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목 버금의 위계
第八[십승관법의 여덟째라는 말임]로 버금가는 위계를 밝히는 것인데, 대저 진실의 위계와 近似의 위계의 두 가지는 해탈지견을 지니면 朱紫[붉음과 자주빛]가 분명해진다. 결국은, 아직도 이른바 증득 못한 것을 증득하였다고 말하고, 四善根을 헤아리고서 初果라 하고, 초과를 無學果[아라한과]라 하는 오류는 하지 않게 된다. 단멸, 증득한 바와 아직 단멸, 증득 못한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四門의 이름과 위계는 다를지라도 단멸 및 諦理는 우뚝 솟아서 다르지 않는 것이다.
제1문 次位의 뜻
二乘은 일생[이승에서의 한 번의 生이라는 말임]에서 번뇌를 단멸할 것을 대개 논하지만 시절이 이미 촉박하다. [일생에서의 단멸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임] 敎門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대동소이하니, 잘못하여 질동[迭動; 범위를 넘어서 작동하는 일]하여서는 안된다. 보살의 교문은 단지 시절이 길고 수행이 멀 뿐만 아니라 지혜와 단절이 또한 다르다. 그러나 경로는 다르더라도 바로 귀결하는 길은 하나다. 육바라밀의 처음 아승기겁은 아직도 성불을 모르고, 두 번째 아승기겁은 (성불하는 것을) 알면서도 설하지 못하고, 셋째 아승기겁은 스스로 알기도 하고 설하기도 한다. 백겁 동안에 大人[불, 보살]의 相을 심어서 다섯 공덕[정진으로 衣食이 풍부, 명성이 높아짐, 자신력 증진, 평안히 죽음을 맞음, 사후 善道에 태어남]을 갖추는 것을 不退地라 이름 한다. 모두 近似位다. 도량에 앉아서 성불하는 것을 바로 진실위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 교의 처음에서 얕은 것도 또한 次位가 있으니 어찌 범부가 만드는 마음이 바로 上位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增上慢이 아니라면, 이것을 밀어부쳐서 누구에게 줄 것인가?[증상만의 사람 이외는 밀어부칠 사람이 없다는 말임]
통교의 二乘의 眞位와 似位는 지혜가 삼장교와 다르지만 단멸의 위계는 다르지 않다. 만일 보살의 위계라면 조목조목이 다르다. 名義의 공통과 차별을 가려내는 것은 「법화현의」와 같다. [그 책을 참조하라는 뜻]
별교의 미혹, 단멸, 지혜, 위계에는 二乘은 귀머거리고 벙어리며, 그 경계가 아니다. 따라서 이름 하여 “별교”라 한 것이다. 일왕하건대 「섭론」이나 「화엄경」이 밝힌 바 十地의 위계가 바로 그 뜻이다. 다만 별교의 뜻은 그 길이 많아서 중생의 기근에 대하여 설이 다르다. 가로로 설한다면 바로 四門이 다르며 세로로 설한다면 바로 階降[順次와 같은 말]에 깊고 얕음이 있다. 하나의 경전에만 정하여 집착하여 서로 시비하여서는 안된다. 또한 보살은 혹 통교의 논을 만들어 경전을 풀이하거나 혹 별교의 논을 만들어 경전을 풀이하고 있다. 「용수」가 天部의 論을 만든 것과도 같이 「천친」 및 여러 보살들의 논전도 또한 얼마나 헤아릴 것인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임] 이것을 촌탁하는 자는 적다. 어찌 하나의 뜻에만 간절하게 전념하여 다른 門을 비난하고 반발할 수가 있을 것인가? 만일 구차스럽게 억양[抑揚; 칭찬하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일]한다면 부처님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훼손함을 초래할 것이다. 일반적인 것을 바라보려고 하다가 뒤집혀서 메고[목이 멘다는 말] 막히게 된다.
지금 별교의 위계를 밝힌다면 四門에 異說이 있어서 여러 가지가 다르다. 천백의 經緯가 있더라도 그 이치는 하나다. 이쪽에는 아직 많은 논의가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앞에서의 四門에서 이것을 미루어 본다면 통교에서 여러 가지 위계를 설한 것은 그것들이 똑같은 眞諦라는 것을 알며, 별교에서 여러 가지 위계를 설하여도 그것들이 똑같이 중도라는 것을 안다. 「경」에서 말하였다.
“여러 가지 도를 설한다고 하더라도 기실은 一乘을 위한 것이다. 그 설한 바 법은 모두가 다 一切智의 경지에 이른다.”
이 뜻을 회득한다면 狐疑[의심이라는 말]는 쉽게 그치고 다툼과 언쟁은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위의 思假를 파하는 가운데서 이미 모든 위계를 약설하였으니 혹시 알려고 한다면 거기에 가서 찾아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