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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4:16-35절) 마음의 惡을 버리라 2-631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정보의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일부가 아이패드라고 해서 조금 작은 노트 같은 판을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받았는데, 이제는 작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다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아파트 시세라든지, 물건의 값을 알아보려면,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든지, 또 대개는 전화번호를 모르니까 직접 차를 타고 가서 물어보든지, 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오직 핸드폰 하나로 자기가 알고 싶은 모든 정보들을 다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정보의 스피드는 옛날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특히 현대인들은 정보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에 비하여 구식이고,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수치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정보의 스피드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의 속도가 전혀 자신의 인생을 바른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알고 많이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남의 이야기이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가치 있는 바른길로 가게 하려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결국 우리 마음에서 악을 제거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책 읽는 것을 많이 강조했던 이유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또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수많은 정보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함에 따라서 더욱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자기 마음에서 악을 버리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대개 사람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실력이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겉으로 나타나는 결과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축복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거의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농사를 잘 지어서 악은 물리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복이란 복은 다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Ⅰ.악에서 떠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가치 있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은 바로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성공하게 된 것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이름도 없는 무명인이었는데, 어떤 유명한 사람의 눈에 들게 되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유명한 사람은 첫눈에 이 무명의 사람이 크게 될 가능성을 보았던 가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4:16절)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아마 이 한 가지 말씀보다 우리 신앙에서 더 중요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해서 악을 떠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방자(放恣)해서 악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악’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악(惡)’이라고 하면, 좋지 못한 습관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태도 같은 것을 말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신 후, 집안 식구들을 못살게 구는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악(惡)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태도일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나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태도나 습관이 일시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 나타나는 나쁜 태도나 습관은 단순히 일시적인 생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에 길이 굽어 있을 때에는 모든 차들이 구부러진 길을 다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길이 굽어 있는데, 바르게 달린다면, 차가 길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이나 태도는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잘못된 태도나 습관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냥 간단하게 결심을 하거나 반성을 한다고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악(惡)에서 떠나려고 하면. 대공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길이 휘어져 있는 곳을 바르게 하려면, 새로운 길을 만들고, 그 다음에 옛날 길을 폐쇄를 시키는 대공사를 해야 합니다.
가끔 도시 변두리에 길을 넓히는 곳이 있는데, 가보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서 일단 새로운 길이 지나갈 곳의 논과 밭을 돈을 주고 사서 땅을 확보한 후에 산을 깎고, 다리를 만들고, 그 다음에 덤프트럭에 흙을 싣고 와서 길을 만든 후에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서 새 길을 난 다음에야 옛날 길을 폐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한두 가지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전체가 악(惡)을 깔고 있으며, 악(惡)위에 세워진 것을 일단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오기(惡棄)였고, 야망(野望)이었으며, 마치 술 취한 주정뱅이 같이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든 상태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대형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온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던 것을 드디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악(惡)’이란 어떤 한두 가지 나쁜 습관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은 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자기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이나 혈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자기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 전체가 수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큰 병이 있어서 수술을 받으려면, 직장에 휴직을 해야 하고, 학교도 휴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수술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자는 스스로 세상 출세의 길과 성공의 길에서 내려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마음을 수술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주일이면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는 해변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시고, 40일이 걸리는 광야 길로 데리고 가셨고, 그 40일은 결국 40년으로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계속 출세의 길을 달리는 사람은 사실 악(惡)을 치료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악(惡)을 치료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마치 술이나 담배를 끊으면, 금단(禁斷)증세가 나타나면서 죽을 것같이 답답한 느낌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우리가 세상길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들을 때에는 금단(禁斷)증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의 성공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에서 도태(淘汰)되는 것 같고,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시 재기(再起)할 수 없을 것 같고, 오직 믿음 하나만 붙들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나쁜 성질이나, 못된 태도를 고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못된 성질이나 태도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하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못된 성질이나 태도를 버리지 못합니다. 길 자체가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길 자체를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 인생 자체가 구부러져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지금까지 혈기와 분노의 감정으로 살아왔던 나 자신을 부인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붙들어왔던 나의 옛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새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대수술하는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내 인생 전체를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인생 전체를 수술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惡)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되고,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惡)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는 절대로 악(惡)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차를 타고 갈 때, 반드시 안전벨트를 매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굳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 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차가 충돌할 때, 얼마나 큰 힘으로 우리 몸이 밖으로 팅겨져 나가는지,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악한 생각이 충돌을 할 때, 우리의 의지(意志)나 교양(敎養)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의지(意志)나 교양(敎養)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직 자기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없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나 오류가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에 대한 전문적인 진리(眞理)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는 아픈 것을 모르더라도 의사(醫師)의 진단을 한 후에 우리 건강에 심각한 잘못이 있다고 진단하면,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醫師)의 진단이나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산 사람들은 얼마 살지 않아서 병으로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내 안에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단순한 감기처럼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수술이 필요한 암 같은 병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하나님의 큰 수술을 받고, 회복중인 환자들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고, 앞으로 더 건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지만, 결국 죄로 인하여 죽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은 것입니다.
17절)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여기서 성경은 우리 마음의 악(惡)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분노(忿怒)를 쉽게 나타내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 마음에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분노(忿怒)의 감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분노(忿怒)의 감정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바르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정한 정도로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이유 없이 무시하거나, 업신여길 때, 화가 납니다. 또 내 상태가 내가 원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 때에도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든지 혹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반복해서 할 때, 우리는 스스로 화가 날 것입니다. 이런 화는 다른 사람에게 터트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분노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진단하고 분석(分析)을 해서 바로잡아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자꾸만 삑삑 거리면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면 자동차를 세워서 점검을 해야 할 것이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망치로 자동차를 부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옛날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을 때, 한 번씩 손바닥으로 치면, 잘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지, 기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분노는 펄펄 끓는 물과 같아서 매우 조심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를 퍼부어버리면, 그 사람은 끓는 물을 뒤집어쓰고, 중화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을 속으로 꾹 참기만 한다면, 우리 속이 홀랑 다 타버려서 결국 우울증이나 화병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노(忿怒)가 생기는 것은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심각한 잘못이 있는 것으로 알고, 일단 화를 식혀야 합니다. 그리고 난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씩 하나씩 곰곰이 분석(分析)을 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너무나 많이 나는데 이것이 간단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화가 나서 정신병이 걸리고, 자살(自殺)을 하고, 싸우고, 물건을 부수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교통사고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으로 분노를 식히고 상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대개 세상에서 화를 치료하는 방식은 조용하게 명상(冥想)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자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옛날 사울 왕은 성령이 떠나자,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서 발작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다윗에 대한 극심한 미움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이것을 음악으로 치료하려고 했다가 안 되니까 결국 나중에 무당(巫堂)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의 영(靈)을 만나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악(惡)한 계교(計巧)를 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나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인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선(善)을 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악(惡)한 계획(計畫)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내 인생이나 품성(品性)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사람 사정이고,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18절)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은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으니까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고, 유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 사람의 재산(財産)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은 결코 본질적(本質的)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오직 수단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는 공부하는 수단(手段)에 불과합니다. 본질적(本質的)인 것은 그 학생이 교과서 내용을 잘 소화를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우리 마음 상태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연단을 통과할 때, 정금(正金)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하늘의 복(福)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이 우리의 면류관(冕旒冠)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의 거두리라(갈 6:8).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반드시 성공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만큼 욕심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당시에 결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부요(富饒)했지만, 세상 적으로는 아브라함보다 부요(富饒)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야말로 가장 복(福)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갈 데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셨고, 하나남의 말씀이 임하게 하셨고, 결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축복(祝福)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19절)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는 악인(惡人)이 득세(得勢)하고, 불의(不義)한 자가 세력을 부리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惡人)은 선인(善人)앞에 엎드러지고, 불의(不義)한 자는 의인(義人)의 문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악인(惡人)과 불의(不義)한 자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선(善)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못살게 굴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씩 세상을 뒤집으십니다. 즉 위에 있는 자가 낮아지게 하시고, 낮은 위치에 있는 자가 위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이때 악(惡)한 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자기들에게는 힘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바람직한 것은 악(惡)한 자들이 선(善)한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선(善)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不義)한 자가 의(義)로운 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의(義)로운 자로 변하게 됩니다. 악인(惡人)이 자발적으로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최고로 좋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악(惡)한 자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신사적(紳士的)으로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惡)한 자가 단 한 명이라도 변할 수만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Ⅱ.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태도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혼자 무슨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듬어지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20절)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가난과 부(富)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게 되고, 돈이 많은 사람을 보면,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이런 외모(外貌)와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단을 받느라고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연단을 받느라고 가난하게 된 것을 잘 모르니까 무시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치셔서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도 싫어하지만,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가난하게 된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客觀的)으로 조용히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돈이 많으면, 친구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돈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선심(善心)도 쓰고, 선(善)도 베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단순히 돈만 많은 것과 하나님 앞에서 연단 받고 회복된 경우와는 다를 것입니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거만(倨慢)할 것이며,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했다가 하나님의 축복(祝福)으로 부자(富者)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것이며, 친구들이 많은 것들을 사랑을 베푸는 기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같이 가난해도 연단 받는 것과 그냥 망한 것은 다르고, 부요(富饒)해서 돈이 많은 것과 축복(祝福)으로 부자(富者)가 된 것은 다른 것입니다.
21절)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우리에게는 모두 다양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행복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도움을 받고 있는지, 생각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옛날 다윗 시대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목축업(牧畜業)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웃에 다윗이 있음으로 해서 도둑들이 얼씬도 하지 못해서 양(羊)이 도둑질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다윗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고, 다윗이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다윗을 업신여기는 말을 하며, 다윗의 성질을 건드리는 바람에 다윗이 출동해서 나발을 죽일 뻔한 적이 있었 습니다(삼상 25장 참조)
우리는 이웃이 있기 때문에 도둑이나 강도나 맹수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와 함께 많은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일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도움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은 사랑을 실천할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리(眞理)를 배웠다면, 그 진리(眞理)를 누구에겐가 써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자기가 잘 된 것이 전부 자기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나발과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자기 자신이 옛날에 가난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즉‘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공하고 나면, 옛날에 어렵고 가난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수입(收入)이 전혀 없이 살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출애굽의 경험과 광야 경험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자산(資産)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난하고 어렵게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이것 자체가 엄청난 정신적인 자산(資産)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22절)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이기서‘도모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고 바르게 돈을 벌고, 일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고 한다면, 아마 그의 마음 자체가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을 하더라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나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길 자체가 굽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해도 언제나 굽은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善)을 도모(圖謀)한다는 것은 이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 꺾어진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성경에서‘선(善)’이란 남에게 잘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활을 쏘는 자가 화살을 가지고, 과녁에 정확하게 맞히듯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찾는 것이 선(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善)을 이루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열정을 다하여, 찾아내어야 합니다. 양궁 선수들이 과녁(貫革)을 정확하게 맞히려면, 팔에 힘이 있어야만 정신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활 쏘는 연습을 해서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자신의 나쁜 습관은 무엇인지, 철저하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거기에 내 혼신(渾身)의 힘을 다 쏟을 때,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진리(眞理)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나타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과녁을 맞히니까 축복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23절)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이것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만 하고, 말을 할 때에는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희망(希望)사항이기 때문에 현실화되는 데는 엄청난 벽(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들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된 것 같고, 틀림없이 잘 될 것 같은데, 세상 현실에 부딪쳐보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벽(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음속으로 희망(希望)하는 것과 세상 현실(現實)사이에는 더 큰 엄청난 벽(壁)이 있습니다. 그래서 꿈은 높은데,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사람은 자꾸 비현실적인 공상(空想)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잘못하면, 너무 세상을 우습게 알거나, 혹은 너무나 세상을 두려워해서 현실에 부적응(不適應)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야 하지만, 세상에 부딪쳐서 그것이 실제적인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즉 세상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을 설득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경험도 없으면서 머리로만 믿고, 밀어붙이는 것은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을 꾸고 형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고,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에서 실컷 종살이를 하면서 세상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애굽 왕 바로에게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흉년에서 살리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4절)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물질적인 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의 연단 없이 돈만 많은 사람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 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연단 없이 돈만 벌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은 눈에 보이는 복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만 했지, 전혀 하늘의 복(福)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단을 받은 사람은 먼저 영적(靈的)인 복을 많이 받은 후에 물질적인 복도 받고, 세상적인 복도 받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의 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압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이 사람이 겉으로 성공한 것만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복이 있고, 물질적인 복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 믿음이 없이 부자(富者)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성공 자체가 우상(偶像)이기 때문에 그것을 절대시 하고, 쩔쩔매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 받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없어지고 맙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성공했다는 것이 미련한 것만 붙든 모습입니다.
Ⅲ.다른 사람을 향한 증언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축복(祝福)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듣지 못한다면, 앞을 보지 못하고, 인도자가 전혀 없는 맹인(盲人)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진리를 소화를 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축복이고, 예언이며, 치료하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주위에 있는 가축들이나 새가 사람의 말을 한다면, 이것은 예사 일이 아닐 것입니다.
가끔 집에서 키우는 열대지방의 구관조(九官鳥)나, 앵무(鸚鵡)새가 사람의 말을 한다고 해서 신기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런 새가 사람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지, 뜻을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祝福)입니다.
25절)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사람들은 대개 어떤 중요한 일에서 진실을 증언할 것을 서약(誓約)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서약(誓約)을 해도 웬만해서는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진실이 자기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기를 쓰고 진실을 말하려고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이익에 대해서는 자기 생명이나 이익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타락하면서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단을 받으면서 엄청난 훈련을 받는데, 그때 우리는 조금씩 거짓을 싫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짓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인격이 나의 생명이나 인격과 똑같이 소중하며,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서 말할 때, 그 말씀은 바로 상한 마음들을 치료하는 약(藥)이 됩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는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법정(法廷)에서도 정직하게 증언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낙심한 자들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거짓말을 뱉은 자들은 꼭 거짓말을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人格)이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이익(利益)을 위해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재판장(裁判長)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6절)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경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결국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시고, 축복(祝福)이 되십니다. 여호와를 의뢰(依賴)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힘이 되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 반드시 도와주시는 산성(山城)이 되시고 적(敵)을 물리치는 백만 대군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이 신앙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녀나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피난처를 주는 것입니다. 27절)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광야에는 여행을 하다가 물이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뒤를 물차가 따라온다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는 생수로 따라다니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분노(忿怒)의 불로 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무나 무섭고,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런 지옥(地獄)불에 타지 않도록 시원한 물로 식혀 주시고 우리 속에서도 시원한 생수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罪)로 인한 멸망(滅亡)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8절)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이끌고 가르치면, 영적(靈的)인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가장 놀라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오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젊은이들이 많이 결혼을 하니까 아이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믿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수적(數的)으로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영적(靈的)인 부흥이 없어지고, 또 재미도 없고, 은혜도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더 많이 세상으로 나가니까 청년들이 없어지게 되고, 믿는 자들 안에서 결혼상대를 만나지 못하게 되니까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되지 않는 곳에는 이런 심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29절)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좋지 않은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여부에 따라서 저주(咀呪)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축복(祝福)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잘 식혀서 지혜로 말하면, 그 말은 축복(祝福)의 말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화가 난다고 화를 여과(濾過)하지 않고, 그대로 말해 버리면, 다른 사람을 저주(咀呪)하게 됩니다. 명철한 사람과 속이 빈 사람의 특징은 자기 안에 있는 생각과 분노를 어떻게 소화를 해서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고, 화가 나는 대로 폭발시키는 사람은 전혀 가치가 없는 쓰레기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중화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욕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소화해서 말하는 사람은 천사보다 더 복된 사람입니다. 30절)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마음의 평온은 믿음으로 분노를 이기고, 의심을 이기고, 미움을 이긴 결과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살게 하고,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임하게 합니다.
반면에 시기(猜忌)는 믿음으로 미움과 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계속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뼈가 썩는 것이기 때문에 뼈 안에서 고름이 나게 됩니다. 이 병은 잘 낫지도 않고, 계속 재발되다가 죽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31절)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여기서 가난한 자는 믿음으로 연단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난당하는 성도를 멸시(蔑視)하는 자는 고난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尊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하는 방법은 고난당하는 자를 무시하지 않고, 궁핍한 자를 귀하게 생각하고, 말씀의 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려고 하면, 말씀을 전하는 자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32-33절)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환난을 이기지 못합니다. 결국 환난이 오면, 자기 지혜로 안 되니까 망하고 말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는 고난이 올수록 더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고난이 올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됩니다.
지혜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에게 머물게 됩니다. 그 대신 미련한 자는 똑똑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였다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나라를 지켜줍니다.
34-35절)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처음에는 말씀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훼방하고, 두렵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왕이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결국 부흥이 터지고 축복이 터집니다.
그러나 왕이 세상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고 나가면, 부흥이 꺼지면서 힘도 약(弱)해져서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고, 재산을 모두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신하(臣下)들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기도로 돕고, 지혜로 구체적인 부분을 적용해야 하는데, 믿음이 없는 자는 말씀의 가치를 모르니까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가치를 알고, 합심해서 충성하는 자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