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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불미 불미야 / 이원익
문득 눈을 뜨니 새벽이다. 옆자리에 다시 끼어든 아내에게서 바깥 찬 기운이 풍겨 온다. 신문을 주우러 갔다 왔나 보다. 무얼 그리 아침부터 찾아볼 게 있었나? 얼마 전에 연 동네 식료품 가게 경품 발표라도 실리는 날인가? 그런 자그마한 기대와 챙김이라는 고리에 또 하루가 낚여 이어간다. 아무튼 침대가 꿀렁거리는 그 바람에 감만의 내 꿈도 헝클어졌다. 나는 꿈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좌우로 기우뚱 기우뚱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군가 내 팔끝을 잡고 마주보며 나와 춤을, 아니 나를 들여다보며 춤을 추이고 있었다. 맞다, 아버지다. ‘부울미 부울미 불미야, 부울미 따악딱 불미야!’ 아버지는 앉은 채 두 팔을 뻗쳐 내 작은 손끝을 벌려 잡고서는 오래 전에 들었던 젊고 뜨뜻하며 힘찬 그 목소리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고 나는 그에 따라 그저 좌우로 번갈아 천천히 기우는 돛대처럼, 무슨 인형 나라의 메트로놈, 그 박절기 막대처럼 눈만 아버지를 마주한 채 이 편 저 편으로 움직일 뿐이다.
‘근데 불미불미가 뭐야? 불미딱딱은 뭐고?’ 내가 좀 자라서 아기티를 벗어나 아우를 탔었나? 동생이 눈에 들어온 어느 어린 날 엄마에게 물어 본 기억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미 아장아장 걸어 다녀서 아버지가 어디 바깥에서 돌아와 방에 들어오면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의 다리를 감싸 안으며 굵고 두꺼운 발등에 마주보고 올라갔다. 아버지가 나들이옷을 벗어 걸으려 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나는 공짜로 몸 전체가 이리저리 옮겨지며 좋아했다. 아, 대웅전 기둥보다 굵고 튼튼했던 아버지의 종아리, 그리고 항공모함보다 더 넓고 두꺼웠던 힘찬 아버지의 발등!
아마 이때쯤은 주로 내 동생이 아버지의 ‘불미불미 불미야’의 대상이었던가 보다. 내게도 해 달라고 가로막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서너 번만 건성으로 해 주고는 이내 동생의 두 손을 잡았다. 눈도 잘 못 맞추고 겨우겨우 나부끼고 기울었다 추슬러지는 동생의 고개며 몸을 아버지 곁에 비켜서서 함께 바라본 기억이 있다. 내가 더 잘 할 텐데…, 시샘과 함께 차올랐던 잠깐의 섭섭함도 세월에 따라 다 흩어졌지만 그래도 여태 몇 알갱이는 가슴 속에 남아 있었나 보다. 이는 마치 분자라는 것이 얼마나 많으며 작은지를 보이는 화학 시간에 들은 플라톤(?)의 오줌 줄기 얘기와 같아서, 어느 날 그가 살아생전 아테네의 대리석 담벼락 사이에 한 줄기 오줌을 누었다 치자. 그 때 그 오줌의 분자들은 세월과 함께 이 세상에 흩어져 이미 사라진지 오래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진 않아. 실은 그 분자 알갱이들이 퍼지고 퍼져 돌고 돌아, 이 극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먼먼 인연의 내 몸에까지 이 순간 몇 알갱이 머물며 잡혀 있다고 했듯이.
‘니 그런 불미 못 봤나? 전에는 성냥간에서는 다 그런 불미 썼지. 사람이 가랭이를 벌리고 그 위에 올라서서 오른 발 왼발을 번갈아 힘주어 디디면 따악, 따악,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불구덩이로 바람이 들어갔지. 요새는 다 밀고 땡기는 왜넘들 풍구를 쓰지만….’ 엄마가 어느 날 이렇게 말해 줬었지. 내가 한 이삼학년 됐을 땐가 보다. 그때에는 아버지가 이미 내 동생을 건너뛰어 주로 막내에게 불미불미를 해 주고 있었을 때였지 아마? 그리고 불미는 본래 불무며 다시 서울말로는 풀무가 됐다는 것도 한참 뒤에는 알았고, 풀무원이라는 식품회사에 내 친구가 다녀서 우리말 가꾸기를 하는 무슨 모임에서 잘 지은 이름이라고 그 회사가 상을 받았다는 얘기도 미국 와서 들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아기를 데리고 풀무질을 하는 전통은 어쩌다 보니 내 대에서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미국 와서 두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첫 아이 낳았을 때 생각이 나서 한 번 해 본 적은 있다. 그런데 불미불미 하고 아이를 갖고 카펫 바닥에서 몇 번 시도를 하는데 아내가 의아스럽게 바라보더니 곧 무슨 일로 냉큼 안고 가서는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그 뭐라고 하나? 롤링 시트 구멍에 다리를 모아 박아 넣어 앉히고는 입에는 젖마개를 꽂아 버렸다. 그러고 그 후로는 나도 일부러 다시 불미불미를 해 보려고도 않있고 이럭저럭 잊어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산다고, 아마 한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무엇이 그리 바쁘고 쪼들렸는지, 잊어버리고 놓아 버린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모든 게 다 때를 놓치고 나서야 다시금 돌아보고 찾고 조금씩 아쉬워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부산 사는 형님이 늦게 배운 온라인 웹 서핑이며 이메일에 재미를 들리시더니 지난해부터는 손자를 봤다면서 더 자주 아기 사진이나 즉흥시, 갖가지 유행하는 말장난이라든지 재치 있는 우스갯소리 같은 잡다한 자료들을 보내 주신다. 그러던 어느 날 전통적인 육아법이라면서 단동십훈이라는 걸 보내셨다. 읽어 보니 내가 아기 때 겪었거나 그 후에 알고 있었던 구절도 일부 있었지만 무엇보다 모든 걸 한문으로 억지로 갖다 붙인 게 좀 우습기도 하고 그럴 듯하기도 하다. 참, 그랬었지. 우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걸 그 한문 문화, 그 모화사상의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읽고 그런 식으로만 풀어야 정상이고 납득이 가던 시대에 살았었지. 그러다보니 쭈그러들어 이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뭇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본래의 고유한 것들인데 이제는 그마저 또 다른 서양 프레임, 미국과 영어의 틀로 마지막 확인사살을 당하며 급속히 씨갈이를 하고 있는 중이리라. 그래서 몇 십년 전 내가 아이를 키울 때에는 한국이든 여기 교포 사회든 무조건 미국식 서양식이 대세였는데, 일례로 아내도 미국 유아 식품 ‘거버’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지 않았나? 그러다 요즘은 다시 한국식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하나? 그나저나 이제는 키울 아이도 없지 않나! 손자는 언제 보나? 하기야 손자 손녀가 태어나더라도 언감생심 그 샘 많고 똑똑한 며느리들이 늙다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육아법을 일임할 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단군 왕검 때부터 왕족이나 귀족들을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단동십훈(檀童十訓)이라는 자료를 보면 뭐든지 한문으로 갈음하여 바꿔 놓고 그에 따라 아주 형이상학적인 기발한 해석들을 해 놓았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나 해야 할지 식자우환이라고나 해야 할지. 하기야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게 어디 이것뿐이랴? 이런 건 차라리 애교지만 이 세상의 많은 경전, 역사책, 고전, 전기들이야말로 애교로 봐 줄 수 없는 가관일지도 몰라. 그것들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다 엿 바꿔 먹고서는 말이지. 그러니 이른바 지금 세상에 그 울림이 큰 대단하고 거룩하다는 것들일수록 실은 후세의 갖다붙이기식 변조와 아전인수격 해설 때문에 그리 된 거지 뭐 달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몰라. 그리하자면 일단 원문이 해석의 여지가 많게 구멍이 많고 상당히 애매해야지 꽉 짜이고 명명백백해서는 안 되겠지.
어쨌거나 이런 단동십훈에 나와 있는 것 같은 아기 어르는 소리는 우리 겨레가 한문을 알기 수천 년 수만 년 전부터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왔든 남쪽나라 섬나라에서 왔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이 소리들의 뜻과 기원을 밝히려면 우리말 본래의 뿌리를 찾아 언어학이나 인류학적으로 꼼꼼히 풀이함이 마땅한데 내가 아직은 공부가 짧아선지 그런 식으로 잘 설명 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얕은 머리로나마 내 나름의 짐작을 덧붙이려 한다.
1. 불아불아(弗亞弗亞):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린 아이의 허리를 두 손아귀로 잡고 세워서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하면서 ‘부라부라’라고 하면서 귀에 익혀준다. 弗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뜻이고 亞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므로 弗亞弗亞는 사랑으로 땅에 내려오고 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무궁무진한 생명을 가진 어린이를 예찬하는 뜻이다.
내 설명: 아마도 ‘부라부라’는 내가 아기 때 우리 시골에서 했던 ‘불미불미’의 원형이지 싶다. 아마도 소중하고 까다로운 불을 정성스레 지피며 ‘불아! 불아!’ 하고 빌면서 바람을 부치는 동작(나중에는 풀무질이 되었겠지만)이 아닐까 한다. 우리 아버지는 주로 내 팔을 벌려 손끝을 잡고 했었는데 본래는 아기 허리를 잡고 했나 보다. 아기가 귀여워서였겠지만 더불어 아기 윗몸의 유연성과 탄력, 정서적 일체감 키우기에도 도움이 됐겠지.
2. 시상시상(詩想詩想): 어린이를 앉혀 놓고 앞뒤로 끄덕끄덕 흔들면서 ‘시상시상’ 하고 부른다. 사람의 형상과 마음과 신체는 태극과 하늘과 땅에서 받은 것이므로 사람이 곧 작은 우주라는 인식 아래 조상님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태초의 하느님을 나의 몸에 모신 것이니 조상님과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순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이다.
내 설명: 어린 아기가 부모 손에 잡혀서 앞뒤로 흔들리면서 지금 옹알이로 무슨 싯귀를 가다듬는 것도 아니고 조상과 하느님에게 순종하시겠다 다짐한다…? 이거야말로 꿈보다 해석이 거창하다. ‘시상시상’, 무슨 뜻일까? 서라는 말과 관계가 있을까? 아무튼 ‘부라부라’는 옆으로, ‘시상시상’은 앞뒤로 흔들어 아기 몸을 풀어 주고 유연성과 적응성을 높이는 동작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시상시상’이 아니라 '달궁달궁' 또는 '달강달강' 이라고도 했다 한다.
3. 도리도리(道理道理): 머리를 좌우로 돌리는 동작으로 천지에 만물이 무궁무진한 도리로 생겨났듯이 너도 도리로 생겨났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며 대자연의 섭리를 가르치는 뜻이다.
내 설명: 천지의 도리와는 상관없고, 본래 ‘도리’라는 말이 아주 옛말로는 ‘머리’를 뜻했을 것이다. 대머리, 대가리, 대골, 족두리 같은 말에 화석 같이 남아 있다고 본다. 주위의 다른 겨레인 만주나 몽고, 터키의 말 들을 조사해 보면 아마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은 지금 아기 보고 무리하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도리를(아비 아미가 누군가를?) 말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네 머리, 곧 보송보송 배내털을 털갈이하고 있는 그 조그맣고 귀여운 도리를 흔들어 보라고 보채는 중이다. 그것도 수만 년 동안이나 내리 보채는 중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리’가 다른 몇 개의 다른 말(‘대갈박’이라는 말을 보면 머리를 각각 대, 갈, 박 비슷하게 불렀던 때가 차례로 혹은 겹쳐서 있었던 것 같다)을 거쳐 지금은 ‘머리’라는 말로 바뀌어 한참 굳어 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헤드란 말로 다시 바뀔 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는 중국에서 온 ‘두’ ‘수’ 혹은 이웃 일본에서 온 ‘아다마’란 말로 바뀔 뻔한 적도 있었으나 그 위기는 이제 지나간 듯하다.
4. 지암지암(持闇持闇): 두 손을 앞으로 내놓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인데 그윽하고 무궁한 진리는 금방 깨닫거나 알 수 없으니 두고두고 헤아려 깨달으라는 뜻이다.
내 설명: 요즘은 ‘잼잼’이라고도 한다. 이건 그냥 주먹, 아니 고사리 같은 아기손이니 조막이라고 해야지, 그걸 내 눈 앞에서 쥐었다 폈다 해 보라는 소리다. 손을,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비로소 사람다우므로 이는 아주 중요한 동작 연습이다. 쥐다, 주먹, 줌, 주다, 줍다, 집다, 짚다, 젓다, 잡다…, 이런 말들이 모두 같은 뿌리가 아닌가 한다.
5. 곤지곤지(坤地坤地):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왼쪽 손바닥을 찧는 동작으로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사람과 만물이 서식하는 땅의 이치도 깨닫게 되어 천지간의 무궁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내 설명: 물론 하늘이나 땅과는 상관없는 우리말이다. 곤지곤지, 아마도 손 또는 손가락을 뜻하는 옛말일 것이다. ‘곤’은 본래 ‘곧’ 혹은 ‘갇’이었을 것 같고 가닥, 가락, 가락지, 골무, 가지다, 가리다, 가리키다, 거두다, 가볍다, 가깝다 같은 말들이 다 손을 뜻하는 ‘곧’ 혹은 ‘갇’ 이라는 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게 아닌가 한다.
6. 섬마섬마(西摩西摩): 어린이를 세우면서(立) 하는 말로 ‘섬마섬마’라고 하는데 정신문명인 강상의 이치만으로는 안 되므로 서마도(西磨道)에 입각한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해 나가라는 뜻으로 ‘섬마섬마’ 또는 ‘따로따로’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립하여 정신과 물질에서 발전하라는 뜻이다.
내 설명: 아기보고 서양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라? 아무래도 오버인 것 같다. 아직 다리가 덜 굳은 아기 보고 이제부터는 홀로 서는 연습을 해 보라는 말이다. 만약 섬마섬마, 이 말이 바뀌지 않고 수만 년 내려오고 있다면 선다는 말은 꽤 역사가 오래 된 어휘다. 아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 세우는 시늉을 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7. 업비업비(業非業非): 어른이 아기를 보고 양팔을 뻗어 손바닥을 흔드는 동작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서움을 가르치는 말로서 어릴 때부터 조상님들의 발자취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라는 뜻인데 자연 이치와 섭리에 맞는 업이 아니면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내 설명: 한국 사람들이 업이나 카르마에 대해 들어 본 지는 기껏 해야 천 육백년 밖에 안 된다. 이 ‘업비’란 말은 그냥 아비, 애비, 아버지란 말이다. 아버지란 방금 내가 꿈에서 보았듯 다정하기도 하지만 본래 좀 무서운 분이다. 그래서 무슨 짓거리를 하지 말라고 겁을 줄 때에는 전에는 짐짓 호랑이가 온다고도 했고 일제시대에는 순사가 온다고 하면 애들이 울음을 그쳤다고 하지만 본래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런 수만 년 된 전통이 이제는 끊기려 한다. 요즘 아버지 겁내는 아이들이 어디 있나! 마누라 ‘마’자 소리만 들어도 경끼 내는 남정네들은 있지만.
8. 아합아합(亞合亞合): 손바닥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 내는 동작인데 두 손을 가로 모아 잡으면 亞자의 모양이 되어 이것은 천지 좌우의 형국을 이 몸속에 모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다.
내 설명: 아합아합 또는 아함아함 하는 것은 소리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손바닥으로 가렸다가 뗐다가 하며 소리를 내 보라는 소리다. 폐활량을 늘리고 숨 내쉬기 연습을 시키는 것인데 아기가 따라하면 참 귀엽겠지?
9. 짝짝궁짝짝궁(作作弓作作弓):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 내는 동작으로 천지좌우와 태극을 맞부딪쳐서 하늘에 오르고 땅으로 내리며 사람으로 오고 신으로 가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손뼉을 치면서 재미있게 놀자는 뜻이다.
내 설명: 혼자서 두 손바닥을, 혹은 남과 마주 해서 손바닥을 치면 짝짝 소리가 나니 짝짜꿍이다. 중국에서 기원한 태극이나 글자 그대로 활을 만들고 또 만들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짝짜꿍을 옛날에는 아기들하고 주로 했는데 요즘은 관리와 기업인, 경찰과 조폭, 정치인과 언론인, 심사위원과 응모자, 심지어는 간수와 죄수 사이에도 더러 하는 모양이다.
10. 질라아비훨훨의(地羅亞備活活議): 나팔을 불며 춤추는 동작인데 천지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지기(地氣)를 받아 생긴 육신을 活活(훨훨)하게 자라도록 즐겁게 살아가자는 뜻이다.
내 설명: 질라아비가 무슨 말인지, 혹시 나팔수를 질라아비라고 했는지, 훨훨 내지르라는 소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훨훨 팔을 내뻗으며 크게 춤을 추는 동작이다. 앞서 작은 동작들을 아홉 가지나 연습했으니 이제 활개 치며 큰 동작으로 마무리 하자는 것이다. 애 참 힘들겠다.
이렇게 조목조목 늘어놓다 보니 문득 부질없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침대에 누워 왜 이러고 있는가? 아기에게 가르치려고 지금 새삼스레 기억을 되살려 복습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심이요 애도 배기 전에 기저귀부터 사다 놓는 셈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얼까? 다시 내가 아기로 돌아가서, ‘부라부라’부터 따라 배우며, 잼잼 주먹 쥐고 도리도리 고개 흔들며 질라아비 훠얼훨…?
곁의 아내도 이미 한참 전에 얼마큼은 체념한 듯 남은 잠을 따로이 마저 청하는 이 새벽, 그래, 그렇지, 그렇다면 오늘부터 한 세상 다시 한 번 살아 보기로 작심하여 이제부터라도 내 손끝 발끝, 몸놀림 하나하나부터 다시 비롯해 볼까나? 손가락 끝부터 오로롯이 제대로 다시 움직이며, 허튼 짓 말고, 먼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사랑의 진수만 받아 빨며 오무락오무락 입술 삐죽이며, 다시 한 번 그 가락 따라 천진난만하게 나부낄까나? 너무 늦었나?
이렇듯 멀거니 눈만 뜨고 아쉽고 미련한 등판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희붐한 천장을 바라보는데, 잔잔하던 대지가 다시금 부풀며 조금씩 바닥이 울며 흔들리는가, 멀리서 서리어 와 천천히 회색 곰보 천장에 엉기며 드러나는 아버지의 불콰한 얼굴이 이윽고 나를 부르며, 불미불미 불미야, 내 두 손을 벌려 잡고 어르며 웃는다.
(2014.6.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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