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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태조 이성계ㅡ
이성계가 돌아가신 부친 환조의 좋은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그 마을에 사는 나무꾼 아이가 산에가서, 나무를 하다가 두 스님이 아래위의 땅을 가리키며 ‘저기는 장상(將相)’이 나고 ‘여기는 왕후(王侯)’가 나는 터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그래서 이성계가 부친의 묘자리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있는 기라,
달려가서 이성계에게 이 말을 알렸고,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는 10여 리를 달려가 길가에서 쉬고 있는 두 스님을 만나, 집으로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성계가 두 스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이튿날 떠나려는 것을 다시 하루를 더 머물게 해 잘 대접한 다음, 부친 묘 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랫드니 두 스님들은 처음에 고런 건, 모른다고 하다가, 하루 더 유숙한 후, 후한 대접에 감사하는 뜻에서 묘지를 잡아주겠다 했습니다.
두 스님은 한 경관이 빼어난 곳에 가더니, 두 곳을 짚으며, “이곳은 장상(장수와 재상)이 나고, 저곳은 왕후가 나니 알아서 택하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가 왕후가 난다는 곳을 택하니, 나이가 많은 노승이 너무 욕심이 과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사람의 일은 최상을 추구해야만 그 다음 정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드니,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그럼 좋은 대로 하라면서" 그말만 하고는 떠나는 거였습니다.
그 두 스님 중 노승은 아마 무학대사의 스승이신 나옹선사이고 젊은이는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인 것 같았다는 그런 설이 후세에는 전해지고도 있는데,글세나다.
이 묘자리외에도' 이승계와 무학 대사와의 연은 이승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왕이될거란걸, 예측하는 해몽을 해주기도 했다"고도,하고 또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서울)에다 터를 잡아주고 고기다가 대궐을 지어서,오늘의 서울이 있게한, 고런 대사이기도 했다는 전설 얘기도 있습니다.그리고 사석에서는 서로가 친구처럼 반말도 해다고도 하고요....?
두분은 고런 사이였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