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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1)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는?
문 : 바다낚시를 나갔다가 참변을 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악성 댓글을 달지 말아 달라고 하소연하는 사연이 알려졌습니다. 마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놀러 나갔다가 죽은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악성 댓글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마음에 상처가 더 커진 것입니다. 악성 댓글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도 악성 댓글은 줄어들지 않고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자기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회에서 사람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시간이 가면서 고인 물처럼 썩어들어 더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누리려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과 배려심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감정에 치우친 표현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심리적 살상을 가하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래서 “악성 댓글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살인범에 따르는 처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상처를 받건 말건 자살하건 말건 악의에 찬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그 마음이 지옥 같다’고 합니다. 흔히 심리 상담가들은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을 해서 사람들 마음을 안정시켜 주지만,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들, 열등감, 상처, 그밖의 다른 심리적 문제로 마음 상태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지옥처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런 심리 상태는 연쇄 살인범, 특히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유사합니다. 길을 가다 행복하게 웃는 가정을 보고 ‘나는 불행한데 너희는 왜 그렇게 시시덕거려’ 하는 분노 때문에 한 가정을 몰살시키는 살인범 심리나 마찬가지란 것이지요.
악성 댓글을 다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정의롭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는 병적인 자의식으로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감은 사실은 본인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병적인 정의감’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운 것에 대한 분노를 외부에 투사하기 위해 악성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렇게 악성 댓글을 달고 그 결과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아 팽창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범죄자들이 방송에 자신이 나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와 유사한 심리입니다. 그래서 멈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데에 온 힘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노인분들, 현직에서 물러난 분들이 모여 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악성 댓글은 그보다 더 악성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하는 범죄 행위로 진화해서 더는 사람의 영역이 아닌 영적 영역, 악의 영역까지 다다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따라가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물을 거스르듯이 기도하고 선행하려는 것인데 그런 자기 성향을 막기는커녕 부추긴다면, 그 영혼은 돌아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 위험이 크니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노리는 자들이 항상 곁에 있음을 생각하시고 다른 사람들 해코지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이 자기 영혼을 위해 유익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세상의 법칙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내가 던진 칼은 언젠가는 나의 목을 노리고 돌아옵니다. 감정 해소를 위한 댓글은 자신의 인생을 망칩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2) 새해를 맞아
이번 호에서는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신부님들께 인사말을 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서울대교구 사제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일정을 미루다 보니 막차를 타게 된 것이지요. 의정부 한마음청소년수련원으로 피정을 들어가면서 혹 나 혼자 피정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바쁜 성탄시기에 누가 들어올까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피정 장소를 가보니 기우였습니다. 여러 신부님이 막차를 타고 들어오셨더군요. 더 반가운 것은 대부분의 신부님이 그야말로 가기 싫어하는 곳에서 사목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빈민사목 같은. 그분들을 보면서 반갑기도 하고 너무 오래 현장에서 사목하시는 것이 걱정되기도 해서 강론 때 노파심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이번에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냉담 신부였습니다. 심지어 ‘사제가 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회의적인 마음을 가지기도 했던 패배자 신부였습니다. 그런 제가 심리 상담을 공부하면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사제들이야말로 이 사회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앞날이 안 보이는 막막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마치 고아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등대처럼, 등불처럼 길을 비춰주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저는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사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살기에 성질은 괴팍할지 몰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사제들은 보상에 상관없이 주님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돈을 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즈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사람들이 종교계 안에도 생기고 있는데, 사제들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분들이 많으니 삶이 힘겨운 분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됩니다. 사제들은 말 그대로 귀신 아비, ‘신부(神父)’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아버지의 자리를 갖는 사람들이니 외롭고 힘겨운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제 중에 아픈 분들이 늘어나서 걱정입니다. 왜 병이 나는가? 혹자는 마누라 없이 혼자 살아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부들의 대부분은 일 중독자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늘 머릿속에서 본당 일이 떠나지 않는 사제들이 대부분이란 것입니다.
또 사서 고생하는 사제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도 혼자 무언가 하려고 기를 쓰다가 진이 빠지고 일이 버거워서 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든 신부님들, 병이 나기 직전인 신부님들께 조언을 드립니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사목도 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건강해야 교우분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도 중요하지만, 함께 어울리고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마음의 힘을 키우고 병을 고치는 데에 사람들과 어울려서 즐겁게 보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놀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대화하는 삶이 사람을 훨씬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3)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문 : 작은 본당의 주임 신부입니다. 첫 주임이어서 나름 열의를 갖고 사목을 하려는데 강론이 갈수록 힘이 듭니다. 강론하고 나면 교우분들이 ‘오늘 강론은 누구누구 들으라고 한 말’이라고 소문을 내서 난감하기만 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 본당 신부가 어떤 사람들은 미워하고 어떤 사람들만 편애한다며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려서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 : 강론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누구라도 힘이 들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작은 본당일수록 그리고 유동 인구가 적은 곳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위 이웃집의 숟가락과 젓가락 숫자까지 다 아는 그런 곳일수록 본당 신부가 하는 말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민감한 것인가?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건강한 아이들은 부모에게 독립을 하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독립 의지는 더 강해져서 차차 어른으로 자리를 잡아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숙해간다고 말하지요. 심리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라도 받아들이고 설령 나와 반대되는 의견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물론 본당 신부의 강론 역시 누구를 지적해서 하는 말이라는 식의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마치 음식 맛을 보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편식하지 않고 여러 가지 맛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처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극도로 예민해서 내용을 음미하기보다 ‘저 말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지칩니다.
어떤 본당 신부님이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있습니다. 처음 간 본당에서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신자분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왔답니다. 본당 신부는 떡 벌어지게 차려진 음식상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서 맛있게 먹는데, 웬일인지 신자분들이 같이 식사하지 않고 자기가 먹는 것만 바라보는데 표정들이 야릇하더랍니다. 왜 그러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묘한 소문이 나더랍니다. 새로 온 본당 신부가 누구 음식은 싫어하고 누구 음식만 먹더라 하는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신자들이 자기가 가져온 접시 아랫면에 이름을 적어놓고 본당 신부가 누구 것을 먹는지 관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그 본당 신부는 절대로 식사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신자들도 굳이 초대를 하지 않더랍니다.
이런 비슷한 현상이 있으면 사목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이런 때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아무리 문제를 이야기해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고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문제를 이야기하면 또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그런 사람들을 상처가 심한 아이처럼 대해줘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하면 또 다른 말들이 나오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돌봐줘야 합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 중에서 신부님의 마음을 흔들려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비난하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기도하고 조용한 태도를 유지하면 맥이 풀려서 그런 공격적인 행동을 덜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아주 집요하게 본당 신부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가진 오래된 병적인 콤플렉스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니, 좀 더 멀리 거리를 두고 안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조언을 하면 가끔 착한 신부님들이 주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살라고 하시지 않으셨느냐고 반문하시는데, 그 경우는 어미 양을 잃고 길을 헤매는 어린양의 경우이고, 본당의 경우는 성격 장애를 지닌 이들의 경우이니 대응 방법이 같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하더라도 성격 장애를 앓는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밥 먹듯이 하니 거리를 두고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4) 미얀마 사태와 수치 여사
문 : 평소에 미얀마의 수치 여사를 존경해온 사람입니다. 미얀마의 오랜 군부독재 정권과 각을 세우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수치 여사가 대단한 사람이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인데, 최근 로힝야족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이 큽니다. 미얀마 민주화의 화신이라는 수치 여사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또 순한 불교 국가인 미얀마 사람들이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답 : 수치 여사의 대응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드셉니다. 심지어 노벨상을 박탈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수치 여사가 왜 그런 대응을 하는지에 대한 사회심리학자들의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얀마는 오랫동안 군부가 통치를 해왔는데 우리나라 군부독재 시절처럼 군부가 나라의 모든 것을 다 장악해왔습니다. 군부에 대한 비판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론을 심하게 통제하고 심지어 군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질게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군부에 수치 여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제거도 못 하고 연금해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해 수치 여사와 일종의 협상을 한 것이지요. 마치 미얀마가 민주화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미얀마의 민주화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다가 로힝야족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로힝야족은 언론에서 말하듯이 미얀마와는 심리적 적대 관계인 사람들입니다. 영국을 대신해 미얀마를 통치하면서 미얀마 국민들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준 사람들입니다. 지금 미얀마 사람들이 로힝야족을 살상하는 이면에는 이런 오랜 적개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미얀마 군부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전략적으로 부추기고 있습니다. 군부가 저지르는 이런 살상행위 뒤에는 면밀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우선 자신들이 애국자인양 하는 것입니다. 국민은 평소에는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가질지라도 외부의 적이 생기면 정부가 마치 국민들을 위한 정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때 정부는 애국심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비리와 부패를 감추고 비판 세력에게 억압과 통제를 가합니다.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에는 군부의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영악한 계산이 깔렸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치 여사의 입장은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침묵을 지키자니 국제적인 여론의 비판을 받아야 하고, 군부의 살상행위를 비판하자니 군부로부터 로힝야족을 편드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친일파적인 부류로 몰려 겨우 이룬 민주화의 작은 싹마저 다시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 사람들은 누군가 희생양을 원하는 집단심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닌 그냥 화풀이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의 집단심리입니다. 미얀마 군부는 이런 현상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겨우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중이지만, 언제라도 우리 역시 미얀마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위안부 문제나 강제노역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처럼 우리 역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는지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기 성찰이 충분하지 않을 때 로힝야족처럼 부모세대의 잘못 때문에 애꿎은 후손들이 피해를 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할 필요가 있음을 미얀마 사태를 통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역사 의식이 없이 살면 결국 영악한 자들에게 농락당하고 이용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기나긴 세월에 겨우 마침표를 찍은 우리 입장에서는 미얀마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또, 미얀마 불교를 보면서 종교는 아편인가 하는 마르크스의 물음이 아직도 뼈아픈 질문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5) 사람이란 존재는…
문 : 언론 보도를 통해 흉악범죄들을 접할 때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고 세상 살기 두렵다는 마음만 듭니다. 이런 세상을 두고 종교인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종교인들이 정신없는 사람들이거나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렇게 무법천지인 사회는 오로지 강한 경찰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어쨌거나 요즈음은 길을 가다가도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밤에는 아예 외출조차 하지 않습니다. 언제쯤 이런 세상이 끝이 날까요?
답 : 형제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범죄행각을 보면 사람들은 더 강한 경찰력으로 통제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느낍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의 예를 들면서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무자비한 경찰력을 동원하는 덕에 범죄율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런 외적인 통제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아’들을 교도소에 보내면 다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일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그래서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발붙일 곳을 없애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악마성’도 있지만 ‘천사성’도 같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어린 시절부터 방치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 안의 악마성이 더 커져서 소위 반사회적 성격장애인이 돼 분노 범죄를 비롯한 미성숙한 범죄 행위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이런 악마성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마음 안에 불안감이 조성되고, 심지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서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가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통제 사회가 가지는 한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바로 이 말씀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선행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도 암환자이면서 다른 암환자를 위한 기금을 모은 청년이라든가, 중병에 걸린 어린아이가 노숙자들에게 줄 빵을 만들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금을 모은 이야기 등의 사연들은 주위 사람들 마음 안의 천사성을 자극해서 많은 기부금을 모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행한 작은 선행이 사람들 마음 안의 선한 마음을 다시 타오르게 했고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구나’ 하는 희망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어떤 혁명보다도 강하고 절실하고 현실적인 혁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문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장 정치적인 문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어떻게 들으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다가 자기 생명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님의 말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르침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본인도 행복합니다. 주님은 행복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유명인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26 · 끝) 영성 심리의 이득
‘영성 심리를 공부하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선 영성 심리의 개념부터 말하자면, 일반 상담심리가 상담가와 내담자의 일 대 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반면 영성 심리는 상담가와 내담자가 하느님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심리적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것이 다릅니다. 영성 심리는 일반 상담에선 알 수 없는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문제들과 영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득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영역과 심리적인 영역 그리고 신체적인 영역이 균형을 이룰 때 가장 건강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릴 경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성 심리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위한 지침을 알려주는 중요한 공부입니다.
두 번째는 영성 심리를 통해 더 깊은 자기 통찰을 할 수 있습니다. 영성 심리에서는 자기 문제를 보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만 봐서는 절대로 꼬인 상황을 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담자들이 자기 문제를 보도록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러나 자기 문제를 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남의 탓을 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성 심리상담은 수도자처럼 자기 자신을 보는 과정으로 이끌기에 신앙생활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심화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죄를 성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더 깊은 자기탐색이기에 신앙인들에게 아주 유용합니다.
세 번째 이득은 영성 심리는 신앙인의 마음에 힘과 자유로움을 줍니다. 대체로 독실한 신앙인 중에서 병적인 죄책감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병적인 죄책감은 독성과 같은 심각한 수치심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병적인 신앙생활을 조장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합니다. 영성 심리상담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신앙인들이 꼭 공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강의한 초기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욕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러길 벌써 20여 년. 지금은 많은 분이 격려해주시고 같이 공부하는 사제, 수도자 신자분들이 생겨서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고 계십니다. 몇 명 안 되는 인원으로 시작한 저의 상담 카페(cafe.daum.net/withdoban) 회원은 1만 1000명을 넘겼고, 국내외 많은 분이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를 하고 계셔서 제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어쩌나?’ 마지막 회를 쓰면서 그동안 지면을 내어주고 지원해주신 가톨릭평화신문, 특히 제 칼럼을 한결같이 밀어준 ‘아! 어쩌나’ 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전국지에 얼굴이 실리고 공영방송에 출연해 가톨릭교회의 영성 상담심리를 알리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이 제가 주임으로 있던 가재울성당 재개발 문제와 맞물려 몹시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님과 성모님께서 이끌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성모님 이야기로 마무리하지요. 재개발 당시 성당마저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자들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불안할 때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언뜻 떠오른 생각 하나는 성당에 성모님의 대형 초상화를 붙여 사람들에게 여기에 성당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성모님 플래카드를 붙이고 매일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조합 측에서 성모님 플래카드를 떼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이유는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무섭다는 것인가 하고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성모님 얼굴이 화가 난 얼굴처럼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 도둑놈들아 너희가 하는 짓에 성모님이 화가 나신 거다’ 하고는 협상이 종결될 때까지 플래카드가 찢어지면 갈아서 붙이고 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가재울성당은 성모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당신이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배운 것이 가재울성당 재개발 현장이었고 그곳에서 영성 상담심리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공부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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