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전주한옥마을,송광사 탐방기 보견회 2014 봄 유적탐방기 2014.5.1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여객선 침몰 대형사고로 수백명의 인명을 앗아간 올해의 4월은 온 국민이 우울증에 시달려야 할 지경이다. 보견회 행사를 과연 집행할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여러 곳에 자문을 해보니 음주가무의 소풍놀 이가 아니라 건전한 야외수업 성격의 탐구적인 행사로 무관하다는 최종 판단을 하고 전 회원께 공지했다. 이번 행사에는 종전의 25인승 미니버스가 아니라 28인승 고급 리무진버스로 대채했 다. 장거리 여행에 좌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원 중 16명이 참가하고 비회원중 8명이 추가로 참가하여 모두 24명이 동행했다. 이 중에는 대구의 박대원동문은 전날 서울까지 와서 동참하는 열의를 보였다. 서초동 교대역에서 7시반에 모이기로 했으나 전원이 일찍 도착하여 예정시간보 다 앞당겨 출발- 죽전간이정류장에서 필자를 비롯한 5명이 합승하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대한민국의 아픔을 뒤로 한채 일로 김제를 향햐 달린다. 고속도로 주변 산하는 언제나처럼 푸른 녹색의 봄을 발산하고 있었다. 모처럼 모인 친구들- 밤잠도 설쳤을텐데 얘기가 끝이 없다. 회장 인사말을 하라기에 우선 이번 사고로 숨진 어린학생들과 승객들을 위한 묵념시간을 가졌 다. 그리고 정규회원 이외 참가한 7명과 대구의 박대원동문 들께 일일이 호명하면서 환영의 박 수를 보냈다. 오늘 스케쥴을 알렸다. 먼저 찾을 곳은 김제의 금산사이다. 백제시대의 대사찰로 미륵전을 비롯 굽보.보물이 많은 절이다. 다음은 전주로 가서 향토 먹거리 전주비빔밥을 먹고 전주 한옥마을을 두시간 가량 관광하고 완주로 가서 송광사를 답사키로 했다. 필자가 다녀본 유적지 중에서 일반에게는 별로 알려지지않은 송광사를 추가시켰다. 분명 실망 치는 않을 것으로 여겨서였다. 김민효 사무총장이 아침김밥과 음료,과일,과자류,맥주,소주,간식 거리를 완벽하게 준비하여 오고 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봉사정신이 투철한 진정한 리더 이다. 세곳에 미리 문화해설을 하도록 사전에 준비했다. 전주에서부터 완주까지 안내와 식당섭 외까지 김총장의 아랫동서 친구분이 현지에서 맡아주어 한결 편하게 진행되었다. (1)김제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
금산사에 도착했다. 원래 주차장에서 금산사까지 절 앞 가게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사전에 연락 하여 금산사 안쪽 주차장까지 타고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도 냇물을 따라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해설사와는 보제루에서 만나기로 했다. 절 경내로 들어가는 경계에 홍예문이 서있다. 홍예뭄 위 누각에는 개화문(開化門)이라는 편액의 글씨가 써있는데 송월주 스님의 글씨이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차도 옆 자연탐방로를 따라 가니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이 예사롭지 않다. 기둥이 엄청굵고 얹힌 기와 규모도 보통크기가 아니다. 현판에는 母岳山 金山寺라는 편액글씨가 돋보인다. 서예가 一中 김충현 선생의 글씨이다. 두 금강장사가 지키는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선다. 네명의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잡신 과 악귀의 출입을 막고 서 있다. 금산사는 역사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압권이다. 보제루에서 여자 해설사를 만났다. 마침 아침 예불시간이라 마이크 사용을 못한다며 자그마한 키에 우스개를 섞어가며 어젯밤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술마시고 노래를 너무 불러 목이 갔다며 느스레를 떤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진다. 금산사는 모악산(母岳山)을 배경으로 한다. 해발 794m의 모악산은 아기를 안은 엄마형상이라는 모습으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금산사는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이 내탕금을 내 려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신라 36대 혜공왕 2년에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려는 1500여 승병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재난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정유재란때 왜군들의 보복으로 장엄했던 80여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선조 31년 수문대사와 15분의 대덕스님들이 복원 불사를 시작,35년만인 인조 13년(1635년)에 5여래 6보살을 모신 대적광전과 39척의 미륵불을 모 신 미륵전 등 대사구지역만 낙성을 보았다. 고종 광무초에 주지 용명화상은 광산에 미쳐 사리탑 지를 훼손하려는 광부들에 의해 순교하였다. 금산사는 오랜 역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물을 지닌 사찰로 국보1점,보물 11점을 보유하고 있다. 보제루를 지나 미륵전과 본당인 대적광전 앞 마당을 보니 그 규모가 엄청 넓다. 가람 배치도로 봐서 우측에 자리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은 3층건물인데 법당안은 한층 통으 로 뚤려 있다. 1층에는"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 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 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해설사의 도움으로 미륵전 내부와 지하층을 둘러 보았다. 안을 들여다 보면 또한번 놀란다.어마어마한 크기의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다.미륵전 미륵삼존 불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이며, 가운데 주불이 11.82m, 좌우 보불은 8.8m가 된다. 주불이 키가 더 큰 이유는, 주불의 아래에는 연화대를 놓았지만 옆의 두 분의 보불에는 연화대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로 배치됨으로써 ‘삼존불이 봉안된 모습’이 ‘뫼 산(山)자 형태’ 를 이루고 있다. 미륵전 앞 중앙마당에 있는 보리수나무로 모였다. 보리수나무는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면 이 열 매가 스님의 염주가 된다. 염주로 염불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복을 부르는 신비한 영험까지 얻게 된다. 보리수 나무 잎에 냄새를 맡아보니 향이 짙었다. 또 미륵전 바로앞 우측에 고목의 산사나무가 있다. 수명이 다 되어가는 산사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하얀꽃이 피어 있다. 가을이 되면 새빨간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언젠가는 생을 다하고 사라질 것에 대비해 새끼 산사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한다. 화엄경에 근거를 둔다하여 화엄 전,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하여 비로전으로 불린다. 현재 건물은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 건물이 전소하고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오여래(약사래불,노사나불, 비로자나불,석가모니불,아미타불)과 육보살(월광,일광,문수,보현,관음,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금산사는 국보급 보물이 많다. 위에 설명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보물 제476호인 대적광전 외에 보물급 전각과 탑을 소개한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 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 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26호 방등계단-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 1기가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 도라고 부른다. 육각다층석탑-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 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 적 석탑이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 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 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석등-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 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그외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 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석련대(石蓮臺)-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 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 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장전(大藏殿)-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 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 하면서 세워졌다.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 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 대장전 내 석가모니불 후불광배의 조각이 정교 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북강삼층석탑(보물 제29호)-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 며, 전체적으로 신라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 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정방형이다.
아름다운 여러 전각들을 살펴보고 송대라 부르는 방등계단으로 올라섰다.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이 계단의 중앙에 부도 1기가 있다. 모양에 따라 석종형부도라 부른다. 방등계단 옆에는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각으로 불상이 없 다. 적멸보궁안을 보니 부도 있는 쪽으로 창문이 뚤려 있고 신도들은 그 쪽 진신사리 방향을 향 해 기도를 올린다.높은 계단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산사 사찰 경내가 너무나 넓고 아름답다. 대적광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겼다.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오면서 아름답고 규모가 큰 금산사 경내를 뒤돌아 본다. 그리고 진입로 입구의 龍華宗札 彌勒聖地라는 돌에 새 겨진 입간판을 보면서 새삼 미륵도량의 근본도량임을 느끼게 한다. (2)전주한옥마을 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한다. 전주 한옥마을 전동성당 인근에 있는 종로회관이라는 식당으로 갔 다. 전주의 전주비빔밥이 주 메뉴이다. 맥주,소주,막걸리 각기 취향대로 잔을 들고 안전과 즐거 운 답사여행을 위한 건배를 하였다. 이날 중식은 장세원 회원이 스폰서 해 주었다. 식사를 끝 내고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터인 전동성당으로 갔다. 성당 앞에서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남한 3대성당으로 명동성당 내부공사를 마무 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3년이 걸려 완공한 대 역사의 성당이다. 땅구입에 17년이 걸렸으니 모두 40년만인 1931년에 완공된 한강 이남에서 가 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고딕양식에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을 도입한 아름다운 건 축물이다. 해설사는 성당 외곽의 벽돌무늬가 모두 다르다는 점도 강조한다. 한옥마을을 오면 필수 코스가 경기전(慶基殿)과 어진박물관이다.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창건 되었다.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높이가 9m이고 살이 양쪽 7개개씩 하늘을 향해 꽂혀 있다. 그중 하나가 부러져 있었는데 처녀귀신이 공중부양으로 들어가다 살이 하나 부러지면서 막았다나?믿거나 말거나. 문이 3개인데 홍살문 외에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경기전 정전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 하마비를 떠받치는 동물은 사자인데 두마리이다. 당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마를 해야 하는 곳이다. 입구 기둥에는 밑둥에 흰 회칠을 하였는 데 이 또한 뜻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현실적인 방법론으로 쓰였는데 벌레들이 올라오지 못하도 록 방충 역할을 했다는 점이고 다음은 흰 회칠은 구름으로 표현된것으로 구름 위의 사당을 표현 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선을 끈 나무가 있었다. 땅에 붙었다고 할 정도로 휘어진 매화 나무였다. 나무나이가 100년이나 되었다는데 전주사고가 있는 쪽을 향해 마치 절을 하는 모습이 다. 누운 매화 즉 와매라고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그래서 호학나무(好學木)로 불리기도 한다. 조금 더 안쪽에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었다. 조선조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이 다. 이조실록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개국에서 멸망할 때까지 모든 왕들의 일기 가 적혀있고 업적과 과실이 모두 실려져 있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유산임 에 틀림없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모두 11개의 세계기록유산을 가진데 비해 일본 은 단 한개라고--대국 중국이 5개라니 우리나라도 대단한 문화대국으로 자부하고 싶다. 전주사고를 2층까지 들어가서 구경하였다. 경기전 정전인 어진 박물관으로 갔다. 어진이란 왕 의 초상화를 말하는 것으로 태조에서 철종 때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영조,철종 어진 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실제 모습이 아니고 추정해서 그린 것으로 국 가에서 공인한 표준 영정이다. 고종과 순종 어진은 사진을 보고 모사한 것이다. 태조어진은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했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태조어진을 보면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의 전신상 어진이다. 다른 임금이 모두 붉은 청룡포인데 비해 태조는 푸른 청룡포가 다르다.(고종황제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뀌어 황색 청룡포를 입게 되었다) 수염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린 점은 놀랄만하다. 특히 우측 눈위의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다. 어진을 한양에서 이곳 전주로 옮겨오는 과정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 다.무려 708일이 걸려 이곳 전주까지 가마로 360여명이 동원 되었다 한다. 당시의 가마도 전시 되어 있었다. 경기관을 나와 전주한옥마을 큰 거리를 산보했다. 보도블록에 검고 흰 색갈이 다 른 것이 보였는데 이 줄이 성터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최명희 문학관과 최명희길도 보인다. 소설 혼불로 유명한 문학인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손자이신 이석 황손의 집인 승광제(承光 齊)는 시간이 없어 생략했다.. 이석황손은 가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다. 곧장 전주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오목대(梧木臺)로 갔다. 고려 우왕 6년 (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머물렀던 곳이다. 그후 태조가 머 물렀다는 뜻으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畢遺趾)"라는 비문을 고종황제가 친필 로 쓰고 비각을 광무4년에 세웠다. 이성계는 승전가를 부르며 개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 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베풀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 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 이성계는 대풍가를 통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천하재패의 꿈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다라고는 하나 과연? 오목대에 올라 우리와 동행하면서 안내한 안내한 사장이 준비한 차를 마시는 시간 을 가졌다. 그는 이곳 다도회 회장이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바삐 다니는 중에 이런 여유 시간 을 가지는 것도 꼭 필요한 것 같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 시간이 없어 이목대는 생략했 다. 구름다리를 건너 이목대가 있다. 이목대는 시조 이한(李翰)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으로 발이산(發李山)자락이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이 곳에서 태어나 진법놀이를 하며 자란 곳이다. 목조는 당시 전주부사와의 불 화로 함경도로 옮겨갔다.이것이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하늘 의 뜻으로 여겼다.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3장에 묘사되어 있다. 건물은 없고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의 문구를 새긴 비석과 비각이 서 있다 다리가 아파 쳐진 친구들과 전화교신 끝에 오목대입구에서 만났다. 버스로 마지막 목적지 완주 의 송광사로 향했다. (3)완주 송광사 늘 그러하듯 욕심을 내어 한곳 더보자고 한 곳이 송광사이다. 완주 송광사는 다녀본 사람이 적다 필자도 몇년전 이곳을 다녀오고부터 전주쪽 여행시에는 이곳을 들른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차로 40분정도 걸린다. 송광사로 가는 길에서 본 왕고참 벗나무 터널은 벚꽃이 만발할 때는 정말 대단 하리라 생각된다. 사장이 승용차로 선도하면서 송광사에 도착했다. 해설사가 결국 무산되고 스님이 해설을 맡았다.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평왕 5년 (583)이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 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 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 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에 전주사고 (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 량이다. 송광사 일주문을 들어섰다. 대문을 달아놓은 특이한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 있 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 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었다. 사찰에는 가람과 불법수호를 위해 금강문이나 천왕문을 두고 있다. 송광사는 금강문에 이어 천 왕문도 연이어 서있다. 다포식 팔작지붕 모양을 한 금강문에는 那羅延金剛장사(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어 아금강이라함)과 密蹟金剛(흠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 흠금강이라함)의 두 장사가 문을 지키고 있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 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동,서,남,북의 네 곳을 지키 게 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指國天王),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남쪽을 수호 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의 四大天王이 험상궂은 얼굴로 천왕문을 지키고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바로 亞字형 종루(鐘樓)(보물 1244호)이다. 亞字형 종루는 이곳 송광사 종루가 국내 유일한 것이라 한다. 종루의 모양이 특이하고 아름 다워 계속 시선이 간다. 종루 안에는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범종(凡鐘)을 가운데 두고 땅위 의 네발짐승을 제도하는 북(鼓),물속의 생명체를 위한 목어(木魚),날짐승을 위한 운판(雲板)이 걸려 있다. 법당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여늬 절과 달리 대웅전 앞뜰에 탑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탑신앙이었으나, 탑대신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5칸의 다포식 배흘림기둥의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았다. 부처 세분을 모셨는데 흙으로 구운 소조좌상(塑造坐像)(보물제1274호)이다. 소조좌불로는 국내 최대 크기(5.4m)라고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약사여래불,아미타여래불의 삼세불 (전,현,미래)이며, 원래는 2층의 건물이었다 한다. 부처님 점안식에 진묵대사가 참가했다고 전한다. 불상 복장에서는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봉림대군 두 왕세자의 무사귀국을 비는 발원 문이 나왔다고 한다. 이 좌불들은 국가 위기 때 땀을 흘렸다 하여 유명하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한국민중예술과 불교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한국최고의 아름다운 천장벽화이다. 천장벽화는 대웅전 네벽면에 그림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어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대웅전 또한 보물(제 1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와 16위의 나한 그리고 후면에 500나한을 모시고 있는 나한전에 들렀다.나한전에서 불공기도를 하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하여 유명하다. 진묵대사께서 아들 득남을 기원 하는 불공을 드리는 어느 여인을 위해 나한을 때리며 "한철 살고 와" 했다고 한다. 과연 나한이 그집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 명부전, 삼성각을 둘러 보았다. 특히 지장전의 크기에 모두들 놀랐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 으로 국내 최대의 규모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배치하고 있으며 이 밖에 시왕(十王)과 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시왕은 저승의 십대왕을 지칭하는데 중생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죄를 이들 앞에서 심판받게 된다. 염라대왕(제오대왕)도 보인다. 지장보살은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스스로 성불하지 않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도록 교화하시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사월초파일을 앞둔 송광사는 높은 점등탑을 세우고 광명의 불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님의 본전과 각 전각마다 친절한 해설을 듣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오늘의 탐방행사를 모두 마치는 순간이다. 이제 저녁 식사를 이곳 완주에서 하고 상경할 계획이다. 완주 화심리에 위치한 '윤가네순두부"집으로 안내되었다. 사무총장이 미리 메뉴를 보고 주문 을 해 두었다. 이집 메뉴를 골고루 섞어서 준비한 석식으로 만찬을 겸했다. 이날 석식은 순서 에 의해 장극두 회원이 스폰서 해주었다. 점심(장세원)과 저녁(장극두) 두 장씨의 후원으로 전라도 향토음식의 맛여행까지 즐길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회장과 사무총장이 마이크를 잡고 협조해주신 회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침 이훈 동문과 고재화 동문이 입회비를 내고 정식회원으로 가입이 되었다. 환영의 박수를 받았다. 이제 정회원이 24명으로 늘었다.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잘 이끌어가 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긴다. 회원님들께 거듭 감사를 드리며 다음달 행사에서 만나뵙기를 바라며 장편의 대 탐방기를 모두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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