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부르는 감사생활 단 6:10, 22-23
홍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특히 방역당국과 의료진)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코로나19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엄중한 상황이다. 교회가 감염병의 확산 통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하다. 이 질병은 소위 기독교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일반 상식과 얼마나 동떨어진 채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예수님조차 볼모로 잡힌 것 같다. 제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이들에게 미혹되지 마라. 씁쓸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이런 중에 인터넷에서 평화운동가인 박노해 시인의 사진에세이집인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을 보게 되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농부가 거친 땅을 일구는 모습이었다.
“사막을 달구던 태양이 저물어가면 흰 잘라비를 입은 수단의 농부들은 나일 강물을 끌어다 이랑을 내고 씨앗을 뿌린다. 거대한 모래폭풍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그동안의 노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말라 죽으면 다시 심고 또 말라 죽으면 다시 심는 일을 원망도 불평도 없이 해나간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일강 주변으로 ‘푸른 띠’를 이루며 넓어지는 농토와 숲, 날마다 반복되는 농부들의 성사聖事 덕분에 오늘도 불타는 사막에 푸른 생명이 자라난다. 나는 걸음마다 황무지를 늘려가는 사람인가. 걸음마다 푸른 지경地境을 넓혀가는 사람인가.”
어려울 때 투덜거리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투덜거림은 약자의 버릇이다. 하지만 곤경에 처해서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숙명론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은 언제든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고, 삶의 방향을 바꿔놓곤 한다.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말라 죽는 작물들 위에 새로운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강고한 의지이다. 희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농토와 숲이 푸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농부들의 그런 끈질김 덕분이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또 우리가 감사하는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래서 대개 보면 남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는 사람보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잘 된다. 받는 사람은 나중에 또 더 받기를 좋아한다. 또 받은 일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운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베풀고 나서도 또 더 베풀고 싶고 또 자기에 대해서 어떤 유익과 자기의 어떤 소득을 생각하기보다도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항상 자기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다. 이런 분들의 생활은 정말 행복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우리가 남을 도와주는 것은 내가 꾸어주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언젠가는 받을 날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 감사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 비치면 그 생활은 맑음이다. 감사의 햇살이 불평의 구름에 가리면 그 생활은 흐림이다. 그리고 그 불평이 연속되면 그 생활은 장마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다. 불행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 행복한 사람이라도 불평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감사하라.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을 놓고 감사하고, 보는 것마다 감사하라. 감사하면 내가 행복해 진다.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불평과 원망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불평과 불만은 산처럼 커지고 많아진다. 불평하다가 끝나는 불행하고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라 감사만 하는 축복 받고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은 다니엘의 사자굴 속에서 살아난 이적 이야기이다. 그는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라도 기도하면 사자 굴에 집어던지겠다는 경고를 받는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행동하나? 본문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하였다.
다니엘은 이러한 위기에서도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고 오히려 감사하였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자 하나님께서 굶주린 사자의 입을 막고 왕의 마음을 돌려 감사할 일을 만드셨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단 6:22)
기적의 은혜이다. 사자들의 입이 봉해졌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니까 기적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능력과 기적으로 갚아주신다. 감사는 기적을 만든다.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이다. 그것을 누릴 줄 알면 부자이다. 부는 바람도, 하늘에 뜬 흰 구름도,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도, 눈부신 햇살도 공짜이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다 공짜이다. 아침에 시린 공기도, 숲길을 걷는 것도, 아이들 뛰노는 소리도, 아무 바람 없는 친절도, 시원한 나무그늘도, 구림작은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 있는 것도, 인생에서 진실로 좋은 것은 모두 공짜이다. 문제는 감사가 없는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고 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결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요, 그리하면 하나님의 구원(기적)을 본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어른이 무엇을 주시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할 것을 강조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받으면서도 늘 감사하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고 하였다. 왜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감사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척도가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당시의 불신세계의 특색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다고 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른다. 세계의 모든 문헌 가운데 성경만큼 “감사하라”는 말을 많이 언급한 것은 없다. 감사한 마음은 신앙의 척도이다. 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평안한 때뿐 아니라 괴로울 때, 모든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산다.
여러분, 욥은 세상 모든 고난을 다 겪고서도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거두시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감사하는 생활의 조건은 오직 하나이다. 참된 신앙이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 하겠는가? 매사에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짜증스럽게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그는 돈이 많아도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매사에 감사하며 사는 분이 있다. 감사가 넘치니 마음도 기쁘다. 평안이 흘러넘친다. 그가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부자이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이다. 감사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일본의 굴지의 기업 “내쇼날” 상표의 창업자 마쓰시다의 야이기이다. 그는 94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렸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파산을 당하여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85년이 지난 후 일본 굴지의 기업의 총수가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직원이 마쓰시다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큰 성공을 하셨습니까?” 마쓰시다 회장은 자신이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첫째, 가난한 것, 둘째, 허약한 것, 셋째 못 배운 것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직원이 “이 세상의 불행을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은혜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마쓰시다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이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90살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이러한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 생각되어 감사하고 있다네.”
여러분 어떤가? 마쓰시다 회장처럼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가 아니겠는가?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감사가 있다.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이다.(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없어도,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못 가졌어도,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리라는 찬양시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주님 그 한 분만으로 감사하자. 구원, 그 사실만으로 감사하자. 감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사랑하고픈 마음이 있어야 사랑하고, 주고픈 마음이 있어야 주고, 감사하고픈 마음이 있어야 감사할 수가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과 가정에 찾아오고, 불평과 원망은 행복을 떠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감사의 마음을 상실하고 있지나 않은지, 감사하며 살았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생활을 하였는지, 감사의 마음을 재정비하여야 하겠다. 먼저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 원망 이전에, 불평 이전에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란다.
여러분, 감사가 기적을 만든다. 성경이 우리에게 감사하라는 이유는 감사가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감사는 기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혹시 감사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잊어버린 감사를 찾으라. 감사가 기적을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라. 감사는 나를 지키는 능력이며, 나를 살리는 힘이다. 감사는 복된 성도의 삶이다.
감사가 없으면 성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감사가 없으면 기도의 문도 닫히고 만다. 감사가 없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고 영적인 기쁨과 감격이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 하나님 앞에 귀한 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의 모든 면에서 감사할 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막에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놀라운 기적을 주신다. 작은 감사 속에 더 큰 감사가 숨어 있다. 작은 것에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더 큰 것을 누릴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함으로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시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