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원정 | 페루 안데스 ＜하＞] 눈사태의 공포와 화이트아웃 속에서 초피칼퀴 정상에 서다

[산머루산악회]

[해외원정 | 페루 안데스 <하>] 눈사태의 공포와 화이트아웃 속에서 초피칼퀴 정상에 서다

• 글·박상윤 뉴욕한미산악회 회원
• 사진·뉴욕한미산악회 페루 안데스 원정대 기자의 다른 포토보기

재미교포 산꾼들의 페루 안데스 고봉 등정기

당초 페루 최고봉이며 남미 제2봉인 와스카란(6,68m)을 등반하기로 했던 우리는 피스코 등반을 하면서 에이전트로부터 “현재 큰 세락이 무너지며 지속적으로 심한 눈사태가 발생하고 있어 와스카란봉 등반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신 추천 받은 산이 초피칼퀴(6,354m) 또는 알파마요(5,947m)였다. 우리는 산의 성격이나 높이에서 중간이며 또한 우리에게 생소한 초피칼퀴를 등반하기로 결정했다.

▲ 모레인캠프를 향해 등반하며 바라본 와스카란 산군. 맨왼쪽 둔덕처럼 생긴 설봉이 초피칼퀴이며, 오른쪽은 와스카란 남봉이다. 초피칼퀴는 왼쪽 북서릉을 타고 등반했다.

7월 11일 첫째 날, 오전 9시30분 지난 2주간 산타크루즈 트레킹과 피스코 등반을 함께했던 14명의 대원들은 이제 마추픽추 트레킹이 계획돼 있어 아쉽지만 석별의 정을 나누고, 그동안 함께한 쿡 1명, 하이포터 3명 그리고 새로운 가이드 프렉스와 대원 4명 등 총 9명이 팀을 이루어 초피칼퀴를 향해 출발했다.

일부 대원은 부득이 와스카란 대신에 뾰족봉 초피칼퀴를 선택한 데 대해 안전 때문에 많이 걱정했다. 오후 1시30분 트레일 헤드에 도착했다. 트레일 헤드는 산타크루즈 트레킹을 마치고 자동차로 피스코 베이스캠프로 가는 50구비를 돌고 도는 산 중턱 ‘안쿠슈’에 있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오후 3시경 베이스캠프(4,400m)에 도착했다. 캠프 설치를 마치고 내일의 일정을 가이드와 상의한 뒤 휴식에 들었다. 이때 미네소타에서 왔다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자기 팀도 피스코 등정을 마치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는 18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을 그냥 그대로 ‘빅(Big)팀’이라 호칭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빅팀이 피스코를 등정하던 날 날씨가 안 좋아서 걱정을 했다며 안부를 묻는다. 12명이 정상에 올랐다고 하자 축하 인사를 전한다.

▲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와스카란 남봉(오른쪽 봉). 와스카란 왼쪽으로 접어들어 초피칼퀴를 등반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피스코 산행 후 배탈이 나서 초피칼퀴 등반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우리는 비상약 중화제 차콜 두 알을 권했다. 1시간 후 배탈 통증이 신기하게 없어져 자신도 정상 등정을 결정했다며 고마움을 전한다. 이후 이 팀과는 정상에서 하산까지 줄곧 훈훈하게 함께했다.

등반로 양옆에서 일어난 눈사태가 사기 꺾어

둘째 날, 오전 10시경 루트 정찰 겸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4,600m 지점까지 산행 후 돌아왔다. 오후에는 실전훈련을 했다. 와스카란 등반을 계획했던 우리는 피켈 한 자루만 준비했다. 그러나 경사가 훨씬 가파른 초피칼퀴의 테크니컬한 등반을 위해서는 아이스엑스 두 자루는 필수였다. 그래서 모자라는 한 자루 문제는 가이드 프렉스가 선등 후 고정로프를 설치하면 등강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특히 등강기가 생소한 이문석 대원은 집중적으로 훈련을 했다. 미서부 캘리포니아의 프레지노에 사는 이문석 대원은 1970년대 초 인수봉에서 처음 나에게 바위를 가르쳐준 오랜 친구다.

▲ 잡석지대에 구축한 캠프1. 식수는 빙하 얼음을 녹여서 사용했다.

셋째 날, 오늘은 모레인캠프(5,000m)까지 오르는 날이다. 가이드는 4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모레인(빙하가 끝나는 지점)에 오르는 길은 베이스캠프에서 15분 정도 산등성이를 올라 평탄한 능선 길을 10여 분 따라 가다가 우측 빙하계곡 너덜지대를 지나 토벽 리지를 따라 오른다. 리지를 받치는 왼편 빙하 벽은 100여 길 흙절벽으로 잠시도 정신을 놓을 수 없다. 이곳에 서면 왼쪽으로 초피칼퀴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와스카란 남봉과 북봉이 한눈에 들어와 서로가 연봉임을 알게 된다.

홀연 초피칼퀴 바로 아래에서 세락(눈 처마)이 무너졌는지 우르릉 벼락 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좇지만 하얀 눈보라가 솟기 전에는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 잠시 후 하얀 눈안개는 눈 산태를 일으키며 아래로 흘러내리며 우리 등반대의 기를 꺾는다. 이번에는 오른편 와스카란 남봉 암반에 붙어 있던 측면 설벽이 무너져 내린다. 굉음과 더불어 잠깐 사이에 산 모습의 일부를 바꾼다. 그제야 와스카란을 자세히 살펴봤다. 온 산은 폭격을 맞아 초토화된 것처럼 찢기고 터져서 도저히 등반이 불가함을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눈사태는 계속되었다. 빈발하는 눈사태는 점점 남의 일처럼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오후 2시 모레인캠프에 도착했다. 산행은 불과 4시간밖에 안 됐는데 몸은 많이 지친다. 고소와 급경사 리지 길이 힘들었던 것 같다. 모레인캠프는 와스카란 등반 팀들로 많이 붐빈다. 미국 2팀, 스위스, 멕시코, 독일, 오스트리아 등 각 나라 1팀씩 출신 나라들이 다양하다.

▲ (위) 모레인캠프에서 출발해 빙하로 접어들고 있다. 대원들은 이곳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등반에 나섰다. / 초피칼퀴 베이스캠프 부근에서 바라본 피스코(왼쪽). 뉴욕한미산악인들이 첫 번째 등정에 성공한 봉우리다.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는 차크라르후봉이다.

넷째 날, 고소적응을 위해 물을 많이 마셔 밤에 소변을 보러 밖에 나오면 으레 하늘부터 바라본다. 달과 별은 얼마나 총총히 빛나고 있는지, 구름은 안 가렸는지… 천수답 농부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천기를 살핀다. 어, 그런데 날씨는 좋은데 와스카란 봉우리에 삿갓구름이 걸려 있다. 고산에서 가장 경계하는 구름이다. 삿갓구름이 걸리면 향후 2~3일은 날씨가 안 좋아진다는데.

오늘은 마지막 하이캠프(5,400m)로 이동하는 날이다. 프렉스는 어제와 비슷하게 4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오늘은 설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개인장비를 잘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한다. 오전 9시 30분 설상화와 헬멧 등을 착용하고 하이캠프로 출발했다. 옆에 있던 최연묵 대원(재미연맹 워싱턴 지부장)이 말을 건넨다.

“형! 정상부는 구름이야?”

“아냐! 괜찮을 거야….”

안심을 시키지만 내심 오전 중 와스카란 정상에 낀 삿갓구름이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이캠프 가는 길은 모레인캠프에서 그 옆 빙하계곡으로 내려와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경사도 급하지만 심한 너덜지대로 발목이 접지르지 않을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렇게 1시간 오르면 만년설을 만난다. 초피칼퀴빙하는 초입부터 경사가 있고, 또한 이쪽저쪽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렇게 세 시간을 올라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캠프지는 적당한 크기의 설원으로 비교적 안전지대였다. 그러나 설원은 경사가 있어 수평을 잡기 위해 상단을 피켈로 깎는 수평작업이 필요했다. 텐트의 오른쪽과 10여 m 아래는 커다란 크레바스가 형성되어 있어 잘못 미끄러져 가속이 붙지 않도록 조심스럽다.

▲ 세락을 우회해 북서릉으로 접어드는 대원들. 맨앞은 외국 산악인들이다.

차 한 잔 끓여 마시려는 찰나에 대원 한 명이 갑자기 토한다. 모두들 안타깝게 바라볼 뿐 속수무책이다. 그 대원은 잠시 후 안정을 찾고는 “괜찮아” 하면서 우리를 안심시킨다.

아침에 끼인 삿갓구름 때문인가? 와스카란은 물론 초피칼퀴 상단은 구름이 몰려들며 바람 또한 거세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내일 새벽 1시로 예정된 정상공격을 위해 가능한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다. 텐트 속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지만 점점 거세게 몰아치며 텐트를 때리는 바람소리에 휴식은커녕 내일 날씨 걱정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우리가 사는 북반부와는 정반대 계절인 남반부는 겨울이라 오후 6시면 어김없이 어둠이 깃든다. 바람소리의 시름 속에 랜턴을 켜고 시계를 본다. 이제 저녁 8시, 이때부터 초조하게 바람이 잦기를 기다리며 4시간 동안 시간 읽기에 들어갔다.

다섯째 날 오전 0시30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러 시간 동안 요동치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정상부엔 구름이 끼어 있어도 우리 머리 위는 구름이 뚫리고 달과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무척 안도가 되었다.

어둠을 가르며 정상을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오르는 길은 산세가 가팔라 거의 직등이든지 아니면 약간의 사선 오름길이 있을 뿐 쉽게 오르는 길은 거의 없다. 약 두 시간 쉬지 않고 꾸준히 산행했다. 그런데 우리 팀보다 앞서 가던 스위스 팀의 불빛이 한 군데 머물러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 (위)외국 산악인들이 등정에 성공한 뒤 모레인을 향해 하산하고 있다. / 북서릉 하산길은 크레바스가 많아 위험했다.

스위스 팀의 불빛이 돌아 빠질 때 즈음해서 우리 팀도 그 구간에 도착했다. 초피칼퀴 등정을 위해 넘어서야 할 난구간 중 한 곳이었다. 스타트 부분은 약 70cm 폭의 크레바스가 있고, 그 위로는 45도 경사면을 60여 m 올라야 했다. 가이드와 사전에 얘기한 대로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로프에 주마(등강기)를 걸고 다섯 명이 이 구간을 오르는 데 1시간 남짓 소비했다.

이렇게 몇 군데 오르자 이미 날이 밝았다. 이제 정상을 향해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경사면을 올랐다. 경사면 위는 말 등과 같이 좌우는 벼랑길이지만 가운데 길은 다소 완만하다. 시계는 아침 8시30분을 지나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 팀의 보행 속도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대원들은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며 자꾸 쉬자고 한다. 가이드는 바로 위가 정상이라며 사기를 돋운다. 이젠 다 올랐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숨은 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정상으로 들어가는 문은 갑자기 좌측으로 90도 꺾어 오른다. 20여 m 오르는 경사는 가장 급했고, 오른쪽 밑은 아무것도 걸릴 것 없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날씨는 이미 가스가 꽉 들어차 천지간 구분이 안 되는 화이트아웃 수준 상태였다.

천신만고로 정상에 올랐지만 한동안 정상에 올랐는지 몰랐다. 가이드 프렉스가 말해서 정상인줄 알았다. 잠시 후 눈을 밝히고 주변을 살펴보니 정상은 겨우 300스퀘어피트(약 8.4평)가 채 안 될 정도로 좁았다. 정상 주변에 시야가 없어 그것을 즐길 복은 없었다.

“다음엔 세계 3대 미봉 알파마요 어때요?”

▲ (위)공격캠프에서 일몰을 맞이하고 있다.날씨가 좋아 페루안데스의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 기념촬영한 뉴욕한미산악회 회원들. 맨 왼쪽부터가 이드, 최영묵, 박상윤, 이문석, 한상근. 대원 4명 모두 정상에 올랐다.

20여 분 정상에 머물다가 가스가 심해 겨우 사진 몇 장 찍고는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은 밑이 안 보여 오히려 더 힘들었다. 다섯 번 이상을 레펠(현수하강)을 했다. 특히 60m 레펠은 화이트아웃으로 시야가 막혀 가끔 발이 떨어져 허리에 통증을 일으켰다.

정상까지 9시간, 하이캠프까지 하산하는 데 6시간, 하이캠프에서 모레인캠프까지 철수하는 데 3시간, 총 18시간의 긴 산행을 마쳤다. 모레인캠프 텐트에 눕자마자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한참을 자고 눈을 뜨니 아직 깜깜한 밤중이다. 어찌하겠나? 생리작용이다. 밖에는 달과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씨에 정상에 올랐더라면…’하며 복에 겨운 생각을 했다.

7월 16일 엿새째, 오전 10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짐을 꾸리며 3주간의 원정을 마무리한다. 오후 3시경 와라츠 호텔에 돌아왔다. 호델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스카란과 초피칼퀴가 한눈에 보인다. 어? 그런데 정상부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고산 날씨는 조석지변의 변화를 장담할 수 없음을 재확인하며 ‘어제 잘 갔다 왔구나’ 생각했다. 내 마음도 고산 날씨처럼 조석지변의 변화를 장담할 수 없음이 깊게 통찰되었다.

얼마 후 우리 등반대의 페루 에이전트 사장 모랄레스씨가 찾아왔다. 정상 등정 축하와 함께 다음 등반으로 세계 3대 미봉의 하나인 알파마요를 소개한다. “이번 정상 팀 실력이면 충분히 알파마요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며 우리 등을 살살 긁어 준다. 알파마요는 마지막 500m 구간은 75도 수준의 벽을 올라야 하는데.

글쎄!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