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빼어난 연기자나 가수, 스포츠 선수들이 언론과 인터뷰할 때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실력으로 승부할래요.” 드라마나 영화, 노래, 혹은 운동경기 그 자체를 보고 평가하기보다 주인공의 외모에 더 관심을 두는 팬들의 성화를 지적하는 말이다. 겉치레로 하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타고난 신체가 아니라 땀 흘려 이룬 성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다.
대학 교수는 어떨까. 학문은 인기를 좇는 영역이 아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수려한 외모는 불리하게 작용할 때도 있다. 얼굴 잘 생긴 학자, 탤런트 같은 교수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영화속의 멋있는 학자는 작은 키에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뭔가 허술해보이지만 놀라운 예지력을 가진 사람일 뿐 장동건 같은 외모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외모와 학문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지만 전문성이 뛰어난 학자는 외모가 뛰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서울대 조국 교수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부담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최근 트위터를 시작한 조 교수에게 일어난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신간 <지리산 행복학교>로 또 한번 인기를 끌고 있는 공지영 작가가 조 교수의 트위터 입성을 환영하면서 “제가 떤 사람이 안성기씨 다음으로 조국 샘인데…에잇 잘 생긴 남자에게 떨어야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장난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에 <불멸의 신성가족>의 저자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헉, 공샘까지 이러시면 곤란하죠”라며 “며칠 전 인권위 친구가 ‘조국 교수님은 자기 외모가 오히려 부담이라고 해요’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차라리 이재용씨 보고 아버지 돈이 부담이라고 해’라고요”라고 응답했다. 절친한 사람들끼리 격의없이 나누는 농담이지만 조 교수의 ‘미남본색’을 새삼 상기시켜준 일이다.
본인이 결코 유쾌해하지 않을 외모 이야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그와 대면하는 순간 받은 첫 느낌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가 대중앞에 선다면 외모에서 주는 부드러운 이미지만으로도 뜨거운 바람을 일으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얼마전 조 교수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와 나눈 대담을 정리해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오 기자는 조 교수와 7개월 동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조 교수가 “권력의지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의지가 정치인의 집권욕구와는 사뭇 다른 의미라는 사족이 붙어있지만,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조 교수가 모종의 역할을 할 의지가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 셈이다. “언론 노출이 너무 심하면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며 손사래치는 조 교수를 설득해 인터뷰하게 된 것은 그 권력의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11월26일,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나의 첫 질문은 몸(身)에 관한 것이었다. 얼굴생김은 신문에 종종 실리는 사진으로 꽤 알려져 있지만 신장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실례지만 키가 얼마입니까.
“180㎝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한번 야유를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키도 크다 이거지? 하는. 대학 때부터 외모 얘기만 나오면 저는 뭐라 말해도 얻어터지게 돼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용모를 타고났잖아요. 젊은 시절 여난(女難)도 많았겠습니다.
“제가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는데요, 내 활동이나 생각에는 관심이 없고 외모에만 관심을 두는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는데 자꾸 반복되니까 힘들어집디다. 선배들이 저보고 ‘너는 너무 눈에 띄어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요. 경찰의 검문검색에 걸리기 딱 좋다는 거예요. 또 제가 이국적이고 도회적 분위기여서 당시 활발하던 농활이나 빈민활동에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그때문에 갈등을 많이 했죠. 나중에 받아들였습니다. 어떡하겠습니까. 성형수술을 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기왕 이럴 바엔 외모를 활용하자고 생각하게 됐죠.”
-외모를 활용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나의 외모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 내가 쓴 글을 안 읽고 그냥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내 생각을 전달하자는 거죠. 운동이라는 게 사회적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건데, 대중 민주주의에서는 대중의 변화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저와 아무 인연이 없지만 외모에 호감을 가진 대중들이 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생각까지 바꾸게 된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이렇게 듣고보면 그에게도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셈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으로 규정해놓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의 진보를 위해 참여하고 활동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자 도리라고 그는 믿는다. 교수, 특히 서울대 교수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트위터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지식인으로서 필요한 목소리를 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엊그제 리영희 선생이 타계했을 때 “리 선생은 70~80년대 이성의 무기를 들고 수많은 우상과 싸우셨고, 그곳에서 피를 흘리셨다. ‘르 몽드’의 호칭처럼 그는 나의, 우리 모두의 ‘사상의 은사’셨다”라는 글을 올린다. PD수첩 사건이 2심 무죄가 났을 때는 “언론보도에서 부분적 오류나 허위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형사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민주헌정국가 법 이론의 상식이자 기초, 이 점을 법원을 통해 확인하면서 안심해야 하는 현실이 법학자로서 안타깝다”는 글을 올렸다. 그가 트위터 계정의 자기 소개 글에 ‘학문과 앙가주망(사회참여)은 나의 운명’이라고 써놓은 바로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교수님이 트위터에 들어오니까 인기 폭발이더군요. 계정을 오픈한 지 한달도 채 안되었는데 팔로워가 1만7000명이 넘었잖아요. 혹시 교내에서 “교수가 무슨 트위터냐” 하는 식의 눈총을 받지는 않습니까.
“지금 대학사회는 과거와 달라서 학문적 업적을 중요시합니다. 그걸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발언을 하면 눈총을 받겠죠. 저는 이 부분에서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눈총 주는 분은 없습니다.”
그가 한국형사법학회에서 주는 정암 형사법학술상 수상자이며, 해외저널에 영어논문을 총 10여개 발표한 왕성한 연구자라는 점, 대개 정교수때 받는 정년보장심사를 부교수때 일찌감치 통과했다는 점 등을 떠올리면 ‘학자 조국’에 대한 학계 평가가 어떤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2006년 경향신문이 창간 60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을 이끌 60인’, 2010년 동아일보가 창간 90년을 맞아 선정한 ‘2020년을 빛낼 대한민국 100인’에 뽑힌 이력이 있다. 진보·보수언론 양쪽으로부터 차세대 리더 지식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이번에 나온 <진보집권플랜>은 대학교수가 언론인과 만나 진보진영의 집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보기드문 형태의 책인데, 어떤 취지에서 내게 됐습니까.
“이명박 정부의 난폭 우회전을 보면서 진보인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죠. 다음번에는 꼭 권력을 가져와야한다고 주먹을 불끈 쥡니다. 그런데 생각만 그럴 뿐 현실에선 잘 안될 것이라는 비관과 냉소, 패배주의가 깔려있습니다. 야권이 분열하고 분당하면서 감정이 나빠진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촛불 집회에 한 두번 나왔거나, 나오고 싶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한번도 못나온 사람,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보자는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 우리가 힘을 내야한다,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 이런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정당으로 옮겨갈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국민의 힘으로 야권을 통합하자는,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민란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민란이란 단어가 과격하긴 해도 아주 의미있는 운동이라고 봅니다. 진보개혁진영이 뭉치지 않으면 절대 집권 못하거든요. 다 합쳐도 아슬아슬하게 이긴다는 것을 지난 세 번의 선거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5개 야당이 하나의 당으로 곧바로 합하는 방안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노선, 이익, 감수성 등을 고려해 근친성이 있는 정당끼리 소통합을 먼저 하고 이 둘이 나중에 연정을 하는 방식이 현실적입니다. 이런 통합없이 야당이 제각각으로 후보를 내고 국민들에게 난감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정치인의 직무유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정 이야기를 꺼냈다가 여야 모두의 외면을 받고 실패한 적이 있는데요.
“우리가 연정경험을 갖지 못한 것은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연정은 한마디로 자리 나누기인데, 이를 나쁘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투명하고 공개적인 나눔, 그속에서 다수파가 양보하는 나눔이 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를 국민이 정당에 압박하는 방식으로 드림팀 놀이를 해보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드림팀 놀이란 진보집권이 이뤄졌을 때 장관으로 누가 적격인지를 자유롭게 추천하고 토론하면서 연정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종의 말(言)놀이다. 누군가 “농림수산부 장관에 강기갑 의원 추천입니다” 하면 “난 교육부 장관에 심상정, 노동부 장관에 이정희 추천”하는 식으로 실명을 들어 제안하는 방식이다. 총선 후보 역시 어느 지역에는 누구 추천 하는 식으로 시민들이 거명을 해 정당의 일방적 공천을 막고 최상의 후보를 모아보자는 아이디어다. 트위터 같은 매체를 이용하면 돈 한푼 안들이고 쏠쏠한 재미도 느끼면서 정치의식도 높여갈 수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생각이다.
-여야 대선주자에 대한 말놀이는 어떻습니까. 개별 정치인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을 듣고 싶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태생적 정치인입니다. 수첩공주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정치공부를 해 내공이 다져진 분이죠. 김문수 지사는 과거의 자기 색채를 지우려고 오버하는 것 같고, 이재오 장관도 킹 메이커가 아니라 킹이 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또 누가 있나요. 야권은 좀 복잡한데 내년 4월 재·보선이 시금석이 될 것으로 봅니다. 손학규 대표나 정동영 의원은 이번이 마지막 찬스가 될 것이고 유시민 전 장관은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조 교수님의 권력의지는 어느 정도인가요. 어디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요.
“저는 이미 정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정치지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치활동을 하는 것과 정치인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가 근래 이름값이 조금 올랐다고 평생 정치에 헌신한 사람의 자리를 뺏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당 정치인, 그들을 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보병 전투병에 비유한다면 저는 후방에서 빵빵 때려주는 포병입니다. 이 역할에 만족하고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면 제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 지원유세를 하는 수가 있을 겁니다. 진보진영의 확장적 구조조정에 기여하는 것까지가 저의 권력의지인 셈이죠.”
-정치인이 되라는 권유를 꾸준히 받고 있잖습니까. 정당의 제안을 실제 받은 적도 있고요.
“저의 정체성에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상품성이 있다고 보아서인지 돈 대줄 테니 나가라고 하는 독지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학자와 지식인으로 몸이 굳어져있습니다. 정치인이라면 야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죠.”
그는 이를 ‘정치적 근육’이라고 표현했다. 싫든 좋든 매일 사람 만나고, 모임이라면 초등학교 운동회까지 일일이 찾아가 얼굴 내밀고, 말도 안되는 민원도 다 들어주는 그런 기질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을 듣는 그가 그런 근육을 언제 완성할 수 있을지, 혹은 끝내 못만들지 예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정치인 조국’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인터뷰 내내 “만약 정치인으로 변신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며 “지금은 변신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들어갈 때는 충분히 근육을 키워서 가겠다는 것, 그래서 장외에 있을 때 각광받는 우량주였다가 장내에 들어가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져내린 정운찬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식인 조국’을 변함없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법무법인 원'의 조광휘 변호사입니다. 비평가들은 좋아했으나,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은 영화들을 제작했고, 지금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일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십니다. 휴일에는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탑니다. '모모'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웁니다.
경향신문에서 조국 교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학선배의 인터뷰이기에 유심히 읽었다. 그에 대한 인터뷰의 상당수가 그의 출중한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데, 이 인터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미 나온 이야기 외에 새로운 정보의 제공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소설가 공지영씨가 트위터에서 ‘잘생긴 남자에게 떨어야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올린 글을 비롯하여 몇 가지 정보가 추가되었다. 나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외모는 그가 가진 매력의 일부에 불과한데, 진보적 언론조차 그 부분을 지나치게 조명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외모에 대해, 특히 이성의 외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익숙한 현상이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고운 피부, 초롱한 눈빛, 건강한 신체는 좋은 유전자의 표현이고, 좋은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부지불식 간에 선호하는 것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런데 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눈, 코, 입 등의 기관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배열되었는지가 다른 인간에게 그토록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선호도가 일치한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은 물론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등이 총 동원되어야 한다.
그 매커니즘을 정밀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여기에 ‘어떤 사람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라는 현상이 있다. 그것을 두고 외모란 쓸모없는 것이고, 내면이 훨씬 중요하다고 아무리 설득해봐야 공자님 말씀일 뿐이고, 많은 사람들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개개인이 그러한 성향을 가지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런 선호를 가졌다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타인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로 인해 결혼이나 사업 파트너의 결정 등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그르치면 스스로 그 재앙을 감수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모의 경쟁력’이라는 현상이 사회적 차원에서는 또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또는 ‘나라를 기울어지게 할 만큼의 미인’이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모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적 의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에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상품처럼 제시할 것을 강요받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미디어에 의하여 매개되는 미디어민주주의 시대에, 외모의 사회적 의미는 한층 복잡하다. ‘외모’는 개인적 특질을 넘어 그 또는 그녀가 갖추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자본 또는 정치적 재능의 한 형태가 된 것이다. ‘외모’는 자기가 직접 대면하는 사람에 대하여 남보다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의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서 재화를 획득하거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수단이다. 번창하는 대중문화산업의 표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은밀한 성적 향유와 욕망의 경제학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며, 무르익은 민주주의의 외피 너머에서 작동하는 교활한 정치공학과 사이비 정치는 우리 사회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아무리 비이성적이라고 폄하한들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라면,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든 우리의 셈법에서 제거할 수 없는 얼룩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지성과 통찰력 그리고 리더싶과 같은 본래적인 정치적 재능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감각기관의 형태와 배열을 지녔다’라는 사실, 즉 ‘외모’라는 기이한 정치적 자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한나라당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보수’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힘이라면 성찰없이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의 경우에는 다르다. 진보는 ‘존재하는 현상’의 정당성을 성찰하면서 ‘그래야만 하는 당위’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모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진보의 가치에 배치된다.
나도 외모의 가치를 이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복지를 증진시켜 준다. 꽃미남의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언니’들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위로받는가. 그러나, 우리를 혼미하게 하지만 도무지 그 정체를 규명하기는 어려운 ‘외모경쟁력’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나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요술램프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정당한 기회조차 박탈하는 핸디캡이 된다면, 우리의 고민은 응당 깊어져야 한다. 나아가서 본래 불안정한 민주주의를 ‘외모경쟁력’이라는 현상이 더욱 혼미하게 하고 있다면 그 문제는 어떻게든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빠스칼의 말마따나, 심각한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야 할 배의 선장을 지위로 뽑을 수도 없지만, 미모로 뽑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지리멸렬한 개혁진보 세력이 답답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하여 약간의 농담과 약간의 진담을 섞어 조국 교수의 수려한 외모에서 다소간의 희망이라도 발견하려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보수세력에 지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뼈아픈 방법이어야 하지, 그것으로 서로 승부를 해보자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진보의 자가당착일 뿐이다.
나는 십 년에 한 번쯤 ‘잘 생겼다’ 는 말을 들으면, 겉으로는 ‘에이..’하면서도 맘 속으로는 좋아서 정신줄을 놓는다. 내가 아는 예전의 조국 교수는 사석에서 ‘미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비본질적인 것을 거론한다고 다소 히스테리컬하다고 할 정도로 불편해 했다. 그것이 그가 본래 타고난 단아한 품성이다. 지금의 그는 짜증스런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그의 미모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싶어하는 진보적인 매체의 의도와 결합되면 자칫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사랑하고 쉽게 지루해 한다.
조국 교수는 내가 후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단순히 미남자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 아름다움, 그 명석함, 그 친화력, 그 사회적 상징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에 눈감지 않고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대단히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진보의 아름다운 무기로 활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낱 정치적 상품으로 소비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아깝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유는, 평등은, 민주주의는, 평화는, 연대는, 정의는, 그리고 이 모든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진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