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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속으로
-제주도 여행기-
2011년 8월 6일 토요일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동행한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것에 앞으로의 일정이 걱정되었다.
여름휴가 피크에 맞춰 제주로 간다는 것이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여행이란 일상의 번잡을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는 곳에서 한가롭고 느릿느릿 걷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 곳의 풍경과 음식, 그 곳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느긋하게 읽으며,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필 여름휴가의 절정인 팔월 초인가?
모처럼 고교동창인 친구J가 함께 하자고 하는데 거절하기도 뭣했던 K는 무작정 답을 해버렸다. 형편도 좋지 않은데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하느냐고 타박을 했지만, 티켓을 예약하고 돈까지 보내버린 뒤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 통의 전화도 없는 금요일. 휴가철의 절정이다 보니 누군들 전화해서 주문을 시키고 싶을까.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서울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다. 강남 터미널까지 2시간 30분, 버스 속에서 자다 깨다 두어 번을 하고나니 강남 터미널이 코앞이다. K의 친구 J가 기다리고 있었다. J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후, 다음 날 함께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비행기 표는 우리가 몇 시간 늦게 출발하고 몇 시간 일찍 돌아오는 것으로 예약이 되었었는데 함께하는 여행을 누가 앞서 가고 뒷 서 가는 것이 마뜩찮아 거의 5분 간격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J부부는 제주항공이였고 우리는 대한항공이었다. 친구는 일주일여를 머리를 싸매고 철저한 계획서를 썼고, 제주의 맛 집과 가야 할 곳을 꼼꼼하게 체크했고, 관람할 곳의 할인권도 예약해 놓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렌터카를 빌려 그와 번갈아 가면서 운전을 하기로 했다. 그 계획서를 보니 2박 3일의 일정 동안 다 소화를 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일단은 해보기로 하고 저녁은 J의 집 근처 막창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J의 집으로 들어가 2차 술상이 차려졌고. 그 후 J의 처형이 합석을 했고, 또 노래방으로 그렇게 해서 자정이 조금 넘어 모두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첫째 날 2011년 8월 6일
다음 날, 새벽 3시30분쯤에 눈을 뜨니 모두들 꿈나라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1시간여를 뒤척이는 사이 K가 잠에서 깼다. 우리는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먼저 샤워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이 씻고 나자 J부부도 깨어나 여행 준비를 하고 나섰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던 중 J의 안사람이 주민등록증을 두고 왔다고 해서 차를 돌렸다. 아파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J의 큰딸로부터 주민증을 건네받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해 서둘러 각자의 티켓을 찾고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1시간 남짓한 거리여서 잠들기도 어정쩡해서 창밖으로 지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비행기는 곧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기내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시고 나자 어느덧 제주공항이었다. 오전 8시,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7월까지 목포에서 근무하던 그의 고등학교 동기인 S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출발 전, K가 S에게 연락해 놓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토요일이 휴무라서 제주가 고향인 S에게 자세한 안내를 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배낭만을 기내로 들고 탑승했던 우리와는 달리 J의 가방이 빨리 나오지 않아 시간이 걸렸다. 다들 비행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우리들이 서성거리는 사이 J는 렌터카 대여하는 곳으로 향했고, 먼저 나온 우리는 우리대로 J를 찾는다고 헤매었다. 그러다가 결국 J와 J의 와이프가 티격태격 하는 것을 달래서 S의 차에 올랐다.
공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귀포 시내에 한국콘도가 있었다. 1983년 초에 세워진 콘도라서 그런지 허름한 여관방 같은 느낌이었다. 48시간 기준으로 요금은 17만 얼마라고 한다. J의 근무처인 회사에서 일정액을 지원해 그 정도 가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된 콘도라고는 해도 정도가 좀 심한 것 같았다.
주방은 닦아 놓기는 했지만 곳곳이 낡았고, 가스레인지 아래 싱크대 문을 열어 보니 거뭇거뭇한 곰팡이가 슬어 있어 찜찜했다. 욕실은 천정이 뻥 뚫려있었고, 방은 천장 모서리가 덜렁 거렸다. 베란다는 맨발로 도저히 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로서는 그저 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짐을 내려놓고 아침식사도 할 겸 함께 차에 올랐다. 은연중, 가이드를 자처한 S를 앞세워 여자들은 서귀포 방파제 테마거리를 구경했고, 남자 둘은 마트에 들어가 저녁 만찬을 위한 식품과 생수, 술 등을 샀다.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S가 안내한 곳은 해장국집이었다. 선지 해장국과 소주를 시켜 간단히 속을 풀었다. 밑반찬으로는 풋고추, 된장이 전부였지만 여느 상차림보다 푸짐하다는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까운 “한림공원”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가서는 일반적인 수목 전시관인 듯 했으나 잠시 뒤, 따라 들어온 J의 안내로 돌아보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광범위 했다.
야자수 길과 아열대 식물관의 기괴하고 다양한 선인장, 형제굴과 쌍용굴, 그리고 제주도의 화산석의 기이한 형체들과 몇 백 년씩이나 된 갖가지 분제, 민속마을, 사파리 조류원엔 공작과 낙타 등을 그냥 방목해 두고 있었고, 연못정원엔 앙증맞고 아름다운 여러 색깔의 수련들이 제 모습을 뽐내며 떠 있는 것이 꽃 접시를 전시해놓은 듯 했다. 수련 앞에서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그 옆에 내가 선다면 수련의 아름다움이 희석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수석전시관까지 십 만평의 공원을 다 돌아보고 나자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었다. 그 모든 것이 1971년부터 송봉규라는 사람, 개인이 가꾼 것이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식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식물들을 관리하기 위한 비용 등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제주의 첫째 날은 날도 덥고 공원을 도느라 다리도 아프고, 샌들을 신고 걸어서인지 발바닥에 불이 나 홧홧거렸다. 그러나 관람료가 아깝지 않았고, 속을 꽉 채운 듯 만족감이 들었다.
다음은 용머리 해안으로 향했다. 제주의 상징인 화산 돌과 바위들이 갖가지 형체를 이루고 바닷가를 신비롭게 수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용머리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하늘이 점점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하고 있어 렌즈를 통해 바라본 용머리가 바라던 대로 나올 것 같지 않아 두어 장만 기념으로 찍고 해안을 돌아 나왔다.
오후 5시 30분 하멜전시관으로 향했다. 서귀포 안덕면에 있는 올레10코스로 용머리 해안을 보고 해안가로 이어지는 곳에 하멜상선 전시관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후, 13년간 조선에서의 생활을 자세히 소개한 보고서 형태의 하멜표류기는 서방에 최초로 우리나라를 알렸다.
하멜상선 스페르웨르 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48년 건조된 것으로 대양항해용 범선인 바타비아 호를 모델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상선 관람 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고, 한림공원을 도느라 지쳐버린 일행들은 매표소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서귀포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곳곳에 기암괴석과 바닷가에 돌로 쌓은 노천목욕탕이 있었다. 노천탕으로 민물이 스며들면 S의 어린 시절에 노천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곤 했었다고 한다.
오후가 되자 태풍 “무이파”가 오는 영향인지 바람이 점점 드세고, 파도가 샴푸 거품처럼 밀려온다. 무섭게 몰려오는 파도는 객기를 부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인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하얀 거품을 부글거리며 세차게 갯바위로 달려들었다가 제 몸을 산산이 부셔버리는 저 처절한 작열. 그리고 무형으로 자신의 모습을 뭉개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 바다로 돌아가 버리는 파도의 능청에 경의를 보낸다.
잠시 꾸벅꾸벅 졸았던가? J의 집에서 전야제와 이른 새벽 기상, 비행기 탑승, 한림공원까지의 일정에 지쳐 버렸다. 가물가물한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기력이 없다. 모두들 S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새로운 것을 보면 늘 안광에 빛을 발하는 K만은 “죽인다. 아! 저기도” 라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런 K도 피곤한지 “근데, 우리 콘도 가기는 가는 기가?” 라며 물었다. 그는 연이어 묻고, S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이곳 저 곳을 데리고 다닌다. 사실 자신도 제주에서 자랐지만 구석구석을 다 보진 못했다고, 친구가 왔으니 그 덕에 오랜만에 제주를 둘러본다고……. 바람의 언덕에 올라 먼 바다와 진초록의 억새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첫째 날의 계획대로라면 ‘생각하는 정원’과 ‘소인국 테마파크’까지 보아야 하는데 모두들 지쳐 콘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 듯 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제주에 내렸을 때 이상 기운을 보였던 J부부는 한림공원에서 다정한 포즈로 사진도 찍고, 서로 웃으며 잘 지냈다. 더구나 걷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던 J의 안사람이 그 긴 시간을 별 투정 없이 함께 걷고, 사진 찍히고 더위도 참아 내자 걱정했던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콘도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마트에서 사온 쌀과 찬거리들을 펼쳐 놓고, 고기도 굽고, 밥도 한 후, 식탁을 창가로 옮겨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J 내외도 신혼여행 후, 이십 몇 년 만에 왔다고 했다. 처음 신혼여행 때 옆 자리의 중년 부부 한 쌍이 결혼 후 십년 만에 다시 제주를 찾았다는 말에 J의 안사람은 제주도가 뭐 그리 멀다고 십년씩이나,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 낳고 살다보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삶이란 역시 우습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제주도에서 둘째 날.
텔레비전 뉴스에서 태풍 ‘무이파’ 가 상륙했다고 한다.
새벽녘에 깨어 베란다 창을 열어 보니 비가 수직으로 내려 꽂이고 있었다. 엄청난 바람의 위력으로 베란다에서 바라보이는 제주의 야자수들이 테크노 댄스를 추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건너편 ‘여미지 식물원’ 의 나무들과 콘도 주변의 야자수들이 함께 어울려 허리가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무이파는 중국 쪽으로 방향을 트는가 싶었는데 마음이 변했는지 제주를 거쳤다. 이른 아침 뉴스 자막엔 제주행 왕복 비행기가 모두 결항이라고 했다. 월요일에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걱정한다고 자연의 심술을 한낱 인간이 어찌하랴 싶어, 될 대로 되겠지 마음을 놓아 버렸다.
아침 7시 40분. 컵라면과 햇반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태풍의 진로가 서해 쪽, 해안을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서해가 위태롭다. 그러나 태풍이 왔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콘도에 처 박혀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모두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비를 맞아도 좋다. 콘도 입구에서부터 야자 잎들이 온통 도로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가지 않은 상태여서 도로 청소를 할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풍으로 인해 모든 해안가의 공원이 폐쇄되었다. 가장 보고 싶었던 주상절리는 먼발치에서 물안개와 파도에 휩싸인 그림자만 보았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았다. 우산이 있다한들 거센 비바람에 소용도 없을 것이다. 피부에 닿는 빗방울이 따끔따끔 했다. 빗방울 침을 맞으며 새벽부터 몰아치는 태풍 속을 온 몸으로 헤치며 외돌개를 보기 위해 송림 사이로 내려갔다. J의 안사람은 아예 신발을 벗어 버렸다. 굽이 높은 신발이라 당연히 불편했으리라. 탐방 길엔 온통 떨어진 솔방울과 꺾어진 야자 잎, 마른 솔잎과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튕겨 오르는 파도가 던진 물방울들이 송림으로 날아들었다. 빗물에 가려 시야가 흐릿했다.
외돌개는 약1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 놓을 때 생성되었다. 높이는 20미터 정도며 꼭대기엔 소나무 몇 그루가 자생하고 있었다.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된 할머니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할망바위’ 라고도 불린다.
태풍 무이파는 투수처럼 파도를 외돌개 꼭대기까지 던져 올렸다. 우리 일행처럼 온 몸으로 파도와 맞서고 있는 외돌개를 눈을 비벼가며 겨우 볼 수 있었다. 모두들 비에 흠뻑 젖은 생쥐가 되었어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도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우리들과 서너 명 정도의 관광객만이 볼 수 있었다. 외돌개를 보고 돌아 나오는데 관리 직원이 살아 돌아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며 출입통제 팻말과 입구를 밧줄로 막아버렸다.
우리 일행은 각기 남,여 화장실로 몰려가 빗물과 짠물에 젖은 옷을 물에 헹궈 꼭 짜서 입고 정방폭포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얼마쯤 달리자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정방폭포로 들어서는 초입엔 중국풍의 다리와 담장이 있고, 오른편엔 제주도에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던 ‘서복’의 전시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방폭포로 향하는 입구는 마치 중국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 왼편 기념품점이 있어 제주 화산 석으로 만들어진 기념품 하나를 사고 싶었다. 나는 어디를 가던 기념품을 사지 않는데, 이곳에서 만큼은 하나 갖고 싶었다. 눈으로 점지해 놓고 폭포로 갔다. 서귀포 바닷가에 수직으로 서있는 정방폭포엔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K와 나도 서로 찍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J부부와도 함께 찍었다. 정방폭포를 보고 올라오는 길에 화산 석으로 만들어진 손 안에 쏙 들어오는 맷돌을 하나 샀다. J부부는 해녀상과 감귤 초콜릿을 산 후, 서복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서귀포의 진주집이라는 식당에 차를 댔다.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식당입구 안쪽에서 유리문을 한 사내가 잡고 서 있다가 손님이 들어오고 나갈 때 마다 열어주고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나무로 걸쳐 놓고 있었다. 진 주집은 전복 뚝배기가 이름난 곳인가 보았다. 우리 일행도 전복뚝배기(특 15,000원) 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까지 추위를 달래기 위해 소주로 건배를 했다.
전복 뚝배기는 그 값을 했다. 전복이라기보다는 오분자기라는 것이 맞을 것 같은 자그마한 전복이 다섯 개, 그리고 새우와 조개 등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전복뚝배기에 곁들여 몇 병의 소주를 비우고, 다시 비바람 속을 나섰다. 모두들 얼근하게 취해있는데, S만은 운전을 하는 관계로 건배만 하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우리 일행의 가이드와 운전을 하기 위해 사이다로 대신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 곳은 실내 조각 전시장이었는데 그곳은 정전이 되어 관람을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전신주가 쓰러져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콘도로 돌아오는 길에 여미지 식물원만이 비바람 속에서도 매표를 하고 있어 우린 여미지로 들어갔다. 그 곳은 실내로 조성되어 있어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상관이 없었다. 여미지 식물원은 자체 동력이 있나보다.
여미지 식물원은 1989년 10월 12일 계우개발이 개원, 1992년 한국기네스 협회 인정 동양 최대 온실 식물원이다. 2005년부터 현재의 부국개발이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다. 온실에 수생식물, 다육식물, 열대생태원, 열대과수원이 있었다. 정자로는 한국정원, 일본정자, 프랑스정자, 오바타분수, 한국식 대문이 있다. 그리고 전망대와 옥외 전시관도 있다.
태풍으로 인해 야외 관람을 할 수 없는 관계로 사람들이 모두 여미지로 몰려 왔다. 다행인 것은 비행기 결항으로 인해 복잡하지 않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한림공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볼거리는 많았다.
이틀째 여정을 마무리 하고 콘도로 돌아오는 길,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잠깐 졸고 있는 사이 차가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뜨니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 모두들 내리고 있었다. 나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차에 앉아 있는데, 그가 뒷좌석 문을 열고 한마디 한다.
“바람이 세니까 밖에 나오지 말고 꼼짝 말고 앉아 있어라”
“응 알았어.” 장난기 섞인 그의 말에 킥킥 거리다가 그래도 궁금해 밖으로 나가자 정말 몸이 휘청거렸다. 난 다시 뒷좌석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열심히들 하라고 했다. 그러자 J안사람이 “뭐야” 하고 묻는다.
“나중에 말해 줄게” 그러나 궁금증을 못 견디겠는지 다시 묻는다. 난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어머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지 마누라는 날아간다고 나오지 말라고 하고, 내가 조수석에 앉으니까, 앞바퀴 눌린다고 내리라더니.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신랑에게 한마디 한다.
“자기도 좀 배워라!”
그러거나 말거나 J와 S는 펑크 난 타이어를 빼고 예비 바퀴를 갈아 끼운다. 난 다시 밖으로 나가 그것도 제주의 추억이라고 카메라로 몇 장을 찍어둔다.
꽃사슴.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닉네임이다. 156도 안 되는 키에 얼굴이 크고, 상체가 두툼하게 보인다. 그다지 살이 찐 것 같지는 않은데 가분수 같은 느낌을 주고 있어, 70,80십년대의 닉네임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 별명은 꽹과리다.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에 독도가 나왔고, 독도에 무리진 괭이 갈매기가 우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 내 별명의 계기가 되어 그는 심심하면 “꽹갈아!” 하고 부르는 것이다. 대신 K의 별명은 수시로 방귀를 뀌어 대는 바람에 “뿡뿡이” 라는 별명과 또 다른 하나 “똘이장군” 이다. 가끔 그에게서 골목길을 휘저으며 천진하게 뛰어 노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몰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생각 난 것이 똘이 장군이다.
콘도에서 저녁, 두부 부침과 반 건조 옥돔 구이, 마트에서 산 밑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다들 피곤해서인지 저녁술도 소주 두어 잔으로 끝났다. 그리고 S는 월요일 출근을 위해 근무처로 돌아가며 마지막 날까지 차를 쓰게 해주었다. 자신이 아는 곳에 차를 세워 두면, 비상키로 열어서 찾아 가겠다고 한다. 정말 친구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다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차는 잘 안 빌려주려고 하는데, 삼일씩이나 차를 내준다.
2011. 8. 8일 제주의 세 번째 날
베란다 문을 여닫는 바람에 밤새 모기와 싸웠고, 에어컨의 냉기에 몸이 싸늘해 새벽엔 에어컨 바람이 덜 가는 쪽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J부부는 오히려 덥다고 해서 자다가 우리와 자리를 바꾸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일기예보에 모두 눈이 가 있다. 제주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무이파 영향으로 서해지역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김포공항은 오후 3시까지 태풍경보 중이었고, 아침 5시 30분경 군산을 지나고 있다. 오후 3시쯤 백령도를 지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 고, 대전, 충남도 태풍에 본격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 쪽에도 최고 200m이상 비가 내릴 것이라고 등산, 야영객들은 주의를 하라고 방송한다. 하늘 길과 바다 길이 모두 막혀 막바지 휴가 계획을 세웠던 사람들은 모두 취소를 해야 했다.
제주에선 500년이나 건재했던 팽나무가 쓰러졌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새겼던 모든 비밀을 침묵으로 간직하며 견디어 왔을 나무는 끝끝내 자신의 몸이 부서져도 입을 다물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주 오랜 후에, 한 줌의 거름으로 대지의 틈 사이 검은 한 점으로 박혀 자신이 존재했던 시간마저 소멸시킬 것이다. 인간 또한 이렇게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본다고 하지만 더 큰 눈으로 보면 개미 한 마리의 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끔 이러한 생각이 들면 움직이지 않고 깊은 산 속, 토굴에 들어가 앉은 그 자리 그대로 고스란히 썩어 흙이 되어 흩어지고 싶어진다.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제아무리 진귀한 것이라도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 한다. 다만 하나 오래된 고목을 보면 그 시간의 역사를 묵묵히 견디는 지고한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선지 도시를 떠나오고부터는 여행이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난생 처음 온 제주라 하더라도 내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다. 일상이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사는 것이라서 더더욱 내 마음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콘도 퇴실 전에 천제연을 들렀다. 그리고 다시 천지연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나뭇잎들이 물을 흐려 놓았다고 한다. 천지연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표소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전 11시 45분. 콘도로 되돌아가 남은 밥과 찌개로 점심을 먹고 짐을 꾸렸다. 그리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섭지코지는 드라마 ‘올인’ 촬영지로 제주특별자치도 동쪽 해안에 볼록 튀어나온 육지와 맞닿아 있다. 봄철이면 노란 유채꽃과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해안풍경이 일품이란다. 들머리의 신양해변백사장, 끝머리 언덕, 위 평원에 드리워진 유채밭, 등 그러나 8월초여서인지 유채는 볼 수 없었다. 섭지는 비좁다는 뜻이며, 코지는 곷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섭지코지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오른편에 승마장이 있었다. 우리도 각기 말 잔등에 올라탔다. 난생처음 타보는 말이지만 너무 싱겁다. 말들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듯, 무료하게 걸음을 뗐고, 그 잔등에 올라앉은 나 또한 무료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정해진 짧은 코스를 돌고 사진을 찍고, 정말 코미디 같은 느낌이었다. 말馬이라 하면 드넓은 몽골초원에서 윤기가 흐르는 갈기를 휘날리며 거침없이 달리고, 그 위에 앉은 기수는 몸을 낮추고 먼 곳을 향해 질주하는 사이 말과 기수가 한 몸이 되어 바람과 풀냄새, 그리고 자유를 한껏 느끼며 거침없이 광활한 대지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라고 꿈꾸어 왔던 내게 너무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꽃사슴은 말들이 불쌍하다고 마부에게 “애들 좀 쉬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며 안타가워 했다. 인간은 참 묘한 동물이다. 그렇게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기 옆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수시로 거친 말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동물에게는 천하에 없는 천사같이 군다니?
섭지코지를 내려와 향한 곳은 쇠소깍이었다.
본래 명칭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쇠둔이라고 지명을 삼았으며, 효돈천 하류에 단물과 바닷물이 만나 부딪히면서 깊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소라 불리고 있으며, 쇠소깍은 쇠소의 마지막 지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쇠소깍은 서귀포 칠십 리에 숨겨진 비경중 하나로서 찾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요즈음은 쇠소깍과 이어지는 해안절경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고 한다. 깊은 수심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며 새소리만이 나그네를 반기는 정적의 공간이다. 섭씨 18도의 용출수를 유지하므로 가을에 뛰어들더라도 차갑지가 않다. 이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전에 분출한 조면암이 분포하는 지역으로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쇠소깍은 한가로웠다. 이름난 관광지인 제주 곳곳이 이렇게 한적한 것은 물론 태풍 ‘무이파’의 영향력이었다. 꼬박 24시간여를 휴가객을 실어 나르지 않았으니 태풍 속을 헤치며 다녀도 사람에 밀리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소깍은 들어서는 초입부터 계곡으로 이어진 곳들이 신비로운 바위들의 군무였다. 차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돌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그 곳은 투명 카누를 타고 물길을 따라 가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림 같은 바위의 군락을 먼 눈빛으로만 보고 사진 몇 장만을 품고 돌아 선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성산 일출봉이다.
성산 일출봉 천연보호구역은 제주도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출봉 전체와 1㎞ 이내의 해역을 포함하고 있다. 성산 일출봉은 중기 홍적세 때 얕은 바다에서 화산이 분출되면서 형성되었다. 일출봉은 커다란 사발모양의 평평한 화구가 섬 전체에 걸쳐 있어 다른 화산구와는 구별되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일출봉을 중심으로 하는 성산포 해안 일대는 청정해역으로 동남쪽의 해안은 비교적 넓은 조간대가 있는데, 암석지대·자갈지대·모래사장 등이 있다. 그 외 해안식물은 녹조류·갈조류·홍조류 등 총 127종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해조상을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해조류가 자라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제주분홍풀, 제주나룻말로 지칭되는 신종 해산식물의 원산지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해산동물의 경우 총 177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중에 많은 한국산 미기록종이 포함되어 우리나라 해산동물의 분포 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주목되는 지역이다. 성산 일출봉 천연보호구역은 일출봉의 지형·지질·경관적 특성과 주변 1㎞ 연안 해역의 식생이 우리나라 해양생물의 대표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산 신속 및 신종 해조류의 원산지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일출봉을 오르는 길은 완만하게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J의 안사람은 달가운 기색이 아니다. 그런 그녀를 K와 나는 일출봉에 갔다가 내려오면 회 먹으러 가자, 고 유혹을 해 오르기 시작했다. 날씨 탓인지 주변은 온통 물안개가 자욱했다. 제주엔 쓰레기통조차 돌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제주가 돌이 많다고 해도 왠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약간 부서진 곳을 살펴보니 겉에만 화산석인 듯이 보이지만 모두 시멘트로 찍어 놓은 것들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약간의 실망과 내 짐작이 역시 맞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나무 길과 돌길을 오른다. 오르는 길을 제외하고는 온통 밀림 같다. 물안개에 쌓인 바다와 좌우로 기암괴석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내륙지방에서는 본적이 없는 알 수 없는 풀들이 야생으로 자라고 있다. 물안개로 인해 입은 옷이 꿉꿉하다.
몇 번을 쉬다 오르다 하는 사이 정상에 올라섰다. 그러나 안개로 인해 분화구는 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개에 가려진 분화구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다가 '성산일출봉' 팻말 앞에서 사진 한 장씩 찍고는 돌아서 내려간다. 우리 일행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 장의 기념사진만 카메라에 담고 돌아 섰다. 우리들은 횟집을 찾기로 했다. 제주는 다른 바닷가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보통의 바닷가 관광지는 바닷가 옆으로 횟집들이 줄 지어 서 있는데 제주는 바닷가로 가 보았자 그다지 횟집이 눈에 띄지 않았다.
차를 서너 번이나 되돌려 다시 성산일출봉 쪽으로 향하자 두어 곳의 횟집이 보여 그중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비가 다시 내려 실내에 자리 잡았다가 J의 고집에 밖으로 나갔다.
회를 시켜 놓고 보니 그 곳에서 성산 일출봉이 바로 보였다. 비는 내리고 술잔은 돌고, 안타깝게도 K는 운전 때문에 소주 한 잔만을 마시고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갈매기 두어 마리가 빗속을 날고 있었고, 일출봉은 저 혼자 첨성대처럼 바다를 향해 묵묵히 서있다. 그 모습이 왠지 믿음직한 장군처럼 느껴졌다. 몇 시간을 횟집에서 노닥거렸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저녁 아홉시가 넘어야 했으므로 그가 소주 한 잔의 취기마저 완전히 깼다고 생각 되었을 무렵 우리는 횟집을 나왔다. 차는 ‘남영마트’ 라는 곳에 주차를 시켜 놓고 택시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제주공항 로비는 그야말로 난민촌이었다. 여러 종류의 박스들이 난무했고, 야외 돗자리까지, 그 위에 드러눕거나 앉았던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공항 직원들은 그 박스들을 치우고, 그러면 또 다음 사람들이 어디선가 박스를 가지고 와서 퍼질러 앉고 했다. 로비 곳곳에 핸드폰 충전을 위한 전기 코드들이 늘어져 있고, 그 곁에서 충전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꽃사슴은 “아 이거 재밌다. 우리도 앉아서 사진찍자” 며 방금 자리를 비운 박스위에 주저앉는다. 우린 서로 돌아가며 핸드폰으로 기록을 남겼다.
여행에서 제일 즐거운 것은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다. 어쩌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사람을 흥분시키는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 일 없이 간단하게 끝나는 여행은 왠지 지리멸렬 할 것 같은 느낌, 어느 영화에서처럼 피서지에서 생긴 일 하나쯤은 간직하고 싶은 것이 여행하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욕망이 아닐까 싶다. J부부는 밤 10시 20분, 우리는 9시 35분발이었다. 그러나 항공사 직원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상황에 따라 지연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항공사에서는 비상 수송을 위해 특별기를 계속 제주로 보내오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되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비행기는 떠올랐다. 제주에 올 때, 탔던 것 보다 더 큰 비행기였다. 특별기라 했다. K는 궁금했던지 스튜어디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뭘 그리 자꾸 물어 쌌느냐는 내 말에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까봐, 라고 말하며 재미있어 한다.
태풍이 온다는 말을 듣고도 떠났던 제주도로의 여행, ‘무이파’로 인해 마음껏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출발 때부터 빠트린 J안사람의 주민증, J의 집 피아노 위에 두고 갔던 계획서, 허름한 한국콘도, 거친 바람과 빗속을 다녀 머리에서 발끝까지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던 일, 한기로 인해 소름이 돋아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소주부터 찾았던 일까지. 그리고 한권의 앨범에 오롯이 담긴 그 때 그 시간들……. 또 하나의 추억 통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11년 8월 8일
첫댓글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 그게 가장 좋은 여행이겠지요. 제주도는 역시 언제 다시 가도 좋은 곳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