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諸行)이라는 말은 인연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인연 따라 형성된 것은 인연이 다하면 항상 변화하고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합니다. 무상이란 말은 ‘항상 함이 없다’ 즉 끊임없이 변화해서 사라진다는 의미이지 허무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무상하기에 고(苦)이고,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지금 행복한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변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내 몸까지도 변해서 사라지는 것이기에 결코 거기에 애착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착을 가지면 가질수록 괴로움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변해가지 않는 것이 있던가요? 어린아이도 자라 어른이 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내 몸의 세포들도 순간순간 생겨나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 양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그 결과 어느 순간 고통이 엄습하기 마련이지요. 제행(諸行)이란 말과 제법(諸法)이란 말은 같은 의미인데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더불어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의미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무상하기에, 항상 하지 않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가 아니라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없다.’ 뜻입니다. 아(我)는 영원성(永遠性)으로 참나, 본래면목, 불성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 변해 갈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 변화니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니 권력이건 금력(金力)이건 모든 게 잠시 잠깐 동안입니다.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를 이내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고, 그 사람 역시 얼마 후에는 그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듯 무상하고 무아인 세상이 아무렇게나 변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업(業) 따라 변해가는 것이지요. 변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일말의 서글픈 면이 있는 듯하여 허무하다는 말로 쓰기도 하지만 변해가기에 또한 삶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변하니까 희망이 있지요. 부자가 영원히 부자이고 가난한 자가 영원히 가난하다면 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할 것 없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무소의 뿔처럼 열심히 나아가라.’ 하신 것입니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가리켜 삼법인이라 합니다. 모든 것은 변해가는 것이어서 내 것이라 말할 것 없기에 집착하는 마음 없이 그저 열심히 정도(正道)따라 살면 열반적정(괴로움이 없는 평안한 한 상태)의 마음이 된다는 의미로 불교의 근본법칙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삼법인(三法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하나 더하면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는데 사성제와 함께 이해하면 그 의미가 새롭습니다.
‘네가 지금 고통스러우냐?(고성제-현재의 果) 그 원인을 잘 분석해 보아라 (집성제-과거의 因). 찬연한 미래(열반)를 원하느냐? (멸성제- 미래의 果), 열심히 정도를 가라 (도성제-현재의 因)’는 의미가 우리가 사성제의 뜻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무상과 무아의 도리를 잊고 집착한 결과로 오는 것이어서 정도(正道)를 가면, 즉 무상과 무아의 도리를 바탕으로 살아가면 열반적정의 경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의미로 사법인의 실천론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결코 제행무상의 뜻은 허무의 뜻이 아니라 변해가는 만상의 이치를 꿰뚫어 바른 도리(正道)로 그 변화를 아름답게 승화시키라는 발전지향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출처 : 불교신문(능인선원 지광스님) 법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