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왕의 사비니 여자들 납치
초기 로마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로물루스(Romulus)는 그 해결책으로 로마에 대규모 이주단지를 마련하고 이웃 나라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외국 출신의 추방된 자, 망명자, 빚쟁이, 살인자, 심지어 달아난 노예 등 주로 홀로 떠도는 남자들뿐이었다. 이들에게는 아내가 필요했다. 로물루스는 이들을 위해 이웃 나라 사비니(Sabine)의 여자들을 납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로물루스는 콘수스(Consus)축제를 디데이로 잡았다. 콘수스는 ‘저장한다’는 뜻의 콘데레(condere)에서 유래하였다. 콘수스 신은 수확한 농산물을 저장하는 창고를 관장하였고 신전은 로마의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었다. 축제가 벌어지자 이웃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특히 사비니 처녀 총각들이 많았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그의《영웅전》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로물루스는 자주색 옷을 입고 귀족들 중 가장 앞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로물루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외투를 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하였다. 로물루스의 부하들은 무장을 한 채 근처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오자 칼을 뽑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사비니 처녀들을 찾아 겁탈하였다. 그러나 사비니 남자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도 하지 못하고 서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 사람들은 노약자들을 데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지만 곧바로 로마에 사신을 보내 강탈당한 자국의 처녀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로물루스가 정식으로 결혼하여 그들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회신을 보냈지만 사비니 족은 이에 불만을 품고 로마에 선전포고를 했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b.1937)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와 사비니 족의 전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로마 인과 사비니 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 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 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죽고 죽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납치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도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의 타티우스 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합이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 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Giambologna,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Pietro da Cortona,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27-29
Jacques Stella, The Rape of the Sabines
Johann Heinrich Schönfeld,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c. 1640
Nicolas Poussin,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Nicolas Poussin,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37-38
Nicolo Bambini,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Jacques-Louis David,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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