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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78
1월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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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초점을 맞추시는 하느님>
요즘 정부 각료나 정부기관의 요직, 고위 공무원을 임명할 때마다 대대적이고도 철저한 인사청문회를 거칩니다.
국민이 바친 세금을 집행하고 더불어 국민생활 전반에 걸친 중요한 사업들을 실행하게 될 지도자들이 그에 합당한 자질이나 역량, 도덕성을 갖추었는지 검증하는 시스템으로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부적격자나 부도덕한 사람이 고위 공직자에 임명된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자로 자기 몫만 챙기려는 사람이 각료에 임명된다면 향후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국민들을 향한 사심 없는 봉사와 헌신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임기 내 국민들의 피와 땀이 어린 혈세와 국고를 최대한 챙기려고 기를 쓸 것입니다.
그 결과 얼마가지 않아 줄줄이 초대형사건사고가 터질 것입니다. 친인척 비리, 공금횡령, 다양한 구설수로 즉시 세간의 도마 위에 오를 것입니다.
인선작업을 할 때 마다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 안에서 되풀이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 제대로 된 검증절차입니다.
애시당초 무리나 뒤탈이 없는 깨끗하고 후보, 아무리 ‘신상털기’를 해도 나올 것이 없는
투명한 후보를 추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인선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선작업은 우리 사회의 인선 시스템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후보자의 과거 경력 가운데 오점이나 문제점을 들추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선 작업에서 과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과오나 과실, 그 어떤 비리나 문제점이 있었는지 캐지 않습니다. 지난 삶을 무조건 덮어둡니다.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난 실수가 아니라 미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난 삶을 깔끔히 정리하고 오늘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려는 의지이며, 지난 삶에 대해 가슴아파하는 뉘우침이며, 나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겸손한 신원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대명사격인 레위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단 한 가지 죄목도 들추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수용으로 레위를 회심으로 인도하여 당신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의 용기와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혔으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리와 관련해 이런 말이 떠돌았습니다.
“세리들이 가까이 오면 집이 공포에 떤다.”
“세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천하고 악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담하게도 사람들이 그토록 증오와 멸시의 시선을 보내던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키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세리 레위의 제자단 편입은 충격적이고 당혹스런 대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크신 자비와 관대한 마음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자비하시고 관대하신 우리의 하느님,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져옵니다. 지난 우리 인생 안의 감추고 싶은 오점들,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 일일이 들춰내시며 혼내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다시 한 번 어제를 딛고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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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 실질적 무신론자가 탄생한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한 여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은 우리나라의 유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집 여자와 외도를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뭐 그리 잘난 여자인지 얼굴 한 번 보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그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눈이 매우 크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이무석 교수에게 정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이 작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남편이 그 여자가 눈이 크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을 뿐 실제로는 눈이 작지도 않고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긴 것은 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딸 둘인데 자신은 첫째고 둘째가 태어났을 때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아빠가 둘째만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아빠처럼 쌍꺼풀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생도 잘 돌보고 공부도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동생만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아빠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얼마짜리라고 가격을 매겨주는 것과 같고 자녀는 그 가격을 믿고 그 가격만큼 살아갑니다. 사랑을 못 받았다고 믿으면 그 떨어진 자존감을 행위로 채우고 극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행위’에 치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며칠 째 계속 저의 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고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면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굳이 행동으로 자신을 하느님처럼 높이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니 이런저런 행동으로 하느님 자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집중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무시하시고 죄만 짓는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는 것이지 단순한 율법준수에 의해 구원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로마 3,20)
그런데도 자칫 교리를 가르칠 때, 이러저러한 규정들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믿음의 공로 외에 더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바로 죽은 아기들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또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이기적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경고합니다.
혹자들은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말씀 때문에 믿음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으면 곧바로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만약 믿음이 들어왔다면 실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천은 믿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지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것을 주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마치 율법을 잘 지킨 것이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인 것처럼 믿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내가 내 아들을 뭐 하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아들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인간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에 집중하게 만드는 교리교육에서 벗어납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상관없는 구원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이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로마 11,6)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옵니다. 행위는 믿음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교리교육의 핵심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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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바든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하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제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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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부르고 응답하는 곳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계급, 능력과 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연’ 속에서 ‘필연’을 만들어 가는 고된 작업입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누군가 나의 뜻과 다른 무엇을 제안할 때, 제 의지와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황망함이 가득할 때, 신앙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레위가 그런 신앙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신앙은 앞뒤 계산하지 않는 무모한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인 의탁이고, 그 의탁은 제 삶의 일정 부분을 내어놓고 또 다른 새것으로 제 삶을 꾸며 가는 상업적 거래가 아닌,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결단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기도 합니다.
의사에 빗대어 보면, 신앙의 전적인 의탁이 삶을 완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픈 이가 의사에게 제 생명을 완전히 맡기는 것은, 그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온전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신앙 안에 하나가 되십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예술 작품의 작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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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율 바실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고 식사를 하십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파의 율법 학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된 노릇이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대답하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들은 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신은 지금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나빠지면 건강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후회를 많이 합니다. “건강하다고 자만하지 말 껄”하고 말입니다.
나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건강하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건강과 마찬가지의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고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만하면서 사는 경우입니다.
내가 지금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많은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사랑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세상이 바쁘고 빠르게 살아가야 되기 때문이라고 말들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오로지 세상에 뒤쳐지지 않고 사는 것만은 아닐껍니다. 더 올바로 살고 더 값지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더 건강하기 위해서는 건강검진도 하고 운동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반성의 시간과 실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 바쁘게 빠르게 살다보니 자신의 하루하루를 반성할 시간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반성의 시간은 나를 더욱 발전시키는 시간입니다. 반성을 통해서 알게 된 나의 잘못과 실수, 상처와 미움들은 분명히 치유되고 사랑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한 사랑은 나를 주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자만하다 주님 앞에 가서 후회하기보다 주님 앞에 기쁘게 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합시다. 우리에게는 늘 주님이 필요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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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의사는 병자들 속에 산다.>
의사들이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은 병자들입니다. 병자를 만나기 싫어하거나 만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하려 오시였으니 죄인들 안에 있어야 죄인들의 구원이 가능합니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왔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학생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고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뜻의 전달자이며 죄악을 가득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있습니다.
북쪽에 참다운 인간다운 삶이 없고 젊은 지도자가 자기 뜻대로 세계인류에게 공포와 무질서를 주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 없이 인간의 탐욕 불의 부정만 있어 국제 세계와의 불통의 상태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오늘 남쪽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행하다 보면 십자가 없는 동네가 없고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라 밤이면 작은 읍에도 수십 개의 종탑과 십자가가 있으며 골짜기 마다 절이 없는 곳이 없으며 종교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에 편승하고 재력에 눈을 돌리고 공명심에 빠져 있는 한 가난한 과부의 돈으로 큰절 큰 교회당 큰성당을 짓고 세를 과시 하는 한 고통과 가난과 불의와 불평등의 억압에서 힘들게 살고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좌절감만 심어 줍니다.
또한 정치지도자나 교회 지도자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속에 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협력하고 함께 하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배신자, 비 협력자로 낙인을 찍고 물리치는 사람들은 선한 공동체 안에 살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 하고 살며 의존 하는 가운데 충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충돌을 피하기만 하면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충돌을 서로 대화나 서로 인격적 관계로 풀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 내 마음에 들지 않은 다고 미워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이 결여 된 사람이며 겸손과 온유를 잃어 교만과 독선과 억압과 독재적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리사이 같은 정신으로 죄인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물리리치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죄인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따라 사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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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님 ]
<나는 지금 의인인가요? 아니면 죄인인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시자 군중이 모여들었고 그 장소에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강론과 가르침의 사목이요 또 하나는 치유와 마귀를 쫓는 사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테 4,2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에는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언제 어디서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 가르침이 주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인간구원의 시간이 왔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빨리 회개하고 세속적 가치 기준에서 멀어지며, 하느님을 믿고 복음적 가치에만 가까이 하라는 요구입니다.
복음의 요지는 하느님은 요구하시는 동시에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처럼 완전하고 거룩해지며, 사랑과 자비가 많기를 원하시고 진복팔단에 표현된 행복의 가치에 따라 살며, 지상에 재물을 쌓지 말고 내일에 연연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용서하신 아버지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가 하느님이 세워 놓으신 표준에 들지 못하고 하느님의 기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아오기를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신다는 것 또한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중 어느 하나라도 잃어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듯이 아흔아홉 명의 올바른 자녀보다 한 명의 죄인 자식이 회개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욱 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벌하시기 보다는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 삶의 원천인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길을 가시다가 우두커니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 말에 레위는 즉시 그분을 따랐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으며 식사대접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다가 “본당의 일 좀 하자꾸나? 봉사자로 나의 일을 좀 도와다오!”라고 나를 부르신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레위처럼 즉시 일어나 “예수님, 저를 써 주십시오. 제가 여기 대령하였나이다.”라고 일어나 감사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있을까요?
봉사도 봉사할 때가 있고, 봉사자도 봉사자로 불러줄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마시라! 하느님이 내 곁을 지나가시는데도 자기 아집과 교만과 게으름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붙들고 주님 주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는 말씀에 굶주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수님에게서는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귀한 당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만나면 함께 식사를 하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던 것이다.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식사를 하심으로써 그들을 받아주셨고 사람들을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저녁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부자들의 성공 습관 다섯가지’ 중에서 커피 브랜드를 석권하여 부자가 된 하워드 슐츠의 성공 포인트는 “매일 다른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인맥관리를 하며 남의 좋은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삼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한 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에 병든 인간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학자나 대사제나 원로들을 위한 식사였는데 그들만이 구원받은 특권을 누렸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약한 자, 버림받은 자, 죄인, 창녀들도 똑같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의인인가요? 아니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인이지만 그분으로부터 용서받았다면 행복한 죄인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를 죄 없다고 인정하시는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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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르는 선물>
‘나를 따라라.” 이는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발걸음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참조; 1베드 2,21; l요한 2,6) 지상 사물을 탐내지 말고, 썩고 마는 돈벌이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세상 명예를 피하고, 하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온갖 것을 하찮게 여기십시오.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고, 누구에게도 쓰라린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참아 주고, 억누르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용서를 청하십시오. 언제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만을 찾고(요한 7,18 참조), 거룩한 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모든 일을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세상 돈벌이도 포기하고 재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빈털터리이신 그분의 제자무리에 합류했다 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나설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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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께 미쳐봄이…>
199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보좌 사제를 3년 하다가 2000년도에 광주 월산동성당에서 첫 본당 주임 사제로 신자분을 섬기는 사목을 할 때입니다.
월산동성당에 유치원이 있습니다. 유치원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하는 아이 중에 너무 잘생긴 남자아이에게 “너, 나중에 크면 신부님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가 저를 쳐다보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제가 미쳤어요.”
신부인 저는 그날 아이의 눈에 “미친놈”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싫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그 사제는 하느님께 미친놈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라는 세리를 보시고,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레위의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동안 레위는 마음속에 큰 번민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는 돈에 영혼을 팔았고, 돈 때문에 같은 민족을 배반했고, 하느님의 율법도 버렸고,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난 뒤에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면서 주리고 목마름 심정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레위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레위의 마음으로 보시고 레위를 부르시어,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은혜스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레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의 이런 행동은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레위는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죄인의 자리가 은혜의 자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은혜의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 두레박이 고운님들에게 다짜고짜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인생) 안에 예수님을 초대하시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자신이 죄인이어도 괜찮겠지요. 자신의 과거가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 있다 해도 괜찮겠지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보다, 죄인이라고 느끼며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재산을 잃어도 좋습니다. 바라건대, 하느님의 거룩한 얼굴을 잃지 않기를….”
“병들어 괴로워도 좋습니다. 바라건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잃지 않기를….”
“사람들에게 힘들어도 좋습니다. 바라건대, 하느님의 위로로 만족할 수 있기를….” 아멘, 알렐루야! 그러므로 바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도하며 살아가면서 매 순간 지향을 두고 하느님께 화살기도를 수없이 날리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도 매 순간 화살기도와 함께 미사 중에 몸과 마음이 아프신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과 참된 삶이 있으니 죄인 된 고운님들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향주 삼덕(신, 망, 애)의 축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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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80)
♧♧ 시편 71편 3절….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의 저의 바위, 저의 성곽입니다."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여기서 견고함, 불변성의 이미지를 가진 ‘반석’은 ‘늘’ ‘항상’ 하느님의 절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 보호할 반석이 되어 달라고 하는 다윗의 간구 속에는 이미 오직 하느님께로 부터만 안정과 평안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하느님께 대한 다윗의 깊은 신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신명기 33장 27절. 시편 90편 1절. 91편 2절. 참조)
* 저를 구할...
여기서 하느님의 의지적 결단의 표현을 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 산성 되소서. 당신의 저의 바위, 저의 성곽입니다. 다윗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한편, ‘되소서.’라는 말은 환난 중에 처하여 하느님의 도움만을 절실히 간구하는 다윗의 마음을 잘 나타내 주는 시적 언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로우심을 믿는 이만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성곽을 비유로 하여 주님께 충실한 이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의 안전성과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자주 ‘주님은 나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시편 19편 3절).’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었습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주님께 충실한 이들의 확신은 곧 곤경 중에서도 능히 인내함으로 승리하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 시편 71편 4절….
"저의 하느님, 저를 구원 하소서. 악인의 손에서 불의한 자와 폭력을 일삼는 자의 손아귀에서."
‘폭력을 일삼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메츠’란 ‘발효되다.’라는 말인 ‘하마츠’에서 나온 말로 마치 한줌의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하듯이(마타오 복음 13장 33절. 참조) 자신들의 죄 본성이 그 인격을 완전히 사로잡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악인과 불의한 자와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온통 악한 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시편 71편 5절….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입니다."
*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이는 하느님만이 다윗 자신의 안전과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참 근거라는 말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예레미야서 17장 13절. 참조), 조상들의 희망이신 주님(예레미야서 50장 7절. 참조)으로 선포했으며,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영광의 희망(콜로새서 1장 27절. 참조), 우리의 희망(티모테오 1서 1장 1절. 참조)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이렇듯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참된 희망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입니다.
이 구절에서 부터 6절까지 에서는 하느님이 다윗의 참된 희망이신 이유에 대해 보다 구제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어릴 때’는 9절의 ‘늙어 버린 이때’와 상반되는 말로 유, 소년과 청, 장년 시절을 다 포함합니다. 즉 이 구절은... 다윗이 지난 유아 시절에서 장년시절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떠받쳐 주시는 든든한 반석이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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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금과 은을 보여주고서 이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아마 망설임 없이 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금의 가치가 은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떨까요? 금 한 돈, 현금 5만 원, 상품권 5만 원, 홍삼 엑기스, 건강 팔찌.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금과 은에는 금을 갈등 없이 선택할 수 있었지만,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당연히 갈등이 생깁니다. 어떤 것이 더 이득인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선택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주저하게 되고 또한 후회도 하게 됩니다. 삶을 단순화시키는 방법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명확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도 가져야 하고, 저것도 가져야 한다며 욕심을 부리다가는 정작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곧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발을 움직여서 당신을 따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서 지상 재물을 탐내고 썩고 마는 돈벌이를 추구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할 때,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레위는 주님의 명령에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세상 돈벌이도 포기하고 재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빈털터리이신 그분의 제자 무리에 합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에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선택을, 욕심을 채우는 선택이 아닌 사랑을 채우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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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약자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 소확행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때문입니다. 이것도 갖고 싶고, 이것도 하고 싶고……. 나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어느 청년이 생각납니다. 이 청년은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행복한데?”라고 물으니, “다요.”라고 대답합니다.
사랑하니 소확행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는 일을 사랑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사랑할 때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소확행’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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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분에게서 후원을 받았습니다. 3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품으로 가신 가족이 있었고,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조의금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어려운 이를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미얀마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드렸습니다. 아이티에서 선교하시는 신부님에게 보내드렸습니다. 미얀마의 신학생과 아이티의 어린이에게는 하느님 나라에서 온 선물이 되었을 겁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내가 아름답게 변하면 그만큼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사랑이 없는 엄격함과, 자비가 없는 정의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참된 평화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사울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고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일을 깨달았고,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제는 세례를 줄 때 세례 받는 이에게 성유를 발라서 축복해 줍니다.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죄가 사해지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겁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참된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 서적, 교회 잡지, 교회 신문은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는 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주교는 서품 받는 사제에게 도유를 합니다. 서품식을 통해서 사제는 성사를 집전하는 제사직(祭祀職)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직(豫言職)을 받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봉사직(奉仕職)을 받게 됩니다. 서품 받는 사제는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의 다리를 주물러 주면 안 됩니다.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독신서약을 합니다. 독신은 벼슬이 아닙니다. 독신을 해야 할 만큼 사제가 해야 할 봉사가 많을 뿐입니다. 교구장의 사목 결정에 순명해야 합니다. 순명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맡겨진 소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목이 진정한 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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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참 나의 실현; 부르심과 응답-
“모든 것은 지나간다”, 매일 미사 말씀을 대하며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1독서의 흐름과 변화가 눈부십니다. 사무엘이 등장했는가 하더니 오늘은 새로운 인물인 사울이 등장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더불어 떠오른 대 데레사의 ‘아무 것도 너를’이라는 기도문이 생각났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가 늘 기도서에 끼워 놓고 읽던 고백의 기도문이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좋아하는 성가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어뇨, 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오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가사가 좋아 2절까지 모두 인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늘 응답할 수 있도록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썼던 글의 일부도 생각납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야 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에겐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의 업적에 안주하거나 미래를 앞당겨 걱정함이 없이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자나가지만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사는 이에겐 늘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야 합니다. 오늘이 미래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우리의 정주 서원이 뜻하는 바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타성에 젖은 안주의 삶이 아닌 늘 새로운 정주의 삶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 깨어 충실히 깨어 준비되어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 오십니다. 주님과의 은총이 만남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의 레위와 오늘 독서의 사울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에 앞서 이들은 각자 삶의 자리에 충실했으며 끊임없이 내면 깊이에서는 주님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길을 지나가시던 주님의 눈에 포착된 레위입니다.
“나를 따라라.”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시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부르심과 응답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에 합류함으로 새롭게 시작된 레위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그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대로 예수님과의 만남은 구원의 만남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레위를 부르신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한 두 번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매일 주님을 새롭게 만나야 삽니다. 어제 한 자매와의 면담성사때 대화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역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영육으로 병들어 있는 병자들인 우리들이요, 죄중에 살아가는 죄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병자와 죄인, 바로 우리의 신원이자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합류할 때 치유와 용서요, 참 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자각의 깨달음이 겸손입니다. 오늘 사울의 부르심도 참 신선합니다. 새로운 인물 사울에 대한 묘사도 기대감이 넘칩니다.
‘키스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 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바로 이런 사울을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합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역시 삶의 자리에 충실했던 사울을 부르십니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춘 다음 그에게 사명을 부여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역시 복음의 레위처럼 주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펼쳐진 사울의 인생여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생 부르심과 응답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사울의 인생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요. 끝까지 성소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 사울을 통해 배웁니다.
아무리 과거에 성소에 충실하며 잘 살았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의 현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나를 따라라” 부르심에 응답해 다시 새롭게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부르심에 하루하루 충실히 응답하여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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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두 부르심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마태오 사도로 알고 있는 세리 레위, 그리고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의 부르심입니다.
"그 뒤에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방금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 말씀에 목말라 모여든 이들 중에서 제자의 재목감을 뽑으셔도 될텐데, 굳이 한창 세관에서 돈을 만지며 일하고 있는 레위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지요.
제1독서는 주님께서 당신이 뽑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을 사무엘에게 소개하시는 대목입니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1사무 9,17)
앞으로 사울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는지 뒷일을 모르지 않는 우리로서는 이 말씀 앞에서 큰 반가움이나 기대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지금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선물할 첫 임금을 사무엘에게 소개하시며 설레고 기뻐하십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누구든, 이렇듯 하느님의 기대와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민족들의 혈세를 짜내어 제 배를 채우고 로마인 앞잡이 노릇을 했던 레위의 과거를 보시지 않고, 앞으로 주님께 불순종할 사울의 미래를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소위 거룩하고 완벽히 성실한 이들보다 약하고 죄인인 이들을 눈여겨 보시고 그들을 부르심로써 그들에게 새 삶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세리와 죄인을 아우르시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볼멘 소리를 하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십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구원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요. 예수님은 힘 있고 부유하고 지식 넘치고 교양 있고 처세술마저 출중한 이들의 우두머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 창녀와 병자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독서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놀라운 사실을 밝힙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
기름부음은 정화와 하느님 영의 현존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받는 이의 인간 됨됨이나 능력에 기인하기보다 하느님의 선택에 따른 은총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부르심 앞에서 제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많이 알면 다친다"는 말이 있지요. 너무 꼬치꼬치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만 알고 있어야 안전하다는 뜻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부르심과 응답이 이른바 "알면 다치는 길"로 들어섬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당히 신자 타이틀만 단 채, 세상의 잇속과 성공도 적당히 누리는 선을 넘어서면, 버림과 따름, 조롱과 모욕, 몰이해와 박해, 십자가와 죽음의 길이 펼쳐지니까요.
예수님 말씀과 가르침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세상 논리에 야합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물질과 힘이라는 우상숭배를 거슬러 역행하는 삶이란 결코 녹록치 않으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교회 역사 갈피마다 존재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주님을 알아갈수록, 그분을 사랑할수록 다친다는 것, 그로써 입는 상처는 놀랍게도 감미롭습니다. 감미로운 고통, 달콤한 십자가... 이는 무슨 자학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착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과 하나되는 길, 그분과 일치 상태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오늘 주님의 길을 걷고 계시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기름부음으로 주님의 영과 하나되어 기도와 선행의 은사를 살아가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는 우리의 때 묻은 과거도, 실패로 점철될 미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죄인인 우리의 "지금 여기"를 보십니다. 그러니 레위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따랐던 응답의 순간부터 그분과 구원의 여정을 엮어 갑시다. 구원은 지금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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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평범성을 주관하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의 동기와 재능을 솔직히 표현하라
평범성을 주관하는 성령은 저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부여받은 동기와 재능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이것을 자의식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하라고 초대하신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평범성이다. 평범해지라는 부르심은 단순할지라는 몰라도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미묘하면서도 난해한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평범해지는 일’이 우리 시대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되었다.
-「일상 안에서의 거룩함」에서
♣참 자아는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비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하느님의 자녀로 ‘그저’ 우리 자신이 되는(평범해지는) 것이며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모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여 하느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거짓된 자화상을 만들어 내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한다. 세상의 것들에 유혹에서 벗어나 거짓자아를 과감히 버리고 참 자아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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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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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랑의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습”에서 “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듯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그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가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회개해야 용서하겠다고 완고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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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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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허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 어느 것 하나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물도 ᆢ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공기청정기를 틀고
미세먼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준다 해도 만족 100프로가 없듯이
사람이 기댈수 있는 것은
서로의 허물을 알면서도
너와 내가 함께 할 때 완성을 향해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슬프고
안타까워 하시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어,
쓸모 없는 인간이야,'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아무리 큰 죄와 허물도
덮으시고 낫게 하십니다.
"허물이 많을수록 더 큰
이불을 준비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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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주님께서는
함께하고파
병든 죄인을
먼저 부르십니다.
병든 죄인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병든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조건과 자격을
내려놓으면
소중한 사람이
보입니다.
우리자신이
병든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병든 죄인을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죄인의 마음을
되살려 놓으십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해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을 다시 만납니다.
부르심은
사랑의 나눔입니다.
나눌수록 풍요로운
사랑과 용서의
잔치입니다.
잔치에 없어서는
안될 사랑의
회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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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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