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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시 에스라의 나무 강단이 제공하는 성경의 어휘 연구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중요한 주제 하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가진 백성들이 당한 고난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현대에 생긴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바로 '게토'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발음하는 것처럼 '게토'라고 표기하며, 198번째 의구 연구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고난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T가 두 개 있어서 발음할 때 '게토'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가장 큰 고난이 서려 있는 도시가 바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입니다. 방문해 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아프고 비극적이며 잔혹했던 인간성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현장입니다. 먼저 이 게토라는 말의 뜻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게토(Ghetto)의 사전적 의미는 소수 인종, 특정 민족, 또는 종교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뜻합니다. 도시 전체는 아니지만 한 구역을 딱 정해서 "너희들은 여기만 살아라" 하고 가두어 둔 지역입니다. 이 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과 격리되어 다른 백성들과의 교류도 없고 상업적 거래도 제한되기 때문에 대개 아주 가난하게 지내며 빈민가를 이룹니다. 사회적·경제적으로 극심한 압박을 받는 외토리이자 배척받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중세 시대에 유럽 여러 나라들이 설치한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디아스포라도 일차적으로 유대인에 관한 것이었듯, 이 게토 역시 유대인들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아가 나치 독일이 만든 유대인 강제 수용소나, 현대에 이르러 미국 등지에서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소외 지역을 일컫는 말로도 쓰입니다.
이 게토라는 단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516년의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바로 전해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영어로는 베니스) 공화국이 유대인들에게 도시의 특정 구역에만 거주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신들 흩어져 살지 말고 여기 다 모여서 살아라. 다른 데는 가지 마라" 하고 격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정해 준 그 구역에 마침 주조 공장, 즉 쇠를 녹여 기물을 만드는 주물 공장(Foundry)이 있었습니다. 그 주물 공장을 베네치아 방언으로 '게토(Ghetto)'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너 어디 사느냐?" 물으면 "게토(주물 공장 구역)에 산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단어가 유대인 격리 거주지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단어가 라틴어식 철자인 'Ghetto'로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유래설이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 여러 나라들은 유대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격리하여 살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독특한 선민의식과 문화 때문에 이방 민족과 잘 어울려 살지 못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또한 혈통적으로 우수하고 머리가 좋아 상업과 금융으로 돈을 많이 버는 반면, 현지 주민들에게 끼치는 도덕적·종교적 영향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주변 사회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당했고, 훗날 히틀러 같은 인물이 나타나 인종을 말살하겠다는 끔찍한 계획까지 세우게 된 것입니다.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게토는 이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이탈리아의 로마, 체코의 프라하 등 유럽 도처에 설치되었습니다. 게토에 살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기록이나 사진을 보면 얼굴이 하나같이 처처하고 우울합니다. 배척받고 따돌림당하며 박해받던 유대인들의 슬픈 단면입니다. 노소 할 것 없이 웃는 사람 하나 없이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르러 게토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비극의 무대가 됩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의 거주지를 철저하게 제한했고, 그곳의 환경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치는 폴란드 내의 독일 부속 지역과 소련 점령 지역 등 유럽 전역에 약 1,000개 이상의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압박하고 박해했습니다.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산지사방으로 피신하여 소련, 폴란드 등 동유럽과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디아스포라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나치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이 유대인들을 잡아다 게토에 가두었습니다. 독일 점령 총독부는 1939년 10월, 폴란드의 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Piotrków Trybunalski)라는 도시에 첫 번째 게토를 설립했고, 이를 시작으로 유대인 말살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행해 나갔습니다.
당시 나치가 운영한 게토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1. 폐쇄형 게토: 외부와의 출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유대인들을 철저히 가두어 둔 격리 지역입니다.
2. 개방형 게토: 유대인들이 모여 살되, 제한적으로 외부 출입과 통행이 허락된 구역입니다.
3. 절멸(파괴적) 게토: 가장 악질적인 형태로, 유대인들을 굶겨 죽이거나 강제 노동으로 말려 죽이고, 궁극적으로는 가스실이 있는 대량 학살 수용소로 보내기 직전에 임시로 수용하던 파괴적인 구역입니다.
이 중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Warsaw) 게토는 규모가 가장 큰 게토였습니다. 이곳에는 무려 4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수용되었습니다. 면적은 겨우 1.3평방마일(약 3.4평방킬로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사방 수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좁은 도심 구역에 40만 명을 밀어 넣은 것입니다. 영어 표현으로 'packed like sardines', 즉 정어리 떼처럼 꼭꼭 눌러 담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발 디딜 틈 없이 엉켜 살았습니다. 지극히 비인도적이고 처참한 환경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우치, 크라쿠프, 비아위스토크, 루블린, 쳉스토호바, 그리고 소련 지역의 민스크 등지에도 대규모 게토들이 설립되었습니다. 나치는 게토 안의 유대인들에게 신분을 식별할 수 있도록 다윗의 별이 그려진 완장이나 배지를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그들을 가혹한 강제 노동으로 혹사했습니다.
게토의 일상생활은 나치 당국이 임명한 유대인 자치 조직인 '유대인 의회(Judenrat)'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독일인들이 일일이 감시하기 어려우니 유대인 중에서 대리인을 세워 통제한 것입니다. 그리고 게토 내부의 유대인 경찰들은 독일 당국과 유대인 의회의 명령을 수행하며, 동족들을 집단 학살 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비정한 임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나치의 가혹한 규칙에 무조건 굴복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회의 승인 없이, 혹은 몰래 외부에서 음식물과 약품, 무기, 정보 등을 몰래 들여오는 밀반입 생존 투쟁을 벌였습니다. 적발되면 즉시 처형당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기에, 일부 유대인 의회 회원들은 동족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이를 은밀히 눈감아주거나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일부 게토에서는 유대인 지하 저항 조직인 레지스탕스(Resistance) 대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인간은 극도로 억압받으면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봉기가 바로 1943년 봄에 일어난 '바르샤바 게토 봉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나치 군대에 처절하게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비록 비극적인 유혈 사태로 끝났으나, 이 불꽃은 다른 소규모 게토들의 연쇄적인 봉기로 이어지며 독립운동의 불씨처럼 타 올랐습니다.
마침내 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독일 경찰은 폴란드 우치에 남아 있던 마지막 대규모 게토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1944년 독일군이 진공하여 점령하기 전까지는 게토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점령 후 불과 3개월 만에 헝가리 헌병대와 독일의 제국보안본부(RSHA)에서 파견된 학살 전문가들이 연합하여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헝가리 전역의 유대인 약 44만 명을 단기간에 파괴적 게토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헝가리 국경을 넘어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집단 학살 수용소로 전원 이송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 명칭이지만, 실제 위치는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폴란드 남부의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라는 도시입니다. 나치는 오시비엥침을 점령한 후 도시 이름을 독일식인 아우슈비츠로 바꾸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이자 절멸 수용소를 운영했습니다. 이곳은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대량 학살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잔혹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근 마을인 '브제진카(Brzezinka)'를 독일식으로 '비르케나우'라 불렀는데, 두 명칭을 합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복합 수용소라고 합니다.
이곳은 하나의 수용소가 아니라 거대한 복합 단지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1940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주로 정치범이나 지식인들을 수감했습니다. 정문에는 그 유명한 문구인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철제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죽도록 노동을 해야 자유를 얻는다는, 혹은 죽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잔인하고 섬뜩한 구호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가장 핵심적인 대량 절멸 수용소입니다. 철도 선로가 수용소 내부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어 유럽 전역에서 기차로 실려 온 유대인들이 곧바로 내려 선별되었습니다. 거대한 가스실과 시신을 태우는 화장 시설들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모노비츠): 강제 노동 수용소로, 인근에 거대한 독일 기업들의 화학 공장을 세우고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죽기까지 착취하던 곳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죽음의 공장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역사학자들의 추산으로 약 110만 명에 달합니다. 그중 절대다수는 유대인이었고, 그 밖에 폴란드인, 로마인(집시), 소련군 포로, 장애인, 정치범, 그리고 신앙적 절개를 지키며 징집을 거부했던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플랫폼에서 즉시 군의관들에 의해 선별(Select)되었습니다. 노동력이 있는 건강한 이들은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어린아이와 노인, 임산부와 병자들은 내리자마자 샤워를 시켜 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비르케나우의 가스실로 직행해 학살당했습니다.
나치는 '치클론 B(Zyklon B)'라는 독가스를 살포해 무고한 생명들을 잔인하게 질식사시켰고, 그 시신들을 부설 화장장에서 무참히 소각했습니다. 또한 수용소 내부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온갖 비윤리적인 생체 실험과 약물 실험이 자행되었습니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현장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지옥은 1945년 1월 27일,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군이 진격해 들어와 아우슈비츠를 함락하고 남은 생존자들을 극적으로 해방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오늘날 1월 27일은 전 세계적으로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로 지정되어 그 참상을 기리고 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1979년에 이 유적지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독일의 강제 및 절멸 수용소'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World Heritage)에 등정했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잔혹한 과오를 보존하여 후세에 영원한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Never Again(두 번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을 외치며 인종주의와 전체주의 독재가 가져온 비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악명 높은 독일 본토의 수용소는 뮌헨 북서쪽 약 16km 지점의 작은 마을에 설립된 다하우(Dachau) 강제 수용소입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인 1933년 3월에 버려진 폐기 군수품 공장 터에 세워진 최초의 정식 강제 수용소였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이 다하우 수용소를 직접 방문하여 유대인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고초를 겪고 죽어갔는지를 현장에서 확인하며 눈물을 머금고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나치에 반대한 정적들과 노동조합원들이 먼저 수감되었고, 이어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이 갇혔습니다.
특별히 1938년 11월 10일 밤부터 11일 새벽 사이에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나치의 대대적인 집단 테러와 학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폭도들은 유대인들의 상점과 회당, 건물의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 냈습니다. 깨진 유리가 밤거리에 수정처럼 깔려 빛났다고 하여 이 밤을 '수정의 밤(Kristallnacht, 시탈나흐트)' 혹은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 부릅니다. 대형 참상을 미화한 완곡어법(Euphemism)이자 풍자적인 명칭입니다. 그날 밤 독일 전역에서 1,600개가 넘는 유대인 회당이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7,000개가 넘는 상점이 완파되었고, 91명의 유대인이 하룻밤 사이에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자들이 무차별 체포되어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등의 강제 수용소로 압송되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이들은 혹독한 강제 노동과 총살, 생체 실험, 그리고 가스실에서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집단 학살과 테러 행위를 러시아어로 '포그롬(Pogrom, 대학살·대박해)'이라고 부릅니다. 특정 소수 민족, 특히 유대인들을 향해 자행된 군중 폭동과 폭력 사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하우 수용소는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29일에 미군에 의해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다하우에는 4만 3천 명이 넘는 정치범들과 2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갇혀 있었는데, 미군에 의해 극적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후 베를린 등지에는 수정의 밤에 파괴되었던 유대인 회당의 일부가 재건되었는데, 그 벽면에는 "결코 잊지 말자,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라는 문구가 독일어로 명선하게 새겨져 역사적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배운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게토(Ghetto)는 본래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이 주물 공장(게토)이 있던 구역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격리 거주하게 한 데서 유래한 용어로, 소수 민족이나 종교 집단이 집중적으로 격리되어 사는 도시 내 소외 구역을 뜻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 등 유럽 전역에 1,000개가 넘는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가두고 혹사했습니다. 나아가 이 게토를 기반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나 다하우 같은 잔혹한 강제 및 절멸 수용소를 운영하여 11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을 독가스로 학살하는 인류사 최악의 '포그롬(대박해)'과 홀로코스트 참상을 자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게토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믿는 신앙을 자유롭게 고백하고 예배하며 선포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종교의 자유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아우슈비츠와 게토의 고난의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이 자유의 철기를 누리는 동안 우리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우리의 위대한 믿음과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열심히 증거하여 이 하늘의 축복에 동참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게토와 수용소의 고난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부여된 영적 자유를 감사함으로 누리고 더 많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주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오늘 198번째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른 소중한 단어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핵심 요약 정리
게토(Ghetto)의 정의와 역사적 어원
1. 정의: 소수 인종, 특정 민족 또는 종교적 집단이 다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도시 내부의 특정 구역에 밀집하여 거주하는 소외·빈민 구역을 뜻합니다.
2. 어원: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대인들을 도시 내 '주물 공장(베네치아 방언으로 게토)' 구역에 강제로 몰아넣고 격리 생활을 강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습니다.
3. 나치 독일치하의 게토 운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폴란드 바르샤바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 1,000개 이상의 게토를 설치했습니다. 가장 컸던 바르샤바 게토는 불과 1.3평방마일의 좁은 구역에 40만 명의 유대인을 정어리 떼처럼 과밀 수용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혹사했습니다.
게토는 폐쇄형, 개방형, 그리고 최종 대량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기 직전에 가두던 절멸(파괴적) 게토의 세 유형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르샤바 게토 무장 봉기(1943년 봄) 등을 통해 비장하게 나치에 저항했습니다.
4.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절멸 수용소
폴란드 오시비엥침(독일명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나치 최대의 강제 및 절멸 수용소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 학살)의 잔혹한 상징입니다.
철도로 실려 온 수감자들을 플랫폼에서 선별하여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등은 즉시 치클론 B 독가스가 나오는 가스실로 보내 학살하고 소각했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을 비롯해 폴란드인, 집시, 여호와의 증인 등 약 11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5. 다하우(Dachau) 수용소와 수정의 밤(Kristallnacht)
1933년 뮌헨 인근에 세워진 나치 최초의 정식 강제 수용소입니다. 1938년 11월 10일 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회당 1,600여 곳을 방화하고 상점을 약탈·파괴하는 대규모 군중 폭동인 '포그롬(Pogrom, 대박해)'이 발생했습니다.
깨진 유리가 밤거리에 수정처럼 깔렸다 하여 '수정의 밤'이라 부르며, 이 사건 직후 3만 명의 유대인 남성이 다하우 등지로 압송되어 인체 실험과 학살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다하우는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6. 현대적·영적 교훈
게토와 수용소의 비극은 전체주의 독재와 왜곡된 인종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역사의 표본입니다.
오늘날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제약 없이 누리는 성도들은 이 평화의 시기를 고귀하게 여기며, 과거의 참상을 기억하고("Never Again"), 영적 안일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복음의 사랑과 진리를 만방에 증거하는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