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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의 찬바람(구례, 순천 , 광양) 5
지역 문화사로 부터 차를 마시는 사이 우리의 대화가 화제에 올랐다.
"아, 선생님들 지금 전쟁터를 찾으러 왔나요?"
"네, 6.25전쟁 격전지를 찾고 혹시라도 처리하지 못한 유해가 남아 있다던가 아니면 사연이 있는 전쟁이야기를 찾으러 여기에 왔습니다. 악양 초등학교 뒤에 그당시 유해를 매장했다는 이야기 혹시 선생님 못들으셨나요?"
"그러면 들어오시면서 악양루 근처에 지금 신다리 공사중인데 그곳은 들으셨습니까."
"국군이 후퇴하면서 폭파했고 그곳에서 아군 2명이 전사 했는데 다라 옆에 가매장하고 떠나버려 7월말 장마에 그만 떠내려 갔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오는 입구 고소성이 있는 곳에 개인호가 있고 전쟁은 조금 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하동 쇳고개와 계동리 이야기도 하고 화전리 이야기도 한다.
"그러면 악양초등학교에 가서 돌봄이 아저씨를 만나면 되겠네요. 해병대 상사출신으로 월남전 참전용사 입니다. 이곳 토백이로 바로 학교 옆이 집이라 가장 잘 알 겁니다."
우리는 차를 마시고 바로 최참판댁 맞은편 민간인 기와집을 찾았다.
대문 입구에 큰 감나무의 가지가 땅까지 내려와 덮을 정도로 곶감 만드는 작은 토종감이다.
이집의 할아버지 나이가 90, 직접 6.25당시 부역에 참가한 장본인 이다. 2007년도에 한번 들어와 대면한 적이 있어 그때 이야기를 일행에게 직접 들려주려 한다
대문은 반쯤 열려 있어서 우리는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계십니까", "네, 누구신지요?"
머리가 하얀 보지못한 할아버지가 나오신다. " 아, 예 혹시 김문식 할아버지... ."
알고보니 할아버지는 1개월전에 99세로 돌아가시고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던 큰아들이 내려와 96세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 큰아들 나이가 무려 75세다.
이렇게 그 당시를 기억하고 실제 경험한 인원들은 모두 돌아 가신다
돌아 가신 할아버지는 '50년 7월 25일경 이곳에 피난가지 않고 32의 나이로 장가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3일인가 그전인가 새벽에 시끄러워 나아보니 웬 군인들이 평사리 저 들판으로 막 달려나가고 멀리서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쟁이었다. 도망칠 겨를도 없다. 벌써 동네 젊은 인원 한명이 빨간 완장을 두르고 해방군이 들어온다고 밖으로 나와 만세부르라 한다.
요란하게 호르라기도 불고 태극기 있는 집은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데 군인인줄 알고 국군만세라 부른다. "동무, 벌써 죽었어. 한번은 용서하지!" 북한군이었다.
이웃 할아버지는 얼른 어디서 들었는지 "김00장군 만세"라 한다. 태극기는 품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순간에는 죽고 사는 문제였다
화개장터에서 이미 전쟁을 하여 학도병이 많이 상하고 인솔하던 방위군 장교들은 도망치고 인솔자도 없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하동 방향으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차도 없고 오직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가는데 그래도 일부 지휘자들은 흩어진 군조직을 여기저기 만나면 규합하여 임시 조직을 만들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간 부대는 정래혁 중령이 이끄는 부대로 말이 대대 규모지 중대 병력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작고하신 할아버지는 광풍이 휩쓸고간 이후 부역자로 나가 화개장터 저 위부터 하동에 이르는 19번도로변에 죽어있는 시신을 거둬 인근에 안보이게 묻는 것이 임무였다.
지금이야 도로다운 도로가 되어 아스팔트 포장도 되어 있지만 그때야 겨우 우마차 가 교차 지나가는 비포장길로 옆은 대부분 야산이었다.
지금 차밭은 그 이후 개간하여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을 재건운동이 벌어지고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고 하면서 차량으로 교차 통행이 가능토록 확장 되어왔고 지금은 4차선 도로로 구간구간이 넓혀진 상태니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다.
나한테 남겨준 이야기는 지금 도로변에서 변하지 않은 곳의 주변을 찾아보면 애기묘처럼 약간 뽈속 나와 있으면 한번 파 보라 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지금 안계시고 없다.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사실 그때 우리는 지표 조사도 못했다. 할 여력도 없었지만 위치 선정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무연고 묘나 애기묘도 있을수 있는데 모두 개장공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평사리를 떠나 악양면사무소 소재 악양초등학교로 갔다.
마침 학교 수업시간이고 돌봄 안전지킴이 아저씨가 계시다.
"지킴이 아저씨, 아저씨가 이곳 6.25전쟁 관련 내용을 가장 잘 안다고 평사리 문화해설사분이 소개해서 왔습니다."
"예, 조금 전에 전화 받았어요. 무엇을 알고 싶으세요. 내가 그 당시 10살인데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이 학교에 북한군 지휘소와 야전병원이 있었지요. 미군 비행기 폭격과 포탄이 비오듯 쏟아져 많이 죽었어요. 나는 호기심에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경을 했어요. 무섭지도 않아."
"그럼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도 보셨나요?"
"사실 그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동네 어른들하고 일부 부역자들이 치웠거든!"
"그런데 그걸 알아서 무엇하려고요. 북한군을 발굴하여 어디에 보내나요. 중공군은 보내주고 있돈데. TV에서 봤어요."
"그런 것은 아니고요. 야전병원이라하고 지휘소가 있었다 하니 혹시 우리 군인이나 경찰이 포로로 붙잡혀 있다 죽을 수도 있어서 그 위치를 한번 보고 싶거든요."
" 저 학교 뒤 소나무 밭 좌측 지금 과수원으로 변해 가는데 그곳에 가보면 모르겠네 흔적이 있을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린 차를 돌려 골목길을 돌아서 그 근처로 가서 내렸다. 위치는 바로 학교 북쪽 뒤였고 소나무 큰것이 군락으로 몇그루 옆에 있어 찾기 쉬웠다.
그리고 그곳에 어느 종친의 선영묘들이 있었다. 바로 옆으로 개간하여 감나무 밭이 늘어나고 있는 상태로 아직 원형이 그대로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지킴이 아저씨가 올라오신다. 직접 알려 주어야겠다고 한다.
김실장이 물었다. 어르신 월남전에 해병대로 가셨는데 거기서 우리 국군도 많이 전사했나요?"
지킴이 아저씨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신다. " 나는 일선 부대에서 나가 있어서 죽은 것은 알지만 몇명이 죽었는지는 모르고 우리 중대에서는 몇명 죽지 않았어요."
"그럼 그 죽은 유해는 다 찾아 오셨나요?"
"우리 동료는 다 찾아서 현지에서 영결식하고 떠나 보낸는데 아마 어디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본국으로 배로 운구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우리는 혹시나 월남에 남겨진 우리 국군용사님이 계실까 기대반 우려반을 갔고 물어 봤는데 역시나 알고 있는 그 이상이나 이하도 아니였다.
"월남전에서 전.사망 총계는 5차에 걸쳐 수정 발표되며 5,099명이 최종 발표 숫자다."
우리가 월남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1964년에는 육군만 140명이 들어갔고 1965년부터 전투병이 들어가는데 육군 15,973 , 해병대4,286 , 기타 공군 해군이 21/261명 수준이었다. 최초 20,541명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인 1966년에 두배규모로 늘어나는데 45,605명으로 주로 육군이 40,534명으로 대다수 였다.그러다 다시 1967년에 48,839명으로 해병이 6,144명으로 증파된다.
총 전사망 5,099명중 전사는 4601명 순직 272명 사망 226명이 공식적인 최종 숫자다
1973년1월23일 베트남 평화협정이 조인되고 28일 08:00시부 발효됨에 따라 우리군은 1월30일부터 선발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여 3월23일 철수 완료하는데 모두 항공기를 이용했으며8년 6개월의 대장정을 완료한다.
나는 육군본부에 근무시절 웃기는 업무를 하나 밤샘하고 욕먹고 미친몸 소리 들으며 이 월남 전쟁 실종자 인원을 파악하여 보고한 적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 되었다.
2002년 어느날 갑작스레 미군측에서 한국군 박우식 대위를 발굴했다고 인수해 가라는 것이다.
미군 발굴팀이 월남에서 추락한 미군헬기 위치를 추적하여 발굴하는 과정에 한국군 박우식 대위를 발굴 했다는 것이며 이미 주한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박우식 대위의 유가족과 접촉하여 유전자 감식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송환 업무가 육군본부에 떨어지고 그 업무를 나에게 추진하라 하였다.
업무 분장표에 명확히 그건 군수참모부의 일이고 특히 외국에 나가 들어오는 것은 국방부 군수국과 군비통제실의 협력하 이루어지도록 되었다.
그러니 나보고 하라하니 어처구니가 없는데 내 바로 위에서는 몇명이 실종 되었으며 그 현황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내가 무슨 수로 그걸 파악하겠는가. 전사망 통계도 5차에 걸쳐 수정 발표되는 마당에 하지만 군인이란 하면 할 수 있다.
그때 국방부 업무 파트너가 인사국에 고00사무관인데 아주 인성이 좋은 친구였다.
현황을 알려달라 하니 오히려 나보고 물어본다.
이미 업무분장표를 이용하여 책임한계를 2차 상급자까지 보고하고 그 내용을 올려 주었는데 육군이니 육군에서 해야 한다는 별 이상한 논리다.
그 친구는 아무런 준비도 없고 사실 행정고시로 들어오다보니 군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직급만 5급이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본인은 내가 구세주인데 도와 주었으면 좋으련만... .
하지만 우리 수뇌부에서는 명확히 책임소재를 하라는 것이다. 회피가 아닌 명확한 업무한계란다.
나는 어쨌든 상황을 고려하여 각 처부를 임무를 식별하고 실제 실종자 숫자 파악에 나서 8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박우식 대위는 제9사단 29연대 3중대 소속인데 지금이야 결과처리가 되었으니 쉽게 말하지만 과정에 있어서는 혼선이 있어 이미 우리는 전사처리로 되어있는, 다시말해 유해가 우리측에 와 있는 것처럼 되어 진실여부가 대두 되었는데 미군측이 유가족까지 추적하여 DNA감식까지 완료했으니 그동안 우리측은 아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게 우수꽝 스럽다.
지금의 남북문제에서도 그런 징후는 여러군데서 나타난다. 누구를 패씽하고 누구와 비밀 접촉을 하고 미국은 그런것을 전 세계에 조직망을 가지고 우세한 장비를 이용하여 나쁘게 말하면 월권 행위를 많이 한다면 이상할까!
그러더니 동아일보 모기자가 이번에는 월남에 한국군 가매장지가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심심하면 올라온다고 하는데 월남 현지인이 실제 위치를 알고 제보한 것이라며 본인이 방문도 했단다.
그러면 정말 월남에 남아 있을까?
답부터 이야기하면 공식 기록으로 그런 것 없다.
실종 8명중 2명은 월북으로 전단지에서 식별 되었고 대위 한명이 월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한명은 현지 탈영, 한명은 휴양소 수영중 실종 되었고 한명은 근무지 무단이탈 한명은 외출중 실종이다.
박우식 대위는 헬기 추락사추정에서 유해 수습이 되었고.
결국 고 박우식 대위는 국방부 주관하 송환업무로 결론이 나고 7월 말에 그 유가족이 하와이에 가서 유해를 인수하여 소령으로 추서 진급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 되었다.
그러니 지금 실종은 공식 4명(월북 관련 3명, 현지 탈영 1명)인 셈이다.
지킴이 해병대 아저씨의 확고한 답변은 전국 어디가나 "해병은 전우를 남기지 않는다"가 정답이다.
김실장의 질문으로 시작된 이곳 이야기는 이렇다.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이곳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벌써 저 평사라에 국군이 아직 버티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완장을 차고 공부하러 한양 갔다던 동네 형이 설치고 다니며 해방군이 온단다.
나는 뭔지도 모르고 여러 명이 가길래 나도 형 뒤를 따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서울에서 남노당에 포섭되어 이 동네 자치 위원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곳이 평야가 넓어 곡창지대로 이 일대에서는 가장 부한 곳이다.
한참 밀리어 내려가고 있는데 미쳐 본대와 함께 빠지지 못한 경찰인지 군인인지가 민간인 복장으로 저 건너편으로 달리는데 뒤에서는 공산군인지 동네에 있던 프락치 대원들인지 잡아라하며 뒤를 쫒는다. 전쟁이 월남전에 가서 실제 해 보았지만 살기만 하면 상당히 재미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어릴때야 더 재미 있겠지. 결국 그 인원은 잡히지도 죽지도 않고 산 넘어 가 버리고 뒤쫒던 인원들이 이 학교로 돌아왔는데 쳐다보니 다 알고 있던 형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이 완전히 빨갱이 판이었는데 그걸 몰랐으니 전쟁이 나지.
지킴이 아저씨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버지는 당시 학교 소사, 심부름하고 시설물 관리하고 요즘 같으면 아파트 관리인하고 비슷하다할까 그 직책을 했는데 학교를 전쟁 통에도 그놈들이 개교를 시켜서 문을 열었어요.
그래서 우리들 모아놓고 장백산가 가르치고 한글도 가르쳤어요. 배워야 한다며.
교실 몇개는 지휘부로 양호실이 있던 곳은 그들 야전병원으로 사용하는데 조금 있으니 어디서 오는지 부상당한 사람들이 오는데 군인 복장보다는 학생 복장이 더 많이 보였던것 같아요.
그러다 또 얼마가 지나는데 날씨는 얼마나 더운지 우리는 저기 악양천에서 목욕도 하고 그놈들이 뭐라 하지 않더라고.어린이와 노인들을 그리고 일부 아낙네들 빼고는 모두 불려가 밤이면 무슨 재판인가 사상교육인가 한답시고 잡아가고 그런데 어느날부터는 교육이 아니라 밤새 포탄이나 실탄 먹을 것을 메고 산을 넘어 함안 어디까지 갔다 온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녁에 도착하여 넘겨주고 통제하는 인원을 따라 다시 집으로 오면 해가 오른다고 한다.
소문도 돈다. 유엔군이 강력하게 반격을 하여 해방군이 진출을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학교는 임시 휴강이 되고 그래도 우리는 신기해서 학교에 가 북한군인지 어디에서 데려온 학도의용군인지 형들하고 옆에 있으며 가끔 심부름도 하고 밥도 얻어 먹곤 한 기억이 있다.
여기는 감, 그중에서도 가장 큰 대봉이 잘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감나무에는 감들이 파랗게 크게 자라고 있고 또 배나무도 유명하다. 땅이 좋아서 그런지 당도가 높아 전국적으로 하동배 대봉이 인기가 있는 상품이다. 그 배는 거의 익어가고 있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따 먹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돼지 닭을 잡아가고 돈을 주는데 그 돈을 어디에 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