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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鳴吉)은 처음에 상헌(尙憲)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정승의 천거에서 빼버리기까지 하였으나, 함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가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상헌도 처음에는 명길을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지키면서 조금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상헌은 시를 지어, “마침내 두 대(代) 걸쳐 나눈 교분 다시 찾아서, 평생의 의심 모두 풀어 버렸네.”라고 하였고, 명길도 시를 지어,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서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서 일에 따라 변한다네.”라고 하였다.
鳴吉初疑尙憲有釣名之心, 而至削枚卜. 及其同囚, 見其死生迫頭, 而確乎不拔, 遂信其義而服其心. 淸陰初亦以鳴吉與秦檜無異, 及見其以死自守, 不爲撓屈, 亦知其心本非爲虜, 兩家各相敬重. 尙憲詩曰: “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 鳴吉詩曰: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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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인물을 들자면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쓴 이경석(李景奭)과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일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그 반대편엔 척화론을 주장한 김상헌(金尙憲)과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가 있다. 그들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었다.
특히 예조 판서 김상헌과 이조 판서 최명길은 청나라에 항복할 때까지 조정에서 그야말로 극한 대립을 하였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척화를 주장한다고 보았고, 김상헌은 최명길을 남송 때 금(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진회(秦檜)에 비유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으로 몰아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둘은 그 후 청나라의 심양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함께 감옥살이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상헌은 압송되어 갔고 최명길은 제 발로 찾아갔다. 사실 그들은 병자호란과는 무관한 일로 투옥되었다. 김상헌이 압송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4년이 지난 1641년 1월이고, 최명길은 그 이듬해인 1642년 10월에야 심양에 갔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칩거하고 있었다.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반면 최명길의 사연은 다소 복잡하다. 조선이 결국 청나라의 압박에 못 이겨 군대를 출병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최명길은 임경업(林慶業)의 심복인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밀사로 보내 조선이 부득이하게 참전하게 된 사실을 알리고 명나라와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게 하였다. 이 일이 나중에 청나라에 발각되자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아들 최후량(崔後亮)에게 자신의 장례 도구를 지참케 하고 심양으로 떠났다.
“나는 영의정으로서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관여해 왔다. 이번 일은 나 혼자 주도한 것이다. 그리고 임경업이 평안 병사로 있었으므로 그에게 배를 마련해 보내도록 한 것이다. 우리 임금께서도 모르는 일이고 신하들도 아는 이가 없다.[我爲首相, 事之大小, 皆關於我. 此事我獨主張, 而林慶業爲平安兵使, 故使之裝船以送. 旣非主上所知, 諸臣亦無知者. ]” (燃藜室記述, 권26, 獨步)
심문을 마치고 그는 감옥에 갇혔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수행하고 환국할 때까지 두 사람은 같은 감옥에서 2년을 함께 지내게 된다. 이 일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을 풀고 둘 다 나라를 위해 행동한 것임을 서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과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에는 2년 동안 그들이 주고받은 시가 100여 편 수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은 그 가운데 두 편의 시를 인용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화해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본래 최명길의 집안은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 때부터 김상헌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최기남과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으며, 김상헌은 당시 나이가 어려 함께 배우지는 못했으나 성혼의 신도비명과 성혼 문인들의 비문을 여러 편 지을 만큼 성혼 문하와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양에서의 감옥 생활이 이러한 두 집안 간의 우호 관계까지 회복해 준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경쟁과 대립을 한 인물들이 많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서로 갈라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같은 자리에 함께 앉는 것조차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후손 대대로 원수 집안으로 지내기도 한다. 그 점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함께 감옥 생활을 한 것은 어쩌면 두 사람에게 행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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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주요 저·역서
- 『고전적정리입문』, 학민문화사, 2011
- 『서울2천년사』(공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 『승정원일기』(인조/영조/고종대) 번역에 참여
- 『홍재전서』,『졸고천백』,『기언』,『명재유고』,『성호전집』번역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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