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0일(목) 조금 흐림.
대통령 선거일 다음 날이다.
결과가 내 마음에 들든 아니든 그가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녹산공단 친구 공장에 일이 있어 귀가하는 길에 들렸다.
월명산 흥국사, 가야 불교와 관련한 절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흥국사는 주변을 잘 다듬으면 공장 일로 지친 노동자나 경영주에게 좋은 쉼터를 줄 수 있겠다.
명월산 흥국사(明月山興國寺) / 법화종, 전통사찰이 아님.
- 부산시 강서구 지사동
1706년(숙종 32)에 증원(證元)이 찬한 「김해명월사사적비(金海明月寺事蹟碑)」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고교(高橋) 밑에서 왕후 허씨(許氏)를 친히 맞아 들여 환궁하였는데,
이때 허씨는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게 폐백을 올렸다고 한다.
왕은 그 신령스러움에 감동하여 산의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고, 세자를 위해 신국사(新國寺)를, 왕후를 위해 진국사(鎭國寺)를, 본인을 위해 흥국사를 지어 나라의 융성함을 빌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7년(광해군 9) 대웅전과 승당(僧堂)·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1706년 일원(一元)·일혜(一惠)·상진(尙眞)·응준(應俊) 등이 중수하였는데, 그때 담 밑에서 건강원년(建康元年, 144) 3월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에서 들어와 불도를 전하니 왕이 중신숭불(重信崇佛)하였다는 명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동안 폐사가 되었던 것을 김원두(金元斗)가 옛터를 되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였고,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로는 부근에서 발굴하였다는 조각 석물이 있다. 높이 60㎝, 너비 80㎝ 정도인 좌불(坐佛)을 양각하고,
그 좌우에 코브라뱀이 불상을 옹호하듯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의 불교조각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인도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사찰측에서는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사찰 오른쪽에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와 증원이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정원 복판에는 1986년에 세운 오층관음보탑과 석등·사적비 등이 있다.
이 절은 불교의 남방전래설 연구와 가락불교의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는 중요한 사찰이다.
(다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흥국사 입구 안내문과 동일하다.)
보지는 않았다.
KNN 특별 다큐멘터리, ‘과학으로 본 허황옥 3일’가 2021년 12월 17일 방영하였다. / 인터넷 검색, 법보신문 기사.
이 방송을 보지 않았기에 내가 이렇쿵저렇쿵할 수는 없다.
이 방송의 의도가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부산으로 2000여년 전에 항해는 가능하였을 것이다.
항해가 가능하였다고 인도 북부의 어느 나라의 공주가 가야에 왔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유타국이란 나라도 특정할 수 없고 발음이 비슷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고.......
고증할 수 없으니 갑갑하다.
근래 가야사 관련하여 여러 책을 읽었다.
가야 남방불교 전래설은 고증할 수 없다.
왕후사(가야 8대 질지왕) 건립은 역사의 사실로 보여진다.
장유화상이나 기타 자료는 조선후기에 나온다.
흥국사(수로왕 자신), 진국사(왕후), 신국사(세자, 2대 거등왕)을 위해 수로왕이 절을 건립하였다..
부암(선대 수로왕), 모암(어머니 허왕후), 자암(거등왕 자신)을 위해 거등왕이 절을 건립하였다.
뭔가 짜맞추어진 것 같다. 고증할 수 없으면 추정할 수는 있어도 확정할 수는 없다.
어느 학자는 코브라의 용트림이 아니라 부드럽고 얇은 옷이 날리는 형상이라고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 석조 뒤에 명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건강원년(144년)~'이 적힌 기와가 발견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는 말도 신빙성이 없다.(어느 학자의 말)
가야사를 더 알기 위하여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을 빌려 왔다.
남방전래설을 설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물이나 기록(적어도 고려 중기 이전)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궁금하다.
김수로왕의 세력은 어디서 왔을까?
인도에서 허왕후가 왔을까?
인도에서 왔다고 불교 신자였다고 단정하여도 되는가?
첫댓글 감사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