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창세기28장10~22절
제목 : 벧엘의 하나님
야곱은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향합니다.
얼마를 걸어온 것일까요. 어느덧 날이 저물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잘 곳을 찾고 있었던 야곱은 베게로 쓸만한 돌 하나를 주어 들고 자리를 잡고 누었습니다.
아마 만 가지 생각이 교차 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떠나보내면서 형의 마음이 누그러질 때 까지만 외삼촌집에 잠시 가 있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불안 했습니다.
야망 때문에 겁 없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과 장자의 축복을 가로 채기는 했지만 그것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도망자의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자리가 편안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막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어딜 가든 함께하며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원을 드립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다가 길거리에서 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와 함께하시 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1. 꿈을 통해 주시는 말씀(10~15절)
1)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다리(10~12절)
(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갔습니다(10절)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이 에서에게서 피신하기 위해, 또 더불어 친족 중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2)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므로 한 돌을 가져다가 베게로 삼고 거기 누워 잡니다(11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야곱이 출발한 브엘세바에서부터 이곳 루스(19절)까지의 거리는 약 85km쯤 됩니다.
따라서 야곱은 집을 떠난 후 하루 만에 이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약 3일)의 여행을 한 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밖의 에서는 오히려 편안한 가운데 물질적인 유산을 차지한 반면, 축복받은 야곱은 낯선 땅에서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는 상반된 환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세에서 신자와 불신자가 누리게 될 각각의 형편(영적 측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는 팔레스틴의 여행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자신이 입던 옷을 이불삼고 돌베개 삼아 잠들었습니다.
(3) 야곱이 그곳에서 꿈을 꿉니다(12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⓵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12a절)
“[12a]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꿈은 특별히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친히 현현(顯現)하여 직접 잠자는 수신자에게 전하는 방법(20:3-7; 28:10-19)과
둘째, 하나님의 계시가 상징적인 물건, 인물, 그리고 행위들을 통해 나타나는 방법입니다.
이런 경우 꿈을 꾼 자는 당황해하며 해몽가의 도움을 요청합니다(40장;단 2:3).
이처럼 꿈은 계시의 초기 단계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한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나(민 12:6;삼상 28:6;왕상 3:5;마 2:22),
완전한 계시인 성경이 완결된 이후에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서의 꿈의 중요성은 현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본즉(힌네) - '보라'는 뜻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야곱이 꿈속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놀라 감탄하는 장면이 있어 '힌네'가 세 번이나 사용돼 잘 표현해 줍니다.
의미상으로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땅에 있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연결 통로가 되어 주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 1:51;14:6).
이는 또한 사닥다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이 진정한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요 10:9;행 4:12).
신약 시대 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기사를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사닥다리의 본체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1:51).
*요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본절에서 이 거대한 사닥다리가 여호와의 명에 의해 외롭고 처량한 신세로 두려움 속에 잠겨있는 무기력한 야곱이 누워 있었던 바로 그 곳, 그 마음속에 찾아와 우뚝 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 사다리는, 하나님은 항상 하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용서의 문, 사죄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실수한 내용까지도 선용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놀라운 은혜입니다.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를 보이신 뜻입니다.
하나님과 영교는 우리 경건에 정비례하고 우리 심령의 정화에 정비례합니다.
⓶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합니다(12b절)
“[12b]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의 무리를 뜻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히12:22).
*히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① 메시지를 전달하고(슥 1:9;5:5),
② 심판을 수행하며(삼하 24:17;시 78:49),
③ 구원하고(19:12-17),
④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시 91:11).
또한 특별한 기능은 그들의 임재 자체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한 측면을 현시하는 것이며(사6장;겔1장;계4:6-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찬양하는 일에 합세합니다(시 148:2;사 6:3).
따라서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린 것은, 하나님 임재에 따른 영광의 현시와 택한 백성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 가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사람들에게 내려다주는 천사들의 역할을 표현한 것으로서(시 34:7;91:11;마 18:10;히1:14)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Calvin, Murphy)을 예표합니다.(요 1:51).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신앙의 연속이 이 밤에 벧엘에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과 평소의 경건한 신앙은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2) 야곱에게 주신 여호와의 약속(13~15절)
(1)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십니다(13절)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란 말은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인 엄위로우심과 그분의 완전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친히 세상의 유일하신 창조주이심을 밝히는 자신의 칭호를 사용하시면서 조상 때부터 맺으신 언약을 야곱에게 상기시킵니다.
비록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났으나 영원하신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장차 구원 얻을 후사의 조상으로 모든 믿는 자를 대표해서 언약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은 일찍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13:15),
이삭에게(26:3) 언약으로 주셨던 그 땅으로서 언약의 반복과 계승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하신 약속 중 제일되는 부분입니다.
(2)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4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자손의 번성과 확산의 이 축복은 야곱에게 허락된 두 번째 약속으로서 의미상으로 오늘날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풍성한 삶과(요 10:10;참조,시1:3;23:5)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의 점진성을 암시합니다(13:14;신 12:20).
족속(미쉬파하) - '가족', '씨족', '혈족'을 나타내는 말로 영역에서는 '가족'(KJV, family)이라고 번역했으나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주 부족(수 7:16-18) 또는 국가와 같은 큰 무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특히 강력한 혈연관계를 가진 친척들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하나가 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신약의 성도들을 암시합니다(마 26:28).
(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15절)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 이삭에게도 언급된 축복이며(26:24) 야곱에게 다시 특별히 반복된 축복입니다.
도망가는 입장에 있는 그에게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무엇보다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함께 있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맘'은 '결합하다'는 뜻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한편 후에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란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아맘'을 어근으로 하여 조어되었을 뿐만 아니라(사 7:14;마 1:23),
승천할 때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이 약속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었습니다(마 28:20).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는 것은 놀라운 재산이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중 가장 크고 귀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요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슬플 때나 기쁠 때, 실패했을 때나 성공했을 때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마28:20, 욥1:10, 잠언3:6).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도우시는 분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키며(솨마르) - 본래 의미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다'란 뜻으로 하나님의 돌보아 주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표현으로 자주 언급됩니다(시 34:20;86:2; 121:3,4,7).
이 보호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란 말씀이 제시해 주듯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기인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곳에 있든지 다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 이 말은 야곱의 밧단 아람 행이 야곱에게는 도피 행각일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언약 후손을 보존하시고 인도하시는 자비로우신 배려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이 말속에서 비치고 계십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아쉐르디바르티) - '내가 말했던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했던 축복은 가나안 땅에 대한 소유(13:14-17;15:7, 18;17:8;26: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손(12:2; 15:5; 16:18; 22:17; 26:4) 그리고 모든 종족이 야곱의 후손을 통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12:3;18:18;22:18;26:4).
이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약속된 것(25:23)으로서, 그의 아비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을 때 확인된 것(27:27-29;28:3,4)을 지금 하나님께서 친히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루기까지(아드아시티) - '내가 성취할 때까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빌 1:6).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도망자의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의 약속은 가장 절실하고도 값진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새 지도자 여호수아에게(수 1:5), 다윗이 죽은 후 어린 솔로몬에게(대상28:20),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마28:20) 주어진 약속입니다.
궁극적인 성취는 신약 시대에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내주(內住)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요 14:16;15:26).
2. 벧엘의 하나님(16~22절)
1) 야곱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16절)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 야곱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심을 깨달았다기 보다는, 언약의 하나님이 특정한 장소 이외에서도 당신의 백성과 교제 하신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Lange,Rosenm ller).
고대 이방 종교의 신들은 대개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 것들이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렇게 초월자(超越者)로 파악한 신앙은 당시로 볼 때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알지(야다) -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 경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인상을 남겼는지 보여줍니다.
2) 그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두려워 합니다(17절)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두려워하여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는 누구나 거룩한 종교적 두려움을 느낍니다.
모세(출20:18,19), 욥(42:56), 이사야(6:5), 베드로(눅 5:8), 요한(계1:17,18)등도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따른 깊은 경외감에 압도되어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 -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야곱이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 그분을 뵈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가 겪은 특별한 경험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묘사했을 따름입니다.
즉 하나님과 분명한 교재를 나눈 장송 대한 야곱 자신의 표현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성도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6:19).
한편 이 장면은 장차 이뤄 질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을 예표하기도 합니다(계 21:10,12).
하늘의 문 - 수사학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내비쳐지는 문', '하늘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문' 등을 가리킵니다.
3)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 붓고 벧엘이라 하었습니다(18~19절).
(1)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18절)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기둥(마체바)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물로서 야곱과 라반의 돌기둥(31:4, 5), 라헬의 묘비(35:20), 압살롬의 비석(삼하 18:18)등이 그 예(例)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돌기둥을 세운 것은 우상이나 신적 예배의 대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다만 꿈과 그 꿈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Calvin, Keil).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런 대상의 경배를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입니다(출 23:24; 34:13;레 26:1;신 7:5).
기름을 붓고 - 돌기둥을 거룩하게 구별하려는 행위로서(출 30:25-29; 40:9-11). 야곱이 하나님께 그곳의 자신을 헌납하는 신성한 의식이었습니다.
(2)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습니다(19절)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벧엘(베트엘)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서 뒷날 야곱이 귀향할 때 이곳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처소 내지 하나님의 전을 지어 영광돌리겠다는 그의 약속과 신앙과 소망을 담고 있는 지명입니다.
훗날 야곱은 신앙과 소망을 담고 있는 지명입니다.
훗날 야곱은 고향에 귀향한 후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35:7,15).
한편 이곳의 원지명은 '편도 나무'라는 뜻의 '루스'였습니다 (삿 1:23).
그런데 전후 상황으로 보아 야곱이 돌기둥을 세운 곳이 '루스'라는 성읍 중심지가 아니라 외곽의 들판으로서 야곱이 그곳에 이름을 명명한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차츰 '벧엘'이란 이름이 들판을 끼고 있던 성읍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인이 거처하는 곳은 벧엘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처럼 천국의 실존과 하나님의 실존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도록 원하고 계십니다.
루스가 벧엘이 된 것 같이 신앙인의 거처와 신앙인의 생활 공간은 어디든지 벧엘을 만들 수 있고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벧엘과 천국의 특징은 물질적인 조건보다 영적인 조건이 우선하고,
환경의 조건보다 정신적인 조건에 더 좌우됩니다.
4) 야곱의 서원 내용(20~22절)
(1)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여 필요한 것을 채워 달라 하십니다(20절)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서원(네데르) - 하나님께 구두(口頭)로 자신을 바치는 행위. 즉 실행을 맹세하고, 제물을 바치며(레 27장), 어떤 일을 삼가는(시 132:2)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경건한 열심과 헌신의 표시가 함께 드려졌습니다(시22:25).
여기서 야곱의 서원은 어떤 것을 소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확신의 표현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됐으나 원문에는 들어있습니다.
이 용어의 해석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중
첫째는 '만일...하시면'이란 해석으로 야곱이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견해와,
둘째론 '왜냐하면...'으로 번역되기도 하므로 야곱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성경 전체 해석상 후자를 택하나 첫째 견해도 배재하지 않는 이유는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에서와 이삭에게 거래하던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거래를 시도하는 '옛 사람'의 습관이 다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품마저도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손길로 처리되어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32:24-31).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 하나님께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보호와 인도를 간구하는 야곱의 요구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13-15절)을 확신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하십니다(21절)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 에서의 보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구에 기꺼이 응낙해 주셨습니다(33:4).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문자적으로는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로서 야곱의 상호 교환식 서원을 지지한 듯 하나 전체 문맥으로 보아 야곱이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과 값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절을 부연 설명으로 보아 '(여호와께서) 내게 하나님이 되시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Hengstenberg).
이 서원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평생 섬기며 살겠다는 의지의 발로(發露)이자 신앙 고백입니다.
(3) 그곳에 기둥을 세우고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22절)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⓵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22a절)
야곱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킵니다(35:7).
*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⓶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2b절)
십분의 일 -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입니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합니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임에 분명합니다.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말씀 가이드
야곱의 머리 위로 뻗어 있던 사다리는 우리 머리 위에도 생생히 존재한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게 익숙한 우리는, 천사의 존재를 간과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신다.
바로 나 한 사람을 위해 ‘마나하임’(두 부대, 32:2)의 천사가 움직인다.
나를 위해 동원된 비가시적인 천사들, 도움의 손길은 무엇일까?
하늘. 노숙인 야곱의 머리 위로 사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사다리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천사들을 파송하신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하늘을 봐야한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게 연결된 사다리를 놓지 않는 분이 거기 계시다.
땅. 노숙의 벌판에, 야곱은 ‘하나님의 집’이란 이름을 붙인다.
초등학생들이 아파트 부랜드와 평수로 서열을 정한다는 이 광기의 시대에, 내가 누운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인 줏대를 세우고 전수해야 한다.
하늘과 땅을 잇는 기념비. 노숙의 도구로 사용한 돌을, 야곱은 기념비로 세운다.
땅에 묻어버려도 시원찮을 비루함의 증거물을, 하나님은 기름을 부은 ‘벧엘’이 도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 삶에 또 어떤 기념비들을 세우실까.
이미 주신 은혜들마저 분주함에 파묻혀 묻어버리고 있진 않은가.
우리 머리 위로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면, 그 사다리 끝에서 천사를 부리시는 분이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문법에 휩쓸릴 이유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나를 위해 내려오시지 않았는가.
묵상 Point
1) 복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 여정
두렵고 외로운 마음으로 하란으로 향하던 야곱은, 해가 지자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한다.
축복을 받을 때는 중천에 뜬 태양 같이 의기양양했을 야곱이 이젠 황량한 저녁 같은 초췌한 도망자가 되었다.
이미 받은 축복마저 물거품이 된 듯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야곱 인생에서 기장 절망적이던 그 순간 하나님은 하늘까지 닿는 계단(사다리)과 그곳을 오르내리는 천사와 그 위에 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땅과 후손)을 다시 들려주심으로써 이삭에게서 받은 복을 숭인해주신다.
세상에서 희망 없는 우리에게도 하늘과 땅을 잇는 완전한 계시오, 새 뱉엘이요, 새 성전이신 예수님이 계신다(요1:51).
야곱의 이 여정은 야곱의 영적인 눈이 열리는 걸음이었다.
2)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의 여정
하나님께서는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동행하고 지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여태 같이하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인간적인 지혜와 모략과 눈에 뵈는 자원만으로 스스로 자기 인생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야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끈질긴 임마누엘의 사람뿐이다.
축복은 내가 내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때까지 야곱의 여정은 스스로가 고통스럽게 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3) 더 깨질 것이 남은 야곱의 여정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로 총하는 문이라고 고백하고, 성전 기둥을 세우듯 베개로 쓰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발라 구별하고, 그곳 ‘루스’를 ‘벧엘’로 부른다.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 대로 가고 오는 이 여정을 안전하고 넉넉하게 지키시면 자신도 하나님을 위해 전을 세우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결박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만약-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신앙이었다.
더 깨지고 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남은 야곱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0-14절 빈손으로 도망가는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끝났지만, 야곱은 모든 것을 잃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상속자만 되면 이삭의 지위를 계승하여 족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빈손으로 들판에서 유숙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잠든 그에게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여주시며, 그에게 땅과 후손의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장자의 지위와 복은 야곱이 제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그것을 인정할 때 누릴 수 있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15절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를 이끌어 반드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야곱 곁에 계셨지만, 그가 자기 지혜와 힘을 신뢰하면서 현실만 주목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의 눈을 열어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후 ‘벧엘’(19절)은 야곱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시작하는 신앙의 본향이 되었습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6-19절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 고백하며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부릅니다.
이후 야곱의 일생에서 벧엘은 신앙의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밧단아람에서 나그네로 지낼 때에도, 에서를 맞이하는 두려운 순간에도 그는 벧엘의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벧엘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그 모든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낼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벧엘’은 어디(언제)입니까?
나아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자리가 우리의 벧엘이 되게 합시다.
20-22절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다시 언급하며, ‘만일’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벧엘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믿음은 아직 온전하지 못합니다.
특별한 경험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지만, 믿음이 성숙하고 단단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의 믿음에도 여전히 ‘만일’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지 않은지 살펴봅시다.
[기도]
공동체-고난의 때에 저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시고 힘을 얻게 하소서.
열방-최근 이집트 정부는 빈곤층 비율을 33%로 발표했지만, 국제사회는 전체 인구의 60%를 빈곤층으로 분류한다.
정부가 빈곤층 지원 정책을 늘려 많은 주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