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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교육의 문명사적 고찰
김영호
(새화랑유치원 이사장)
1. 들어가는 말
교육은 문명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문명의 발생과 성장에는 교육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경주에 남아 있는 분황사,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석굴암, 첨성대, 봉덕사종, 대릉원, 금관 등은 신라인의 예지가 담긴 창조적 교육문명(敎育文明)의 사적(事跡)들이다.
불국사는 큰 기와집이고, 다보탑과 석가탑은 정원의 장식물, 석굴암은 돌부처의 지하실, 첨성대는 돌로 쌓아놓은 모형, 포석정은 향연을 위한 야외놀이터, 봉덕사종은 하나의 커다란 금속으로 만든 과시용 종(鐘), 대릉원은 공동묘지, 금관은 왕들의 액세서리(accessories) 등으로 단순히 가볍게 볼 수 없는 문명의 실체적 표상(表象)들이다. 이들 표상에는 신라인이 후세(後世)를 위해 남겨 놓은 수많은 의미를 담은 지고(至高)한 가치(價値)의 교육문명이다.
그 수많은 의미가 오늘의 경주를 있게 한 것이고, 대한민국이 반만년의 역사를 있게 한 신라교육의 자랑스러운 문명사(文明史)일 것이다.
오늘날 AI와 IT기기(機器)는 인간이 창조한 교육문명의 놀라운 산물(産物)이다. 이것은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인간의 하인(下人)이 되어 새로운 문명사에 기여하고 있지만 신라인이 남겨 놓은 유물과 비교해 볼 때 신라인의 문화적 작품들은 현대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우수한 창조적 기술능력이 내재(內在)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신라의 교육문명을 창조한 신라의 교사와 학생, 교육사상가, 교육문명의 실체, 화랑도 교육 등에 관한 것을 개괄적으로나마 고찰하여 경주발전을 위해 문명사적 자료로 조망(眺望)하고자 한다.
2. 신라의 교사와 학생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육부의 조상들이 각기 그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는 까닭에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君主)로 삼고 나라를 세워서 도읍을 두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三國遺事』 第一卷 奇異. 前漢之節元年壬子三月朔 六部祖 各率子弟 俱會於閼川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박혁거세는 육부(六部)의 조상(祖上)들로부터 덕(德)있는 사람으로 인정되어 백성을 다스릴 적임자로서 추대되었다. 그래서 보령(寶齡) 13세에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의 군주가 되어 61년간 백성을 다스렸다.
다스린다는 말에는 교육의 의미가 함의(含意) 되어 있으므로 박혁거세는 공인된 신라 최초의 교사인 셈이다. 교사의 인간조건에는 덕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덕으로 다스리는 군주가 성군(聖君)이며 성사(聖師)가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 신라혁거세거서간(新羅赫居世居西干), 38년 계사(癸巳)에 낙랑인(樂浪人)이 침입하여 국경까지 왔다가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판에 노적가리가 있는 것을 보고 “도의를 지키는 나라이니, 가히 침범할 수 없다.”하고 곧 철병(撤兵)하여 돌아갔다. 이 사적 하나만 보더라도 혁거세거서간은 백성들을 잘 교화(敎化)하였고, 정사(政事)를 잘 폈던 군왕(君王)이며 교사(敎師)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本紀 新羅赫居世居西干, 三十八年 癸巳 樂浪人 將欲襲掠 及至 國境 見民不夜扃 野有露積 乃曰有道之國 不可犯也 撤兵而還
내물왕(奈勿王)은 석씨(昔氏) 흘해왕(訖解王)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추대되어 356년 4월에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2년 봄에(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환(鰥: 홀아비), 과(寡: 홀어미), 고(孤: 어머니 없는 아이), 독(獨: 아들 없는 늙은이)를 무문(撫問)하고 각각 곡식 삼곡(三斛) 씩을 주었고, 효제(孝悌)로 남다른 행실이 있는 자에게는 관직 1급(級) 씩을 주었다.
9년 4월에 왜병(倭兵)이 크게 쳐들어 왔을 때, 왕이 듣고 이를 대적치 못할까 하여 초우인(草偶人)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지니어 토함산 밑에 벌여 세우고 용사 일천(一千)을 부현(斧峴) 동원(東原)에 잠복하여 두었더니 왜인(倭人)이 중(衆)을 믿고 곧 진퇴하여 오고 있어서 복병(伏兵)이 일어나 불의(不意)에 적을 치니 왜인이 크게 패(敗)해 달아나자 이를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17년 춘하(春夏)에 몹시 가물어 흉년이 들고 기근(飢饉)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유망(流亡)하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창름(倉稟)을 열고 구제하여 주었다.
18년에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을 이끌고 내투(來投)하므로 왕이 이를 받아들여 육부에 분거(分居)하게 하였더니, 백제왕이 서(書)를 보내어,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지금 대왕이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우 어그러지며 내가 평일(平日) 대왕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청하건 데 그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인민(人民)이란 것은 상심이 없는 고로 생각이 나면 오고 맘에 싫으면 가버리는 것은 정한 일이거늘 대왕은 백성의 불안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람이 어찌 그리 심하냐.”고 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38년 5월에 왜인이 금성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아니하였다. 장사가 다 나가 싸우기를 청하니 왕이 가로되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봉을 당기기 어렵다 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으니 적이 싸운 보람 없이 물러가는지라 왕이 먼저 날쌘 기병 200명을 보내어 적의 귀로를 막는 동시에 일변 보졸 1,000명을 보내어 독산(獨山 : 延日)에서 쫓아 두 쪽에서 협격(夾擊)하여 크게 깨트리니 살획(殺獲)이 매우 많았다.
40년 8월에 말갈(靺鞨)이 군사를 일으켜 북변(北邊)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내어 이를 실직(悉直) 들에서 적을 크게 깨뜨리었다.
당시 신라의 입장은 백제가 가야연맹과 왜국 등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연합할 수밖에 없었는데 왕은 혼란했던 난국을 잘 타개함으로서 강력한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이리하여 내물왕은 52대 효공왕까지 김씨가 신라의 왕위를 세습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내물왕은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들에게 곡식을 내리고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한 자에게 관직 1급식을 주었다는 것과 백제의 독산성주가 300 명을 이끌고 내투하였을 때 사살하지 않고 왕이 이를 받아들여 육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것, 왜병이 침략하였을 때 전술전략을 잘 하여 적을 물리침으로써 백성의 목숨을 지킨 것 등은 군왕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려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였던 사적(事蹟)이므로 그 교훈적 의미가 큰 것이며, 이는 내물왕이 현명한 군왕만이 아니라 신라인의 위대한 교사임을 말해 준다.
3. 신라의 교육사상가
교육사상가는 교육에 관하여 체계 있는 지식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신라의 교육사상가는 신라 건국이후 천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교육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한 법사(法師)라 할 수 있다.
신라의 교육사상가로는 거명(擧名)되는 법사(法師)들은 당(唐)에서 유학한 학승(學僧)들이었다. 그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정치적・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바탕으로 하고, 한편 당의 발달된 문화를 활발히 수용하게 된 시기에 불교신앙도 현세 공리적(公利的)인 불교신앙에 더하여 참다운 신교(信敎)로서의 면목을 희구하고 국내외에서 불교의 학문적 연구와 그 신앙의 참다운 길을 소개하고 개척하였으며, 당시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여 주었다.
본고에서는 신라인들의 지적수준을 당대의 중국인들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우수하였던 몇몇 학승인 원광법사(圓光法師), 원효(元曉), 의상대사(義湘大師)와, 설총(薛聰)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원광법사(圓光法師)
당의 『속고승전(續高僧傳)』 제13권에 원광법사에 대한 사적(事績)이 전해오고 있다. 원광은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승려이고, 속성은 박씨이며 진한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해동에 살았으며, 조상의 풍습이 길게 이어져 온 까닭에 신기(神器)가 넓었다. 또 문장도 좋아하고 도학(道學)과 유학(儒學)을 섭렵(涉獵)하였으며, 제자(諸子)・사서(史書)를 공부하여 그 문명이 삼한(三韓)을 복종시켰다. 그러나 박람(博覽)이 중국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에 이르렀다.
唐續高僧傳第十三卷載 新羅皇隆寺釋圓光 俗姓朴氏 本住三韓 光卽辰韓人也 家世海東 祖習綿遠 而神器恢廊 愛染篇章 校獵玄儒 討讎子史 文華騰翥韓服. 博瞻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 發憤溟渤하여 年二十五에 乘舶造于金陵.
처음에는 장엄사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는데, 본래 세간의 전적(典籍)을 잘 알아 궁리(窮理)가 신통하였다고 여겼으나 석종(釋宗)의 강론을 듣고는 오히려 썩은 초개(草芥)와 같이 여겨졌다. 헛되이 유교(儒敎)를 공부한 것이 실로 생애를 두렵게 한다고 여긴 그는 진나라 황제에게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할 것을 청하였다. 칙서(勅書)로 허락하였으므로 처음으로 승려가 되어 곧 구계(具戒)를 받고 강사(講肆)를 두루 유람하며 좋은 도리를 다하고 미묘한 말을 해득하여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初聽莊嚴旻公弟子講 素霑世典 謂理窮神 及聞釋宗 反同腐芥 虛尋名敎 實懼生涯 乃上啓陳主 請歸道法 有勅許焉 旣爰初落采 卽稟具戒 遊歷講肆 具盡嘉謀 領牒微言 不謝光景.
또 오나라의 호구산에 들어가서 염정(念定)을 계속하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자들이 임천(林泉)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아울러 사함(四含)을 종합하여 섭렵하고 공이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본받기가 쉽고 통직함은 무너뜨리기가 어려워서 깊이 마음먹었던 바에 부합하였다.
원광의 학문이 오월(吳越)에 통하였으나 다시 주(周)・진(秦)의 교화를 보려고 개황9년에 장안으로 유람 왔는데, 불법이 처음 모이고 섭론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때를 맞아 문언(文言)을 받듦으로써 미묘한 실마리를 진작시켰으며 또 지혜로운 해석으로 명예를 장안에 날렸다. 이와 같은 공적을 본국에서 듣고 상계(上啟)하여 자주 송환을 청하였다.
원광이 수십 년 만에 돌아오니 노유(老幼)가 서로 기뻐하였고 신라 왕 김씨가 만나보고 공경하며 추앙하기를 성인처럼 하였다. 원광의 성품이 겸허하고 정이 많아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말에 항상 웃음이 있고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건복 58년에 몸이 조금 아프다가 7일이 지나 청절한 계를 남기고 기거하던 황륭사 가운데 단정히 앉아 임종(臨終)하니 춘추(春秋) 99세였다. 그는 화랑의 수련덕목인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을 내포(內包)한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남긴 신라의 위대한 교육사상가였다.
2) 원효대사(元曉大師)
원효(617-686)는 지금의 경산시 근처에서 육두품족(六頭品族) 설담날(薛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이었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는데 장차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기운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 39년인 대업(大業) 13년 정축년이었다.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 배웠다고 한다.
『三國遺事』 第四卷 義解.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 丁丑歲 生而穎異 學不從師.
29세 때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황룡사에 들어가서 중이 되고, 법명(法名)을 비로소 원효(元曉)라 하였다. 33세 때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기 위해서 지금 서해안의 남양(南陽)이나 아산(牙山) 근처를 향하던 중 갑작스러운 비가 내려 무덤인 줄 알지 못하고 찾아들어 하룻밤을 지냈다. 잠결에 그 속에서 해골에 괸 빗물을 마셨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화엄(華嚴)의 진수를 깨치고 오직 국내에서 독학(獨學)에 전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음날 사람이 살던 집을 찾아들어 잠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무덤 속에서와 같이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던 끝에 이러한 변화란 필시 내 마음 하나(唯識)의 탓으로 해서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 마음(唯心) 만이 있고 그 밖에 또 다른 법(法:三界)이 있음을 알 수 없는 일이니, 내 자신의 마음의 문제를 구태여 바깥 나라로 구하러 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크게 깨달은 것이다. 그 뒤 그의 불교연구의 성의는 99부 24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나타났고, 황룡사와 분황사 등에서 불교를 강론하였다.
대사가 일찍이 하루는 춘의(春意)가 동하여 거리에서 노래 부르기를, “누구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떠받힐 기둥을 깎아 보고 싶구나.”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때 태종(太宗)이 듣고 말하기를, “이 대사(大師)가 아마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듯하다.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그 이익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요석궁(瑤石宮)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칙명(勅命)을 내려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불러들이게 하였다. 궁리(宮吏)가 왕명을 듣고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궁리를 만나자 원효는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가 대사를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입히고 말리게 하였으므로 그곳에서 유숙(留宿)하였는데, 공주가 과연 임신(妊娠)을 하였고 설총을 낳았다.
師嘗一日 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時瑤石宮 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 遇之 佯墜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禠衣曬량 因留宿焉 公主果有娠 生薛聰.
원효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는 속복(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다.
일찍 수많은 부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화영(化詠)하고 돌아왔다.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고 나무(南無)의 칭호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고 하겠다.
그가 출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불일(佛日)을 처음 빛냈다는 뜻이다. 원효는 또한 방언인데,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향언(鄕言)으로서 새벽이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일찍이 분황사에 거주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편찬하다가 『제40회향품(第四十廻向品)』에 이르러서 마침내 절필(絶筆)하였다. 또 일찍이 공무로 인하여 몸을 백송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모두 위계의 초지라고 하였다. 또 해룡의 인도에 따라 노사에서 조서를 받고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 필연(筆硯)을 소의 뿔 사이에 놓았다고 하여 각승(角僧)이라고 하였다.
원효가 일찍이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찬하였다(曉嘗所穴寺旁에 有聰家之墟云 讚曰).
角僧初開三昧軸 각승초개삼매축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축을 열고
舞壺終掛萬街風 무호종괘만가풍 무호는 마침내 만가의 풍습이 되었네.
月明瑤石春眠去 월명요석춘면거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을 자고 나니
門掩芬皇顧影空 문엄분황고영공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보는 그림자 쓸쓸하네.
3) 의상대사(義湘大師)
의상의 아버지는 김한신이고 진평왕 47년(625)에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영특했고, 성품이 천연하였다. 자라면서 속세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소요하다가 29세에 경사 황복사에서 삭발을 하고 불문(佛門)에 들었다고 한다.
法師義湘)은 考曰韓信으로 金氏라. 年二十九世에 依京師皇福寺落髮이러나 未幾에 西圖觀化하여 遂與元曉道出遼東이라가 邊戌邏之爲諜者하여 因閉者累旬하다가 僅免而還하다.
당나라에 들어가서 유식학의 대가인 현장(玄奘)의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하다가 종남사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嚴)의 문하에서 화엄사상을 공부하였다. 원효에 비해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가 남아있다.
이 법계도는 화엄사상을 요약 정리한 7언 30구 210자의 게송을 도장 모양의 그림 형식을 만든 것이다. 서문에서는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은 정해진 처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근기와 병의 증상에 따르는 것이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은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림자에 집착하여 본체를 잃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열심히 해도 근본으로 돌아갈지 기약하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의 이치에 의지하고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槃詩)를 만든다.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을 이름붙일 수 없는 참된 근원에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림자를 참이라 착각하고 이름에 집착하여 본질을 놓치는 무리들이 참된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글을 쓴 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법계도에 의상의 교육사상인 ‘환본의 교육론’과 ‘내 몸 교육론’이 담겨있다. 글을 쓴 목적이 ‘길을 잃고 헤매는 미자(迷子)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귀종(歸宗), 환귀(還歸), 환본제(還本際) 등의 표현을 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어서 의상의 교육사상은 근본 마음으로 돌아가는 교육, 즉 환본(還本)교육론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학습자인 무지의 중생에 대한 인식이다.
무지의 존재를 무능력의 존재로 보고 있으며, 학습자를 행자(行者)라고 표현하고 있다. 행자는 길을 가는 사람, 즉 수행자다. 누가 길을 가는가, 수승과 교육자의 수행이 학습자의 수행이 될 수 없고, 학습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망상은 누구의 망상이며, 누가 그 망상을 쉬게 할 수 있나. 스스로 쉬게 할 수 밖에 없다. 환본의 교육론에서는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인 것은 중생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완전히 나의 몸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상은 제자들과 문답할 때 ‘내 몸’, ‘나의 몸(吾身)’이란 말을 많이 하고 있다. ‘내 몸 교육론’은 ‘내 몸이 내 몸을 교육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자기가 자기를 교육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스승이 제자를, 보다 성숙한 사람이 보다 미성숙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상의 내 몸 교육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의상의 견해는 화엄사상의 견해로서 ‘내 몸’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남과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부처는 중생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보며, 중생의 몸이 있고 부처의 몸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인식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뚜렷이 구분되지만, 부처의 눈으로 볼 때는 한 찰나(一念)에 존재한다. 법계도에서도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라 하였다.
구세는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라는 과거 삼세와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라는 헌재 삼세, 그리고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라는 미래 삼세를 말한다. 여기에 이 구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념이라고 한다. 이 일념을 포함하여 십세(十世)라 하고, 그것이 서로 붙어있다고 한 것이다.
의상은 교육사상가인 동시에 매우 활동적인 교육실천가였다. 소백산 추동에서의 90일간의 화엄경 강의 때는 3,000명이라는 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다는 사적(史籍)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4) 설총(薛聰)
『삼국유사』에 의하면,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대사이고 어머니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이다. 태종무열왕이 궁리(宮吏)에게 칙명(勅命)을 내려서 원효(元曉)를 요석궁(瑤石宮)으로 불러들여 그곳에서 유숙(留宿)시켜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와 짝이 되도록 하여 설총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三國遺事』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 遇之 佯墜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禠衣曬량 因留宿焉. 公主果有娠 生薛聰.
『삼국유사』열전(列傳)에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니, 신라의 10현(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으로 중국과 신라의 속물명을 통회(通會)하고 6경문학을 훈해(訓解)하여, 지금도 해동에서 경을 공부하는 자들의 전수함이 끊이지 않고 있다.”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 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缺落)되어 읽을 수가 없으나,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
又能屬文 而世無傳者 但今南地或有聰所製碑銘 文字缺落不可讀 竟不知其何如也
설총은 신문왕과 사이가 좋아 신문왕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통일신라의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신문왕에게 임금은 충신을 가까이 하고, 간신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화왕계를 지어 바쳤다. 화왕계에는 모란꽃, 장미꽃, 할미꽃이 표현되어 있는데 각 꽃은 임금, 간신, 충신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신문왕이 일찍이 한가하여 설총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막 그치고 향기로운 미풍이 불고 있다. 고아한 담론과 좋은 해학으로써 울적한 회포를 풀었으면 하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터이니, 나를 위해 들려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총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옛적에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했습니다. 봄날 내내 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다투어 달려와 뵙지 아니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나니 이름은 장미(薔薇)라 합니다.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 치아며, 곱게 단장한 옷을 입고 또렷한 모습으로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말하기를, “저는 왕의 훌륭한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 대장부가 있으니,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 합니다.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둘렀으며, 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었으며 노쇠하여 비틀거리고 굽은 허리로 걸어와서 말하기를, “저는 서울성 밖 큰 길 가에 삽니다. 생각하옵건대 왕의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기름진 음식이 풍족하지만 상자 속에 저장해 두는 데는 반드시 좋은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麻)으로 만든 끈이 있어도 띠(茅)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왕께서도 그러한 뜻이 있으십니까?”라고 하자,
화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에도 도리가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장부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이 되는 분은 노성(老成)한 신하를 가까이 하면 흥(興)하고, 요염한 여자를 가까이 하면 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염한 여자와 합하기는 쉽고, 노성한 신하와 가까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희(夏姬)가 진나라를 멸망시켰고, 서시(西施)가 오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또한 맹가(孟軻)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낮은 낭관(郎官)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화왕이 사과하며, ”내가 잘못했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문왕이 추연하게 얼굴빛을 바로 고치며, “그대의 말은 풍자하고 비유함이 참으로 깊고 간절하오. 이를 글로 써서 감계(鑑戒)로 삼고 싶소.”라고 하였다.
또 설총은 신라인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향가가 대부분 이두로 기록 되어 있어서 난해 하였다. 그래서 우리말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이두의 체계를 정리하였다. 이두는 우리말의 조사와 향가의 뜻을 적절히 종합하여 우리말을 표현한 것이다.
4. 신라의 교육문명의 실체
경주시는 신라왕조 천년의 고도로서 각종 문화재가 무수히 산재해 있는 도시이다. 족단(足端)에 닿은 보잘 것 없는 한 조각 석편(石片)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자세히 보면 그것은 하나의 무가치한 소석(小石)이 아니라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예지(叡智)가 숨어 있는 예술작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주의 각종 문화유산은 조상이 남긴 보물이기 때문에 소중한 면도 있지만 그 문화유산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보면 형태, 구조, 문양, 색상, 질감 등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불가시적인 창조적 정신과 의미가 조상의 차원 높은 지혜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하여 더욱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신라인이 남긴 현존하는 교육문명의 실체(實體)는 수없이 만지만 본고에서는 성덕대왕 신종, 첨성대, 다보탑, 분황사탑에 대해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성덕대왕 신종
성덕대왕(成德大王)은 신종(神宗)은 다양한 의미가 담긴 신라인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이 황동 12만근을 내어 선고(先姑)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붕(崩)하자,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建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도(工徒)를 모으고 이에 완성하여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하였으니, 절은 바로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에 선고(先考) 성덕왕(聖德王)의 명(命)을 빌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同王 7년 771). 그러므로 종명(鐘銘)을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고 하였는데(成德大王은 즉 景德王의 아버지 興光大王이며 , 鐘은 본래 景德王이 先考를 위하여 시주한 금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에 聖德鐘이라고 함),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金弼奚가 왕명을 받들어서 종명(鐘銘)을 지었으나 글이 번거로우므로 싣지 않는다.
『三國遺事』 塔像 第4,..., 新羅 第三十五代 景德王 捨黃銅十二萬斤 爲先姑聖德王 欲鑄巨鐘一口 未就而崩 其子惠恭大王建運 以大曆庚戌十二月 命有司鳩工徒 乃克成之 安於奉德寺 寺乃孝成王開元二十六年戊寅 爲先考聖德大王 奉福所創也 故鐘銘曰 聖德大王神鍾之銘(成德乃景德王之考 典(興)光大王也 , 鐘本景德爲先考所施之金 故稱云聖德鐘爾) 朝散大夫 前太子司議郞 翰林郞 金弼奚 奉敎撰鐘銘 文煩不錄
이 종은 처음 봉덕사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일명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에 영묘사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지어 보존하였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에 옮겨 달았다. 이 종도 인왕동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되어 그곳에 종각을 다시 지어 옮겨 단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의 입 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音管)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둘레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乳廓)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둘레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향로(香爐)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하게 실측(實測)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 첨성대(瞻星臺)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A.D. 632~646) 때에 건립된 천문대이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체 외형을 보면, 네모꼴의 기단을 2층으로 놓고, 그 위에 원통형으로 몸체를 쌓아 올렸는데, 27단의 석단(石段)위에 ‘정(井)’ 자(字) 모양의 길쭉한 돌을 2중으로 올려 끝맺음을 하였다.
밑에서 13단(段)과 15단(段)에 걸쳐 남쪽으로 네모난 출입구를 만들었고, 그 아랫돌 양측에 사다리를 걸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몸체 안쪽 제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제19단, 20단과 제25단, 26단의 두 곳에 ‘정(井)’자(字) 모양으로 2단이 놓여있다. 1단의 높이는 약30cm이고, 전체 높이는 9.17cm이며, 밑받침돌 1변의 길이가 5.35cm로 되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첨성대를 구축할 때 쓰인 돌의 수가 362개라 하는데, 이것은 1년을 음력(陰曆)으로 계산해서 잡은 것이라 한다.
신라 사람들은 해와 달, 별의 움직임과 일식(日蝕), 월식(月蝕)을 세밀히 관측(觀測)하고 기록하여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인지 불길(不吉)한 일이 있을 것인지를 점쳐서 정치(政治)에 반영 시켰던 것이다.
지금은 우뚝 솟은 첨성대 하나만 남아 있으나, 당시에는 첨성대를 중심으로 천체(天體)를 관측(觀測)한 것을 기록하고 이들 자료를 토대로 해서 연구하는 관청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3) 다보탑(多寶塔)
다보탑(多寶塔)은 생긴 모양이나 조각솜씨로 볼 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석탑이다.
현재의 높이는 10m40cm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이 탑을 다보탑이라 부르게 된 것은,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설법한 것을 증명하는 순간을 표현하여 다보여래(多寶如來)상주증명탑이라 부른 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탑의 기단부는 네모로 구성하고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네 모퉁이와 중앙에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갑석을 받고 있다. 갑석 위에는 네모로 된 돌난간을 돌리고 그 안쪽에 여덟모가 난 옥신(屋身)이 있으며 다시 여덟모의 갑석을 덮고 여덟모로 된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대나무마디 모양의 돌기둥의 연화문이 새겨진 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연화문이 새겨진 돌 위에는 8개의 꽃술모양의 기둥이 양쪽에 있는 옥신을 둘러싼 체 여덟모가 난 옥개석을 받들고 있으며,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탑의 기간 사방 네 귀둥이에 원래는 4마리의 돌사자를 두었으나, 1구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사자를 석탑에 배치하는 예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4) 분황사(芬皇寺)
분황사(芬皇寺)는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고승 원효(元曉)와 자장(慈藏)이 살다 간 곳이다. 그리고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6만6천7백근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像)이 안치(安置)되었던 곳이고, 황룡사(黃龍寺)의 노송도(老松圖)를 그려 유명한 솔거(率居)의 관세음보살상벽화(觀世音菩薩像壁畫)가 있었던 곳이며, 또 희명(希明)과 그의 어린이가 천수관세음보살상(千手觀世音菩薩像) 앞에서 향가(鄕歌)를 뇌던 곳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돌우물에는 호국용(護國龍)이 살아서 호국사찰護國寺刹)의 이름을 얻었다. 또한 신라시대 석탑(石塔)으로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으며 이 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6년, 현재 분황사 뒤쪽 웅덩이에서 많은 양의 석불(石佛)이 발견 되었는데 좌불(坐佛) 13점, 광배(光背) 1점, 기타 6점이며 이들은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 절은 원효(元曉)(A.D.617-686)와 깊은 인연이 맺어진 곳이다. 원효가 입적(入寂)하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그의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하며 예배를 올렸다. 그가 예배할 때 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설총(薛聰)이 그의 아버지를 얼마나 극진히 사모했느냐 하는 것을 말 해 주는 것이지만 이 상(像)은 처음부터 그를 사모(思慕)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향해서나 돌아다보는 그러한 상으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원효의 소상(塑像)은 없지만 그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관련하여 한층 그의 따스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는 이 절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入寂)하였다.
5. 신라의 교육과 화랑도
1) 신라의 교육
신라는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세웠다. 이는 당나라의 국자감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관계가 12등급인 자로부터 무위자에 한했고, 연령은 15세에서 30세까지를 원칙으로 했다. 수학연령은 9년으로 한정하였으며, 교육내용은 유교의 윤리관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경전이 주가 되었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1) 논어, 효경, 예기, 주역
(2) 논어, 효경, 좌전, 모시, 춘추
(3) 논어, 효경, 상서, 문선, 산학
또 국학에 유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유학과 이외에 잡학교육으로서 기술적인 의학, 율학, 천문학, 산학 등을 가르치는 과도 있었다.
신라의 교육목적은 삼교의 윤리가 어울려서 독특하게 창조된 것이다. 국란타개에 앞장설 용감한 무사와 실천적인 인물 양성 및 전 국민에게 종교적・도덕적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는 것이다. 삼교의 윤리는 유교, 도교, 불교윤리를 말한다. 유교윤리는 집에 들어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며, 도교윤리는 모든 일에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을 아니 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이며, 불교윤리는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실행하면서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諸惡莫作 重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신라의 교육은 충효의 교육이고, 이론중심교육이 아니라 실천과 실행중심교육이며, 선행교육이었다.
2) 신라의 화랑도
가. 화랑(花郞)과 화랑도의 개념
화랑은 개인이고 화랑도는 단체이다. 개인으로서의 화랑은 호칭할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예를 들어 김유신의 경우는 ‘유신랑(庾信郞)’으로 불렀고, 화랑도(花郞徒)는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이며, 상황에 따라 도(徒), 낭도(郎徒), 도중(徒衆) 등으로 표현하였다. 혹은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화랑도(花郞道)를 ‘신라의 화랑과 그 낭도들이 사상적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려고 힘썼던 도리(道理)’로 정의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화랑 이전의 원화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남모와 준정의 갈등에 의해 그 제도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때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 花郞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이 풍월도는 하나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역사적 사상과 제도로서 당시의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교육문명이었던 것이다.
나. 화랑도의 행동특성
신라 화랑들의 행동특성은 원광법사가 유교, 불교, 도교를 바탕으로 만든 다음과 같은 세속오계에 의해 도의를 닦은 구체적인 덕목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속오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그 중심덕목은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다섯 가지로서 실천덕목이다. 신라 화랑들은 그들이 수련한 오계를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통일이전의 대표적인 화랑으로는 전장에서의 용기와 친구에게 죽음으로 신의를 보여준 사다함(斯多含), 미륵신화가 화신한 미시랑,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린 김유신(金庾信), 대대로 죽음으로 충효를 보인 김흠순(金欽純), 어린 나이에 화랑이 된 관창(官昌)과 양산가(陽山歌)의 주인공 김흠운(金欽運), 화랑도의 도의교육을 보여준 검군(劍君)과 혜숙(惠宿)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다함은 고귀한 가문의 후예로서 풍채가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곧았다. 스스로 화랑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해서 부득이 맡았다. 가야와의 전투가 한창일 때 종군하기를 청했고, 나이가 어려(15,16세) 왕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낭도와 같이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전공으로 포로와 토지를 주었으나 세 번 사양하였다. 포로는 풀어 양인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쟁에 같이 참가하여 죽음을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친구가 병사하자 사다함(斯多含)도 7일 뒤에 죽었다.
사다함은 겸손과 충(忠)과 용(勇) 및 벗에 대한 의리 즉 신(信)을 확실한 실천을 통해 보여준 신라화랑이었다는 것을 『삼국유사』는 말하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진평왕 때의 대표적인 화랑이다. 동왕 51년(629)에 고구려 군과의 전쟁에서 신라군이 패하여 기세가 떨어졌을 때 선두에 썼던 것과 김춘추(金春秋)가 백제와의 전쟁에 필요한 원군(援軍)을 청하기 위해 고구려에 갔을 때 만일 김춘추가 기한 내에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면 김유신은 자신의 말발굽이 고구려와 백제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즉시 군사를 일으켜서 신의를 지켰으며, 전쟁 중이라도 인명을 무조건 살상하지 않았다.
김춘추의 사위였던 품석(品釋)과 김씨 부인이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시신을 빼앗겼을 때 포로로 잡힌 백제부장 8명과 시신을 바꾼 적이 있으며, 항복해 오는 백제군 좌평 정복(正福)과 병사 1천명을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한 적도 있다. 또한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하게 한 뒤에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백제 땅을 개인의 식읍으로 주려 하자 개인적인 이익을 챙길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김유신의 행동은 세속오계의 사군이충, 교우이신, 살생유택을 실천한 것이며 신라화랑도의 행동특성이었다. 이러한 화랑도의 행동특성은 신라 청소년의 행동모범이었다.
하나의 화랑도는 몇 백 명에서 천명을 넘는 인원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들 사이에는 화랑의 행동을 본받아야 할 모범적 행동이 된다. 나아가 낭도가 아니더라도, 화랑도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도 화랑의 행동은 신라사회에서 지니는 의미가 컸던 것이다.
화랑도의 행동특성에 영향을 준 요소는 특정 개인적 차원의 영향과 당시의 사상적 영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인적 영향이란 어떤 스승이나 화랑의 개인적 인품이나 성향을 말한다.
원광에게 가르침을 받은 귀산과 추항이 화랑도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 가르침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가르침이다. 승려였지만 유교적 덕목도 들어 있고, 불교적 계율도 시대에 맞추어 변형된 형태로 전달하였기에 당시의 청소년들에게는 매우 큰 행동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
화랑도의 행동에서 유교적인 사상의 흔적과 불교적인 사상의 흔적 및 도가적인 사상의 흔적도 모두 나타나고 있다. 충과 효를 강조하고 인과 겸양, 검소함을 강조하는 화랑의 행동은 진흥왕대에 화랑이 등장한 이래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김음렴의 사례에서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국학을 설립하고 유교적 인재를 양성하기 전부터 유교는 이미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어 있었다.
불교의 경우는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화, 용화향도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불교와 밀접한 관련과 영향을 생각할 수 있고, 도가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화랑도의 산수유오에서 가름해 볼 수 있다. 화랑도들이 명산대천을 찾은 산수 탐방의 목적이 단지 놀이 행위만이 아니라 도가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으며, 화랑들을 신선, 선랑이라 부른 것에서도 도가적 경향을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화랑도의 행동특성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3) 화랑도 교육의 교육문명사적 관점
화랑도 교육의 교육문명사적 시각에서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화랑도는 도의연마, 가악(歌樂), 유오(遊娛), 교육공동체 등을 연마하였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라 하여 ‘서로 도의를 닦았다’는 기록에서 보면, 도의(道義)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을 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규범을 바르게 지켜야 한다. 그 규범들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전통사회의 도의로써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인륜이 유교적 덕목으로 교육되어 왔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충(忠)과 효(孝), 신의(信義)와 같은 덕목이 화랑도들이 닦았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포함되어 있고, 화랑의 행동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국학(國學)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가 필수과목으로 선정된 것도 바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유교적 가치관이 신라의 중앙집권적 질서 유지를 위한 가치관과 관련하여 화랑도의 가치관 형성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화랑도은 배우기보다 연마, 수련을 통한 상황중심과 실천중심의 도의를 중시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에 화랑들이 ‘상열이가악(相悅以歌樂)’이라 하여 ‘서로 가악(歌樂)을 즐겼다.’라고 했다. 가악은 풍류에 속한다. 화랑도를 풍류도, 풍월도라 부른 것은 화랑도의 활동 가운데 가악과 같은 풍유를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화랑도가 즐긴 대표적인 가악이 혜성가, 모죽자랑가, 찬기파랑가 등의 향가이다. 충담사, 월명사, 융천사 같은 승려들이 이들의 향가를 지었으며, 화랑들은 그 향가를 즐겼다.
화랑들은 ‘유오산수무원부지(遊娛山水無遠不至)’라 하여 ‘산수를 즐기며, 먼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라고 하여 산수가 좋은 곳이면 전국 어디에도 멀다 않고 다니면서 유오(遊娛)하였다는 것이다. 학습의 장은 제한된 교실공간이 아니라 개방의 장소인 전 국토가 심신연마의 도장(道場)이었던 것이다.
화랑들은 유오를 통해 여러 가지를 보고 익혔으며 그곳에서 가악을 즐김으로써 정서함양과 심신을 도야했던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화랑들은 상마(相磨), 상열(相悅) 등으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교육공동체, 생활공동체, 운명공동체의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들을 화랑의 무리, 화랑의 도(徒)라고 칭하는 것을 볼 때 집합적 차원의 공동체임이 밝혀지고 있다. ‘용화향도(龍華香徒)’ 혹은 ‘미륵선화(彌勒仙化)’로도 불러진 것에서 종교적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랑도교육은 문자위주의 학교교육이 아니고, 풍류(風流), 풍월(風月)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학교교육과는 문명적으로 다른 풍류도교육이다.
풍류정신의 본질적 의미는 자유정신이다. 그래서 화랑도의 정신은 풍류정신이다. 화랑도는 현실 속에서 생활하면서 ‘여유(餘裕)와 ‘멋’이라는 행동특성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화랑도의 교육은 교육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신라인에 한정한 교육이 아니라 고대 한국인의 교육원형이라 생각된다.
6. 나가는 말
국가나 사회가 발전했다는 것을 인식하려면 그 문명의 변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명은 오랜 교육의 산물(産物)이다. 교육은 보편적으로 인간형성 작용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출생적 미완성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발달하려면 교육의 힘을 빌려야 한다. 생득적인 잠재능력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교육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내재적 교육가능성을 발현하고 연마할 수 없어 인간은 자연계의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국가도 발전을 이룩하려면 통치권자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화융성을 위한 교육정책을 펼쳐야 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도 외국의 선진문화를 배우기 위해 멀고 힘든 국비 및 사비 유학의 길을 떠나고 있다.
신라의 육부 백성들은 원래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로서 북방(北方)의 이주세력이었다. 육촌(六村)이 분거(分居)해 살면서 백성들이 보여준 방종(放縱)의 행동양식은 국가와 군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여 육부촌장들은 덕(德)을 갖춘 혁거세(赫居世)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하여 국정(國政)을 맡겼던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주(君主)의 자격으로 덕(德)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백성을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교육을 통해 백성으로 하여금 덕을 갖추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경주 시민 모두가 덕성을 갖춘 시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경주 발전을 위한 신라교육의 문명사를 간략하게 살펴 본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초대 군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의 통치에 대해, 낙랑인이 “도의를 지키는 나라이니, 가히 침범할 수 없다.”하고 곧 철병(撤兵)하여 돌아갔다는 사적에서 볼 때, 박혁거세 거서간은 덕치를 잘 한 교사였고, 17대 내물왕(奈勿王) 역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지고 우선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난국을 잘 타개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고 교화하여 52대 효공왕까지 37대 571년 동안 김씨가 왕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재위 46년간 국기를 튼튼히 구축한 군왕이었다.
둘째, 신라의 교육사상가로서의 원광법사와 의상대사는 당(唐)에 유학한 승려였으며,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만들어 화랑과 신라인의 교육덕목으로 삼게 하였고, 의상대사는 ‘환본의 교육론’과 ‘내 몸 교육론으로 신라인을 교육한 대사였다.
셋째, 원효대사는 화엄(華嚴)의 진수를 깨치고 오직 국내에서 독학(獨學)에 전심하여 많은 저술하였으며,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고 나무(南無)의 칭호를 부를 수 있도록 교화하였다.
넷째, 신라인이 남긴 현존하는 교육문명의 실체(實體)로서 성덕대왕신종, 첨성대, 다보탑, 분황사탑 등에는 효와 창조적 지성이 표현된 예술적・과학적・공학적 산물이다.
다섯째, 신라의 교육은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 윤리가 어울려서 독특하게 창조된 것으로, 국란타개에 앞장설 용감한 무사(武士)와 실천적인 인물양성 및 전 국민에게 종교적・도덕적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는 것이다.
여섯째, 신라 화랑들은 유오(遊娛)를 통해 여러 가지를 보고 익혔으며 상마(相磨), 상열(相悅) 등으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교육공동체, 생활공동체, 운명공동체, 종교적 공동체의 생활을 통해 정서함양과 심신을 도야했다.
일곱째, 신라 화랑도교육은 문자위주의 학교교육이 아니고, 풍류(風流), 풍월(風月)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학교교육과는 문명적으로 다른 풍류도 교육이었다.
우리 경주시는 상기와 같은 신라문명의 교육적・사상적・예술적・공학적・창조적 지성이 전해오고 있는 역사문화의 도시이고, 또한 국가와 시정의 책임자가 관심을 갖는 문명의 도시이다. 그래서 자라는 세대에게 신라인의 교육문명사적 지성을 깨닫고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경주시의 발전과 선진문명화에 필요한 과제라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제안 하고자 한다.
1. 각급 단위 학교에 화랑학습공간을 마련하여 신라 화랑들이 익힌 세속오계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화랑정신을 고취시킨다.
2. 화랑의 집, 통일전, 화랑마을 등에 일정기간 합숙시켜 집합적 유오교육을 통해 지성의 자율적 연마를 도모한다.
3. 국립화랑교육관을 마련하여 신라문화유산의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접근을 통해 신라인의 차원 높은 예지를 배우고 익혀 선진문화의 장조와 애국심과 애향심 및 조상숭배정신을 함양토록 한다.
오늘날 수축사회에 접어들어 황금문화의 골든 카슬(Golden castle)인 경주시가 합계출산율 감소로 인해 위축되고 있지만, 경주의 발전이 곧 나라의 발전이라는 사실이 신라교육문명사가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시민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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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택・이희덕(1978). 한국사대계. 서울: 도서출판 삼진사
최 호 역해(2006). 신역 삼국유사. 서울: 홍신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