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황하와 양자강을 따라 발생한 문명을 ‘하강문명’이라고 부르며, 내몽골과 요하 유역에서 발굴된 문화를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기원과 계통이 다른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발전했다. 대표적인 중국 신석기 문화로 황하 중류의 앙소문화가 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만 년 전 : 오늘날의 한반도 지형 형성
기원전 6000년경 : 신석기, 원시농경 시작(부산 동삼동, 함북 웅기 서포항)
신석기 혁명,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홍적세의 마지막 빙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시작되었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지형과 식생이 마련되었다. 빙하가 녹아내려 해안선이 높아지자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서해 바다가 생기고 대륙에 붙어있던 일본은 섬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무렵, 인류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이는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 되었다. 이 놀라운 역사적 대사건을 우리는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 혁명이라고 부른다이제 인류는 먹잇감을 쫓아 이동을 거듭하던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곳에 정착하여 삶을 가꿀
수 있게 되었다.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필요한 작물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생산경제에 돌입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베어져 집이 되었고 숲은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인간의 마을에 내주기 시작했다.
황하문명,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여겨지다
중국은 어디에서 농경이 처음 시작되었던 것일까? 중국 문명의 기원은 어디일까?
황하 황하의 경로와 주요 도시들.
우리는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황하문명을 배웠다. 오랫동안 황하 유역에서 중국 문명이 기원하였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날의 최대 벼농사 지대인 양자강 유역은 이제 겨우 원시 농경을 시작한 인류의 거친
농기구로는 개간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도처의 늪과 습지, 삼림을 어떻게 개간할 수 있었을까?
반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넓게 발달한 부드럽고 비옥한 황토 퇴적층은 원시 농경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
일찍이 황하 유역에서 앙소의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되었다. 하, 상, 주 등 초기 국가가 출현했으며 이후로도
천년 동안 이곳 중원을 중심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가 부침하지 않았던가?
황하와 양자강 하류의 ‘하강문명’이 발굴되다
그런데 1973년 후진지역으로만 생각했던 양자강 하류에서 하모도 문화가 발굴되었다. 절강성 여요현 하모도
마을 사람들이 논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이 유적에서는 1미터가 넘는 두꺼운 벼의 퇴적층과 물소와
사슴 갈비뼈로 만들어진 쟁기가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이미 7000년 전쯤에 논농사가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현재 유적의 현장은
하모도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양자강 하모도 문화가 발전한 양자강.
황하 유역에서는 밭농사 중심의 문명이, 양자강 유역에서는 벼농사 중심의 문명이 발생하였다.
황하와 양자강을 따라 발생한 중국의 문명을 '하강문명'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황하 중심의
선진 문화가 주변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 아니라, 기원과 계통이 다른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모도 문화 범위 양자강 하류에서 벼농사를 발전시켰던 하모도 문화 범위.
내몽골과 요하 유역, 홍산문화가 발굴되다.내몽골과 요하 유역에서도 하강문명에 버금가는 신석기 문화가
발굴되어 '홍산문화'로 불린다. 현재는 중국의 영역인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홍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흥륭와 문화는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질서정연하게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놀라운
수준의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상과 옥귀걸이나 옥룡 같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들이
발굴되었다. 최근 중국이 이 흥륭과 문화를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 등 중화의 시조 마을로, 내몽골 및
요하 일대에 널리 분포한 홍산문화를 이른바 '요하문명론'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동북공정, 즉 부여 · 고구려 ·
발해의 역사를 중국내 동북 지방의 역사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 토기와 적석총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로 중국의 중원 문화와 구별되며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하, 양자강, 요하 유역에서 중국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다
역사학자 크로체의 말대로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역사'다. 광범한 영역을 다스리는 다민족 통일국가인 중국은
한족(漢族) 외에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대중화주의 · 다민족통일국가를 표방하면서
내부를 통합하고 대외적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까지 황하,양자강,요하 유역에 수천 개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중 1921년, 역시 앤더슨에 의해 처음
으로 발굴되어 일찍부터 중국의 신석기를 대표하는 문화층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황하 중류의 '앙소 문화'이다.
하류 지역에서는 '대문구 문화'가 발굴되었다. 앙소 유적에서는 검은색과 붉은색 계통의 채색토기, 즉 채도가 많이
발굴되었고 대문구 문화층에서는 흑도와 백도가 유명하다.
앙소문화를 낳고 성장시켰던 것은 황하 중류 유역의 대지를 덮은 황토였다. 이 앙소촌도 황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황하 중류의 앙소문화
앙소 문화는 첫 발굴지인 하남성 민지현 앙소촌의 지명을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섬서성 · 하남성 · 산서성 일대에
광범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중 반파 유적과 강채 유적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반파 유적은 1953년 서안에서 발전소를 건설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현재 유적 자체가 반파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적 자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유적이나 유물이 현장을
떠났을 때는 이미 온전한 생명력을 지니기 어렵다.
앙소기의 마을은 대개 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약 20채에서 100채 정도의 규모로,
비슷한 크기의 일반 집들은 몇 개의 조로 나뉘어 중앙광장을 향해 문을 두고 있다. 일반 집은 5명 안팎의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는 크기이며 각 조는 같은 어머니를 둔 모계 가정으로 추정된다.
일반 집과 구별되는 커다란 집이나 광장에서 집회나 마을 공동의 일들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축사도 있고
곳곳에 저장굴로 보이는 웅덩이나 창고시설이 있다. 마을 주위에는 배수나 방어를 위해 5~8m의 도랑,
즉 해자를 팠으며 해자 밖에는 마을 공동묘지가 있었다.
앙소 문화 범위 중국 신석기를 대표하는 황하 중류의 앙소 문화 범위.
앙소인들의 골격은 몽골인종에 속하며, 현재의 화북 및 중앙아시아계보다는 남중국계와 더 유사하다. 화북인은
이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북방 민족과의 융합이 빈번히 일어나 체질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앙소문화의 채도, 신석기인들의 확대된 정신세계를 반영하다
앙소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채도이다. 붉은색, 검은색, 흰색 등의 바탕에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별, 파도, 사선 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도 있고 물고기, 뱀, 새 등 동물무늬도 많다.
그중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도 있고 초기 글자 같은 부호도 보인다. 신석기인들의 이러한 감각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치중했던 구석기인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물의 배후원리를 찾아내고 추상화하는
데 노력했던 신석기인들의 보다 확대된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야생의 곡물을 재배하고 사냥해 온 짐승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연현상의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변화상을 연관시켜 추상적이며 종합적인 원리로 정립해내는 고도의 사고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아가면서 성숙한 정신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이 발생하고 추상적인 도안의 예술품들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서 자연의 위험이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인류는 공동체의 안전과
풍요로운 생산에 대한 염원으로 다양한 공동의 의식 문화를 발전시켰다.
수준 높은 기술이 개발되고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다.그리고 끊임없이 수준 높은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뜨리는 문화'에서 '가는 문화'로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루었다. 더욱 정교해진
손놀림으로 다양한 간석기들이 만들어졌다.
창과 활과 도끼 등 이음도구들이 발달했으며 실을 뽑고 그물을 만들었다. 물고기며 곡물들을 보다 다양한 조리법
으로 식탁에 올릴 수 있게 되었고, 따뜻한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곡식은 토기를 만들어 저장하였다.
신석기를 대표하는 유물,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
초기의 원시농경은 생산력이 낮아서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하였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임신과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은 갈돌로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찌는 등 요리를 했다. 남성들은 멀리 나가 활이나 창으로 말 · 사슴 · 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개 · 돼지 · 소 · 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가 실현되다
이 시기에는 남녀 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잉여생산물이 적어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 간의 차별도 거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
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이나 광장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종교적 의식을 집행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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