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으로 간다. 딸과 사위가 리조트를 예약해 놓았다. 가을이 가버리기 전에 외손자 도율을 데리고 여행을 가잔다. 깊은 숲속에 리조트가 있어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고 물놀이 시설이 있으니 도율과 함께 물놀이를 할 수도 있단다. 온천물이란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인지 남편은 조금 주저하는 듯 했으나 나는 무조건 찬성이다. 이 나이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기다려주는 것은 없다. 지금 건강하니 무엇이 문제인가.
제천하면 남편과 함께였던 청풍호가 떠오르고 호반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들이 떠오르고 청풍호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청풍호 케이블카가 생각난다. 친구들과 함께였던 자드락길도 떠오른다. 일찍 출발해서 일단은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제천에 올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주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청풍호의 구비구비 돌아드는 물길과 물길을 둘러싼 산들의 어우러진 풍경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싶은 풍경들이다. 그럼에도 달리는 차를 멈출 공간이 보이지 않아 아쉬워하면서 지나치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저기저기 너무 멋진데 어쩌나 저걸 그냥 지나쳐야 하네 안돼 안돼 소리를 지르는 사이 이미 다른 풍경이 다가온다.
청풍케이블카. 사 년 전에 남편과 한번 와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봄이었다. 나무들이 연두빛 보드라운 새잎을 막 밀어올리는 중이었다. 손자와 딸네와 함께인 가을날 케이블카는 새로운 즐거움이며 풍경이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은 만원이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걸어간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먹고 살기 힘들다는 뉴스는 매일매일 방송이 되어 불안한데 이렇게 여행지에 와보면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여유롭고 풍족해 보인다. 군세를 더 받아내겠다는 의지를 바탕에 깔고 한국은 부자 라고 툭 던진 트럼프 미대통령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케이블카를 탄다. 육십오세 이상은 할인해준다기에 얼씨구나 하고 주민등록증을 준비했다. 본래 12,000원인 요금을 9000원 받는단다. 나이 먹으니 여기저기 여행지에서 대접을 받는다. 그럼에도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다. 차라리 3000원을 더 주고 젊음을 잠시라도 되돌려 받고 싶다. 십개월이 넘어선 도율은 이제 제법 똘망똘망하다. 제 어미의 가슴에 안겨 밖을 내다보면서 좋아라 다리를 흔든다. 도율아 저기 봐봐 저기 봐봐.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도율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아가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울긋불긋한 숲속을 바라보며 곤두박질치듯 가파르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멀리 청풍호가 내려다 보인다. 산을 오르는게 아니라 하늘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정상이다. 청풍호와 하늘과 겹겹이 둘러선 능선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아스라이 보이는 수많은 능선 사이사이에 운무가 펼쳐져 있어 참으로 고즈녁하고 아름답다. 절경이다. 수묵화다. 그 앞에서 남편과 내가 딸과 사위와 도율과 사진을 찍는다. 도율이 웃으면 우리도 덩달아 신나게 웃는다. 딸아이가 우리 다리를 어찌나 길게 찍어 놓았는지 웃음부터 픽 나오는데, 멋있어보이기는 한다. 요즈음 핸드폰 카메라는 요술쟁이다. 거짓말쟁이다. 도대체 나이를 구분할 수 없을만큼 젊게 나온다. 주름이 사라진다. 일단 기분은 좋다. 잠시 착각하게 된다. 아직 젊구먼. 착각은 자유라 했다.
젊은이들은 핸드폰 사용이 빠르니 점심을 먹을 장소를 찾는 일도 빠르다. 유명한 맛집이 있다는데 찾아가보니 인산인해다. 밖에 쭉 늘어선 의자들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다. 물론 주차장도 그렇다.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중년 여인들이 일어섰고 나와 손자 도율을 안고있는 그가 재빠르게 앉는다. 함께 흔들흔들 흔들리며 기다린다. 참으로 평화롭고 느긋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오고 버섯불고기와 떡갈비를 야무지게 먹는다. 늦은 점심이라 배가 고픈 탓도 있다. 정갈하고 맛나고 달달하다. 공간도 넓어서 쾌적하다. 역시 맛집이네 그런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숙소로 이동한다. 박달재 휴양림을 끼고 구비구비 울창한 산길을 올라간다. 커다란 절을 지나고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풍경이 수려한 곳에 절이 있기 마련인데 절을 지나고도 그보다 더 산속으로 들어가다니. 궁금증이 점점 더해지는데, 저만치 상상할 수 없는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숲속에 저런 건물이? 나라에서 이 넓은 산에 저렇게 큰 건물을 지을 수 있게 허용해 주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연 훼손을 염려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눈감고 있었나? 공무원들은 모른 척 했나? 앞쪽은 객실이 많고 가격이 비싸지 않은 일반적인 리조트 형태이고 뒤쪽 산으로 올라가면서는 별장처럼 개별적인 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 아뭏든 공기가 맑고 풍경이 수려해서 사람에게는 최적의 환경이다.
대명리조트는 여기저기 많이 이용해 봤지만 리솜이라는 리조트는 처음이다. 포레스트 리솜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발된 '친환경 리조트'란다. 자연 지형과 식생을 그대로 보존하고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여 자연과 인간이 함께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리솜 포레스트를 설계하였다는데. 단지 내에서는 전깃줄과 자동차를 찾아볼 수 없으며 박달재 휴양림이 자리잡은 단풍이 아름다운 주론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산지형을 따라 그대로 건물을 지어 윤슬길 마루길 가온길 누르길등 산길을 조성해 놓아서 산책하기에 알맞다. 실내와 야외에 힐링 스파가 있고 자연온천도 있다.
짐을 정리하고 조금 쉬고 저녁 산책길에 나선다. 여기저기 빛깔이 다른 조명등을 달아놓아서 숲과 나무와 연못과 오솔길이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멋지다. 특히 아랫녘으로 내려다보이는 어슴프레한 숲 풍경이 장관이다. 연보랏빛 풍선과 파란 풍선을 잔뜩 달고 있는 둥치가 커다란 인조 나무는 사랑이 열린 것 같은 환상적인 모양세다. 딸과 사위가 도율을 안고 나무 양쪽에 서서 한쪽 발과 팔을 들고 즐겁게 사진을 찍는다. 질세라 남편과 나도 찍는다. 매 순간 매 순간이 감사하고 감사하다.
다음날 일찍 아침 산책길에 나선다. 윤슬길이다. 햇살이 동쪽에서 비춰들기 시작하고 있다.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경쾌하게 들려온다. 경사가 꽤 가파른 언덕길이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가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양쪽으로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다. 특히 오래되고 수형이 멋진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 빛깔을 뽐내는 중이다. 한 발 한 발 걸어 올라간다. 바쁜 일 없고 아픈 사람 없으니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더욱 손자 도율이 함께 있으니 저 숲처럼 사랑이 꽉 들어찬 느낌이다.
중간중간에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요즈음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도율이다. 따스한 햇살아래 의자를 잡고 서서 우리를 향해 웃고 있는 도율은 햇살처럼 반짝이면서 의젓하고 귀여워서 우리를 환호하게 한다. 다움과 홍길과 도율이 함께 찍은 사진들은 설령 찡그렸다 해도 우리를 웃음과 행복으로 이끌어간다. 과거인 우리와 현재인 딸네와 미래인 도율이 함께 있으니 참으로 조화로운 모양세다. 대가족이었던 옛날의 삶 방식이 참으로 지혜로웠음을 알겠다. 구비구비 올라가는 길목마다에 별장처럼 고급스레 지어진 집들이 보인다. 다음번에는 저 곳에 숙소를 정해놓고 쉬었다 가자 엄마. 딸아이가 말한다. 그래그래 좋지 좋아.
이번에 리조트에 가면 스파를 하자고 딸아이는 미리 말했다. 준비해야 할 물품들을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수영복을 꼭 입지 않아도 된단다. 물속에 들어가 본 지가 언제인데? 망설여지는건 사실이다. 눈치를 챈 딸아이가 말한다. 손자와 물놀이 하는거 싫어? 그 말에 어찌 싫다는 말을 할까. 좋아 좋아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물에 들어가 봐야지 뭐 수영한지는 오래되어서 수영은 못할거 같고 그냥 물에서 도율이랑 놀지 뭐 은근히 기대가 된다.
물에 젖어도 비치지 않는 편안한 복장을 하고 따스한 온천물에 들어간다. 티셔츠를 준비하라는 내 말에 수영팬티만 입어도 된다고 큰소리 치던 남편이다. 누가 수영팬티만 입고 물에 들어가? 딸아이가 놀라서 사위의 어깨가 드러나는 티셔츠를 빌려 주었다. 거기다가 캡 모자를 눌러쓴 남편은 몸이 반듯하고 목선이 길어 사십대 같다. 와우 아빠 젊은이 같아. 딸아이의 말에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물속에서 놀다보니 느슨해지면서 딸도 사위도 도율도 더 정답고 사랑스럽다.
도율은 튜브를 타고 딸과 사위와 그리고 우리가 깔깔거린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물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어 마음을 열게 한다. 아랫쪽을 내려다보니 울창한 가을 숲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신선 놀음이다. 젊어서 우리는 이 좋은 것들 한번도 누리지 못하고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싶다. 돈을 모으느라 무엇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누릴 거 누리면서 사는 젊은이들의 방식과 누릴 거 안누리고 살아온 나이든 사람들의 방식, 어느게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나온 내 젊은 시절이 아쉽다. 아깝다.
아무래도 그곳은 산속이기도 하고 늦가을이기도 하니 기온이 낮은 편이기는 했다. 따스한 온천물에서 놀다가 밖으로 나가면 찬 기운이 확 느껴지는 것은 맞다. 감기에 취약하고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는 나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참을 수 있는 기온이다. 온천물에서 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딸아이가 커다랗고 따스한 옷을 활짝 펴들고 나에게 손짓하였다. 엄마 추우니까 빨리 이 옷 걸쳐줄께 뒤로 돌아봐 딸아이가 시키는대로 뒤로 돌았다. 옷이 걸쳐졌다. 아 이 따스함! 이 감동!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딸의 사랑이다. 제 어미를 염려하는 딸의 사랑이다. 도대체 언제 준비했던걸까? 사위 옷이란다. 크고 두꺼워서 부피가 큰 옷이다. 아가 도율과 본인들의 짐도 많은데 제 어미까지 신경을 쓰다니. 아 나는 행복한 사람!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다음날 의림지에 들렀다. 의림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리시설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수리시설이다. 규모는 만수면적 13만 ㎡, 최대 수심 13.5m이다. 의림지 제방 위에 조성된 수백 년 묵은 노송이며 버드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이 자라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의림지를 한바퀴 돌았다. 품위있으나 구부러진 노송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림자조차도 세월이 느껴진다.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여유롭게 손자이름을 즐겁게 불러가며 노송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행복이 느껴진다. 나이 들어 맞이한 손자를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내려놓기를 아까워하는 그다. 수박이나 참외나 고추에 몰입하던 그가 지금은 손자에게 몰입중이다.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이란 사랑이 전부 손자에게 향하고 있다. 더없이 보기 좋다. 우륵이 서쪽 해를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다는 장소에 서 본다. 한낮이라는게 아쉽다.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 차 있는 깊은 숲속의 리조트에서 이박삼일은 너무 짧았다. 공기가 맑고 숲 냄새도 좋지만 가장 사랑하는 딸과 사위와 손자와 함께여서일 것이다. 가을숲인데다가 단풍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숲은 다채롭고 화려하면서 아름다웠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여유로운 산책길에서 나는 특히 콧노래가 나왔다. 자연속으로 숨어들어 느낄 수 있는 정적과 고요함이 거의 완벽했다. 손자와 함께하는 물놀이 역시 신이 나고 즐거웠다. 더 나이를 먹으면 함께 해 볼 수 없는 놀이다. 나이 먹은 어른들이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딸과 사위는 무슨 일이든 계획해서 앞장서 주었다. 편안하였고 흡족하였다. 딸과 사위의 대화나 행동은 하도 알콩달콩해서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손자 도율은 건강하게 잘 먹고 잘 놀고 잘 웃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라. 감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