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의 10세 정화(鄭𣲲) 만시(挽詩)
■ 만정진사화(挽鄭進士𣲲)
기묘제현양교리(己卯諸賢梁校理) 기묘사화의 현인 양교리
서경순리정장흥(西京循吏鄭長興) 서경의 순리 정장흥
외손역유시서종(外孫亦有時書種) 외손도 역시 시서를 좋아하는데
유자능전효우칭(猶子能傳孝友稱) 아들은 선조를 본받아 효와 우애로 칭송을 받네
필하동경시이금(筆下動驚詩以錦) 붓끝은 세상을 놀라게 해 시는 비단과 같은데
안전유련주여승(眼前有戀酒如澠) 눈앞에 아련하니 술이 강물 같네
수지오십인간세(誰知五十人間世) 누가 오십이 인간 세상인 줄 알았으리
일와천추환불응(一臥千秋喚不譍) 한번 천추에 누우니 불러도 대답이 없으리
양교리(梁校理) : 홍문관 교리를 지낸 양팽손. 기묘사화로 피해를 본 조광조 등을 신원하는 상소로 삭직(削職)되었다.
순리(循吏) :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勤務)하는 관리(官吏).
정장흥(鄭長興) : 강항의 큰 외조부 옥천(玉泉) 정인관(鄭仁寬). 장흥부사를 지냈다.
외손(外孫) : 강항은 정인홍 공의 외손자이다.
승(澠) : 중국 산둥성에 있는 강 이름(澠水)
오십인간세(五十人間世) : 정화 공이 50세에 졸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1608년이다.
■ 정진사화(鄭進士𣲲)의 졸년은 1607년 50세, 진사는 48세
족보에 정화 공의 졸년은 미상이다. 만시(挽詩)에 ‘오십인간세(五十人間世)’라 하므로, 1558년생이므로 졸년은 1607년이다.
옥천 정인관 공은 승지와 부제학을 지냈다고 기술되었으나, 왕조실록 등 문헌적 고증이 없다. 수은(睡隱)이 진사 정화 공이 사망한 1608년에 정장흥이라 하였으므로 대표 관직이 장흥부사이다.
진사사마방목을 보면,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59위(89/100)인데, 합격 시 나이가 48세이다. 거주지는 능성(綾城)이다. 본관이 나주(羅州)로 된 것은 잘못이다. 형의 사마방목 본관은 광주(光州)이기 때문이다.
■ 양팽손(梁彭孫, 1448~1545)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이다.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으로 1510년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전랑· 수찬·교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 · 박세희(朴世熹) · 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 58세로 죽었다. 1630년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는 『학포유집(學圃遺集)』 2책이 전하며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화가로도 유명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1점이 오랫동안 양팽손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산수도>에 제시와 함께 써있는 '학포(學圃)'라는 호의 주인을 과거에는 양팽손으로 보았으나, 같은 필치의 제시와 호가 윤두서의 작품에도 써있는 사실이 발견되어 '학포(學圃)'라는 호의 주인이 조선 후기의 다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과 양팽손 종가에도 다른 작품들이 전하고 있으나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팽손 [梁彭孫]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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