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2잔만 먹어서 운전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시내 같으면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여기는 시골이고 또 집에까지 골목길로 가면 2km 정도에 불과하므로 염려할 것이 없었다. 집 대문을 열면서 K교수는 “아차,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수업은 9시 20분이면 끝난다. 보통 때는 강의 끝나고 손 씻고 바로 퇴근하면 9시 40분에 집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12시가 넘어버렸으니 아내는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지 않고 TV를 보고 있던 아내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본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강의 끝나고 정리하고 글을 쓸 게 좀 있어서 늦었어요.”
“이상하네, 내가 연구실로 전화해도 안 받던데. 두 번이나 했는데.”
“그래요? 왜 전화가 안 울렸을까? 아, 알았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에 연구실 전화를 학과사무실로 돌려 놓았는데,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지. 조교는 9시 반이면 퇴근하니까.” K교수는 엉겁결에 둘러대었다. 아내는 ‘이 남자가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K교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K교수는 속으로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는 핸드폰이 보급되기 전이라서 이러한 변명이 가능했다.)
며칠이 지나 K교수는 경상대 교수 세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미녀식당으로 갔다. 이제 봄은 더욱 깊어가고 기온은 점점 오르고 있었다. 식당 입구 오른 쪽에 라일락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나무 가지 끝 부분에 연보라색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있는데, 진한 라일락 향내가 진동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라일락을 이름이 영어라서 외래종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수수꽃다리’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이 있는 토종이다. 지금은 잘 먹지 않지만 곡식 중에 ‘수수’라는 잡곡이 있다. 수수꽃이 피어 있는 모습과 수수꽃다리의 꽃 모양이 닮아서 ‘수수꽃 달리는 나무’라고 부르다가 수수꽃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라일락은 하트 모양의 잎을 따서 이빨로 깨물면 매우 쓴 맛이 난다.
네 사람은 베란다에서 음식을 주문하였다. 메뉴판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스파케티가 있었다. 한사람은 모짜렐라 스파게티, 두 사람은 김치 스파게티, 그리고 K교수는 불고기 스파게티를 시켰다. 요즘에는 서양 음식도 토종 음식과 결합하여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음식이 나타났다. 이른바 ‘퓨전 음식’이 나타났는데, 한식과 양식을 섞어서 만든 새로운 요리법이 유행이다.
마침 그날은 점심시간이었지만 손님이 많지 않아서인지 미스K가 네 사람이 있는 테이블에 와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스파게티였다. 마침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미식가로 소문난 ㅇ교수가 끼어 있어서 대화를 주도하였다. K교수는 미식가도 아니고 입맛이 무딘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리를 잘 몰라서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스파게티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음식인데, 보통 사람들은 스파게티와 파스타를 혼동한다고 한다. 미녀식당의 상호인 ‘파스타 밸리’에서 파스타는 밀가루 반죽을 뜻한다. 파스타는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들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음식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밀가루 반죽 요리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파게티는 파스타의 한 종류로서 국수면 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면 길고 단면이 동그랗게 말린 형태의 파스타를 스파게티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파스타가 스파게티의 상위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파스타의 종류가 많은데, 파스타가 약 200가지, 그리고 스파게티가 약 30가지 종류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