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혁을 쓴다. 변혁은 혁명이라는 말만큼이나 흔한 말이 되었다. 그 역사가 길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세상이 변혁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변혁을 말해 온 만큼 변혁되었는지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변혁은 끝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변혁을 변혁해야 하듯이 변혁은 계속될 것이다. 변혁의 기준도 다르다. 변혁의 대상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다. 변혁의 우선 순위도 다르다. 변혁을 말하는 서로가 변혁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자신이야말로 변혁의 대상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들, 자신의 삶터를 잃은 난민들.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이주노동자가 된 이들. 그중에서도 아동이나 여성들. 누구도 알기 쉽지 않은 가정 내 폭력 희생자들, 나는 그들과 같은 희생자들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 변혁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을 변혁해야 그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을까.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기후 재난이나 사회적 재난,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경제 약자, 노동 약자, 사회적 약자들은 잊히기도 한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희생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아서 변혁하기 위해서 변혁을 쓴다. 나는 그들 희생과 고통의 원인의 중심에는 자본의 무한 이윤 증식 운동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무한 이윤 증식을 제어할 수 없다면 그들 희생과 고통도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자본의 무한 이윤 증식 운동을 제어하는 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변혁은 아니지만 멈출 수 없는 변혁인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변혁은 지금도 하고 있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변혁을 쓰고 있다.
2026.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