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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21년 4월 25일, 부활절 제4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4월 25일, 부활절 제4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부활절 제4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35장(큰 영화로신 주)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 교독 시편 23:1~6절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함께 기도합니다. [랜슬럿 앤드류스 (Lancelot Andrewes)]
(실시간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오, 가장 영화로우신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든 천사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에 의해
지금과 영원히 축복과 영광, 감사와 찬양을 받으소서
제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주님께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0:11~18절입니다. (성경)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특별 찬양 - 570장(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 말씀 선포: 나는 선(善)한 목자라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부활절 제4주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선(善)한 목자’입니다. 우주 만물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모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창조주 하나님이 포함되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전체(all)’을 이룹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은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않습니다.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갖고 있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책임을 집니다. (그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져야하는) 인간은 세 종류, 곧 이리로 비유된 강도(도둑), 삯꾼, 그리고 선한 목자의 삶이 있습니다. 양을 헤(-해)치며 사는 강도(도둑)의 삶이 아닌, 양(羊)으로 인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삯꾼의 삶이 아닌,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는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나눕니다.
2. 세 지평: 신(神), 인간(人間), 그리고 짐승
오늘 본문은 ‘아버지와 인간(목자), 그리고 양(羊)’이라는 세 지평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신(神)이고, 목자는 인간이고, 양은 짐승입니다. 곧, 신과 인간과 (신도 인간도 아닌 모든 것이라는 의미에서) 짐승이라는 ‘전체’’를 드러내는 세 지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과 짐승, 곧 아버지와 양의 지평은 ‘잘못이 없다’는 점에서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아버지는 신, 곧 하나님이시기에 흠이 없습니다.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은 언제나 옳고,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진선미(眞善美)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혹 신이 불합리해 보여도, 신은 언제나 인간 사고 속의 진선미를 넘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인간의 인도를 받는 입장이기에 그 흠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양은 선(善)한 인간(목자)의 우리에 들어있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든가, 혹은 아직 그 우리에 들지못해, 혹은 삯꾼, 혹은 강도(도둑)를 만나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든가 할 뿐입니다. 어쨌든 ‘책임’이라는 (혹은 ‘죄’라는) 점에서 비켜 서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인도를 받지 않는 모든 야(野) 생물도 ‘책임’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짐승과는 그 결이 다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존재로 ‘책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에 있어, 선한 목자와 삯꾼, 그리고 (이리로 비유된) 강도(도둑)라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도(도둑)은 양을 헤(-해)치는 인간이고, 삯꾼은 자신을 위해 양을 희생하는 인간이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같은 인간이 있고, 인간같은 인간이 있고, 짐승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신같은 인간을 선한 목자라고 하고, 인간같은 인간을 삯꾼이라 하고, 짐승같은 인간을 도둑 혹은 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신같은 인간, 곧 성자하나님이 되셨습니다(30). 혹시 짐승같은 인간이라면 인간같은 인간으로, 혹시 인간같은 인간이라면 신같은 인간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남을 헤(-해)치면서 사는 자(짐승같은 인간)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자로(인간같은 인간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자(인간같은 인간)에서 남을 위해 사는 자로(신같은 인간으로) 말입니다. [*.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분포 중, 신같은 인간, 인간같은 인간, 짐승같은 인간의 분포는 어떻게 될까요? 신같은 인간은 많아지고, 짐승같은 인간은 적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신같은 인간, 선한 목자에 대하여 조금 더 들어가 봅니다.
3. 선(善)한 목자
3-1. 선(善)
선(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착하다’는 의미와, ‘잘 (드러남)’이라는 의미입니다. ‘착하다’는 뜻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질다’와 같은) 그런 의미이고, ‘잘 (드러남)’의 의미는 그것이 그것으로 (잘) 드러날 때 선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방귀 냄새’가 착하지는 않지만 ‘방귀 본래의 냄새’를 낸다면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선의 ‘착하다’라는 의미도 사실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인간이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잘) 드러날 때가 곧 ‘착하다’가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인간으로 드러나는, 곧 인간의 선은 ‘행복’이고, 행복을 이루는 학문이 ‘정치학’이라고 정리합니다.]
[*. 진선미(眞善美)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 성부하나님 속성은 진(眞)이며, 성자하나님 속성은 선(善)이고, 성령하나님 속성은 미(美)가 됩니다. 참된 것, 옳은 것, 곧, 진은 성부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참됨이, 옳음이 그대로/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을 일컬어 선이라 하니, 이는 성자하나님의 속성이 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리하는 자리는 언제나 아름다움이니, 미는 곧 성령하나님의 속성이 됩니다.]
3-2. 선(善)한 목자
그렇다면 선한 목자는 ‘목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난 목자를 말합니다. 양을 대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은 어떤가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11, 15)’까지 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14).’ 심지어 지금 목자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양들까지 걱정하면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합니다(16). 양들의 음성을 듣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또한 선한 목자는 ‘아버지(하나님)’를 인지하고 있는 목자입니다. [삯꾼이나 강도는 ‘아버지(하나님)’를 인지하지 않습니다.] 15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리고 17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마지막으로 18절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즉, 선한 목자는 1) 아버지를 알고(15), 2)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17), 3) 아버지의 계명도 받습니다(18). 삼위일체의 지평에서 보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선한 목자의 성부의 지평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선한 목자의 성령의 지평이고, 아버지의 계명을 받아 실천하는 것은 선한 목자의 성자의 지평이 됩니다. 선한 목자는 온 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삯꾼과 강도(도둑)’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아버지(하나님)을 알아채고 있는 이는 선한 목자이고, 아버지(하나님)를 알아채지 못하면 삯꾼 혹은 강도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한 목자는, 양을 대함과 아버지를 대함이 서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을 대하는 선한 목자의 삶이 사실은 아버지를 대하는 삶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마주하는 선한 목자의 마음이 또한 양을 마주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모델과 화폭을 번갈아 가며 봅니다. 모델을 보며, ‘이렇게 그려야지’ 다짐을 하고, 화폭에 그리면서 ‘어떻게 봤더라’하며 기억해 냅니다. 아버지를 마주함이 화가가 모델을 보며 다짐하는 것과 같고, 양을 보는 것이 화가가 화폭에 그리며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목자는, 양을 대함에서 아버지(하나님)를 만나고, 아버지(하나님)를 대하면서 양을 만납니다. 그것을 용서(容恕)라고 합니다. 얼굴(容)을 보며, 같은 마음(恕)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양을 만나며 (아버지가 되어) 용서하고, 아버지를 만나며 (양이 되어) 용서를 구합니다. 서(恕)입니다. [*. 서(恕)는 같을 여(如)자에 마음 심(心)자가 합쳐진 글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과 같은 감정으로 느끼며 배려해 주는 것을 말한다. '용서(容恕)한다'는 말이 있다.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고 관용을 베푼다는 뜻이다. 논어에 자공이 '죽을 때까지 실천해야만 하는 것을 한마디로 하면 무엇입니까?'라고 공자에게 물어보았다. 공자는 '그것은 서(恕)로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비슷한 의미다. 인간관계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고, 자신이 그것이 싫다면 남에게 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사 원작, 심범섭 지음., <중용: 공존과 소통 그리고 인성을 세우는 진리>에서)]
4. 선(善)한 목자가 되려면
그렇다면 선한 목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아버지(하나님)를 알아야 합니다. 하여간에, 아버지(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힘써 아버지(하나님)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이, 마치 양이 나를 알고 내가 양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버지(하나님)를 안다는 것은 삶을 ‘각성(覺性)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이아몬드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는 그저 평범한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지만,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돌멩이를 다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하나님)를 아는 사람은 삶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만납니다. 우리가 아버지(하나님)를 힘써 알아야 할 이유입니다. 호세아는 성찰합니다. 호세아 6:3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안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코끼리를 안다고 하면, 대부분 그저 코가 길고, 귀가 넓고, 몸이 큰 짐승 정도로 아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코끼리를 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코끼리는 성격이 어떤지, 무엇이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음식인지, 어떻게 새끼를 낳고 키우는지 등등 알고 보면 알아야 할 것이 거의 끝이 없습니다. 아버지(하나님)를 아는 것도 이와 같아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하겠지만, 사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단지 ‘되어-감(becoming)’이라는 도상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쨌든 아버지(하나님)를 알아채고 있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둘째,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17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짊어진 그분의 삶의 무게일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을 얻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는 사랑함으로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을 메시아, 예수님은 느끼고 있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얻을까요?
아버지(하나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렇게 여기는 자녀의 마음은 무척 기뻐하십니다. (지난 주에 나눈,) ‘아버지-자녀’ 관계의 기원이 된, 다윗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머무실 집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머무실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께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고, 결국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큰 복(福)과 함께 메시야 약속에까지 이르렀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해보십시오. [혹, 양을 대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 삼국지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는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매우 고심했다. 비록 장자인 조비가 태자 자리에 있긴 했지만 재능은 온 천하가 다 알 정도로 차남인 조식이 훨씬 뛰어났기에 조조 역시 조식을 더 신임했고, 결국 태자를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 소식에 당황한 조비는 곧장 그의 충신 가후를 찾아가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덕망과 아량을 갖추시려면 가난한 선비처럼 일을 처리하고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한편 아들된 도리를 저버려서도 안됩니다.’라고 충고했다. 조조가 출정을 하던 어느 날,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 아버지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조식은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시를 큰소리로 낭송했다. 한편 조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눈물을 쏟아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조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조비는 흐느끼며 ‘연세도 많으신 아버지께서 직접 장수를 이끌고 출정하시니 아들로서 염려가 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주위가 숙연해졌고, 조조는 태자의 지극한 효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결국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었다.”]
셋째, 아버지(하나님)의 계명대로 자유(自由)해야 합니다. 18절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하나님)의 계명은 ‘구분하지 말라(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구분(이것이 선이다)’인데, 이 계명의 본질은 자유의지(自由意志)입니다. ‘스스로’입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카쟌차키스는 조르바의 입을 빌려 ‘인간은 자유’라고 선언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라는 것은,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 책임이 따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하한 어떤 계명도 ‘자유’ 위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삼위의 지평에서, 자유를 살펴봅니다. (성부의 지평에서) 아버지(하나님)를 알면 알수록 ‘자유’의 폭도 커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성자의 지평에서) 우리의 마지막도 결국은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8:21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성령의 지평에서) 성령이 임하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자유한 사람이 신 같은 인간, 선한 목자입니다.
5. 훈련
선(善)한 목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해 봅니다.
1) 가슴 열기: 아버지(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려면, 아버지(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접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주만물을 보며 프랙탈(fractal)을 느껴도 좋고, 성경 말씀을 통해 자주 접하며 묵상해도 좋고, (하나님의 영을 지닌) 인간을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도 좋고, 어찌 되었건, 아버지(하나님)의 흔적에 대해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 그것은 바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것을 하루에 100번씩, 100일 동안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자~’ ‘정죄하지 말자~’ 등등. 하루 100번, 100일 동안 중얼거려 보기입니다.
2) 혼란: 그렇게 하다 보면 ‘혼란’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혼란’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혼란이 두려워 다시 돌아가면 안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25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모든 것들이 그 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 만나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 하는 것, 쇼핑하는 것, 드라마 혹은 영화 보는 것, 정치뉴스 등 세상의 여러 벌어지는 일 등등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3) 혼란을 다스리기: 혼란을 치유하는 방법은 낯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보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길로 나서 보십시오. 가지 않던 길을 걸어보거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식당에 가 보거나, (늘 드라마를 보시던 분은) 낯선 뉴스 토크를 보시거나, (늘 뉴스 토크를 보시던 분은) 낯선 드라마를 보시든가, (둘 다 보시는 분은) 티비를 보다가 갑자기 꺼 보거나, 갑자기 숨을 멈춰보거나 등등. 낯선 세계에 익숙해져 보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세계’ 혹은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세계’는 틀림없이 낯선 삶이지만, 익숙해지면 지복(至福)의 세계가 열립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오히려 커지는 것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말-그릇이 큰 사람이 되십시오. [*. 고정된 관점을 고집하는 대신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일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특징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 다양성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부른다. 말을 담아내는 그릇이 넉넉한 사람 말이다. 그릇이 좁고 얕은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을 쏟아내지만 그릇이 넓고 깊은 사람은 상황과 사람, 심지어 그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까지 고려해서 말한다. (김윤나 저, <말그릇: 비울수록 사람을 더 채우는> 참고.)]
4) 관찰하기
낯선 세계에 익숙해 지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앞에서도 감정을 다스리며 삶을 관찰할 줄 알게 됩니다. 비로소, 세상이 보기에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의 세계를 복(福)으로 알고 누려갑니다.
6. 나가는 말
인간의 삶에는 신(神)같은 인간이 있고, 인간같은 인간이 있고, 짐승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신같은 인간을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인간같은 인간을 삯꾼이라 합니다. 짐승같은 인간을 강도라 합니다. 사실, 이 세 지평은 다소(多少)간의 [혹은 경중(輕重)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간 모두의 삶에 녹아있는 지평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시며 (하나님 알아채기, 하나님의 사랑 느끼기, 자유하기), 조금씩 선한 목자로, 신의 모습에 다가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온전하게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가 569장(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399장 (어린 양들아 두려워 말아라)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