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범죄를 미리 사해 주시는 하나님
전주온고을침례교회 황의찬 목사 묵상서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나중의 범죄를 미리 용서하고 시작하신 일이다. 삼라만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어 그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실 때, 하나님은 장차 벌어질 사람들의 죄와 타락을 모르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천지 창조 사역을 멈추지 않으셨다. 물론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에 있어서도 유의할 점이 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어 하나님께서 귀애하신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기보다는, 조건이 충족됨에 따른 반사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키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귀애하신다. 그것이 곧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결코 자기에게 만족을 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세상을 지으신다. 하도 실망을 주어 나중에 가서 세상 지으신 것을 스스로 후회하게 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다. 이는 곧 ‘나중의 범죄를 먼저 용서하는 속성’을 하나님이 지니셨다는 뜻이다. 나중의 범죄를 앞당겨서 용서하고 일을 시작하는 이 섭리는 기독교의 핵심 요체이다. 이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납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합리적 사고 체계’는 먼저 죄가 있으므로 나중에 용서가 있다고 되어있다. 잘못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용서한다는 것을, 세상의 합리적 사고 체계는 수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천년 전 예수가 사형 당한 것이 지금 나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 이천년 전에 이미 내 죄를 용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이고 기독교인이다. 세상에서 합리적 사고 체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얼토당토않은, 마치 이솝 우화만도 못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등진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을까? 분명 어느 한 쪽은 옳고, 어느 한 쪽은 그르다.
사람들은 ‘합리적’이라거나, ‘과학적’이라는 말이 나오면 더 이상 의심하기를 중단한다. 합리적 혹은 과학적이라는 잣대는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는 종착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비합리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 고개를 떨어뜨리고 항복해야 한다. 합리적, 과학적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누구도 승복해야만 한다. 어찌 보면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는 공동체의 최고의 선인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합리적, 과학적이라는 가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합리성과 과학은 누가 창출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오랜 경험에 따른 산물로서 실험과 입증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착되어 왔다. 다수의 사람들이 수긍한 공동의 선이며 가치로 자리를 잡아왔다. 그렇다면 ‘나중의 범죄를 먼저 용서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합리성과 과학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는 한낱 궤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땅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봉하고 예배한다. 기독교인들 역시 합리성과 과학을 정립해가는 공동체 안의 지체들이다. 여기에 인류의 딜레마가 있다. 하나님이냐 합리성이냐의 문제 안에 인류는 놓여있다.
이 딜레마는 때로 치열한 다툼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서로 마주 대하여 치열한 전쟁을 하기도 했다. 한 때는 ‘그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닌 선택의 영역이니 논쟁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침묵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합리성과 과학은 논리와 체계를 정교하게 가다듬고 가꾸어 진화해 나갔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그러한 세상을 향해 성경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위에 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서기 3세기에 아프리카 출신 터툴리안은 마흔 살이 될 무렵 기독교인이 되어 성경의 진리를 세상의 도구인 합리성으로 증명을 시도했다. 터툴리안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십자가 사건이 있었는데, 그 십자가에서 사형 당한 예수는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는 믿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자기의 시도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수 믿은 믿음은 세상의 합리로 되어지는 일도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음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치적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해함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영역으로 남긴다는 뜻이다.
서기 5세기에 역시 아프리카 출신 어거스틴도 터툴리안과 비슷한 고민을 했다. 터툴리안도 어거스틴도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의심치 않으면서 아직 기독교에 들어오지 않는 지식인들에게 변증을 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했다. 세상이 쌓아올린 합리성에다 기독교의 진리를 대입하려고 애를 썼다. 어거스틴도 이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I belive that I may understand)”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진리가 세상의 합리성과 과학으로 설명이 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고 보면, 또 믿다보면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터툴리안 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듯 하지만 아직 명쾌하게 풀어내지는 못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러한 논란의 흐름에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다. “내가 믿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I know that I may understand)” 계몽주의는 성경을 믿음의 책이 아니라 이해의 책으로 자리를 매기고자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진리, 이해되지 않는 구원은 인류에게 유익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역사의 메인스트림에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선 듯하다. 인문학이 만개하고 때마침 터져 나온 진화론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기독교 교리 중에는 ‘나중의 범죄를 먼저 용서하는 하나님의 속성’ 뿐 아니라 세상의 합리성과 과학으로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한 많은 영역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나중 범죄를 앞당겨 사해 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좁혀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먼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미리 용서하고 일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지으신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행습 속에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행습 안에 ‘나중의 범죄를 먼저 용서하고 시작하는 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얼핏 생각하면 과연 그런 일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섣불리 포기하는 것은 우리 안에도 세상의 합리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이러한 노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 중에, 범죄의 개연성이 있음에도 시도하는 일이 없을까? 마치 하나님이 천지창조 사역을 시작하듯 말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일은 어떤가? 부모는 자기들이 낳는 자녀가 장차 숱한 오류와 범죄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살아온 것에 비추어본다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사춘기를 맞이해서는 부모에게 반항했고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던 자신을 생각한다면 내가 낳고자 하는 자녀도 그와 똑같은 길을 가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깨달으면서 고뇌했던 시기가 자녀에게도 있으리란 개연성을 알고 있다. 내 자녀는 착하여 부모 속을 태우는 일이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낳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부모는 자녀 낳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태어날 자녀가 숱하게 저지를 범죄에 대하여 앞당겨서 모두 용서한다는 전제가 이미 성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단지 부모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또 결혼행위는 어떤가? 배우자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고 결혼하는 부부가 있는가? 물론 기대는 하겠지만, 결혼 생활에는 수많은 갈등과 역경이 있을 것을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이 살아온 모습을 지켜본 사려 깊은 사람들은 안다. 부부간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갈등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결혼하는 것은 배우자가 나중에 자기에게 저지르게 될 범죄를 자기가 미리 용서하고 시작하는 행위이다.
결혼과 자녀를 낳는 일을 통해서 ‘나중 범죄를 미리 용서하는 속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들은 수없이 많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한 반의 담임을 맡는 일은 어떤가? 일 년 동안 자기 반 아이들이 수없이 많은 나쁜 행동을 하리란 것을 안다. 그럼에도 기꺼이 담임을 맡는 행위는 향후 일 년 동안 아이들의 죄악을 미리 용서하고 시작하는 일이다.
친구를 사귀는 일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나를 속이거나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없다. 그 친구가 나를 어렵게 할 수도 있지만 우정을 나누는 일은 친구가 저지르게 될 나중의 죄악을 내가 미리 용서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 하나하나를 이렇게 뜯어보니 죄는 사후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전에 용서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살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지은 죄는 물론, 앞으로도 짓게 될 죄악을 생각한다면 나는 하루도 더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후에 내가 지을 죄를 지금 미리 용서하고 내일에 희망을 건다. 다행히 하나님이 미리 용서하시는 속성으로 나를 용서한다니 천만다행이다. 무릇 모든 범죄는 사후용서가 아니라 사전용서이다.
서기 4세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 황제들 중에는 침례로서 죄를 사함 받는다고 인식하고,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겠다고 미룬 경우가 더러 있었다. 침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소치이다. 만일 숨이 곧 떨어지는 순간에 침례를 받았는데 다시 건강이 돌아와 단 몇 시간이라도 더 살게 될 경우 그 때 지은 죄는 어떻게 될까? 죄 사함이 죄 이후라면 기독교 교리에서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 숨 떨어지기 직전에 딱 맞춰서 침례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은 죄로부터의 구원은 범죄 이후의 용서가 아니라, 사전에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신다. 하나님의 죄 용서가 얼마나 합리적인가? 얼마나 과학적인가? 세상의 합리성과 과학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제대로 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죄는 나중이 아니라 먼저 용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배우자의 잘못은 이미 예견되었고, 그 잘못은 내가 용서하고 시작했다는 진리를 안다면 부부간의 갈등은 대폭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용서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때그때 분노로 이글거린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
디 있을까? 자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녀가 부모인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를 때 이미 용서하고 낳았다는 사실을 재인식한다면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훨씬 더 부드럽고 효율적이 될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의 범죄를 용서하고 교제를 갖고 있음을 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나중의 범죄를 먼저 용서하시고 일을 시작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 함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죄의식으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라는 뜻이 아니다. 죄 앞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미리 용서하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 망각하지 않고 늘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 삶이 죄 용서함 받은 자들의 귀한 삶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