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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00. 광복의 날까지
아침의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위에 먹구름 같은 외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서른여섯 해, 산천은 깊은 신음 속에 잠들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은 새벽 이슬처럼 풀잎 끝에서 사라지고, 선열들이 흘린 붉은 피는 진달래처럼 산과 들에 번져 조국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꽃잎처럼 여린 소녀들은 차가운 밤바람에 떨었고, 독립을 꿈꾸던 열사들은 별빛 하나 남긴 채 이름 없는 들녘에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어둠 속 등불처럼 꺼지지 않아 긴 밤을 밝히고, 마침내 해방의 아침 해를 불러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조국은 번개에 갈라진 거목처럼 분단의 상처를 안고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산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가 바다에서 하나 되듯 손을 맞잡고 마음을 모아 통일의 아침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푸른 하늘을 넘어 백두에서 한라까지 울려 퍼지고, 무궁화가 온 산천에 활짝 피어나듯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진정한 광복의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302.별의 강
가슴속 시계가
비 맞은 못처럼 붉게 녹슬어 갈 때,
나는 어둠 내려앉은 언덕 끝에 선다.
길 잃은 별 하나가
우물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내 가슴 깊은 곳으로 풍덩 내려앉는다.
바람은
빈집 문틈을 스치는 아이처럼
살며시 다가왔다가,
갈대의 마른 숨결만 흔들어 놓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꿈의 능선 너머
너는 저녁 하늘에 걸린 등불처럼 머물고,
나는 새벽 안개처럼
천천히 지워지며 서 있다.
그리움은
둥지를 잃은 새처럼
밤새 내 가슴 둘레를 맴돌고,
기다림은
가뭄 끝에 흐르는 샘물처럼
패인 마음 골짜기마다
은빛 물길을 내린다.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
그 이름은
가슴에 박힌 별처럼 빛나고,
별빛은 강이 되어 흐른다.
나는 그 물소리를 들으며
떠나가는 계절 하나를
종이배 띄우듯
가슴 깊은 곳에 조용히 띄워 보낸다.
303.그때는 그랬지
엄마는 광주리에
낮은 산 하나 이고
저 멀리
칠성시장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책보자기를 어깨에 걸고
금호강 은빛 비늘 같은 물결 따라
뚜벅뚜벅 집으로 걸었다
강물은
오래된 숨처럼 굽이쳐 흐르고
팔공산은 아무 말 없이
먼 하늘을 품고 있었다
배 속 허기는
보이지 않는 실 하나 되어
어디선가 날아온
사과 향 끝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 향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저쪽에 사과밭이 있다”는
꾸밈없는 속삭임 하나가
어린 마음의 문을 열고
하얀 사과 속살 위에
그날의 먼지를 내려앉혔다
우리는 금지된 팻말 앞에서
작은 잘못을 마주했고
낯선 아재는
큰 꾸중 대신
따뜻한 눈빛 하나 건네며
가벼운 꿀밤 하나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용서를 주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는
볼품없던 사과 몇 알을
살며시 넣어주었다
그날의 못난이 사과는
가난의 열매가 아니라
긴 세월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의 온기였다
아지랑이처럼 아득한 시간이 흘러도
그 사과 향은 아직 남아
금호강 물결 따라 흐르고
나는 오늘도
어린 날의 발걸음으로
그 길 위에 서서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때는 그랬지
304.기도
처마 끝 풍경은
밤하늘에 맑은 울림이 되어
잠든 산사의 적막을 깨운다
새벽은
나무의 심장에 귀를 대고
푸른 눈꺼풀을 천천히 연다
두 손 모은 간절함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꽃씨처럼
굽이굽이 산길을 오른다
한 줄기 염원은
은빛 실타래를 풀어내듯
산 너머 하늘에 길을 놓고
붉은 단풍잎 위에 내려앉은 마음은
먼 계절을 건너온 새 한 마리처럼
고요히 날개를 접는다
은은히 번지는 산사의 종소리
맑은 물 한 방울이
오랜 그리움 끝에 바다를 만나듯
기도는
보이지 않는 빛이 되어
부처님 마음의 깊은 연못에 스며든다
305.아버지의 별
늦은 밤,
하늘에 떠 있는 반짝이는 별 하나.
그 별은 어린 날 밤길을 밝혀 주던
등불 같은 아버지였습니다.
굽은 등은 큰 언덕처럼 언제나 나를 품어 주었고, 거친 손마디는 나무껍질처럼 시린 세월을 견디며 사랑을 깊이 숨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들판의 거친 바람처럼
세상을 향해 마구 달려갔고,
아버지 마음에 떨어뜨린
철없는 말들은 묵직한 돌멩이가 되어 오래도록 딱딱한
가슴에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말없는 사랑은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잎처럼
끝까지 나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움이 꽃처럼 피어나는 오늘,
나는 빈 하늘 아래 서서
늦게 돌아온 철새처럼
아버지가 걸어가신 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버지,
당신은 떠난 것이 아니라
높은 하늘의 길잡이별이 되어
지금도 내 삶을 밝히고 계십니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가 남겨 주신 길 위를 걸으며 당신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내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306.남은 잎 하나
세월이 흘러가니
곁에 머물던 사람들도
가을 나뭇잎처럼
하나둘 바람에 실려 간다
남은 몇 사람은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잎사귀 하나처럼
말없이 자리를 지킨다
차가운 바람은
흩어진 낙엽 사이로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지난날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제
떠나는 것은 보내야 한다고
수없이 마음에 새겨 보지만
문득 뒤돌아보는 마음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따뜻한 흔적일까
거울 속 내 모습은
해 질 무렵 빈 들판처럼
쓸쓸히 서 있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는 가지 끝에 남은
작은 잎 하나처럼
다시 찾아올 봄을 조용히 기다린다
307.붉은 발자국
산길 모퉁이에서
붉은 발자국 하나
소리 없이 걸어온다
초록이 머물던 자리마다
작은 불씨가 피어나고
숲은 오래 접어 둔
가을의 편지를 연다
저만치 푸른 그림자는
강물 위 얇은 배가 되어
먼 하늘로 흘러가고
나뭇가지 끝에는
하얀 침묵 하나
살며시 내려앉는다
곧 세상은 눈의 옷을 입고
지난 계절의 이름을
조용히 부를 것이다
308.우듬지
친구들이
떠나간 빈자리
산들바람이
잠시 놀다 갔어요.
외롭지는 않았어요.
그 빈자리에도
비가 내리고
햇살이 찾아오면
작은 새싹들이
손잡고 찾아올 테니까요.
소나무 꼭대기
새 한 마리 내려앉고
바람은 살며시
우듬지를 흔들었습니다.
고맙다,
나를 잊지 않아 줘서.
309.선
하늘에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선 하나 그어졌다
손 내밀면 닿을 듯 멀어지는
저 산 너머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발자국들이 잠들어 있다
바람은 매일 그 길을 찾아가지만
빈 가지 끝에 걸린 그리움만
조용히 흔들고 돌아온다
땅 위에 그어진 선 하나는
강물보다 깊은 세월을 품고
수많은 이름 없는 눈물을 건넜다
하늘마저 갈라놓은 선 위에서
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빛나고
달빛은 두 세계를 함께 비춘다
언젠가
마른 강물이 다시 흐르고
잃어버린 발자국이
서로를 찾아가는 날
그날 하늘에 남은
마지막 선 하나도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리라
그때까지
나는 오늘도
금 간 하늘 한쪽에
작은 별 하나를 띄운다
310.기다림
강 하나가
내 앞에 조용히 흐르고 있다
강 건너에는
겨울의 손을 잡은 갈대들이
바람 따라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다가갈 수 없는 거리 앞에서
나는 오래된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금이 갈 것 같은 마음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바람은
빈 가지 사이를 지나며
먼 곳에서 온 편지처럼
내 곁에 머물고
갈색 잎들은
작은 배가 되어 흔들리다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차가운 겨울 아래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작은 뿌리 하나가
봄을 향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얼음이 녹는 날
봄은 살며시 문을 열고 찾아와
잠들었던 땅 위에
초록빛 불 하나를 밝혀 놓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강 건너를 바라본다
기다림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나를 키우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둠 속에 뿌리내린 나무가
끝내 꽃을 피우듯
나도 이 겨울을 지나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311.진달래 화전
산에 산에 피어나는 분홍빛 진달래야
곱게 곱게 물들어서 봄빛 되어 피어라
물 건너 시집간 누이 친정에 오거들랑
산 따라 꽃잎 따서 바구니에 담아오면
따스한 봄볕 솥뚜껑에 화전 곱게 부쳐서
온 가족 웃음꽃까지 정답게 나누어 먹자
312.그 겨울날
매일 드나드는 제집인 양
소매 끝으로 파고들던 그 겨울
까마귀 울음마저 얼어붙던 하늘 아래
새까맣게 언 내 작은 손
말없이 웃으시며 당신 품으로
끌어 당겨 녹여 주시던 어머니
시린 내 손보다
더 차가운 당신 가슴은 차갑다는
말 한마디 끝내 하지 않으셨습니다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시며
“괜찮다, 괜찮다”
낮고 따뜻한 목소리 이제는
불러도 닿지 않는 이름 먼 기억
저편에서 눈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당신이 남기고 간 작은 온기 하나
얼어 있던 내 마음을 녹입니다
자식을 위해 봄 한 철쯤
기꺼이 내어주시고
꽃 피고 낙엽 지는 숱한 계절을
묵묵히 건너오신 당신
나도 어느새
아픈 마음을 먼저 알아보고
작은 손 하나 오래 잡아 주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문득 내 손끝에도
당신의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313,나이 익어 가는 소리
거리 끝 골목에서
작은 노래 하나 피어나면
젊은 날의 바람처럼
어깨가 먼저 춤을 추었다
노랫가락 따라
가볍던 발끝도
어느새 조심스레 멈춰 서고
한 잎 내려놓은 나무처럼
가만히 귀 기울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인다
혹시 바람에 놀랄까
오래된 가지가 떨릴까
살며시 피어나는 마음 하나
그래, 그래
나도 어느새
가을 들녘처럼 익어 가는구나
푸르던 날은 지나가고
고운 빛 하나둘 물들어
깊은 향 품은 열매처럼
천천히 여물어 가는구나
나도 그렇게
하나의 계절이 되어
조용히 익어 가는구나
314,도향(都鄕)
골목은 오래된 사진첩처럼
지난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빌딩 사이 작은 커피 향은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을 여는
작은 열쇠 같다
낡은 벽돌 틈 사이에는
시간이 물감처럼 스며들고
나는 그 골목에서
어린 추억의 나를 만난다
머리 위 내려앉은 하얀 서리는
겨울꽃처럼 피어나
지나온 세월을 말해 준다
돌아오는 이 길은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하고
도시는 어느새
내 마음속 고향이 된다
315.겨울비
갈색 창가에 비가 내린다
창틀에 기대 선 마음 하나
젖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겨울은 빗물에 잠기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찬 바람 끝에 매달려
방 안 깊숙이 스며든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은빛 물방울
굳게 닫힌 시간을
은빛 눈 녹이듯 풀어내고
메마른 대지는
푸른 희망의 씨앗 하나 품는다
비가 내린다
은빛 숨결이
하늘에서 쉼 없이 내려와
메마른 겨울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가슴속 작은 불씨 하나
가로등 불빛을 등에 지고
겨울비 너머로 붉게 타오른다
긴 밤을 건너온 온기
젖은 대지의 가슴에 스며들어
봄을 부르는 푸른 싹 하나
스멀스멀 눈을 뜬다
316.오십 년 세월의 친구
우리는
강 하나를 건넌 것이 아니라
봄비에 젖어 흔들리던 버드나무와
여름 골목에 길게 드리운 그늘과
가을 들녘을 물들이던 황금빛 바람과
겨울 창가에 머물던
따스한 햇살과 함께 건너왔다
세월은 굽이 많은 강이 되어
우리를 저마다의 물길로 흘려보냈지만
오늘 정모의 자리,
백림정에서의 뜻깊고 정겨운 만남은
나이테처럼 깊어진 주름과
서리처럼 내려앉은 흰 머리가 있었고
그럼에도 웃음은
첫 물살을 가르던 작은 배처럼
여전히 맑고 가볍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반세기라는 긴 다리는 안개처럼 걷히고
의자 끝에 걸터앉아
세상을 다 가진 듯 꿈을 나누던 아이들이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뛰어다닌다
오십 년,
친구란
세월의 강 위를 떠도는 배가 아니라
폭풍과 안개가 지나간 뒤에도
마음의 언덕에 서서
한결같은 빛을 밝혀 두는
오래된 등대 하나,
서로의 먼 밤을
묵묵히 비춰 주는 이름이다
317.쉬었다 가는 삶
하얀 들판 같은 침상 위에
세월 한 토막이 길게 누워 있다
벽에 걸린 달력은
숫자 꽃잎을 한 장씩 떨구고
창가에 고인 오후는
졸음의 날개를 편다
저 산 너머로 가는 길엔
숨 가쁜 구름이 밀려오고
아직도 비탈을 오르는 몸은
바람에 취한 갈대처럼
겨울 강가에서 흔들린다
뒤돌아보면
먼 길을 걸어온 발자국들이
저녁노을 속 갈림길에 모여
조바심의 새들을 날려 보낸다
벌레 먹은 이삭 하나
고개 숙인 채 흙을 바라보고
놓쳐 버린 막차 같은 하루는
빈 들녘을 서성인다
어느 모퉁이 바람에 기대어
잠시 넋을 놓고 있었기에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웅성이는 그림자들 사이
숨을 곳 하나 찾지 못한 마음은
작은 개미굴 하나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늘어진 가지 끝에도
봄빛은 다시 스며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감사라는 가느다란 비단길 위에
한 줄기 미소를 걸어 둔다
318.행복
절벽 끝 바위틈에
오래 품고 있던 침묵을 깨고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비바람이 스쳐 간 자리마다
꽃들은 제 몸을 흔들며
향기 한 줌 허공에 걸어 둡니다
당신의 눈빛이 머무는 곳
새벽 가장자리에 걸린
별이 되어 어둠을 밝힙니다
행복은
높은 궁전의
창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틈에 뿌리내린 풀잎처럼
작은 마음 하나에도
햇살의 이름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습니다
319.혼자 두고
아무 말 없이
지방으로 떠난 친구
그가 떠난 뒤
술상 위에는
의자 하나가 먼저 비어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야, 어디야?"
"응, 멀리 와 있어."
"술은?"
"지금 마시고 있네."
수화기 너머
부딪히지 못한 잔 하나가
테이블 끝에서
내 이름을 채우고 있었다
320.재회
친구를 떠나보낸
동대구역에는
저녁 그림자처럼 외로움이 서성인다.
오랜만의 만남을 싣고 온 기차는
긴 한숨을 내려놓고 떠나가고,
광장 입구에 선 이정표는
오래된 상처처럼 가슴을 건드린다.
떠나보내는 목적지는
사진 속 풍경처럼 멀어지고,
큰 가방을 끌고 선 너는
짧은 만남의 끝에 매달린 풍선처럼
계단 끝에 머물러 있다.
불빛에 젖은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잔잔히 흘러내리고,
유월의 끝자락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너는 흰 구름처럼 웃었다.
가벼운 포옹마저
손끝 사이로 흩어지고,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은
철커덕 닫히는 열차 소리에 밀려
멀어져 갔다.
계단 꼭대기에 앉아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물로 받은 꽃잎 손수건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처럼
아직도 주머니 속에 남아 있고,
함께 먼 길을 약속하던 시간들은
물 위에 쓴 글씨처럼 흐려져
이제는 다른 계절의 추억 속으로 스며든다.
서울행 열차의 뒷모습이
저녁 안개처럼 멀어질 즈음,
나의 늦은 발걸음도
저무는 그림자처럼 역을 떠난다.
321.산다는 그말
멀리 흐르는
시간의 강물 물결에
손가락을 담가 보니
고요는
잠든 아이처럼
물결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고
따뜻한 햇살도
포근한 이불처럼
구름 한 장 덮고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편안함은
긴 겨울을 견딘 씨앗처럼
불편 속에서 자라고 있었고
마침내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내 가슴에 와 앉은
한 줌의 빛이었다
322.팔조령
팔조령은
산이 오래 접어 둔 한 권의 손바닥이다.
봉화산과 상암산은 두 손을 맞잡은 채
구비마다 사람의 숨결을 받아 적는다.
돌 하나, 풀잎 하나, 꽃 한 송이도
지나는 발걸음의 이름을 기억하고,
지친 어깨가 기대면 바람은 말없이 등을 쓸어 길 하나를 더 열어 준다.
사람들은
여덟 번의 손길이 모여
고개를 세웠다고 말하지만,
팔조령은 숫자가 아니라
서로를 밀어 주던 마음들이
돌처럼 굳어 된 이름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계절보다 먼저 웃고,
여름이면 푸른 그늘 속을 흐르는 색소폰이 땀에 젖은 길을 식혀 준다.
가을은
불꽃을 잎으로 피워
떠난 사람의 이름을 흔들고,
겨울은 흰 침묵을 이불처럼 덮어
세월의 발자국을 재운다.
굽이굽이 휘어진 길은
산맥의 주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한 줄기 혈맥이다.
아무도 펼치지 않는 날에도
바람은 먼저 책장을 넘기고,
길은 묵묵히 다음 발걸음을 기다린다.
길가의 비석 하나.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선교사 배위량의 기도가 아직도
이 고개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323.신매시장
내가 즐겨 찾는 신매시장은
돼지저금통 동전처럼
달그락거리며 하루의 적막을 깨운다.
북적이는 시장 골목은
허기진 개미굴이 되어
사람들을 천천히 품어 내고,
노점마다 피어나는 웃음은
김 오른 국밥처럼
서늘한 마음까지 데운다.
산더미처럼 쌓인 채소와 과일은
용지봉의 푸른 허리를 닮았고,
어물전에서 밀려오는 바다 냄새는
골목 끝까지 싱싱한 숨을 채운다.
덤으로 주고받는 말들은
참새 떼처럼 날아올라
할머니 손바닥 위에
따뜻한 온기 한 줌으로 내려앉는다.
“보이소, 보이소.
한 번 보고 가이소.”
아지매들의 구수한 목소리는
돌솥에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식어가는 하루를 다시 끓여 낸다.
두 손 가득 시장을 안은 사람들은
누리공원을 지나
하나타운 주차장까지
풍성한 얼굴로 걸어간다.
신매시장 골목은
장을 보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익혀 내는 가마솥이다.
나는 그곳에서
된장국 같은 구수한 사람을 만나고,
따뜻한 사람 냄새를
배부르게 마신다.
324.겨울 손
소매 끝을 파고들던 황소바람
까마귀 울음마저 얼어붙던 하늘 아래
새까맣게 언 내 작은 손
말없이 웃으시며
당신품으로
끌어안아 녹여 주시던 어머니
시린 내 손보다
더 차가운 당신 가슴도
끝내 차갑다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시며
"괜찮다, 괜찮다"
낮고 따뜻한 그 목소리
이제는 불러도 닿지 않는 먼 이름
저편에서
눈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당신이 남기고 간 작은 온기 하나
얼어 있던 내 마음을 녹입니다
자식을 위해
봄 한 철쯤 기꺼이 내어주시고
꽃 피고 낙엽 지는 숱한 계절을
묵묵히 건너오신 당신
나도 어느새
아픈 마음을 먼저 알아보고
작은 손 하나 오래 잡아 주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문득 내 손끝에도
당신의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325.여명
세월에 꺼져 가는 몸일지라도
긴 바람을 견딘 고목처럼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한다.
문득 불어온 봄바람에
내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는
자장가 같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메마른 마음에 스미는
햇살처럼 따뜻했다.
오늘도 잊지 않고
내 곁을 찾아오는 말과 기억들,
오랜 친구처럼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
326.별 하나
얼마나 오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어둠 속에 잃어버린
당신의 빛깔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또 올라야
침묵으로 굳게 닫힌
용서의 문 앞에 설 수 있을까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긴 바람이 돌아와도
가슴 깊이 잠긴 침묵의 섬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구름이 길을 감춘 지평선 너머
새벽 안개를 헤치는 배처럼
마음과 마음 사이 먼 길을
나는 새벽 풀숲을 더듬어 간다
희미해진 기억의 사다리를
한 칸씩 놓으며
마른 가지 끝에 돋는 새순처럼
조금씩 너에게 닿아 간다
손끝에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끝내 닿을 수 없는
천 년 강처럼 깊은 마음의 거리
그 거리를 가로막는 것은
놓지 못한 미움의 조각일까
가슴 깊이 가라앉은 아픔의 돌일까
그 돌을 품고서는
아무리 먼 하늘을 건너도
내 마음은 끝내
새처럼 가볍게 날지 못하리
용서는 얼어붙은 강 위에
작은 봄 하나 띄우는 일
그리고 마침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지지 않는
별 하나를 밝히는 일이다
327.자운영꽃
파란 하늘 닮은 들녘에
붉은 꽃물 스며드는 계절.
어버이의 땀방울 스민 흙은
말없이 봄을 품고
수줍은 숨결 하나 밀어 올린다.
내 마음 스쳐 머문 너는
옥녀꽃대 고운 자태로
그리움 마디마다 꽃을 피운다.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기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기에,
저토록 붉은 숨결로
들녘 가득 봄을 물들이는가.
홀아비꽃대처럼
바람마저 외로운 날이면
나는 바람의 숨결 되어
흙 깊은 심장으로 스며든다.
햇살 머무는 들녘마다
이름 없는 봄빛 되어
누군가의 기다림 끝에서
자운영 한 송이로 피어나리.
328.그 얼굴
따가운 햇살 아래
초록의 숨은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말없이 견뎌 온 계절은
어느 저녁
보랏빛 고요를 품고 깊어졌다
계절의 문턱에 서면
바람도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가슴 한켠 묻어 둔 이름 하나
마른 잎의 낮은 숨결 사이에서
조용히 눈을 뜬다
그렁그렁 고인 저녁빛 위로
접어 둔 날들이
바람의 손끝에서 천천히 펼쳐지고
꽃잎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먼 길 돌아오는 발자국처럼
그 얼굴은 말없이 내 안을 지나간다
이제 그 얼굴은
눈앞의 형상이 아니라
긴 계절을 건너온 따뜻한 숨결이 되어
내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나를 숨 쉬게 한다
329.연꽃
흙탕물
깊은 곳에도
조용히 길을 두고
오랜
어둠 속에서도
꽃은 숨처럼 떠오른다
말이 없어
더욱 맑고
향은 스스로 번져
물결이
잠시 멎는 자리
젖은 달 하나 흔들린다
330.빈 의자
힘들면 쉬어 가라고
등을 내어주고
심심하면 머물다 가라고
말없이 자리를 비워 둔다.
등을 낮춘 채
누군가의 그림자를 받아내며
땅을 짚은 네 다리로
하루를 묵묵히 떠받친다.
아무도 앉지 않아도
기다림은 비지 않는다.
마음 둘 곳 잃은 발걸음 하나
먼저 품고 있는 빈 의자.
아무도 오지 않는 날에도
햇살이 먼저 다녀가고
바람이 곁에 앉았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331.울릉도 발자국
동해는 오래 품은 불씨를
화산섬으로 피워 올렸다.
바람은 기암절벽에 등을 기대고
천 년의 숨을 고른다.
파도는 하얀 포말을 붓 삼아
'울릉도'라는 이름을
푸른 물결 위에 천천히 새긴다.
가족식당의 정갈한 밥상에는
바다를 닮은 온기가 피어나고,
낯선 길 끝에서도
고향 같은 냄새가 오래 머문다.
봉래폭포는 물빛으로 노래하고,
성인봉은 하늘 가까이
푸른 기도를 올린다.
항구에는 아침을 싣고 돌아온 배와
사람들의 웃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간다.
깎아지른 바위들은
수천 년 바람을 품은 얼굴로 서 있고,
관음도와 죽도는
말없이 바다를 지키는
오래된 수호신이 된다.
망향봉에 오르면
섬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 되고,
푸른 바다는
발아래서 끝없이 숨을 쉰다.
작은 섬 하나가
손끝처럼 바다를 내밀자
우산국의 등불이
별빛처럼 다시 켜진다.
울릉도는 동해가
오래 품어 온 역사의 한 문장이다.
저 멀리 독도. 바람은 울릉도를 읽고,
파도는 그 이야기를 건너
오늘도 동해에
푸른 역사를 써 내려간다.
332.숙이네
섬은
동해가 오래 품어
한 모금 숨으로 피워 올린 푸른 심장.
내수전 초입,
절벽은 바람을 안고
푸른 세월을 익힌다.
마가목을 품은 염소의 숨결은
산이 간직한 불씨를
한 그릇 생명으로 데워 내고,
검은 묵 한 모는
바위가 천 년 빚어 낸
고요한 숨결이다
호박막걸리 한 잔은
파도가 긴 밤을 발효시켜
노을빛으로 띄운 구름.
저녁이 섬의 어깨에 기대면
숙이네는
등불 하나가 아니라
울릉도의 심장이 되어 따뜻하게 뛴다.
먼 길을 건너온 사람들은
그 온기를 가슴에 품고
저마다 한 조각의 울릉도가 되어
노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333.독도
울릉도의 그림자가 멀어질수록
바다는 더 깊어졌고,
그 끝에서 작은 섬 하나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굽이치는 파도를 가르며
독도를 향해 나아가는 선라이즈호
오랜 시간 마음속으로 그려 온 섬이 눈앞에 가까워지는 순간,
설렘과 경외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침내 허락받은 듯 배가 닿고,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벅찬 감동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발아래 놓인 바위는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수천 번의 파도와 바람을 견디며 오늘까지 남겨진 시간의 흔적이었다.
거친 표면 하나하나에는 지나간 계절의 숨결과 묵묵히 자리를 지켜 온 섬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독도는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이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수많은 날을 홀로 견뎌 온 살아 있는 존재였다.
끝없이 부딪히는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하늘을 가르는 괭이갈매기의 날갯짓, 섬을 지키듯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삽살개.
그 모든 풍경 속에는
독도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이 오면
독도는 가장 먼저 햇살을 품는다. 어둠을 지나온 빛은
바다 위에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독도는 기억하는 섬이다.
지나온 시간을 품고,
오늘의 바람을 견디며,
내일을 향해 조용히 서 있는 섬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 남아있을 영원한 이름이다
334.떠나는 여름
여름은 하늘 한쪽에 걸어 두었던
뜨거운 햇살의 끈을 풀고
푸른 날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한때 숲을 가득 채우던
매미의 노래는 잦아들고,
바람이 스쳐 간 빈 가지 사이로
가을의 작은 숨결이 내려앉는다.
어둠이 머문 뜰에는
귀뚜라미 한 마리
닫혀 있던 계절의 문을 두드리며
아직 오지 않은 이름을 부른다.
풀잎 위 잠시 머물던 잠자리도
투명한 날개에 남은 햇살을 털어내고
바람이 가리키는 먼 길로 떠난다.
나는 아직 여름의 온기를
두 손 안에 품은 채 서 있는데,
어느 마른 잎 하나
어깨 위에 내려와 조용히 속삭인다.
떠난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머물 곳을 찾아가는
고요한 여행이라고.
꽃은 피고 지고,
바람은 머물다 흘러간다.
비워진 자리마다
새로운 시간이 조용히 뿌리를 내린다.
저무는 들판 아래
작은 씨앗 하나
긴 겨울을 건너기 위해
깊은 잠 속으로 몸을 묻는다.
오늘 나는
떠나는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빈자리에
가을의 첫 잎 하나를 띄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계절이 머물고,
나는 빈 가지 끝에 맺힌
작은 새순 하나를 기다린다.
335.콩나물국
새벽은 아직
어둠의 이불을 걷지 못한 채
부엌 한쪽에 머물러 있고
가느다란 불빛 아래
냄비 속에서는
하얀 김이 별처럼 피어난다
긴 하루의 무게를 등에 지고
돌아온 마음은
젖은 외투처럼 무겁게 내려앉지만
아내의 손끝은
말 없는 물결처럼 조용히 움직인다
맑은 물에 몸을 담근 콩나물은
차가운 계절을 견뎌낸 작은 생명처럼
뜨거운 냄비 안에서 익어가고
어느새 한 그릇의 온기가 된다
소금 한 꼬집에는
식탁을 기다리는 마음이 스며 있고
다져 넣은 마늘 향기에는
하루를 걱정하던 시간이 배어 있다
참기름 한 방울 떨어지는 순간
평범한 국 한 그릇은
어둠 속 작은 등불이 되어
말없이 내 마음을 밝힌다
힘겨웠던 하루 끝에서
나를 감싸는 것은
뜨거운 국물의 온도만이 아니다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말 대신
조용히 내 앞에 놓인 따뜻한 마음
한 그릇의 마음이다
화려한 꽃처럼 피어나지 않아도
늘 같은 자리에서
계절을 견디며 피어나는 마음
콩나물국 한 그릇에는
함께 지나온 시간과
서로를 향한 기다림이 담겨 있다
어제의 걱정은
하얀 김처럼 천천히 사라지고
나는 다시 상쾌하고
따뜻한 아침을 맞는다
336.낡은 리어카
마당 한쪽에 놓인 너는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한 장처럼
지난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때는 두 바퀴로 힘차게 길을 달리며
무거운 짐도 묵묵히 견뎌 냈던 너는
마치 젊은 날의 나처럼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 녹슨 손잡이와 닳은 바퀴는
세월이 내 얼굴에 남긴 주름처럼 보이지만,
너는 버려진 물건이 아니라
긴 시간을 함께 건너온
우리들의 소중한 흔적이다.
나는 가끔 너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삶은 언제나
달려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오늘도 낡은 리어카 하나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마치 내 마음속 오래된 기억을 싣고
천천히 길을 굴러가는 것처럼.
337.구원
겨울 내내
알집 속에 잠들어 있던 사마귀
여름날
바람을 잘못 타고
대리석 위에 내려앉았다.
처음 디딘
차갑고 낯선 바닥.
여름보다
발끝이 먼저 떨린다.
미끌미끌
휘청휘청
뒤뚱뒤뚱.
넘어진 자리마다
한낮의 햇살 발자국이 찍힌다.
“누구 없어요?
다리 좀 잡아 주세요.”
바람이 다가와
사마귀를 가만히 들어
풀잎 끝에 내려놓는다.
풀잎이 흔들리고
사마귀도
다시 흔들린다.
338.바람개비
텃밭 한가운데
낡은 플라스틱 병 하나가
바람을 품은 꽃으로 피어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투명한 날개를 활짝 펴고
햇살을 빙글빙글 흔들어 놓는다.
낯선 몸짓에 놀란 새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푸른 잎과 어린 열매는
그 사이 말없이 살을 찌운다.
한때는 버려져
길가를 떠돌던 빈 병.
이제는 바람을 따라 돌며
텃밭의 고요를 지키고
익어 가는 시간을 보살핀다.
오늘도 바람개비는
쉼 없이 돌아가며
보이지 않는 바람의 길을 그려
푸른 하루를 지켜 낸다.
339.생각나름
넘지 못한 것은
벽이 아니었다.
벽 앞에 멈춰 선
내 안의 작은 두려움이었다.
어느 날,
떨리는 마음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잠들어 있던 시간을 흔들어 깨우고
굳게 닫혀 있던 길을
조용히 열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하나는
손바닥만 한 불씨가 되어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재가 되기를 거부한 채
끝내 꺼지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어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길을 잃은 마음들을 비추었다.
마침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세상 한편에 오래 머물러
누군가의 지친 가슴에 닿아
다시 걸어갈 용기를 밝히는
한 줄기 새벽이 된다.
340.사랑해요
참, 이 짧은 두 글자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려 마음에 도착하는 말입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쌓이고, 그리움이 조용히 꽃을 피운 뒤에야 비로소 입술 위에 내려앉는 말입니다.
사랑해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얼어 있던 시간은 녹아내리고, 메말랐던 하루에는 작은 봄 하나가 찾아옵니다.
혹시 너무 빨리 전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이 가벼운 말이 되어 버릴까 봐
나는 몇 번이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숨겨 둔다고 작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달빛이 밤을 찾아가듯, 파도가 끝없이 바다로 돌아가듯, 내 마음은 언제나 당신에게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참아 보려 했습니다. 조금 더 아껴 두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순간마다 더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장 늦게 꺼냈지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사랑해요.
이 말보다 더 따뜻한 말도, 이 마음보다 더 진실한 마음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수많은 날들 가운데 당신을 만난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한 줄의 시가 되었습니다.
341.울타리
하늘을 향해 오르는 넝쿨도 혼자서는
위로 오르지못한다.
어딘가 기대어 설 수 있는 가지를 만나야 비로소 더 높은 곳을 향할수있다
길을 걷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친 순간 말없이 내어준 어깨나 따뜻한 한마디의 말이 다시 걸어갈 힘이 된다.
우리는 때때로 지금의 자리가 오롯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받쳐준 마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조용히 막아준 울타리, 넘어질 때 잡아준 손길,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준 작은 등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 자란 나무가 뿌리가 머문 땅을 잊지 않듯, 사람도 자신을 품어준 인연을 기억할 때 더욱 깊어진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마음의 빚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길을 잃은 이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따뜻한 울타리가 된다.
342.되는 걸까
나는 참 어리석은 사람인가 봅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눈빛 하나, 스쳐 지나가는 미소 하나에도 의미를 찾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건넨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내게는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곤 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모를 겁니다.
당신에게는 평범했던 순간들이 내게는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는 것을.
오래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 앞에 당신이라는 계절이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메말라 있던 시간 속으로 스며든 당신의 따뜻함은 잊고 있던 설렘을 다시 깨워 주었습니다.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다시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걸 당신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이 마음을 품어도 되는 걸까요.
혹시라도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는 이 설렘을 조금 더 믿어도 되는 걸까요.
당신은 긴 겨울 끝에 피어난 작은 꽃이었습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 준 작은 빛이었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다가가고 싶을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잊으려 할수록 당신의 흔적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놓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당신이 남긴 짧은 말 한마디를 떠올리며,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다시 찾곤 합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친 하루 끝에 미소 짓게 해 준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묻습니다.
이 마음을 계속 간직해도 되는지,
이 설렘을 조금 더 믿어도 되는지.
잡을 수 없는 별빛 같은 마음이라 해도 나는 쉽게 놓지 못합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이 마음이 언젠가 아픔으로 남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 내게 따뜻한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 서툴고 조심스러운 마음에도 봄이 찾아올까요.
그리고 괜찮다면
당신이라는 계절을
조금 더 오래 좋아해도 될까요.
343.검색창
작은 창 하나는
마치 세상으로 건너가는
작은 문처럼 열리고
먼 나라의 오늘은
어제의 빛바랜 기록처럼 다가와
한 줄의 문장 안에서 만나며
가슴에 머물던 물음 하나는
길을 찾는 나그네처럼
조용히 답을 향해 걸어간다
수많은 목소리가 흐르는 곳에서
나는 필요한 별 하나를 찾듯
마음 깊은 어둠 속에
작은 불빛 하나를 밝힌다
검색은 어쩌면
무언가를 찾는 손길이라기보다
궁금함이 세상에 보내는
작은 편지와 같은 인사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깜빡이는 커서는
아직 열리지 않은 길을 품은
작은 등불처럼
새로운 생각 하나를 기다린다
344.고사목
썩어가는 살점 한 덩이
긴 세월의 상처를 품은 채
숲 한켠에 누운 고사목
마른 등걸은
말굽버섯에게 제 몸을 내어주는
마지막 숨결처럼
소리 없이 자신을 나눈다
한때 푸르렀던 잎과 가지의 기억 위로
새 생명의 씨앗이 내려앉고
겨울 눈밭을 뚫고 피어나는 봄꽃처럼
아프도록 아름다운 생을 이어간다
바람에 흩어질
마지막 티끌 하나까지도
허공에 흘려보내지 않고
작은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나무
모든 것을 비워낸 고사목은
어둠 깊은 숲속의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다음 생명의 길을 밝힌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숲이 오래도록 간직해 온
생명의 약속이다
고사목은 오늘도
침묵 속에서 썩어가며
침묵 속에서 봄을 키운다
345.당신에게 머문 마음
사람의 마음은
비가 그친 숲을 닮았습니다.
햇살은 모든 잎을 고르게 어루만지지만,
맺힌 물방울은
가장 오래 기다린 가지 끝에서
끝내 가장 오래 머뭅니다.
당신이 자꾸 생각난다는 것은,
제 마음이 이미
당신이라는 숲을 깊고도 조용히
지나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돌아보면
수많은 계절이 스쳐 지나갔어도,
끝내 제 마음이 쉬어간 곳은
언제나 당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마음이 오롯이 행복한 이유는 단 하나.
수많은 길 끝에서
망설임 없이 당신에게로 흘러간
그 마음 하나가
아직도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46.연꽃
깊고 어두운
진흙 속에서
맑은 꽃 하나 피어났습니다.
푸른 잎은
바람을 품고,
붉은 꽃잎은
햇살을 머금습니다.
높새바람은
잎새 사이를 지나고,
이슬 한 방울은
작은 하늘을 품습니다.
한 계절
물 위에 피었다가
연꽃이라는 이름으로
고요한 빛을 남깁니다.
진흙 깊은 곳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꽃.
그 맑은 침묵 앞에서
마음 하나 조용히 피어납니다.
347.사는 일
사는 일은
바람의 결에 실려 가는
구름 한 점.
손을 펼칠수록
허공은 깊어지고,
손을 오므릴수록
바람은 손금 사이를 빠져나간다.
우리는
끝내 닿지 못할 것들을 품고,
끝내 붙잡히지 않는 것들로
한 생을 완성한다.
348.태풍
검은 하늘에
목이 쉬도록 바람을 운다.
빗방울은
어둠의 씨앗처럼
가슴 깊이 박힌다.
비를 털지 못한
새 한 마리,
젖은 깃으로 밤을 견딘다.
바람은
내 이름을 거두어 가고
그림자 하나만 남겨 둔다.
함께 비를 맞던 우리는
흙 묻은 들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선다.
태풍은 지나갔는데,
어둠은 떠나갔는데
처마 끝에서
마지막 빗방울 하나가
끝내 떨어지지 못한다.
349.속새
조용히 살고 싶어
산중 깊은 곳에
마음 한 채 눕히고
하늘 한 장을 벗 삼아
바람의 숨결만 헤아리는데,
어느 날
속세의 발자국들이
'체험학습'이란 새가 되어
고요의 숲을 건너와
적막의 우물에
동그란 파문 하나씩 놓고 갔네.
350.적서차별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선 층인데
누군가는
제 이름으로 불리고
누군가는
F층이라는 낯선 이름 뒤에
조용히 숨는다.
오래된 두려움 하나가
숫자 하나에 그림자를 드리워
사층은 오늘도
자신의 이름을 잃은 채 서 있다.
승강기 작은 불빛 아래
손끝으로 층수를 세던
시골 어르신이
한참을 바라보다 낮게 묻는다.
“사층이 어디 갔지?”
사라진 것은
층이 아니었다.
잊힌 것은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마음 하나였다.
같은 벽돌로 쌓이고
같은 햇살을 받으면서도
이름 하나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
어쩌면 사람도 그러하다.
오늘도 승강기는
말없이 문을 열고 닫는다.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발걸음 사이
이름 잃은 F층 하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351.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 길 걷다 보면
꽃보다 오래 남는 향기와
말없이 기대고 싶은
작은 그늘을 만납니다
내 마음을 듣는 눈빛
닫힌 문을 열어주는 온기
길 잃은 새 한 마리도
쉬어 가게 하는 마음
많이 가진 손보다
나눌 줄 아는 빈손이
더 환하게 빛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당신과 함께라면
천천히 걸어도 좋겠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머무는
따뜻한 빛이 되겠습니다
352.〈바위꽃〉
사람의 발길 드문
산길 중턱,
가파른 바위틈에
작은 하얀 꽃
하나 피어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자리에서
너는 말없이
햇살 가득한
하루를 받아 적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순간,
하얀 웃음 하나가
조용히 번졌다.
나는 그 웃음 속에서
잊고 지내던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만났다.
353.그대라는 계절에
그대를 만난 그날부터
내 마음의 시간은
늘 봄꽃처럼 피어납니다.
스쳐 가는 바람 한 줄기에도
그대의 향기가 머물고,
깊은 밤 홀로 바라보는 별빛 속에도
그대의 따스한 미소가 아련히 떠오릅니다.
수많은 인연들 사이에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나 봅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걸어온 마음,
소리의 향기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요.
그대가 웃는 날에는
세상 모든 빛이 더욱 환해지고,
그대가 아파하는 순간에는
내 마음에도 깊은 비가 내립니다.
세월이 흘러
우리의 머리가 희어지고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날이 와도
끝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이 있습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그 자리에는
언제나 그대가 머물러 있다는 것.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떤 순간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는 오늘도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대라는 따뜻한 계절 속에서 살아가렵니다.
354.석류
빨간 보석
알알이 품고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린 알주머니.
먹으면 예뻐진다는
달콤한 소문 따라
동네 수다쟁이 누나들
살금살금 다가와
눈도장 콕콕 찍는다.
날마다
볼이 발갛게 익어 가던 석류
어느새
햇살을 한가득 머금고
빨간 보석
알알이 웃으며
톡톡 터뜨린다.
355.짝사랑
철쭉나무 곁에 기대어
조용히 오르는 나팔꽃.
가느다란 덩굴손으로
말없이 감싸 안고
작은 바람에 속삭인다.
“좋아해… 좋아해…”
전하지 못한 마음은
보랏빛 꽃잎에 담아
바람 따라 띄워 보낸다.
하지만 철쭉나무는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래도 나팔꽃은
아침마다 피어난다.
돌아오지 않는 마음에도
꽃은 피어나고
향기는 머문다.
오늘도 나팔꽃은
하늘을 향해
작은 나팔을 분다.
“좋아해… 좋아해…”
356.왕산 백일홍(王山 百日紅)
천년 하늘 붉은 노을
한 줄기 내려와
왕산 기슭 한 그루 꽃으로
긴 세월 피었구나.
염천(炎天)에 몸을 사르며
붉은 뜻 홀로 밝히고,
솔바람(松風)에 옷깃 여미어
옛 혼을 깨우는가.
잎새마다 바람의 글월 새겨 두고
어느 길 그리 서둘러 가는가.
옛 님의 발자취 따라
먼 길 찾아가는가.
화려한 꽃빛도
추풍(秋風) 앞에서는
한 조각 구름처럼 흩어지고,
빈 가지 홀로 서서
말없는 세월을 품으니
꽃 진 뒤 남은 것은
오직 붉은 마음뿐이네.
가슴 깊이 쇳덩이 하나 품고
사백 년 긴 밤을 지새운 뜻,
이는 한낱 꽃의 피고 짐이 아니요
충혼(忠魂)의 맥이요
하늘 향한 굳은 맹세라.
갈바람 부는 저녁
꽃비 되어 내려오면,
왕산 표충단(表忠壇) 백일홍아,
푸른 뜰 위 붉게 잠들어
옛 사람의 넋을 품고
오늘도 너혼자 피어 있구나.바람도 나누어 줍니다
357.오늘은 대서입니다.
하늘은 뜨거운 불꽃을 풀어놓고,
햇살은 지붕 위에 오래 머물러
집 안의
작은 숨결마저 달아오르는 날입니다.
어젯밤,
우리 집의 작은 여름 한 조각이
먼저 잠들었습니다.
차가운 구름을 품고 있던 에어컨은
아무 말 없이 멈추었고,
방 안에는
뜨거운 밤의 숨결만 가득했습니다.
나는
오래된 선풍기 하나를 꺼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바랜 몸체를 닦은 뒤
조심스럽게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잠시 멈춰 있던 낡은 날개가
느리게,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작은 바람 하나가 방 안을 건넜습니다.
시원함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조용한 위로였습니다.
누군가 건네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다시 깨운 작은 바람.
오래된 선풍기는 알고 있었을까요.
작은 날개 끝에서도
누군가의 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낡은 것에도 다시 누군가를
품을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바람은 늘 높은 곳에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낡은 날개 끝에서도 불어오고,
서로를 향한
마음속에서도 피어났습니다.
오늘 밤,
우리 집에는 차갑고 강한 바람 대신
조용히 서로를 살피는
따뜻한 바람이 머뭅니다.
작은 바람 하나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 온기는 오래도록
우리가족 기억에 남아있을것입니다.
358.풀
길가에 선 풀을
함부로 잡초라 부르지 마라.
세상이 지나가며 남긴 상처마다
가장 먼저 내려앉아
푸른 실로 꿰매는 바늘이다.
지친 발걸음의 무게를
말없이 제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바람이 흘리고 간
이름 없는 한숨마저
푸른 침묵으로 한 땀 한 땀 봉합해
다시 땅의 숨결로 돌려놓는다.
꽃은 한 계절을 피워
눈부신 시간을 남기지만,
풀은 보이지 않는 날들을 이어
찢어진 세월을 봉합한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눈물 흘리고 떠난 자리엔
언제나 가장 먼저
푸른 숨 하나 돋아난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풀 한 포기.
오늘도 세상이 더는 찢어지지 않도록
낮은 몸으로
땅을 꿰매는
가장 오래된 손끝이다.
359.엄니는
꽃샘바람 매섭게
마당 끝을 서성이던 날이면
구슬 쥐고 놀던 손,
딱지 접어 내기하던 손,
흙먼지 뒤집어쓰며
병정놀이하던 까만 손이
어김없이
엄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얀 달빛 닮은 가슴에
내 작은 손 녹여 주시며
“춥제, 이리 온나”
짧은 한마디에 담긴
세상 가장 깊은 사랑.
그 품의 온기는
세월 너머에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았다.
발 시리다 칭얼대던 날,
어리광 부리던 날에도
말없이 등을 쓸어 주시며
“조금 있으면 괜찮다”
하시던 엄니의 손길.
바람처럼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온기는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가슴 깊은 곳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당신이 남기고 간
포근한 그리움 한 자락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지친 하루 끝마다
작은 봄을 피워 낸다.
엄니는 가신 게 아니다.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 속에 계시고,
햇살 고운 날이면
햇살 속에 계시고,
꽃 피는 날이면
꽃잎 사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계절이 몇 번을 갈아입어도
엄니는 그대로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왜 그리 참고 사셨는지,
왜 아픈 몸 감추며
내 웃음 하나에
당신의 봄을 피우셨는지.
나도 어느새
엄니를 닮아 간다.
누군가 추우면
품을 내어 주고,
누군가 힘들면
말없이 등을 토닥이는
그 깊고 조용한 사랑의 길을
조금씩 걸어간다.
엄니는 그랬다.
떠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물러
오늘도
따뜻한 봄으로
살아 계신다.
360.꽃기린
가시의 숲에
붉은 불씨 하나 밝히는 꽃기린.
아픔은 줄기 깊이 스미게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도 아침을 연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면
달빛을 오래 품은 끝에
꽃잎마다 맑은 침묵을 매단다.
또르르, 또르르.
새벽이 흘리고 간
작은 은빛 방울.
그것은 울음이 아니라
가시를 견딘 시간이
마침내 흘려보낸 빛이다.
오늘도 너는
상처를 꽃으로 덮지 않고
가시를 버리지도 않는다.
다만,
붉게 살아 냄으로
침묵마저 꽃으로 피워
세상보다 먼저
꽃이 된다.
361.고모령
경부선 철길 따라
포도송이 익어 가던 계절,
도란도란 모여 장난처럼 담을 넘던
어린 손끝은 녹슨 레일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금은 담 너머 보이지 않는 고모령은
사라진 길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 접혀 있는
한 장의 낡은 지도다.
눈을 감고 이름을 부르면
고향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품을 펼쳐
나를 다시 어린 저녁으로 데려간다.
고모동 길가의 철조망은
세월이 걸어 둔 오선지,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은
달보드레한 어머니의 손끝이다.
길 잃은 발걸음마다
달빛은 말없는 등불이 되고,
바람은 지친 어깨 위에
고향의 체온을 살며시 얹어 놓는다.
팔현마을을 지나면 형제봉은
저녁노을을 오래 품은 숯불처럼 붉어지고,
고모로에 핀 주홍빛 능소화는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다
끝내 하늘에 닿지 못한
어머니의 기도가 되어 피어난다.
비 내리는 만촌동 고모령 노래비는
돌이 아니라
세월이 펼쳐 놓은 한 권의 기억이다.
이름 없이 스쳐 간 사람들의 발자국은
빗방울마다 다시 글자가 되어
천천히 가슴을 적신다.
팔현과 성동, 가천 그리고 시지는
오래된 나무가 뻗어 낸 가지들.
뿌리는 먼 시간을 붙들고 있어도
새잎은 이곳의 바람을 먹고 자라
고모령이라는 푸른 그늘을 드리운다.
고모령에 비가 내리면
잠든 마을은 물결처럼 숨을 쉬고,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 이야기들은
철길을 따라 흐르는 바람이 되어
세월의 녹을 천천히 벗겨 낸다.
오늘도 나는
고모령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고모령이 내 안을 천천히 걸어간다.
쏜살같이 흘러간 반백 년은
강물 저편으로 멀어졌어도
기억은 포도 향기처럼 깊게 익어
철길 끝 저녁노을 속에서
말없이 나를 기다린다.
고모령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 없는
고향의 심장이다.
오늘도 그 심장은
빗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힘차게 뛰고 있다.
362.바람의 숨결
손끝에서 피어난 바람도,
부채 끝에 매달린 바람도,
기계의 심장이 빚어낸 서늘함도
저마다 여름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숲을 건너온 바람은
새의 노래를 날개처럼 달고,
풀잎의 향기를 옷깃에 두른 채,
햇살마저 푸른 빛으로 식혀 데려온다.
그 바람이
가만히 내 뺨에 입을 맞추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가장 시원한 것은
바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나무들이 잎으로 엮어 낸 기도,
흙이 뿌리로 길러 낸 생명,
그 깊은 숲이 세상에 내어준
한 줄기 숨결이라는 것을.
363.팔공산 카페에서
비는 팔공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창가에 머문 커피 향은
젖은 시간 위로 고요히 피어오른다.
끝내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 하나,
찻잔 가장자리에 남은
온기처럼 천천히 식어간다.
눈을 감으면
안개 너머 한 사람이 걸어오고,
눈을 뜨면 빗방울만
유리창을 오래도록 두드린다.
떠나간 발자국은
아직도 내 계절 한켠에 머물러,
낯익은 풍경이 되어
비 올 때마다 조용히 길을 건넌다.
지금도 어디선가 같은 구름 아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까.
망설임은 젖은 잎끝에 맺혔다가
바람을 따라 말없이 흩어진다.
끝내 닿지 못한 말들은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팔공산 능선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비 그친 창가에는
은은한 커피 향만 남고,
빈 찻잔 곁을 스치는 안개 한 줄기.
그것이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의 마지막 인사였다.
364.난꽃이 피었다
창가에
난꽃 한 송이 피었다.
오랜 침묵은 향기가 되었고,
보이지 않던 시간은
뿌리 끝에서
꽃잎 한 장씩 빛을 밀어 올렸다.
여름의 땡볕은
창틀에 오래 머물렀으나,
난은 그늘을 품은 향기로
하루를 건너갔다.
창가에 핀 것은
꽃 한 송이.
오래 바라볼수록
시드는 것은 꽃이었고,
끝내 남는 것은 향기였다.
365.마른 오후의 정원
늘어진 석류 한 송이
붉은 시간을 매달고
가지 끝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피다 멈춘 도라지꽃은
끝내 부르지 못한 하늘의 노래를
푸른 침묵으로 품는다.
바람 없는 오후
천사나팔은 아직 피지 않은 별빛을
가만히 품고 있고,
푸름을 향해 뻗는 소나무는
말없이 하늘의 높이를 익혀 간다.
꽃과 잎마다
저마다의 계절을 살아낸 흔적.
마른 오후의 정원은
고요히 생명의 책장을 넘긴다.
그 곁에서 에어컨은
찬 바람으로 여름을 어루만지고,
나는 작은 글자마다 마음을 심으며
조용히 한글의 숲을 거닌다.
366.두두썸동
금호강은
한여름의 심장처럼 뛰며
푸른 숨결을 물결 위에 풀어놓았다.
늘 걷던 벚꽃길엔
축제를 기다리던 미소가 번졌고,
강변은 저마다의 발걸음을
말없이 품어 안았다.
물대포가 하늘을 가르자
열기는 물꽃으로 흩어지고,
환호는 물결을 타고
여름 끝자락까지 번져 갔다.
청춘의 노래는
바람의 등에 실려
금호강 깊은 물결을 흔들고,
강은 오래 잠들어 있던 추억마저
조용히 일깨웠다.
해가 저물자
드론은 밤하늘에 별자리를 수놓고,
불꽃은 강물 위에 또 하나의 하늘을 피워
여름밤을 환하게 밝혔다.
그날의 금호강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계절과 시간을 잇는 다리였다.
축제는 막을 내렸어도
여름은 물길을 따라 흐르고,
그날의 환호는
물결 깊은 곳에 빛으로 잠들어
해마다 같은 여름을 다시 깨운다.
367.가고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은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강물은 굽이마다 시간을 새기듯
우리도
우리만의 흔적을 남기며
길 위를 걸어가자
어차피
오는 것은 시작의 문이고
가는 것은 끝의 문이지만
그 사이 잠시 머문 날들이
삶이라는 이름의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을
피는 꽃은 계절을 품고
지는 꽃은 바람을 품듯
만남도 이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한 장의 풍경일 뿐
그러니
붙잡지 말고
서두르지도 말자
오는 것은 맞이하고
가는 것은 보내주며
흐르는 시간의 강 위에
잠시 머문 바람처럼
그저
우리답게 살아가자
368.그 자리
소나기는
하늘의 먼지를 씻은 뒤
벤치 위에
젖은 빈칸 하나를 두고 갔다.
나뭇잎 끝 물방울은
비가 미처 거두지 못한
시간의 조각이었다.
바람 하나 지나가며
빈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이름 없는 온기를 만지고
말없이 돌아섰다.
그 자리는
비어 있어서 더 깊었다.
기다림도, 이별도 없이
시간이 잠시 내려놓은
작은 의자 하나.
비둘기 한 마리
젖은 날개를 털며 다가와
고개짓 하나 남기고
하늘의 낮은 틈으로 사라졌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벤치는 다시 비어 있었다.
다만 그곳에는
떠난 것들의 그림자와
아직 마르지 않은 한순간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369.소문
처음에는
입술 사이에서 피어난
아지랑이 같은 입김이었다
작은 말 한마디 등에 업고
허공을 떠돌다가
바람의 등을 빌려
구름 너머로 달아났다
희미했던 그 빛은
수많은 귀를 지나는 동안
낯선 얼굴을 하나씩 얻었다
누군가의 한숨이 되고
누군가의 의심이 되고
때로는 이름 없는 상처가 되어
골목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철길을 흔드는 기적이 되고
먼 곳을 깨우는 메아리가 되어
큰길을 건넜다
낡은 손수레처럼
느리고 무겁게
사람들의 발밑을 지나갔다
뒤돌아선 사람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 산만 바라본다
그러나
자신이 흘려보낸 바람은
수많은 입술을 거쳐 돌아와
끝내
자신의 발자국 위를 밟으며
말없이
뒤따라 걷는다
370.민소관(民疏官)
민심은
봄날의 새싹처럼
소리 없이 돋아납니다.
기쁠 때는
나라를 감싸는 봄바람이 되고,
아플 때는
백성의 삶에 스미는 빗물이 됩니다.
작은 목소리가
세상의 소음에 묻힐 때,
민소관은
귀를 열어 한숨을 듣고
마음을 열어 작은 바람까지 품습니다.
“작은 민심의 울림 하나가
내일의 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오늘도 민소관은
백성의 마음과 나라를 잇는
살아 있는 다리가 되어
묵묵히 걸어갑니다.
371.별바래기
별을 바라보고
별을 이야기하며
별을 품고
별을 노래하고
별을 꿈꾸며
별을 그리워한다.
높고 넓은 하늘이 있어
별은 머물 수 있고
깊고 어두운 밤이 있어
별은 더욱 빛난다.
오늘은
별 볼 일 없는 하루일지라도
내일은
별처럼 빛나는 하루가 된다.
수많은 별무리 속에서
서로의 별을 찾아
웃고 떠들며
마음껏 빛나는 우리들.
낮에는 햇살에 잠들고
밤이면 외로움을 속삭이는 별 하나
오늘도 내 마음 위에 내려와
조용히 꿈을 꾼다.
별처럼 살자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에게 하나뿐인 별,
너는 나에게 하나뿐인 별
서로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니까.
372.추억은 지지 않는 꽃이다
친구들을 만나던 길이
어느 날부터
그리움으로 걷는 길이 되었다.
한때는 당연했던 웃음소리와
마주 앉아 나누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꽃으로 피어난다.
함께 걷던 길도
따뜻했던 차 한 잔의 시간도
세월 따라 멀어졌지만
추억은 떠나지 않는다.
오래된 사진 속 미소처럼
마음 한켠에 조용히 머물며
오늘의 나를 밝혀주는
작은 등불이 된다.
만날 수 없는 날에도
친구들은 내 마음 뜰에 피어
계절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이 된다.
373.꽃사슴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멀어질수록 사라지는
꽃잎 같은 순백의 영혼
눈가엔 푸른 이슬 머금고
먼 길 돌아온 그리움은
말없이 시간을 품는다
닿고 싶은 마음은
얼음의 창살 앞에 멈추고
뜨거운 세상 앞에 숨는다
갈대숲 저 너머
희미한 발자국 하나
바람에 지워지고
내 그림자만 홀로 남는다
왜 떠나며
뒤돌아보았을까
스쳐간 인연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선다
사계절 등에 꽃밭을 지고
나는 오늘도 걷는다
기다림의 모닥불 곁에서
조용히 깨닫는다
찾던 꽃사슴은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피어난
한 송이 그리움이었다
374.앞산 빨래터
앞산 길을 더듬으니 맑은 물이 반기고
산새 쉬는 빨래터엔 어머니 숨결 어린다.
돌 위에 두 손 적시며 사랑부터 빨아내니
고단했던 하루살이 물결 따라 흘러가고.
햇살 한 줌 품에 안고 다시 앞산 찾았더니
잊고 살던 내 마음도 맑은 물에 씻겨 오네.
375.부모
먼 길 떠나는
작은 새를 위해
둥지는
제 온기를 나누고
밤마다 바람을 막아준다
내일의 하늘을 꿈꾸며
오늘의 햇살도
기꺼이 내어준다
꽃을 피우는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열매는 익어
제 빛으로 물들면
어느 날
스스로 피어난 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땅속에는
한 생을 바쳐
물을 길어 올린
부모라는
깊은 뿌리가 있다.
376.세월 베어 눕다
흰 구름 강물 되어
노을 밴 산마루에
굽은 나뭇가지마다
저녁빛이 내려앉네
꽃잎은 몇 봄 지나
바람 따라 흘렀는가
가슴 속 묵은 뜰에
푸른 꿈이 잠들었네
빈 뜰의 오래된 돌
이끼 옷을 걸친 채로
한 평생 품은 향기
베개 삼아 누웠구나
377.어머니의 가슴
어머니 작은 가슴에는
평생 꺼지지 않는
별 하나가 살았다.
자식이라는 이름을 품고
찬 새벽 부엌 불빛 아래
젖은 손으로 하루를 열며
먼 길 떠난 자식의 안부부터
먼저 묻던 사람.
자신의 봄은 뒤로 미루고
우리의 꽃만 피워낸
말없는 나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높은 목소리로 웃을 때에도
어머니는 낮은 그늘이 되어
말없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좋은 것은 먼저 내어주고
모자란 것은 자신에게 돌리며
"맛있다, 배부르다."
한마디로
가난한 저녁마저 따뜻하게 밝히던
작은 등불.
이제는 찾아온 얼굴 앞에서도
기억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아
희미한 불빛처럼
가만히 흔들리는 어머니.
돌아보면
미뤄둔 시간은 모두 내 것이었고
기다린 세월은 모두 어머니의 것이었다.
오늘 맑은 하늘 아래
나도 부모가 되어
가슴 깊은 곳에
늦게 피어난 별 하나를 품는다.
그 별은
평생 나를 비춰온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378.소문
손수레는
바퀴를 굴리고
자전거는 페달을 밟고
오토바이는
굉음을 앞세우고
자동차는 질주하고
비행기는 날개를 편다.
먼 산을
바라보던 사람이
머리를 긁는다.
그보다
먼저 고개를 넘은 것은
발도 없고 날개도 없는
작은 입 하나.
379..구름에게
구름아,
뜨거운 태양 앞에
넓은 품을 펼쳐
하루를 감싸주니 고맙구나.
네가 흘리는 빗방울은
메마른 땅의 눈물이 아니라
생명을 깨우는 희망이겠지.
너도 얼마나 뜨거웠을까.
온몸으로 햇살을 품고
기꺼이 비가 되려는 마음.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아도
너의 사랑은
우리의 발걸음마다
시원한 그늘이 되어 머문다.
380.입추
절기는
가을 한 장을 넘겼는데
한낮의 태양은
아직도 여름의 불씨를 머금고 있다.
태풍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하늘은
숨결마저 접어 둔 채
푸른 적막만 깊어진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짙은 그늘을 베고
오후의 꿈을 길게 눕히고,
금호강은
푸른 비단을 천천히 접으며
계절 하나를 물속 깊이 감춘다.
보이지 않는 가을은
바람보다 먼저
강물의 숨결에 스미고,
풀잎 끝에 맺힌 고요는
어느새 내 마음에도
첫 단풍 한 잎을 물들인다.
계절은
소리 없이 강을 건너왔는데,
한낮의 태양만
끝내 여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381.가을
잔물결 위 단풍잎 하나
가을빛을 피워내고
솔바람에 춤추는 잎새
가을 향기 머금누나
달빛 어린 가을밤은
고요 속에 잠드누나
382.그리움인지
강가 버들 끝 고드름 하나
봄볕 따라 녹아내려
긴 겨울도 살며시 가네
가물가물 옛 벗 얼굴
꿈결처럼 피어나는 밤
호주머니 전화 꺼내
먼 길 열차시간을 찾아보네
383.삐짐
삐죽한 한마디가 가시 되어 스쳤던가
톡 쏘던 그 입술엔 서운 바람 불었나니
감춰둔 내 사랑은 마른 가지 봄눈처럼
오늘도 꽃망울 터뜨린다
384.기다림
보고픈 벗들아, 모두 평안한가.
가물거리는 기억은
저무는 어제에 접어 두고
달력 한 귀퉁이만 조용히 넘긴다.
창가의 햇살은 천천히 식어 가고
오래된 찻잔에는
봄의 체온이 남아 있다.
황소눈처럼 깊어진 눈길은
먼 산마루를 몇 번이나 넘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바람의 빈 발자국뿐.
오늘도 나는
한 걸음 늦게 너를 기다린다.
385.속마음
스친 바람인 줄 알았는데
먼저 돌아선 것은 낙엽이었고,
가슴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렸다.
조심스레 봄 한 송이 내밀었더니
돌아온 것은 차가운 돌 하나,
나 또한
메마른 메아리 하나 던지고 말았다.
빈 깡통 같은 한마디는
가슴 골짜기를 오래도록 맴돌고,
끝내 닿지 못한 진심은
깊은 우물 속 달빛이 되어
고요한 물결 위를 밤새 흔들리다,
새벽 첫빛에 조용히 스며든다.
386.웃음꽃
걸어온 길 끝에
말없이 묻어 둔 씨앗 하나,
보이지 않는 계절을 품더니
어느새 향기로 피어난다.
지난 시간은 꽃잎이 되어
입술보다 먼저 웃고,
굳게 잠긴 마음에도
봄눈 녹듯 빛이 스민다.
한 송이 미소는
바람을 닮아 번져가고,
머문 자리마다
따뜻한 계절 하나 놓아둔다.
한 사람의 웃음이
천 개의 마음에 꽃씨를 심으면,
세상은 어느새
꽃길보다 깊은 꽃밭이 된다.
387.도로 중앙선
가장 낮은 곳에 누워
가장 높은 질서를 세운다.
노란 두 줄은
말 없는 강물처럼 길을 가르고,
넘지 말라는 침묵으로
수많은 숨결을 지켜 낸다.
발아래 있다고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낮음을 품은 선 하나가
오늘도 생명의 방향을 그린다.
388.입추
문을 여니
달력은 가을이라 적혀 있고,
햇살은 아직도
여름의 불씨를 품고 있다.
계절은 먼저 이름을 보내고
바람은 천천히 뒤를 따른다.
그 사이, 한 잎의 마음이 먼저 물든다.
389. 봄 속에 여름
꽃들은
햇살을 한 모금씩 마시며
빛의 숨결을 여민다.
흩어진 구름은
흰 손바닥을 펼쳐
불붙는 하루를 살며시 감싸 안고,
검은 비 한 줄
목마른 꽃잎의 입술을 적시면
하늘 끝에는
노을 한 송이 붉게 피어난다.
봄이라는 얇은 껍질 속에서
여름은
푸른 씨앗 하나 품은 채
말없이 익어 간다.
390. 그날
작은 심장은
새 한 마리 품은 가지 끝에서
가만히 떨고,
등 뒤에 머문
한 줄기 따뜻한 바람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펼친다.
날개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믿음이
가슴속에 새겨 준
빛의 모양이었다.
그날,
한 사람은
조금씩 새벽을 닮아 갔다.
391. 봄이다
굳게 다문 흙의 입술에
맑은 물 한 방울 스미자,
잠들어 있던 초록의 맥박이
조용히 땅을 밀어 올린다.
꽃은
햇살의 언어를 먼저 익히고,
바람은
향기로 안부를 건넨다.
늦잠 자던 봄비마저
발끝을 맞추어 걷는 날,
세상은
누군가 처음 펼쳐 읽는
동화책 한 장이 된다.
392. 봄이 오면
꽃은
햇살을 한 겹 걸치고
웃음으로 가지를 밝힌다.
창가를 스치는 향기는
식탁 위의 침묵까지
환하게 물들이고,
아기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잎.
봄은
들판에서 오는 계절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마다
조용히 피어나는
한 송이 빛이었다.
393. 마음의 꽃
들꽃은
바람 한 철을 품고 지지만,
가슴 깊은 흙에 심긴 꽃은
계절의 이름을 잊는다.
눈물은
그 꽃을 적시는 맑은 샘이 되고,
그리움은
보이지 않는 향기로 머문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사랑도
어느 새벽,
가슴 한쪽에서
이름 없이 다시 피어난다.
394.그리움에 취하다
말없이 스미는 빛처럼
당신은 어느 날
내 마음 한쪽에 내려앉았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날이면
창가에 오래 머문 햇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혹시 그 빛을 따라
당신이 돌아올 것만 같아서.
저녁이면 당신의 이름을 씁니다.
바람이 한 자 한 자 지우고
별빛이 그 자리를 다시 채워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이름.
당신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나는 식어가는 그 온기를 더듬으며
기억의 길을 천천히 걷습니다.
바닷가에 부서지던 파도,
고택 돌담을 스치던 발자국,
말없이 맞잡았던 손끝.
그날의 바람은 지나갔지만
손끝에 머물던 온기는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데려갔지만
기억까지 데려가지는 못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리움은 기다림이 아니라
시간의 손길도 닿지 못한
한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부르지 않아도
내 안에서 먼저 피어나는 이름,
내가 잠들기 전
가만히 곁에 앉는 이름이기에.
나는 그 이름 곁에 앉아
지나간 시간을 바라봅니다.
창밖에는 밤이 깊어가고
멀리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나는 오늘도
당신이 남기고 간 별빛 한 조각을 품고
말없이 밤을 건넙니다.
그리움에 취한 사람처럼.
395.그런 사람이 좋더라
꽃잎처럼
알록달록한 맞장구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마음의 결을
가만히 읽어주는 사람이 좋더라.
어둔 길목에서는
말없는 등불 하나 되어
조용히 곁을 밝혀주고,
긴 계절이 지나
수많은 얼굴들 사이에서도
문득 내 이름 하나
기억해주는 사람이 좋더라.
마음은 바람 같아서
머문 자리도 잊은 채
소리 없이 멀어져 가지만,
기억은 지지 않는 별이 되어
먼 밤 하나
오래 밝혀주기도 하더라.
누군가의 마음 한켠에
작은 별 하나로 남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리라.
긴 외로움의 밤에도
한 번쯤은 마음이 따뜻해질 테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좋더라.
말없이 곁을 지키고,
멀리 있어도 잊지 않는 사람.
긴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는 좋더라.
언제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