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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 감상문 -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학년
20090626 박희석
Ⅰ. 서 론
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대문호이다. 우리 고전 작가 중에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만큼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1) 이것은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 특유의 재치 있고 익살스러운 표현과 그 속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풍자가 매우 인상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이 했던 고민들, 그가 가졌던 사상과 견해들이 지금도 유효하며 우리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2) 특히 최근 실학사상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면서 실학사상의 효시이자 조선후기 상당히 진보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열하일기(熱河日記)등과 같은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법고창신(法古創新)3)은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②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어린 시절과 성장배경
이렇듯 조선후기의 대문호이자 사상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인물인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반남박씨(潘南朴氏)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대대로 대사헌, 참판, 판서 등의 고관들과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이었다.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할아버지인 필균(弼均)은 지돈녕 부사(知敦寧府事:왕족 관계 관청의 정2품 고관)였다.4) 이러한 집안의 내력만을 보면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어릴 적부터 큰 어려움 없이 집안의 재력과 권세를 세습하며, 순탄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어릴 적부터 그의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 5세 때부터 할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해가자 따라 다니면서 엄한 훈도와 초학 공부를 하였는데,6) 이렇듯 연암(燕巖)의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은 자신의 임지에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 이러한 영향으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연암(燕巖)의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은 손자에게 특별히 공부를 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이 많았다.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어릴 적부터 약질인데다가, 잡병이 많아서7) 집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 과정에서 집안의 종들과 어울려 놀게 되었다. 또한 하인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합리적이었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사고와 문학관은 바로 이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암(燕巖)의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은 노론계 문신이었다. 박필균(朴弼均)의 일족인 박필성(朴弼成)이 효종의 사위이고 박명원(朴明源)이 영조의 사위인 등 왕실과 가까운 인척 관계에 있어,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다.8) 하지만 왕의 신임을 받는다고 해서 위세를 부리거나 이를 이용해 재물과 권력을 도모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근신하면서 청렴하게 살았으므로, 사대부들 사이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9) 연암(燕巖)의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이 고위 관료였으면서도 오히려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점은 마치 황희정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암(燕巖)이 24세가 되던 1760년에 비로서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이 세상을 뜨게 되는데, 원래부터 넉넉한 가정형편이 아니었던 연암(燕巖)의 집이 이때부터 더욱더 빈곤해지게 된다.
연암(燕巖)은 열여섯 살 때인 1752년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와 결혼하게 되면서, 그의 장인 이보천(李輔天)10)에게서 수학하게 된다. 그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연암(燕巖)은 이러한 장인으로부터 사상과 처세 면에서 커다란 감화를 받고, 그릇된 시대 풍조와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선비의 진정한 본분을 잊지 않는 자세를 배웠다고 한다.11) 이어서 연암(燕巖)은 처삼촌인 영목당(榮木堂)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수학하되 주로 실학을 공부했다.12) 이렇게 어린 시절에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에게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 환경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조선시대의 대문호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Ⅱ. 조선을 대표하는 대문호 박지원과 인간 박지원
현재 박지원 선생의 작품들은 ‘연압집’이라는 문집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총 17권 6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물론 연암(燕巖)선생이 지은 시, 기, 소설,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작품들이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오산이다.
지난 2005년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제목 그대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이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본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형인 박희원(朴喜源)의 현손인 박기양(朴綺陽)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연암집을 편집하고 간행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진 박영철(朴榮喆)이 넘겨받아 소장하고 있다가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면서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이 지난 2005년 발굴되면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는 총 33편의 연암(燕巖)선생 친필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물론 연암집에도 연암선생이 쓴 편지는 여러 편 수록되어 있으나, 연암집에 수록된 편지와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 수록된 편지는 그 성격과 내용이 사뭇 다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편지는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서(書)와 척독(尺牘), 그리고 문집에 실려 있지 않고 별도로 전하는 간찰(簡札)등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13) 서(書)는 주로 공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공식적인 글이고, 척독(尺牘)은 공식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문예적인 글이다.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편지는 서(書)와 척독(尺牘) 두 종류이다. 반면에 간찰(簡札)은 서(書)와 척독(尺牘)과는 별개로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고 부탁을 하는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의 편지이다.14) 이 때문에 자신의 솔직한 감정 표현에서부터 신변잡기와 같은 쇄쇄한 내용을 다루게 된다.15) 따라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 실린 편지들을 살펴보면 기존에 우리가 알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공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글을 부탁하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내용들을 통해 과정록이나 연암집 등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전후사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도 있다.
Ⅲ.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
① 아버지로서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 수록되어 있는 33편의 편지를 수신인에 따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박종의(朴宗儀)16) : 21편
박종채(朴宗采)17) : 1편
아 이 들 : 1편
이재성(李在誠)18) : 5편
벗 들19) : 4통
서 령 군 수 : 1통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대부분이 맏아들 박종의(朴宗儀)에게 보낸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 수록되어 있는 편지들은 모두 1796년부터 1797년 사이에 쓰인 편지들이다. 그런데 맏아들 종의(宗儀)가 연암(燕巖)의 형 박희원(朴喜源)에게 양자를 간 년도가 이 편지들이 쓰인 1797년으로부터 8~9년 전인 1778인 것을 고려해 보면, 그만큼 연암은 자신의 형에게 양자를 간 종의(宗儀)의 생각이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진년(1796) 3월 10일 연암(燕巖)은 맏아들 종의(宗儀)에게 손자인 효수(孝壽)가 태어난 걸 기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초사흗날 관아의 하인이 돌아올 때 기쁜 소식을 갖고 왔더구나. “응애 응애” 우는 소리가 편지 종이에 가득한 듯 하거늘 이 세상 즐거운 일이 이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느냐? 육순 노인이 이제부터 손자를 데리고 놀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니? 또한 초이튿날 보낸 편지를 보니 산부(産婦)의 산후 여러 증세가 아직도 몹시 심하다고 하거늘 퍽 걱정이 된다. 산후 복통에는 모름지기 생강나무를 달여 먹여야 하니, 두 번 복용하면 즉시 낫는다. …중략… 관속 2백여 명이 아침에 국과 밥을 보내와 몹시 축하해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경술년 원자가 탄생하시자 산해진미를 갖춰 몹시 기뻐하시며 억조창생을 고무한 임금님의 마음을 우러러 헤아릴 것 같구나.20)
라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응애 응애” 우는 소리가 편지 종이에 가득한 듯하다’는 표현이 참 인상적인데, 이를 통해 당시 연암(燕巖)이 혼자의 탄생을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별한 형식 없이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적어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이렇듯 박지원 선생의 기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기뻐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며느리의 산후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고 있는 면이 참으로 정겹다. 이 편지이외에도 효수(孝壽)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려달라는 편지를 종의(宗儀)에게 또 한 차례 보내게 되는데 손자를 귀여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꾸밈없이 잘 나타나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손자 효수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이 종의(宗儀)에게 편지를 유독 많이 보내게 된 또 다른 요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연암(燕巖)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편지는 이외에도 또 있다. 종의(宗儀)에게 밤사이의 안질(眼疾)은 어떤지 묻는 편지가 있는가 하면, 집에 아무도 없으니 자물쇠를 잘 잠그고 문단속을 잘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라서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세세하게 자식을 챙기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종의(宗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과거 볼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과시는 몇 수나 지어 봤으며 속작에는 능하여 애로가 없느냐? 글제를 대해서 마음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은 뒤에라야 시험장에 들어갈 일이고, 비록 반도 못 썼다 하더라도 답안지는 내고 나올 일이다. 중존은 네가 쓴 최근의 글을 보고 뭐라 하더냐? 또 아저씨는 뭐라 하더냐? 자세히 적어 말해주면 어떻겠니? 그리고 글씨 연습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좋은 간장지를 사서 성의를 다해 살지고 충실하게 글씨를 써 보는 게 어떻겠니? 다섯 냥을 보내 줄 테니 시지 및 과거 볼 때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보탰으면 한다.21)
이렇게 먼 타지에서도 아들의 과거준비에 대해 세세하게 걱정을 하고 있고, 과거 볼 때 필요한 물건과 시지를 사라고 손수 돈을 보내주는 모습에서 연암(燕巖)의 따뜻한 부정(父情)을 느낄 수 있다. 연암은 이후에도 과거 전날의 주의사항과 과거 보는 날의 유의점을 적은 편지를 종의(宗儀)에게 한 번 더 보낸다.
이 편지뿐 아니라 연암(燕巖)이 종의(宗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유독 ‘자세히 적어 말해주면 어떻겠니?’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연암(燕巖)이 종의(宗儀)에게 관심이 많고,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정(情)에 대한 답답함과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을 볼 때 마다 연암(燕巖)의 따뜻한 부정(父情)이 느껴져 참으로 아련하였다.
이러한 연암(燕巖)의 부정(父情)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편지 전반부에서는 책을 잃어버리는 등의 아들들의 행동들을 탓하면서 마지막에는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다.”22)라고 쓰며 직접 담든 고추장을 자식들에게 보내준다. 또한 다른 편지에서도 직접 보낸 소고기 볶음과 고추장의 맛이 어떤지 알려달라고 독촉하면서, 인편을 통해 계속 보내겠다고 쓰고 있다. 정치와 학문, 문장뿐 아니라 농사일에도 능했던 연암(燕巖)이 직접 농사지어 담긴 고추장 단지를 자식들에게 보내는 장면은 그가 자식들을 각별하게 아꼈음과 동시에 따뜻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였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문집에서는 장대한 기골에 날카로운 풍자와 빛나는 유머로 반짝이던 연암의 면모가 편지 글 속에서는 곰살궂고 자상한 어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23) 특히 연암은 편지를 쓰기 9년 전인 1787년 부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는데,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이 때문에 서울 집의 자식들을 더욱 각별히 챙기게 된 건지도 모른다.24) 한편 이렇게 자식들을 각별하게 챙기는 모습 이면에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질병과 상황을 투정하고 하소연하는 육순 노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② 위정자로서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더불어 위정자로서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8번째 편지를 보면, “영남과 호남의 대나무가 모두 얼었고, 백화(百花) 또한 얼어붙었으니 가을일이 걱정이거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몹시 근심된다.”25)고 하였다. 당시 연암(燕巖)은 안의의 현감으로 있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곧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날씨가 이상하게 추우니 자신이 안의에 없을 때인 가을, 백성들의 농사일이 잘못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을원에 부임하자마자 아전들이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게 돈을 걷는 것을 금한 것, 아전들이 서울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려하자 그것을 못하게 한 것 등은 백성들을 향한 연암(燕巖)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목민관’으로서의 연암(燕巖)의 모습은 ‘칠사고’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칠사고는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이 지은 목민서(牧民書)라고 할 수 있는데, 박지원은 늦은 나이에 벼슬길을 시작하여 고위직으로 진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자기의 관할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해온 실용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26)
③ 기 타
1) 꼼꼼한 성격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의 편지들을 통해 연암(燕巖)은 즉흥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우 꼼꼼하고 계획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연암(燕巖)은 통제사로부터 숭무당기를 써줄 것을 부탁받는데, 1번 편지에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처남인 이재성에게 글을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숭무당기를 완성하여 통제사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연암은 매우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른바 명문으로 알려진 연암의 글들은 모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짓고 그런 후에 고치고 다듬고 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27)
또한 종의(宗儀)에게 보낸 22번 편지 내용을 보면 아직 면천군수에 부임하지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수군 합동 군사훈련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서령군수와 처남인 이재성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를 통해서도 연암(燕巖)의 성격이 매우 계획적이며 꼼꼼하고 신중함을 알 수 있다.
2) 호탕하고 유머러스한 박지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매우 호탕하고 해학적인 사람이다. 이 서간첩에도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 할 수 없을 만큼 연암(燕巖)의 이러한 면모가 편지 곳곳에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 중 어떤 벗에게 쓴 19번 편지에 연암(燕巖)의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면이 가장 잘 나타난다.
밤비가 마치 부견이 강물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후드득 후드득 집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사외다. 게다가 수많은 이들이 들끓는 바람에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할 뻔했거늘, 알지 못하겠사외다, 그대는 이런 우환을 면했는지? 편지를 보내며 한번 웃사외다.28)
여기서 “밤비가 후드득 후드득 집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참 재미있다. 또한 이 때문에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할 뻔했다”라며 이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을 ‘우환’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하였는데, 특유의 익살스러운 면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지 끝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는지 “편지를 보내며 한 번 웃사외다”라며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여럿 작품들을 통해 특유의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표현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만 이것은 사회·인물·시대의 모순·불합리·죄악·불미스러운 점을 파헤치고 조롱하는 내용과 형식의29) 풍자적인 표현의 한 일환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품에서의 풍자적인 표현과는 별개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 19번 째 편지에는 일상의 일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연암 본래의 유머러스한 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글인 서(書)와 문예적인 글인 척독(尺牘)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간찰(簡札)이기에 느낄 수 있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참 모습일 것이다.
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속 마음은?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보다보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에 대한 평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평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박지원과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제법 낯선 시각들도 보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박제가에 관한 것이다. 종의(宗儀)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재선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에 들여온 요즘 중국인의 시필 서너 첩을 만일 빌려 볼 수만 있다면 의당 이 며칠 사이의 불안정한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건만, 그 사람이 무상무도(無狀無道)한 자니 지보라고 하여 잠시라도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지만 모름지기 한 번 빌려보렴.
여기서 재선이란 박제가의 자이다. 무상무도(無狀無道)는 버릇이 없거나 무례하거나 경우가 없는 말을 뜻하고 무도는 도리에 어긋나여 막되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의 인성이 아주 고약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30) 이 때문에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번역한 박희병 선생은 “아마도 연암은 박제가의 문예적 재능은 십분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성, 그 인격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31)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정민 선생은 ‘새 발굴 『연암선생서간첩』의 자료적 가치’에서 “박제가를 두고 ‘망상무도(罔狀無道)’하다고 했다. 글자 그대로 풀면 ‘꼴같지 않고 무도하다’는 말이다. 물론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쉽게 내주지 않을 거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고는 쉽게 하기 어려운 표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32)
즉,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박제가를 ‘무상무도(無狀無道)’하다고 표현한 것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엇갈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민 선생의 견해에 더 공감이 간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스승과 제자임과 동시에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고, 박지원이 박제가를 정말로 욕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쓴 것이라면 박제가가 무상무도(無狀無道)한 인사이기 때문에 중국인의 시필을 빌려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편지 마지막 부분에 “그렇지만 모름지기 한 번 빌려보렴”이라고 종의(宗儀)에게 당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 맞던 간에, 박지원은 박제가를 몹시 아끼고 아깝게 지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그래? 설마...’하는 생각이 드는 박지원의 개인적 느낌이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편지가 아들에게 보낸 간찰(簡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암집에 실리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박지원 선생의 숨김없는 자유로운 인물평은 마지막 편지인 33번째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드시 유생(柳生)의 무리에게 이를 자랑해서는 안된다. 유(柳)는 더함을 구하는 사람이 아닌데다 침잠하는 기상이 적어, 단지 책을 빌려 박식을 뽐내기만 좋아할 뿐이다.33) 모름지기 한증락의 무리와 참구해 가며 읽고, 글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은 네 외삼촌께 여쭤봐 실효를 다하도록 함이 옳다.34)
이 내용을 보면 직접 유득공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앞뒤 문맥으로 보아 유득공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35) 더함을 구하지 않고, 침잠하는 기상이 적어서 단지 책을 빌려 박식을 뽐내기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꽤나 혹독하게 평하고 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유생의 무리와 어울리지 말고 한증락과 외삼촌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들 종의에게까지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같은 편지에서
이방익전은 이번 인편에 고대했는데 또 오지 않으니 탄식할 만하다, 탄식할 만해. 혜보는 전연 돌아보지도 않고 초정이 혼자 감당하고 있느냐? 내게 좀 자세히 말해 줬으면 한다.36)
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혜보란 유득공을 말하고 초정은 박제가를 말한다. 따라서 전후사정을 종의에게 자세히 알려줄 것을 당부하면서 유득공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을 표하고 있다. 유득공은 박제가와 더불어 박지원의 제자였으며, 동시에 매우 가까웠던 사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유득공에 대한 박지원의 위와 같은 평은 상당히 의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박지원의 생각과 느낌 또한 공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적인 감정으로서, 간찰(簡札)로만 이루어진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서만 볼 수 있는 연암(燕巖)의 꾸밈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Ⅳ. 결 론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지인이나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인 간찰(簡札)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문호이자 선구적인 사상가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밖으로 보이는 공적인 모습 뿐 아니라 인간적이고 꾸밈없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과거에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연암집’에도 실리지 못하고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같은 이유로 오히려 주목을 받는다니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특별한 선별과정 없이 편지를 모아 놓았다는 점에서 연암집과 크게 구별이 된다. 연암집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글 중에서도 정제되고 다듬어진 글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무수히 많은 박지원 선생의 글 중에서 어떤 것을 수록할 것인지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선별한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어 실질적으로 한 번 더 정제되고 다듬어 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연암집을 역사서술에 비유하자면 ‘정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야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에서의 박지원 선생의 모습은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사상가’라는 명성에 맞는 위풍당당하고 근엄하며 권위있는 모습이 아니다. 멋있고 예쁘게 ‘치장한 얼굴’도 아니다. 단지 자식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아버지이면서도 자신의 질병과 처지를 자식에게 하소연하고 한탄하는 육순의 노인이기도 하며, 손자의 탄생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걱정하는 자상한 할아버지이자 시아버지이다. 또한 자신은 비록 임기가 끝나 고을을 떠나지만 이상기후로 날씨가 이상하자 백성들의 농사를 걱정하고, 아전들의 부당한 징수를 금하는 현명하고 애민적인 위정자이다. 더불어 친구와 간밤에 이 때문에 잠을 설친 일로 우스갯소리를 하는 익살스럽고 호탕한 면을 보이면서도,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섭섭한 일이 있거나 불만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드러내기도 하는 ‘맨 얼굴’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읽는 동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은 우리 선대의 위대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마치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혹은 옆집 할아버지, 아저씨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을 법한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다.
Ⅴ. 참고 문헌
참고 서적
• 박지원, 박희병,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배게, 2005
• 이은직, 정홍준, 『인물로 보는 한국사2』, 일빛, 2003
•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 박지원, 김명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돌베개, 2007
• 정민,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태학사, 2010
참고 논문
• 김은정(金垠呈), 「연암 박지원의 풍자 문학에 나타난 정치적 상징」, 경상대학교대학원, 2009
• 김혈조, 「燕巖 편지의 세 가지 층위에 대하여」, 『大東漢文學 第36輯』, 대동한문학회, 2012
• 김문식, 「연암 박지원의 牧民書, 『七事考』」, 『東洋學 第 48輯』,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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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1) 박지원, 김명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돌베개, 2007, p468
2) 당시 조선은 ‘청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이므로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주자학적 사상에만 빠져서 청나라의 선진화된 문물이나 제도 등은 오랑캐의 것이라고 하여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당시 조선의 위와 같은 현실을 비판하면서 상당히 합리적으로 사고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도 당시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열강들 속에 끼어있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외국의 선진문물이나 제도들을 수용하고 세계화의 흐름에 들어갈 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지킬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관점과 사상을 가지고 이 문제를 접근하느냐에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이 했던 고민들, 그가 가졌던 사상과 견해들이 지금도 유효하며 우리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고 한 것이다.
3) 옛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로,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대표적인 창작방법론이다.
4) 이은직, 정홍준, 『인물로 보는 한국사2』, 일빛, 2003, p89
5)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부모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김지용의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이은직의 『인물로 보는 한국사2』에는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의 아버지 박사유(朴師愈)는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죽었고,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 역시 젊은 나이에 남편을 따라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나온다.
반면 김명호가 편역한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에서는 ‘연암의 부친 박사유는 아무런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장남으로서 부모를 모시고 그 슬하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박지원, 김명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돌베개, 2007, p471)고 나온다.
6) 김은정(金垠呈), 「연암 박지원의 풍자 문학에 나타난 정치적 상징」, 경상대학교대학원, 2009, pp74~75
7)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p12
8) 박지원, 김명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돌베개, 2007, p471
9) 박지원, 김명호, 위의 책, p471
10) 이보천(李輔天)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적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다. 유안처사(遺安處士)라 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 다.
11) 박지원, 김명호, 앞의 책, p471
12) 김지용, 앞의 책, p12
13) 김혈조, 「燕巖 편지의 세 가지 층위에 대하여」, 『大東漢文學 第36輯』, 대동한문학회, 2012, p49
14) 간찰(簡札)이 연암집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학문적으로 규정하기 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15) 김혈조, 위의 논문, p107
16)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맏아들. 하지만 1778년 박종의(朴宗儀)는 박지원의 형 박희원 (朴喜源) 에게 양자를 간다.
17)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18)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처남이다.
19)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어떤 벗’에게 보낸 편지 세 통과 개성유수로 있던 벗 황승원에 게 보낸 편지 1통으로 총 네 통이다.
20) 박지원, 박희병,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배게, 2005, pp28~29
21)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pp60~61
22) 박지원, 박희병, 앞의 책, 돌배게, 2005, p26
23) 정민,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태학사, 2010, p270
24)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2005, p27
25)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2005, p38
26) 김문식, 「연암 박지원의 牧民書, 『七事考』」, 『東洋學 第 48輯』,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2010, p39
27) 박지원, 박희병, 앞의 책, 2005, p13
28)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2005, p66
29) 김은정(金垠呈), 「연암 박지원의 풍자 문학에 나타난 정치적 상징」, 경상대학교대학원, 2009, p61
30) 박지원, 박희병, 앞의 책, 2005, p23
31)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2005, p23
32) 정민, 앞의 책, 2010, p271
33) 정민, 앞의 책, 2010, pp271~272
34) 박지원, 박희병, 앞의 책, 2005, pp106~107
35) 정민, 위의 책, 2010, p272
36) 박지원, 박희병, 위의 책, 2005,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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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정리했음.
감사합니다 교수님!! 더불어 이번 기회를 통해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연암 박지원 선생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