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답사>
“최명희와 ‘혼불’을 만나다!”
"다만 저는, 제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한없이 고단한 길이겠지만,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저는, 저의 삶과, 저 자신이, 서로 깊은 이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1. 최명희(崔明姬) Choi Myeong Hee
전주는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이 나는 도시다. 소설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 지닌 땅’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 서거정은 『공북루기』(珙北樓記)에서 전주를 아조선근본지지(俄朝鮮根本之地 우리 조선의 근본 되는 땅)라 하여 각별히 상서로운 곳으로 높여 불렀다.
전주는 작가의 고향이자 문학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다. 전주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태어난 작가는 풍남초등학교(1960년 졸)와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1963년 졸), 기전여자고등학교(1966년 졸)를 거친 뒤,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다음 1968년 영생대학(현 전주대학교) 야간부 가정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수료했다.
이 기간 중 작가는 모교인 기전여고에서 서무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70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72년 졸업과 동시에 기전여고에 교사로 부임하여 서울 보성여고로 옮기기까지 2년 동안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혼불』 출간 이후, 1997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12월 11일 몹시도 차고 매운 날, 지병인 난소암으로 영면(永眠), <전주시민의 장>으로 장례 후 모교인 전북대학교 부지 건지산 중턱에 안장됐다.
• 1947년 10월 10일
1947년 음력 10월 10일 전북 전주시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로 유학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최성무씨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의 양천 허문으로 깊이있는 이품과 예술적 조예를 겸비한 매우 현숙한 부인이었던 어머니 허묘순씨의 2남 4녀 가운데 장녀로 출생하였다.
본적은 전북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 작가의 본관은 삭녕으로 조선 세종 조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성종 조까지 대제학과 영의정 등 삼정승을 두루 거쳐 영성부원군에 오른 명신 문정공 최항은 작가의 19대조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신 분이었으니 작가 최명희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좇아 아름다운 모국어를 진주처럼 새겨 작품을 이루려 했던 정신은 이러한 조상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이라고 하는, 지금은 ‘경원동’이라고 이름이 바뀐 그런 동네입니다. (중략) 전 이상하게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 몇 번지라고 했을 때, 그 어린 마음에도 ‘화원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제 맘에 좋아서, 굉장히, 제가 뭔지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화원’이라고 하는 그 음률이, 그 음색이 주는 울림이 저로 하여금 굉장히, 제 마음에 화사한 꽃밭 하나를 지니고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곤 했어요." ∥1997년 11월 8일 국립국어연구원 강연록 「혼불과 국어사전」 중에서(작가의 출생지인 ‘화원동’은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불렸던 지명이다. 1957년 경원동 3가로 바뀌었다가 1974년 경원동, 1996년 풍남동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 1960년 2월
전주풍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던 1961년 콩트 「완산 동물원」이 ‘당선작품’이란 수식어를 달고 교지 『학』에 실렸다.
• 1963년 3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교 시절 작가는 청소년 문사들이 모이는 전국 단위의 굵직한 백일장과 문학콩쿠르에서 장원을 도맡아 ‘공포의 자주색’(당시 기전여고의 교복이 자주색이었음)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천재 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 1964년 5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 해에 동국대학교 주최 제 2회 전국고교생 문학콩쿠르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 로 소설부 장원으로 뽑혔다.
• 1964년 9월
출판협회가 주관한 전국 독서 감상문 대회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독후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가 초등부에서 일반부까지 통틀어 전국 특등으로 당선되었다.
• 1965년 9월
연세대학교 주최 전국남녀고교생문예콩쿠르와 10월 대전대학과 미국오스틴대학교가 공동주최한 전국남녀고교생문예콩쿠르에서 수필부 장원에 뽑혔다. 특히, 연세대학교에서 수상한 수필 「우체부」는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아 1968년부터 1981년까지 고등학교 작문교과서(박목월-전규태 공저, 정음사)에 예문으로 실렸다. 학생의 작품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1966년 2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가정환경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진 최명희는 1968년 영생대설가로 성공할 수 있는 큰 바탕이 되었다.
• 1970년 1월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단편소설 「정옥이」가 전북대학교 제16회 학예상, 단편소설 「탈공」이 숙대신보사 제2회 대학문학상, 수필「냇물」이 제1회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 우수작품으로 뽑히는 등 단편소설과 수필로 여러 대학의 문예공모전에서 수상하며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 1972년 2월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 1972년 3월
전주기전여고에 국어교사로 부임해 2년 동안 재직하고, 1974년 서울 보성여자중고등학교로 옮긴 뒤 1980년 5월 그만둘 때까지 7년, 합하여 9년간 국어교사를 지냈다. 최명희는 이 시기를 ‘삶의 실체에 내던져진 내가, 삶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무렵’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못 썼을까? 절필이라는 말은 마땅하지 않고…. 정말 너무 너무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괴로운 시간’이었다. ‘땅속 씨앗의 시절’. 그러나 최명희는 안 써진다고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줄곧 일기와 편지를 쓰면서 왕성한 습작기를 보냈다.
• 1980년 8월
4월 교통사고로 6개월간 병원에서 생활했다. 그 절망의 병상에서 파란 인광을 내뿜으며 시작한 소설이 「혼불」이다. 그때부터 작가는 자신의 표현처럼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최명희에게 ‘혼불’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숙명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이 당선됐다. 공모전의 상금은 2천만 원으로 사상 초유의 고료였다. 당선작은 200자 원고지 1,700장 분량으로 1996년 총 10권으로 발간된 대하소설 『혼불』의 1부(1∼2권)에 해당한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최명희는 문예지와 일간지, 사보 등 다양한 매체에 수필과 칼럼, 콩트 등을 발표했다. 또한 『여성동아』 등에서 인터뷰 전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글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였으며, 발표 때마다 큰 호응을 얻었다. 2009년 1월까지 밝혀진 작품은 6종으로 발표된 「혼불」을 제외하고, 소설 28편과 수필 156편, 콩트 20편, 시 1편 등 모두 205편이다.
• 1985년 9월
월간 『전통문화』에 장편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 연재를 시작했다. 전주천을 주요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986년 4월까지 8개월간 연재되었으며, 이 작품을 통해 최명희는 무속과 판소리 등에 관한 지식이 가히 전문적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평을 얻었다. 독특한 흡인력을 가진 문체의 힘에 대해 작가는 극구 ‘전라도 산천, 전라도 가락, 전라도 말이 베풀어준 음덕’이라고 표현했다.
• 1988년 9월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를 시작하였다.
• 1995년 10월까지
1988년 9월부터 시작한 소설 「혼불」의 『신동아』 연재를 마쳤다. 7년 2개월 동안 이어진 이 기록은 당시 월간지 소설 연재 사상 최장기록으로 남아 있다.
• 1995년 10월
1988년 9월부터 시작한 소설 「혼불」의 『신동아』 연재를 마쳤다. 장장 7년 2개월 동안 이어진 연재 기록은 당시 월간지 소설 연재 사상 최장기록으로 남아 있다. 육필로 쓴 원고는 원고지 12,000장에 달한다.
• 1996년 12월
대하예술소설 「혼불」이 전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완간’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작가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공간 이후 6․25, 4․19, 5․16 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이며,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와 20권이 될지 30권이 될지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 1998년 12월 11일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永眠). 장례는 5일장(전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5일 전주시청 앞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고인의 생가와 모교인 기전여고를 거친 시가지 운구행렬에 이어 전북대학교에서 노제를 지냈다.
•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조사의뢰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최명희의 1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현대문학이론학회 공동주최로 전북대학교에서 열렸다.
• 2004년 10월 20일
남원시 사매면 노봉리에 혼불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소설 「혼불」의 주 무대인 이곳은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남원시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
• 2006년 4월 25일
작가의 고향인 전주한옥마을에 최명희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2. 혼불
최명희(崔明姬)가 지은 장편소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장편소설공모’에 제1부가 당선되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다.
1988년 9월부터 제2부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199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 동안 계속되어,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2월에 제1부와 제2부가 네 권 분량으로 한길사에서 출간하였다.
이후 ≪신동아≫ 연재 부분과 새로 집필한 부분이 더해지고 기존 출간 부분도 대폭 수정 보완되어, 최종적으로 1996년 12월에 전 5부 10권으로 한길사에서 출간하였다.
이후 작가는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투병하던 중에도 제5부 이후 부분을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내 집필하지 못하고 타계하여, 1996년에 간행된 판이 최종본이 되었다.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남원의 매안 마을과 거멍굴을 중심으로, 매안 이씨 가문의 삼대를 이루는 청암 부인과 그 아들 이기채 부부, 손자 이강모·허효원 부부, 그리고 거멍굴 천민인 춘복이 등이 주요 인물이 되어 펼쳐진다. 이야기는 강모와 효원의 혼례 장면을 기술한 것으로 시작된다.
둘의 결혼생활이 순탄치는 않으리라는, 예사롭지 않은 전조가 드러나는데, 실로 신부는 초야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수모를 당한다. 그도 그럴 것은 신랑 강모가 사촌누이 강실이와 상피(相避)를 범하며 비극적 사랑을 하던 터이다.
급기야 강모는 방황 끝에 만주행을 결행하고, 효원은 외로이 공규(空閨)를 지키며 매안 이씨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시할머니 청암 부인으로부터 이어받는다.
청암 부인은 청상과부로서,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며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로서, 매안 뿐만 아니라 민촌 거멍굴 사람들에게도 신임이 두텁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전기로, 그간 잠재되었던 반상(班常)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격동기에 힘을 잃어 가는 가문을 되살릴 책무가 효원에게 부여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거멍굴 천민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춘복이는 ‘변동천하’를 꿈꾸며, 양반가 처자 강실이를 사모하여 자신의 아이를 수태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를 행동에 옮긴다. 결국 이 때문에 강실이는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효원의 도움으로 이를 모면하는 듯 사건이 진행된다.
소설이 미완인 상황이라 사건의 전모를 이 이상 가늠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소설의 이야기가 이런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닌 터라 그 줄거리를 단언할 수는 없다. 그 줄기에서 확산된 이야기의 분량과 비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인 여느 소설과는 다른 서사구성과 서사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민속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직접 기술하거나 형상화의 모티프로 삼은 대목이 빈발할 뿐만 아니라, 문서나 전적(典籍)이 인용되고 설화나 민요, 판소리 대목 등이 인용되기도 한다. 사상과 철리(哲理)를 담론한 대목들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곧잘 곁가지를 뻗어간다. 결국 이 작품은 소설 장르를 넘어서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은 단선적 플롯을 취한 소설과 다른 양상일 뿐, 일견 소설의 본질적 산문 양식에 더 적확(的確)한 것이라 하는 게 타당하다. 특히 여러 담론을 융해하는 과정에 적용된 시점이나 구성의 역학이 돋보인다.
물론 세심하게 다듬은 문장 하나 하나가 소설의 문체미학을 한 차원 드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소설이 단순히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술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이 작품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3. 소설 혼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최일남(소설가)
최명희의 소설을 대하면 어느 벌족한 가문의 종가댁 잔치마당엘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대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곧 거기서 울을 넘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이어 뜨락을 메운 질펀한 흥취와 안방 여인네들의 정겨운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채 어른들의 경세담들을 모두 한마당에서 만난다.
고색창연한 그 일문의 내력을 숨기고 있는 뒤꼍 대밭의 은밀한 속삭임까지도.
최명희는 아마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보고 듣고, 깊이 간직해온 그 집 마당가의 한 그루 늙은 오동나무 혹은 은행 고목인지도 모른다. 그래 끝내는 우리 삶의 참모습과 옳은 자리를 보여주는 『혼불』을 써내게 된 것인지 모른다.
이청준(소설가)
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은 여성적인 넋의 고혹스러움과 섬세한 문체의 마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면서도 대하 서사시적인 규모를 지닌 일대 거작이며 엄청나게 폭이 넓은 사회소설이다. 이야기 중심, 사건 중심이 아닌 소설 장르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이 작품으로, 최명희의 소설사적 지위는 이미 확고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는 우리가 대대로 전승해온 풍속의 세계를 최대한 정밀하고 자상하게 또한 아름답게 복원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마치 우리 민족의 참된 정체를 지키려는 수호여신과 같은 풍모를 띠게 된다. 『혼불』은 앞으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고은(시인)
한국인은 삶의 크고 작은 토막들을 통틀어서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더러 '사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아예 '말' 그것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 것이 곧 '이야기'이다. 요컨대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장 긴요하게 주고받는 '말의 말'이다. 그것으로 한국인은 인생을 말하고, 인생을 풀이하고 인생에 매듭을 지어 나갔다. '이야기'로 살고, 사는 것을 이야기 삼아 왔다.
최명희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이야기'를 말하는 출중한 '이야기꾼'이다. 근대말과 현대에 걸친 그 아픈 과도기의 구석구석, 바꾸어 말해서 안방, 집안, 고샅에서 사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현장을 바늘귀로 헤집어서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는 그 아린 사연들을 풀이하는 '이야기꾼'이다. 그러기에 이 작가의 이야기는 심히 '여공(女功)'적이다. 길쌈질, 바느질에 바친 전통사회 여성들의 손의 공력(功力)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소재로 삼아, 말의 공력(功力)을 부림으로써, 『혼불』이라는 이야기로 엮어 내었다.
실제로 이 작가는 시치고, 호고, 뜨고, 공그리고 할 뿐만 아니라 박고 누비고 꿰매기까지 하는 저 알뜰한 옛 여인네의 손놀림, 섬세한 여성 손끝의 바늘 놀림 그대로 이야기를 꿰어나간다. 그래 이 작가는 장단이며 사설에 걸쳐서 그녀의 고향 남도의 판소리 흥이며 기운을 이야기에 싣는 것을 절묘하게 연행(演行)해 보이고 있다.
유종호(문학평론가․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
일제 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가 『혼불』에 이르러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역사의 격심한 갈등과 대변혁 속에서도 의연히 민족혼의 알맹이를 마모시키지 않고 영글 수 있게 만든 것은 옹골찬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청암부인을 비롯한 숱한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 아내, 여인상을 최명희는 애절함과 그리움으로 우리 시대에 부상시켜 준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 답사기
- 최명희 대하소설 <혼불> 읽은 후 -
影園 김 인 희
<혼불>은 오랫동안 나를 목마르게 했고 학수고대하게 한 책이었다. 재작년에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구매하고자 하였는데 품절이었다. 그 후로 몇 번을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다가 찬바람 안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렇게 긴 시간을 그리움으로 사로잡혔기에 그토록 절절하였던가! 책을 펼친 순간부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깊은 밤 열권의 책을 쌓아놓고 독서하는 나에게 가족들은 쉬면서 읽으라고 여러 번 만류를 했었다.
<혼불>은 1930년대 전라남도 남원 매안 이씨 가문의 종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씨 가문의 종손 강모의 결혼을 시작으로 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매안 마을과 문중의 땅을 부치고 살아가는 상민들이 살고 있는 ‘거멍굴’이 등장한다. 강모의 할머니 청암부인은 결혼한 후 시댁으로 간 신랑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시댁으로 가는 날에 흰색 가마를 타고 소복을 입고 있었다. 매안 이씨 시가에 처음 들어설 때 허물어져가는 기둥을 붙잡고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고 각인하듯 다짐을 한다.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여자의 삶을 접어두고 몰락해가는 한 집안을 일으키는 대장부로서 살아간다. 청암부인의 노력으로 매안 이씨 가문은 위엄 있는 가문이 되고 누구도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기채와 율촌부인 사이에서 강모를 얻고 손부 효원을 보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지켜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효원은 대실 친정에서 혼례를 치른 후 신부를 외면하고 홀로 잠든 신랑 강모를 통해서 절망을 간직하고 새벽빛이 들어오는 창호문을 보면서 스스로 족두리를 벗고 활옷을 벗으면서 가슴에 찬바람을 안고 지낸다. 효원이 혼례를 치른 후 1년 뒤에 매안 시가에 와서 살면서 강모의 따뜻한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홀로 눈물을 삼키는 날들이 많았다. 강모는 사촌 여동생 강실을 무지개처럼 그리워하고 자신에게 사랑이 있다면 강실이 뿐이라고 혼자서 고백을 한다. 강모는 학교 졸업 후 공무원으로 일을 하면서 만난 술집 여인 오유끼를 구하기 위해서 공금을 쓰고 감사에서 발각되어 집안에 큰 화를 끼친다. 강모는 강실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도피를 하듯 만주 봉천으로 떠난다. 효원은 다행스럽게 아들 철재를 출산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가녀린 여인이 아닌 가문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가족과 친지들과 가문에 딸린 종들의 일상을 세심하게 돌본다. 효원을 보는 친지들과 집안 노비들도 할머니 청암부인에게서 풍기는 느낌을 효원에게서 느끼면서 청암부인과 효원을 보통 여인이 아니라고 놀라워한다.
청암부인이 운명한 날에 효원의 마음에 스며든 할머니 청암부인의 정신을 소중하게 품고 이씨 가문을 지키고자 다짐한다. 어린 아들 철재를 바라보면서 가문이 바르게 서야 아들의 장래가 빛날 것이라고 아들 철재를 위해서라도 흠 없이 티 없이 가문을 보존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을 한다.
거멍굴에 사는 사람들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고 살아가는 상민들이었다. 이씨 문중의 양반들이 갈 수 없는 천한 마을이 거멍굴이었고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거멍굴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신분상승을 꿈꾸는 춘배와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악한 옹구네가 있었다. 춘배는 상것의 자식은 다시 상것이 되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면서 강실이를 통해서 자신의 자식을 얻고자 하고 과부 옹구네는 악한 꾀를 내어 도모하게 된다. 강실의 임신을 알고 효원은 가문을 살리고 강실을 살리는 방도로 친정의 암자로 보냈으나 강실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애타 하면서 강실의 어머니 오류골 작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용서를 구한다. 효원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강실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 어디 먼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기를 바랐던 마음. 강실의 좋지 못한 행실이 가문을 더럽히고 아들 철재의 앞길을 막을까 염려해서 강실을 보냈던 마음. 그리고 한 곳에 켜켜이 쌓아 놓은 신랑 강모에 대한 원망. 그렇게 강실이를 떠나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강실이 살아 돌아와서 효원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빌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혼불>은 5부 10권으로 되어있는 대하소설이다. 작가 최명희님은 17년간 장구한 세월을 <혼불>에 쏟아부었다. 혼불을 읽으면서 호흡이 멎을 듯했고 벅찬 감동 때문에 때로는 책을 덮고 긴 호흡을 했던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과 빛깔을 모두 엮어내지 못하는 내 미력한 글이 글쓴이에게 송구한 마음뿐이다. 다만 나의 감동이 빛을 잃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과 강박감으로 글을 쓴다.
나는 <혼불>을 읽으면서 한 문중의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지낸 듯 묘한 착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글쓴이의 화려하면서 사치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에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의 문화와 풍속과 생활에 대해서 실증적인 제시를 하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서술한 내용들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혼불>은 우리의 정신과 관습과 민간신앙과 각종 의례를 총망라하여 기록한 철저한 역사이고 문화라고 하겠다. <혼불>이 곧 우리의 정신이라고 역설하고 싶었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강모와 효원이 혼례를 할 때는 혼례가 이루어지기까지 모든 전과 후를 철저하게 설명하고 있는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청암부인이 사망했을 때는 장례 절차를 철저한 고증을 거친 증언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심진학 역사 선생을 통해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전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백제의 역사와 후백제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깊고 드넓게 들려주고 있었다. 겨울철 연날리기 장면에서는 연을 만드는 방법과 연싸움에서 이기는 비법과 연날리기에 담긴 사연을 들려주었다. 윷놀이 장면이 나오면 거기에 깃든 역사와 이야기를 백과사전을 펼친 것처럼 낱낱이 들려주고 있는 작가의 세세한 배려에 연신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매안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송두리째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과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암울하고 처절하게 슬픈 모습을 고스란히 그렸다. 글쓴이는 나에게 다시 두 손이 부르르 떨리는 어찌할 수 없는 울분과 원망을 간직하게 했다. 그리고 할머니 청암부인과 어머니 율촌부인과 부인 효원과 사촌동생 강실이와 동거녀 오유끼 까지 다섯 여자를 외롭게 한 강모의 도피적인 삶에서 한 자락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을 느꼈다. 심진학 역사 선생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깊이를 다시 재어보게 되었다
“혼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혼불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다.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 혼불은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 삶을 사람답게 하는 힘의 불이기도 하다. 즉 혼불은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인 것이다. 이미 혼불이 나가버린 사람의 껍데기만 남은 어둡고 차디찬 몸을 살아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여. 나는 혼불이 살아있는 시대를 간절히 꿈꾸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아픈 일제강점기 한 가문의 진정한 삶을 일궈내는 상처의 삼십 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글쓴이의 말을 옮기면서 글쓴이의 ‘혼불’은 우리 민족의 삶이요 역사요 문화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결론지어 본다.
** 부끄럼움에 떨면서 수년 전에 쓴 작품을 옮긴다. - 影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