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이야기 26] ㅡ '예언'에 관하여
여러분은 '예언'이란 단어를 좋아하십니까?
하지만 관심은 있으시되 좋아해서는 안 되는 말이 '예언'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언'이란 단어는 항상 불길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유명한 예언가들의 예언들은 하나같이 '종말'과 같은 비극을 말합니다.
무당의 복점이란 것도, "올해 삼재가 들었어."라는 비극적 결말의 암시가 전제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언이란 말은 인류에의 경고 표시(시그널)와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예지의 언어로서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지이자 통찰의 주장입니다. 즉, 현재에 있지 않은 미래로 향하는 '길 없는 길'에 이정표를 세워 인도하려는 겁니다. 이것을 정치적 표현으로 하자면 '리더십' 정도가 되겠습니다.
예언들 가운데서는 매우 조잡하고 일관성 없이 조리가 서지 않아 오히려 총체적 부조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무수히 많습니다.
일종의 때려맞추기식입니다. 가령, 로또 맞추기나 퍼즐 조각 맞추기 혹은 점괘 맞추기 등과 같은.
그리고 여기에는 온갖 수식어들이 붙고 억지 해석들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혼란은 오히려 증폭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김건희 명품백과 주가조작에 대한 소환조사를 하겠다고 한 데 대해 예측들이 분분합니다. 대충 두 가지 추측으로 집약되는데, 적당히 수사해서 혐의 불충분이나 불기소 처분으로 싼 값에 면죄부를 주려 한다거나, 레임덕에 빠진 윤석열에 칼을 빼들었다거나, 둘 중 하나라는 예측입니다. 그러니 결과를 지켜보자는 겁니다.
'모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인 지 저것인 지 정확히 지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모든 가능성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는 식의 열려 있는 상태로 사실은 이도저도 아닌,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않은, 어정쩡한 엉거주춤의 상태(태도)라는 것이지요. 나쁘게 말하면 박쥐의 표상이라 말할 수 있고, 좋게 말하면 중립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속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검의 진행 속도에 맞춰서 가겠다는 취지(태도)로 보입니다. 마치 모든 점괘들이나 모든 예언들처럼 "이현령비현령"의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들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유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를 보면, 무엇을 상실했는 지의 목적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상실, 인간에 대한 신뢰의 상실, 인간성의 상실 등을 가리키는 것 같지요.
인간성의 상실은 곧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실한 것이 되겠고요. 입으로 가치를 말하는 사람이 지닌 가치란 것이 무엇인 지 모를 때, 서로 믿고 의지하고 보호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연대감이 사라졌을 때, 무정부 상태에서 각자도생으로 온몸에 가시를 돋우며 홀로서기를 해야만 할 때.
붕괴, 불안, 불행, 공포, 혼돈, 아노미, 단절, 좌절, 절망 등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나타날 때 비극을 예고하는 각종 예언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봅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누가 잘 맞추나'에만 초점이 맞춰져 비극적 현실을 망각하고 가치관의 붕괴와 혼란을 더욱 키운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섬뜩한 예언을 소개합니다. 물론 둘 다 비극적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쪽집게(족집게)처럼 "때려맞춘다."는 데 강조가 있지 않고, 경고의 시그널입니다. 즉, "미래를 준비(대비)하라."는 겁니다.
kjm / 202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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