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정리
仁守/정 용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갑을 지니고 다닌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핸드백 속에 넣거나 손에 쥐고 다니며, 남성들의 경우에는 주로 상의 안주머니 속에 넣어 마치 자신의 심장의 일부인양 귀히 여긴다. 지갑을 한자로 써보면 ‘紙匣’인 것으로 보아 '상자 또는 동물을 가두는 우리'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으며 유래가 상당히 오래된 듯하고 초창기에는 그 재질이 종이인 듯싶다. 우리네 선조들의 복주머니, 쌈지 등이 오늘날의 지갑에 해당할 것이다.
필자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갑은 모 핵심권력기관에서 기념품으로 제작한 것으로 10여 년 전에 어느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편지봉투 크기의 검정색 가죽지갑인데 재질이 좋아 사용할수록 가죽이 반들반들하고 제봉 또한 빈틈없이 꼼꼼하게 되어있어 짧지 않는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 멀쩡하다. 앞으로 10년 또는 그 이상 사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항상 주변이 안정되어있어야 개운한 성격인 필자에게 언제부터인가 지갑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용카드사용이 일상화 된 이후인 듯하다. 신용카드로 물품을 구입하거나 또는 현금인출기를 이용하여 송금을 할 경우 관련 영수증을 지갑에 보관하는데 일정시기가 도래하면 지갑은 과다한 영수증 섭취로 복어마냥 배가 불룩해지고 이에 시각적(視覺的) 불편을 느낀 필자는 정리의 필요성과 귀찮음 속에서 몇 일간 갈등과 게으름으로 날짜들을 소비한다.
어렵게 날짜를 잡아, 열다섯 칸의 작은 방들을 일제히 수색하여 내용물들을 일단 모두 밖으로 끄집어낸 후 계속 보관할 필요성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으로 크게 분류한 후 보관의 필요성이 있는 서류나 물품들은 다시 유사물품 동일분류원칙의거 각 방별로 보관하고, 보관의 필요성이 없는 서류 등은 분쇄기에 넣어 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는데 주기는 2~3개월이고, 다이어트 한번 하는데 소요시간은 약 10분정도 걸린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처음 시작하는 것은 귀찮으나 막상 끝내고 나면 목욕 한 번한 것처럼 홀가분하기 그지없다. 작업 그 자체보다 작업과정에서 겪는 소비성향의 공포감을 느껴야하는 것이 싫어서 기피하는지도 모른다. 더욱 놀랄 것은 사용처가 생각나지 않는데 있다. 물론 기억력 탓이지만 마치 사기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결혼생활 30년 접어들면서 가정경제 집행권을 2원화시킨 것은 20년가량 된다. 물론 그 사이 공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허울 좋은 껍데기뿐이고 오히려 일감을 떠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어떤 때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누구나 섬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확성, 친절성, 적극성이 결여되면 이 사회에서는 낙오자가 되기 때문이다.
복잡해진 환경 탓에 현대인의 뇌는 극도로 피곤에 지쳐있다. 그런 이유로 최근 각종 정신질환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뇌에게도 고도의 면역성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의 기능은 노쇠화 되는데 환경은 정밀성을 요구한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갭이 일정 한계를 초과하면 인간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는 각자 나름대로의 대책이 요구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억력 등 뇌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요가, 단전호흡 등 의식적인 훈련을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메모활용 또는 개인용 컴퓨터에 저장하는 등 뇌(腦)의 분실(分室)을 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 옛날에는 지갑이 ‘마음의 힘’이었고 또한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특별히 지갑을 정리하지 않아도 내용물에 크게 변동이 없었고 단지 소지하고 있는 현금액수만 가끔 확인했던 단순한 삶이 그립다. 거침없이 지갑을 외면하고 큰 단세포로 세상에 남을 용기가 아직 내게는 없다. 정초인데도 김삿갓의 무제(無題)라는 시(詩)가 오늘따라 의미 깊게 다가온다.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 죽일기) 사각 소반위에 멀건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 공배회) 하늘과 구름그림자 함께 떠도네.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 무안색) 주인이여! 면목 없다고 무안해 하지마라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 도수래) 국물 속 거꾸로 오는 청산이 나는 좋다오.
(20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