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사드>(1964)와 <모킨포트 씨의 고통제거법>(1968)은 소설 <저항의 미학Die Athetik des Widerstands>으로 유명한 독일 태생의 유대인 작가 페터 바이스Peter Ulrich Weiss(1916~1982)의 희곡 작품이다. 페터 바이스는 그동안 우리에게 반체제, 사회주의 작가로 딱지가 붙어 일반 공연무대에 올리지 못하던 작가였다. 그러다 1995년 4월 <마라/사드>와 <모킨포트 씨의 고통제거법> 두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올랐다.
어린 시절 유대인에 대한 핍박을 피해 부모와 함께 체코, 스웨덴 등으로 망명생활을 한 페터 바이스는 연극 연구자들에게는 혁명극 <마라/사드>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초기에 개인주의적, 형식주의적인 전위작가 정도로만 알려졌던 그는 1960년대 ‘기록극’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아 이념적, 정치적 참여의 경향을 보이다가 말기에는 가치중립적인 작품세계로 복귀한 작가다.
1995년 극단 오늘은 극단적인 인물들과 여러 시간대를 뒤엉켜놓고 오늘을 조망하는 <마라/사드>(연출 위성신)을 국내 무대에 올렸다. 장 폴 마라는 프랑스혁명 당시 노동자층을 혁명의 중심으로 인식한 마르크시즘의 분위기를 풍기던 지도자. 때문에 일부 혁명세력에 공포의 대상이던 마라는 1793년 7월 13일 한 여인에게 살해당한다. 1808년 같은 날 사디즘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드 후작은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자들을 모아 이 사건을 재현하는 연극을 연출하며 자신도 출연한다. 사드가 정신병원에서 연극을 했다는 것과 마라 살해 사건은 각기 역사적 사실이다. 단지 두 사건이 결합된 것뿐이다.
이 연극은 삼각의 틀을 유지한다. 먼저 1995년 현재의 인물인 ‘진행자’가 1808년 사드의 연극 속에 뛰어들어 1793년 마라 살해 사건을 재현하며 이를 오늘의 시점으로 끌어오는 삼중극 형식을 취한다. “나는 혁명이다”고 외치는 마라, “아무나 붙들고 살을 섞지 못하면 그게 무슨 놈의 혁명이냐”며 또 다른 혁명을 꿈꾸는 사드, ‘광기’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정신병자들이 또 다른 삼각구조를 이룬다.
특히 정신병자와 사드는 “비정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사하는 것이 ‘정상’이란 임의의 기준을 세워 여기에 어긋나는 것들은 광기, 변태 등의 굴레를 씌워 가차없이 사회에서 추방해 나가는 권력의 실체를 캐는 방법”이라는 미셸 푸코의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연출진이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고전적 혁명을 상징하는 마라와 이성 시대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드 가운데 누구를 극의 중심에 놓을 것인가 하는 작품 해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번 바뀌어 왔다. 애초 페터 바이스는 초현실주의 화가였다. 그래서 그는 1925년 ‘공산주의에 대한 초현실주의 운동의 공식적인 참가’를 선언했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의 행동주의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작가 자신이 가장 만족한 공연이 혁명가 마라를 중심에 놓고 저항적 관점을 부각시킨 1965년의 동독 공연임을 짐작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는 1964년 사드 중심으로 연출된 서베를린 공연과는 다른 작품 해석이었다.
1991년 위성신 연출가가 처음으로 중앙대에서 상연했던 <마라/사드>도 전적으로 마라를 중심에 놓았었다. 그러나 1995년 공연은 1980년대와 달리 이념이 사그라진 당대의 바뀐 상황에 맞춰 사드와 광인들을 극 속에서 충분히 살려 “우리는 지금 무슨 사상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사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래서 부제도 ‘유희적 다시 읽기’였다. 마라의 열정으로 보냈던 지난 시대가 정말 다시 읽어야 할 만큼 어둡고 음습했는지는 보는 이가 느껴야 할 몫이다.
<마라/사드> 초연보다 4년 뒤인 1968년 첫 선을 보인 <모킨포트 씨의 고통제거법>은 1995년 당시 극단 가교가 <목공지 씨 못봤소?!>(연출 이송)라는 제목으로 상연했다. 영문도 모르고 감옥에 갇힌 ‘목공지’라는 인물이 전 재산을 빼앗긴 후 자유의 몸이 된 뒤 뇌수술을 받지만 고통을 해결할 치유책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거대한 조직사회에서 나약한 한 인간이 피폐해져가는 과정과 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우화적인 형식을 빌려 바보연극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