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이웃하는 사유들
----이인원의 시세계
박수빈(문학평론가, 시인)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상력이 펼쳐진다. 이인원의 시편들은 추상적인 생각을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열린 사고로 대상을 감각하고 표현하는 점에서 새롭게 읽힌다. 정서는 시대와 연동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다양하며 파편화가 진행된 실상을 이인원의 시는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슬픔, 우울, 고독 등의 비극적인 긴장미가 이번 다섯 번째 시집『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에 가득하다.
내용을 보면 행복한 삶은 요원하고 아픔과 이웃하며 산다. “말라 죽고 병들어 가는 것들만 있었다”는「협상의 기술」에서의 고백은 “제 마음까지 보여줄 수 없었던 꽃”과 “제 마음만큼 넓혀갈 수 없었던 그늘”이 “공존을 연습하는 동안”의 이야기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한 권의 시집을 아우르는 사유에 해당한다.「A4」에서는 “양악 통증이 극에 달”하는 어금니의 “이빨 자국투성이” 같이 아프며,「나무는 무릎이 없다」의 경우 “연골이 다 닳은 인간”의 “없는 무릎으로 가장 먼저 무릎 꿇는” 행위고,「번개탄」에서는 “죽음이란 따스한 둥지에 안심하고 탁란하는 일”이라거나 “비좁은 알에 갇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던 불안과 우울”이라는 표현에서 헤아리게 된다.
이때 대상에 대한 연민이 있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울림이 되어 돌아온다.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오감이 생생해지고 독자를 감동으로 이끈다. 다음의 예시를 보자.
방금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누가 가슴에 삽을 댄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해 보자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해 보자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분홍 입술의 시간」전문
사진 한 장이 오래된 기억을 촉발할 때 있다. 이 시는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당시의 사람과 장소로 연결된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과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이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어떤 기억들은 매장되어 있다가 무심히 발굴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목적에 의해 도굴되기도 한다. 당사자조차 잊고 지내던 기억의 무덤도 불현듯 되살아날 수 있다.
이 시에서 솔깃한 부분은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이라고 연상하는 장면이다. 기억 속에 순장이 되었다가 먼 훗날 다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화자는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래도”라는 부사어 다음에 행갈이를 한 만큼 호흡조절을 하면서 강조하여 읽게 된다. 사진에서 오래된 기억의 어떤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나 역시 순장이 된 젊은 날의 화자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하고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하자는 다짐이 와 닿는다. 기억의 봉분이 열리면 설렘과 애증이 동시에 있을 것 같다.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이라는 표현에서 생명의 활기가 느껴진다. 분홍이라는 색감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가 있으며 열정과 관능의 이미지가 환기되는 면에서 시인의 감수성이 전해온다.
봐라
발가벗고 바동거리는 목숨이란 말
간지럽단 말 대신 긁적긁적 꽃망울 터뜨리는 나무
못 참겠단 말 대신 철썩철썩 온몸 보채는 바다
복잡한 어순과 어휘 싹둑 잘라 낸 은유의 배꼽
탯줄도 가르기 전 터득한 몸말
옹알이부터 시작된 말
다 잊어버린 후까지
무서울 땐 삐죽삐죽 머리칼 곤두섰고
추울 땐 오소소 소름부터 돋았던
가장 오래된 미래의 말
이제 다신 못 본다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마지막
말씀 한 줄기
싸늘한 배꼽이 따뜻한 배꼽에게 남기는
완벽한 유언
가장 새로운 과거의 말
-「보디 랭귀지」전문
시인의 뛰어난 감각과 감수성은「보디 랭귀지」에서도 이어진다. 시인은 “탯줄도 가르기 전 터득한 몸말”이 언어보다 먼저라고 강조한다. 언어는 대상과 이를 인지하는 인간 사이의 매개로 이루어지며 표상하려는 의미와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꽃망울 터트리는 나무”를 보게 되었을 때 “간지럽단 말”로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파도치는 바다 역시 “못 참겠단 말 대신 철썩철썩 온몸 보채는” 보디 랭귀지가 우선한다. 언어화 과정은 일상의 경험을 수용하는 것이다. 본연의 감각과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 새삼 중요하게 느껴진다.
대상과 생생하게 만나기 위해 시인은 감각과 감수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의미를 포착하는 언어 사용 이전 즉 “복잡한 어순과 어휘 싹둑 잘라 낸 은유의 배꼽”을 향한다. “배꼽”은 감각의 기원인 자궁과 원래 하나였던 것을 상징하는 신체 기관이다. 시인은 “배꼽”을 지향하며 시 쓰기 역시 대상과 분리되지 않고 감각을 공유하며 “몸말”을 익히려 한다. 이 고단한 삶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를 궁구하는 것이다.
가히 현대는 욕망으로 점철되는 시대이다. 욕망을 따를수록 가식과 허위를 동반하며 결국 ‘나’라는 주체는 스스로 올곧이 주체가 되지 못한다. 경쟁하고 비교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나’는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초월적이고 달관적인 마음의 경지는 수련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는 일련의 심정들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결핍감을 느끼게 되니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욕망이 부각이 되면 타인은 굴절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어떤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상대는 그야말로 타자이다. 역지사지로 서로 추방하였거나 누군가에 의해 추방된 고독한 타인이다.「11월」에서 “사소한 기억은 얼마나 긴 손가락을 가졌는가”, “내 새끼손가락은 다른 이들보다 얼만큼 짧은가” 라는 표현과「장미, 또는 도마뱀」에서는 “징그럽게 단 결핍 강박 몇 모금/ 아껴 마신다”거나 “경계(境界)를 경계(警戒)하라”, “나와 당신들 사이”에 대한 사유는 메아리처럼 퍼진다. 이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에코가 되는 울림으로 구성이 된다.
음풍농월의 완상과 거리가 있고 편하게 읽기보다 곰곰이 되새기게 하는 시편들이다. 그래서 느슨했던 감각과 감수성이 탄력을 받고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때 어울림은 순행하지 않는다.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며 이는 어쩌면 이 시대가 비극성의 긴장미를 담보로 하기에 그러할 것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가면의 나라이지만 정작 시인은 화자에게 탈을 씌우지 않는다. 그만큼 포장하지 않고 형상화한다.
타자와의 거리를 인정하고 이 사이에 파생하는 난제를 고려하면 고정관념이 없어야 한다. 세상은 편견과 아집이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우리는 선을 긋고 나와 타자를 구별이라는 명목 아래 차별해왔다. 이런 틀 안에서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며 상투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시인은 경계를 허물기 위해 새로운 발상으로 접근한다. 공존을 시도하는 발자국이 시집에 찍혀 있다.
시인의 촉수는 “장미”, “맨드라미”, “능소화”, “도마뱀”, “풍뎅이” 같은 동식물 생명체를 비롯하여 “11월”, “지중해”, “외가” 등의 계절이나 공간 같은 무정물 심지어 “홀소리”도 시적인 장치로 활용한다. 일상의 예민한 감각을 신선한 언어로 배치한 다음에 대구나 대조의 방법으로 구조화하는 특장을 보인다. 시집의 맨처음에 실린「꽃사과를 보러 갔다」에서 “꽃을 사칭한 열매”와 “열매를 차용한 꽃” 사이를 배회하는 “나무”의 관점은 이번 시집을 관통한다.「에코」에서도 마찬가지로 대구를 이룬다.
입이 없는 것들의 귓속에
따옴표 속 느낌표로
오소소
돋아나는 혓바늘
귀가 없는 것들의 입속에
괄호 속 말줄임표로
점점이
피어나는 귓바퀴
-「에코」전문
1연과 2연이 마주보며 대응한다. 행간에 떠도는 소문이란 이렇듯 평범한 듯 비범한 언어의 긴장으로부터 태어난다. 이 시의 정황은 불편하다. 불화 속에서 얼마나 환멸을 부를 것인가. 대구가 반복되며 통사적 특질로 자리매김이 되는 시이다. 섬세한 언어 감각을 확보한 언어유희는 구조적으로도 눈에 띈다. 음상과 의미의 차이를 앞뒤로 배열하여 효과를 증폭하고 있다. 언어의 소리와 뜻의 차이에서 오는 촌철살인은 성찰의 계기로 이어진다. 이인원의 이번 시집은 정치나 역사와 관련된 거대 담론을 다루기보다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 갈등이 주로 등장한다.
나아가화려하고 현학적인 세태나 경향으로부터 언어를 엄하게 다룬다. 예컨대「지중해」에서는 “햇볕”과 “햇살”과 “햇빛”이라는 시어가 제각각 등장한다.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인 “햇볕”과 ‘해가 쏟아내는 광선’을 나타내는 “햇살”과 ‘해가 비추는 빛’은 간과할 정도로 비슷하나 엄격히 구분하여 쓰고 있다. 그만큼 시인은 언어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하고 감각적으로 접근한다. 1연에서 “어제 쏟아져 내렸던 햇볕과/ 오늘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내일 쏟아져 내릴 햇빛을/ 골고루 혼합한 거대한 저 황금 붓”이 4연에 이르면 “장미에 쏟아져 내렸던 햇볕과/ 부겐베리아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유도화에 쏟아져 내릴 햇빛을/ 골고루 반죽한 파스타 접시가 놓인 야외 식탁을 지나”에서 보듯이 서사적 진술을 아낀다. “햇볕-햇살-햇빛”으로 이어지는 핵심 소재를 변주하면서 이국에서의 체험을 새로운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표면장력」은 “내가 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순간에//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는 순간에// 뜨거운 심장에 차가운 눈물 똑, 떨어지는 순간에”가 전문이다. 표면장력은 외부의 다른 조건들과 경계를 만들면서 내면에 최대한 집중하는 힘이다. 짧은 시이지만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거나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어야 해서 아주 절실하다. 간절함은 의미를 운운하기 이전에 원초적인 감각이 먼저 발동하게 된다.
「홀소리들」연작 5편은 한글 생성의 원리에서 착안한 시편들이다. 홀소리는 주지하듯 폐쇄나 마찰의 장애를 거치지 않은 소리이다. 고유한 발음기관에서 발생한 소리가 방해 없이 성대와 만나 이루어지는 면에서 홀소리는 고유의 감각을 궁리하는 시인의 관심과 부합한다. ‘ㅏ,ㅑ’를 발음 그대로 감탄사처럼 받아들이고 상상력이 뻗어간다. ‘ㅗ, ㅛ’는 “잠자리 겹눈으로 본 한낮의 풍경”과 “으름밤나방 겹눈으로 본 한밤의 풍경”으로 볼 수 있고 발상이 흥미롭다. 홀소리 연작은 이렇듯 감각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로 작동하며 개성이 있다.
홀소리는 그 자체로 기능을 한다. 닿소리를 만나는 과정은 어쩌면 의도성이 개입되는 것과 비슷하다. 단어가 되고 의미가 생성되기도 하지만 홀소리의 입장으로 보면 그냥 독창성을 지닌 상형이다. 음가에 대한 홀소리 연작이 영롱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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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 :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청동울음>, <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스프링시학>, <다양성의 시>, <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 상명대 강사, wing28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