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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권 평안도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이니, 천문(天文)으론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야(分野), 곧 석목(析木)의 성좌(星
座)이다. : 《전한서(前漢書)》를 살펴보건대, "연(燕) 땅은 미성과 기성의 분야이다."
하였으니, 낙랑(樂浪)과 현도(玄?)도 마땅히 그에 속할 것이요, 또 말하기를, "현도와 낙랑은 무제(武帝) 때에
두었는데 다 조선 예맥(?貊)ㆍ구려(句驪)의 만이(蠻夷)다." 하였으니, 본국을 통틀어 미성과 기성의 분야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삼국 때에는 고구려의 소유였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668)에 이르러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唐) 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함께 쳐서 멸하여 드디어 그 땅을 차지하였다. 효공왕(孝恭王) 9년(905)에 궁예(弓裔)가 철원(鐵原)
에 웅거하여 후고구려왕(後高句麗王)이라 일컬으면서 패서(浿西) 13진(鎭)을 나누어 두었고,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고 서경(西京)이 관할하는 땅을 패서도(浿西
道)라 하였다가 뒤에 북계(北界)라 일컬었다. 숙종(肅宗) 7년(1102)에 서북면(西北面)이라 일컬었고,
뒤에 황주목(黃州牧)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을 이 면(面)에 붙였다가 신우(辛禑)
14년(1388)에 도로 서해도(西海道)에 붙였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16년에 영길도(永吉道) 갑산군(甲山郡) 서면(西面)
여연(閭延) 등 땅이 본도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훈두(小薰頭) 이서를 베어 여연군(閭延郡)을 삼았고,
세종조(世宗朝)에는 또 여연 상무로(上無路)ㆍ우예(虞芮) 등의 땅을 나누어서 무창(茂昌)ㆍ우예 두 군(郡)을
두어 본도에 붙였다가, 세조(世祖) 원년(1455)에 모두 파하고 그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관내(管內)에 부(府) 1, 대도호부(大都護府) 1, 목(牧) 3, 도호부 6, 군(郡) 18, 현(縣) 13개가 있다.
관원 관찰사 : 한 사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하고 하나는 병마절도사가 겸한다.
병마우후(兵馬虞侯)ㆍ도사(都事)ㆍ병마평사(兵馬評事) : 각각 한 사람씩. 심약(審藥)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도, 하나는 절도사도이다. 검률(檢律) : 한 사람.
평양부 平壤府
동쪽으로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50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47리, 남쪽으로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36리, 서쪽으로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57리, 증산현(甑山縣) 경계까지 72리, 북쪽으로 순안현(順安縣) 경계
까지 49리,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6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
으니, 이것이 전조선이요,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요,
전하여 41대 손 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 : 험(險)은 검(儉)이라
고도 쓰니, 바로 평양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나라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겨와 도읍하였고, 보장왕 27년에 당 고종(唐高宗)
이 이적을 보내 신라와 함께 협공(夾攻)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좌위위대장군(左
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에게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뒤에 당 나라 군사가 떠나자 그
땅이 다 신라로 들어갔다.
고려 태조 웑년(918)에 평양이 황폐하였기 때문에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황주(黃州)ㆍ해주(海州)ㆍ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인구를 채워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삼았고, 조금 뒤에 서경(西京)을 삼았다.
광종(光宗) 11년(960)에 서도(西都)라 개칭하였고, 성종(成宗) 14년(995)엔 서경 유수(西京留守)라 일컬었고,
목종(穆宗) 원년(997)엔 또 호경(鎬京)이라 고쳤다.
문종(文宗) 16년(1062)에 다시 서경 유수라 일컫고 경기(京畿) 사도(四道)를 두었고, 숙종(肅宗) 7년(1102)에
문무반(文武班) 및 오부(五部)를 설치하였다. 인종(仁宗) 13년(1135)에 중 묘청(妙淸) 및 유참(柳?), 분사시랑
(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절령(?嶺) 길을 끊으므로 김부식(金富軾)을 명하여 이를 쳐서 평정하
게 하고 유수(留守)ㆍ감군(監軍)ㆍ분사(分司)ㆍ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조금 뒤에 경기 사도를 삭제하고 여섯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 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
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현 교위(三和縣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의 백성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몽고(蒙古)에 붙으니, 몽고가 서경으로 동령부(東寧府)를 삼고
절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원(元)이 도로 우리나라에 돌려주어 드디어 다시 서경 유수가 되었고, 공민왕(恭愍
王) 18년(1369)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고쳐 평양부(平壤府)로 삼았다.
본조에서 그대로 두어 관찰사로서 부윤(府尹)을 겸하게 하였으며,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 1 : 중화(中和). 현(縣) 6 :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함종(咸從)ㆍ증산(甑山)ㆍ순안(順安)ㆍ강서
(江西).
관원 부윤(府尹) : 한 사람인데, 관찰사가 겸한다. 서윤(庶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ㆍ
역학훈도(譯學訓導) : 각각 한 사람씩. 토관(土官) 도무사(都務司) 도무(都務) : 한 사람.
교부(校簿) : 한 사람인데, 정6품이다. 전사(典事) : 두 사람. 전례사(典禮司) 장부(掌簿)ㆍ감부(勘簿)ㆍ전사(典事)ㆍ
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각 한 사람씩. 제학서(諸學署)ㆍ융기서(戎器署)ㆍ사창서(司倉署)ㆍ영작서(營作署)
감부ㆍ관사(管事) : 각각 한 사람씩. 섭사 : 각각 두 사람씩. 수지국(收支局) 장사(掌事)ㆍ급사(給事)ㆍ섭사 : 각각
한 사람씩. 전주국(典酒局) 급사ㆍ참봉(參奉) : 정9품. 섭사 : 각각 한 사람씩. 사옥국(司獄局) 섭사 : 두 사람.
사부(四部) 섭사 : 각각 두 사람씩. 진서위(鎭西衛) 여직(勵直)ㆍ부여직(副勵直) : 각각 한 사람씩.
여과(勵果)ㆍ부여과(副勵果) : 각각 두 사람씩. 여정(勵正)ㆍ부여정 : 각각 세 사람씩. 여맹(勵猛)ㆍ부여맹 : 각각
네 사람씩.
여용(勵勇)ㆍ부여용 : 각각 다섯 사람씩. 이상 관품(官品)은 모두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에 보인다.
군명 조선(朝鮮) : 동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사기(史記)》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
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
(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
성씨 본부 조(趙) : 상원(祥原).
풍속 팔조(八條)의 가르침 : 반고(班固)의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기자(箕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짓기ㆍ누에치기ㆍ베짜기를 가르치고 백성을 위하여 금법(禁法) 8조를 만들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死刑)으로 갚고, 사람을 상한 자는 곡식으로 갚고, 도적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몰입
(沒入)시키고, 제 죄를 속량코자 하면 1인당 50만 전을 내되, 비록 면죄되어 평민이 되나 풍속이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혼인할 데가 없게 된다." 하였다. 부인이 정조를 지켜 음란하지 않다.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 서ㆍ남ㆍ동)과 다르며 유순하고 삼가는 기풍이 있다. : 모두 《한서(漢書)》에 있다.
도(道)로 제어하기 쉽다. : 천성이 유순하여 도로 제어하기 쉽다.
그릇은 조두(俎豆)를 쓴다. :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며, 혹 관(冠)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조두를 쓰니, 이른바 중국에서 잃어버린 예(禮)를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절제한다. : 그 풍속이 음식을 절제하고 집을 꾸미기를 좋아한다. ○ 모두 《후한서(後漢書)》에 있다.
삼년상(三年喪)을 입는다. :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 "부모와 남편의 상은 다 삼년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입는다." 하였고, 《오대사(五代史)》에, "그 나라 사람이 문자를 알며 삼년상을 입는다." 하였다.
기력(氣力)을 숭상한다. : 《남사(南史)》에 "나라 사람이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살, 칼과 창을 잘 쓰고 투구와
갑옷을 가지고 전투를 익히는데, 후위(後魏) 때 여러 나라 사신들의 시합에서 제사(齊使)가 1등을 했고 고려가
2등을 했다." 하였다.
빌려줌에 너그럽게 용서함이 없다. : 《요동지(遼東誌)》에, "성질이 유순하나 빌려줌에는 너그럽게 용서함이
없고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옛날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숭상한다. :
《수서(隋書)》에, "경술을 좋아하고 숭상하며 문사(文史)를 사랑하고 즐겨 중국의 서울로 유학(遊學)하는 자
들이 왕래하며 길을 잇고 혹 죽도록 돌아가지 않으니, 선철(先哲 기자(箕子))의 유풍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淫祠)가 많다. : 《수서》에 있다. 바둑과 투호(投壺)를 즐긴다. : 《당서(唐書)》에, "풍속
이 바둑과 투호와 축국(蹴鞠)을 즐긴다." 하였다.
산골짜기에 의지해 살며 풀로 지붕을 인다. : 《수서》에,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풀로 지붕을 이는데, 오직
왕궁(王宮)과 관청과 절만은 기와로 이었다. 가난한 백성은 한겨울에 긴 구들을 만들어서 불을 지펴 온기를
취한다." 하였다.
네거리 옆에 모두 서당(書堂)을 지었다. : 《수서》에, "사람들이 배우기를 즐겨하여 궁벽한 마을의 천한 집에서도
서로 삼가고 힘쓰며, 네거리 옆에 모두 서당을 지어놓고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이 한데 모여 경서를 외고
활쏘기를 연습한다." 하였다.
인사(人士)가 생업을 즐긴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있다.
풍속이 사납고 교만하다. : 권근(權近)의 기에, "고씨(高氏) 적부터 무강(武强)을 숭상하였고, 고려 때에 요(遼)와
금(金)과 국경을 접하여 점차 되놈의 풍속에 물들어 풍속이 사납고 교만하다. 이는 마치 기(岐)와 풍(?)의 땅을
주(周) 나라에서 씀에 인후(仁厚)한 교화를 일으키고, 진(秦) 나라에서 씀에 용감하고 사나운 기운을 가짐과 같다.
대개 백성의 본성이 온후하고 진중하며 질박하고 곧으므로 선(善)으로 인도하면 쉽게 좇아 감화되고 엄하게 몰면
또한 족히 부강(富强)한 기업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날래고 굳세다. : 권근의 기문 서(序)에, "평양은 기자의 옛날 봉지(封地)이다. 8조의 가르침으로 백성들이 예의를
알았으나 주몽씨(朱蒙氏) 이래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그 풍속이 마침내 변하여 비록 수(隋)ㆍ당(唐)의 성대
한 병력(兵力)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었으니, 그 날래고 굳셈을 상상할 수 있다." 하였다.
형승 경계는 고래 나루[鯨津]를 임했고 땅은 기러기 변방에 이었다. : 《고려사》에 있다.
산을 등지고 물에 막혔다. : 김부식(金富軾)의 전(傳)에, "북쪽은 산을 등지고 삼면(三面)이 물에 막혀 있다."
하였다.
서북쪽을 제어한다. : 이색의 기에, "나라의 근본이 되어서 서북쪽을 제어한다." 하였다.
긴 강을 굽어보고 멀리 광야에 임하였다. : 권근의 기에 있다.
먼 산이 들을 둘렀고 긴 강이 마을을 감돈다. : 권근의 시(詩)에, "높디높은 먼 산이 평야를 둘렀고,
금실금실 긴 강은 옛 마을을 감도네." 하였다.
산천 금수산(錦繡山) : 부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포백(布帛)이 하마
족히 귀해도, 문채(文彩)는 수놓은 비단으로 돌아가고, 동풍이 부는 봄날에, 들길을 걸으면 언제나 환하구나."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산 돌이 찬란한 오색(五色)인데, 꽃나무가 얼기설기 겹쳤네. 나무꾼이 구름을 뚫고 가니,
분명 채색 노을 속으로 들어가네." 하였다.
모란봉(牧丹峯) : 금수산에 있다. 고려 때 왕이 이 봉우리에 올라 시 구절을 부르기를, "북두칠성이 서너 점이로고."
하니, 한 서생(書生)이 나아가 대구(對句)하기를, "남산 만수(南山萬壽) 십천추(十千秋)로다." 하니, 왕이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모란이라는 신선 봉우리, 우뚝 솟아 이 나라의 진산 되었네.
내가 부벽루에 왔다가 이 산 꼭대기에 오르니 흥이 그지없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말 들으니, 모란봉 위에 모란꽃이 벌써 늙었다네. 봉우리에 꽃 없다 한(恨)하지 마소,
봉우리 이름만으로 그대로 좋지 않은가." 하였다.
구룡산(九龍山) : 부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혹은 대성산(大城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이른다.
옛 기록에는 "산마루에 99개의 못이 있다."고 했으나, 지금은 다만 3개의 못이 있다.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
창광산(蒼光山) : 부의 서남쪽 4리에 있다. 속전(俗傳)에, "김부식(金富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압박하니
묘청(妙淸) 등이 짚거적으로 이 산을 덮어 창름(倉?)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다." 하니, 이 때문에 또한 창관산
(倉觀山)이라고도 이름한다.
목멱산(木覓山) :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황성(黃城)의 옛터가 있는데, 일명 형성(?城)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구려 고국원왕(古國原王)이 환도성(丸都城)에 있다가 모용황(慕容?)에게 패하여 이리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용악산(龍岳山) : 부의 서쪽 28리에 있다. 일명 농학산(弄鶴山)이라고도 한다.
대보산(大寶山) :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위산(葦山) :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를 임
해 있다.
형제산(兄弟山) : 부의 북쪽 50리에 있는데, 두 산이 아울러 솟아 마치 형제와 같다.
마산(馬山)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속전에, "용마(龍馬)가 나와 논다."고 하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부산(斧山)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속전에, "한 용맹한 장수가 도끼를 가지고 여기서 적(敵)을 무찔렀다."고
하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덕암(德巖) : 대동문(大同門) 밖에 있다. 우뚝 솟아 물을 막아내므로 부(府)의 사람들이 그 은덕을 고맙게 생각
하여 이름지었다. 신증 당고의 시에, "바위가 물을 받아들임도 좋지만, 물이 돌을 감돌아야 하네. 견고한 성곽
(城郭)이 걱정 없으니, 주민들이 모두 은덕에 귀의하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바위가 강물이 부딪치는 곳에 솟아 있어, 성(城) 안에 강물 재난이 없네.
몇천 년간 편안히 살면서, 사람들이 바위를 덕스럽게 여기네." 하였다.
주암(酒巖) : 부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속전에, "술이 바위 틈에서 흘러나왔는데, 흔적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인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신증 당고의 시에, "술못[酒池]이 상(商) 나라를 망하게 하더니 유한(遺恨)을 여기에
쏟았구나. 귀한 것은 임금을 올바르게 돕는 일, 부암(傅巖)에 술 빚은 누룩 있구나." 하였다.
○ 사도의 시에, "어느 날에 바위에서 술이 흘러나왔던고, 바위 속에 주신(酒神)이 있었던게지. 지금까지도 흘러
나와서 평양에 취한 사람이 많도다." 하였다.
이암(?巖) : 제연(梯淵) 남쪽에 있다.
바다 :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대동강(大同江)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 한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군(寧遠郡)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또 꺾여 서쪽으로
흘러 덕천군(德川郡) 경계에 이르러 삼탄(三灘)과 합류하여 남으로 흘러 개천군(价川郡) 경계에 이르러 순천강
(順川江)이 되고, 순천군(順天郡)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고, 자산군(慈山郡)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
(禹家淵)이 된다. 여기서부터 동으로 흘러 강동군(江東郡)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되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성천부(成川府) 경계에 이르러 비류강(沸流
江)이 되고 또 꺾여 남으로 흘러 강동현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부성(府城)
동북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부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이 되고, 또 대동강이 된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내려가 평양강과 합류하여 중화형(中和縣)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용강현(龍岡縣) 동쪽에 이르러 급수문(急水門)을 나가 바다로 들어간다.
○ 지금 사마천(司馬遷)의 《열전(列傳)》을 살펴보건대, "한(漢)이 흥하자 요동(遼東)의 옛 변방을 닦아 패수
(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였고,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려 변방을 나가 패수를 건너 왕험
(王險)에 도읍하였다." 하였으니, 압록강을 패수라 한 것이다.
또 《당서(唐書)》에, "평양성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다. 산을 따라 구불구불 성곽을 쌓았고 남쪽은 패수를
면하였다." 하였으니, 지금의 대동강을 가리킨다.
또 《고려사》에는, 평산부(平山府)의 저탄(猪灘)을 패강(浿江)이라 하였으니, 백제(百濟)의 시조(始祖)가 북쪽
으로 패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고 당(唐) 나라 황제가 패강 서포(西浦)에 배를 대고 돈을 깔고서 육지에 내려
송악군(松岳郡)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 저탄을 가리킨 듯하다. 이로써 보건대, 본국 경내에는 본래 세 패수가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 《고려사》 악지(樂志)에,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8조의 가르침을 베풀어 예속(禮俗)
을 일으켰으므로 조야(朝野)가 무사하고 백성들이 기뻐하여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비하여 노래를 지어 그 임금
을 송축하였다." 하였다.
○ 고려 인종(仁宗)이 서경에 행행(行幸)하니, 묘청(妙淸)ㆍ백수한(白壽翰) 등이 큰 떡을 만들어 그 속을 비우고
구멍 하나를 뚫어 기름을 담아 익혀 강에 가라앉히니, 기름이 떠서 수면으로 나와 바라보면 오색(五色)과 같은
지라, 수한 등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침을 뱉어 오색 구름을 만든 것이니,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운 상서입니다. 청컨대, 백관(百官)들이 표하(表賀)하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문공인(文公仁) 등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기름칠한 가죽신을 만드는 자가 고하기를, "익은 기름[熟油]이 물에 뜨면 이상한 빛이 있습니다."
하니, 이에 잠수를 잘하는 자를 시켜 그 떡을 찾아내게 하여 비로소 속임수임을 알았다.
○ 최자(崔滋)의 부(賦 <삼도부(三都賦)>)에, "뭇 물줄기 모였으니 이름이 대동강(大同江)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을 안고 풍수(?水)를 모아온 듯, 깨끗하긴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비단 닻줄을 풀고 목란(木蘭) 배를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리니 황홀
하여 병풍 속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사(辭 강지수사(江之水辭))에,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데, 목난 배를 중류에 띄웠구나.
드높은 피리 가락 노래 소리, 손님을 맞아 잔 드리네. 혹은 뛰는 비단 잉어며 날아오르는 흰 갈매기.
먼 개펄에 연기는 자욱, 언덕에 풀은 더북더북. 철 경치 바라보고 즐겨 돌아갈 줄 잊고 서성대네. 햇살이 서쪽으로
달리고 물은 가고 안 머무르네. 기뻐 즐김이 얼마던가, 내 마음속에 시름 품네. 아아, 젊음이 두 번 오지 않으니,
늙음이 다가오려는데 무엇을 구하리. 벼슬은 우연한 것, 부귀는 뜬구름. 군자가 소중히 여기는 바는 의(義)뿐,
만고천추에 이름이 남는 것. 술 한 잔 들어 권하노니, 우리도 옛사람 높은 자취를 도모해 보세." 하였다.
○ 고려 김인존(金仁存)의 시에, "긴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물이 하늘을 비쳤는데, 대동루(大同樓) 위에 벌어진
화려한 잔치. 맑고 화창한 햇빛은 장막 틈으로 새어들고, 나부끼는 향연(香煙)은 관현(管絃)에 뜨네. 한 줄기 긴
강은 맑아 거울인 듯, 두 줄 수양버들은 멀리 연기로고. 을밀대(乙密臺) 앞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스스로 천년
전 일을 징험하며 장래를 상상하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나루로 전구(前驅)가 검(劍)을 끼고 건너니, 회오리바람이 땅을 말아 새벽 모래를
날리네. 찬 수염엔 싸늘하게 고드름이 매달리고, 병든 눈은 흐릿흐릿 눈[雪]에 어지럽네. 고향 생각에 구름을
바라보니 더욱 꿈틀거리고, 나그네 발길은 기슭을 따라 몇 번이나 비스듬한고. 저 건너 수풀 사이에 푸른 주기
(酒旗)가 펄럭이니, 마을이 분명 있어 술을 사서 마시리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기자(箕子)의 유허(遺墟)에 땅이 평평한데, 큰 강이 서쪽으로 꺾여 외로운
성(城)을 앉았구나. 뽀얀 물결은 아득히 하늘까지 이어졌고, 모래의 물은 깨끗이 밑바닥까지 해맑아라.
온갖 냇물을 받아들여 항상 곤곤히 흐르고, 온갖 형상을 비쳐 다시 아름답구나. 넘실넘실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뜻은, 바로 우리 왕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인 듯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대동강의 넓은 물이, 얼어 붙어서 구슬을 깐 듯. 빙빙 둘러 멀리 바다와 통하고, 구불구불
가까이 성을 둘렀네. 갈 때에 미끄러운 건 괜찮아도, 찢어질 때 소리가 무서워라.
언덕을 건너면 다 평평한 땅[平壤], 고을 이름이 편안해서 좋아라."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천서(天書)를 받들고 새벽에 대동성(大同城)을 나가니, 손님을 보내는 누선(樓船)이 나루
어귀에 비껴 있네. 녹수(綠水) 청산(靑山)은 그림에 둘 만하나, 한화(閑花) 야초(野草)는 이름도 모를씨고.
화려한 잔치에 더디더디 마시고자, 돛대를 먼저 천천히 가라 하네. 경개가 좋다 유련(留連)하여 사절(使節)을
늦추리, 또 말[馬]을 달려 앞길을 서두르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물결이 집채 같고 빗방울이 주먹만한데, 일행이 강 머리에 화선(?船)을 대었네.
지척 누대(樓臺)는 날아도 못 오르네만, 심상한 시주(詩酒)는 서로 어울려 노는 버릇. 나그네 길 3천 리를 저만큼
버려두고, 부생(浮生)을 5백 년으로 어즈버 셈쳐보세. 어쩌면 어룡(魚龍)이 일제히 뛰어 일어나서, 운무(雲霧)를
홱 쓸어내어 푸른 하늘을 볼꼬."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평양 외로운 성(城)에 새벽길을 떠나니, 화선의 북소리 둥둥, 봄날이 화창하네.
새 나는 저쪽에 구름이 다하니 청산이 나오고, 나루의 밀물은 멀리 푸른 바다와 통하는구나. 임금님의 어지심이
온 천하에 같은 것 기쁘거니, 이 몸이 타향에 와 있는 줄 모르겠네. 술잔을 들어 자꾸 권하지 마소, 사보(四牡)
동풍에 갈 길이 아득하이."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상국(上國)에서 조서(詔書)를 반포하니, 먼 지방이 근신(近臣)을 영접하네. 화선(?船)이
비껴서 건너기가 멀고, 화려한 잔치에 연달아 술잔을 드네. 언덕의 버들은 연기와 어울려 자욱하고,
강 꽃은 비를 띠어 새로 피었네. 시를 지어놓은 것들을 보니, 모두 다 내를 건널 사람들."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구름 같은 추종(騶從)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성을 나오니, 성동(城東) 지척에 한 강이
가로질렀네. 비단 자리에 술은 중조(中朝) 사신에게 권하고, 부채[扇]에 쓰는 시는 내한(內翰 한림학사(翰林學
士))의 이름을 머무르네. 멀리서 오는 물은 은하수에서 떨어지는 듯, 채주(綵舟)는 마치 그림 속에서 가는 양.
풍광(風光)이 모두 시흥(詩興)을 둘 만하거니, 술잔 앞에 춤추는 소매는 무엇하료."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패수(浿水)가 넘실넘실 옛 성을 둘렀는데, 강 건너 멀리 푸른 산이 비꼈구나.
안동도호(安東都護)는 한갓 묵은 자취, 파로장군(破虜將軍 이세적(李世勣))은 부질없이 이름만 남았네. 경치가
좋으면 가는 곳마다 즐김이 괜찮으리, 배를 띄우며 애오라지 봄놀이를 대신하네. 시를 써둔 이가 모두 중조(中
朝)의 사신들, 이 나라 사람들이 응당 그 경중(輕重)을 알리." 하였다.
○ "부벽루(浮碧樓) 앞을 두 번째 지나니, 황황(煌煌)한 용절(龍節)이 강가를 비추누나. 햇빛이 뚫고드니 물결
거품이 부서지고, 빗발이 몰아오니 이내[嵐] 기운이 많구나. 괴석(怪石)이 울퉁불퉁 지주(砥柱)처럼 솟아 있고,
영원(靈源)은 구불구불 은하수에 닿아 있네. 전조(前朝)에 전쟁하던 무궁한 한(恨)은, 모두 다 봄바람 따라 뱃노래
에 들어올 뿐." 하였다.
○ "높이 시를 읊으니 물밑의 용(龍)이 놀란 듯. 자리를 가까이하여 천천히 마시니 조용도 하네. 누선(樓船)이
흔들흔들 뽀얀 물결을 일으키니, 마치 미불(米? 북송의 화가)의 서화방(書?舫)을 탄 듯. 모래 위에 마주 섰던 두
마리 들 거위가, 깜짝 놀라 곧바로 운산(雲山) 옆으로 날아 가누나. 주인이 손님을 사랑하여 멀리 마중하여,
비단 자리에 거문고 뜯고 피리를 부네. 새파란 강물이 마치 봄 포도주 고인 듯, 취하여 보니 두 볼에 홍도색이
나네. 노성(魯城)의 산빛이 구름 연기에 이어져 있는데, 그 속에 아리따운 신선도 많다네. 따라갈 길이 없어
공연히 한바탕 웃노니, 신선을 배움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 만할까. 구중(九重) 깊은 곳 광명궁(光明宮)에도,
환패(環佩)가 또한 뭇 신선과 같다네. 인생이 천지간에 맘대로 가고 머무를지니, 해외(海外)를 좋게 여겨 중주
(中州)를 마다하랴만, 그대의 영주(瀛洲)에서 9곡(斛) 명주(明珠) 주는 것 감사한데, 이별에 임해서 못 갚고 감이
부끄럽네. 내일 아침 작별하고 가면 아득한 하늘, 말[馬] 앞의 지나는 길은 양의 창자와 같으리.
하룻밤 상사몽(相思夢)에 머리가 모두 세리, 높디높은 봉황산(鳳凰山)에 푸르디푸른 압록강."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새벽 바람이 목란(木蘭) 배로 불어 오는데, 돛대를 의지하여 술잔을 멈추고 푸른 강을 바라
보네. 물가의 나무는 연기를 띠고 나루에 늘어섰고, 어부(漁父)의 도롱이는 비를 맞으며 낚시터에 서 있구나.
얼음 같은 소반에 회(膾)를 써니 은실이 가늘고, 돌솥에 차를 달이니 눈 같은 물결이 번득이네.
벌써 전구(前驅)에게 떠날 채비 분부했으나, 술 한 병 더 마시고자 주인을 위해 머무르노라."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패강(浿江)이 대관절 어떠하뇨. 한 줄기 검푸른 빛이 떠 있네. 배와 수레는 가벼이 오락
가락하지만, 물고기랑 조개는 모를 것이 많네."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강물이 성곽을 감돌아 흘러 끊어진 산으로 흘러 들어가네. 떼[?]를 타고 근원을 찾으려
하니, 어디가 근원인지 모르겠네." 하였다. 평양강(平壤江) : 부 서남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순안현(順安縣)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구진익수(九津溺水)와 합류한다.
박금천(薄金川) : 부 북쪽 9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줄기 빠른 내가 비로소 근원을 발한 곳은, 인가가 끊어진 유산(乳山)의 뿌리.
달고 서늘한 맛이 차(茶) 달이기에 알맞아, 괴롭게도 도성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길어가는구나." 하였다.
○ "한 물이 어디서부터 근원하였나, 유산 산 밑 흰구름 뿌리. 차를 달이느라 곳곳의 사람들이 길어가니, 오고가는
사람들이 온종일 떠들썩하네." 하였다. 백은탄(白銀灘) : 부 동북쪽 4리에 있다. 신증 당고의 시에, "강물이 넘실
넘실 흘러가는데, 이 여울에 흰 은[白銀]이 뜬다네. 나라의 금령(禁令)을 지켜, 내버려져 나루에 통한 것 아닌가."
하였다.
○ 사도의 시에, "저자에서 은 매매를 금하니 누가 앞 여울에 채웠나보다. 욕심 많은 사내는 눈여겨 보지 마소,
물 속에 두고 보기가 좋을 뿐." 하였다. 적교포(狄橋浦) : 부 서쪽 2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부 서쪽 사이현(沙伊峴)
에서 나와 평양강으로 들어간다.
양명포(揚命浦) : 부 서쪽 5리에 있다.
○ 고려 묘청(妙淸)의 난에 김부식이 적(賊)의 양식이 다하여 취할 만한 형편임을 알고 여러 장수들을 명하여
토산(土山)을 쌓아 올려 양명포를 건너질러 적성(賊城) 서남쪽 모퉁이에까지 이르렀다.
교인(僑人) 조언헌(趙彦獻)이 올린 계책에 의하여 대포 틀을 만들어 토산 위에 놓으니, 그 제도가 높고 커서 무게
가 수백 근이나 되는 돌을 날려 성루(城樓)를 맞추어 부수고 이어 화구(火毬)를 던져 불지르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토산은 높이가 8길이요, 길이가 70여 길이며, 넓이가 18길이었다.
○ 강종(康宗) 2년(1213)에 포구 물 속에서 큰 독만한 돌이 저절로 육지로 나와 1백 20보(步)쯤을 다녔다.
연포(燕浦) : 부 남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부 동쪽 당동(唐洞) 소지(召池)에서 나와 구진익수로 들어간다.
마탄(馬灘) : 부 동쪽 40리에 있다.
○ 묘청의 무리가 졸병들을 뽑아 훈련시켜 관군을 막아 지킬 계책을 하니, 김부식이 후군(後軍)이 적고 약함을
염려하여 밤에 보병과 기병 1천을 보내 병력을 증강하였다. 적이 이를 모르고 첫새벽에 마탄 자포(紫浦)를 건너
곧바로 후군을 찌르니, 중 관선(冠宣)이 응모(應募) 종군하여 갑옷을 입고 큰 도끼를 메고 앞서서 나와 적 10여
명을 쳐 죽였다. 관군이 승세를 타 크게 격파하니, 적이 모두 서로 짓밟으며 강으로 달려가 빠져 죽었다.
남포(南浦) : 옛 이름은 당포(唐浦)이며, 부 남쪽 5리에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비 갠 긴 둑에 풀빛이 진한데, 남포에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 건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하거니."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비가 지나간 긴 강에 새벽 기운이 맑은데, 해가 비쳐 옥거울인 양 사람을 환히 비추누나.
바위와 물결은 무슨 일로 다투는지, 서로 만나면 그저 성나 꾸짖는 소리." 하였다.
○ "두 돛대 두둥실 강물은 맑은데, 먼 산이 그린 눈썹인 양 분명하네. 술 한 병에 취하여 안 돌아가고 있노라니,
모랫가에 썰물 지고 갈매기는 우짖네." 하였다. ○ 호경(鎬京) 승지(勝地)에 좋은 경치 많다 해도, 구경하며 놀기
에는 성(城)을 띤 이 강물이 난 좋아라. 처음엔 돛을 달고 배 가는 대로 맡겼더니, 문득 술에 취해서는 물결대로
따라가네. 노란 꾀꼬리 우는 곳에, 이 몸이 두 공부(杜工部)인가, 흰 해오라기 날아가니, 내사 장지화(張志和)로세.
연못가에서 어부(漁父)가 웃을까 염려되나, 주안(朱顔)에 곤드레만드레 취하기를 사양치 마소." 하였다.
○ 최해(崔瀣)의 시에, "짙었다 묽었다 운연(雲煙)이 좋은데, 갔다가 왔다가 나그네도 많으니. 사람들 못하는 소리
하려고 한껏 애쓰다가 갈 길에 몰려서 노래를 못 이루네." 하였다.
○ 고려 형군소(邢君紹)의 시에, "강 속의 늙은 돌이 연파(煙波)에 잠겼고, 성 위 거친 대(臺)에 풀 나무가 우거졌네.
옛것을 좋아하는 나그네 와서 무엇을 느끼는가. 황하(黃河) 한 곡조 옛사람의 노래라." 하였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 낚시터 푸른 나무엔 봄 그늘이 엷고, 강 위 푸른 산엔 저녁 빛이 짙네. 물 한가운데
사람 있는 듯 원근을 모르겠는데, 석양 어디서 죽지가(竹枝歌)를 부르는고." 하였다.
○ 김종서(金宗瑞)의 시에, "임 보내는 강변에 이별의 한이 많으니, 관현(管絃)도 처량히 끊겨 노래를 이루지 못
하누나. 하늘이 풍백(風伯)을 시켜 깃발을 막으니, 하루 저녁 대동강에 늦은 물결 일어나네." 하였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강가에 눈이 녹아 강물이 많아졌는데, 밤이 되어 들리는 죽지가 소리.
그대와 이별한 뒤 무한한 생각, 천리의 봄 마음을 푸른 물결에 보내네." 하였다.
구진익수(九津溺水) : 부 남쪽 10리에 있는데, 일명 마둔진(麻屯津)이라고도 한다.
석포(石浦) : 부 서쪽 11리에 있다. 그 서쪽 기슭에 바위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장고천(長鼓川) : 부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이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대정(大井) : 부 남쪽 30리에 있다. 우정(牛井) : 부 동쪽 2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두 우물에 용이 있다."고
하는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
문정(文井)ㆍ무정(武井) : 모두 구제궁(九梯宮)터 안에 있는데, 동명왕(東明王) 때에 판 것이다.
능라도(綾羅島) : 둘레가 12리로 백은탄(白銀灘) 북쪽에 있다. 신증 당고의 시에, "꽃다운 물가 10여 리에, 능라
(綾羅)가 찬란히 섬을 이루었네. 내 어찌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들 위하여 기저귀를 만드는 일 없으랴." 하였다.
○ 사도의 시에, "이미 금수산(錦繡山)이 있고 다시 능라도를 보건만, 동국 사람이 사치함을 삼가 의상엔 흰빛이
많네." 하였다. 두로도(豆老島) : 둘레가 21리로, 부 서남쪽 10리에 있다.
독발도(禿鉢島) : 둘레가 19리로, 부 서남쪽 12리에 있다. 두단도(豆段島) : 둘레가 6리로, 부 서남쪽 10리에 있다.
이로도(伊老島) : 둘레가 23리로, 부 서남쪽 35리에 있다.
벽지도(碧只島) : 둘레가 22리로, 부 서남쪽 25리에 있다. 보음통지(甫音筒池) : 부 남쪽 20리에 있다.
율사지(栗寺池) : 부 동쪽 30리에 있다. 흘이방지(訖伊方池) : 부 서쪽 40리에 있다.
일영지(日影池) : 함구문(含毬門) 안에 있다. 월영지(月影池) : 함구문 밖에 있다.
도영지(倒影池) : 풍월루(風月樓) 북쪽에 있다. 장흥지(長興池) : 다경문(多景門) 북쪽에 있다.
계림지(桂林池) : 추양대(秋陽臺) 서쪽에 있다. 대설지(大舌池)ㆍ소설지(小舌池) : 모두 보통문(普通門) 안 서쪽에
있다. 가물 때 키[箕]를 씻으면 비가 온다.
토산 숭어ㆍ조개ㆍ백부자(白附子)ㆍ우여량(禹餘粮)ㆍ운무(雲毋)ㆍ자기(磁器)ㆍ삼ㆍ실ㆍ웅어[葦魚]ㆍ면어(綿魚)ㆍ
굴ㆍ소가리[錦鱗魚].
성곽 내성(內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만 4천 5백 39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문이 6개인데, 동은 장격(長慶),
서는 보통(普通), 남은 함구(含毬), 북은 칠성(七星), 정동은 대동(大東), 정남은 정양(正陽)이라 이른다.
우리 태종 6년(1406)에 고쳐 쌓았다. 외성 : 당포(唐浦) 위에 있는데, 돌로 쌓은 것은 둘레가 8천 2백 척이고, 흙
으로 쌓은 것은 1만 2백 5척이요, 모두 높이가 32척이다. 두 문이 있는데, 남을 차피(車避), 서를 다경(多景)이라
한다. 지금은 다 무너졌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성은 곧 기자 때에 쌓은 것이다."고 하나 연대가 하도 멀어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고려 태조 5년(922)에 “비로소 서도(西都)의 재성(在城)을 쌓아 모두 6년 만에 끝냈다."고
한 것이 아마 바로 이 성인 듯하다. 주관 육익(周官六翼)에 이르되, "재(在)는 우리말에 견(? 이랑)이다." 하였다.
봉수 부산(斧山) 봉수 : 북쪽은 순안현(順安縣) 독자산(獨子山)에 응하고, 남쪽은 작약산(作藥山)에 응한다.
작약산 봉수 : 부 서쪽 14리에 있다. 남쪽은 솟당점(所叱堂岾)에 응하고, 북쪽은 부산에 응한다.
솟당점 봉수 : 부의 성안에 있다. 남쪽은 획사산(?寺山)에 응하고, 북쪽은 작약산에 응한다.
획사산 봉수 : 부 남쪽 26리에 있다. 남쪽은 중화군(中和郡) 운봉산(雲峯山)에 응하고, 북쪽은 솟당점에 응한다.
불곡(佛谷) 봉수 : 부 서쪽 1백 리에 있다. 북쪽은 영유현(永柔縣) 대선곶(大船串)에 응하고, 남쪽은 마항(馬項)에
응한다.
마항 봉수 : 부 서쪽 96리에 있다. 북쪽은 불곡에 응하고, 남쪽은 가막(加幕)에 응한다.
가막 봉수 : 부 서쪽 98리에 있다. 북쪽은 마항에 응하고, 남쪽은 철화(鐵和)에 응한다.
철화 봉수 : 부 서쪽 99리에 있다. 북쪽은 가막에 응하고, 남쪽은 증산현(甑山縣) 토산(?山)에 응한다.
궁실 영숭전(永崇殿) : 부의 성안에 있는데, 우리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전(殿)은 바로 고려 장락궁(長樂宮)
의 옛터이다. 고려의 숙종(肅宗)과 예종(睿宗)이 매번 서경에 행행(行幸)할 때마다 장락궁에서 뭇 신하들과 잔치
하였다.
○ 이지저(李之?)의 시에, "대동강 물은 유리처럼 푸르고, 장락궁 꽃은 비단마냥 붉구나. 옥연(玉輦)의 한 번 놀이
가 일을 좋아함이 아니라, 태평 시절의 좋은 경치를 백성들과 함께 함이로세."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아침 저녁 재관(齋官)이 자황(?黃 황적색(黃赤色)의 임금의 어복(御服))께 배알하니,
비궁(?宮)이 맑고 고요한데 수침향(水沈香)을 사르네. 기봉(箕封) 천년 조선 나라에, 삼한(三韓)을 통일한 성조
(聖祖) 임금이시여. 팔채(八彩)처럼 상서로운 구름은 화악(華岳)에 비꼈고, 중동(重瞳)처럼 상서로운 해는 부상
(扶桑)을 비추시네. 홍도(鴻圖)가 길이 굳어 후손에게 드리우니, 금지옥엽(金枝玉葉)의 복록(福祿)이 창성하리로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원묘(原廟)가 깊고 엄숙하여 터가 아늑한데, 푸른 소나무 문에 오색 구름이 둘러있네.
강물이 넘실넘실 임금님 은택을 생각하게 하고, 천일(天日)이 환하시니 성인(聖人)의 얼굴인 줄 알도다.
궁궐 나무에 새가 우니 봄이 절로 늙었고, 금문(禁門)은 인적이 끊겨 낮에도 항상 잠겨 있네.
개국(開國)의 규모가 원대함을 길이 생각하면서, 재배(再拜)하고 돌아오니 산(山)에 가득한 한(恨)이여." 하였다.
대동관(大同館) : 즉 객관이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내가 압록강을 건너, 열흘 만에 평양에 이르니, 이곳이
조선의 서경(西京), 기자(箕子)의 유향(遺響)이 있네. 성 남쪽은 패수(浿水)를 임하여 구경할 만한 정대(亭臺)가
많은데, 쾌재정(快哉亭)에 한 번 올라가면, 남은 것이 한눈에 보이네. 새벽에 얼음을 밟고 지나가, 20일 만에 왕경
(王京)을 다녀왔네. 관반(館伴)이 정부의 고관으로 도량이 활짝 트인 사람, 나를 위해 놀이 날짜를 정하고 미리
떠들지 말라 경계했네. 관찰사가 수고로이 나를 맞아 화방(?舫)에 소연(小宴)을 차렸네. 이윽고 강을 건너서 성안
에 들어가 다시 수레를 타고, 비로소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의자에 앉으니 자리가 널찍하네. 덕암(德巖)이 그 밑
에 있는데, 벼랑엔 무성한 풀 나무들. 이 정자가 꼭대기에 있어 몇 걸음 앞에 강물이 굽어보이는데,
마치 비단을 펄펄 날리는 듯, 몇 자 몇 길인 줄 어이 헤아리리.
찬 얼음이 아직 다 녹지 않아, 해에 비쳐 날로 더 번쩍이는데, 신짝만한 고기잡이 배들이 그 위에 둘셋씩 떠 있고,
고기들이 물 속에서 나와 큰 놈 작은 놈이 그물에 걸리기도. 등림(登臨)에 흥이 미진하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먼 생각을 가지기도. 수레를 몰아 동문(東門)을 나서 마음껏 경치를 탐방했네.
조천석(朝天石)이란 큰 돌엔 아침 저녁 물이 출렁거리고, 가고 또 가 을밀대(乙密臺)에 올라가니, 높은 다락에 현판
이 보이는데, 북으로 금수산(錦繡山)을 베니, 이 산이 홀로 우뚝하였네. 굽어보니 강물이 두 갈래로 갈려 제비 꼬리
와 자못 비슷한데, 물가 모래 옆에 초가가 보이고, 어부의 노래가 처량히 들리네. 주인이 술 잔치를 벌였기로,
내가 반나절을 머물다가, 해질녘에 산에서 내려오니, 마음과 눈이 모두 활짝 트였네. 이번 놀이에 얻은 기관(奇觀)
을 돌아가 친구들이게 자랑하리라." 하였다.
청화관(淸華館) : 대동관 남쪽에 있다. 서윤(庶尹) 임중(林重)이 중수(重修)하고, 성임(成任)은 편액을 쓰고, 성현
(成俔)이 기(記)를 지었다.
누정 을밀대(乙密臺) : 금수산 꼭대기에 있는데 평탄하고 앞이 탁 틔었다. 을밀대라고 부르며, 또 사허정(四虛亭)
이라 일컫는다.
○ 김극기의 시에, "물을 벤 높디높은 조월대(釣月臺), 크고 작은 배들이 몇몇이 감돌아 가는고. 신선이 하루 아침
에 학을 타고 돌아간 뒤, 모래 위에 새들만 오락가락하누나."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높디높은 금수산에 을밀
이란 대가 있네. 깊은 바위 속을 굽어보니, 큰 자라와 악어의 집인 듯."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금수산 꼭대기에 손바닥처럼 평평한 한 대(臺). 아마도 하늘 위의 신선이 바람을 타고 이따
금 내왕할 듯." 하였다. 부벽루(浮碧樓) : 을밀대 아래, 영명사(永明寺) 동쪽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경진년 초겨울 초하루에 상(上)이 서토(西土)를 순성(巡省)하여 백성들의 질고
(疾苦)를 시찰하고, 군사와 말을 엄숙히 하여 평양에 이르셨다. 평양은 옛 도읍이므로 왕명으로 평안ㆍ황해 두
도의 선비들을 모아 책문(策問)을 내어 문사(文士)들에게 두 도의 시무(時務)를 묻고,
어가(御駕)를 명하여 부벽루에 올라 강을 굽어보며 무사(武士)들의 활쏘기를 관람하고 과거를 보이셨다.
평안도 관찰사 조효문(曺孝門)이 절하고 청하여 헌수(獻壽)하니, 명하여 호종(扈從)한 뭇 신하들에게 차례로
술잔을 올리도록 하고 술을 부어서 돌리게 하셨다. 어제시(御製詩)를 쓰도록 명하니,
뭇 신하들이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자, 조효문이 그 시들을 현판으로 달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신(臣) 숙주를 돌아보며, '네가 이 전말을 기록하라.' 하였다.
신이 삼가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 신무(神武)로 난을 평정하고 문(文)으로 태평을 이루고 도 오히려 스스로 편안
히 계시지 않고 사방을 순시(巡視)하며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돌보시며, 언로(言路)를 열고 현준(賢俊)을 구하
기를 급급(汲汲)히 하여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
였다. 이에 또 누대에 등람(登覽)하사 먼 생각을 하며 높이 천고를 어루만지고 경물(景物)을 보고 회포를 일으켜
시로써 드러내 넓은 덕화로 세상을 어루만지니, 전성(前聖)을 따르는 뜻이 시의 자구(字句) 밖에 은연히 나타나
는지라, 어제(御製)가 찬란히 빛나 강산을 두루 비추고 빛을 만세에 드리워 바로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
(九疇)와 아름다움을 나란히 한다. 이것이 진실로 서토(西土) 사람들에게 천년에 한 번 있을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김부식의 시에, "이궁(離宮 별궁(別宮))에서 물러나와 승(勝)한 놀이에 참예하니, 무궁한 경상(景象)이 두 눈에
몰려드누나. 구름 가에 뭇 산들은 겹겹이 고개 들고, 성(城) 밑의 찬 강은 넘실넘실 흘러가네.
버들이 아득한 곳은 술 파는 뉘 집인가. 달이 휘영청 낚시 배는 어느 곳에 떠 있는가.
옛날 두목(杜牧)은 한가한 손[客]이 되길 바랐지만, 지금 나는 오히려 그것도 부자유할까 꺼리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오색 구름 속의 백옥루(白玉樓)가 땅 위에 날아왔으니, 임금 노시기에 적당하네.
북쪽 난간에 병풍처럼 열린 천 개 봉우리가 빼어나고, 동헌(東軒)엔 거울이 쏟아지는 듯한 강물이 흐르누나.
이끼 돋은 길엔 호석(虎錫)을 편안히 하였고, 버드나무 늘어선 물가엔 일찍이 용주(龍舟)를 띄웠네. 지금까지
어필(御筆)이 현판에 머물러 있어, 은하수처럼 환하게 멀리 어두운 데를 비추누나." 하였다.
○ "붉은 다락 한 채를 땅을 골라 지었으니, 깨끗하고 고운 풍경이 오경(吳京 금릉(金陵))과 비슷하네.
북쪽에 비낀 산은 금련(金蓮)이 피어난 듯, 남으로 흐르는 물은 옥자리를 깔아놓은 듯. 바위 사이의 푸른 이내는
선탑(禪榻)이 아득하고, 나루터에 붉은 해는 나그네 돛에 환하구나. 중국 사람이 곳곳에 감로(甘露)를 일컫지만,
이 맑은 다락에 견준다면 헛되게 이름을 얻었을 뿐." 하였다.
○ 조간(趙簡)의 시에, "태평의 임금님 수레 환경(還京)하려 하옵시니, 금벽(金碧)이 거듭 금수산에 빛나누나.
달을 뚫는 돛대 소리 탑(榻) 위에 들려오고, 공중에 걸린 등불 빛은 물결 사이에 떨어지네. 백은탄(白銀灘)의
낚시질 늙은인 고기와 함께 즐기고, 푸른 뫼의 선승(禪僧)은 학(鶴)과 함께 한가해라. 이 좋은 경상(景狀)을
어느 곳에 비할 거냐, 남빈(南賓)의 팔영(八詠)이 모두 무색하리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어제 영명사(永明寺)를 지나다가, 잠깐 부벽루에 올랐어라. 성은 비었는데 달이 한 조각
이요,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千秋)로다. 기린말[麟馬]이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天孫)이 어느 곳에
노니는고. 길게 휘파람 불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더라." 하였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흰 갈매기 날아드는 물결 위에 성긴 비 오고, 누른 송아지 서 있는 언덕 남쪽에 점점이
솟은 산들. 금수령에 날이 저물어 박쥐들 소란하고, 백은탄에 구름이 어두우니 해오라기가 한가하구나." 하였다.
○ "영명사 장경루(長慶樓)에서 중의 손을 끌고, 대동강 중류에 배를 띄웠네. 세상의 홍진(紅塵)이 못 이르는 곳에
있는데 창파(滄波)가 다한 끝까지 찾아가 보려네. 옛부터 현달(賢達)이 뉘라서 건재하다던가, 내가 취해 자려
하니 그대도 쉬소. 월암(月巖) 남쪽은 천하에 드문 경치, 조천석(朝天石)이 늙었는데 이슬비가 시름을 자아내네."
하였다.
○ 형군소(邢君紹)의 시에, "강 다락의 외로운 저[笛]가 용(龍)의 잠을 깨우는데, 취중의 풍류가 한낮의 신선이로세.
먼 나무가 구름인 양, 구름이 나무인 양, 높은 하늘이 물에 둥실, 물은 하늘에 둥실. 두 벼랑의 높고 낮은 언덕은
들락날락, 크고 작은 냇물은 만 갈래 파도의 근원이네. 저기 가는 일엽편주(一葉扁舟)의 손[客]은 어디로 가려는지,
아득히 석양이 지는 곳으로 혼자 가고 있느니."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좋은 날에 함께 백척루(百尺樓)에 오르니, 긴 강이 넘실넘실 동쪽에서 흘러오네.
예쁜 사람 아양떠니 반가우나 무엇하리. 노니는 사람 돌아오니 머리가 세려 하네. 바위는 멀리 돌아 형세 아직 안
끝나고, 물색(物色)은 생기를 띠어 쉴 줄을 모르누나. 시 읊다가 문득 용담(龍潭) 길을 회상하노니,
이곳이 아름다우나 객리(客裏)임이 서글프네."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영명산(永明山) 아래에 큰 강이 흐르는데, 화선(?船)으로 와서 부벽루를 찾았네.
바람 피리 한창 높고 날은 저물려는데, 아득한 연파(煙波)가 시름을 자아내네." 하였다.
○ 정포(鄭?)의 시에, "온종일 등림(登臨)하여 돌아가길 잊고서, 다락 앞의 물과 산을 욕심껏 구경하네.
물가에 서 있는 해오라기는 가랑비 속에 또렷하고, 난간에 의지한 사람은 그림 속에 있구나. 온 하늘에 거침이
없으니 마음이 탁 트이고, 만 경치가 다투어 당겨 눈이 바쁘구나. 누가 봉호(蓬壺 봉래산)를 이 땅에 옮겼는고,
나도 바로 풍골(風骨)을 동안(童顔)으로 바꾸려네." 하였다.
○ 명 나라 장보(張溥)의 시에, "말[馬] 멈추고 한 번 패강(浿江) 다락에 오르니, 푸른 물결이 겹겹이 난간 밖에
흐르누나. 산빛은 부질없이 시객(詩客)의 한(恨)을 남겼는데, 국화가 도리어 노인의 머리에 꽂히었네. 같이 노는
영걸(英傑)들은 정이라도 두텁건만, 이 몸은 게을러서 취하면 곧 드러눕네. 사해(四海)가 한 집안인 임금님 은총
속에, 등림(登臨)에 여의는 시름을 적어서 무엇하리." 하였다.
○ 명 나라 주탁(周倬)의 시에, "높은 다락 백 자가 몇 해를 묵었는고, 난간 밖에 긴 강이 밤낮으로 흐르누나.
벽려(??)는 해가 깊어 돌 뿌리에 뻗었고, 바다가마우지는 고요한 낮에 여울 머리로 올라오네.
부여(扶餘)의 옛 땅은 지금도 그대로 있고,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은 오래도록 전해오네.
이 날에 등림하여 함께 유상(遊賞)하노라니, 눈앞에 가득한 고상한 흥치가 온갖 시름을 풀어주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사신(使臣)이 조서(詔書)를 반포하러 와 맑은 놀이를 즐기니, 모두 당금의 제일류
(第一流)라. 옥절(玉節)을 멀리 푸른 바다 위에서 찾고, 국화를 처음 패강 머리에서 보는구나. 인생이 술을 대하면
취하기를 사양치 말 것이, 객리(客裏)에 산을 대하면 쉬어야 하리. 지금은 바로 사방에서 성덕(聖德)을 노래하는
때, 구태여 등조(登眺)하여 잔시름을 일으키리." 하였다.
○ 육옹(陸?)의 시에, "외로운 배를 저녁에 대니 가까이 높은 다락, 다락에 오르고 싶어 다시 배를 버렸네.
풍물(風物)은 철 따라 슬그머니 때에 따라 고쳐지고, 강산은 일찍 고금의 놀이를 겪었네. 구름에 치솟은 나무들은
천 봉우리를 모았고, 기슭을 낀 복숭아 꽃은 한물에 흐르누나. 머리를 돌리며 아직 관람의 흥이 다하지 않았는데,
달 아래 피리를 부니 다시 머뭇거리네." 하였다.
○ 윤택(尹澤)의 시에, "층층 벼랑 위에 높은 다락이 험하다 이르지 말라, 마치 학을 타고 강물에 걸터앉은 듯.
들꽃은 색채를 날리며 봄뜻을 밝히는데, 달 아래 이슬은 빛을 매달아 나무 끝을 비추네. 상쾌한 바람 뜬 구름은
가랑비 온 뒤, 녹음(綠陰) 방초(芳草)는 어느 때에 그치랴. 다락 앞의 안계(眼界)가 거칠 것이 없으니,
산과 구름이 평평하여 시름이 안 보이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좋은 날에 안장을 연(聯)하여 성(城) 밖에 노니니, 산 앞의 커다란 다락이 긴 강을 굽어보네.
곱디고운 먼 나무는 평탄한 들 밖이요, 둥실둥실 쪽배들은 옛 나룻가로다. 천년의 번화는 서로 갈마들어도,
사시의 풍경은 끝날 적이 없구나. 등림하여 동남쪽을 한참 서글피 바라보니, 아득한 뽀얀 물결에 나그네 시름을
부쳐 보내네."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뾰죽뾰죽 강 다락 열두 난간에, 술잔 앞에 주객이 함께 얼굴을 펴누나. 운방(雲房)에
좌선하는 중은 선심(禪心)이 깨끗하고, 석동(石洞)에 신선이 돌아가니 학의 등이 한가하네. 술자리를 파하자 사람
들은 청작방(靑雀舫)으로 올라가고, 밀물이 돌아가니 갈매기들은 푸른 잔디 물구비[碧莎灣]로 모여드네.
좋은 산과 승(勝)한 물을 두루 다 구경했으니, 작별한 뒤에 꿈에 아니 오고 갈까."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강물이 푸르고 깨끗하여 속속들이 봄인데, 숲은 우거져 봄 물에 부각되었구나.
뭉쳤던 신기(蜃氣)가 사르르 흩어지니, 열두 난간이 씻은 듯 환해지네. 물 속에 새파란 하늘이 거꾸로 잠기고,
천궁이[?蕪] 물가에 따스한 향기가 풍기네. 푸른 구름이 부유스름, 새파란 연기가 잠겼는데, 사람은 유리 거울
속에 앉았는 듯. 청성(靑城)의 선객(仙客)이 동국(東國)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자옥(紫玉) 피리를 소매에 넣고
푸른 무지개에 올라, 왼손으로 부구(浮丘 상고의 선인(仙人))를 부르고 오른손으로 관윤(關尹 노자(老子)의 제자
인 윤희(尹喜))을 부르며, 술이 얼큰하자 풍이궁(馮夷宮)에 북을 땅땅 치네. 풍이가 취해 누워 불러도 깨지 않고,
집에 가득한 교주(蛟珠)들이 남빛 옷 입고 노래할 뿐. 내일 아침에, 함께 놀던 사람들을 회상하여 바라보면, 한
조각 강산이 꿈속의 경치 같으리." 하였다. 자주(自註)에, "사신 일행이 평양으로 돌아오자 부벽루에서 연회할
제, 다락 이름을 지은 뜻에 의하여 온이체(溫李體 만당(晩唐) 시인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의 시체)를
본받아 단사(短詞)를 지어 흥(興)을 적었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대동강 위에 백척이 되는 다락, 다락 앞에 강물이 해마다 흐르네. 천오(天吳 수신(水神))가
잠을 실컷 자고 나서 싸늘한 벽초(碧?)를 입고, 일어나 창규(蒼?)를 파고 다락 밖에 와 노는구나.
새파란 깃발이 흔들흔들 안개를 떨치며, 꽃다운 풀과 나무들이 주위에 둘러섰네. 화란(?蘭)이 구불구불, 주렴(珠
簾)이 깊은데, 맑은 빛이 겹겹이 흩어졌다 되 깔리네. 광릉(廣陵)의 광객(狂客)이 하늘 가에 오니, 몸에 떨친 건
예전에 월궁(月宮)의 계수나무에 물들인 나의(羅衣). 손에 유리 병을 들고 포도주를 내라고 소리치네.
천오(天吳)여, 천오여, 허물하지 마소. 마시면 한 번에 3백 잔을 마셔야 하느니. 술이 얼큰하자 시험삼아 붓을
달리니,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귀신이 노한 듯하구나. 천오도 놀라 도망쳐 부를 수가 없으니, 웃으며 청산을 가리
키며 돌아갈 길을 물을 수밖에."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훈훈한 바람에 석양 다락을 의지하니, 강물이 산 빛을 적셔 새파랗게 흐르누나. 초목을 모두
천지의 은택을 머금었는데, 강산엔 고금의 시름이 끊이지 않네. 마음은 상국(上國)에 매달려 꿈조차 수고로우나,
몸은 타향에 있어 장한 놀이를 이야기하누나. 내일 아침 머리를 돌리면 곧 묵은 자취, 운초(雲?)여, 아낌없이 한번
더 묵어가세."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화란(?欄) 주동(朱棟)이 깊고 맑은 강물을 굽어보는데, 산이 빙 둘러 있고 두 언덕이 평평
하구나. 만이랑 물결 찬 빛이 항시 떠 있고, 발[簾]에 가득한 파란빛은 걷어도 되 생기네. 청천(晴川) 방초(芳草)
는 시를 짓기 어렵고, 야도(野渡) 고주(孤舟)는 내 감정을 자아내네. 양부(兩部)의 놀이 지금은 적막한데,
오직 가경(佳景)만 남아 서경(西京)을 장하게 하는구나."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백 척이나 되는 높은 다락이 강 바람을 의지하여, 열 길 홍진(紅塵)을 저 멀리 떠나있네.
기러기는 연기 빛을 띠고 변방 밖으로 비껴가고, 해는 노을빛에 떠서 창문 동쪽으로 올라오네. 백 편 시부(詩賦)에
가슴이 탁 트이고, 일만 골짜기 구름 연기에 안계(眼界)가 텅 비었네. 취해 난간을 두드리며 서북쪽을 바라보니,
오색 구름 엉긴 곳이 바로 대궐일세."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높은 다락 층층한 처마가 담쟁이 덩굴 속에서 솟아났으니, 한 번 올라 바라보매 느낌도
많을시고. 먼 봉이 우뚝 솟았으니 낭관(郞官)의 붓인가, 끊어진 언덕이 가로질렀으니 직녀(織女)의 북[梭]이로
구나. 강 비는 추위를 빚어 나무 끝에 오고, 영(嶺) 구름은 어둠을 나누어 바위 가에 떨어지누나. 등림(登臨)의
흥이 유유(悠悠)하여 다하지 않아 또 목란주(木蘭舟)에 올라 뱃노래를 듣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높은 다락이 푸른 물을 굽어보며 바로 을밀대(乙密臺)를 바라보네. 가다가 거마(車馬)가 적을 때면, 밝은 달이
스스로 오고 갈 뿐."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다락이 금수산(錦繡山)을 의지하여, 패강 물을 면했구나. 그림자가 벽파(碧波) 속에 둥실
뜨니, 주란(朱欄)이 거울 속에 떨어지네." 하였다.
풍월루(風月樓) : 부 안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금상(今上) 19년 가을 7월에 개성 윤(開城尹) 임공(林公)이 안주 만호(安州萬戶)가
되어 얼마 안 지나 군정(軍政)이 모두 잘 되었으므로, 그해 겨울 11월에 서경 부윤(西京府尹)으로 승직하여 관내
를 순찰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성을 어루만져 위엄과 은혜가 더욱 드러났으므로, 다음 해 2월에 밀직부사
(密直副使)로 진배(進拜)되었으니, 대개 그 공적을 포상한 것이었다.
그가 서경에 재임할 때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지고 사람들이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므로, 이에 5월 초하루에
영선점(迎仙店) 옛터에 땅을 골라 다락 5칸을 짓고 단청(丹靑)을 칠해 5달 만에 준공하니, 바라보매 날아갈 듯
하였다. 동남쪽으로 뭇 산이 바로 자리 밑에 있는 듯하고, 그 앞에 다시 강물이 있어, 연못을 좌우로 파서 연꽃을
심으니, 올라 구경하는 승경(勝景)이 부벽루와 막상막하인데 화려함은 그보다 나았다.
앞서 상당 승지(上黨承旨) 한맹운(韓孟雲) 군의 글씨로 풍월루(風月樓)란 석 자를 크게 써서 걸고 한산(韓山)
이색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대가 내 다락의 기문을 아낌은 내가 내 다락을 이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나, 지금 내가 흥(興)을 부침이 얕지 않으니, 그대가 그 뜻을 부연해 주겠는가.' 하니, 내가 말하기를, '공의
높은 식견과 넓은 도량은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 다락을 그렇게 이름 지음이 과연 마땅하다.
대저 바람은 오되 방향이 없고 달은 다니되 자취가 없으니 넓고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다. 도(道)도 이와 같아 비록
그것이 태허(太虛)에 있을 때엔 본디 형상이 없으나, 드러나게 하는 것은 오직 기(氣)의 작용이다. 이 때문에 크게
는 천지가 되고, 밝게는 일월이 되고, 흩어져서는 풍우와 상로(霜露)가 되고, 우뚝 솟아서는 산악(山岳)이 되고,
흘러서는 강하(江河)가 되고, 질서가 정연해서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인륜이 되고 찬란히 구비되어서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치구(治具)가 된다.
그것이 세도(世道)에 있어선 청명하면 다스려지게 되고 혼탁하면 어지럽게 되나니, 모두 기(氣)가 유형화한 것
이다. 하늘과 사람이 간격이 없고 감응이 어긋남이 없으므로 인륜이 무너지고 정교(政敎)가 폐해질 때엔 일월에
변(變)이 생기고 풍우가 재난이 되며 혜성(慧星)이 날아 흐르고 산이 무너지며 물이 마르는 변고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가 어지러워지는가의 기틀은 인사(人事)를 살핌으로써 볼 수 있고, 잘 다스려지는
가 어지러워지는가의 상징은 바람과 달에서나 구하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 중원(中原)이 겨우 안정되어 사방에
근심이 없으니 이른바 다스려진 세상이다.
우리 국가가 한가한 때를 타 정사와 형벌을 닦아 백성과 만물이 풍족하고 편안하며 강산이 맑고 고와 가는 곳마다
음풍농월(吟風弄月)할 만한 곳이 아닌 데가 없다. 하물며 서경(西京)은 이 나라의 근원이 되어 서북을 공제(控制)
하고 인사(人士)들이 생업을 즐겨 기자(箕子)의 유풍이 있다. 또 이 다락은 한 부(府)의 승지(勝地)를 차지하여
손님들이 이르러 일헌(一獻) 백배(百拜)ㆍ투호(投壺)ㆍ아가(雅歌)를 할 때 바람이 불어와 몸이 상쾌하고,
달이 떠올라 정신이 맑으며, 좌우의 연꽃 향기로 정경(情境)이 유연(悠然)할지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그것이 이 태평성대의 사람이 된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익새가 거꾸로 날자 성인(聖人)이 《춘추(春秋)》에 쓰셨고, 소가 헐떡거리자 역사가가 썼으니,
세상을 경계함이 이처럼 지극하였다. 이것이 또 공이 은미한 뜻을 붙인 것인가. 천하와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와
함께 근심하는 자가 아니면 이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철 따라 좋은 경치에 정신이 팔려서 돌아가기
를 잊고 의(義)를 해치고 교화(敎化)를 손상시키는 것은 군자가 말하기 부끄럽게 여긴 바이니,
뒤에 오는 자가 오히려 삼가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평양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인데, 고려가 서경(西京)을
두었고 또 호경(鎬京)이라 일컬었으며, 뒤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다가 또 고쳐 평양부라 하였고,
본조(本朝)에 들어와 이름을 그대로 썼다. 부(府)가 서북 한 도(道)의 도회지로, 그 땅이 넓고 그 사무가 많으며
그 풍속이 순박하다. 번화하고 아름답기가 동방에 으뜸으로 이따금 신선의 자취와 신령스러운 유적이며 기특한
형상과 이상한 구경거리가 있어 전 시대 인물의 풍류를 상상할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진신(搢紳) 사대부로 벼슬
하는 이들이 모두 그곳을 즐긴다. 부(府)의 동북쪽 6, 7리에 다락이 있으니, 그 이름이 부벽이다.
다락이 가파른 벼랑 위에 있어 아래를 굽어볼 땅이 없는데 여러 승경(勝景)을 한 눈에 모두 볼 수 있으나, 사신들
이 사명을 수행하는 여가에 몇 걸음으로 갈 만한 곳이 아니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에 순문사(巡問使) 임후
(林侯)가 비로소 풍월루 5칸을 넓은 도회 가운데 세우니, 뭇 산이 둘러 있고 긴 강이 구불구불, 연못을 굽어보면
위 아래가 하늘빛이니 다락의 승경이 부벽루와 막상막하인데, 손님들의 관개(冠蓋)가 오면 문득 다락에 올라 경치
를 굽어보면서 주객(主客)이 술잔을 주고 받으며 조용히 스스로 흡족하니 다락의 승경이 또 부벽루보다 앞서 그
이름을 한 부(府)에 홀로 드날렸다. 다만 지은 지가 여러 해가 되어 자못 무너져 빠진 바가 있더니,
천순(天順) 계미년(1463)에 광산(光山) 김겸광(金謙光)이 감사(監司)로서 부윤(府尹)을 겸하여 개연(慨然)히 이를
중신(重新)할 뜻이 있어 재목을 모으고 대목을 시켜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현재 감사 오백창
(吳伯昌)이 후임으로 왔는데, 후(侯)는 일찍 문무(文武)를 겸한 재목으로 서북의 행정에 종사하여 그 요해처를
관장하다가 얼마 안 되어 들어와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가 나아가 이 도의 감사가 된 것이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 사랑하여 정사가 통하고 교화(敎化)가 행해지니 종래의 온갖 폐단이 모두
쇄신되었다. 이에 다락의 옛 터에 나아가 그 규모를 증대하여 가운데 대청을 세우니 넓고 툭 트이며 높고 환하며,
좌우에 협실(俠室)을 두고 협실 옆에 또 별실을 날개로 붙이니 그 큼직하고 청절(淸絶)함이 예전에 비해 더욱 장관
이라, 보는 자가 좋게 여겼다. 다락이 이뤄지자, 내가 마침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가 지나가니, 때는 바야흐로
7월 16일이라, 밝은 달이 하늘 한가운데 뜨고 연꽃이 만발하여 붉은 향내가 은은하고, 푸른 그림자가 한들한들하
는데, 난간에 기대어 고금(古今)을 생각하니 산천의 경치의 정채(精彩)가 전의 백 배였다. 후(侯)가 나에게 술잔을
주며 기를 청하는데, 대저 이 다락의 아름다운 경치와 다락을 이름한 뜻은 목은(牧隱) 선생의 기(記)에 자세하니
내가 다시 무슨 군말을 덧붙이랴.
내가 생각하건대, 산림이나 평지나 무릇 명승지는 바로 천지 조물주의 비장(?藏)인데, 혹시 천지 조물주의 비장을
드러내어 인물 풍류의 승상(勝賞)을 삼는 것은 천하에 구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악양루(岳陽樓)는 파릉(巴陵)의 유명한 다락이요, 등왕각(?王閣)은 남창(南昌)의 사치스러운 명각(名閣)이요,
황강(黃岡)의 죽루(竹樓)와 남주(南州)의 황학루(黃鶴樓)가 천하의 걸출한 누각이다. 그러나 당초에 창건한 자가
앞서 경영하기 시작하고 호사자(好事者)가 뒤에 중신(重新)하지 않았다면 천지 조물이 그 천기(天機)의 오묘함을
드러낼 길이 없어서 천지 사이에 인물 풍류가 혹 거의 없어지고 말았을는지 모른다. 이제 몇천 년 왕자(王者)의
옛 도읍인 평양에 풍월루라는 한 다락의 산천의 훌륭한 경치가 앞에서 이른바 여러 걸출한 누각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니, 후(侯)가 중신한 일이 또한 수고롭고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옛날에 등왕각이 중수되자 한퇴지(韓退之)가 기를 지었는데, 비록 퇴지의 그 재주와 그 어짐으로써도 자기의 문사
(文辭)가 삼왕(三王)에 열거되며 이름이 승지에 남게 됨을 영광으로 여겼다. 돌아보아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으로
서 이런 다락, 이런 승지에서 이름을 목은의 뒤에 잇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행이 아니랴. 그러므로 글이 서툴다고
사양하지 않고 즐겁게 쓰는 바이다." 하였다.
○ 동월(董越)의 기에, "풍월루는 조선 평양성의 동쪽 모퉁이에 있다. 앞에는 큰 거리를 굽어보고 뒤에는 못 물을
보며 인가와 객관(客館)이 동서에 마주 솟아 있으니, 한 번 바라보면 우뚝하여 마치 사람이 옷깃을 바로하고 용모
를 단정히 하고 단정히 앉아 있으매 비록 사면 사람들이 다리를 뻗고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있어도 그를 어지럽힐
수 없음과 같으니, 조선 서경(西京)의 첫째 가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서경에 정관(亭館)이 또한 많되 대개는 모두
산세를 따라 향배(向背)를 삼았으므로 그 이른바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을 겸하여 거두고 아울러
저축하여 아무런 장애가 없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데 이 다락은 홀로 이를
겸하여 가졌으니, 그 풍월이란 큰 편액이 다른 다락이 아니라 반드시 이곳에만 있음이 마땅하다.
무신년에 성천자(聖天子)께서 천자의 지위를 이음으로써 여러 나라에 널리 알릴 제, 내가 황문(黃門) 왕군(王君)과
함께 실로 조선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이 있어 2월 그믐날 길이 평양을 경유하게 되었으나, 그때에 달이 아직 밝음
이 생기지 않고 동풍도 그리 따스하지 못하여 비록 이 다락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경치와 사람이 어긋남을 가만
히 탄식하면서 한 번 오르지 않았었다. 3월 16일에 사명을 마치고 서쪽으로 돌아가는데 열흘 만에 평양에 이르렀다.
그때에 관반(館伴)인 이조의 허군(許君)이 다시 국왕의 교지(敎旨)를 받들어 나를 국경까지 배웅하다가 미리 서경
관찰사 성현(成俔)과 약속하고 배를 갖추어 나를 대동강 가에서 기다리고, 또 남쪽으로 배를 띄워 옛성에 들어가
기자(箕子)의 유적을 찾자고 청하였다. 드디어 닻을 풀어 이암(?巖)으로부터 패수(浿水)를 건너 차문루(車門樓)에
올라가 기자가 그었다는 정전(井田)의 구도(溝塗)인 직로(直路)로 불리는 것을 따라서 남문으로부터 들어가 몇 리
를 가서 이 다락에 이르니, 국왕이 벌써 미리 병조의 어 판서(魚判書)를 보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촛불을 두 번 갈고서야 상을 물리고 이조와 관찰이 또한 처소로 돌아간 뒤에 내가 황문과 함께 난간에 의지한 채
마음대로 둘러보고서 인하여 가만히 웃으며 말하기를, '이 다락을 풍월이라 이름 지은 것이 헛되지 않은가.
처음 내가 이곳을 경유할 때에는 경치와 사람이 이미 어긋났는데, 이번에 수레를 돌려 돌아가는 도중에도 풍우가
또 몰아치니, 이것은 조물주가 우리에게 적이 인색하여 비록 동방의 풍월일망정 또한 우리가 염치없이 취할까
염려함이 아닌가.
아아, 대저 광풍제월(光風霽月)을 가슴속에 간직한 자는 주자(周子)요,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돌아온 자는 정자
(程子)이다. 전철(前哲)의 유풍(流風)이 천고를 환희 보니 비록 뒤의 사람이 감히 그 울타리조차 바라볼 바가 아니
나, 청렴함은 마땅히 우러러 사모할 것이요, 뜻밖의 참소는 마땅히 경계해야 함은 또한 일찍이 유교(遺敎)를 받들
었으니, 이에 행하여 풍월을 저버림이 없기를 구할 것이다. 그런데 조물이 사람에게 오히려 바람과 달을 이다지도
인색하게 아끼니, 하물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좋은
밤에 귀로 들어도 소리를 이루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빛을 이루지 못함은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만 유감일 뿐만
아니라, 비록 이 다락에 있어서도 반드시 스스로 상음(賞音)을 얻지 못하여 한갓 그 맑고 밝아 사방으로 통함을
저버림을 슬퍼할까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서로 돌아보며 한 번 웃었다. 그날 밤에 다락의 동서의 곁채에서 침대
를 나누어 잤다. 다음 날 관찰이 이조를 통해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굳이 청하였다.
대저 우주는 내뿜는 기운으로써 만물을 고동(鼓動)시키고 밝은 달은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빛을 용납할 곳은
반드시 비추니, 만나는 바에 따라서 취하되 금함이 없고 쓰되 다하지 않는다. 전배(前輩)가 워낙 일찍이 무진장
으로 이름하였는데,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서로 어긋나서 정을 잊을 수 없으니 또한 한때의 일을 적을 뿐
이요, 있고 없음에 진실로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조는 맑숙한 인품이 사랑스럽고 관찰은 속이 빼어나고 문채가
있으니, 다 풍월에 저버림이 없을 분들이다.
두 분이 동으로 돌아가는 날에 다시 이 다락에 한 번 오르기로 약속한 만큼, 비록 우리의 상음(賞音)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망정 이른바 맑고 밝아 사방으로 통하는 데에는 또한 헛되지 않을 것이다.
다락의 창건과 명명(命名)의 연월은 동국의 도지(圖誌)에 갖추어 있으니,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되겠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거마(車馬)가 다니는 거리에 탁 트인 기루(綺樓), 등림하여 둘러보매 경치가 도리어 그윽하네.
바람이 버들 언덕에 오니 푸른 실이 춤추고, 달이 연꽃 못에 비추니 향기로운 안개가 떠오르네. 정전(井田)을 그었
던 땅에 교목(喬木)이 늙어 있고, 신선을 맞던 일은 가고 큰 강만 흐르누나. 지금은 옥연(玉輦)이 때로 순수(巡狩)
하시니, 여기가 과연 명도(名都) 중에도 상유(上游)임을 알리로다." 하였다.
○ 명 나라 임실주(林實周)의 시에, "사객(使客)이 등림하여 멀리 노는 회포를 위로하니, 만 그루 소나무가 둘러섰
는데 푸른 구름이 떠 있구나. 바람이 사좌(四座)에 오니 더위를 모르겠고, 달이 중천에 이르니 온통 가을인 듯.
푸른 연(蓮)은 향기를 풍기며 수면에 펼쳐 있고, 새 버들은 그림자를 흔들며 처마 끝에 하늘거리네. 난간에 의지했
다가 내일 중국으로 돌아가면, 응당 서경에 이 다락이 있음을 말하리라."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다락 앞에 연못을 팠으니, 보통 때에도 풍월이 족하거늘, 내가 마침 눈 갠 뒤에 오니, 경치가 더
한층 기절(奇絶)하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맑은 바람은 일정한 기약이 없고, 밝은 달은 뉘 능히 간섭하랴. 바람이 움직이니 연꽃 향이 날고,
달이 구르니 다락 그림자 거꾸러지네." 하였다. 망월루(望月樓) : 대동관 서쪽에 있다.
대동문루(大同門樓) : 권근의 기(記)에, "평양은 나라에서 가장 큰 진(鎭)이다. 사신들이 경유하는 곳이요 군사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 성이 무너져 없어졌으나 해가 오래도록 보수하지 못하였다. 그 문은 동쪽을 대동(大同), 남쪽을
함구(含毬)라고 하는데, 또한 모두 신축년의 병화(兵火)에 타버려 방위가 튼튼하지 못하니 진실로 염려할 만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1392) 가을에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이에 중추(中樞) 신(臣) 조온(趙溫)을 평양 윤(平壤尹)
에 임명하시니, 다음 해에 정사가 잘 닦이고 송사(訟事)도 공평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하였다.
그해 가을에 왕명을 받들어 비로소 옛성을 중수하고, 또 그 다음 해 봄에 새로 두 문을 만들어 가을에 이르러 준공
하였다. 공이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나에게 청하기를, '평양은 군민(軍民)의 사무가 복잡하고 풍속이 사납고 교만
하여 옛날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져 왔다.
내가 재주 없이 요행히 개국(開國)의 처음에 즈음하여 외람되이 중한 직책을 받들어 이곳의 관장(官長)으로 부임한
뒤 밤낮으로 마음을 오롯이 하여 방위를 튼튼히 하고자 하여 성(城)은 농한기에 쌓고 문은 중들에게 부역하게 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와 공사를 도와서 세 철에 완공하니, 문루(門樓)가 이미 장대하고 성벽이 이에 완전하여 비로소
번유(藩維)의 땅이 되었다고 일컫겠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아니요 오직 임금의 덕이니, 청컨대 그대는 이 일을 붓
으로 적어 문설주에 걸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중수(重修)한 유래를 알게 하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평양은 곧 고조선과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이다.
구주(九疇)와 천인(天人)의 학(學)과 팔조(八條)와 풍속의 아름다움이 우리 동방 몇천 년 예의(禮義)의 덕화(德化)
에 기초가 되었으니, 아아, 아름답다. 그러나 위만(衛滿)으로부터 고씨(高氏)를 지나는 동안 오로지 무강(武强)만
을 숭상한 결과 그 풍속이 크게 변하였고, 왕씨(王氏)의 세대에 미쳐서는 요(遼)와 금(金)과 원(元)이 국경을 접
하였기 때문에 되놈들의 풍속에 물들어 더욱 교만하고 사나워졌으니, 이는 마치 중국의 기산(岐山)과 풍(?)의 땅과
같은지라, 주(周) 나라에서는 그곳을 사용하여 인후(仁厚)한 교화를 일으켰고, 진(秦) 나라에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용맹스럽고 사나운 기운을 가지게 하였다. 대개 그 백성들의 성질이 온후하고 진중하며 고지식하고 정직하므로
선(善)으로써 인도하면 쫓아 감화되기 쉽고, 용맹으로 몰면 또한 족히 부강한 업(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명(皇明)의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여 지극한 정치를 나타내고, 우리 전하께서 정성으로 사대
(事大)하고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임하여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이란 이름을 회복했다. 그런데 이제 공이 총명하고
화락한 자질로 맨 먼저 중선(重選)을 입어 이 도읍의 윤으로 왔으니, 반드시 덕교(德敎)를 선양하여 백성을 선(善)
으로 인도하여 옛날의 교만하고 사납던 풍습을 크게 변하게 하여, 예의의 교화를 일으키고 그 풍속을 다시 순박히
하여 성세(盛世)의 유신(惟新)의 정치를 도움이 실로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니, 어찌 다만 성곽(城郭)의 견고함과
문루(門樓)의 웅장함이 옛날보다 나을 뿐이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대저 이 다락이 아래로 긴 강을 굽어보고 멀리 광야(曠野)에 임하여 아침 햇발과 저녁 달의 온갖
경치가 모두 난간 아래에 가리키고 돌아보는 사이에 모여 있으니, 반드시 멀리 거마(車馬)를 수고롭게하여 부벽루
에 오르지 않고도 한 쪽의 훌륭한 경치를 모조리 얻을 수 있겠다. 훗날 혹시 이 다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게 된다
면 마땅히 먼저 백성들을 위하여 황극(皇極)에서 편 말씀을 강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기자의 은택이 우리 동방에
점차 배어듦이 심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음을 알게 하고, 지금 천자께서 국호(國號)를 내려주신 은혜와
우리 전하께서 옛것을 회복한 덕이 실로 무왕(武王)이 기자를 봉하고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던 것과 똑같은 계책임
을 알게 하겠다. 또 백성들로 하여금 타고난 양심의 성품은 애당초 중화(中華)와 오랑캐, 예와 지금의 차이가 없는
것이니, 진실로 힘을 써서 황극의 가르침을 따르면 신인(神人)이 협종(協從)하고 자손이 길한 일을 만나 대동(大同)
의 뜻에 맞을 수 있음을 알게 하겠다. 후에 한두 동지와 함께 술잔을 잡고 바람을 쐬며 강산의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성정에서 우러나는 흥을 펴고, 또한 마땅히 공을 위하여 한 번 시를 지어 칭송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대동강 가에 우뚝 솟아 있는 누대(樓臺), 거친 연기 문에 자욱하여 낮에도 안 열리네.
나는 듯한 기둥이 구름에 솟아 별을 딸 만하고, 빈 창이 물에 가까워 달이 먼저 오는구나. 산이 병풍처럼 둘려 그늘
이 어울렸고, 나무가 발[簾]과 난간을 덮어 푸른 빛이 뭉쳐 있네. 지척에 두고도 한 번 오를 길 없으니,
다시 바다 밖에 봉래(蓬萊)를 찾으리라 말하겠나." 하였다. 신증 관찰사 안윤덕(安潤德)이 읍호(?灝)라고 이름을
고쳤다.
신증 망원루(望遠樓) : 대동강 동쪽 기슭에 있다. 영귀루(詠歸樓) : 남포(南浦) 가에 있다.
연광정(練光亭) : 덕암(德巖) 위에 있다. 감사 허굉(許?)이 지었다.
○ 당고(唐皐)의 기(記)에, "평양성은 조선에 있으니, 기자의 옛 도읍이다. 이번에 내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녹봉(鹿峯) 사(史) 선생과 함께 반삭(頒朔)의 명을 받들고 오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유적(遺跡)을 찾아 소회를
풀려고 했으나 사신의 일이 한창 많아 그럴 틈이 없었다. 새벽에 얼음을 밟고 패강(浿江)을 건너 한양에 도착하여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평양에 이르니, 이때에 강의 얼음이 이미 풀려 배를 타고 건넜다.
마침 참찬 이택지(李擇之) 군이 관반(館伴)으로 함께 오고 평안 관찰사 유담년(柳聃年) 군이 나를 생양관(生陽館)
에서 맞아 함께 배 안에서 조그만 술자리를 벌였다.
술이 한두 순배(巡盃) 돌자 참찬이 역관을 시켜 성 위에 있는 정자를 가리키며 나에게 고하기를, '이 연광정이 성문
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어찌 한 번 올라갔다가 기종(騎從)들이 다 강을 건넌 뒤에 관(館)으로 나가도 되지 않겠습
니까.' 하였다. 내가 허락하여 이에 녹봉과 함께 견여(肩輿)를 타고 성에 올라 조금 뒤에 바로 정자에 이르니,
정자가 사면이 탁 트이고 그 앞이 덕암(德巖)인데 바위가 강에 기대 부딪치는 물살을 막아낼 만하므로 성안의 주민
들이 모두 그 덕택을 입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정자에서 왼편으로 3, 4리쯤이 금수산(錦繡山)이요,
산꼭대기에 을밀대가 있는데 매우 평탄하고 탁 트였으며, 위에 사허정(四虛亭)이 있고,
산에 다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모란봉이라 부른다. 산 밑에 부벽루가 있어 역시 강에 의지하였고, 아래에
기린굴(麒麟窟)이 있는데 동명왕(東明王)이 말을 기르던 곳이다. 또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이 여기서 말을 타고 하늘에 조회하였다 한다. 그 앞에 능라도(綾羅島)가 있고,
섬이 백은탄(白銀灘)과 이어져 있다.
동북쪽으로 또 10여 리에 주암(酒巖)이 있으니, 일찍이 술이 바위 속에서 나왔다 하는데, 모두 정자의 왼편으로
모인다. 정자의 오른편이 읍호루(?灝樓)인데 성의 동문 위에 있으며, 또 남쪽으로 5리쯤에 정전제(井田制)가 남아
있으니, 정자의 오른쪽이다. 그 뒤에 풍월루가 있고, 누 앞에 연못(蓮池)이 있고 연못 안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규봉(圭峯) 동공(董公)이 동국에 사신으로 왔을 때 그 누각을 위해 기문을 지었다. 또 그 뒤가 쾌재정(快哉亭)이니,
이 정자는 대동관(大同館) 안에 있다. 또 금수산에서 일어난 한 지맥(支脈)이 꿈틀꿈틀 서쪽으로 뻗어 엎드렸다
다시 일어나는 곳에 무덤이 있으니, 기자가 관패(冠佩)를 감춘 곳이다. 이상이 모두 이 정자가 차지한 경치인데,
유독 '연광(練光)'이라 이름한 것은 대개 패수(浿水)에서 취한 것이다.
정자에 올라가 조금 앉아 있으니 참찬이 다시 심부름꾼을 보내와 녹봉을 맞이하여 부벽루를 유람하며 조그만
술자리를 벌여 흥(興)을 다하되 통역을 시켜 꿇어앉아 내게 고하기를, '풍월루는 동공이 기를 지었으나 이 정자는
이보다 앞서 중국 사신으로서 관상(觀賞)한 분이 없고 두 공(公)에서부터 관상하기 시작했으니, 기를 지어 주십
시오.' 하니, 내가 글이 서툴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틀이 지나 정주(定州) 납청정(納淸亭)을 지나가는데,
이 정자는 내가 처음 지나갈 때 이름지었던 것이라, 참찬이 다시 청하기를 '그러면 납청정의 기문을 지어주시겠
나이까.'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이 정자의 이름을 지었고 또 글까지 지어, 저 정자는 사양하고 이
정자는 허락한다면 너무 편벽되지 않은가.
그만둘 수 없다면 차라리 연광정의 기를 짓겠다.' 하니, 참찬이 매우 기뻐하였다.
대저 천하의 물건 중에 도(道)에 견줄 만한 것은 물만한 것이 없다. 물이야말로 진실로 도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물의 본성이요, 허(虛)한 것은 물의 체(體)요, 연[練]한 것은 물의 형상이요, 빛나는[光]
것은 물의 용(用)이다. 형상은 본성에 합해 있어 떠날 수 없는 것이고, 용은 체에 근본하여 갈라질 수 없는 것이다.
물이 항상 움직여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비단 같은 빛깔이 때로는 다함이 있고, 물이 텅 비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면 광(光)의 용(用)이 때로는 없어질 것이니, 물이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군자가 도(道)에 뜻을 둠에 대개 또한 물에서 구하기 때문에 형상을 실천함은 본성을 다하는 것이요, 용을 통달
시키는 것은 반드시 체(體)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일 본성을 버리고 형상을 말하고 용을 말하고 체를 버린다면
이목구비의 욕망이 혹 사욕에 구속되어 삶을 후하게 하는 부귀이달(富貴利達)이 나의 삶을 해치게 될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물이여, 물이여." 한 것은 물의 이러한 뜻을 취함이다. 동국에 학문하는 선비가 많으니,
연광이라 이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은 우리 공자의 유의(遺意)에서 본 것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물이
껄쭉껄쭉하여도 그 흐린 줄을 모르고 넘실넘실 흘러도 그 맑은 줄을 모르며 나거나 들거나 물과 함께 골몰하면서
스스로 산수 사이에서 즐긴다 말하면서 술 마시고 시 읊는 나머지에 맑은 흐름과 격류하는 여울을 굽어보는 따위
는 진실로 이 정자를 이름 지은 당초의 뜻이 아니요, 또한 어찌 우리들이 오늘 기관(奇觀)하는 한 유쾌한 뜻이겠
는가. 정자의 이름은 그 시초의 유래를 아직 물어보지 못했으니, 우선 여기 와서 논 연월과 참찬이 부탁한 뜻을
적었을 뿐이다." 하였다.
○ 당고의 시에, "한 내[川]가 깨끗하기 누인 명주 같은데,
이 정자가 내의 빛을 함축했네.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 모두 수운향(水雲鄕)에 있구나."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긴 강이 흰 누인 명주를 끄는 듯, 정자가 강면(江面)을 마주하누나. 물결이 해 달의 빛을
흔드니, 번쩍번쩍 옥(玉)과 번개를 날리는 듯." 하였다.
쾌재정(快哉亭) : 대동관 북쪽에 있다.
○ 당고의 시에, "그윽한 정자가 빈관(賓館)을 맞이하고 맑은 바람이 때때로 오네. 더위가 활짝 가심을 보아라,
이 경치가 자못 쾌한지고." 하였다. ○ 사도의 시에, "풍진(風塵)을 떨치고 난 뒤, 문득 이 정자에 왔네.
가슴과 눈이 모두 활짝 트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으리." 하였다.
함벽정(涵碧亭) : 부벽루 곁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부 서쪽 1리에 있다. 고려 태조 13년에 서경에 거둥하여 학교를 창설하고 수재(秀才) 정악(廷?)
을 임명하여 서학박사(書學博士)를 삼았다. 역학당(譯學堂) : 부 남쪽에 있다.
역원 대동역(大同驛) : 대동문 안에 있다. 찰방(察訪). 본도에 속한 역이 11개인데 생양(生陽). 안정(安定), 숙령
(肅寧), 안흥(安興), 가평(嘉平), 신안(新案), 운흥(雲興), 임반(林畔), 양책(良策), 소곶(所串), 의순(義順)이다.
○ 찰방 1명.
차문원(車門院) : 다경루(多景樓) 서쪽 2리에 있는데, 또한 옛 성문(城門)이다.
봉국원(奉國院) : 부 동북쪽 30리에 있다.
재송원(栽松院) : 부 남쪽 11리에 있다. 원(院) 곁에 소나무 몇십 그루가 있는데, 손님을 전송하는 곳이다.
또한 재송정이라고도 한다. 부산원(斧山院) : 부산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 부 동쪽 1리에 있다.
대정원(大井院) : 대정 곁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보통문 밖에 있다. 우정원(牛井院) : 우정 곁에 있다.
강복원(降福院) : 부 서북쪽 15리에 있다. 안학궁원(安鶴宮院) : 안학궁 북쪽에 있다.
부방 인흥부(仁興部) : 부 성안 및 성밖 서ㆍ남ㆍ북 10리.
의흥부(義興部) : 부 서쪽 경계. 예안부(禮安部) : 부 동쪽 경계. 지안부 지안부(智安部) : 부 북쪽 경계.
불우 영명사(永明寺) : 금수산 부벽루 서편, 기린굴(麒麟窟) 위에 있다.
○ 고려 예종(睿宗)의 시에, "청강(淸江) 서쪽 벽에 솟아 있는 연궁(蓮宮), 물상(物像)이 초연하여 낭풍(?風)에 비길
만하네. 성(城)을 둘러싼 봉우리들은 저마다 가물가물. 숲에 가득한 꽃ㆍ나무들은 다투어 푸릇불긋.
비오는 날 수레와 배들이 다락 아래 꽉 찼고, 달밤에 생가(笙歌)는 물속에 둥실 떴네. 이제 비단으로 덮어 있는
부왕(父王)의 필적을 뵈니, 감상(感傷)이 예전 그대로인데 뜻이 무궁하구나." 하였다.
○ 곽여(郭輿)의 시에, "부처의 절이 옛날 임금의 궁궐과 이어졌으니, 소나무ㆍ가래나무가 천고의 유풍(遺風)을
지녔네. 유리 전당(殿堂)이 공중에 엉겨 푸르고, 수놓은 비단 누각(樓閣)이 물에 비쳐 불그레하네.
고요한 밤 배는 맑은 거울 속에 비껴 있고, 밝은 달에 다락은 그림 병풍 속에 의지했네. 십년에 한 번 행행하사
사흘을 지내는 동안, 눈에 가득한 부연 물결, 뜻이 무궁하구나."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절이 아슬아슬 반공중에 솟았는데, 물빛과 산빛이 다시 맞닿아 있구나.
작로(鵲爐)에 향(香)은 한 올[縷]을 다 태우고 나서, 난간을 의지하여 좋은 바람ㆍ연기를 거두었네." 하였다.
○ "강머리의 민둥 고개가 우뚝하게 푸른데, 그 위에 절이 솟아 달성[月城]을 베었네. 탑 그림자는 고요히 물결
속에 서렸고, 종소리는 높이 나무 끝을 뒤흔드네. 하늘이 도솔천을 열어 미륵 부처 임하시고,
땅이 비야리성(毗耶離城 유마거사가 거처한 곳)을 열어 유마거사가 머물렀네. 월궁(月宮)의 천만 집을 의지하니
옥 도끼로 어디서 다시 수리했는가." 하였다.
○ "돌길엔 길상초(吉祥草)가 돋아 있고, 금로(金爐)엔 지견향(知見香)이 자욱하네. 천석(泉石)의 승지(勝地)를
찾아와서, 시조(市朝)의 바쁜 몸을 씻어내네. 영(嶺) 위의 달은 밤을 낮으로 만들고, 강 바람은 여름에 서늘함을
보내는구나. 시원하기가 마치 은하수 위에서 신선의 고삐로 난새 봉새[鳳]를 보는 듯." 하였다.
○ "공(空)을 찾아 문득 측금원(側金園)에 이르러, 웃으며 붉은 난간을 의지하여 푸른 물결을 굽어보네.
들 기운은 구름을 시켜 첩첩한 벽을 묻었고, 강 소리는 비를 빙자해 감도는 여울에 외치누나.
은궁(銀宮)은 방장산(方丈山)에 노는가 의심되고, 옥우(玉宇)는 광한전(廣寒殿)을 다시 찾을 것 없네.
미리 상상하건대 바위에 내려가 머리를 돌리는 곳에, 늦은 이내[嵐] 짙푸르고 떨어지는 노을이 붉으리." 하였다.
○ "맑고 높은 절이 명승지의 구경에 족하네. 난간을 의지하여 발[簾]을 걷고 오래도록 눈 길 주어 바라보네.
올망졸망 빼어난 고개는 허공을 치받아 일어나고, 넘실넘실 맑은 강은 바다로 들어가 흐르네.
일만 골짜기의 서늘한 바람은 한 경쇠 소리를 따르고, 천 물결의 흰 달은 세 척의 배에 비쳐오네. 기틀을 잊어
모래사장의 해오라기를 사랑하니, 해 지고 사람들 돌아가니 더욱 자유로우리." 하였다.
○ "세상과 막혀 한껏 고요한 절이, 첩첩 산 남쪽 끝, 물 북편에 있네. 용녀(龍女)는 구슬을 안고 어정어정 나오고,
기러기는 과일을 물고 훨훨 내려오네. 숲 속에 황금땅을 깨끗이 쓸고, 물결 밑에 벽옥(碧玉) 하늘이 가벼이 흔들
리네. 연하(煙霞)의 그지없는 경치들이 다투어 고운 자태로 내 앉은 자리에 달려와 모셔줌을 웃으며 사례하네."
하였다.
○ 고려 박의(朴義)의 시에, "가벼운 배를 타고 절 찾아오느라고, 광가(狂歌)ㆍ취무(醉舞)로 중류를 흘러왔네.
대(臺) 앞에 넘실넘실 한 강의 수면, 섬 밖에 들락날락 일천 산꼭대기 흥겨워라. 유객(游客)들의 지껄이는 소리
왁작, 도(道) 높은 늙은 중은 말씨도 조용하네. 월암봉(月巖峯) 위에 뜬 둥그런 달은, 사람마다 고금의 시름을
비추어 깨트리네." 하였다.
○ 고려 이혼(李混)의 시에, "영명사 안에 중은 안 보이고, 영명사 앞에 강만 절로 흐르누나.
빈 산 외로운 탑이 뜰 가에 서 있고, 사람 없는 나루터에 작은 배가 비껴 있네. 장천(長天)에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고. 넓은 들에 동풍은 쉴 새 없이 부는구나. 아득한 지난 일을 물을 이 없으니, 엷은 연기 비낀 석양이
시름겹게 하네." 하였다.
주암사(酒巖寺) : 주암 곁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벼랑의 절을 찾아 석양에 홀로 다락에 기대 있네. 북쪽 봉우리엔 법원
(法苑 절)이 깊고, 남녘 포구엔 선류(禪流)가 맑네. 숲 속 범의 싸움을 풀어줄 지팡이 있고, 바다 해오리를 놀라게
할 잔이 없네. 지금까지 향화(香火) 밖에서는 고기와 새들이 함께 노닐 뿐이네."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 부 남쪽에 있다. 인왕사(仁王寺) : 성(城) 남쪽에 있다. 신호사(神護寺) : 창관산(蒼觀山)에 있다.
광법사(廣法寺) : 대성산(大城山)에 있다. 동망일사(東望日寺) : 소라산(所羅山)에 있다.
서망일사(西望日寺) : 서산(西山)에 있다. 장경사(長慶寺) : 부성(府城) 가운데 있다.
○ 김구(金坵)의 시에, "작은 배로 푸른 강물을 가로질러서, 저녁녘에 쓸쓸한 장경사에 닿았네. 슬픈 가사(歌詞)로
문득 강산을 조상하려 하니, 땅 신령이 슬그머니 눈물을 흘릴까 두렵네. 생각하니 옛날 내가 멀리 스승을 좇아 왔
을 때는, 바로 서도(西都)가 한창 번성했을 무렵. 달이 밝은 만호(萬戶)는 문 걸 줄을 모르고, 먼지도 고요한 아홉
거리엔 떨어진 걸 줍는 자가 없더니, 지금엔 지난 일이 모두 다 씻은 듯이 없어지고, 처량한 궁궐에 부질없이 푸른
숲만 우거졌네. 영웅들 살던 터는 반이 호미와 보습에 들어가고, 조시(朝市) 길엔 삼[麻]과 보리가 덮여 있구나.
분홍 치마 뽕따는 처녀의 슬픈 노래가락이 시름을 자아내어 사람을 늙히려누나." 하였다.
두타사(頭?寺) : 대성산(大城山)에 있다. 회룡사(回龍寺)ㆍ용악사(龍岳寺) : 모두 용악산에 있다.
송태사(松泰寺) : 대보산(大寶山)에 있다. 용천사(用泉寺) : 사기리산(沙器里山)에 있다.
환희사(歡喜寺) : 백록산(白鹿山)에 있다. 화원사(花元寺) : 자화산(慈化山)에 있다.
천림사(天林寺) : 건지산(巾之山)에 있다. 원명사(元明寺) : 눌산(訥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이 모두 소상
(塑像)이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동국이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수사(洙泗)의 물결이 멀리 미쳤네.
나라의 제사가 중국을 본뜨니, 숭배하여 보답(報答)함이 또한 지극하구나."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떼[?]를 타시겠단 말씀이 본디 빈말이나, 유교(遺敎)가 숫제 동으로 퍼졌네. 내가 와 접빈
(接賓)하는 이들을 만나니, 그 옷이 공자의 옷 모양 닮았네." 하였다. 성황사(城隍祠) : 부 서쪽 4리에 있다.
단군사(檀君祠) 신증 당고의 시에, "아득한 옛날에 나라를 열였으니, 조선에 이 분이 비조(鼻祖)라네. 가시덩굴을
베지 않았던들, 뉘라서 동국을 낙토(樂土)로 만들었으리."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단군이 언제 비롯했던고, 말 들으니 요(堯) 때에 비롯했다고. 지금부터 4천년 전이나, 유묘(遺廟)
가 산마루에 있네." 하였다.
동명왕사(東明王祠) : 기자사(箕子祠) 곁에 있다. 두 사(祠)가 같은 집에 있는데 단군이 서쪽에 있고 동명이 동쪽
에 있으며 모두 남향(南向)이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향(香)과 축문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지낸다. 본조(本朝)
세종(世宗) 11년(1429)에 처음 설치했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말 들으니 옛날 태고 적에, 단군이 나무 가에 내려왔다고. 동국 땅에 군림
하니, 때는 제요(帝堯)의 시절. 세대를 전함이 몇인지 모르고, 세월을 지남이 천 년을 넘었네.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에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라 이름했네."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동명이 삼한(三韓)
의 웅주(雄主)로, 선서(仙逝)한 지 세대가 오래되었건만, 사당이 서경(西京)에 있어, 사람들이 닭과 술로 제사
드리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고구려가 처음 나라를 이룩했을 때, 왕의 호는 동명이었네. 그의 덕이 두터웠던 줄 알리니,
전사(專祠)가 서경에 있도다." 하였다. 기자사(箕子祠) : 성안에 있다.
○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에 왕이 서경에 행행하였을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사(祠)를 세우기
를 건의하여 중사로 제사지내 왔고, 본조 세종 12년 경술에 비(碑)를 세웠다. 변계량(卞季良)이 그 비문을 지었는
데, 이르기를, "선덕(宣德) 3년 무신년(1428) 여름 4월 갑자일에, 국왕 전하께서 전지(傳旨)하기를, '옛날에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 나라를 이긴 뒤 은 나라의 태사(太師)를 우리나라에 봉하여 그의 신하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우리 동방의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중국을 본떠서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인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을 힘입어 서이다. 돌아보건대, 그 사우(祠宇)가 좁고 누추하여 경배(敬拜)하기에 걸맞지 않으므로
우리 부왕(父王)께서 일찍이 중수(重修)하라 명하셨고, 내가 그 뜻을 이어받아 중수를 감독하여 이제 준공되었
으니,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원히 후대에 보여야 하니, 사신(史臣)이 그 글을 지어라.' 하니,
신계량이 명을 받들고 삼가 떨면서 감히 사양치 못하였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자께서 문왕(文王)과 기자(箕子)를 아울러 《주역(周易)》의 상(象)에 나열하였고
또 삼인(三仁)으로 일컬었으니, 기자의 덕을 이루 다 찬양할 수 없었다. 생각하건대,
옛날 우(禹) 임금이 수토(水土)를 평정할 때 하늘이 홍범(洪範)을 주어 이륜(?倫)이 펴졌으나, 그 학설이 일찍이
한 번도 우하(虞夏)의 서(書)에 보이지 않더니, 천여 년을 지나 기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설이 나왔으니,
그때에 기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을 진술하지 않았다면 낙서(洛書)의 천인(天人)의 학(學)을 후세 사람
들이 무엇으로부터 알았겠는가. 기자가 사도(斯道)에 공이 있음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기자는 무왕의 스승이다.
무왕이 그를 다른 나라에 봉하지 않고 우리 조선에 봉하여 조선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친자(親炙)하여 군자(君子)
는 대도(大道)의 요지(要旨)를 얻어 듣고 소인(小人)은 지극한 정치의 은택을 입게 되어,
그 감화가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동방을 후대하여 인현(仁賢)한 분을
주어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심이요 사람의 힘으로 미칠 바가 아님이 아니겠는가.
정전(井田)의 제도와 팔조(八條)의 법이 해와 별처럼 빛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그 가르침에 복종하여
천년이 지난 뒤에도 마치 그와 한 시대에 태어나서 초연(?然)히 직접 대한 듯함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께서 총명으로 옛날 것을 상고하실새 즐거이 경사(經史)를 보셨고,
우리 전하께서 하늘이 주신 예지(睿智)의 자질로써 성학(聖學)을 계속해서 밝히셨으니, 그 홍범 구주의 도(道)도
대개 정신으로 합하고 마음으로 융합하신지라, 이 때문에 친히 짓고 계술(繼述)하여 그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전례(典禮)를 이룩함이 지성에서 나왔으니, 이는 진실로 전대(前代)의 군왕이 짝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경사(卿士)와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일어나 이를 교훈으로 삼고 이를 실행하여 천자(天子)의 성덕(盛
德)을 가까이하여 베풀어주시는 복(福)을 얻어 받게 됨이 의심 없으니, 아아, 성대하도다. 무릇 사옥(祠屋)을
짓고 약간의 밭을 두어 제수(祭需)에 공급하게 하고 부역을 면제시켜 쇄소(?掃)를 맡게 하며 부윤(府尹)에게
명하여 제사를 삼가게 하니, 묘궁(廟宮)의 일은 대개 부족함이 없다. 신 계량이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절
하고 머리를 숙여 명(銘)을 바칩니다. 명에 이르기를, '아아, 기자는 문왕과 짝이 되어,
진실한 홍범의 제훈(帝訓)을 펴시었네. 은(殷) 나라의 스승만이 아니요 실로 무왕의 스승이니, 은 나라는 그분을
버려 망하였고, 주(周) 나라는 그분에게 물어 흥했도다.
크나큰 천하에 안위(安危)를 맡은 몸이, 거두어 동으로 오니 하늘의 은혜로세.
가르치고 다스려 팔조(八條)가 빛나니, 어느 어리석은 자 맑아지지 않으며 유약(柔弱)한 자 강해지지 않으리.
《한서(漢書)》에 칭찬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고 했고, 오랑캐를 중국으로 만들었다고 당대(唐代)
에 비(碑)를 세웠네. 부지런한 우리 임금, 끓어진 학문을 환히 이어 그 이치를 깊이 아시고 그 법을 몸소 행하여,
짓고 계술(繼述)하니 사우(祠宇)가 날씬하네. 우뚝 솟은 그 당(堂)에 편안히 계신 신(神)께, 세시(歲時)로 제사
드려 정성껏 공경하네. 아아, 소신(小臣)이 유경(遺經)에 잠심(潛心)하다가, 이제 왕명을 받들어 머리 숙여 명
을 지으니, 성덕의 환한 빛이 억만년에 미치소서.' 하였다." 하였다.
○ 장녕(張寧)의 기(記)에,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정도(正道)를 행하다가 난을 무릅쓴 것과 법을 성인에게
전수해 준 것과 교화가 백성에게 미친 것 세 가지로 기자 묘비(箕子廟碑)를 풀이하였으니, 대인(大人)의 능사(能事)
가 끝났다. 그러나 다만 그 이른바 '주(紂)의 악행이 영글기 전에 스스로 죽고 무경(武庚)이 혼란함을 염려하여
나라를 보존할 것을 도모하였던들 나라에 지도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누구와 더불어 다스림을 일으키겠는가.'
하는 논은 내가 주제넘지만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대저 비간(比干)이 아직 죽지 않았고 천하가 아직도 상(商) 나라인데, 선생이 왕실의 부사(父師)로써 미연(未然)
에 바로잡아 구하려 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요행을 바람은 이야말로 또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설령 과연 이런 마음이 있다 해도 마침내 난망(亂亡)이 뒤를 이어 사기(事機)에 이룸이 없을지니, 이는 더욱이
중지(中智)도 하지 않을 일인데 대현(大賢) 군자가 한다고 할 것인가. 하물며 삼인(三仁)이 서로 고하고 말할
즈음에 속속들이 속마음을 환하게 서로 펴놓았으되 선생이 기미조차 일찍이 여기에서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
이로써 보건대, 거짓 미친 체하여 간(諫)하지 않은 마음에는 확실히 이미 정견(定見)이 있었던 것이다.
주 나라가 흥하자 무왕(武王)이 물으러 가매 곧 말씀을 올렸고 봉(封)하매 또한 나아갔다. 고도(故都)의 백성들이
은 나라를 잊지 않고 무경의 마음이 은 나라의 유업을 이으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일찍이 한 번도 그
사이에 뜻을 두지 않았고, 오직 팔조의 법으로 백성들을 가르쳐 비로소 예양(禮讓)을 일으키면서 여유 있게 이
동토(東土)에 처하기를 마치 본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하였다. 게다가 그가 처음 봉해졌을 때에 조선이 비로소
중국과 통하여 성왕(成王)의 시대에 미쳐서는 '서쪽은 정벌(征伐)하고 동쪽은 귀복(歸服)한다.'는 말이 전해졌
으며, 동노(東魯)에 이르러서는 성인(聖人 공자)이 또한 '군자(君子)가 사는 데에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
는 말이 있었으니, 진실로 선생이 이 땅을 편안히 여겨 백성을 인도한 힘이 아니었다면 그 교화(敎化)가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그 마지막 일에 나아가도 그 처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어찌 장차 과감히 은 나라를 잊어버리고 주 나라를 따르는 것을 즐거워했겠는가.
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 대저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은 하늘의 뜻이요, 주 나라가 흥한 것도 하늘의 뜻이다.
홍범의 도가 거의 끊어질 뻔하다가 다시 전하고 이미 막혔다가 다시 통한 것도 하늘이요,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음을 알면서도 또 몸을 숨겨 스스로 욕되게 하면서 주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은 것,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다.
대개 하늘이란 것은 이치[理]일 뿐이니, 성현(聖賢)의 언어와 동정(動靜)이 다 이를 어기지 않거늘 하물며 큰
것에 있어서랴. 이 이치를 온전히 다하여 처(處)하매 반드시 마땅하고 씀에 사사로움이 없고 베풂에 곧 준칙에
맞음, 이것이 성인이 이른바 인(仁)이다. 비록 그렇지만 완악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무경의 전감(前
鑑)이 멀지 않거늘, 하물며 재주가 족히 일을 이룰 만하고 덕이 족히 사람을 움직일 만하고 도(道)가 족히 세상
에 설 만한 선생과 같은 분께서 그 사이에 뜻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어 큰 은혜를 거두어 한 나라에 베풀어 오랑캐를 변하여 중화를 만들어 이륜(?倫)과 예악
(禮樂)의 은택이 지금까지 쇠하지 않아 대대로 봉(封)함을 받고 나라를 누림이 장구하며, 선생도 또한 길이 묘사
(廟祀)를 두게 된 것은 다 중국의 주 나라가 하사한 것이니, 아아, 주 나라가 또한 어질도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부(賦)에, "상 나라가 쇠하여 큰 도가 몰락하니, 요부(妖婦 달기(?己))가 화(禍)를 부채질하여
쌓인 곡식이 먼지가 되었네. 주색에 빠져 법도를 무너뜨리니 포학한 불길이 마구 올라, 하늘의 위엄을 하찮게
여기고 경계하지 않아 충성된 말을 멀리하고 듣지 않았네. 아아, 선생은 이 궂은 때를 만나니 의(義)로서는 대신
(大臣)이요 친족으로서는 숙부이네. 막중한 조상의 공렬(功烈)을 보니 감히 근심 없이 편안하랴.
상아(象牙) 젓가락을 처음 만들 때에, 뒷일을 지탱하지 못할까 근심했고, 약석(藥石)같은 직언(直言)을 올려 중병
을 고치려 했건만, 그 못난 아이 주(紂)가 깨닫지 못하여 쓴 독한 풀을 단 엿처럼 즐겼네. 아아, 격절(激切)한 나의
충심(忠心), 홀로 헤매며 어디로 가리. 미자(微子)는 멀리 갔지만 내 어찌 차마 다시 임금을 등지리.
탄식하건대 비간(比干)은 이미 죽었으니 내 어찌 부질없이 목숨을 끊으리. 꾹 참고 자취를 감추어서 거짓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네. 종묘사직이 뒤집힘을 서러워하여 거문고를 안고 탄식했네. 소와 말이 들에 가득하고 옛 도읍
엔 보리가 팼네. 당신이 힘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천운(天運)이 이미 가버렸네. 궁벽한 동토(東土)에 있는
이 조선은 실로 당신의 봉국(封國). 사우(祠宇)가 오래 되었으되 더욱 새로우니, 맑은 기풍이 어제인 듯. 백성들이
팔조(八條)의 교령(敎令)을 지켜 편안히 베짜고 농사 짓고 우물 파 마시네. 성대한 덕(德)이 빛을 흘리니 백성들
감화된 줄 알리로다. 내가 몇천 년 뒤에 태어나서 우연히 사절(使節)로 이곳을 지나다가, 의형(儀刑)을 상상하고
공경을 일으키니 그지없는 먼 생각을 품네.
《서경(書經)》에 구주(九疇)가 있고 《주역(周易)》엔 명이괘(明夷卦)가 있으니, 중니(仲尼 공자)가 찬(贊)을
쓰고 유종원이 비문(碑文)을 썼도다. 아아, 선생의 큰 도를 다시 군말을 덧붙여 무엇하리."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몸이 도망쳐 나라를 떠나서도 종친(宗親)을 생각했거니, 거짓 미침이 바로 은 나라를 욕되
게 한 것이라고 누가 말하랴. 주 무왕(周武王)이 봉(封)했으니 버릴 임금이 없고, 노유(魯儒)가 논(論)한 뒤에
어진 신하가 있었구나. 평양에 이어진 산에 무덤이 길가에 있고, 대동강 감돈 길에 사당이 여러 번 중수됐네.
조서(詔書)를 받들고 지나가노라니 봄이 바다와 같은데, 천년의 문물(文物)에서 동국 사람을 보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하루 아침 거짓 미친 체, 어찌 종친을 등지리. 천명(天命)이 벌써 은 나라를 떠난 줄 알았네.
홍범(洪範)의 도(道)를 전하여 숨김이 없었고, 조선에 나라 받아 마침내 신하로 섬기지 않았네.
전에 없는 가르침을 세우 몸소 본보기 되었고, 뒷사람들 공을 갚아 예(禮)가 새로웠네. 당시의 종친들 얼마였는가.
오늘에 공 같은 이 몇 분이나 있는고."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포락(?烙)의 시뻘건 연기 나자 왕기(王氣)가 쇠퇴하니, 거짓 미친 심사(心事)를 뉘라서
알랴. 말씀은 천년에 드리워져 홍범에 남아 있고, 사람이 삼한(三韓)에 와서 옛 사당에 참배하누나.
땅이 늙고 하늘이 거칠도록 이름은 안 없어지고,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데 학(鶴)은 더디 돌아오네.
동번(東藩)이 본래 중국의 분봉지(分封地)라, 풍화(風化)가 전과 같이 옛날과 비슷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홍범을 진술하여 구주(九疇)를 드러내니, 만년의 성학(聖學)이 종주(宗周)를 열었도다.
나라가 멸망한들 신복(臣僕)이야 차마 되리. 기꺼이 거짓 미친 체 참아 죄수(罪囚)가 되었네. 새 사당(祠堂)의
송라(松蘿)는 항상 울창하건만, 고궁(故宮)의 벼와 기장은 절로 우거졌구나. 내가 와 배알(拜謁)하며 느낌을 더하
노니, 끼친 교화(敎化)가 젖어 바다 모퉁이에 가득하네." 하였다.
○ 명(明) 나라의 사마순(司馬恂)의 시에, "서주(西周)에서 일찍이 제왕(帝王)의 스승이 되었다가, 봉(封)함을 받
아 멀리 해동(海東)에 와 살았네. 충성과 의리는 어찌 미자(微子)와 같이 가리. 인(仁)한 마음은 오직 중니(仲尼)
만이 알았을 뿐, 홍범 한 편에 경훈(經訓)을 드리웠네. 조선 천년에 옛 사당에 제향(祭享)받네.
문장(門墻)에 추배(趨拜)하니 엄연히 계시온 듯, 배회하며 우두커니 서니 먼 생각이 일어나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옥마(玉馬)로 서주(西周)에 조회하지 않더니, 관상(冠裳)으로 동국(東國)에 밝은 모습
엄연하네. 고풍(高風)은 삼대(三代)를 능가한다 말하고, 유교(遺敎)는 아직도 팔조(八條)를 지킨다네.
옛 사당 솔가지엔 학(鶴)이 있을 뿐, 깊은 수풀 오디에는 올빼미가 이미 없네. 사절(使節)로 지나는 길에 봄이
저물었는데, 바람을 임하여 대초편(大招篇)을 지으려 하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대산(臺山) 산 아래 푸른 소나무 그늘 속에, 기자의 사당이 고요하고 깊숙하네.
홍범 구주는 임금의 가르침을 폈고, 유풍(遺風)이 만고의 백성의 마음을 감화화네. 귀신의 호위가 삼엄하게 있는
듯한, 파초ㆍ여지(?支) 향기로우니 아마 꼭 흠향하시리. 얼마나 중화(中華) 사람들이 자주 물었나, 초연(?然)히
동쪽을 바라보며 매양 노래부르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숭배하는 사당이 단군사(檀君祠)에 가까워,
봄ㆍ가을에 소와 돼지를 잡는구나. 팔조(八條)가 지금 몇이나 남았는고. 동국 사람들이 교화의 정치를 존숭하네."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학(鶴)이 되신 지 몇천 년이언만, 해마다 철마다 제사를 드리네.
백성들은 반이나 되는지, 성곽(城郭)은 아직도 예와 같네." 하였다.
여단(?壇) : 부 북쪽에 있다.
평양강사(平壤江祠) : 봉황대(鳳凰臺) 위에 있다. 사전(祀典)에 서독(西瀆)이 되는데, 중사(中祠)에 실려 있다.
구진익수사(九津溺水祠) : 부 서쪽 9리에 있다. 남쪽 기슭에 원숭이 머리[猿頭]라는 바위가 있다. 해마다 봄ㆍ
가을에 향(香)을 내려 제사한다. 하사(下祠)에 실려 있다.
대동강(大洞江祠) : 대동문 밖에 있다. 부산사(斧山祠) : 부산 위에 있다. 그 제사를 이름하여 압병(押兵)이라 한다.
능묘 기자묘(箕子廟) : 부성(府城) 북쪽 토산(?山) 위에 있다.
○ 원(元) 나라 곽영석(郭永錫)의 시에, "무슨 일로 거짓 미친 체 머리 풀어헤쳤나, 은(殷) 나라의 국운(國運)을
혼자 붙들려 하였네. 버리고 가면 오직 제 몸만 길이 깨끗해질 뿐, 간(諫)하다가 죽으면 누가 위태로워진 나라를
슬퍼하리. 노(魯) 나라 땅 한 언덕에 송백(松柏)이 있고, 충혼(忠魂)을 만고에 귀신이 아는구나.
저물녘에 조선(朝鮮)의 길가에 말[馬]을 세우니, 지금도 아직 맥수시(麥秀詩)가 들리는 듯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태사(太師)께서 이 깊은 산에 유골(遺骨)을 묻었다기로, 초장(椒?)을 전(奠)드려 한 잔을
부으려 하네. 제사를 보존하려 함은 응당 미자(微子)의 뜻과 같고, 인(仁)함은 곧 비간(比干)과 한마음. 묘대(墓臺)
에 구름이 따스한데 푸른 솔이 어울렸고, 옹종(翁仲)에 봄이 깊어 파란 이끼 돋았네. 말 들으니 동국 사람이 보본
(報本)하여, 세시(歲時)에 제사드리며 와서 흠향하기 바란다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머리 풀고 미친 체함이 어찌 자기의 몸 때문이랴, 나라가 문득 망함을 차마 어지 보랴.
평생의 속마음을 뉘라서 알리, 공씨(孔氏)의 삼인(三仁)이란 말이 가장 참되네." 하였다.
○ "직간(直諫)해도 독부(獨夫)를 깨우칠 길이 없었으니, 명이(明夷)의 심사(心事)를 뉘라서 견주랴.
구주(九疇)를 주왕(周王)에게 전수하지 않았던들, 후세에 무엇으로 말미암아 낙서(洛書)를 알았을꼬." 하였다.
○ "동번(東藩)의 제도 옛날 봉군(封君) 천년의 유풍(遺風)에 예문(禮文)을 숭상하네. 영령(英靈)을 조상하려니
어느 곳에 찾을꼬. 얇은 연기, 우거진 풀이 외로운 무덤을 덮었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포락(?烙)에 불이 뻘겋자 만방(萬方)의 인심이 흩어지니, 뜻이 있어 종이 된 심사를
세상에 알 이 없었네. 천성(千聖)이 마음을 전한 구주가 남아 있고, 삼한(三韓)에 교화를 끼쳐 팔조를 드리웠구나.
외로운 이 성이 워낙 분봉(分封)의 땅이요, 옛 무덤엔 한갓 기적비(紀績碑)만 남았구나. 아름드리 나무는 그늘을
짓고 해묵은 풀이 우거졌으니, 봄 바람에 지나는 손[客]이 슬픔을 못 이기네." 하였다.
○ 동월의 사(辭)의 서(序)에, "무덤은 평양성 서북 모퉁이에 있다. 내가 동국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전배(展拜)
하니, 때마침 비바람이 휘몰아쳐 저도 모르게 사람으로 하여금 처량한 심사를 자아내게 한다.
대개 천성으로 덕(德)을 좋아하여 일어난 것이니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인하여 사(辭) 3장(章)을 지어서 조상한다. 사에 이르기를, '구름이 컴컴하고, 나무는 그늘진데 비는 부슬부슬
산이 깊네. 중로(中路)에 말[馬]을 쉬고, 먼 뫼에 무덤을 바라보네. 돌이 삐죽삐죽 이끼가 끼었는데, 한 번 절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감개로운 이 정(情)이 무엇 때문에, 고금에 조금도 차별이 없는가. 아아, 영원히 죽지 않음
은 오직 사람의 마음이네." 하였다.
○ "높디 높은 무덤이, 어찌하여 동토(東土)에 있는가. 비로소 봉(封)한 것은, 주 무왕(周武王)이요, 나를 안 좋아
한 것은 저 못난 아이가, 유허(遺墟)를 둘러보니 벼와 기장만 더북더북, 딴 나라에 와 구차히 살았으나, 덕(德)을
한결같이 하고 풍속을 같게 하여, 천백세에 유전(流傳)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功)인가. 아아, 저 석 자의 무덤
에 봉분(封墳)을 높이라." 하였다. ○ "북소리 둥둥, 저(笛) 소리 유유하며, 술이 넘실넘실, 다시 제수(祭需)를
나누어, 동국 사람들이 제사를 봄ㆍ가을에 꼭 행하네, 바라건댄 신(神)은 오셔서 나의 이 정성을 위로해 주소서.
우리 동국 사람에게 경계하노니, 소나무ㆍ가래나무를 베지 말아, 이 아름다운 그늘을 머물려 두어 길이 언덕을
덮게 하라. 아아, 이것 밖에 또 무엇을 구하랴." 하였다.
○ "왕창(王敞)의 사에, "그늘진 여름 나무가 겹겹이 그늘인데, 가시 덤불을 베어내니 풀이 우거졌네.
외로운 무덤을 바라보니 어디쯤인가. 목란(木蘭)이 덮인 높은 뫼로구나. 서리와 눈에 비석이 벗겨졌고, 바람이
쓸쓸하니 번뇌를 씻어주는구나. 주(周) 나라의 도읍은 오래 전에 윤몰(淪沒)했건만, 팔조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려오네. 아아, 도맥(道脈)이 서로 이어져, 백세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네." 하였다.
○ "경대(瓊臺)와 요궁(瑤宮)에 주(紂)의 악(惡)이 가득 차 황월(黃鉞)이 동으로 갔네. 노성(老成)한 신하를 버리고
간신(奸臣)을 쓰며, 여색(女色)에 빠지고 완동(頑童)을 친하였으니, 옛 도읍이 황폐하여 보리만 더북더북.
새 봉국(封國)을 이룩하여 유풍(儒風)을 진작하니, 해우(海隅)가 감화되어 신공(神功)을 우러렀네.
날씬한 사당(祠堂) 지어 제사드려 높이누나." 하였다.
○ "비가 어둑어둑 내리고 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초장(椒?) 전(奠)드려 진수(珍羞)를 벌려놓고 제사하네.
현당(玄堂)이 깊숙하여 천년을 지내었고, 구주(九疇)를 서술하여 먼 후손에게 드리웠구나.
백양산(白楊山), 가래나무, 묘목(墓木)이 하늘에 솟았는데, 이 산을 지나노라니 눈물을 금할 수 없네. 아아,
저 교동이 어두워 알지 못함이여, 나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하였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사(詞)에, "높디
높은 산에 흰구름이 자욱하고, 꽉 들어찬 나무에 기운이 스산한데, 무덤이 당(堂)과 같아 성 아래 자리잡아,
석수(石獸)가 우뚝우뚝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아아, 나의 집은 저 대강(大江) 남쪽, 이 삼한(三韓)과는 아득한 먼 곳. 사신의 수레를 타고 문득 동국에 오게 되어,
압록강 넓은 물을 훨훨 건너서, 첩첩한 산, 겹겹이 고개를 넘어왔지만, 사명을 띤 몸이 수고롭다 말하리.
오다가 평양을 몇 리에 두고, 통역이 내게 무덤 숲을 가리키며 하는 말, '저기가 기자(箕子)가 돌아가신 뒤,
그분의 관잠(冠簪)을 모신 곳'이라고. 내가 수레를 돌려 그리로 가서 초주(椒酒)를 손수 따라 전(奠) 드리려 하니,
길이 가파라 구불구불하고, 눈물이 가로 세로 줄줄 흐르네. 아아, 상(商) 나라의 말년에, 어찌 그리 독부(獨夫)가
황음(荒淫)하였던고. 안고 갈 제기(祭器)가 왜 없으며, 쪼개어 볼 만한 마음이 왜 없었을쏘냐.
상아 젓가락을 간(諫)할 수가 없었으니, 선왕(先王)의 잠언(箴言)도 소용이 없었네.
불이 땅 밑에 엎드림에 명이괘(明夷卦)였고 도(道)가 비로소 주왕(周王)의 허심(虛心)에서 나타났네.
조선을 떼어서 맨처음 봉하였으니, 거기도 똑같이 일월이 비치는 곳. 대개 당신을 손님으로 삼고 신하로 삼지
않은 것이라, 모혁(毛革)과 주옥(珠玉)이 없었을쏜가. 동토(東土)에 와서 베푼 은혜가 초목을 장마비처럼 적셨
으니, 동국 사람들이 송화가루와 인삼 떡으로 제사를 받듦이 마땅하도다.
창규(蒼?)를 타고 내려오셔서 신(神)이 양양(洋洋)히 흠향하시니, 원하건댄, 이 동방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나쁜
기운과 요사스런 기운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동인(東人)이 대대로 이 무덤의 제사를 지켜서, 소와 양이 와서
침범하지 말게 하라. 이 나라와 황명(皇明)과 함께 서로 종시(終始)하여, 위에선 푸짐한 사물(賜物)을 내리고
아래선 보배를 바치게 하소." 하였다.
○ 당고의 시에, "오솔길로 소나무 수풀에 들어, 말을 쉬고 묘대(墓臺)에 절하네. 고풍(高風)을 일찍부터 우러렀
더니, 사절(使節)로 이제야 처음 왔구나." 하였다.
고적 기자궁(箕子宮) : 유기(遺基)가 정양문(正陽門) 밖에 있다.
구제궁(九梯宮) : 동명왕(東明王)의 궁. 예전에 영명사(永明寺) 안에 있었다.
○ 고려 예종(睿宗)의 시에, "동명궐(東明厥)에 길이 험하여, 수레를 멈추고 소멍에를 풀어놓았네. 옛 성(城)이
절벽에 비껴 있고, 높은 각(閣)이 찬 강을 굽어보누나. 화전(?殿)은 항시 문이 열렸고,
주렴(珠簾)은 갈구리를 아니 내리네. 승(勝)한 놀이가 진실로 아쉬우니, 가을에 다시 오길 약속하네.
○ 옛 궁의 남은 터가 층층 봉우리에 있으니, 걸음걸음 올라와 보매 안계(眼界)가 널찍하구나. 넓은 벌 세 쪽에는
산이 뾰죽뾰죽하고, 긴 하늘 한 편에는 바다가 질펀하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옥우(玉宇)가 공중에 치솟아, 겹겹한 궁전이 몇 해를 지내왔는고. 봉여(鳳輿)가 지금
와서 풍속을 살피는데, 기린을 타시고 옛날에 신선 되어 올라가셨네. 고개마루는 채찍을 묻은 언덕이요,
바위 가에는 차를 달이던 샘물이 있네. 굴(窟)이 깊어 땅 밑을 뚫었고, 사다리가 멀리 하늘가에 대어 있네.
호경(鎬京)에 술마시던 주왕(周王)의 즐거움이요, 분수(汾水)에 노래하는 한 무제(漢武帝)의 사(辭)로구나.
먼 데 사람이 이 승경(勝景)을 찾아올 때, 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했는지 누가 알리.
○ 아홉 층 나는 듯한 사다리가 구름 속에 솟았으니, 우러러보매 처음엔 길이 안 통할 듯. 대전(臺殿)이 문득
나는 새[鳥] 위에 나타나니, 이 몸이 선경(仙境)에 와 센 바람에 머물러 있는 듯.
○ 층층한 다락, 넓은 궁전이 산 위에 솟았으니, 천리 강산이 눈앞에 탁 트였네. 벽공(碧空)에 신선은 가고 사람은
안 보이는데, 우수수 소나무에 바람만 부는구나."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붉고 푸른 봉우리들이 큰 나라를 안았는데, 연꽃 한 송이가 긴 강에 꽂힌 듯. 구제궁은 황폐
하여 옛터만 찾을 뿐, 만세 노래가 전해져 옛 곡조를 부르네. 산과 바다를 마음껏 보니 안계가 멀찍하고, 구름 속에
거니니 마음이 누그러지네. 갑자기 대낮에 선경에 올라오니, 정녕 인간에 이런 경치 다른 데도 있을쏘냐." 하였다.
춘양대(春陽臺) : 관풍전(觀風殿) 북쪽에 있다. 민간에서 '위 마르터[上密德]'라 부른다.
추양대(秋陽臺) : 정양문(正陽門) 서쪽에 있다. 민간에서 '아래 마르터[下密德]'라 부른다.
관풍전(觀風殿) : 옛터가 을밀대(乙密臺) 남쪽에 있다.
○ 김부식(金富軾)이 서경의 적(賊 묘청(妙淸))을 쳐서 평정하고 군의(軍儀)를 갖추어 경창문(景昌門)으로 들어와
관풍전 서편 채에 앉아 오군 병마 장좌(五軍兵馬將佐)들의 하례를 받고 사람을 시켜 여러 성황(城隍)과 신묘(神廟)
에 제사하여 성안을 어루만져 위로하여 예전처럼 편안히 지내게 했다.
○ 김극기의 시에, "전당(殿堂)이 구름에 치솟아 가파르고 깊은데, 느티나무ㆍ신나무가 해를 가려 어두컴컴하구나.
푸른 연못이 그림자를 비쳐 거울같이 밝은데, 영검(靈劍)이 어느 해에 저 바깥 끝에서 나왔던고," 하였다.
대화궁(大花宮) : 유지(遺地)가 부 북쪽 30리에 있다. 고려 인종(仁宗) 6년(1128)에 임원역(林原驛)을 옮겨 새 궁을
짓고 뒤에 대화라 일컬었다. 처음 터를 이룩할 때에 묘청(妙淸)이 최홍재(崔弘宰) 등 재신(宰臣) 3, 4명과 일을 맡
은 역사원리(役事員吏)들을 시켜 다 공복(公服)을 입고 줄지어 서게 하고, 장군 네 사람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사방에 서게 하고, 졸병 1백 20명과 창을 든 군사 3백 명과 횃불 든 사람 20명을 시켜 촛불을 들고 둘러
세운 뒤에, 묘청이 한 가운데 서서 길이가 3백 60보(步)가 되는 흰 삼줄[麻繩] 네 가닥을 사면에서 잡아당기게 하
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것은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으로, 선사(禪師) 도선(道詵)이 강정화(康靖和)에게
전하고 정화가 내게 전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백수한(白壽翰)을 얻어서 전하니 뭇사람의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드디어 대궐을 지어 팔성(八聖)을 대궐 안에 봉안(奉安)하되 백두 성인(白頭聖人)을 선두로 하였다.
정지상(鄭知常)이 제문(祭文)을 짓기를, "날쌔지 않고도 빠르며 다니지 않아도 이르나니 이를 이름하여 하나를
얻은 영(靈)이요, 없는 듯하면서 있고 찬 듯하면서 비었으니 대개 본래의 불(佛)을 이름이다.
오직 하늘의 명이라야 만물을 제어할 수 있고, 오직 흙의 덕이라야 사방을 통치할 수 있다. 이에 평양 가운데 이
대화(大花)의 지형을 골라 궁궐을 새로 이룩하고 천지와 같이 공경할새 팔선(八仙)을 그 안에 모시고 백두를 받
들기 시작하니, 거룩한 빛이 계신 듯, 오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려고 하도다. 황홀한 지진(至眞)은 비록 형용할
수 없으나 고요한 것이 실덕(實德)이다. 바로 이것이 여래(如來)인지라,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하고 현관(玄關)
을 두드려 기향(祈嚮)하나이다." 하였다. 묘청 등이 요술(妖術)로 임금을 속임이 대개 이와 같았다.
주궁(珠宮) : 옛터가 부 서쪽 10리에 있다. 용언궁(龍堰宮) : 옛터가 부 북쪽 4리에 있다.
예종 때에 술사(術士)가 참설(讖說)로써 왕에게 권하여 서경(西京) 미르터[龍堰]에 나아가 궁궐을 창건하고
때때로 순행(巡幸)하라 하니, 왕이 내인(內人) 정극공(鄭克恭)과 사천 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과 태사령
(太史令) 음덕전(陰德全)ㆍ오지로(吳知老)와 주부 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 등을 보내어 미르터의 옛터의
지상(地相)을 보게 하고 양부(兩府) 및 장령전(長齡殿)의 교감 유신(校勘儒臣)들에게 명하여 회의하게 하니,
모두 괜찮다고 하되 오연총(吳延寵)이 홀로 말하기를, "남경(南京)의 역사가 방금 끝나 백성들이 피곤하고 재력이
궁핍하니 새 궁을 일으킴이 불가합니다. 만일 순어(巡御)하시려면 옛 궁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이 또 태사관(太史官)의 장주(狀奏)를 근거로 하여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임어(臨御)하신 지 지금 2백여 년이니, 왕기(王基)와 왕업(王業)을 늘이시려면 마땅히 미르터의 새 궁궐을 창건
하여 그리로 이어(移御)하여 조회를 받고 새 법령을 반포하소서." 하니,
연총이 반박하기를, "이제 미르터궁을 짓는 데 세 가지 불가함이 있습니다. 문종(文宗)의 총명함으로도 오히려
술수(術數)에 현혹되어 서경의 좌우궁을 지었다가 조금 있다가 깨닫고 뉘우쳐 아무런 감응(感應)이 없다고 하여
마침내 순어(巡御)하지 않고 헛되이 재력만 낭비하였으니 그 불가함의 첫째요, 근자에 남경을 개창(開創)한 지가
8년이나 되는데 아무런 길(吉)한 감응이 없으니 그 불가함의 둘째요, 양경(兩京)의 옛 궁이 지금 구하는 미르터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지세(地勢)의 길흉이 반드시 다르지 않고, 하물며 징험(徵驗)할 만한 분명한 비결(?訣)이 없
는 터에 조종(祖宗)의 옛 궁을 버리고 따로 새 궁궐을 지어 집들을 헐어버리고 백성들을 소동하게 함이 그 불가함
의 셋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영단(英斷)을 내려 의심치 말고 한결같이 노신(老臣)의 아뢴 대로 옛 궁에 순어
하여 사직의 장구한 계책을 강구하고, 억설(臆說)을 좇아 함부로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마소
서." 하였으나, 왕이 마침내 홍사 등의 말을 좇으니, 그때의 여론이 애석히 여겼다.
○ 최자(崔滋)이 부(賦)에 "용언궁ㆍ구제궁(九梯宮)이 있는데, 아득하고 이리저리 얽히고 환하고 높아 우주를
닫았다 열었다 하는 듯 동서를 분간치 못하겠으니, 하늘도 그 구조를 빼앗을 수 없고 귀신도 그 공력을 다툴 수
없다." 하였다.
영춘루(迎春樓)ㆍ청원루(淸遠樓) : 최자의 부에, "다경루(多景樓)는 창해(滄海)를 걸쳐 있고 청원루는 반공중에
솟아 있다." 하였다. 다경루(多景樓) : 부 서쪽 9리 양명포(揚命浦) 위에 있다. 대안(對岸)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다락을 걸쳐 있는데, 아래로 배가 통할 만하다. 지금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예종 11년(1116)에 왕이 당포(唐浦) 옛 성(城) 문루(門樓)에 행행(行幸)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환상(歡賞)하면서 그 다락을 다경루라 이름했다고 하는데, 그 소재지가 지금 가리키는 곳과 같지
않으므로 두 설(說)을 다 적어두어 아는 자를 기다린다.
○ 김부식(金富軾)이 묘청(妙淸)을 칠 때에 강을 따라서 성(城)을 쌓으니,
선요문(宣耀門)에서부터 다경루까지 모두 1천 7백 34칸이었다.
○ 김극기(金克己)의 채상자사(採桑子詞)에, "자라 머리[鼇頭] 도는 곳에 황금 대궐이 우연히 사람 사는 곳에서
떨어졌는데, 임금님이 오셔서 즐거워하신 곳, 한눈에 구슬밭이 만경(萬頃)이나 넓구나.
긴 바람이 문득 일어 높은 물결을 불어내니, 마치 은산(銀山)을 뒤집는 듯. 해는 이미 세 발이나 올랐건만,
새벽 기운이 어스름하여 가벼운 추위를 보내누나." 하였다.
○ "집 동산이 적적하여 봄이 반쯤 되려 해도, 봄빛이 아직도 난만하네. 연기가 자욱한데 여린 버들은 긴 가지 짧은
가지를 드리웠고, 비가 멎으니 꽃이 한창 울긋불긋 섞였네. 옛날에 궁중에서 함께 놀며 구경하던 일을 회상하니,
눈물이 떨어지고 애가 끊어지려 하네. 종이를 가지고 그윽한 회포를 쓰면서,
소광(疏狂)을 잊은 채 시(詩)와 술을 짝하네." 하였다.
유미정(有美亭) : 상안전(常安殿) 안에 있다. 고려 숙종(肅宗) 7년(1102)에 미화정에서 잔치를 하며 정자 이름을
고쳐 유미라 사액(賜額)하고, 이어 어제(御製) 한 편을 짓고 유신(儒臣)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라고 명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월성(月城) 북녘 가에 강을 벤[枕] 정자, 선경(仙境)이 그윽하고 기이하여 이름짓기 어렵더니,
문득 어필(御筆)로써 유미라 쓰니, 서도(西道) 사람이 만고에 함께 영광을 자랑하리." 하였다.
봉황대(鳳凰臺) : 부 서남 10리 다경루(多景樓) 서쪽에 있다.
○ 홍간(洪侃)의 시에, "거울 속 산빛은 연꽃이 비낀 듯한데, 옛사람을 생각하니 뒷사람 구슬프네.
처음 봉한 기자(箕子)는 이름만 헛되이 남아 있고, 멀리 옮겨온 진인(秦人)은 사적이 아득한데, 지작관(?鵲觀)이
기울어 소나무와 가죽나무만 컴컴하고, 봉황대가 무너져 풀만이 더북더북. 이따금 산협(山峽)에 비가 날아 우박
이 되고, 해마다 강 뗏목이 누운 채 꽃피네. 봄을 끌며 벌판에 소들, 밭가는 것 두려워하고, 잎 사이로 마을 피리
화답하는 뻐꾹새. 숨은 선비가 제법 홍릉담(紅綾?)을 말하기도, 뽕따는 여인은 아직도 옥수가(玉樹歌)를 전하
누나. 성곽(城郭)엔 학(鶴)이 된 몸이 왔다가 또 가고, 고금(古今)은 달팽이의 촉각, 고요하다가 다시 떠들썩.
연이은 흥망(興亡)이 어느 때나 그치리, 어여차 배젓는 소리에 강물이 물결치네." 하였다.
첨성대(瞻星臺) : 유지(遺趾)가 부 남쪽 3리에 있다. 기린굴(麒麟窟) : 구제궁(九梯宮) 안 부벽루 아래에 있다.
동명왕(東明王)이 이곳에서 기린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뒷사람이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이 기린말을 타고 이 굴에 들어오니 땅속에서 조천석(朝天石)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말발굽 자국이
지금까지 돌 위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주몽(朱蒙)이 말을 타고 하늘에 조회하려고, 고개 중턱 금당(金塘)에 옥기린(玉麒麟)을 길렀네.
문득 채찍을 떨어뜨리고 끝내 아니 돌아오니, 구제궁(九梯宮)에 누가 다시 가을 하늘에 오를꼬."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기린은 백운굴(白雲窟)을 떠났고 용(龍)은 방초주(芳草洲)로 돌아갔네.
강산이 바로 어제 같은데, 손[客]이 홀로 다락에 올랐구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멀고 먼 지난 일이 괴상하고도 신비하니, 성동(城東)에 있는 굴을 기린굴이라 이르네.
동명왕이 여기에서 하늘 위로 조회했다고. 큰 돌이 전처럼 물가에 남아 있네. 원수(沅水)는 근원이 깊으니 세상을
피할 만하고, 구지(九池)는 구멍이 좁아 겨우 몸을 용납할 만하다. 전설이 족히 담소(淡笑)의 재료가 될 만하니,
지나는 손[客]이 구태여 진위(眞僞)를 따져 무엇하리."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산 앞의 굴이 가장 깊고 그윽한데, 말 들으니 진인(眞人)이 옛날 여기에 머물렀다고. 기린이 절로
길들어 하늘 위에 갔고, 귀신이 길잡이 되어 땅속에 놀았다네. 가물가물 길이 있어 선부(仙府)에 통하였고,
아득히 자취 없이 세속을 초월했구나. 괴상한 일 말함이 성도(聖道)는 아니나, 시를 써 애오라지 전설을 적어두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동명왕이 좋은 말을 가졌었는데, 하늘로 다니는 기린이라 하네. 기린의 발굽이 아직도
자국이 있건만, 공족(公族)은 지금 몇 사람인고."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말을 타고 하늘로 조회하러 갔으니, 한번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구나. 뒷사람이 이 굴을
보매, 아직도 말이 나오는 듯하구나." 하였다.
조천석(朝天石) : 기린굴 남쪽에 있다. 위에도 보인다.
○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시에, "하늘? 갔다 왔다 하늘 정사(政事)에 참예했으니, 조천석 위에 기린의 발굽이
가벼웠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기린을 한번 타고 하늘에 올라 조회하니, 부질없이 인간에게 눈물이 줄줄 흐르게 하네.
오직 신령한 바위 서너 개 삐쭉 남아 있어, 푸른 강가에 밀물이 나고 드네." 하였다.
○ "옥황(玉皇)께 조회하여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신령한 바위 하나가 아직도 또렷하구나.
옥 채찍을 수습하여 어느 곳에 묻을고. 북봉(北峯)이 높이 흰구름 가에 버티어 섰네." 하였다.
○ 이첨의 시에, "넓적하게 서린 강 돌이 사면으로 통했는데, 하늘에 조회한 유적(遺跡)이 마침내 어디로 갔는고.
푸른 돌 뿌리가 우뚝 중류에 솟아 있고, 흰 물결이 양편 기슭 바람에 쾅쾅 부딪히네. 구름은 아득히 기린 굴에
이어졌고, 달빛은 나뉘어 제왕궁(帝王宮)을 비추네. 어룡(魚龍)이 적막하고 신선이 멀리 간 뒤,
지금은 이끼 낀 돌에 낚시꾼 늙은이가 앉아 있을 뿐이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강 가운데 반석(盤石)을 조천이라 이름하니, 황당한 이 말이 예로부터 전하네.
굴속 구멍이 어찌 도로로 통한단 말가. 허공에 운연(雲煙)을 타기가 쉽지 않도다. 신인(神人)은 절로 범인과는
달랐겠지. 지난 일은 모두 가는 물 따라 옮아갔네. 천년 뒤 백은탄(白銀灘) 아래 나루터에는, 이제는 오직 오가는
배만 있을 뿐."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사람도 신선이요 말도 또한 신선, 물은 가도 돌은 안 갔구나. 지금까지 말발굽 자국이 남아서,
부로(父老)들이 그 자리를 가리키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그날에 하늘에 조회하던 일은, 전하는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만, 강가에 돌이 그윽히 홀로 있어서,
지금까지 말발굽 자국이 머물렀다네." 하였다.
패강진(浿江鎭) : 신라 선덕왕(宣德王) 3년(782)에 왕이 한산주(漢山州)에 순행(巡幸)하여 민가(民家)를 패강진
으로 옮겼다. 헌덕왕(憲德王) 8년(816)에 우봉 태수(牛峯太守)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패강 장성(長城)을 쌓았다.
혹은 말하기를, "이 진은 황해도 우봉현의 패강(浿江)에 있다."고 한다.
용덕부(龍德部) : 고려 선종(宣宗) 3년(1086)에 용덕부 남쪽 거리에 땅 거울[地鏡]이 나타났는데, 모두 70여 보
(步)로 물에 그림자가 비친 것 같았다. 숙종(肅宗) 10년(1105)에도 용덕부 제연(梯淵) 길에 땅 거울이 또 나타났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땅을 명월리(明月里)라 한다.
제연(梯淵) : 부 남쪽 3리에 있으니, 곧 대동강의 하류이다. 선종이 이 연못에 행행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술잔치
를 벌이고 강물을 따라 대동강에 이르러 활쏘기를 보았다. 숙종(肅宗) 7년(1681)에 왕이 이 연못에 행행하였을
때 잠수질을 잘하는 금군(禁軍)에게 명하여 옛 사다리 터를 찾으라 하니, 금군이 아뢰기를, "땅 밑 10자[尺]에
사다리 주춧돌이 있다." 하였다.
기린각(麒麟閣) : 부 북쪽 5리에 있다. 인종(仁宗) 5년(1627)에 왕이 서경에 거둥하여 기린각에 나아가 승선(承宣)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열명(說明)과 주관(周官)을 강의하고 정지상(鄭知常)에게 무일(無逸)
편을 강의하게 하고, 호종(扈從)한 신하들과 서경의 유신(儒臣) 25인이 시를 지었으므로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10년에 또 이 각에 나아가 윤언이(尹彦?)에게 명하여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강의하게 하였다.
정전(井田) : 외성(外城) 안에 있다. 기자 때 구획한 정전인데,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다. 신증 당고의 시에, "새벽에
성 남문을 나가니, 구일(九一)의 형제(形制)가 보이는구나. 진(秦) 나라의 법령이 소털과 같았어도, 천맥(阡陌)은
그대로 폐(廢)해지지 않았네."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제도는 폐했으나 정 자 구획은 남았으니, 내가 보매 감회가 생기네. 우물 위에 있는 인가는,
정(井)의 안인가 바깥인가 모르겠네." 하였다.
개마대산(蓋馬大山)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그 동편은 곧 옛날 동옥저국(東沃沮國) 땅이다." 했다.
○ 살펴보건대, 《자치통감(自治通鑑)》에, "수 양제(隋煬帝)가 고려를 칠 때 좌(左) 12군(軍)이 개마(蓋馬) 등
길로 나와 압록수(鴨綠水) 서편에 모였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개마는 현도군(玄?郡)에 속하며 개마대산이
있다." 하였고, 《한서(漢書)》에는 "현도군 서편 개마현에 마자수(馬?水)가 있다." 하였고,
《당서(唐書)》에는 마자수를 압록강이라 하였다. 고려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며,
남으로는 장주(長州)ㆍ정주(定州) 두 고을에 이르며, 서북은 개마산에 끼어 있다." 하였는데,
구성은 지금 함경도에 속하고 그 서북은 여진(女眞)의 땅이니, 개마산이 평양의 지경이 아니다. 또 수(隋)의 군사
가 개마 길을 나와 압록수 서편에 모였다 하였으니, 이 산은 아마 압록강 밖 서북 경계에 있는 듯하다.
고구려가 한창 성했을 때 요하(遼河)를 걸쳐 소유하였으니, 이 산이 그 경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통지》는 평양이 고려의 옛 도읍이므로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마산이 확실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자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그대로 두어 의심되는 대로 전한다.
마읍산(馬邑山) : 《일통지》에 "평양성 서남에 있다." 했다. 당(唐) 소정방(蘇定方)이 마읍산을 빼앗아 드디어 평양
을 포위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산이다. 시원(柴原) :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장사를 할 때 무덤에 이르러 자살하는 자가 몹시 많아 나라 사람들이 풀[柴]
을 베어 그 시체들을 덮었으므로 드디어 그 땅을 시원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지금은 그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대성산성(大城山城) : 돌로 쌓았고, 둘레가 2만 4천 3백 척이다.
장안성(長安城) : 대성산 동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5천 1백 61척이요. 높이가 19척이다.
○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28년(586)에 평양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성 가운데에 안학궁(安鶴宮) 옛터
가 있다. 적두산성(赤頭山城) : 흙으로 쌓았다. 평양강 서쪽에 있으며, 둘레가 5천 1백 척이요, 높이가 11척인데,
김부식이 쌓은 것이다.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부식이 이곳에 군병을 주둔하였다.
목멱산사(木覓山祠) : 성 동쪽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 3년(1012)에 서경 목멱사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또 목멱사가 있어 농사를 맡아보니, 밭을 갈지 않아도 벼가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했다. 금강사(金剛寺) : 유기(遺基)가 부 동북쪽 8리 있다.
흥국사(興國寺) : 유기가 부 성안에 있다. 남망일사(南望日寺) : 마둔산(麻屯山)에 있다.
북망일사(北望日寺) : 소산(所山)에 있다. 중흥사(重興寺) : 병현(竝峴)에 있다.
김부식이 묘청을 칠 때에 우군(右軍)이 중흥사에 주둔하였다.
흥복사(興福寺) : 부 남쪽 1백 보(步)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비 온 뒤에 동산꽃이 불그스레 피었고, 연기가 자욱,
마을의 버들은 비스듬히 푸르렀네.
교묘한 하늘의 솜씨를 누가 나누어 받아서 금수(錦繡)로 백만 집을 치장했는가." 하였다.
연창교(連滄橋) : 부 서남쪽 12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흰 모래 푸른 풀 또 구름산, 게다가 긴 냇물이 한가히 흘러가네. 눈에 가득한 경치를 이루 다
할 수 없으니, 난간에 사람이 그림 속에 앉았구나." 하였다.
통한교(通漢橋) : 부 서남쪽 5리에 있다.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동명왕이 하늘로 올라갈 때 통한교를 경유하여
구제궁(九梯宮)으로 내려갔다." 한다.
○ 김극기의 시에, "홍예교(虹霓橋)가 멀리 걸려 은만(銀灣)을 둘렀는데, 한(漢) 나라 사성(使星)이 몇이나 왔다
갔는고. 한 조각 직녀(織女)의 베틀 아래 돌 옆에, 석류꽃이 오랜 세월에 인간에 널렸구나." 하였다.
연우교(延祐橋) : 김극기의 시에, "내려다보니 인간의 백만 집들, 공중에 어른어른 나무가 춤을 추네. 먼 산 가까운
봉우리에 구름이 뭉쳤다 흩어졌다 하니, 천지간에 기상이 변하기도 잘하네." 하였다.
청운교(靑雲橋)ㆍ백운교(白雲橋) : 모두 구제중 터 안에 있는데, 동명왕 때의 사다리이다.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요
인간의 솜씨를 빌리지 않았다. 임원역(林原驛) : 부 북쪽 20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몇 봉우리를 격하여 외로운 역(驛)을 찾아내니, 수풀 사이에 삽살개 컹컹 짖는 소리가 들리네.
무너진 벼랑이 구불구불 구름사다리를 뚫고 나서, 끊어진 시내에 비틀비틀 돌다리를 건너네.
아득한 역정(驛亭)은 멀기도 혹은 가깝기도, 멀리 보이는 장승은 혼자거나 혹은 한 쌍. 머리를 들어 바라보매
하늘이 가 없으나, 가노라면 조만간 수강성(受降城)을 지나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김암(金巖) : 유신(庾信)의 후예. 패강진(浿江鎭)의 두상(頭上)이 되어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
들을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농사짓고 남은 여가에 육진(六陣) 병법(兵法)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다 편리하게
여겼다. 일찍이 황충[蝗]이 서쪽으로부터 패강 경계에 들어와 온 벌판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
김암(金巖)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을 사르면서 하늘에 기도하자, 문득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황충이 모두 죽었다.
고려 왕식렴(王式廉) : 태조(太祖)의 사촌 아우. 사람됨이 충직하고 용감하며 부지런하고 삼가하였다. 태조가 평양
이 황폐하므로 백성들을 옮겨 충실하게 하고, 식렴을 명하여 출진(出鎭)케 하니, 항상 사직을 호위하고 국토를
개척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악(廷?) : 태조 13년에 서경에 거둥하여 학원(學院)을 창설하고 정악에게 명하여 서학 박사(書學博士)를 삼아
육부(六部)의 생도들을 모아 교수케 하였다. 뒤에 그가 학교를 진흥하였다는 것을 듣고 비단을 하사하여 권장
하였고, 또 곡식 1백 석을 하사하여 학보(學寶)를 삼았다. 보(寶)란 방언(方言)으로 돈과 곡식을 시주로 바쳐서
본전은 남겨두고 이자만을 취하여 오래도록 이익이 되므로 보(寶)라 이른다.
박충숙(朴忠淑) : 현종(顯宗) 2년(1011)에 부유수(副留守)가 되었다.
최사위(崔士威) : 현종 2년에 유수(留守)가 되었다. 이방(李昉) : 현종 2년에 부유수가 되었다.
장영(張瑩) : 현종 4년에 유수가 되었다. 이주헌(李周憲) : 현종 7년에 유수가 되었다.
채충순(蔡忠順) : 현종 13년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유수를 겸하였다.
이공(李?) : 현종 22년에 사공 좌복야(司空左僕射)로 판유수(判留守)가 되었다.
원영(元穎) : 덕종(德宗) 2년(1033)에 부유수가 되었다.
최호(崔顥) : 정종(靖宗) 8년(1042)에 부유수가 되어, 판관(判官) 나지설(羅旨說), 사록(司錄) 윤렴(尹廉), 장서기
(掌書記) 정공간(鄭公幹) 등과 함께 왕명을 만들어 새로 《양한서(兩漢書)》와 《당서(唐書)》를 간행하여 바치니,
아울러 벼슬을 주었다.
이장용(李藏用) : 사록(司錄)에 조용(調用)되었다. 채정(蔡靖) : 고려 초의 유수이다.
윤택(尹澤) : 검열로서 권참군(權參軍)이다. 손님을 대접함에 법도가 있었다.
강감찬(姜邯贊) : 현종(顯宗) 9년에 서경 유수 내사시랑(西京留守內史侍郞)을 제수하였다. 왕이 손수 고신(告身)
에 쓰기를, "경술 연간에 되놈의 난(亂)이 있어 병기가 깊이 한강(漢江) 가에 들어왔는데, 그 당시에 강공의 계책
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고 했다.
왕가도(王可道) : 성종(成宗)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장서기(掌書記)가 되었다. 현종 5년에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ㆍ최질(崔質) 등이 난을 일으켜 이로부터 무신이 권력을 부리고 사나운 놈들과 흉악한 녀석들이 문관
의 벼슬을 띠고 대각(臺閣)에 널려 있어 정사가 여러 세도가에서 나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가도가 화주 방어사(和州防禦使)로 임기가 다 되어 서울에 돌아와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마음이 분격하여 비밀
리에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왜 한 고조(漢高祖)가 운몽(雲夢)에서 노닐던 것을 본받지 않는가?"
하니, 김맹이 그 뜻을 알아듣고 가만히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가도는 일찍이 서기(書記)가 되어 자못 인심을 얻었으므로 바로 임시로 서경 유수 판관으로 임명하여 즉시 먼저
가서 준비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 왕이 서경에 거둥하여 뭇 신하들과 장락궁(長樂宮)에서 잔치할 때,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마침내 김훈과 최질을 주살(誅殺)했다.
김심언(金審言) : 목종(穆宗) 때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나가 유수가 되었다.
김문연(金文衍) : 부사가 되었다. 곽상(郭尙) : 숙종 때에 유수가 되었다.
김약온(金若溫) : 예종 때에 유수가 되었다.
김정순(金正純) : 김부식을 쫓아 서도(西都)를 토벌하여 평정하였고, 뒤에 유수를 겸하였다.
조위총(趙位寵) : 의종(毅宗) 말년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유수가 되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의종을 시해하고 명종(明宗)을 세우니, 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중부 등을 주살코자 꾀하자
절령(?嶺) 이북 40여 성(城)이 다 응하였다. 그때에 의종을 아직도 장사지내지 않았었는데, 위총이 그들의 임금
을 시해하고 장사지내지 않은 죄를 성토(聲討)하자 그제야 발상(發喪)하고 희릉(禧陵)에 장사하였다.
명종이 윤인첨(尹麟瞻)을 보내어 서경을 공격해 격파하고 드디어 위총을 죽였다.
정의(鄭?) : 고종(高宗) 4년(1217)에 서경 분사(西京分司)가 되었다. 그때 마침 성주(成州) 사람 최광수(崔光秀)가
서경 병마사(西京兵馬使)를 죽이고 그 성(城)을 점거하여 고구려를 흥복(興復)하겠다고 소리치며 격서(檄書)를
전하며 선동하였다. 정의가 크게 노하여 도끼를 소매에 넣고 필현보(畢玄甫)ㆍ신죽(申竹)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가서 광수를 쳐 죽이고 그의 당(黨) 8천 인을 주살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붙였다. 고종이 크게 기뻐하여 높이 중랑
장(中郞將)을 제수하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주고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였다.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긴 다음 해에 필현보가 서경에서 배반하니, 조정에서 정의를 보내어 선유(宣諭)케 하였다.
정의가 대동강에 이르니, 종자(從者)가 급히 들어가지 말라고 청하자 정의가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왕명을
받고 나왔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지체하겠는가." 했다. 현보를 보자, 현보가 정의를 얻은 것을 기뻐하여 의
로써 우두머리를 삼고자 한편으로는 달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였으나, 정의는 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살해당했다.
장일(張鎰) : 고종 39년(1252)에 다시 유수 벼슬을 설치하고 이응(李凝)으로 부유수(副留守)를 삼고 장일로 사록
(史錄)을 삼고 겸하여 서기(書記)를 맡게 하였다.
민적(閔?) : 충선왕(忠宣王) 원년(1308)에 부윤(府尹)이 되었다.
민보(閔甫) : 충선왕 2년에 부윤이 되어 존무사(存撫使)를 겸하였다.
김사원(金士元) : 충선왕 3년에 부윤이 되었다. 방우선(方于宣) : 충선왕 3년에 부윤이 되어 안정도 존무사(安定道
存撫使)를 겸하였다.
장선(張瑄) : 충선왕 4년에 검교평리행부윤(檢校評理行府尹)이 되었다.
윤지표(尹之彪) : 충목왕(忠穆王) 3년(1347)에 부윤으로 서북면 존무사(西北面存撫使)를 겸하였다.
장항(張沆) : 충혜왕(忠惠王) 때에 부윤이 되었다. 이언충(李彦?) : 부윤이 되었다.
본조 임정(林整) :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부윤을 겸하였다.
조온(趙溫) : 홍무(洪武) 임신년(1392)에 도순문사로 부윤을 겸하였다.
이거이(李居易) 홍무 갑술년(1394)에 서북면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부윤을 겸하였다.
권제(權?) : 선덕(宣德) 정미년(1427)에 관찰사로 부윤을 겸하였다.
황희(黃喜) : 영락(永樂) 정유년(1417)에 도순문사로 부윤을 겸하였다. 이원(李原) : 부윤이 되었다.
한확(韓確) : 정통(正統) 정묘년(1447)에 관찰사 겸 부윤이 되었다.
안숭선(安崇善) : 정통 정묘년에 관찰사 겸 부윤이 되었다. 기건(奇虔) : 부윤이 되었다.
조효문(曺孝門) : 이윤인(李尹仁)ㆍ현석규(玄碩圭)ㆍ김지경(金之慶)ㆍ이파(李坡) : 모두 관찰사 겸 부윤이 되었다.
인물고구려 온달(溫達) : 용모가 껄렁[龍鐘]하여 우스웠으므로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일컬었다. 양강왕(陽岡王)
의 어린 딸이 스스로 나서서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급(級)을 베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분발해 쳐서 크게 이겼다. 왕이 가상히 여겨
탄식하기를, "과연 내 사위로다." 하고 대형(大兄) 벼슬을 주었다. 평강왕(平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베어 저희 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한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
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하건댄,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말고 군사를 주어 가게 한다면 반드
시 우리 땅을 회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이 떠날 때에 임하여 맹세하기를, "계립고개[鷄立峴]ㆍ죽령(竹嶺) 이서를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드디어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널[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지라, 공주가 널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삶이 다르니, 아,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널이 움직여 장사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 : 수 양제(隋煬帝)가 대장군 우문술(宇文述)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쳤다. 문덕이 사자(使者)
를 보내 거짓 항복하기를, "만일 군사를 돌리면 마땅히 우리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조회하겠다."
하니, 우문술이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우므로 그 거짓을 인하여 드디어 방진(方陣)을 만들어
돌아가는데,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 문덕이 치니 제군(諸軍)이 모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하루낮, 하루밤에 4백 50리를 가 압록수에 이르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수(遼水)를 건널 때에 군사가
30만 5천 명이었으나 요동성(遼東城)에 돌아가니 겨우 2천 7백 명이었다.
고연수(高延壽)ㆍ고혜진(高惠眞) : 모두 고구려의 종성(宗姓)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동정(東征)할 때 연수가
북부의 주장(主將)으로, 해진이 남부의 주장으로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安市城)을 구하다가 태종에게
사로잡혔다.
고려 오선각(吳先覺) : 묘청(妙淸)의 난에 거짓 어리석은 체하고 부역(附逆)하지 않았다.
조인규(趙仁規) :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조서(趙瑞)ㆍ조련(趙璉)ㆍ조위(趙瑋) :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이다. 조덕유(趙德裕)ㆍ조린(趙璘). 본조 조준(趙浚) : 평양 부원군이다. 조박(趙璞) : 평원군(平源君)에 봉해졌다.
○ 이상 조씨는 상원군(祥原郡) 편에 자세하다.
효자고려 박광렴(朴光廉) : 성종(成宗) 때의 사람으로, 모란리(牧丹里)에 살았다. 어머니가 죽은 지 7일에 문득
보니 고목(枯木)이 어머니 얼굴과 흡사한지라, 즉시 방안에 모시고 살아 있는 듯이 받들었다.
황수(黃守) : 대대로 본부(本府)에 살았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부(府)의 잡재서 승(雜材署丞)이 되었는데,
부모의 나이가 모두 70여 세로, 날마다 삼시(三時)에 맛난 음식을 차려 먼저 부모에게 받들고 물러나 형제들과
함께 먹기를 20여년 동안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본조 백형(白亨) :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여막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드려 삼년상을 마쳤다.
조정에서 듣고 정문(旌門)을내리고 복호(復戶)하였다.
최부삼(崔夫三) :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려 수년이 되어도 낫지 않자 왼쪽 무명지를 잘라 약에 타서 드리자 병이
나았다. 조정에서 듣고 정문을 내렸다. 김경리(金景利) : 아버지가 미친 병에 걸려 몇 달이 되어도 낫지 않자
오른손의 무명지를 끊어 약에 타서 드리니 이내 나았다. 조정에서 듣고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신증 백현(白絢) : 아버지가 죽자 무덤에 여막을 짓고 상을 마쳤으며, 어머니를 받들어 무덤 곁으로 옮겨서
살았다. 본도의 감사가 그 효행을 가상하게 여겨 영숭전(永崇殿) 지기[直]로 임명하였으나 어머니가 계시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입자 또 정(情)과 예(禮)를 다하여 아침저녁으로 20여
년간 전드리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때 나이 72세였다. 조정에서 듣고 정문을 내렸다.
김일광(金日光) :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얻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조정에서 듣고 정문
을 내렸다. 김의광(金義光) : 어머니가 악질을 얻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조정에서 듣고
정문을 내렸다.
제영 푸른 창, 주홍 문에 피리 섞인 노랫가락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호화로운 거리, 봄바람에 가랑비 지나가니,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버들가지 비껴 있네. 푸른 창, 주홍 문에 피리 섞인 노랫가락, 목멘 듯 들려오니 집집이 기생
방일세." 하였다.
먼 들에 판판하기 손바닥 같네 : 정총(鄭摠)의 시에, "강 언덕에 내 말에게 꼴을 먹이며, 풀을 깔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네. 먼 들은 판판하기 손바닥 같고, 낮은 메는 멀리 눈썹 같구나, 성(城)을 둘러 강은 넘실넘실 흐르고,
언덕 저편에 나무는 우거졌네. 먼 옛날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누가 거듭 베풀어 시행하리." 하였다. 성(城) 머리
의 해묵은 나무는 숫제 해를 가리고 : 정추의 시에, "성 머리의 해묵은 나무는 숫제 해를 가리고, 산꼭대기의 높은
다락은 멀리 바람을 끌어오네." 하였다.
장성(長城) 한쪽에 도도히 흐르는 물 : 김황원(金黃元)의 시에, "장성 한쪽에 도도히 흐르는 물이요, 대야(大野)
동편 끝에 점점이 산들." 하였다.
○ 《동인시화(東人詩話)》에, "황원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고금의 제영(題詠)들을 보니 모두 제 뜻에 차지
않는지라, 곧 바로 현판들을 불사르고 나서 온종일 난간에 기대어 시를 지으려고 애쓰다가 오직 이 한 구절을
짓고 나서 시상(詩想)이 마르니 통곡하고 갔다." 하였다.
봄바람에 준마 타고 긴 성(城)을 둘러 가니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봄바람에 준마 타고 긴 성을 둘러 가니,
물은 멀고 하늘은 길고 갠 날씨가 산뜻해라." 하였다.
푸른 버들 늘어선 인가(人家)에 물이 동에도 서에도 : 김극기의 주암사(酒巖寺) 시에, "남으로 바라보니 대동강의
물은 아득한데, 푸른 버들 늘어선 인가에 물이 동에도 서에도." 하였다.
팔영(八詠) : 조위(曺偉)의 시다. 을밀대의 봄놀이 : 금수산(錦繡山) 높은 누대(樓臺), 벼랑 아래 강인데, 하룻밤
봄 바람에 꽃피어 비단일세. 풀빛이 연기와 어울려 봄이 아롱졌구나. 세월이 빨리 흘러 나는 새 같은데, 봄빛이
한창이로다. 술 가지고 내일 다시 오려 하나, 행여나 꽃 떨어지고 봄이 갈까 두렵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구름이 열리자 금수산 빛 짙은데, 모란봉이 불긋푸릇 겹겹이 둘러섰네. 빈 대(臺), 묵은
돌에 이끼가 덮였는데, 신선이 한번 간 뒤 찾아도 종적 없네.
동풍(東風)이 일찍 봄 만들어 내어, 온갖 꽃들 난만히 꽃다운 풀을 덮었네. 이 고장 사람들 거문고와 퉁소로 좋은
시절을 즐기려고, 술이 얼근하자 일제히 '봄빛 좋다'를 외치누나." 하였다.
부벽루에 달구경 : 집은 반공중에 솟고 산들은 나지막한데, 난간에 기대 서자 어허, 저게 달 아닌가. 떨어져 물에
잠기니 유리 쟁반 같아라. 물과 하늘 다 푸른데 흰 것은 갈 꽃[蘆花]이고, 밤이 깊어 오자 이슬바람 차겁구나,
저 신선 다시 불러와 쇠젓대를 불리라."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빛나는 누각이 불끈 솟아 붉고 높직하니, 강에 비친 그림자가 허공에 흔들흔들. 항아(姮娥)
가 옥도끼 그림자를 한들한들 휘두르니, 열두 난간에 구슬이 엉키었네. 눈가루 날리듯 분분(紛紛)히 떨어지는
향기로운 계수 꽃이, 흩어져 맑은 빛 되어 살과 뼈를 비추네. 통소 소리 끊어지자 강 구름도 비었는데, 일어나
황류주(黃流酒) 쏟으니 두 귀가 뜨겁구나." 하였다.
영명사에 중을 찾음 : "강 구름이 컴컴하게 옻을 칠한 듯, 눈이 땅에 쌓여 무릎에 찰 만하구나. 새벽에 나귀 몰아
장경문(長慶門)을 나서니, 돌길이 하도 미끄러워 나귀만 자주 꾸짖네. 절문은 아직 닫혀 있고, 담 너머 차[茶] 달
이는 푸른 연기, 중 불러 담소하며 같이 토란 굽노라니, 이윽고 바람이 와서 풍경 소리 떵그렁."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강 머리의 찬구름이 흰 비단을 펼친 듯, 눈송이가 구슬 꽃을 펄펄 날리네. 가파른 돌길에 나귀
도 비틀비틀, 절에 도 높은 스님을 몸소 찾아왔네. 다병(茶甁)에 차 끓는 소리 지렁이가 우는 듯, 경(經)을 보는 밤
초가 불그레 흘러내리누나. 흰 머리로 앉은 선탑(禪榻)에 바람이 우수수 부니, 밤 깊자 푸른 소나무에 물결 소리
일어나네." 하였다.
보통문에 손을 보냄 : "푸른 버들 길에 붉은 다락 우뚝 솟았는데, 아지랑이 버들강아지가 수없이 날리네.
아침 비 한 줄기가 땅을 잠깐 축였는데, 제비ㆍ꾀꼬리는 봄이 간다고 우네. 해 가[日邊] 어느 곳이 천자님 서울
인가, 사신 행차 어서 가자 길 재촉하네. 술잔을 다 기울이고 작별할 적에, 구슬픈 이별 곡 소리 애를 아니 끊기
는가."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성서(城西)의 외길이 숫돌처럼 반듯한데, 양옆의 수양버들이 10리나 늘어섰네.
한들한들 황금 같은 만 올의 버들가지가, 봄바람에 길 떠나는 사람을 잡지 못하네. 가랑비 지나간 뒤 먼지도 안
이는데, 유연(幽燕)을 바라보니 구름도 많네. 소매 잡고 술잔 들고 차마 못 가는데, 곁 사람은 또 여구가(驪駒歌
이별할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였다.
차문(車門)에 배를 띄움 : "성남(城南) 지척 옛 나루터에, 맑디맑은 강물이 기름을 뿌린 듯. 장마 걷고 하늘이 높고
쌓인 그늘 흩어지니, 바람도 맑디맑아 가을인 줄 알리라. 여울에 배를 띄워 강물 소리 들으면서, 취한 목청으로
배따라기 맞받는데, 해오라기는 떴다 잠겼다 하늘 밖에 떴구나."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남호(南湖)의 흐르는 물이 비 개어 찰랑찰랑, 엷은 단장 짙은 칠이 서시(西施)와도 같구나.
목란요(木蘭橈) 삿대, 계수나무 돛대로 흰 물결을 날리니, 물 속에 비친 수없는 아미(蛾眉)의 그림자인가.
구슬픈 피리와 북소리, 푸른 구름 저물녘인데, 흰 갈매기 놀라서 봄바람에 훨훨 나네. 술병 들고 고금에 몇 사람이
노니는고, 모래 위 방초(芳草) 길에 애가 끊어지네." 하였다.
연당(蓮塘)에 빗소리 듣기 : "돌 귀틀, 모난 연못이 깊고도 깨끗한데, 만 송이 연꽃이 아름답게 서로 비치네.
새벽 햇살에 짙은 단장으로 교태를 다투니, 푸른 일산 붉은 구름이[蓮花] 거울 속에 흔들리네.
열두 보란(寶欄) 다락 윗머리에, 주렴(珠簾)이 산호(珊瑚) 갈구리에 걸려 올라갔네.
빗소리 주룩주룩 취한 꿈 놀라 깨니, 6월이 서늘하여 가을인 듯하여라."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옥정(玉井)의 연꽃이 향기가 은근한데, 붉은 구름이 거울에 비쳐 아리땁게 단장했네.
미친 바람이 비를 불러 푸른 일산 번득이니, 무수한 구슬이 만 개나 뛰노누나. 수정 발이 한들한들 서늘한 바람
일어오니, 그림 병풍 은촛대에 가을 빛이 새롭네. 무산(巫山)의 꿈을 깨어 문득 놀라 일어나 앉아, 보슬(寶瑟)을
가져다가 쌍원앙곡(雙鴛鴦曲)을 타보네." 하였다.
용산(龍山)이 석양 푸름 : 이어진 봉우리가 구불구불 용(龍)이 서렸는 듯, 깊은 골짜기가 첩첩, 몇 겹이나 되는고.
높직한 푸른 산꼭대기 다시 아니 신기한가, 화폭에 연꽃 한 송이 그려낸 듯하여라.
반쪽이 비를 띠어 구름이 시커멓더니, 구름이 지나가자 푸릇푸릇 몇 봉우리 섰네. 해질녘 턱을 고이고 바라보니
서늘도 한데, 푸르른 아지랑이 젖는 꿈을 모를까."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긴 하늘에 담담한 아지랑이가 떠오르니, 이어진 봉우리의 첩첩한 봉우리가 쪽빛보다 짙구나.
파란 연꽃인 듯 석양녘에 더욱 좋아, 행인이 머리를 쳐들고 가던 말[馬]을 멈추네. 저녁 노을이 금실금실 벌겋게
지려는데, 단풍나무 구름 속에 갈가마귀 번득이네. 어쩌면 왕마힐(王摩詰)의 솜씨를 빌려다가 이 맑은 경치를 다
그려 병풍에 옮겨볼까." 하였다. 마탄(馬灘)의 봄 물 불음 : "대동강이 밤낮으로 넘실넘실 흐르더니,
봄이 오자 푸른 포도빛으로 물들었구나. 눈 녹아 불은 물이 몇 삿대나 묻었는고. 여울에 성난 물결 뒤집는다.
저 사공 부르짖으며 노도 젓지 못하니, 풀잎만한 작은 배가 갈 길 몰라 헤매이네. 물따라 어느 결에 주암(酒巖)을
지나서야, 복사꽃 떠가는 물에 고이 떠서 가누나."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녹아 흐르는 봄 강이 반(半) 삿대라, 물이 불어 기슭을 치며 복사꽃 물결을 솟구치네. 어부들
이 죽지사(竹枝詞)를 다투어 부르며, 창파를 흘겨보며 노를 저어 나가네. 뱃머리에 잉어가 마름[菱] 꽃을 부는데,
낚싯줄이 하늘하늘 바람에 비끼었네. 잡은 고기로 술을 사 돈도 세보지 않고, 저 건너 노래 부르는 홍루(紅樓) 집
으로 가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인흥(仁興)ㆍ융덕(隆德)ㆍ예안(禮安) : 모두 부 동쪽에 있다. 의흥(義興) : 서쪽에 있다.
융흥(隆興)ㆍ지안(智安) : 모두 북쪽에 있다. 흥토(興土) : 성 남쪽에 있다. 내천덕(內川德) : 성(城) 가운데 있다.
외천덕(外川德) : 성 밖에 있다. 이상은 부(部)로 칭한다.
율사(栗寺)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지량(池梁) :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추오미(推吾未)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생이(?伊)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대동강(大同江) : 남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남제산(南祭山)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초리(草里) :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함지(蛤池)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고순화(古順和)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석다산(石多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95리이고, 끝이 1백 20리이며, 바닷가에 있다.
불곡(佛谷) : 위와 같고, 모두 바닷가에 있다. 초도동(抄道洞) : 서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85리이다.
유동(鍮洞) : 위와 같다. 반포(反浦)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반석(斑石)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5리이다.
잉차곶(芿次串)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감초(甘草) : 서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85리이다.
소을촌(所乙村) : 서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85리이다.
서시원(西施院)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임원(林原) : 동북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려대(金呂代)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부산(斧山)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재경(在京)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시족(柴足)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5리이다.
북삼리(北三里)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두용동(豆用洞) : 북쪽으로 70리이다.
남형제산(南兄弟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5리이다.
서제산(西祭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소초(所草)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석곶(石串)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성시 북성(北城) : 을밀대(乙密臺)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모란봉(牧丹峯)을 둘러 부벽루(浮碧樓) 앞으로 지나 내성
(內城)에 붙었다. 숙종(肅宗) 40년(1714)에 감사 민진원(閔鎭遠)이 둘레 1천 8백 16척의 성을 쌓고,
북쪽에 현무문(玄武門), 남쪽에 전금문(轉錦門)과 암문(暗門) 하나가 있다.
성안에 영명사(永明寺)ㆍ부벽루(浮碧樓)ㆍ득월루(得月樓)ㆍ주악루(奏樂樓)ㆍ백운교(白雲橋)가 있으며,
영명사의 북쪽에는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서쪽에는 임청암(臨淸庵)이 있다.
○ 황성(黃城) : 강성(綱城)이라고도 한다. 목멱산(木覓山)에 있으며,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
새로 성을 쌓았는데, 모용황(慕容?)에게 패하여 13년에 이 도성(都城)으로 옮겼으니, 모두 84년 동안이다.
고려 태조(太祖) 5년(922)에 서경(西京)에 성을 쌓았다. : 6년 만에 마쳤으며 새로 관원을 두었다.
○ 방언묘(方言畝)에 있다. 21년에는 서경 나성(羅城)을 쌓았고, 광종(光宗) 6년(995)에는 서경에 성을 쌓았으며,
현종(顯宗) 2년(1011)에 서경 황성(皇城)에 쌓았다. : 《고려사(高麗史)》에 예전 성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기자 때에 쌓은 것이니, 성안에 땅을 그어놓은 것이 정전 제도(井田制度)를 썼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成宗) 때 쌓은 것이다.
○ 기자 때 쌓은 것은 쌓은 사람을 알 길이 없으나 《역대지(歷代志)》에 자세하다.
영아 순영(巡營) : 본조 태종(太宗) 13년(1413)에 비로소 영(營)을 본부에 두었다.
관원 관찰사 : 병마 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ㆍ순찰사(巡察使)ㆍ관향사(管餉使)ㆍ평양 부윤(平壤府尹)을 겸
하였다.
○ 인조(仁祖) 3년(1625)에 팔도도체찰부사(八道都體察副使)를 겸하고, 8년에는 사도체찰부사(四道體察副使)를
겸하였으며, 15년에는 관서 해서 관향사(關西海西管餉使)를 겸하였다.
숙종(肅宗) 11년(1685)에 해서(海西)를 감하자 부윤을 겸하였고, 또 영종(英宗) 31년(1755)에 혁파하자 부윤을
겸하였으며, 33년에는 다시 부윤을 겸하였다. 도사(都事) : 관향종사관(管餉從事官)을 겸하였다.
중군(中軍) : 중영장 도토포사(中營將都討捕使)를 겸하였다.
심약(審藥)ㆍ검률(檢律)ㆍ역학훈도(譯學訓導)ㆍ관향갱사(管餉羹士) 각각 1원(員)씩이다.
평양성 관성장(平壤城管城將) : 부윤이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평양(平壤)ㆍ삼등(三登)ㆍ상원(祥原)ㆍ강동(江東)ㆍ강서(江西)ㆍ증산(甑山)이다.
전영장(前營將) : 상원의 겸영인데, 주작문(朱雀門) 북쪽 변성(邊城) 위에 있다.
좌영장(左營將) : 삼등의 겸영인데, 칠성문(七星門) 안 동쪽 변성 위에 있다. 동쪽에 공금정(控襟亭)이 있다.
중영장(中營將) : 중군(中軍)으로 중군소(中軍所)를 겸하였다. 우영장(右營將) : 강서의 겸영인데,
부성(府城)의 서북쪽에 있으며, 새로운 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후영장(後營將) : 증산의 겸영인데, 을밀대 서쪽에 있다.
북성영장(北城營將) : 강동의 겸영인데, 북쪽 성안에 있다.
진보 보산보(保山堡) : 서남쪽으로 80리, 이로도(伊老島) 가운데에 있다. 서쪽으로 강서(江西)와 동쪽으로 중화
(中和)와의 사이에 강을 끼고 있는데, 방어의 요새
지였다.
○ 석성(石城)은 둘레가 9백 10보다. ○ 별장(別將) 1원이 있다.
○ 영양왕(?陽王) 23년(612)에 수(隋) 나라 장군 호아(護?)가 배를 끌고 와서 패수(浿水)로부터 쳐들어왔다.
봉수 수화산(秀華山) : 서쪽으로 70리이다.
승령산(承令山) : 서쪽으로 30리인데, 오른쪽 사이에 있는 봉수(烽燧)는 다만 순영(巡營)에만 통보한다.
참고 사창(司倉)ㆍ동창(東倉)ㆍ내서창(內西倉)ㆍ영창(營倉)ㆍ삼등창(三登倉)ㆍ상원창(祥原倉)ㆍ중화창(中和倉)ㆍ
강동창(江東倉)ㆍ강서창(江西倉)ㆍ증산창(甑山倉) : 성안에 있다.
장용위창(壯勇衛倉) : 성안에 있다. 사창(社倉) : 성 밖에 있다.
외서창(外西倉) : 서북쪽으로 70리에 있다. 남창(南倉) : 보산진(保山鎭)에 있다. 각각 창고가 25개 있다.
○ 고려 태종(太宗) 때 서경(西京)의 6창(倉)은 해마다 서해도(西海道)로 세곡 1만 7천 7백 석을 수송한다.
왜관에게 녹을 지급하는데 반은 좌창(左倉)에서, 반은 외읍(外邑)에서 지급한다.
역참 현암역(玄?驛)ㆍ관문참(官門站).
진도 대동강진(大同江津) : 대동문(大同門) 밖에 있다. 이천진(梨川津)ㆍ금탄진(金灘津)ㆍ의암진(衣巖津)ㆍ관선진
(觀仙津)ㆍ봉황진(鳳凰津)ㆍ한사정진(閑似亭津)ㆍ구진강진(九津江津)ㆍ석호정진(石湖亭津).
교량 내성(內城)ㆍ중성(中城) 등 18곳에 다리가 있다. 보통교(普通橋) : 보통문(普通門) 밖에 있다.
영제교(永濟橋) : 돌로 쌓았는데 남쪽으로 15리, 앵포천(鶯浦川)에 있으며, 중화(中和)로 통한다.
주교(舟橋) : 서쪽으로 20리이다. 대제교(大濟橋) : 위와 같다. 관선교(觀仙橋)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 일명 적교(狄橋)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30리 대로(大路)에 있으며, 강서(江西)로 통한다.
동천교(銅川橋) : 서쪽으로 55리 대로에 있으며, 강서로 통한다. 개동교(介同橋)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둔전평교(屯田坪橋) : 돌로 쌓았는데, 서쪽으로 50리 대로에 있으며, 증산(甑山)으로 통한다.
강동교(江東橋):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청수교(靑水橋) : 위와 같다. 슬화천교(瑟和川橋)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왜현교(倭峴橋)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천강교(天降橋) : 외성(外城)의 북쪽에 있다.
궁실 어필비각(御筆碑閣) : 초유방(抄鍮坊) 2리 지점에 있다. 선조(宣祖) 계사년(1593)에 어가를 돌릴 때 말이
머무르던 곳이다. 이곳에 영종(英宗) 50년(1774)에 누각을 세워 비석을 세우고, 정종(正宗) 때 어필을 누렸다.
도무사(都務司) : 주작문(朱雀門) 안에 있다.
부정 읍호루(邑灝樓) : 대동문 누(樓)에 있다. 경파루(鏡波樓) : 사창의 남성(南城) 위에 있다.
양벽정(?碧亭) : 장경문(長慶門)의 동쪽 성 위에 있다. 황강정(黃江亭) : 외성의 남쪽 오탄(烏灘) 아래에 있다.
경강정(京江亭) : 외성(外城)의 서남쪽 모퉁이의 소양각도(小羊角島)에 있다.
한사정(閑似亭) : 차피문(車避門) 남쪽에 있다. 석호정(石湖亭)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이상은 강변이다.
쾌재정(快哉亭)ㆍ열운정(閱雲亭) : 모두 대동관(大同館) 북쪽에 있다.
○ 영춘루(迎春樓)ㆍ청원루(淸遠樓)ㆍ다경루(多景樓) : 모두 서쪽으로 9리 지점인 외성에 있다.
함벽정(涵碧亭) : 부벽루(浮碧樓) 가에 있다.
묘전 숭령전(崇靈殿) :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동명왕사(東明王祠)는 인리방(仁里坊)에 있으며, 고려
때에는 그때 그때 어압(御押)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하였다.
본조 세종(世宗) 11년(1429)에 처음으로 기자사(箕子祠) 곁에 세우고, 단군사(檀君祠)ㆍ동명왕사라 칭하였다.
영종(英宗) 원년(1724)에 숭령전이라 사액(賜額)하고, 5년에 참봉(參奉) 2원을 두었다.
○ 숭인전(崇仁殿) : 서쪽으로 1리에 있다.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에 서경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구(鄭久)
를 보내어 사(祠)를 세우기를 건의하였다. 본조 세종 12년(1430)에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기자묘비
(箕子廟碑)를 지은 뒤에 기자전(箕子殿)이라고 하고, 전감(殿監)을 두었다.
광해주(光海主) 4년(1612)에 숭인전이라 이름하고, 옛날에는 참봉 2원을 두었는데, 1명은 선우(鮮于)씨의 후손
으로 하였다가 뒤에 고쳐서 별검직장(別檢直長)을 두었다가, 또 영감(令監)으로 고쳤다.
○ 위의 두 전은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단유 민충단(愍忠壇) : 을밀대 가에 있는데, 만력(萬曆) 계사년(1593)에 동정(東征)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제사
지냈다. 구주단(九疇壇) : 외성에 있는데, 비석이 있다.
사원 계성사(啓聖祠) : 경도(京都) 편에 보인다.
○ 인현서원(仁賢書院) : 정양문(正陽門) 안에 있으며, 명종(明宗) 갑자년(1564)에 건립하고, 광해주 무신년(1608)
에 사액하였다.
기자(箕子) :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 《역대지(歷代志)》에 상세하다.
○ 용곡서원(龍谷書院) : 효종 무술년(1658)에 세우고, 숙종 계해년(1683)에 사액하였다.
선우협(鮮于浹) : 자는 중윤(仲潤)이고, 호는 돈암(遯巖)이며, 본관은 태원(太原)이다. 벼슬은 성균 사업(成均司業)
이고,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 무열사(武烈祠) : 정해문(靜海門) 안에 있다. 선조 계사년(1593)에 세우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석성(石星) : 자는 공진(拱辰)이고, 호는 동천(東泉)이며, 위군(魏郡) 사람이다. 벼슬은 병부 상서(兵部尙書)인데
만력 기해년(1599)에 풍신수길에게 패함으로써 옥사하였다.
이여송(李如松) : 자는 자무(子茂)이고, 호는 앙성(仰城)이며, 요동(遼東) 사람이다. 벼슬은 태자태보 좌도독(太子
大保左都督)이다. 무술년에 요동에서 죽었는데, 소보(少保)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양원(楊元) : 호는 국애(菊崖)이며, 정료(定遼) 사람이다. 정유년에 다시 도독첨사(都督僉事)로서 출전하였다가
남원(南原)에서 패하여 무술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여백(李如栢) : 호는 배성(背城)인데, 이여송의 동생으로 중협장(中協將)이다. 무오년에 죽이기를 논하였는데,
경신년에 스스로 옥중으로 들어갔다.
장세작(張世爵) : 호는 진산(鎭山)이고, 광동(廣東) 사람이다. 우협장(右協將)이며, 계사년에 평양에서 크게 이겼다.
낙상지(駱尙志) : 참장(參將)이다.
이상은 중국 사람이다.
○ 참봉 2원을 두었다.
○ 충무사(忠武祠) : 인조(仁祖) 을유년(1645)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1677)에 사액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 : 고구려 대왕(大王) 영양왕 임신년(612)에 안주(安州) 청천강에서 수 나라 병정 백만을 대파
하였다.
김양언(金良彦) : 자는 선익(善益)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인조 정묘년(1567)에 전사하였다.
벼슬은 태천 현감(泰川縣監)이며, 판중추(判中樞) 진흥군(晉興君)으로 추증되었다.
52권 중화군 中和郡
동쪽은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40리, 남쪽은 황해도 황주(黃州)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강서현(江西縣) 경계
까지 53리, 북쪽은 평양부 경계까지 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가화압(加火押)이었는데,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당악현(唐岳縣)이라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서경(西京)의 속촌(屬村)으로 하였다. 인종(仁宗) 14년에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경기(京畿)의 도
(道)를 나누어 여섯 현(縣)으로 하였다 : 강동(江東)ㆍ강서(江西)ㆍ순화(順和)ㆍ삼등(三登)ㆍ삼화(三和)ㆍ중화
(中和). 황곡(荒谷)ㆍ당악(唐岳)ㆍ송곶(松串) 등 아홉 촌(村)을 중화현에 합치고 영(令)을 두었다가 바로 서경에
예속시켰다. 충숙왕 9년에 태조의 공신 김악(金樂)ㆍ김철(金哲)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그전대로 영을 두었다가, 공민왕 20년에 다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명.
군명 가화압(加火押)ㆍ당악(唐岳).
성씨 본군 김(金)ㆍ박(朴)ㆍ문(文)ㆍ양(楊). 한(韓) : 면주(沔州). 강(康) : 안악(安岳). 이(李) : 장연(長淵). 정(鄭)ㆍ
임(任)ㆍ오(吳) : 모두 해주(海州). 최 : 상원(祥原).
산천 청량산(淸?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해압산(海鴨山) : 군의 서쪽 48리에 있다.
용산(龍山)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동악산(洞岳山) : 수월산(水月山)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동쪽 60리에 있다.
운취산(雲鷲山) : 석가산(釋伽山)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곤개산(坤開山) : 건산(乾山)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운봉산(雲峯山)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오랑산(於郞山)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이진(梨津) : 군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바로 대동강(大同江) 하류다.
대교천(大橋川) : 군의 서북쪽 7리에 있다. 진주지(眞珠池)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칭정(秤井) : 군의 남쪽 대거불리(大去不里)에 있는데 둘레는 10척이며, 5리까지 졸졸 흐르는데 땅속에서 스며
나온다.
마정(馬井)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둘레가 50척이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가물면 비를 빌었는데 효험이
있었고, 샘물이 용솟음쳐 나와 자그마한 내[川]가 되는데, 대동강 하류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숭어ㆍ소유(?油).
봉수 운봉산봉수(雲峯山烽燧) : 북쪽으로는 평양부의 획사산(?寺山)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황해도 황주(黃州)의
천주산(天柱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생양역(生陽驛)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추위를 보내려 처음 북으로 달렸다가, 더위를 맞으러 갑자기 남으로 달리네.
술은 맺히어 눈에 꽃이 어른거리고, 시의 문채는 눈같이 흰 수염에 나네. 아까운 경치는 찾기 어렵고, 좋은 시절은
지나버리기 쉬운 것이네. 말은 맑은 시냇가에 세워두고, 금채찍은 버드나무 실가지에 매어두네." 하였다.
○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나그네 몸 일찍 두루 다녔으니, 내 생애는 부운(浮雲)과 같네. 북극전(北極殿)의 조회
(朝會)로 인하여 또 다시 예전에 놀던 곳을 찾아 들었으니, 어찌 산천이 가로막힌 것을 꺼리랴.
임금의 은혜를 유독 가득 받았는데, 지신[坤靈]도 이별을 아까워하는 듯하여 반나절을 마음놓고 서로 머무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생양역(生陽驛) 사랑하여 푸른 숲에 기대니, 빙 두루고, 배나무는 빽빽이 서로 얽혔네.
방춘백설(芳春白雪)은 가지마다 가득 차, 내가 돌아올 때면 바야흐로 꽃피우리." 하였다.
○ 기순(祈順)의 시에, "낙랑(樂浪)의 밭들 모두 물에 가깝고, 부여(扶餘)의 산 다한 곳 구름에 이어 있네.
초목이 가득하여 어떤 정취 일어나리니, 누가 동군(東君)에게 동풍(東風) 불기 분부하랴." 하였다.
○ 연미계(燕尾溪) 몇 굽이 흐르며, 양장(羊腸)의 길 두세 갈래졌네.
바람 몰아와 건너 숲에 연기 나니, 그쪽에 인가 있는 줄 알겠네.
○ 초옥(草屋)은 마을에 기대어 반쯤 드러나고, 송교(松橋)는 잎이 떨어져 새로 깔렸네. 한 바위 공평하게 시내
를 나누고, 두 산(山) 가운데엔 긴 길이 끼어 있네.
○ 공관(公館) 청풍(淸風)에 사절(使節)의 깃발 꽂고, 화루(?樓) 신월(新月)에 자리를 폈네. 맑고 시원한 산이
몹시 좋아서, 자리를 동쪽으로 치우쳐 보네." 하였다. 다림원(多林院)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구현원(駒峴院) : 군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신구(新舊) 감사(監司)가
교대하던 곳이다. 양화원(陽和院) :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불우 길상사(吉祥寺) : 청량산(淸?山)에 있다. 고봉사(高峯寺) : 해압산(海鴨山)에 있다.
수월사(岫月寺) : 동악산(洞岳山)에 있다. 용산사(龍山寺) : 운취산(雲鷲山)에 있다.
봉승사(峯昇寺) : 곤개산(坤開山)에 있다. 용흥사(龍興寺)ㆍ안양사(安養寺) : 모두 정토산(淨土山)에 있다.
신수암(申秀菴) :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청량산(淸?山)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능묘 동명왕(東明王) 묘(墓) : 용산(龍山)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고구려 시조가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하늘에 일을 아뢰었는데 40에 이르러 결국 승천
(昇天)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태자가 남긴 옥채찍을 용산에 묻어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영변(寧邊) 편과 성천(成川)에 자세하다.
○ 이승휴의 시에, "승천한 구름수레[雲輧]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남긴 옥채찍을 묻어 분영(墳塋)을 이루었네."
하였다.
고적 송현폐현(松峴廢縣)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이었는데,
신라 현덕왕(憲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에 내속시켰다.
고당악(古唐岳) : 군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지금은 당촌리(唐村里)라 한다.
우거 본조 한규(韓珪) : 본관은 면천(沔川)인데, 태조의 개국공신으로 벼슬은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이르렀
으며, 시호는 공무(恭武)다.
[비고]
연혁 세조 12년에 군수로 고쳤고, 선조 2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 군인(郡人) 임중량(林仲樑)이 왜군에 항거
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방면 동두(東頭)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은 55리다. 간동(看東)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은 60리다.
고생양(古生陽) : 동쪽으로 25리다. 상도(上道) : 동쪽으로 끝이 15리다.
하도(下道)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은 20리다. 앵산(鷹山)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은 35리다.
당촌(唐村)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은 30리다. 소거화(小去火)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은 25리다.
대거화(大去火)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은 35리다. 양무대(揚武垈)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은 40리다.
고읍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은 45리다. 석호(石湖) :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은 50리다.
용흥(龍興) : 서쪽으로 25리다. 영진(永鎭)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은 60리다. 동정(東井) : 서쪽으로 50리이다.
성지 동악산고성(東岳山古城) : 바로 송현고현(松峴古縣)의 성산(城山)으로 위에 흙으로 싼 옛터가 있다.
토성(土城) : 서쪽으로 20리에 있는데 직산(直山)의 남쪽이다. 선조 임진왜란 때 부인(府人) 임중량(林仲樑)이
이곳에서 의병을 이끌고 누(壘)를 쌓아 고전하였던 곳으로 둘레가 3여 리다.
영위 중영(中營) : 인조조에 세웠다.
○ 중영장(中營將) 한 사람이 부사를 겸한다.
○ 속읍인 중화(中和)ㆍ평양(平壤)ㆍ상원(祥原)이 진성산(鎭城山)에 속한다.
진보 성산보(城山堡) : 동남쪽으로 50리인데, 옛 송현(松峴)의 땅이다. 동악산(洞岳山)의 남쪽 연포천(?浦川)의
계곡으로부터 시내를 따라 봉황령(鳳凰嶺)을 넘고 간동천(看東川)을 따라 선적(善積)에 도달하는데 아주 요해
지다. ○ 별장 한 명.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성창(城倉) : 평양성 안에 있다.
진도 요포진(腰浦津)ㆍ이안진(耳岸津)ㆍ삭시진(朔施津)ㆍ향암진(香巖津) : 모두 서쪽 50리에 있는데 강의 서쪽
으로 통한다.
곤양진(昆陽津)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마성포진(摩星浦津) : 황주(黃州)로 통한다.
관선진(觀仙津) : 평양 편에 보인다.
교량 만리교(萬里橋) : 대천교(大川橋)라고도 하는데 부의 북쪽에서 평양으로 통한다.
황주교(黃州橋) : 남쪽으로 5리에 있는데 황주로 통한다. 관선교(觀仙橋)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중통교(中筒橋) : 대거화면에 있다. 마성교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석장교(石長橋) : 양무대면(揚武垈面)에 있다.
서진교(西陣橋) : 응산면(鷹山面)의 토성(土城) 아래에 있다.
용강현 龍岡縣
동쪽은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삼화현(三和縣)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해안까지 34리,
북쪽은 함종현(咸從縣) 경계까지 1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다.
건치연혁 옛날 황룡국(黃龍國)이었는데 고구려가 합병하였으며, 고려에서는 황룡성(黃龍城)이라 하였다 :
일명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縣)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한 사람.
군명 오산(烏山)ㆍ군악(軍岳)ㆍ황룡성(黃龍城).
성씨 본현 홍(洪) : 염주(鹽州). 이(李) : 풍주(?州). 팽(彭) : 밀양(密陽). 임(林) : 울진(蔚珍). 음(陰) : 고주(高州).
산천 오석산(烏石山) : 현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봉곡산(鳳哭山) :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혹 화장산(華藏山)이라고도 한다. 적산(赤山) : 현의 남쪽 56리에 있다.
고정산(高靜山) : 현의 동남쪽 35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에 있다. 백사포(白寺浦)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진도(眞島) : 현의 남쪽 해포(海浦) 가운데에 있는데, 염분(鹽盆 바닷물을 조리어 소금을 만들 때 쓰는 가마)이 있다.
조압도(助壓島) :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며 사면이 모두 벽처럼 치솟았다.
급수문(急水門) : 현의 동쪽 27리에 있는 데 황주(黃州)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온정(溫井) : 현의 서쪽 30리인 오을동(於乙洞)에 있는데 둘레가 20여 보이고 물이 아주 따뜻하고 짜다.
거기서 서쪽으로 10여 보에 또 샘이 있는데 둘레가 4척이며 조금 따뜻하고 짜다. 또 여기서 서쪽에 찬 샘이 있는데
둘레가 3척이며 아주 짜고 깊으니 지척간이지만 따뜻하고 찬 것이 아주 다르다.
적통지(赤筒池) : 현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8백 척이다.
토산 실ㆍ삼ㆍ칠ㆍ자초ㆍ조기ㆍ상어ㆍ조개ㆍ홍어ㆍ넙치ㆍ숭어ㆍ삼치ㆍ농어ㆍ부레ㆍ바지락ㆍ새우.
성곽 안시성(安市城) : 오석산에 있는데 현의 치소(治所)와의 거리는 5리이며 험하고 견고하기가 비할 데 없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2천 5백 80척이며 안에는 샘 열 개가 있으며 합쳐 흐른다.
군창(軍倉)이 있는데 세상에서, "이 성을 당 태종이 친히 치려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한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성루(城樓) 백 척(尺)이나 솟아 맑은 구름 스치고, 이 땅에서 옛날에 천자의 군사가
머물렀네. 어가(御駕)는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백포(白袍) 입은 설인귀(薛仁貴)는 누가 공훈 세웠구나.
아득한 옛 일은 물따라 흘러가고, 적적한 봄산은 석양(夕陽)을 보내누나. 사해(四海)가 한 집으로 성한 정치 만났
으니, 원하거니 충성을 닦아 요(堯) 임금에 답하리." 하였다.
○ 지금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살펴보면, 안시폐현(安市廢縣)은 개주위(蓋州衛)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한(漢)이 세웠으며 당나라 태종이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설인귀가 백의(白衣)로 올랐었다는 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에서는 철주(鐵州)를 세웠고, 금(金) 나라 때는 탕지현(湯池縣)이라 고치고 개주(蓋州)에 내속
시켰다. 원성(元省)이 운운한 것은 여기를 안시성으로 여겼던 것인데 잘못이다.
진가유도 역시 나라 사람들의 말에 따라 지은 시이니, 다른 안시성인지 모르겠다.
오을동고성(於乙洞古城) : 현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2백 12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봉수 소산봉수(所山烽燧) : 현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북으로는 함종현(咸從縣) 조사지(曹士池)에 응하고, 남으
로는 삼화현(三和縣) 대당두산(大堂頭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현의 동쪽 3리로 옮겼다.
불우 보덕사(普德寺) : 의성산(依城山)에 있다. 안국사(安國寺)ㆍ내원암(內院庵) : 모두 안시성 안에 있다.
화장사(華藏寺) : 봉곡산(鳳哭山) 북쪽에 있다. 석천사(石川寺) : 화장사 동쪽에 있다.
용천사(湧泉寺) : 정필산(鼎必山)에 있다. 회봉사(回鳳寺) : 두륵산(頭勒山)에 있다.
고산사(高山寺) : 소곶산(所串山)에 있다. 신덕사(神德寺) : 아석산(牙石山)에 있다.
보명사(寶明寺) : 고정산(高靜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황룡국(黃龍國) :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이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으나 태자 해명(解明)은 그대로
졸본성(卒本城) 옛 도읍에 머물러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맹스러웠다. 황룡국왕이 듣고 강궁(强弓)을 하사하였
으나, 해명이 사자 앞에서 잡아당겨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않구나." 하였다. 황룡왕은 부끄러워 해명을 죽이려 만나 보기를 청하였으나 막상 만나서는 해치지 못하고 예로
써 보냈다. 유리왕은 이웃나라의 노여움을 샀다 하여 이내 칼을 하사하였다.
해명이 스스로 죽으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것이 꾸밈이 아님을 알겠는가." 하니,
해명이, "내가 두려운 것은 황룡국이 우리나라를 깔보는 것이다. 그래서 활을 잡아당겼다가 끊어버렸는데 의외
로 부왕에게 견책을 당하였으니 어찌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부딪쳐 죽었다.
명환 고려 유자량(庾資諒) : 현령이 되어 잘못을 들추어 내기를 신과 같이 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칭도(稱道)
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김민(金敏) : 아버지가 죽자 장사를 지내고도 매월 삭망에는 몸소 산소에 가서 제사지내기를 80이
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금상(今上) 1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화촌(花村)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당첨(堂帖)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산남(山南) : 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산북(山北) : 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고읍(古邑)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석정(石井) : 남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우의술(?衣述)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오을동(於乙洞)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난산(卵山) : 동쪽으로 처음과 끝이 20리이다. 일련지(日蓮池) : 위와 같다.
신정(新井) :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상다미(上多美) : 동남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60리이다.
하다미(下多美) :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30리이다. 오정(梧井) :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금천곡(金川谷)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성지 황룡산성(黃龍山城) : 안시성(安市城)이라고도 한다. 옛읍성[古邑城] : 오을동고성(於乙洞古城)이라고도 한다.
봉수 대덕산(大德山) : 지금의 보본읍(報本邑)이다.
창고 읍창(邑倉)ㆍ함창(咸倉) : 산성(山城).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45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진도 사월포진(沙月浦津)ㆍ도리진(桃李津) : 모두 동쪽으로 50리에 있으며, 중화(中和) 소로(小路)와 통한다.
기진(?津) : 다미진(多美津)이라고도 하는데, 동남쪽으로 65리에 있으며, 황주(黃州) 소로와 통한다.
대안진(大安津) : 대진(大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안악(安岳) 소로와 통한다.
교량 학룡교(鶴龍橋)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구룡교(九龍橋)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묘전 기자전(箕子殿) : 경종(景宗) 신축년에 건축하고 영종 을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기자(箕子).
사원 오산서원(鰲山書院) : 현종(顯宗) 갑진년에 건축하고, 숙종(肅宗)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 : 태묘(太廟)에 보라. 김정국(金正國) : 장단(長湍) 편에 보라.
삼화현 三和縣
동쪽은 용강현(龍岡縣) 경계까지 5리, 북쪽은 같은 현 경계까지 11리, 남쪽은 호도(虎島)까지 34리,
서쪽은 해안까지 3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8리이다.
건치연혁 고려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 경내를 나누어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과 합하여
삼화현(三和縣)을 만들고 영(令)을 두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한 사람씩.
군명 우산(牛山).
성씨 본현 고(高)ㆍ노(盧) : 모두 염주(鹽州). 임(任) : 개성(開城). 양(楊)ㆍ이(李) : 모두 봉주(鳳州).
조(趙) : 백주(白州).
산천 우산(牛山) :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석골산(石骨山)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금당산(金堂山) : 금당부곡(金堂部曲)에 있다. 자정산(慈正山) : 현의 서쪽 26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남쪽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1리인 포우산(抱牛山) 중턱에 있는데 동쪽으로 13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가도(?島) : 현의 남쪽 50리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 고려 원종(元宗) 10년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웠다.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아전 최탄(崔坦)은 이연령(李延齡)ㆍ현효철(玄孝哲) 등이 임연을 죽인다는
명목으로 용강(龍岡)ㆍ함종(咸從)ㆍ삼화(三和) 사람을 모아 가도영에 들어가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
과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ㆍ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였다.
호도(虎島) : 현의 남쪽 30리인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전에는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었는데 지금
은 광양(廣梁)으로 옮겼다. 대취라도(大吹螺島)ㆍ소취라도 : 모두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수도(愁島) :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가 된다.
덕도(德島) : 수도와의 거리가 20리인데 둘레가 30리다. 신녕강(新寧江)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토산 실ㆍ칠ㆍ자초ㆍ조기ㆍ상어ㆍ홍어ㆍ넙치ㆍ조개ㆍ석화ㆍ윤화(輪花)ㆍ잔새우[細蝦]ㆍ자하(紫蝦)ㆍ부레ㆍ
숭어ㆍ농어.
관방 광양진(廣梁鎭) : 현의 서쪽 52리에 있는데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 한 사람.
봉수 대당두산봉수(大堂頭山烽燧) : 현의 서쪽 36리에 있는데, 북쪽은 용강현(龍岡縣) 소산(所山)과 응하고, 남쪽
은 신녕강(新寧江)과 응한다.
신녕강봉수(新寧江烽燧) : 남쪽으로는 황해도 장련현(長連縣) 금음복산(今音卜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대당두
산(大堂頭山)과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동쪽에 있다.
불우 법천사(法泉寺) : 석골산(石骨山)에 있다. 안흥사(安興寺)ㆍ보림사(寶林寺) : 모두 우산(牛山)에 있다.
송림사(松林寺) : 금당산(金堂山)에 있다. 자정사(慈正寺) : 자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금당부곡(金堂部曲) : 현 서쪽 13리에 있다.
호산부곡(呼山部曲) :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속칭 대태(大台)다. 칠정(漆井) : 지금은 용강현에 속한다.
고성(古城) : 현의 북쪽 1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6백 30척이며 높이는 9척인데 지금은 반이나
무너졌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숙종 12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독진(獨鎭)으로 삼았다 : 고현(古縣) 터는 금당(金堂) 남산 상리(上里)에 있다.
방면 동리(東里) : 동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원당(元堂)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대상(大上) : 동남쪽으로 끝이 25리이다. 대하 : 동남쪽으로 끝이 35리이다.
위의 두 면(面)은 본래 호산부곡(呼山部曲)인데, 후에 대대면(大代面)이라 고쳤다가, 지금은 나누어 대상ㆍ대하
라 한다.
신남(新南) : 남쪽으로 끝이 45리이다. 신북 : 남쪽으로 끝이 30리이다. 서리(西里) :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금당(金堂) : 본래 부곡인데 서쪽으로 끝이 15리이다. 내화석(乃火石)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오은동(吾隱洞)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은 25리이다. 감박동(甘朴洞)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초소리(草召里)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귀림곶(貴林串) :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5리이다.
성지 우산성(牛山城) : 둘레가 2천 4척이다.
영아 방영(防營) : 숙종 7년에 방어영(防禦營)을 광양진(廣梁鎭)에 설치하였으며, 첨사가 방어사를 겸하였다.
12년에 영을 본부로 옮겼다. 청남수군방어사(淸南水軍防禦使)가 1명인데, 본부사가 겸하였다.
○ 처음에 함종(咸從)ㆍ증산(甑山)ㆍ영상(永桑)ㆍ순안(順安)ㆍ숙천(肅川)ㆍ안주(安州)ㆍ중화(中和)ㆍ평양ㆍ
강서(江西)ㆍ용강(龍江) 등 10읍과 광양(廣梁)ㆍ노강(老江) 2진(鎭)을 1진으로 삼았으며, 황해도의 안악ㆍ
장련(長連)ㆍ은율ㆍ풍천을 1진으로 삼았다가, 후에 또 광양ㆍ노강 두 진 수군을 관장하였다.
진보 혁폐 기도영(機島營) : 고려 때 수군영(水軍營)을 설치하였다. 원종(元宗) 10년에 몰락하여 본래의 맹주(孟州)
땅으로 삼았다가 후에 폐하였다. 호도진(虎島鎭) : 섬 가운데 있는데, 수군첨사를 두었다. 세종 26년에 광양으로
옮겼다.
창고 읍창 : 북쪽으로 3리 지점에 있다. 해창(海倉)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서창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성창(城倉) : 동북쪽으로 25리, 황룡산성(黃龍山城)에 있다.
진도 대진(大津) : 남쪽으로 40리, 신령강(新寧江) 땅에 있는데, 위로는 용강(龍江)에 접하였고, 아래는 서해와
연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장련으로 통한다. 화도진(火島津)ㆍ고수영진(古水營津)ㆍ증남포진(甑南浦津)ㆍ
대두리진(大頭里津).
토산 뽕나무.
함종현 咸從縣
동쪽은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14리, 남쪽은 용강현(龍岡縣) 경계까지 20리, 서쪽은 해안까지 20리,
북쪽은 증산현(甑山縣)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2리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의 아선성(牙善城)이었는데, 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한 사람.
군명 아산(牙山)ㆍ아선(牙善).
성씨 본현 어(魚) : 강릉(江陵). 한(韓) : 청주(淸州). 승(承) : 영일(迎日). 김(金) : 나주(羅州). 최(崔)ㆍ
오(吳) : 모두 해주(海州). 곽(郭)ㆍ강(康) : 모두 진주(晉州). 박(朴) : 밀양(密陽). 이 : 보주(甫州).
임(任) : 풍주(?州).
산천 아선산(牙善山) : 현의 동쪽 2리에 있고 일명 호두산(虎頭山)이라 하는데 진산(鎭山)이다.
소고지산(所高指山) : 현의 남쪽 8리에 있다.
쌍어산(雙魚山) : 현의 남쪽 22리에 있으며 위에 큰 우물이 있는데 보수하면 비가 온다.
검암산(檢巖山)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석고개산(石古介山)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가마산(加馬山) :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물자채산(勿自采山) :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봉황두산(鳳凰頭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바다를 베고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봉황이 높이 나는 모양과 같다.
호두산ㆍ쌍어산 등 여러 산이 이 산 아래에 모여 푸른데 풍경이 이 읍에서 제일이다.
바다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응현(鷹峴) : 아선산(牙善山) 남쪽에 있다.
악도(岳島) : 섬이 둘인데 모두 현의 서쪽 31리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가 되는데 네 벽이
가파르며 높이는 백 척이다. 삼도감지(三都監池)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토산 실ㆍ자초ㆍ조기ㆍ숭어ㆍ상어ㆍ홍어ㆍ농어ㆍ석화ㆍ조개ㆍ소합(小蛤)ㆍ새우ㆍ자하(紫蝦).
봉수 초도봉수(草島烽燧) : 현의 서쪽 27리에 있는데, 북쪽은 증산현(?山縣) 토산(?山)에 응하고, 남쪽은 오곶
(吾串)에 응한다.
오곶봉수(吾串烽燧) : 현의 서쪽 21리에 있는데 북쪽은 초도(草島)에 응하고 남쪽은 조사지(曹士池)에 응한다.
조산지봉수(曹山池烽燧) : 현의 서쪽 23리에 있는데 남쪽은 용강현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은 오곶에 응한다.
누정 척서루(滌暑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평활한 교외는 벽해(碧海)에 이어 있고,
고읍(古邑)은 청산에 기대 있네. 나그네 길은 놀[煙光] 밖으로 나 있고, 인가는 숲 그늘 사이라네. 지역이 떨어져
빈객(賓客)도 적을시고, 송사 없어서 백성[吏民]도 한가롭네. 작약은 붉어 디딤돌에 너울거리니, 난간에 기대어
얼굴 한 번 펴보세."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불우 국안사(國安寺) : 광동산(廣東山)에 있다. 천왕사(天王寺)ㆍ석수암(石水菴) : 모두 아선산(牙善山)에 있다.
영사사(靈?寺) : 소고지산(所高指山)에 있다. 은룡사(隱龍寺) : 검암산(檢巖山)에 있다.
홍법사(洪法寺) : 검산(檢山)에 있다. 마전사(磨田寺) : 석고개산(石古介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연화역(延和驛) : 옛터가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고읍성(古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3백 34척이고 높이는 3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산성(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46척이며 높이는 3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안에 샘이 여섯,
못[池]이 한 개 있다.
인물 본조 어변갑(魚變甲) : 영락(永樂) 6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는데, 여러 번 직제학(直提學)
에 천거되었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사양하고 함안(咸安)으로 돌아가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효첨(魚孝瞻) : 변갑의 아들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가 두루 관각(館閣)의 벼슬을 지내다가 벼슬이 판중추원사
(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어세겸(魚世謙) : 효첨의 아들로 급제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함종부원군(咸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좌의정
에 이르러 문형(文衡)을 장악하였는데, 성질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조그마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어세공(魚世恭) : 세겸(世謙)의 아우로 급제하여 세조(世祖) 조에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
判書)에 이르러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효자 본조 오극통(吳克通) : 부모가 죽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6년이나 염장(鹽醬)을 먹지 않았다.
금상 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경종(景宗)이 즉위하던 해에 중궁(中宮) :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
로 승격시켰다.
방면 오산(吾山)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남리(南里)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난곶(●串) : 남쪽으로 17리에 있다.
삼존(三存)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중리(中里) : 서쪽으로 12리에 있다. 소정(小井)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반화지(反火池) : 서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세곶(世串)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북리(北里)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대정(大井)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오곶(吾串) : 위와 같다.
당현(堂峴)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지 고려 태조 3년에 함종현성(咸從縣城)을 쌓았다 : 2백 36칸이고, 문이 네 개, 수구(水口)가 셋, 성두(城頭)가 넷,
원성(遠城)이 둘이다.
영아 청남후영(淸南後營) : 영장이 한 사람인데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은 강서(江西)ㆍ용강(龍江)이다.
봉수 조사지(曹士池) : 서쪽으로 23리에 있다. 오곶(吾串)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굴령산(窟領山)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창(城倉) : 남쪽으로 30리, 황룡산성(黃龍山城)에 있다.
증산현 甑山縣
동쪽은 영유현(永柔縣) 경계까지 31리, 평양부(平壤府) 경계까지 12리, 북쪽은 같은 부의 경계까지 12리,
남쪽은 함종현(咸從縣) 경계까지 25리,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해안까지 1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강서현(江西縣)의 증산향(增山鄕)인데 본조 태조 3년에 현으로 나누고 영(令)을 두었다.
신증 금상 9년에 현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하였다 하여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한 사람이다.
관원 현감 : 한 사람.
군명 서하(西河).
성씨 본현 최(崔)ㆍ나(羅)ㆍ오(吳)ㆍ한(韓)ㆍ강(康)ㆍ김(金) : 모두 풍주(?州).
산천 국령산(國靈山) :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다산(石多山) : 현의 서북쪽 12리에 있다.
탁유현(卓踰峴) :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바다와의 거리가 5리다.
바다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국령천(國靈川) :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국령산 남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탄곶(炭串) :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황통지(黃筒池) :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다.
독곶통지(禿串筒池) :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34척이다.
토산 실ㆍ닥나무ㆍ칠ㆍ자초ㆍ조기ㆍ조개ㆍ숭어ㆍ굴ㆍ새우ㆍ부레ㆍ홍어ㆍ상어ㆍ농어.
봉수 토산봉수(?山烽燧) : 현의 서쪽 14리에 있는데 남쪽은 함종현(咸從縣) 초도(草島)에 응하고,
북쪽은 평양부 철화(鐵和)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서북쪽 2리에 있다.
불우 청량사(淸?寺)ㆍ용천사(龍泉寺) : 모두 국령산(國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비고]
연혁 중종 9년에 현감으로 강등하였다 : 현인(縣人) 중 반읍(叛邑)한 자가 있었다.
선조 28년에 나누어서 평양(平壤)ㆍ함종(咸從)에 붙였다가 40년에 다시 옛과 같이 했다.
방면 상방(上坊)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하방(下坊)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신리(新里)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독곶(禿串)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정두(頂頭)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가곶(可串) : 서쪽으로 13리에 있다.
봉수 서산(西山) : 지금의 보본읍(報本邑)이다.
창고 읍창ㆍ성창(城倉) : 평양성 안에 있다.
교량 정두교(頂頭橋) : 남쪽으로 8리에 있으며 돌로 만들었다.
순안현 順安縣
동쪽은 평양부 경계까지 15리, 남쪽은 같은 부 경계까지 10리, 서쪽은 같은 부 경계까지 17리,
영유현(永柔縣) 경계까지 24리, 북쪽은 숙천부(肅川府) 경계까지 3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0리이다.
건치연혁 고려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을 나누어 추자도(楸子島)ㆍ앵천촌(櫻遷村)ㆍ용곤촌(龍坤村)ㆍ
화산촌(禾山村)과 합하여 순화현(順和縣)을 만들고 영을 두어 서경에 예속 시켰다가 후에 상원(祥原)에 예속시켰
으며 충혜왕 후(後) 2년에는 삼화(三和)로 이속시켰고 본조 태조 5년에는 치소를 평양부 안정참(安定站)으로
옮기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1명.
군명 평교(平郊)ㆍ순화(順和)ㆍ안정(安定).
성씨 본현 변(邊) : 하주(河州). 전(全) : 삼화(三和). 김(金) : 당악(唐岳). 오(吳) : 해주(海州). 이(李) : 수안(遂安).
산천 법홍사(法弘寺) : 현의 북쪽 47리에 있다. 청룡사(靑龍寺) : 현의 동북쪽 27리에 있다.
왕산(王山) : 현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일명 추자도라 한다. 자화산(慈化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암적천(巖赤川) : 현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흘러 평양강(平壤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자초ㆍ소유(?油).
봉수 독자산 봉수(獨子山烽燧) : 남으로는 평양부 부산(斧山)에 응하고 북으로는 영유현(永柔縣)의 미두산
(米頭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의 동쪽에 있다.
역원 안정역(安定驛) : 현의 안에 있다.
○ 기순(祁順)의 시에, "추운날에 가득 한 잔 사양 마오. 말끔한 얼굴에 취한 것 보겠네. 천리에 상봉하니, 면식
(面識)은 처음이나, 몇 번 함께 지나니 심지(心知)의 벗 되었구나.
소나무 언덕의 바람 소리 천뢰(天?)를 몰아오매, 한수(漢水)의 포도주는 옥잔에 올랐구나.
조정의 신하가 연락(宴樂)에 빠진 것이 아니니, 《주서(周書)》에 이미 향연(享宴)의 의식 많도다." 하였다.
○ 장근의 시에, "날씨 차가우니 가득한 잔 사양마오. 하물며 환락 오락은 소장시(少壯時)에 마저 하오.
사절(使節)의 기 멀리 천리길을 오니, 충성심 구중(九重)에 알려 언제나 무겁네. 발[簾] 건너 산색(山色)은 시흥
(詩興)을 돋우어 주고, 자리 위 봄빛은 술잔에 비치네.
함께 성조(聖朝)의 성한 풍화(風化)를 기뻐하여 번방(藩邦) 인물도 위의(威儀)를 아네."
○ 왕창(王敞)의 시에, "사양(斜陽)은 숲 밖을 비쳐 몇 마리 까마귀 돌아가고, 지친 나그네 난간에 기대어 문득
집을 생각하네. 한결같은 빗발 서대초(書帶草)를 치고, 동풍(東風)은 미낭화(米囊花)를 두루 피게 하네.
빈 대들보에 제비집 새로 짓고, 고요한 뜰 황봉(黃蜂)은 늦은 아문(衙門) 당번하네. 게을리 시편(詩篇) 잡아
의로운 번민 깨뜨리고, 찻잔에 한가하게 새 봄 싹을 시험하네. 암적천원(巖赤川院) : 암적천 위에 있다.
불우 법흥사(法興寺) : 법홍산(法弘山)에 있는데 옛 평양부(平壤府) 경계로 지금은 현에 속한다.
○ 김부식(金富軾)의 기에, "법흥사는 오래된 절이나 지은 때를 모른다. 누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름이 법흥
이라는 중이 지었다 하여 이로써 이름 지었다.' 한다. 그 뒤 길엔 풀이 우거지고 뜰은 황폐하고 담이나 집이 다
무너져 사람이 거처할 수 없었다.
산승(山僧) 징오(澄悟)가 배우기를 좋아하여 도리를 알아 명성이 당세에 뛰어났는데 중수할 양으로 예궐(詣闕)
하여 주청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하였다. 이에 신이 글을 올려 보고했더니, 이때 근신(近臣) 정습명(鄭襲明)이
서경(西京)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서 내리기를, '전번에 서경 사람들이 요망스런 중 묘청(妙淸)의 꾀임을
당하여 성(城)의 견고함만 믿고 복종하지 않아 주관(周官)의 법도에 관련되고, 신하로써 임금을 불렀으니 춘추
(春秋)의 의리를 범하는 것이라, 결국 대장[元戎]을 명하여 성을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흉한 무리들만 그물에 걸린 것이 아니라 우리 사졸도 시석(矢石)에 맞아 죽었고, 일월(日月)이 가매 냇물처럼
점점 멀어지니, 오직 부혼낙백(浮魂落魄)이 긴 밤에 고생을 할까 두려웠다. 불사(佛事)에 의하여 구제하려 하니
징오(澄悟)와 함께 가서 땅을 상(相)보아 새롭게 하여 나의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합당케 하라.'
하였다. 습명은 명을 받들어 그 비용을 받게 하고 하관 집사(執事)에게 명하여 옛날 절의 북쪽 10여 보쯤 되는
곳에 옮겨 경영하도록 하였다. 계묘년 봄 3월에 시작하여 을사년 봄에 공을 끝냈다. 불당(佛堂)ㆍ승침(僧寢)
으로부터 포주(?廚)ㆍ고구(庫廐)에까지 모두 80칸이었는데 빙 둘린 담의 길이가 무려 1백 50여장이었다.
임금이 재문(齋文)과 향물(香物)을 보내어 범패(梵唄)로 중수하고 10일 동안 낙성 잔치를 하게 하였다.
일찍이 당 태종 황제가 의거(義擧)한 이래 전투한 곳에 절을 짓고 이내 우세남(虞世南)ㆍ저수량(?遂良) 등 일곱
학사에게 명하여 비석에 공덕을 새겼으니 이번의 일도 역시 황제의 마음 씀과 같은 것이다. 의당 갖추어 기록
해서 이후에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운운" 하였다.
남암사(南菴寺)ㆍ천일암(千日菴) : 모두 법홍사(法弘寺)에 있다.
정양사(正陽寺)ㆍ심적사(深寂寺)ㆍ오계사(五溪寺) : 모두 청룡산(靑龍山)에 있다.
참화사(?華寺) : 앵천촌(櫻遷村) 북쪽에 있는데 속담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거처하던 곳이라 한다.
보제사(普濟寺) : 자화산(慈華山)에 있다. 용참사(龍?寺)ㆍ신적사(新寂寺) : 모두 묘법산(妙法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추자도부곡(楸子島部曲)ㆍ고순화현(古順和縣) : 지금은 평양부가 되었는데 서면(西面)은 현과 서남쪽으로
60리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ㆍ정방(正坊) : 동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송현(松峴) : 동북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추도(楸島)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동두(東頭)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자작(自作)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공전(公田) : 위와 같다.
봉송(峯松) : 서북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동춘(冬春)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순화(順和)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진리(鎭理) : 서쪽으로 처음이 65리이고, 끝이 80리인데,
영유(永柔) 서쪽 경계 해변에 넘어가 있다.
봉수 독자산(獨子山)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대선곶(大船串) : 진리면(鎭理面) 해변에 있다.
서금강산(西金剛山) : 서북쪽으로 25리, 보본읍(報本邑)에 있다.
창고 사창(司倉) :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해창(海倉) : 진리(鎭里) 해변에 있다.
산창(山倉) : 동북쪽으로 45리, 자모산성(慈母山城)에 있다.
역참 기발(騎撥) 관문참(官門站).
교량 용강교(龍岡橋) : 남쪽으로 7리에 있다. 암적천교(巖赤川橋) : 북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대로(大路)와 통한다.
누정 배회정(徘徊亭)ㆍ관덕정(觀德亭) : 모두 현 안에 있다.
사원 성산서원(星山書院) : 인조 정해년에 건축하여 숙종 병자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몽주(鄭夢周) : 문묘(文廟) 편에 보라.
한우신(韓禹臣) : 자는 하사(夏師)이고 호는 정안(靜安)이니, 청주(淸州) 사람이다.
벼슬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이었다.
강서현 江西縣
동쪽으로는 평양부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는 용강현 경계까지 18리,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29리,
서쪽으로는 함종현(咸從縣) 경계까지 18리, 북쪽으로는 증산현 경계까지 3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1리
이다. 건치연혁 고려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 경내를 나누어 이악(梨岳)ㆍ대구(大垢)ㆍ갑악(甲岳)ㆍ각묘
(角墓)ㆍ독촌(禿村)ㆍ증산(甑山) 등의 고을을 합하여 강서현으로 만들고 영을 두었으며 본조 태조 3년에 증산
을 나누어 따로 현령을 두었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1명.
군명 무학(舞鶴).
성씨 본현 조(趙)ㆍ김(金) : 모두 개성(開城). 정(鄭)ㆍ박(朴)ㆍ오(吳)ㆍ최(崔) : 모두 해주(海州).
황(黃) : 거창(居昌). 이(李)ㆍ강(康) : 모두 문화(文化). 문(文) : 장연(長淵).
산천 무학산 : 현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구룡산(九龍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서학산
(棲鶴山)이라고도 한다.
학란구(鶴卵丘) : 현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속담에, 술자(術者)가 현의 진산(鎭山)을 무학(舞鶴)이라 이름하였으
므로 이 언덕을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쌓았다 한다.
물고교포(勿古橋浦) :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중화현 이진(梨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웅어ㆍ숭어ㆍ조개.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누정 무학정(舞鶴亭) : 객관 북쪽에 있다.
불우 등고사(登高寺) : 무학산 꼭대기에 있는데 수천 길[丈]의 층암(層巖)이 있다.
동림사(東林寺) : 중학산(中鶴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 정림산(正林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이악향(梨岳鄕) : 현의 객관(客館) 북쪽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무학리(舞鶴里)다.
대구향(大垢鄕) :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초성리(草城里)다.
갑악향(甲岳鄕) :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거암리(擧巖里)다.
각묘향(角墓鄕) : 현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서부리(西部里)다.
인물 본조 김반(金泮) :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태조(太祖) 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지중추원사(僉知
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반은 경서(經書)에 정하여 성균관에서 40여 년간 있으면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이름난 선비가 많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중국에 들어갔는데 어룡족자(魚龍簇
者)를 제(題)하라 하니 반이 제하기를, "뉘 가벼운 비단폭에 그렸는가, 바람물결에 운무(雲霧)도 몽롱하구나.
비단 비늘은 벽해(碧海)에 번쩍이고, 용은 하늘에 올라가누나. 잠김과 나타남은 형상은 다르지만, 하늘을 날려는
뜻이야 같네. 만약 자른 꼬리 태워버릴[燒斷尾 당대(唐代) 대신이 처음 관에 나아갈 때 헌식(獻食)의 예를 말
하며 일설에는 호랑이가 변하여 사람이 될 때 꼬리를 불사른다는 말이 있다.] 수 있다면, 하늘에 있는 용을 붙잡
을 것이네." 하니, 중국 사람은 탄식하면서 소미(燒尾)의 예(例)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사람됨이 돈벌기를 좋아하지 않아 늙어서 현에 돌아가서도 아주 검소하게 살다가 죽었다.
효자 본조 박간(朴幹) : 세종조 때 사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을 아침저녁으로 흙을 지고 스스로 분묘를
만들고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며 또 전(奠)을 올렸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김잉질달(金芿叱達) : 아버지가 오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今上) 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은은히 먼 산은 어떤 작은 고을을 둘러쌌다 : 황희의 시에, "은은히 먼 산은 어떤 작은 고을을 둘러쌌고,
인가(人家)는 물에 임하고 땅은 뽕나무에 알맞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부(東部) : 끝이 13리이다. 서부(西部) : 끝이 15리이다. 보원(普院) : 동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석장(席匠)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거암(擧巖)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수천(水川)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한룡(閑龍)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침곶(砧串)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사진(沙津) : 남쪽으로 끝이 20리이다. 부석(夫石)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초성(草城)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봉수 정림산(正林山) : 서쪽으로 10리에 있으며 지금의 보본읍(報本邑)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진창(津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신창(新倉) : 남쪽으로 36리에 있다.
성창(城倉) : 평양성 안에 있다.
진도 이안진(耳岸津) : 중화(中和)와 통한다. 가도진(假島津)ㆍ관진(官津)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소로
(小路)이다.
교량 물고포교(勿古浦橋) : 서남쪽으로 2리에 있다.
사원 학동서원(鶴洞書院) : 숙종 갑자년에 건축해서, 병인(丙寅)년에 사액하였다.
김반(金泮) : 자는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니 강릉인(江陵人)이다. 벼슬은 대사성(大司成)이었으며, 은퇴
후에 본현에 살았다.
안주목 安州牧
동으로는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35리,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52리, 남으로는 숙천부계(肅川府界)까지
48리, 서쪽으로는 노강진(老江鎭)까지 60리, 북으로는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8리, 영변부계(寧邊府界)까지
9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고,
고래 태조 때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14년에는 안북부(安北府)를 두었고, 성종 때는 영주안북대도호부
(寧州安北大都護府)라 칭하였으며 현종 때는 안북대도호부라 칭하였다.
고종 43년에는 몽고군을 피하여 창린도(昌麟島)로 들어갔다가 다음에 육지로 나왔으며 의종 때에는 도절제사영
(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후에 폐하였으며 공민왕 18년에는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
으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좇았다. 세조조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이 하나 : 정주(定州). 도호부가 하나 : 숙천(肅川). 군이 하나 : 가산(嘉山). 현이 하나 : 영유(永柔).
관원 목사ㆍ판관(判官)ㆍ교수 : 각 1명.
신증 연산군 계해(癸亥)에 본주가 조잔하다하여 판관으로 고쳤다.
군명 안릉(安陵)ㆍ밀성(密城)ㆍ식성(息城)ㆍ중반(重盤)ㆍ팽원(彭原)ㆍ안북(安北)ㆍ영주(寧州).
성씨 본주 오(吳) : 해주(海州). 김(金) : 해주ㆍ풍주(?州)ㆍ교하(交河)ㆍ안산(安山)ㆍ수주(水州)ㆍ장사(長沙)ㆍ
광양(光陽)ㆍ온수(溫水). 최(崔) : 해주ㆍ풍주. 강(康) : 정주(靜州)ㆍ남원(南原)ㆍ등주(登州)ㆍ백주(白州).
서(徐) : 성주(星州)ㆍ봉성(峯城). 지(池) : 수주(水州). 문(文) : 전주(全州)ㆍ장연(長淵). 박(朴) : 교동(喬桐).
노(魯) : 진강(鎭江). 장(張) : 부녕(扶寧). 송(宋) : 용성(龍城)ㆍ송림(松林). 이(李) : 철야(鐵冶)ㆍ수안(遂安).
한(韓) : 재령(載寧). 견(甄) : 전주. 방(方)ㆍ임(林) : 모두 풍주. 민 : 동주(東州).
안융(安戎) 최(崔)ㆍ김(金) : 모두 내(來).
형승 표리호산(表裏湖山)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총총히 성한 정기 외로운 성 얼싸안고, 안팎 호와 산[湖山]
엔 정말 영물(靈物) 있네." 하였다. 해련서벽산용동린(海連西壁山聳東隣) : 이색의 시에, "바다는 서쪽 벽에
연이어 남국(南國)으로 통하고, 산은 동쪽 이웃에 솟아 북방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산천 가두산(加頭山) : 주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태자산(太子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悟道山) : 원통산(元通山)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왕산(王山) : 주의 동쪽 15리에 있다.
마두산(馬頭山) :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봉덕산(鳳德山) : 주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9층의 철(鐵)로 된 부도(浮屠)가 있다.
바다 : 안융진(安戎鎭)에 있는데 부와는 서남쪽으로 60리다. 청천강(淸川江) : 살수(薩水)라고도 이름하는데
묘향산(妙香山)에서 나와 주의 북쪽 성(城) 밑을 지나 서쪽으로 30리를 흘러 박천강(博川江)과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수(隋)의 우문술(宇文述) 등이 고구려 군사를 치려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는 30리 거리에 이르러 산에 영을
쳤다가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거짓 항복에 따라 군사를 돌려 청천강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너자 문덕은 급히
그 후미를 공격하여 우둔위(友屯衛)장군을 죽이니 신세웅(辛世雄)과 수 나라 군사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의
인물조에 자세하다.
○ 김극기의 시에, "길 다하여 잠깐 고삐를 푸니, 연기 찬 개포[浦]에 바람배 올라오네. 가득한 물은 푸른 물결
보내고, 삐쭉한 산은 푸르게 빼어났네. 등나무가지는 언덕에 나직하고, 버드나무가지는 물가를 길게 쓰네.
만고에 혼(魂) 녹인 곳, 푸른 물결은 객정(客亭)을 돌아가네." 하였다.
○ 조준의 시에, "살수(薩水) 출렁거려 푸른 하늘에 잠겼는데, 수병(隋兵) 백 만이 고기가 되었구나.
지금도 아직 어초부(漁樵夫)의 이야기 남았으나 나그네의 한갓 웃음거리도 되지 않네." 하였다.
○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수병(隋兵) 다시 일면 어찌 허사이겠는가,
이 땅은 몇번이고 학철어(?轍魚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수레 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고기)가 되리니.
당시 당 나라 이(李 세적(世勣))와 설(薛 인귀(仁貴))을 못했는가. 깃발을 휘두르며 곧장 부여로 오리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조선[東藩] 수십 주를 두루 돌아서 물가 정자 구름속 높은 누각(樓閣)에 머무는 것 버릇
되었네. 오래도록 경치를 대하면 흥 절로 일어나, 곳마다 산을 보며 이르지 않은 곳 없네.
성긴 비 몇 번이나 혹서(酷暑)를 피했는지, 긴 강의 유월이 마치 맑은 가을 같구나. 술잔과 시권(詩卷)은 언제나
있어, 눈에 찬 풍연(風煙)은 걷히지 않네. ○ 가득한 맑은 물은 박천(博川)을 닮았으며, 두 강은 서로 가까우나
연하지 않았더라. 늘어선 산[連山] 끊어진 곳엔 모래 많고, 길은 평평한 들녘을 돌 때는 수전(水田) 사이를
지나네. 나루터 한가한 정자(亭子) 나직한 나무 스치고, 성두(城頭)의 높은 누각(樓閣) 하늘까지 솟았더라.
한때에 말 탄 하인 비같이 따라 오는데, 사람은 훈풍이 불어오는 호화선[?船]에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살수 흐르는 곳 얼마나 깊었는가, 춘풍에 사절(使節) 가지고 우연히 등림(登臨)하니,
양 언덕 끊어져 막힌 곳 티끌 흔적 하나 없고, 한 거울 평평하게 열어 논 듯 도심(道心)을 본 듯하네.
눈 쌓인 한 산은 백벽(白壁)을 안은 듯, 구름 깨고 나온 햇빛 황금 물결에 출렁이네.
성두(城頭)의 피리 북소리 갈길을 재촉하니, 중류(中流)에 띄워 놓고 시를 읊노라."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비갠 새벽 노를 울려 두 물을 건너가니, 물결은 잔잔하여 편히 앉은 초정선(草亭船)
이네. 온 둑의 꽃이 지니 붉은 비 날리고, 몇 점 백구 날라 푸른 연기 깨는구나. 사람 그림자 물거울 속에서 번번
이 움직이고, 노래 소리 멀리 바다 구름 뚫네. 나는 어떻게 영풍(靈風) 만나, 신선의 배를 얻어 곧장 하늘에
오르리." 하였다. 무골도(無骨島) : 주의 동쪽 22리인 청천강(淸川江) 가운데에 있다.
누영지(漏盈池) :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개지(介池) : 안융(安戎)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옥돌 : 안융에서 난다. 닥나무ㆍ왕골ㆍ잣ㆍ소유(?油)ㆍ숭어ㆍ은어ㆍ참치ㆍ붕어ㆍ석화ㆍ게ㆍ새우.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2백 55척, 높이가 12척이며 안에 우물과 샘이 18개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는데 평양(平壤)ㆍ삼화(三和)ㆍ용강(龍岡)ㆍ강서(江西)ㆍ삼등(三登)ㆍ중화(中和)ㆍ성천(成天) 등의 조세를
이 곳에서 모은다.
관방 노강진(老江鎭) : 주의 서남쪽 65리인 청천강 어구에 있는데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 1명.
봉수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 : 북으로는 박천군 독산(禿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청산(靑山)에 응한다.
청산봉수(靑山烽燧) : 주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북으로는 가산군(嘉山郡) 연지(蓮池)에 응하고, 남으로는 오도산
(悟道山)에 응한다.
오도산봉수(悟道山烽燧) : 북으로는 청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소리산(所里山)에 응한다.
소리산봉수(所里山烽燧) : 주의 남쪽 47리에 있는데 동으로는 오도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숙천부(肅川府) 도영산
(都迎山)에 응한다.
제비통봉수(諸非筒烽燧) : 주의 서쪽 43리에 있는데 북으로는 박천군(博川郡) 덕간곶(德間串)에 응하고 서쪽
으로는 노강(老江)에 응한다.
노강봉수(老江烽燧) : 주의 서쪽 66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숙천부(肅川府) 식포(息浦)에 응하고, 동으로는 제비
통(諸非筒)에 응한다.
누정 백상루(百祥樓) : 주의 북쪽 성 안에 있다.
○ 고려 충숙왕의 시에, "청천강 위 백상루에, 삼라 만경 벌려 있어 한 눈에 보기 어렵고, 풀은 멀리 긴 둑에 한
줄로 푸르렀네. 하늘에 뻗은 멧부리 천으로 줄지었고, 비단 병풍 속을 나는 외로운 따오기, 옥 거울 속에 뜬 한
점의 작은 배이네. 속세에 선경(仙境)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았더니, 오늘 밀성(密城)에 영주(瀛洲)를 보는구나."
하였다.
○ 승 정지(定志)의 시에, "옷 걷고 다시 제일 높은 누(樓)에 오르니, 멀고 가까운 평원에 저문 안개 걷히네.
몇 점 조는 물오리는 붉은 여뀌꽃 언덕에 기댔으며, 한 대낚시 던지고 있는 어부 푸른 물결 위에 있네.
연기는 넓은 들에 비껴 있고 구름은 산마루에 누웠으며, 바람은 긴 강에 가득하고 달은 배에 가득 찼네.
돌아보니 외로운 따오기 해지는 놀에 떨어지는데, 조각 돛이 백구 나르는 물가에 왕래하네." 하였다.
○ 문노(文魯)의 시에, "나그네 길에 한가하여 잠깐 누에 올라와서, 눈 돌려 바라보니 여러 생각 거둘 수 없네.
맑은 강 뱀같이 돌아 성 아래 푸르고, 푸른 산 소라처럼 넓은 들에 벌려 있네. 빽빽한 연기 숲에 작은 술집
감췄으며, 줄줄이 내리는 비 조각 배를 씻어 주네. 구름 날고 학이 간 지 몇 천 년이 되었는가.
꽃다운 풀 앵무주(鸚鵡洲)에 의연히 피어 있네." 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강 위 우뚝한 산에 수루(戍樓)를 지었으니, 바람마저 맑은 휘파람 불어 저문 안개
걷어가네. 한 구석 산수는 진 나라 관문[秦?口]이며, 백 전 성지(城池)는 진(晉) 나라 석두성(石頭城)인가.
푸른 풀 둑에는 한 필의 말 울고 있고, 녹양(綠楊) 그늘 아래 외로운 배 매었더라. 천 년이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어보리, 오로지 물소리만 해저문 물가에 울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띠처럼 둘린 청천(淸川) 벽공(碧空)에서 쏟아지고, 백구는 날아가니 석양 놀 붉었더라.
새는 비단 자리 꽃가지에 날아 앉고, 사람은 구슬 누(樓)의 아지랑이 속에 앉았구나. 목동의 피리 소리 소의 등
달에 한가롭게 불어오고, 고기잡이 배 낚시 줄은 바람에 가볍게 날리네. 취해 돌아올 제 등고(登高)한 것 잊었
으니, 발 아래 구름다리는 몇 겹이나 되는고."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각 높고 경치 좋아 그 정말 좋을시고, 사면(四面)의 산을 보니 그 모두 기이하네.
풍경이 특수하니 왕마힐(王摩詰)의 그림인가, 재주 정취 도와주니 두소릉(杜少陵)의 시(詩) 그것일세.
평평한 시내 날은 따스하여 얼음도 쉬 녹고, 먼 국경 하늘 높아 새도 나는 것 더디구나. 마음은 제궁(帝宮)에
있으나 몸은 나그네로 오색 구름[황궁(皇宮)을 말한다] 머리 돌려 보니 임금 생각 멎지 않노라."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고루(高樓)에 다시 오르니 생각이 그침없고, 취하여 난간에 기대어 먼 하늘을 바라보네.
바다 물결 붉게 타니 아침 해 솟아나고, 수림(樹林)에 푸른 것 싸였음은 저녁 연기 오름일세.
멀고 먼 들 언덕에 길손도 많고, 아득한 강파(江波)에는 낚싯배 떠 있네. 소탈하고 미친 흥 거듭 연정 둔다,
괴이하게 여기지 마오. 이 안의 풍경이 모두가 정을 끄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나를 듯 높게 지어 물 갈래 굽어보니, 조정 신하 조서(詔書) 받들고 몇 번이나 지나는고.
비[雨] 뒤의 동령(東嶺) 보리는 두 이삭이요, 가을 맞은 북천(北川)의 벼는 아홉 이삭이로다.
청춘사녀(靑春士女)는 한가한 정(情) 적으련만, 백발 거사(居士)는 즐거움 많을세라. 눈에 가득한 구름과 안개
볼수록 싫지 않고, 다시 들으니 해상에는 고래 물결이 잠잔다 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상서(祥瑞)와 우수(優秀)한 것 모아 짓기도 공교롭고, 굽어 맑은 강 보니 하나의 거울
이네. 신기(蜃氣)인들 이 동우(棟宇)에 가지런할까, 달빛은 발 안에 쉬 들어오네. 희한하게 영주(瀛洲) 해변에
의지한 집은 봉래산 정상의 선궁(仙宮)과 방불하네. 술을 파하고 난간에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니,
취한 혼 날아가서 오운(五雲 황궁(皇宮)을 가리킨다)에 들어가네." 하였다.
○ 최숙(崔淑)의 시에, "살수(薩水) 동쪽 백척루(百尺樓), 홍진(紅塵) 하나 없고 푸른 연기 걷혀가네.
큰 사원기(四元氣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 안아 싸고, 평평하게 세 가지 빛을 집어 머리에 접했구나.
석양에 남은 구름 먼 산에 연이었고, 긴 바람 세우(細雨) 몰아 고주(孤舟)에 들어오네. 올라 앉아 천 병 술을 마실
만하니 이것이 강남(江南)의 앵무주(鸚鵡洲)인가 하노라."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강(江) 구름 나무 그림자 다 같이 유유하고, 만리 풍연(風煙)은 눈을 비쳐 트였구나.
자금궁(紫禁宮)은 멀리 하늘 북극(北極)에 연이었고, 석양은 한가하게 서쪽 누에 의지했네. 희미하게 작은 물은
현포(玄圃)에 통해 있고, 지척의 부상(扶桑)은 봉황주(鳳凰洲)와 격했구나. 하늘 끝 좋은 경치 다 보려 하는
나요, 한 잔 기울여 고금의 근심 지워보세."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상누에 올라 봄은 이번이 처음
인데, 우연히 돌아가는 길에 잠깐 수레 멈추었네. 띠 같이 빙 두른 얼어붙은 시내 빛도 깨끗하고, 숲의 연기 낀
나무 그림자 쓸쓸하네. 다정한 여관 주인 상객(賞客)을 맞았으니, 어디메 선인(仙人)이 홀로 좋아 앉았는가.
술 파하고 찻잔도 모두 돌리니, 눈 바람 송곳같이 문틈으로 스며드네."
○ "안흥(安興)으로 나오는 길 가까이 냇물 있으니, 몇 층 누각은 성곽에 기대어 우뚝하네. 물빛 멀리 어른거려
눈[銀海]을 미혹하고, 햇빛은 산에 비쳐 자연(紫煙)만 나는구나. 아득하게 한강에서 밤에 술 싣고 배 띄운 것
생각하니, 패수(浿水)에서 낮에 띄운 배와 같더라. 동국에 와 곳곳에 올라 보니, 사신의 수레 바다 하늘 끝에
이르른 것 헛되지 않구나."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백 길 푸른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누각, 발 걷어 보니 뭇 산이 흩어져 있네. 출렁출렁 긴
강물 들판 밖에 누워 있고, 층층히 높은 누각 언덕 위에 기대 있고, 백로는 고기 물고 낚싯배 스쳐가네.
지친 나그네 높은 데 올라 생각이 하염없고, 늦은 바람 비를 몰아 긴 섬을 지나가네." 하였다.
만경루(萬景樓) :
○ 진감(陳鑑)의 시에, "홀로 높은 누에 올라 경기(京畿)를 바라보니, 만공(滿空)에 차가운 안개 나그네 옷 적셔주네.
만 그루 송음(松陰)의 푸른 언덕 희미하고, 사면의 성문은 푸른 산을 굽어보네. 사람은 산을 향해 송아지를 타고
가고, 중은 나루터로 시주 양식 얻어 돌아가네. 오운(五雲 임금이 있는 곳)은 어디메인가 머리를 들어 보니, 조수
떨어진 맑은 물에 백조가 날고 있네." 하였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높은 누각 우뚝하게 하늘에 솟아 있어, 멀거니 홀로 서 있으니 석조(夕照) 비쳐 붉었
어라. 고구려와 백제가 이 안에서 싸웠으며, 수당(隋唐)의 침략도 이제는 담소(談笑)로다. 그림 난간 굽어보니
천 이랑에 기장이요, 작은 배 끌려감은 만리에 부는 바람. 사해(四海)가 한 집이라 지극한 평화 맞았으니,
산하(山河)가 백천 겹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강상에 높은 누각 속기를 떠났건만, 첫 봄에 날 때는 듣지도 못하였네. 바람 구름 언덕
골이 높고 낮게 보이고, 초목과 인가는 멀고 가까이 나뉘어 있네. 낮 부엌에는 차(茶) 연기 면면하고, 네모진
연못에는 복숭아 꽃 이렁이렁. 사신(使臣)의 자순(咨詢)은 이미 모두 마쳐 돌아갈 길 바쁘고, 아롱진 난간에
기대보니 날 또한 저물었네. ○ 아홉 하늘 서쪽 가면 그곳이 황기(皇畿)인데 만경루(萬景樓) 안에 들어 잠시
옷을 풀어보네. 하늘은 먼데 강은 흘러 어디메서 다하는고, 봄 깊어 시흥(詩興)은 근래에 드물었네.
노래 소리 개포를 건너 졸던 백구 일어 날고, 소나무 그림자 바람 맞아 춤추는 학 돌아가네. 철 만난 물건 풍성
하지 못하여 맑은 완상(玩賞)도 지쳤노라. 마지못해 돌아보니 백운(白雲)이 날아 있네."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주(州)의 성 꾸불꾸불 맑은 강 바라보니, 백성들 집 다닥다닥 젖은 연기 일어나네.
몇 리(理)에 줄지은 소나무 푸르러 해 빛을 가리고, 사방의 푸른 산빛 하늘에 연이었네. 이 지방 방언은 민남(?南)
지방 비슷하고, 논의 벼는 제우(?右 절강성(浙江省) 서쪽지방)의 논 닮았네. 이역(異域) 풍광이 중국과 같으니,
임금님 은혜는 곧장 해동(海東)의 구석까지 입고 있으리라.
○ 누각 밖 연기와 아지랑이 푸른 기에 젖어 있고, 지저귀는 새 소리 고요한 속에 들려 오네. 계단에 비친 풀 빛
봄이 와 푸르고, 길에 둘린 솔 순은 비 와서 선명하네. 황학은 돌아오지 않고 구름만 아득한데, 백구는 날아가서
물결만 출렁이네. 한 단지 술로는 등림(登臨)한 흥 다하지 못하니 앞 산에 지는 저녁놀을 어찌 하랴.
○ 층층의 난간을 옮겨 기대어 황기(皇畿)를 바라보니, 산의 푸른색은 나그네 옷 물들이네. 백으로 지저귀는
새벽 꾀꼬리 노래 들리고 밖에는 꽃 느릿느릿, 만가(萬家)의 봄 나무는 우중(雨中)에 희미하네.
바람의 들노래는 초부(樵夫)가 나루를 건넘이요, 들보에서 떨어지는 진흙 향기는 제비가 돌아온 것일세.
임금과 부모 생각 언제나 있는 것이, 한 조각 구름에도 고향생각 일어나네." 하였다.
○ 기순의 시에, "눈[六花]이 아롱지게 안주(安州)에 두루 내려, 흥겨워 다시금 만경루에 오르네. 천리 강산은
온통 은세계요, 사방의 빙옥(氷玉)은 도랑과 들에 걸려 있네. 빛이 뜰에 드니 먼저 새벽을 알려 주고, 윤택한
기운 밭고랑에 스몄으니 풍년을 예상하네. 성스러운 세상 화기가 흡족하니, 하늘의 은혜는 해동(海東)까지 미쳐
있네.
○ 당년의 걸출한 집 분애(?埃) 밖에 빼어나고, 종적(?跡)은 아직 남아 예전대로 들려오네. 멀고 가까운 인가의
연기 성벽으로 끊겨 있고, 높고 낮은 밭 이랑은 길을 고루 나누었네. 푸르게 북새(北塞)에 이어진 천 봉우리 묘연
하고, 푸른 물결 동해에 일어 큰 물이 넘실넘실. 어찌 겨를 얻어 자주 이곳에 와서, 서로 만나 시주(詩酒)로서
아침 햇빛 즐겨볼까."
○ 나그네 길 서쪽으로 가 경기(京畿)를 가리키고, 삼월(三月)의 이역(異域)에서 옷 아직 못 받았네.
요동(遼東) 동쪽 늦은 산은 비를 맞아 푸르고, 계주(?州) 성문 봄 나무는 연기 머금어 희미하네.
인정은 승경(勝景)을 즐겨 두 눈동자 탁 트이고, 시(詩)는 행낭(行囊)에 들어와 만상(萬象) 그려 돌아가네.
신선의 학 돌아오지 않아 천지는 늙어가고, 흰 구름 하염없이 옛 처마 곁을 나네." 하였다.
학교 향교 : 주의 성 안 동쪽에 있다.
역원 안흥역(安興驛) : 성의 안에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울창한 숲이, 잎새와 가지 얽혀 낮에도 침침하네. 말 달려 곧장 뚫는
침침한 길 속이라, 찬 눈이 옷깃을 적시는 줄 모르고 가네." 하였다.
○ 당고(唐皐)의 시에, "어제의 음산한 구름과 어젯밤 바람, 새벽에 갑자기 하늘 가득히 눈 내리네. 담비 가죽 옷
여우 가죽 옷은 바로 훈공(勳功)의 표시요, 흰 띠 술잔에 시구(詩句) 또한 기교롭네. 지키는 군졸들의 어금니[牙]
쪼는 소리처럼 딱딱거리고, 정부(征夫)의 삿갓 다툼은 밀봉(蜜蜂)처럼 웅웅거리네. 평생 조선 풍경에 익지 않았
으나, 이 광경에 다시금 아찔하네."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하늘이 얼음 꽃[氷花]을 가위질하여 새벽 바람에 흩어지니, 천산일색(千山一色)이 흔연
히 비어 하나네. 날이 밝아 아름다운 관(館)에서 새 시구를 재촉하고, 어둠이 붉은 누에 들어 정교하기 서로 다투
네. 그윽한 골짜기에 희미한 건 초부(樵夫)들 가는 길이요, 추운 강에 단장한 건 사립 쓴 어옹이네.
눈[雪] 떠다 차 끓이니 금을 녹일 만한 따스한 안방 같음을 알겠네." 하였다.
마고개원(?古介院) : 주의 남쪽 9리에 있다. 신원(新院) :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운암원(雲巖院)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 주의 남쪽 48리에 있다.
남정원(南亭院) :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재천원(載川院) :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불우 칠불사(七佛寺) : 북성(北城) 밖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隋) 나라 병사가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강가에 와서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거늘
수 나라 병사가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아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한다. 천왕사(天王寺) : 성 안
에 있다.
○ 권근의 시에, "적적한 절은 주(州)의 성문에 있어, 6월 창문 가에 살 만하네. 나루터 행인은 물이 물러간 뒤에
가고, 밭 가운데 김매는 노인은 비개고 나왔더라. 산은 들 밖을 비껴 있어 평원도 넓을시고, 물은 성모퉁이를
돌아가니 옛성의 자리로다. 날마다 누에 올라 시 읊는 흥도 많아, 우연히 시가 되면 벽 틈에 적어보네." 하였다.
장락사(長樂寺) : 봉덕산(鳳德山)에 있는데, 9층의 동탑(銅塔)이 있다.
승현사(僧賢寺)ㆍ석천사(石泉寺) : 모두 고맹주(古孟州)에 있다. 화엄사(華嚴寺) : 갈두산(乫頭山)에 있다.
정수사(淨水寺)ㆍ미타사(彌陀寺) : 모두 마두산(馬頭山)에 있다.
영천사(永川寺)ㆍ백학사(白鶴寺)ㆍ경운사(慶雲寺)ㆍ원통사(圓通寺)ㆍ청룡사(靑龍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
(普賢寺)ㆍ개법사(開法寺)ㆍ운주암(雲住菴)ㆍ금동사(金洞寺) : 모두 오도산(悟道山)에 있다.
영화사(靈華寺)ㆍ은적사(隱寂寺) : 모두 왕산동(王山洞)에 있다. 사묘 사직단 :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주의 동쪽 3리에 있다.
청천강신사(淸川江神祠) : 강가에 단(壇)이 있는데 춘추로 향축(香祝)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는데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여단: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맹주(古孟州) : 주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현이었을 때의 치소(治所)였다.
안융진(安戎鎭) : 융(戎)을 인(仁)으로도 쓰는데 주의 서쪽 65리 바닷가에 있는데 토성(土城)이 있다. 고려 광종
(光宗) 25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90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고석성(古石城) : 주의 동쪽 6리에 있는데 둘레는 6천 5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명환 고려 최척경(崔陟卿) :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였다. 유석(庾碩) : 고종 때 부사가 되었다.
본조 최윤덕(崔潤德) : 도절제사(都節制使)로써 목사(牧使)를 겸하였다. 고거정(高居正) : 목사가 되었다.
효자 본조 노사점(魯師點) : 성질이 지극히 효도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여묘를 살면서 3년이나 동구에 나가지
않아 이 일이 알려져 동부록사(東部錄事)를 받았다.
오유린(吳有麟) :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리자 우측 무명지를 베어 약에 타드리니 나았다.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
(旌閭)하였다. 이명지(李明智) : 지극히 효도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여묘를 3년이나 지냈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신증 박덕(朴德) : 12살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드리니 나았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
하였다.
열녀 본조 한씨(韓氏) : 부정(副正) 오지계(吳之界)의 처로 홍무(洪武) 임오년에 남편이 애전(艾田)의 역(役)에
죽자 애통해 하여 재가하도록 친척들이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부조를 하고 정문(旌門)
하였다.
제영 청천강에 이르니 강물이 부끄럽다 :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인정이란 애석해 하지 않음 없나니, 항차
나는 지금 소장(少壯)도 아닌 때라, 청천강에 이르니 강물이 부끄럽네. 몇 번이나 남으로 건너 다시 시를 지어
볼까." 하였다.
열 두 아롱진 난간 푸른 놀에 싸여 있다 : 장성(張珹)의 시에, "푸른 느티나무 높은 버들 남풍을 막아서고,
열둘 아롱진 난간 푸른 놀에 싸여 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인조 6년에 절도사(節度使)가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고, 따로 판관(判官)을 두었다. 숙종 8년에 목사(牧使)
를 두고 판관(判官)을 감하였다. 정종(正宗) 10년에는 안북현(安北縣)으로 강등하였다 : 모역죄(謀逆罪)를 범한
사람이 읍에서 났기 때문이다. 뒤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邑號) 밀성(密城).
관원 목사(牧使) : 안주진(安州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방면 읍사부(邑四部) 주내(州內) : 동남쪽으로 끝이 20리이다. 동주내(東州內) :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75리이다.
운곡(雲谷) : 동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문곡(文谷) : 독곶(禿串)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갈화(葛花) : 갈곶(葛串)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대대(大代)ㆍ누천(漏泉)ㆍ용두(龍頭) : 모두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남면(南面) :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연동(燕洞) : 서쪽으로 끝이 60리이다. 청산(靑山) :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평호(平湖) : 위와 같다.
제비동(諸非洞)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곡(金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성지 신성(新城) : 서쪽 안체성(按體城)은 둘레가 4백 10보이며, 초루(醮樓)가 둘, 장영(將營)이 둘이고, 남쪽으로
문이 하나 있는데 신문(新門)이라 하고, 남쪽으로 수혈(水穴)이 하나 있다.
남당성(南塘城) : 영종(英宗) 45년에 부읍성(附邑城)을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보이다.
외성(外城) : 흙으로 쌓았는데 스스로 역(役)을 감독하여 허물어지는 것을 따라서 보수한다. 둘레는 1천 8보이며
초루가 5개, 한문(?門)이 넷, 수문(水門)이 하나, 수구(水口)가 하나있다.
영아 병영(兵營) : 주성(州城)의 가운데 있으며 세종 11년에 비로소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영변에 설치하였고,
세조 13년에 이를 나누어 좌(左)ㆍ우(右)ㆍ중(中) 3도로 하였다. 하나는 영변이니 중도(中道)요, 또 하나는 강계
(江界)이니 좌도(左道)요, 나머지 하나는 창성(昌城)이니 우도(右道)이다.
예종 원년에 다시 한 진(鎭)으로 합해서 영변에 두었다. 인조 5년에 양서순변사(兩西巡邊使)를 겸하고, 6년에는
순변사를 감하고 영을 본주(本州)로 옮겼다. 관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중군(中軍) : 우후(虞侯)
가 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숙종 원년에 설치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세종 5년에 설치하였다가 19년에 없앴다. 병마평사(兵馬評事) : 세조 8년에 설치하였
다가 광해주(光海主) 14년에 없앴다.
심약(審藥)ㆍ역학훈도(譯學訓導) 각 한 사람이다. 속영 전영(前營)은 숙문(肅門). 좌영(左營)은 덕천(德川). 중영
(中營)은 중화(中和). 우영(右營)은 순천(順川). 후영(後營)은 함종(咸從). 방영(防營) 의주(義州)ㆍ창성(昌城)ㆍ
강계(江界)ㆍ삼화(三和)ㆍ선천(宣川). 독진(獨鎭) 정주(定州)ㆍ선주(宣州)ㆍ곽산(郭山)ㆍ철산(鐵山)ㆍ용천(龍川)ㆍ
의주ㆍ삭주(朔州)ㆍ창성ㆍ강계ㆍ위원(渭原)ㆍ초산(楚山)ㆍ벽동(碧潼)ㆍ삼화ㆍ영원(寧遠) 및 23진이 있다. 산성
(山城) 철옹(鐵甕)ㆍ백마(白馬)ㆍ용골(龍骨)ㆍ운암(雲暗)ㆍ서림(西林)ㆍ인산(?山)ㆍ동림(東林)ㆍ능한(凌漢).
봉수 조청산(?靑山)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동을랑산(冬乙郞山) : 서쪽으로 60리에 있다.
호혈(虎穴) : 서쪽으로 40리 우수로(右水路)에 있다.
역참 관문참(官門站).
진도 상진(上津) : 통착진(統鑿津)이라고도 하는데 영변(寧邊)의 대로(大路)와 통한다.
하진(下津) : 독창진(獨倉津)이라고도 하는데 운산(雲山) 대로와 통한다.
풍포진(楓浦津) : 주의 북쪽 성 밖에 있으며, 박천(博川) 가산(嘉山) 대로와 통한다.
전항포진(戰舡浦津) : 정주(定州)의 사잇길과 통한다.
교량 연청교(連淸橋)ㆍ통진교(通津橋) : 모두 성 밖에 있다. 신천교(新川橋) : 남쪽 5리에 있다.
장평교(長坪橋)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대교(大橋)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금곡원(金谷院) 동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자산(慈山)ㆍ순천(順川) 대로와 통한다.
누정 청조루(聽潮樓)ㆍ자전루(紫電樓)ㆍ백승정(百勝亭) : 모두 성 안에 있다.
망경루(望京樓) : 주 동쪽 성 위에 있다.
사원 청천사(淸川祠) : 현종(顯宗) 경술년에 건축하여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 : 평양편에 보라. 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 : 모두 문묘(文廟) 편에 보라.
○ 충민사(忠愍祠) : 숙종 신유년에 건축해서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남이흥(南以興) : 자는 자호(子豪), 호는 성은(城隱)인데, 의령인(宜寧人)이다. 벼슬은 평안병사 부원수 의춘군
(平安兵使副元帥宜春君)이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박명룡(朴命龍) : 벼슬은 평안 우후(平安虞侯)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준(金俊) : 고부(古阜)편에 보라. 이상안(李尙安) : 자는 정이(靜而)이니 광주인(廣州人)이다. 벼슬은 강계부사
(江界府使)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의상(金毅尙) : 벼슬은 귀성부사(龜城府使)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희건(李希建) : 홍주인(洪州人)으로 벼슬은 용천부사 홍양군(龍川府使洪陽君)이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송도남(宋圖南) :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이니, 벼슬은 영유현령(永柔縣令)이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
書)에 추증되었다.
장돈(張暾) : 인동인(仁同人)이니, 벼슬은 개천군수(价川郡守)였으며, 옥산군(玉山君)에 추증되었다.
김양언(金良彦) : 평양 편에 보인다. 송덕영(宋德榮) : 연안인(延安人)이니, 벼슬은 맹산현감(孟山縣監)이었다.
김언수(金彦壽) : 자는 명수(命?)이고, 벼슬은 훈련봉사(訓鍊奉事)였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한덕문(韓德文) : 자는 윤신(潤身)이니, 벼슬은 훈련봉사였으며 훈련정(訓鍊正)에 추증되었다.
윤혜(尹惠) : 벼슬은 박천군수(博川郡守)였다.
함응수(咸應壽) : 자는 사미(士美)이고,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었으니,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양진국(梁晉國) : 자는 순향(?鄕)이고, 벼슬은 본주(本州) 중군(中軍)이었으며 동중추(同中樞)에 추증되었다.
임충서(林忠恕) : 자는 국인(國仁)이며, 벼슬은 본주천총(本州千摠)이었고, 훈련정(訓鍊正)에 추증되었다.
○ 이상은 인조 정묘년에 전란(戰亂)으로 없어졌다.
정주목 定州牧
동쪽은 가산군(嘉山郡) 경계까지 38리, 남쪽은 해안까지 20리, 서쪽은 곽산군(郭山郡) 경계까지 15리,
북쪽은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42리,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44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 귀주군(龜州郡)이었는데, 현종조에 방어사(防禦使)로 만들었다가 고종 18년에 몽고병이
내침하자 병마사 박서(朴犀)가 힘을 다해 막았다. 힘이 모자랐으나 오히려 항복하지 않아 그 공으로 정원대도
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뒤에 도호부로 되었고,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친 후 치소를 마산(馬
山)의 남쪽으로 옮겼다. 본조 세조 원년에 귀성군을 고귀주(古龜州)의 땅에 나누어 위치시켰으며,
12년에 주의 치소를 수천(隨川)으로 옮겨 수천군(隨川郡)을 없앴다.
관원 목사ㆍ판관ㆍ교수 : 각 1명.
군명 정원(定遠)ㆍ조천(鳥川).
성씨 본주 유(劉) : 백주(白州). 정(鄭) : 보령(保寧). 최(崔) : 춘주(春州). 이(李) : 회령(會寧). 김(金) : 신주(信州).
강(康) : 안산(安山). 노(盧) : 해주(海州). 백(白) : 황주(黃州). 수천(隨川) 최(崔) : 화순. 조(趙) : 백주. 승(承) :
함종(咸從). 석(石) : 충주. 김(金)ㆍ강(康) : 모두 용강(龍岡). 장(張)ㆍ오(吳) : 모두 해주.
산천 마산(馬山) : 고정주(古定州)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당오령(唐於嶺) : 주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곽산군 경계이다.
○ 예겸의 시에, "당오령(堂於嶺)에 굳이 올라오니, 작은 돌은 모나고 큰 바위는 사납네. 말 달려 곧장 마루에 올라
보니 앞길에 아직도 만 겹의 산이 있네.
○ 바다 따라 아득히 길이 머니, 잠깐 평야를 가다가 또 언덕을 올라가네. 산밖에 산이 이어 아직도 천 겹이요,
서늘한 산 찬 풀밭에 석양지기 몇 번인가." 하였다.
원통산(元通山) : 주의 동쪽 35리에 있다. 천동현(泉洞峴) : 주의 북쪽 42리에 있는데 또 귀성부(龜城府)에도 보인다.
광림산(廣林山) : 주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예전엔 가산군(嘉山郡)에 예속되었다.
심원산(深原山) : 주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봉새가 이곳에서 울었다." 하여, 봉명산이라고도 한다.
칠악산(七岳山) : 주의 동쪽 70리에 있는데 위에 용지(龍池)가 있으며 가물면 비를 빈다. 바다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달
천(?川) : 주의 동쪽 5리에 있는데 귀성부 검산(檢山)에서 흘러나와 남쪽으로는 방호현(防胡峴)까지 흘러 내리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 군사 1만 명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공민왕이
우리 태조에게 정예 기병 1천 명을 데리고 따르도록 하였다. 이때 적은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에 둔을 쳐서 여러
장군들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내일의 싸움은 그대 홀로 당하십시오." 하였다. 다음날 적은 세 대(隊)로 나누어
태조와 그 아래 노장 두 사람이 각각 그 한 대씩을 맡아 분격(奮擊)하였다. 태조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급
하게 되었는데, 말이 몸을 삐쳐 뛰어 나가니, 모두 놀랐다. 태조가 적장 몇 명을 쏘고 두 노장과 서로 합하여 쳐
대파시켰다. 예겸의 시에, "신안(新安) 후관(侯館)에서 날이 밝아 출발하여, 말을 달리고 채찍을 드날리며 옥가
(玉珂)를 떨쳤네. 또 달천 다리 위를 건너가니, 백 척이나 되는 맑은 무지개 창파에 누웠네." 하였다.
위도(葦島) : 주의 동쪽 50리에 있다.
○ 고려 고종 때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에 들어가 은신하였는데 그 곳이 10여 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 하였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그걸로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었는데 크기가 기둥만
하였다. 가산(?山)에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어 가 보면 뱀이
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 사람들이 머지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 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만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고도(孤島) : 주의 남쪽 20리에 있다. 달도(?島) : 주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가마천(加磨川) : 주의 동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태천현(泰川縣) 대사리(大思里)에서 나와서 사읍동음(沙邑冬音)
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도치곶(都致串) : 주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목장(牧場)이 있다. 이언지(伊彦池) : 옛 수천(隨川) 동쪽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소어(蘇魚)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죽합(竹蛤)ㆍ부레[魚?]ㆍ새우[蝦]ㆍ굴[石花]ㆍ
바지락[土花]ㆍ석수어(石首魚)ㆍ낙지[絡締]ㆍ은구어(銀口魚)ㆍ민어(民魚)ㆍ진어(眞魚)ㆍ넙치[廣魚]ㆍ오징어
[烏賊魚]ㆍ조개[蛤]ㆍ윤화(輪花)ㆍ제호유(??油)ㆍ자초(紫草).
봉수 입피산봉수(立彼山烽燧) : 주의 남쪽 32리에 있다. 서쪽으로 곽산군(郭山郡) 방축포(防築浦)에 응하고,
동쪽으로 도치곶(都致串)에 응한다.
도치곶봉수(都致串烽燧) : 서쪽으로 임피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진해곶(鎭海串)에 응한다.
진해곶봉수(鎭海串烽燧) : 주의 남쪽 23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도치곶에 응하고, 동쪽으로 합화(蛤和)에 응한다.
합화봉수(蛤和烽燧) : 주의 남쪽 34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진해곶에 응하고, 동쪽으로 광암(廣巖)에 응한다.
광암봉수(廣岩烽燧) : 주의 남쪽 41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합화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암(馬巖)에 응한다.
마암봉수(馬巖烽燧) : 주의 남쪽 51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광암(廣巖)에 응하고, 동쪽으로 잉박곶(仍朴串)에
응한다.
잉박곶봉수(仍朴串烽燧) : 주의 남쪽 53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마암(馬巖)에 응하고, 동쪽으로 사음산(舍音山)에
응한다.
사음산봉수(舍音山烽燧) : 주의 남쪽 60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잉박곶에 응하고, 동쪽으로 미륵당(彌勒堂)에
응한다.
미륵당봉수(彌勒堂烽燧) : 주의 남쪽 57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사음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사읍동음(沙邑冬音)에
응한다.
사읍동음봉수(沙邑冬音烽燧) : 주의 동남쪽 7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미륵당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산군(嘉山郡)
돈산(頓山)에 응한다.
구령산봉수(仇寧山烽燧) : 주의 서쪽 7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곽산군(郭山郡)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마산봉수(馬山烽燧) : 주의 동남쪽 42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구령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칠악산(漆岳山)에
응한다.
칠악산봉수(漆岳山烽燧) : 주의 동남쪽 71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마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산군 연지(蓮池)에
응한다.
누정 풍월루(風月樓) : 옛 정주(定州)에 있다. 영훈루(迎薰樓) : 주의 객관(客館) 남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정원
(定遠)인데, 중국 사신 동월(董越)이 영훈(迎薰)으로 고쳤다.
신증 납청정(納淸亭) : 주의 동쪽 40리에 있으니 중국 사신 당고(唐皐)가 이름 지었다. 사도(史道)의 기(記)에,
"신사년에 천자(天子)가 등극하여 이듬해에 개원(改元)하고 번국(藩國)에 조서를 내리니, 태사(太史) 당공(唐公)
과 내가 명령을 받고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동쪽으로 4일을 오다가 정주를 지나
다시 40리를 오노라니 우연히 한 정자가 산수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태사와 나는 수레를 멈추
고 정자에 올라가니 역관(譯官)이 따라서 들어왔다. 태사가 묻기를, '산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 역관은 '효성
(曉星)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다시 묻기를, '물 이름은 무엇이냐.' 하니, 역관은, '가마(加麻)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내가 묻기를, '그럼 정자 이름은 무엇인가.' 하니, 역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정자 이름을 묻는데 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이는 정자는 있어도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름은 이미 있어도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했으나, 역관은 서로 돌아보며 대답하지
못하고 이에 그 말을 참찬(參贊) 이군(李君)에게 고하였다. 조금 있다가 역관이 와서 이군의 말로 태사(太史)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가 있은 지는 오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름을 짓지 못한 것은 오늘이 있기를 기다
린 것 같습니다. 이제 정자의 이름을 얻는다면 이는 어찌 산천초목의 영광뿐이겠습니까.' 하였다.
태사가 웃고 대답하지 않으니 역관은 몇 차례 갔다가 다시 와서 하는 말이 더욱 간절했다.
내가 보니 태사는 정자를 돌아보면서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내가 말하
기를,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뜻한 바가 있어, 이름을 짓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이다.
이 정자를 지나는 자가 흥이란 느껴서 나는 것이라 하여, 이름을 짓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름을 짓지 않
은 것이로다. 그리고 보니 이 정자를 지은 자나 여기를 지나는 자가 이름에 상관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니,
이는 오늘날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이름을 짓지 않은 자가
바랐던 바와 이 정자를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태사는 빙그레 웃고 나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정자라는 것이 많았다. 정자의 이름은 이름을 짓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뜻에 맞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무루(蕪蔞)ㆍ침향(沈香)ㆍ취옹(醉甕)ㆍ풍락(?樂)ㆍ창랑(滄浪)ㆍ산월(山月) 같은 것은 모두 정자의 이름으로서
뜻도 각각 취할 바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 정자에 이름을 지으려 한다면 어찌 취할 만한 뜻이 없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태사는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보라. 이 정자를 둘러 있는 것이
어느 것이고 정자의 소유가 아닌 것이 있는가. 효성(曉星) 봉우리는 사면에서 우뚝 솟아 밝고 상쾌하고 뾰쪽
하나 누하고 험하거나 괴이하고 사나운 형상이 없으며, 가마천(加麻川) 물은 질펀하고 얕은 물결이 잔잔하게
졸졸 흘러 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없고, 아름다운 나무는 사시(四時)에 무성하여 먼 그늘이 우거졌고,
들꽃은 봄에 피어 그윽한 양기가 아름답도다. 물 위에 바람이 이니 거마(車馬)의 먼지도 날지 않고,
산 등에 달이 밝으니 기둥과 처마의 그림자가 저대로 어른거린다. 때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오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물결을 거슬러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 초동(樵童)이 지게를 지고 오니 총총히 구름을 뚫고 올라
가기도 한다. 때로는 검은 사슴이 머뭇거리면서 노느라면 푸른 털과 서리 같은 털이 뛰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며, 들 학이 춤추면서 내려와서 고개를 들고 둘러 보고 추킨 날개가 눈같이 펄럭이고 때로는 조각 구름이
고개를 지나가면 지친 새가 날라 돌아온다.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일면 노는 물고기가 나와 뛰기도 하고,
어둔 안개가 밤에 걷히면 경치가 맑고 트여 별은 번득이고, 은하수(銀河水)는 돌고 쇠잔한 달은 서쪽으로 잠기며
새벽 닭은 일찍이 울고, 서리 속 기러기는 멀리 날아갈 제, 흐르는 빛이 밝게 비치고 새벽 바람이 우수수 분다.
그대는 생각해 보라. 정자의 맑은 것이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간들 정자가 없겠는가마는 또 이
정자의 처마와 마루는 소나무로 옹호하고 사면이 넓게 트이고, 대점 받침도 없고 동자기둥도 없으며 서까래를
깎지도 않고, 벌려놓은 담도 없으니 진실로 맑지 않은 것이 없도다. 그러나 맑은 것으로 맑은 것을 부르매 모든
맑은 것이 모두 모여들어서 날마다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사이에서 떠돌아 한 점의 티끌 기운도 없어서 정자
밖의 맑은 것이 모두 정자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에 나는 이 정자를 납청(納淸)이라 이름 짓고 싶은데 그대
의 마음에는 어떠한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선생의 마음은 높으십니다.' 내 일찍이 구양수(歐陽脩)의
유미당기(有美堂記)를 읽으니 그 속에 말하기를, '인물(人物)의 성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
도읍의 웅장하고 부유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반드시 사방으로 통한 요충(要衝)으로 배[舟]와 수레가 모여드는
곳에 의거해야만 하고, 산과 물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을 구하려면 반드시 넓고 한가한 들이나 적막한 시골에서
구해야만 한다. 대개 먼저 것은 뜻을 번화한 데에 부치는 것이요, 뒤의 것은 마음을 세속 밖에 노니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각각 흡사한 점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선생의 마음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
난 것이 아닌가. 이제 정자가 이름이 없은 것은 사람들이 다만 정자에서 즐길 줄만 알고 그 즐거운 것이 정자의
맑은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요, 또 다만 정자 밖의 경치가 정자 밖에 있는 것만 알뿐 그것이 정자 안
에 있는 것이 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정자를 만든 자 역시 이같이 맑은 것을 알지 못하고, 더욱이 정자
밖의 경치가 정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선생이 이미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다만 이것이
정자를 중히 여길 줄 알 뿐만 아니라, 정자 역시 자신이 소중함을 알고 더욱더 스스로를 사랑할 것이다.
이로부터 글 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풍류(風流)로 소쇄(瀟?)하여 부귀이달(富貴利達)
을 벗어난 사람들이 놀러오면, 정자는 반드시 그들과 취미가 서로 같은 것을 기뻐해서 정자 속에 있는 맑은 것
을 반드시 나누어 주어 즐거움을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용렬한 사람이나 속된 사람들이 때로 여기 와서 떠들
고 노래하고 웃으며 저들대로 즐거워할지라도 정자는 그들의 즐거움에 반드시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태사(太史)는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내가 다시 웃으며 말하기를, '선생은 중국 조정의 첫째 가는 사람
으로서 더욱이 한림(翰林)의 자리란 본래부터 청화(淸華)하고, 나의 벼슬 자리 역시 청요(淸要)라고 말합니다.
참찬(參贊)으로 말해도 동국(東國)에 있어서 임금을 보좌하는 자리로서 역시 벼슬이 맑고 높으며 기밀(機密)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 모두 이 정자에 모였으니 정자 또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니,
태사도 또한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렇다. 과연 정자가 받아들이는 바라, 또한 이미 맑도다.' 하였다.
역관(譯官)이 그 이름을 가지고 가서 이군(李君)에게 말하니 이군은 기뻐하며 사례하고, 아울러 시를 지어 주기
를 청하였다. 태사와 나는 각각 단구(短句)를 써서 정자 가운데 두고 갔다.
조선 서울에 도착하니 이참찬(李參贊)이 이 일을 이미 국왕(國王)에게 고하였으므로 임금은 경좌(卿佐)를 보내
와서 사례했다. 우리가 일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올 때 다시 이 정자를 지나다가 보니 전일에 지어준 이름과
남겨둔 시(詩)를 이미 현판을 만들어 정자에 걸어 놓았다. 또 국왕은 미리 사람을 시켜 이 정자에 잔치를 베풀
게 했지만 준비만 하고 아직 베풀지는 않았다.
이군이 역관을 시켜 와서 베풀기를 청하니 태사가 말하기를, "정자 이름을 이미 청(淸)이라 했는데 다시 부귀
스러운 모양을 만들면 어찌 이 정자를 성취시키는 바이랴." 했다. 이군이 이 말로 인하여 간략한 상으로 술을
마시도록 하니 태사와 나는 역시 다같이 즐거워 했다. 일어나서 정자에 의지하여 사방을 돌아다 보니 산빛 물빛
은 빛나기가 새로운 것 같아 더욱 정신이 상쾌함을 깨닫게 한다. 이군이 다시 기(記)를 청하면서, '이것은 임금
의 뜻입니다.' 한다. 태사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름을 지었으니 그대가 기를 쓰는 것도 또한 좋지 않은가.'
하므로, 사양할 수가 없어서 전일에 태사가 내게 하던 말을 밝혀 기록하니 때는 12월 22일이었다." 하였다.
○ 당고(唐皐)의 시에, "가마천(加麻川)은 효성산(曉星山)에 닿았는데, 누가 한가로운 정자를 여기에 지었는가.
칡덩굴에 걸린 달이 물결에 비치니 밤에 짝이 있고, 소나무에 부는 바람 고개를 넘으니 낮에도 상관이 없네.
떠 있는 처마에 푸른 안개 손을 머무르게 하고, 동자를 불러 차를 달이며 푸른 여울 굽어보네. 앞에 가득한 경치
보매 맑은 뜻 족하니, 새로운 현판 좋게 달아 정자 모양을 냈네." 하였다. 영춘당(迎春堂)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옛 정주(定州)에 있다. 신증 지금은 주의 북쪽 1리에 옮겨져 있다.
역원 신안역(新安驛) : 주 안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큰 자라와 악어의 굴이며, 범과 이리 다니는 길이라, 물로 가고 산으로 가니 걸음마다
아득하네. 엷은 구름 능히 비 될 줄 모르고, 부단한 저녁 햇빛 저절로 무지개 되네. 멧부리 끝 어지러운 돌을 선
창과 칼이 벌여 있고, 시내 밑 놀란 물결 북소리 울리는 듯. 천가지 버들 실 뜻도 많아, 사람 향해 가볍게 한줄기
시내에 스쳐 있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푸른 산엔 해가 아직 걸리지 않고, 푸른 나무엔 바람이 정히 많네. 신안역(新安驛)에서
베개에 의지하니, 신세 어떠한지 모르겠네. 누른 기장[黃粱] 문득 이미 익었는데, 손의 꿈은 남가(南柯)로
나르네. 우리(郵吏)가 또한 나쁘지 않아 빛깔이 흰술을 잔들고 따라오네. 가느다랗게 읊으며 흥이 그지없는데,
달빛이 한창 너울거리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멀리 천자의 조서 받들어 해동(海東)에 펴니,
산과 내를 지나 길이 몇 천리인가. 공경하고 삼가서 자랑할 만한 여러 수령(守令)들, 석대(石臺)가에 국궁하고
조서를 영접하네."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시내 구름 밤에 일어나니 달빛 몽롱한데, 누가 하늘 표주박을 가지고 푸른 공중에
물을 쏟는가. 어지러운 개구리 소리 꿈을 놀라게 하고, 가느다란 산 아지랑이 발에 들치네. 봄들 꽃다운 풀은
새로 푸른빛 더하고, 새벽 언덕 향기로운 티끌은 엷게 연홍(軟紅)이 젖었네. 먼 길에 비가 와서 행차가 막힘을
탄식하지 말고 초목에 혜택 내려 깊은 공 있음을 가장 사랑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 번 높은
누에 오르니 생각이 멀고 멀어, 아름다운 절기는 또 단오(端午)로세. 서울에서 잔치한 것 응당 누구를 생각
하리, 역로(驛路)에 누에 오르니 다만 마음 상하네. 근심스럽게 푸른 산 보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억지로 푸른
술 마시니 시 짓는 흥 도와주네. 상수(湘水)의 넋 천고에 조상한 이 없으니, 술 취해 남풍(南風)에 의지해 해 긴
것을 보누나." 하였다. 덕제원(德濟院) : 주의 동쪽 25리에 있다. 효성원(曉星院) : 주의 동쪽 56리에 있다.
달천원(?川院) : 달천(?川) 언덕에 있다. 당오리원(唐五里院) :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안양사(安養寺) :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절 서쪽 바위 아래 샘이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곧 영험이 있다.
심원사(深原寺) : 심원산(深原山)에 있다. 지장사(地藏寺) : 덕달산(德達山)에 있다.
석련사(石連寺) : 탄고개산(炭古介山)에 있다. 자성사(慈聖寺)ㆍ송흥사(松興寺) : 모두 오봉산에 있다.
원통사(元通寺) : 원통산(元通山)에 있다. 진강사(鎭江寺) : 칠악산(七岳山)에 있다.
옥계사(玉鷄寺) : 대야산(大夜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옛 정주(定州) 및 옛 수천(隨川)에 있다.
여단(?壇) :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수천폐군(隨川廢郡) :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본래 고려 수주(隨州)이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 군사가
창주(昌州)를 함락시키매, 본주 사람들이 자연도(紫燕島)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육지로 나와 곽주(郭州)
바닷가에서 사니, 고을 사람들이 제 토지를 잃었으므로 곽주 동쪽 16촌(村)과 소속된 안의진(安義鎭)을 떼어서
지수주사(知隨州事)라고 일컫고 인하여 곽주를 합쳤다.
공민왕 20년에 다시 곽주를 따로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수천군(隨川郡)으로 고쳤다. 세조(世祖) 12년에
이를 없애고 정주의 치소(治所)를 그 군(郡) 신안역(新安驛)으로 옮겼다.
옛 정주성(定州城) : 지금 치소의 동쪽 30리에 있다. 돌과 흙이 반반씩 섞였는데 둘레가 3천 8백 97척이요,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우물 8개와 못 1개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성동고성(城洞古城) : 주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흙과 돌이 반반이며, 외성(外城)의 둘레는 3만 1천 7백 9척, 내성
(內城)의 둘레는 9천 1백 18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육지고성(育地古城) : 주의 남쪽 27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7천 1백 16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제영 아득한 창해(滄海)에 미친 물결 고요하다 : 유한생(柳漢生)의 시에, "아득한 창해에 미친 물결 고요하고,
기름진 들판에 장마비 컴컴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세조(世祖) 초년에 따로 귀성군(龜城郡)을 귀성 옛터에 두었음은 앞서 기성부 조에 기록한 바와 같다.
11년에 또 주(州)의 치소(治所)를 수주군(隨州郡)의 신안역(新安驛)에 옮겨 수주군에 합하였다. 경종(景宗) 2년에
수성장(守城將)을 겸하였고 뒤에 위진장(衛鎭將)으로 하였으며, 순조(純祖) 11년에 역적 홍경래(洪景來)의 역모
한 사실로 하여 정원현(定遠縣)으로 강등하였다가 뒤에 도로 승격시켰다.
방면 동부(東部) : 성 안에 있다. 서부(西部) : 성 밖에 있다. 운전방(雲田坊) : 동쪽으로 55리에 있다.
이언방(伊彦坊)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서원방(西院坊)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덕달방(德達坊)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이방(南而坊) : 동쪽으로 35리에 있다.
오산방(五山坊)ㆍ고읍방(古邑坊)ㆍ덕암방(德巖坊) : 모두 동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아이포방(阿耳浦坊) :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다. 서면방(西面坊) : 서남쪽으로 50리에 있다.
동주방(東州坊)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고현방(高峴坊) :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신안방(新安坊) : 동북쪽으로 40리에 있다. 갈지방(葛池坊) :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대명동방(大明洞坊) : 동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창고 사창(司倉)ㆍ신창(新倉)ㆍ승창(僧倉) : 모두 성 안에 있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해창(海倉)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목장창(牧場倉).
영아 독진장(獨鎭將) : 속읍(屬邑)은 정주ㆍ철산(鐵山)ㆍ삭주(朔州)이고, 속진(屬鎭)은 천마(天麻)ㆍ구령(仇寧)ㆍ
막령(幕嶺)이고, 초산(楚山)의 속진은 차현(車峴)ㆍ우현(牛峴)ㆍ하이산(何耳山)ㆍ양령(羊嶺)이고,
곽산(郭山)의 속진은 서림(西林)ㆍ임해(壬海)이고, 벽동(碧潼)의 속진은 벽단(碧團)ㆍ임토(林土)ㆍ대파(大坡)ㆍ
아소파(兒小坡)ㆍ아광평(兒廣坪)ㆍ추구비(?仇非)ㆍ소길호리(小吉號里)이고, 위원(渭原)의 속진은 오로량(吾老梁)ㆍ
갈헌동(乫軒洞)이다.
이상은 농장무대마병(弄壯武隊馬兵) 12초(哨), 정초속오(精抄束伍) 1백 25초, 수영패(隨營牌) 9초,
성정군(城丁軍) 11초, 작대군(作隊軍) 38초, 표하군(標下軍) 2천 6명이다. 《문헌비고》에 실려있다.
역참 신안역(新安驛) : 주 안에 있으며, 말[馬]이 10필이고 대동(大同)에 속해 있다.
기발(騎撥) : 구정참(求井站)이며, 동쪽은 가산(嘉山)의 관문참(官門站)과 상거(相距)하고, 서쪽은 본주의 관문참
과 상거하였는데, 관문참은 주 안에 있으며, 서쪽은 곽산의 운흥참(雲興站)과 상거하다.
교량 달천교(?川橋)ㆍ가마천교(加麻川橋).
토산 꿀ㆍ진자(榛子).
누정 제승루(制勝樓)ㆍ삼관정(三觀亭) : 모두 성 안에 있다.
사원 봉명서원(鳳鳴書院) : 현종(顯宗) 계묘년에 세우고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 강화(江華) 편에 보라.
김상헌(金尙憲) : 태묘(太廟) 편에 보라. 신안서원(新安書院) : 숙종(肅宗) 임진년에 세우고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 문묘(文廟) 편에 보라.
읍호 신안(新安).
고읍 수주군(隨州郡)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고려 때에 수주를 설치하여 북계(北界)에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이 창주(昌州)를 함락하자 본주의 백성들은 자연도(紫燕島)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육지로 나와서 곽주 해빈(海濱)에 우거하였다.
이에 주의 백성은 딸을 잃었으므로 곽주의 동쪽 16촌(村)을 떼어주고 안의진(安義鎭)에 소속시켜 지수주사(知隨
州事)로 곽주를 겸하게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다시 나누어서 곽주를 설치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수주군사(隨州郡事)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11년에 내속시켰다.
숙천도호부 肅川都護府
동쪽은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순안현(順安縣) 경계까지 20리, 영유현(永柔縣) 경계까지 18리,
북쪽은 안주(安州) 경계까지 13리, 서쪽은 바다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6백 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 평원군(平原郡)인데 태조(太祖) 11년에 진국성(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통덕진(通德鎭)
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숙주(肅州)라 일컫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지군사(知郡事)로 고쳤으며,
본조 태종(太宗)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의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진국(鎭國)ㆍ평원(平原)ㆍ숙주(肅州).
성씨 본부(本府) 최(崔) : 봉주(鳳州). 박(朴) : 화주(和州). 임(任) : 문화(文化). 오(吳) : 해주(海州).
정(鄭) : 창녕(昌寧). 신(申) : 공주(公州). 양(楊) : 은율(殷栗). 이(李) : 원주(原州). 전(全) : 등주(登州).
김(金) : 백령(白翎)ㆍ경산(京山)ㆍ인주(麟州)ㆍ김화(金化)ㆍ유성(儒城)ㆍ광리(光利)ㆍ김포(金浦)ㆍ광양(光陽).
황(黃) : 황주(黃州). 강(康) : 진주(晉州).
산천 당산(唐山) : 부의 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통덕산(通德山)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편운산(片雲山)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통덕천(通德川) : 통덕산(通德山) 동쪽에 있다. 근원이 순안현(順安縣)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 성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흐르다가 당자포(唐子浦)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당자포 : 부의 서쪽 30리에 있으니 어량(魚梁)이 있다. 양찬지(楊贊池) : 부의 서쪽 17리에 있다.
풍천(楓川) : 부의 북쪽 23리에 있다. 근원이 안주(安州) 오도산(悟道山)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갔다.
토산 실[絲]ㆍ삼[麻]ㆍ홍어(洪魚)ㆍ석수어(石首魚)ㆍ숭어[秀魚]ㆍ조개[蛤]ㆍ새우[蝦]ㆍ자초(紫草)ㆍ
세어(細魚)ㆍ굴[石花]ㆍ민어(民魚)ㆍ농어[?魚].
성곽 읍성(邑城) : 곧 진국성(鎭國城)이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0척, 높이가 20척이며 안에 우물 5개가
있다.
봉수 도영산봉수(都迎山烽燧) : 부의 남쪽 18리에 있으니 북쪽으로 안주 소리산(所里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영유현(永柔縣) 미두산(米頭山)에 응한다.
식포봉수(息浦烽燧) : 부의 서쪽 30리에 있으니 북쪽으로 안주 동을랑산(冬乙郞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석리
(高石里)에 응한다.
고석리 봉수(高石里烽燧) : 부의 서쪽 30리에 있으니 남쪽으로 여을외(餘乙外)에 응하고, 북쪽으로 식포(息浦)에
응한다.
여을외봉수(餘乙外烽燧) : 부의 서쪽 30리에 있으니 남쪽으로 영유현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석리에
응한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에 있다.
역원 숙녕역(肅寧驛) : 부의 서쪽 2리에 있는데, 누(樓)가 있다
○ 예겸(倪謙)의 시(詩)에, "안흥(安興)을 새벽에 떠나 안개와 연기 무릅쓰니, 달리는 말 나는 듯하여 채찍이 쓸
데 없네. 70리나 되는 길을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도달하니, 붉은 해 아직 중천(中天)에도 오지 않았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큼직한 높은 누각 먼 숲을 대했는데, 한가한 꽃 다 떨어짐 누가 이를 막으리. 아침마다
가는 길 이별도 어렵고, 곳곳에 보는 산 쉽사리 마음에 오르네. 객관(客館)의 화려한 자리에 거듭거듭 취하고,
친구의 아름다운 글귀 짧게 길게 읊네. 가을 바람에 머리를 사양(斜陽) 밖으로 돌이키니, 집이 강남(江南) 땅
몇째 봉우리에 있는고."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서울[北京]을 이별한 지 40일, 매양 누에 오르면 생각 금할 길 없네. 먼 나무 천리의 눈
가리우고, 늙은 하늘[老天] 도리어 일생의 마음을 알아주리. 구름은 일정한 자취 없이 처마에 의지해 자고, 새는
남은 정이 있어 기둥을 돌며 우네. 어쩌면 맑은 바람 양쪽 겨드랑이에 외서, 표연(飄然)히 나를 불어 먼 멧부리를
넘어가게 하리." 하였다.
○ 기순(祈順)의 시에, "백 척 난간이 저녁 그늘에 잠겼는데, 객중(客中)에 올라 구경하니 생각 금할 길 없네.
달리고 달려 장건(張騫)의 절(節)을 함께 잡았고, 즐거우나 근심스러우나 항상 범로(范老)의 마음을 가졌네.
노을 그림자는 멀리 괴로운 따오기 따라 없어지고, 소나무 소리 엎드린 용(龍) 울음 같네. 내일 아침엔 또 동남쪽
길을 향해 갈 테니, 삼한(三韓) 땅 붉고 푸른 멧부리를 두루 보겠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수레를 몰아 숙녕(肅寧)으로 달리니, 가는 길 험하고 멀기도 해라.
푸른 숲은 초가집을 가렸고, 맑은 시내는 돌다리에 걸렸네. 가로질러오는 데는 평평한 육지가 적고, 빙빙 돌아
중첩한 멧부리를 지나네. 들꽃은 간밤 비에 젖어서, 송이마다 금전(金錢)이 향기롭네. 높은 데 오르매 화려한 집이
보이는데, 완연히 산 중앙에 있네. 모든 봉우리는 다투어 빼어난 것 같아, 사방으로 둘러싸 담 두른 것 같네.
한참 만에야 문에 들어오니, 느티나무 싹 뾰족이 돋아나네. 점심밥 배불리 먹으니, 하필 술상을 벌이리.
길에 올라 문득 떠나니, 앞에 벽제 소리 또한 드높네. 멀리 노는 것 누가 즐겁다 하리, 괴롭고 어려운 것 보두
맛보네. 저물녘에 안흥(安興)에 들어오니, 하늘은 연기 빛에 흐려 있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산 빛은 성과 같아 그림 누각 둘렀는데, 거듭 오니 풍경이 눈을 트여 주네. 봄이 가니 푸른
나무에 한가한 꽃 떨어지고, 어두워 오니 빈 숲에 지친 새 돌아오네. 누른 송아지 구름에 누웠는데 푸른 풀 자라고,
들 누에고치를 지으니 푸른 뽕잎 부드럽네. 밭갈기 재촉하는 뻐꾹새[布穀] 소리 겨우 그치려 하자, 손가락 꼽아
보니 보리가 또 익어[麥秋]가네." 하였다.
통녕원(通寧院) : 옛 도연역(都延驛)의 터이니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일명 어파(於坡)라고도 한다.
자비원(慈悲院)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신증 교량 대교(大橋) : 부의 서쪽 1리에 있다. 신교(新橋) : 대교(大橋) 남쪽에 있다.
불우 동산사(東山寺)ㆍ망일사(望日寺) : 모두 편운산(片雲山)에 있다.
백석사(白石寺) : 노골산(老骨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 검산(檢山)에 있다.
천불암(千佛庵) : 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청룡사(靑龍寺) : 오도산(悟道山)에 있다.
정산암(正山庵) : 성산(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행성(古行城) : 부의 서쪽 30리 바닷가에 있으니, 길이가 1만 8천 8백 17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호전성(虎田城)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9천 7백 10척, 높이가 13척인데 지금은 없어
졌다.
명환 고려 충인(忠仁) : 태조(太祖) 11년에 통덕진두(通德鎭頭)가 되었다.
하윤린(河允潾) : 공민왕(恭愍王) 때 지군(知郡)이다. 위왕(僞王) 다첩목아(多帖木兒)가 침입하자 제도(諸道)의
군사와 장수들이 왕내할 때 모두 숙주(肅州)를 경유하였는데 윤린은 대접하기에 소홀함이 없었다.
정치를 하는데 어진 것과 용서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서 세금 외에는 거두는 것이 없어지고 형벌이 줄어드니,
아전과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었고,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본조 연비(延庇) : 부사(府使)가 되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정치가 간이(簡易)하고 부역을 공평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글을 내려 표창했다.
제영 인간이란 본시 청량(淸?)한 것이다 : 이색(李穡)의 시에, "해는 처마 끝에 옮기고 바람은 누에 가득한데,
푸른 그늘 문밖에 이미 가을을 알리네. 인간이란 본시 청량한 것인데, 정부(征夫)의 옷소매 땀 흐르는 것 부끄
럽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현종 11년에 현으로 강등하고 숙종(肅宗) 4년에 부(府)로 승격하였다 : 21년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방면 동부(東部)ㆍ서부(西部) : 모두 읍 안에 있다. 동산(東山)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검산(檢山) : 서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우방(右坊) :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거리(居里)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평리(坪里)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법리(法里)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고리(高里)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5리이다. 식리(息里)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당리(唐里)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삼리(三里)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차리(次里)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송리(松里) : 북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성곽 읍성(邑城) : 곧 진국성(鎭國城)인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50척이며 우물이 다섯인데 지금은 퇴폐
되었다.
영아 청남전영(淸南前營) : 숙종 4년에 영유(永柔)로부터 부(府)로 영(營)을 옮겼다.
○ 영장은 한 사람인데 본부사가 겸한다.
○ 속읍으로는 숙천(肅川)ㆍ영유(永柔)ㆍ증산(甑山)ㆍ순안(順安).
봉수 아산(牙山)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마갑산(麻甲山) : 서쪽으로 10리, 지금의 준본부(準本府)에 있다.
창고 읍창. 해창(海倉)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창(南倉) : 10리에 있다. 서창(西倉) : 70리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 동쪽으로 50리, 자모산(慈母山) 성 안에 있다.
역참 혁폐 도연역(都延驛)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통덕역(通德譯). 기발(騎撥) 관문참(官門站).
진도 아산진(牙山津) : 분포(盆浦) 상류에 있다.
교량 신천교(新川橋) : 남쪽으로 4리에 있다. 은진교(銀津橋) : 남쪽으로 9리에 있다.
토교(土橋) : 서남쪽으로 20리에 있다. 풍천교(楓川橋)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유교(柳橋) :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자은교(慈恩橋) : 남쪽으로 6리에 있다.
향도교(香道橋) : 남쪽으로 7리에 있다.
토산 위어(葦魚)ㆍ새우[鰕].
가산군 嘉山郡
동쪽은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같은 군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정주(定州)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3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 신도군(信都郡)이다 : 또는 고덕현(古德縣)이라고도 한다. 광종(光宗) 11년에 습홀(濕忽)
에 성을 쌓고 승격시켜 가주(嘉州)가 되었다.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라 일컬었고, 고종(高宗) 8년에 반역이
일어났다 하여 낮추어 무령(撫寧)이라 했으며, 18년에 몽고(蒙古) 군사를 피해서 섬으로 들어갔다.
원종(元宗) 2년에 육지로 나와서 태박(泰博)ㆍ무위(撫渭) 등지를 모두 본군에 부쳐서 오성겸관(五城兼官)으로
하였다. 뒤에 나누어 태(泰)ㆍ박(博)ㆍ무위(撫渭) 등 세 주를 두었으며, 오직 박주(博州)만을 그대로 소속시켰다.
공민왕 20년에 이르러 또 나누어 박주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을 삼았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신도(信都)ㆍ가주(嘉州)ㆍ무령(撫寧)ㆍ고덕진(古德鎭).
성씨 본군 한(韓) : 평주(平州)ㆍ안보(安保). 탁(卓) : 가평(嘉平). 조(趙) : 평주(平州). 김(金) : 풍주(?州)ㆍ
안동(安東). 장(張) : 홍주(洪州). 정(鄭) : 함종(咸從). 이(李) : 전주(全州). 문(文) : 황주(黃州). 오(吳) : 해주(海州).
풍속 질(質)을 숭상하고 화(華)를 힘쓰지 않다 : 군적(群籍)에 나타나 있다.
산천 봉두산(鳳頭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청룡산(靑龍山) : 군의 동쪽 9리에 있다. 박천군(博川郡)과의 경계이니 일명 봉미산(鳳尾山)이라고도 한다.
효성산(曉星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서문령(西門嶺)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속명(俗名)은 석문령(石門嶺)
이라고 한다. 《일통지(一統志)》에는 가산령(嘉山嶺)이라고 했다.
○ 김식(金湜)의 시에, "깎은 석벽 높은 봉우리 형세가 하늘로 들어가는데, 말발굽 높았다 낮았다 간신히 오르네.
구름 깊으니 산에 길이 없는 것 같고, 나무 늙었으니 이곳에 신선 있는 것 알겠네. 비를 등진 찬 바위는 아직도
눈이 남았고, 바람에 임한 약초는 향기가 나려고 하네. 머리를 돌이키니 황홀한 저 하늘 밖에, 한 줄기 소나무
소리 시냇물 소리 섞였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낭떠러지는 돌고 길이 구부러져 하늘에 연했는데, 이 길 생긴 지 언젠지 알지 못하네.
처음엔 지형이 왜 손을 두렵게 하는가 의심했더니, 문득 자기 몸이 신선이 되었나 의심하네. 피리소리는 어지럽게
솔가지 비에 나부끼고, 깃발 그림자는 나무 숲 연기를 평분(平分)했네. 좋은 경치 본래 구경하기 마땅한데, 하물며
동국(東國)사람 샘처럼 술이 많음에라."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가산령(嘉山嶺)이 어찌 이렇게 높고 높은가, 층층한 푸른 돌 높다랗게 쌓였네. 그 가운데
작은 길 실처럼 열렸는데, 열 번 돌고 아홉 번 구부러져 양의 창자처럼 돌았네. 내 말을 억지로 몰아 올라가기, 몇
번이나 채찍질해 재촉했나. 하인은 헐떡이며 땀이 얼굴에 흐르는데, 제일 반가운 건 따스한 바람과 가는 티끌도
없는 것일세. 마루턱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눈앞에 푸른 솔 천만 그루이네. 안주(安州)의 물 흰 비단같이 뻗치어,
푸른 산모퉁이에서 공중에 떠서 해에 비치네. 만일 조정 명령 받드는 일 아니라면, 이 곳에 내 어찌 왔으리.
인생이 멀리 노는 것 참으로 장하거니, 마판[?]에 엎드려 배불리 먹기만 하는 못난 말[駑?] 불쌍해라.
높은 데 올라 글 짓는 것 나에게는 어려우나, 경치 대해 짧은 시 지어보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험한 길 오르매 걸음마다 높아지니, 푸른 산 아지랑이 가늘게 날아 도포를 적시네.
성긴 소나무 바람소리는 천상의 음악을 울리고, 먼 물 발해(渤海) 물결이 출렁이네. 한 절간의 연하(煙霞)는 석벽
에 의지했고, 몇 집 풍경이 숲 언덕에 가까운고. 고을 사람 나를 맞아 많이 모였는데, 앞에 달리는 하인들 깃발
보이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어지러운 돌에 소나무 백 리 나왔는데, 노려보는 주린 범이 걸터 앉았네. 사람은 가다가
대낮에도 놀라고, 새는 날아 넘다가 황혼을 겁내네. 돌고 구부러져 말 돌릴 데 없는데, 하늘로 통한 한 문이 보이네.
어찌 모름지기 진재(眞宰)를 원망하랴. 그대로 두어 번방(藩邦)을 굳게 하리." 하였다.
화악산(華岳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망해산(望海山) : 군의 서쪽 1리에 있으니 봉두산(鳳頭山)과 서로 대해
있다.
오사롱산(吾思弄山) : 군의 서쪽 15리에 있으니 정주(定州) 경계에 있다. 일명 칠악산(漆岳山)이라 한다.
벌사롱산(伐思弄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으니 오사롱산과 더불어 가마천(加磨川)을 격해서 서로 대해 있다.
대령강(大寧江)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고 했고 또는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속담에 전하기를, "주몽(朱夢)이 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도망해서 여기에 오니, 물고기들이 다리를 만들어서
건너는데 편리하게 했다 해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한다. 또 박천군(博川郡)에도 나타난다.
가마천 : 고을 서쪽 25리에 있으니 곧 정주 가마천이다. 가지천(加之川) :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자개포지(者介浦池)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송지(松池)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곡지(曲池) : 군의 서쪽 25리에 있다. 추도(楸島) : 군의 동쪽 22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칠(漆)ㆍ자초(紫草)ㆍ숭어[秀魚]ㆍ뇌록(磊綠)ㆍ소유(?油)ㆍ게[蟹]ㆍ새우[鰕].
봉수 돈산봉수(頓山烽燧) : 군의 서쪽 15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정주 사읍동음(沙邑冬音)에 응하고, 남쪽으로
박천군 독산(禿山)에 응한다. 연지봉수(蓮池烽燧) : 군의 동쪽 18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정주 칠악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안주(安州) 청산(靑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누정 적개정(敵愾亭) : 대령강 위에 있다.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지나다가 지어
준 이름이다.
첨허정(瞻虛亭) : 가평관(嘉平館) 서쪽 1리에 있다. 신증 신정(新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역원 가평역(嘉平驛) : 군의 동쪽 3리에 있다.
○ 김식(金湜)의 시에, "푸른 솔 길도 멀고 석문(石門)도 먼데, 말에 내리니 분명 집에 도착한 것 같네. 지붕보다
높은 배나무 처음 열매 맺고, 뜰에 가득한 작약(芍藥) 반쯤 꽃이 피었네. 고개 위에 바람 이니 바위 사이 폭포
울고, 시내 위에 구름나니 바다 안개에 연했네. 느지막이 누에 올라 한가로이 앉았으니, 석양의 그림자 돌아가는
갈가마귀 보내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나는 가평역(嘉平驛)을 좋아하노니, 가산(嘉山) 어귀 바로 곁에 있네. 긴 소나무 푸르러
숲을 이루어, 빽빽하게 문을 둘렀네. 군수(郡守)는 조정 명령을 공경하여, 조서(詔書)에 절하매 자주 머리를
조아리네. 나를 머물러 한끼 밥을 대접하는데, 자리 베풀어 두어 순배 술을 권하네. 해가 기울어 말을 채찍질해
가니, 먼 길에 분주한 것 싫증나네. 앞으로 바라보니 모두 높고 높으며, 곁을 돌아다보니 모두 작은 언덕일세.
하루 종일 일만 산 속에, 고삐와 채찍 항상 손에 있네. 넓적다리 살 점점 여위어지는 것 깨닫겠고, 낯빛은 먼지
에 젖었네. 박천(博川)ㆍ안천(安川) 맑은 우물 건너서, 저물 녘에 안흥(安興)에 들어와 잠깐동안 두 팔을 쉬네."
하였다. 신증 동월(董越)의 시에, "중춘(仲春) 그믐날에, 산관(山館)에 말을 쉰 일 생각나네. 나무 빛은 공중에
푸른 것 떴고, 하늘 빛은 울람(蔚藍)이 움직이네. 관정(官程)은 기북(冀北)으로 재촉하고, 돌아갈 꿈 강남(江南)
에 둘렀네. 사절(使節)이 거듭 여길 지나니, 부드러운 뽕잎 벌써 누에를 치네." 하였다.
○ 당고(唐皐)의 시에, "석문(石門)에 수레 몰아오니, 역(驛)이 있어 길 어귀에 임했네. 사치로움 다투어 두루
단청을 그렸고, 어두움 틔우고자 매양 창을 만들었네. 땅에 깔린 자리는 창포[蒲] 빛이 나고, 탁자에 덮은 자리는
호랑이가 머리를 숙였네. 저물게 쉬어 겨우 식사를 마치자, 밤 잔치에 인해 술을 드네. 예의를 갖추어 관반(館伴)
이 정성스럽고, 말을 통하느라 역관(譯官)이 분주하네. 앞산엔 소나무와 잣나무 많아, 벗어진 작은 언덕과는
다르네. 서로 뒤섞여 동무를 끄는 것 같고, 서로 향해 술잔을 마주잡은 것 같네.
가고 또 가 강 언덕 지나니, 날마다 티끌 먼지에 부딪치네. 흙덩이 던지어, 구슬로 갚아줌 얻으려 하네.
붓에 먹 찍으매 낯이 부끄럽고, 옷깃 당기니 팔꿈치 드러나네." 하였다.
감초원(甘草院) : 박천강(博川江) 언덕에 있다. 가마포원(加磨浦院)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금계사(金鷄寺) : 화악산(華岳山)에 있다. 천왕사(天王寺) : 봉두산(鳳頭山)에 있다.
보혈사(普穴寺) : 오사롱산(吾思弄山)에 있다. 청룡사(靑龍寺) : 청룡산(靑龍山)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효성산(曉星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효성대(曉星臺) : 효성산에 있다. 속담에 옛날 별[星]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
칠성대(七星臺) : 고성(古城) 안에 있다. 옛 가산[古嘉山] : 오사롱산 남쪽 구비 화지리(火池里)에 있다. 본읍(本邑)
이 바다 섬에서 나와 여기에서 살다가 얼마 안 되어 옛터로 돌아갔다.
부창역(阜昌驛) : 옛 터로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안신역(安信驛) : 옛터가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옛 장성(長城)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만 4천 9백 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봉두산성(鳳頭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천 67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안에 우물 99개와 두 시내와 두 못이
있다.
인물고려 한희유(韓希愈) : 이 고을 아전이며, 본관은 평주(平州)다. 말타고 활 쏘기에 능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서 진도(珍島)ㆍ탐라(耽羅)ㆍ일본(日本)을 토벌해서 모두 공이 있었다.
뒤에 원 나라 설도간(薛?干)과 함께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을 깨치니 원 나라 황제가 포상하여 회원대장군
(懷遠大將軍)을 제수하고 삼주 호부 궁시 옥대(三珠虎符弓矢玉帶) 등을 하사했다.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고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효자고려 김원진(金元進) :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리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타서 올리니
병이 곧 나았다.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충개(?介) : 중랑장(中郞將) 김가물(金加勿)의 딸인데,
나이 16세 때 그의 어머니가 나쁜 병을 얻어 오래 낳지 않으니 곧 오른손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약에 타서 드렸
더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신증열녀 본조 홍씨(洪氏) : 탁운(卓蕓)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마치고도 상복을 벗지 않고 따로 제당
(祭堂)을 지어 남편의 화상을 벽에 걸고 날마다 세 번씩 곡하고 전[奠]을 올렸다.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막종(莫從) : 고을 사람 홍한종(洪漢從)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날마다 세 번 곡하고 전을 올렸다. 집이 가난해서
항상 남에게 꾸어다가 지내고 7년이 되도록 상복을 벗지 않았다.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제영 주렴(珠簾) 속 십 리 피리 불고 노래하던 곳 : 김극기(金克己)의 사(詞)에, "미인의 눈썹 멀리 저녁 고개에 떠
있고, 푸른 눈동자 가볍게 은근한 정[秋波]을 풍겨주네. 주렴 속 십 리 피리 불고 노래하던 곳에, 떠도는 몸 다행
히 한가롭게 지나가네. 반악(潘岳)은 과실을 던지는데 잠깐 번거롭고 사곤(謝鯤)은 어찌 북[梭] 던지는 것 피하랴.
서늘한 연기 가는 비 서쪽 누각 위에 비 이별하는 설움이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肅宗) 8년에 별우영장(別右營將)을 겸하고 영종(英宗) 9년에 방수장(防守將)으로 개칭하였다.
옛 가산(嘉山)은 오사미산(吾思美山)의 남쪽에 있었는데, 바닷섬으로부터 나와서 옛 치소(治所)를 환원하였다.
방면 군내면(郡內面)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동면(東面)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남서(南西) : 15리에 있다.
서면 : 20리에 있다. 서북면(西北面)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동북면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창고 본창(本倉). 북창(北倉)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산창(山倉)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서창(西倉) : 가마천(加麻川) 가에 있다.
영아 별우영장(別右營將) : 태수(太守)가 겸하였으며, 속읍은 가산(嘉山)ㆍ박천(博川)이고 속진(屬鎭)은 고성
(古城)이다.
장무대마병(壯武隊馬兵)이 1초(哨)이고, 정초동오(精抄東伍)가 20초이고, 자모별대(自募別隊)가 6초이고,
아병(牙兵)이 1초이고, 작대군(作隊軍)이 3초이고, 표하군(標下軍)이 4백 46이다. 《文獻備考》
토산 쑥.
역참 관문참(官門站) : 동쪽은 박천의 광통참(廣通站)과 상거(相距)하고, 서쪽은 정주의 구정참(求井站)과 상거해
있다.
진도 대정강진(大定江津) : 동쪽 언덕은 박천의 진두진(津頭津)이다.
별가탄진(鼈駕灘津)ㆍ자하포진(者河浦津)ㆍ장수탄진(長水灘津)ㆍ독초진(獨草津).
교량 서방교(西方橋)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누정 제산정(齊山亭) : 군 안에 있다.
영유현 永柔縣
동쪽은 순안현(順安縣) 경계까지 9리, 남쪽은 같은 현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평양부(平壤府) 경계까지 35리,
북쪽은 숙천부(肅川府) 경계까지 13리, 해안까지 3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6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 정수현(定水縣)인데 뒤에 영청(永淸)으로 고쳐서 용강(龍岡)에 붙이고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高宗) 43년에 현령을 파하고 안인(安仁)의 진장(鎭將)이 겸하게 했다.
공민왕 7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고, 본조 태조(太祖) 2년에 안인진(安仁鎭)을 안주(安州)로 옮겨 붙이고,
함종(咸從)에 소속된 통해현(通海縣)을 현(縣)에 붙였다. 5년에 또 영원(寧遠)ㆍ유원(柔遠) 두 진(鎭)이 와서
합쳐서 영영현(永寧縣)이라 일컬었다. 세종(世宗) 5년에 영녕(永寧)이라는 이름을 피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 세조 12년에 옛 영원 지방은 요해지(要害地)라 해서 따로 군(郡)을 두었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
군명 청계(淸溪)ㆍ영청ㆍ정수ㆍ영녕.
성씨 본현 변(邊) : 염주(鹽州). 김(金)ㆍ노(盧)ㆍ강(康) : 모두 풍주(?州).
최(崔) : 해주(海州). 신(辛)ㆍ이(李) : 모두 강화(江華). 손(孫) : 영일(迎日). 우(禹) : 당산(唐山).
유원 윤(尹) : 평주(平州). 임(任) : 풍주(?州). 조(趙) : 금주(衿州). 이(李) : 청송(靑松). 변(邊) : 심양(瀋陽).
통해(通海) 홍(洪) : 염주(鹽州). 이(李) : 홍주(洪州). 노(盧) : 풍주(?州).
형승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 이지강(李之剛)의 시에, "사면으로 산이 둘러 한 성을 이루었네." 하였다.
서쪽은 창해(滄海)에 연해 있다 : 원효연(元孝然)의 시에, "서쪽은 맑은 바다에 연했는데, 바다는 마을에 접했네."
하였다.
산천 미두산(米豆山) : 현의 동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천보산(天寶山)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자화산(慈華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원산(圓山) : 현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석련산(石連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덕지(德池) : 현의 서쪽 20리에 있으니 둘레가 5만 3천 4백 척이다.
가흘지(加訖池) : 현의 서쪽 2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만 1천 50척이다.
우륵지(?勒池)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사근교포(沙斤橋浦)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판교포(板橋浦)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칠(漆)ㆍ자초(紫草)ㆍ조개[蛤]ㆍ석수어(石首魚)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자하(紫蝦)ㆍ
석화(石花)ㆍ부레[魚?]ㆍ윤화(輪花)ㆍ즉어(?魚)ㆍ농어[?魚].
봉수 미두산봉수(米豆山烽燧) : 남쪽은 순안현(順安縣) 독자산(獨子山)에 응하고 북쪽은 숙천부 도연산(都延山)에
응한다.
소산봉수(所山烽燧) : 현의 북쪽 38리에 있으니 남쪽은 선곶(船串)에 응하고 북쪽은 숙천부 여을외(餘乙外)에
응한다.
대선곶봉수(大船串烽燧) : 현의 서쪽 45리에 있으니 남쪽은 평양부(平壤府) 불곡(佛谷)에 응하고 북쪽은
소산(所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동북쪽 2리에 있다.
불우 약사사(藥師寺)ㆍ황갑사(黃甲寺) : 모두 천보산(天寶山)에 있다. 봉진사(鳳進寺)ㆍ북천왕사(北天王寺)ㆍ
남암사(南菴寺) : 모두 미두산(米豆山)에 있다.
추암사(楸巖寺) : 원산(圓山)에 있다. 수정사(水淨寺) : 자화산(慈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유원진(柔遠鎭) :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래 고려 평로진(平虜鎭)인데 정종(靖宗) 7년에 최충(崔沖)에게
명해서 토성(土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천 9백 24척, 높이가 14척이었다.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본조 태조
(太祖) 5년에 현에 붙였다. 안에 우물 셋과 못 하나가 있다.
옛 영원(寧遠) : 현의 서북쪽 40리에 있다. 통해폐현(通海廢縣) :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니 옛 성이 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영전(影殿) : 미두산(米豆山) 봉진사(鳳進寺) 남쪽에 있으니 안에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했고, 동서쪽 벽에는 37공신(功臣)과 12장군(將軍)의 상(像)을 그렸다. 매양 제삿날과 명절이면 등에 불을
켰고 단오(端午)ㆍ추석(秋夕)ㆍ동지(冬至)ㆍ입춘(立春)에는 지방의 수관(首官)이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고소토성(古小土城)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둘레가 1천 8백 20척, 높이가 14척이다. 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미두산성(米豆山城)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3백 80척,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14개와 못 둘이 있다.
또 군창(軍倉)이 있다.
제영 만 그루 소나무 어울려 푸르러 고을 성을 감쌌네 : 공부(孔府)의 시에, "만 그루 소나무 어울려 푸르러 고을
성을 감싸는데, 기름진 넓은 들판 10리나 평평하네." 하였다.
작은 마을[十室]이 쓸쓸하게 옛 성을 지고 있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작은 마을 쓸쓸하게 옛 성을 지고
있는데, 잔산(殘山)과 단롱(斷?)이 하늘에 닿아 연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부(東部)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서부(西部) :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중부(中部)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해율(海栗)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통해(通海)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청지(淸池)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덕지(德池)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상계(上界)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백로(白鷺)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목산(木山) : 남쪽으로 끝이 30리이다.
수남(水南) : 남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갈하(葛下)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용복(龍伏) :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연하(蓮下) :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소호(蘇湖)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성지 유원진성(柔遠鎭城) :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3백 24척이고, 우물이 3개 못이 하나 있다.
통해현성(通海縣城) : 흙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 와룡산(臥龍山) : 소산(所山)이라고도 하는데 위에 보라. 미두산신봉(米豆山新烽).
창고 남창(南倉)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소창(蘇倉) :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진창(鎭倉)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성창(城倉) : 동쪽으로 55리 자모산(慈母山) 성 안에 있다.
역참 혁폐 영덕역(迎德驛)ㆍ심원역(深源驛) 기발(騎撥) 냉정참(冷井站) : 동쪽으로 9리에 있다.
교량 사근교(沙斤橋)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토교(土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반교(?橋).
토산 민어(民魚)ㆍ새우[鰕].
누정 이화정(梨花亭) : 읍안에 있는데 선조 계유 2월에 의주(義州) 가주필(駕駐?)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영종(英宗) 경오년에, 어필로 사액하였다.
사원 삼충사(三忠祠) : 선조 계묘년에 건축하여 현종 무신년에 와룡(臥龍)이라 사액하였는데,
영종 경오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사액하였다. 제갈량(諸葛亮) : 남양(南陽) 편에 보라.
53권 의주목 義州牧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
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
(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 일명 파주(把州)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
(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
(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
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
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에 금(金)이 또한 주(州)를 가지고서 귀속하였다. 고종 8년에는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서 함신(咸新)
이라고 일컬었다가 곧 옛이름으로 회복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해서 목(牧)으로 하였고,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각각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고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으로 내속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 2 : 철산ㆍ용천.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1명씩.
토관 도할사(都轄司) 도할(都轄)ㆍ전사(典事) : 1명씩.
전례서(典禮署) 감부(勘簿)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 1명씩. 융기서(戎器署)ㆍ사창서(司倉署) 장사(掌事)ㆍ
섭사 : 1명씩이다. 전주국(典酒局), 급사ㆍ섭사 : 1명씩. 사옥국(司獄局) 섭사 : 1명. 진강위(鎭江衛)ㆍ여과(勵果)ㆍ
부여과(副勵果)ㆍ여정(勵正)ㆍ부여정(副勵正) : 1명씩.
여맹(勵猛) : 2명. 부여맹(副勵猛) : 3명. 여용(勵勇) : 4명. 부여용(副勵勇) : 5명이다.
○ 토관 이하는 함경도 경원부(慶源府)와 같다.
군명 용만ㆍ화의ㆍ보주ㆍ포주ㆍ파주ㆍ함신ㆍ송산(松山).
성씨 본주 장(張) : 안동(安東)ㆍ화녕(化寧). 최(崔) : 강릉(江陵). 독고(獨孤). 정주(靜州) 윤(尹) : 평산(平山).
김(金) : 평산ㆍ정안(廷安)ㆍ김해(金海). 조(趙) : 충주(忠州). 인산(麟山) 이(李)ㆍ유(柳) : 모두 밀성(密城).
서(徐) : 충주. 최(崔) : 해주(海州). 영주(靈州) 김(金) : 용강(龍岡).
위원(威遠) 백(白) : 백주(白州). 임(任)ㆍ유(柳)ㆍ노(盧) : 모두 풍주(?州).
서(徐) : 광양(光陽). 정융(定戎) : 조(趙), 김(金) : 안악(安岳). 임(任) : 충주. 이(李) : 안동ㆍ옹진(甕津). 고(高) :
삼화(三和). 영덕(寧德) 김(金) : 은률(殷栗). 임(林) : 구현(丘縣). 양(楊) : 당악(唐岳).
영삭(寧朔) 김(金)ㆍ강(康) : 모두 장연(長淵). 오(吳) : 해주.
풍속 풍기(風氣)가 굳세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獵]을 좋아한다 : 지지(地志).
형승 압록강이 천연적인 도랑을 이루고 있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낙랑(樂浪)이 지경을 나누었다 : 기순(祁順)의 시에서.
산천 송산(松山) : 주에서 동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미라산(彌羅山) : 주에서 남으로 1백 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용천군의 땅이었는데, 성화(成化) 12년에 갈라 주에
붙였다. 어전(魚箭 고기 잡는 기구, 통발)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용천군 사자도(獅子島)의 남쪽에, 하나는 북쪽
에 있다.
염분(鹽盆)이 2군데 있다. 백마산(白馬山) : 주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흰 용마(龍馬)가
나와서 논 까닭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두산(馬頭山) : 주에서 남으로 80리 떨어져 있다.
화엄산(華嚴山)ㆍ천마산(天磨山) : 모두 고정녕(古定寧)의 북쪽에 있는데, 주에서 1백 50리 떨어져 있다.
천마산은 삭주(朔州)에 또 나온다.
판막현(板幕峴) : 주에서 동북으로 백 16리 떨어져 있다. 가두등현(加豆等峴) : 주에서 동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진병곶(鎭兵串) : 주에서 남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바다 : 주의 남쪽에 있다.
구룡연(九龍淵) :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다. 못의 남쪽에 토성(土城)터가 있는데, 둘레가 6백 척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 중 한 사람은 못 위에 있는 토성에 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주성
(州城) 안에 살고 있는데, 정주 호장(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가 어느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고 한다." 하고, 그 밤에 이르러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고서 보게 하였더니, 합단
등이 그럴 듯하다 하여 곧 성을 비우고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그러나 강 위에는 타고 건너갈 배가 없었으므로
유간이 마음에 이상히 여겨 자세히 보니 강 북쪽 근변에 철우(鐵牛)를 잠겨[沈] 세우고 또 쇠사슬로 남쪽 강가의
바윗돌 사이에 고정시키니 그 소의 등[背]을 부교(浮橋)로 삼아 건너는 것이었다. 유간이 곧 다리를 파괴하여
다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영락(永樂) 무자년에 주성(州城)을 쌓을 때에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
을 건져서 성문(城門)의 자물쇠[鎖?]를 만들고, 그 철우는 못의 모래 속으로 침몰되었으므로 다시 찾지 못하였
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신룡(神龍)이 진인(眞人)과 같으니 그 변화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하늘을 오르내
리기 일순간인데, 이 창산(蒼山)곁에 자리잡았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가득한 푸른 물은 몇 백 길이뇨, 옥거울이
티끌 받아들이지 않았네. 신물(神物)이 정말 그 속에 있음직하니, 때때로 못 가운데 하얀 기운 있네.
영단(靈壇)을 물가에다 누가 쌓았나, 북 치고 춤추며 빌기를 지금껏 하네. 굴원(屈原)처럼 구가(九歌)를 짓지 못해
한스럽구나, 물속에 어린옥(魚鱗屋)만 보일 뿐일세." 하였다. 압록강(鴨綠江) : 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마자(馬?)
또는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요동도사(遼東都司)와 거리가 5백 60리며, 그 근원은
만주(滿洲) 땅의 백두산에서 나오고, 수백 리를 남으로 흘러서 함경도의 갑산(甲山)ㆍ삼수(三水)를 거쳐 본도의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을 지나서, 강계(江界)와 위원(渭源)의 지경에 이르러 독로강
(禿魯江)과 합치고, 이산군(理山郡)의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포주강(蒲洲江 근원이 건주위(建州衛)에서 나왔
다)과 합치고,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치고,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소삭주(小朔州)를
거쳐서 주의 북쪽에 있는 어적도(於亦島)의 동쪽에 이르러 3파로 나뉘어서, 하나는 남으로 흘러 맴돌아 모여서
구룡연이 되는데 이름이 압록강이다. 그 물빛이 오리의 머리같이 푸르므로 이름지었고,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그 가운데로 흐르므로 소서강(小西江)이라 하였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하나로 합쳤다가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가닥으로 나뉘어서 하나는 서쪽
으로 흘러 적강(狄江 압록강의 서북쪽에 있다)과 합치고 하나는 남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되고, 위화도(威化島)
를 둘러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미륵당(彌勒堂)에 이르고 다시 적강과 합쳐서 대총강(大摠江)
이 되어 서해(西海)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여진(女眞)이 사는 곳에 압록강이 있다."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천하에 세 군데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黃河)ㆍ장강(長江) 양자강(楊子江)ㆍ압록이라 하는
데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 《송사(宋史)》에, "고려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다. 강의 넓이가 3백 보이고, 그 동쪽에는 바닷물이 맑아서
열 길 물속이 내려다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와 바라보이며 물이 다 파랗다." 하였다.
대명(大明)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시에, "압록강 맑은 물이 봉토(封土)의 한계를 그었는데, 폭력(暴力) 없고
사기(詐欺) 그쳐 평화를 즐기었네. 망명한 죄인(罪人)을 받지 않아 천년의 복이요, 예의(禮義)를 모두 닦아 백세
의 공일세. 한(漢) 나라가 친 것은 기록에 밝혀 있고, 요(遼) 나라가 친 것은 자취로써 알겠네.
정회(情懷)가 하늘 복판까지 닿았으니, 물은 풍파 없고 수자리에는 일 없네."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원암(圓庵)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싸늘한 강 한 줄기 물이 고요하게 흐르니, 압록이
아득한데 저녁바람 드날리네. 근원은 백산(白山)에 비롯하여 멀리 흘러나왔고, 형세는 창해(蒼海)와 나누어
허공[鴻?]에 닿았구나. 논밭에 흘러드니 백성들 기뻐하고, 뱃길이 편리하니 객로(客路)가 트였구나.
임금의 은혜 물결 곳곳에 흡족하니, 온 천지가 모두 다 영토 안에 들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변방 고을 쓸쓸한데 나무 늙었고, 한 줄기 긴 강은 요양(遼陽)을
가로막았네. 황풍(皇風 천자의 덕화)은 중국과 조선을 가리지 않는데, 지리(地理)는 어찌하여 피차(彼此)를
구별하랴. 물결은 조각배를 흔드는 것 맡겨두고 천일(天日)이 하황(遐荒 멀고 거친 곳 미개한 곳)까지 비추는
것을 기쁘게 보겠네. 누가 이 발길 바쁜 뜻을 알랴, 천자 말씀 받들어 우리 님께 아뢰려네.
○ 나라에는 지경이 험한 곳 있네, 하늘이 주어 지리(地利)도 웅걸(雄傑)하도다. 세 강물 하도 깊어 헤아릴 길
없는데, 이 한 길[道] 멀어서 통하기 어렵네. 강이 넓어 물결이 바다에 잇달았고, 바람에 파도 일어 하늘에 잇
닿았네. 작은 배 화살같이 빠르니, 탈없이 건넌 것은 사공의 덕일세."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보흡(溥洽)의 시에, "압록강 가을 물결 바닥까지 맑은데, 도도(滔滔)히 흘러내려 고금의 정情)
이 끝없네, 항번(降幡 항복하는 표시로 내어 거는 기)은 마침내는 평양에 왔음을 보았고,
수책(受?)은 한갖 작은 성을 쌓았음을 들었네. 새벽 배 떠나가자 서릿기운 하얗고, 맑은 물에 말 먹이매 눈송
[雪花]이 밝구나. 뉘라서 이 강물을 천참(天塹 천연적인 도랑)이라 했던가, 가없는 경해(鯨海 고래가 노는 큰
바다) 또한 이미 평정해졌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의주는 우리나라 문호(門戶)이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관방(關防)이네.
장성(長城)은 어느 해에 쌓았는가, 꾸불꾸불 산 언덕을 따랐네. 넓고 넓은 말갈(靺鞨)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흘러
봉강(封疆)을 경계지었네. 내가 벌써 천리를 떠나왔는데, 여기 와서 이렇게 머뭇거리네. 내일 아침 강 건너 떠나
가면, 요동벌판에 하늘이 망망하리라."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그럭저럭 오고 보니, 압강(鴨江) 가일세, 물색(物色)은 그전대로 고국이건만, 이상
하다 서로 만나는 것 모두 새롭고, 신시(新詩)는 태반이나 화언(華言 중화의 말) 섞였구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임금의 명 받들고 천자 뵈러 떠나와 가는 길 탐을 내어서 밤에 얼음 건너네. 깊은 곳 다다
라서는 마음 졸여 떨리고, 얇은 곳을 밟으면 얼음 깨지는 소리 들리네. 사신의 법도 고루 알지 못하니,
임금의 은혜 갚을 길 없네. 수달피 갖옷[貂?]은 가는 길에 떨어져가니, 내일 새벽 또 일찍 일어나야지."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남풍이 객로(客路)에 불어주고, 석양이 고국땅을 비춰 주누나. 가랑비에 물결소리 들리
는데, 넓은 둑에 풀빛이 싸늘하구나. 북쪽으로 가면 만리 통하고, 동쪽으로 가면 3한(三韓)에 닿네.
사마(駟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내 낯엔 부끄러움 가득하구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일찍이 압록강을 들었었는데, 오늘에야 강 가운데 지나는구나. 벼랑진 강기슭은 천길
넓이요, 단단한 얼음장은 열길 깊일세. 잘도 가누나 동국(東國) 말[馬]은 튼튼도 하네.
마중나온 원인(遠人 먼 곳 사람. 여기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의바르네. 지경을 달리하니 이하(夷夏 이는
우리나라. 하는 중국) 갈렸지, 청산(靑山)이야 예 이제가 마찬가질세."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압록강 멀리 만경(萬頃) 물결은 오늘 아침 또다시 사신[使星]을 싣고 지나네. 물새들
있는 곳에 바람 물결 고요하고, 물가 풀꽃 있는 곳에 비와 이슬이 많구나. 계수나무 노가 물길 타니 깃과 같이
가볍고, 운산(雲山)이 보이는데 소라같이 푸르구나. 봉지(鳳池)와 용소(龍沼)를 떠난 지 오래인데, 머리 돌리니
그 감개를 어찌하랴."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산 경치 강 물결을 익히 봤는데, 황홀한 훈풍(薰風) 사월(四月)이 지났네. 강가에 오니
벌써 조신(潮信) 빠른 줄 알겠고, 지름길 많은 것 싫지 않구나. 농부는 삿갓 쓰고 밭을 매는데, 해객(海客)은 배
를 타고 조개와 소라를 줍네. 조각배로 월남(越南)하니 풍경 좋으니, 지나는 길 야정(野情)이 없을 수 있나."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낙랑의 나뉜 지경 요(遼)까지 닿았는데, 이 한 강이 가로질러 멀리멀리 푸르네.
장백산(長白山)에 비롯하여 산을 깊이 파면서, 동영(東瀛)으로 흘러서 바닷물과 섞이네. 양편 물가 산광(山光)
은 갠 날에 옥을 담갔고, 사시(四時)의 운영(雲影)은 차[冷]게 하늘 적셨네. 행인(行人)은 어별(魚鼈)을 부를
필요 없구나, 굳은 얼음 스스로 다리를 만들었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물이 깊은 긴 강의 만경(萬頃)에 가을인데, 누선(樓船)은 누가 보내 사두(沙頭)에서 기다
리나. 물결 깨며 날아 넘기 특히 좋아하고, 채찍 던져 물 끊다니 믿을 수 없네. 정모(旌?)에 바람부니 적치(赤幟)
가 나부끼고, 융막(戎幕)에 밤이 차[寒]니 청유(靑油)를 꼈구나. 동주(銅柱) 세워 분계를 멀리할 필요 없네,
저편 기슭 인가들이 바로 의주이네." 하였다. 옥강(玉江) : 주에서 동북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천마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서 산양천(山羊遷)에 이르러 합쳤고, 다시 50리를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며, 강 가운데에서 담청옥(淡靑玉)이 나붙여진 이름이다.
고진강(古津江) : 주에서 동남으로 36리 떨어져 있다. 그 근원이 3인데, 하나는 천마산의 동남에서 나오고, 하나
는 그 서남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광산(普光山)의 북쪽에서 나와서 미륵당(彌勒堂)에 이르러 모두 합쳐서
고정령을 거쳐 10여 리 내려가서 광화도(廣化島)에 이르러 이 강이 되고, 다시 남으로 흘러서 고령주(古寧州)를
거쳐 고린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書狀官) 강기수(姜耆壽)
가 익사(溺死)하였으므로 서장강(書狀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적도(於赤島) : 난자도(蘭子島)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7리이다. 그 안이 평평하고 넓어서 밭 60여 두둑을
일구었다.
검동도(黔同島) : 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압록강이 여기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섬이 두 섬 사이에 있으며, 삼씨량(三氏梁)이 있다.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
을 거치는데 중국 서울로 가는 사신이 입조(入朝)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화도(威化島) :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졌다. 위의 세 섬들은 그 땅이 모두 기름지고
넉넉하여서 백성들이 많이 개간해 경작했었는데, 천순 5년 신사에 농민들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에게
잡혀가 그 뒤부터는 관(官)에서 개간을 금하였다.
○ 고려의 신우(辛禑)가 요양(遼陽)을 치기를 꾀하여 평양에 주둔해서 여러 도(道)의 군사와 민중을 감독해 징집
하여 10만을 일컬었다. 우리 태조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좌군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하는데,
도중에서 도망병이 계속되니 우(禑)가 곳곳마다 죽이라고 명령하였어도 막을 수 없었다.
우가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진군할 것을 독령(督令)하거늘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지경을 침범한다면 천자에게 죄를 얻어 나라와 백성에게 재앙이 곧 올 것이니,
어찌 경(卿)들과 임금을 뵙고 친히 화(禍)와 복(福)을 아뢰고, 임금 곁의 나쁜 사람들을 제거해서 백성을 편안
하게 하지 않을까 보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社稷)이 편안하고 위태한 것은
공(公)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돌려 압록강을 건넜
는데, 태조가 흰 말을 타고 붉은 활과 흰 깃 화살을 가지고서 물가에 서서 여러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더니,
모든 군사 가운데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고금,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어찌 이러한 인물이 있겠
느냐." 하였다. 당시에 장마가 며칠 내렸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군사가 겨우 다 물 기슭에 건너자
큰물이 몰려와서 온 섬이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난자도(蘭子島) : 위화도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수위(水位)가 내려가면 육지에 이어진다.
조몰정도(鳥沒亭島) : 주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진병지(鎭兵池) : 인산진성(麟山鎭城)의 남쪽에 있다. 임덕지(臨德池) : 고린산에 있다.
노토동(老土洞) : 이하는 모두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감창동(甘昌洞)ㆍ
손양동(孫梁洞)ㆍ신호수동(申胡水洞)ㆍ금창동(金昌洞)ㆍ마자산(馬子山)ㆍ다양동(多陽洞)ㆍ파사포(婆娑鋪)ㆍ
사오랑산(沙吾郞山)ㆍ형제산(兄弟山)ㆍ대모성(大母城)ㆍ권두산(權豆山)ㆍ소창산(小昌山)ㆍ대창산(大昌山)ㆍ
송골산(松?山).
토산 실ㆍ삼ㆍ벌꿀ㆍ누치[訥魚]ㆍ숭어ㆍ은어[銀口魚]ㆍ쏘가리[錦鱗魚]ㆍ농어ㆍ
석류황(石硫黃) : 객사(客舍)의 뜰 안에 난다. 담청옥(淡靑玉)ㆍ수포석(水泡石)ㆍ백지(白芷)ㆍ궁간목(弓幹木)ㆍ
게[蟹].
성곽 주성(州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4천 83척, 높이가 12척이고, 안에는 40군데의 우물이 있다.
신증 지금 임금 15년에 옛 성이 좁으므로 고형산(高荊山)을 보내어 편리 여부를 두루 살피게 하고 드디어 터를
닦고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2만 7천 5백 31척, 높이가 12척이고, 동ㆍ남ㆍ서ㆍ북에 모두 문이 있고, 문에는
옹성(擁城)이 있고, 성안에는 한 개의 못과 43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방산진(方山鎭) : 주에서 동북으로 61리 떨어져 있다. 본조 세종 때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8천
7백 82척, 높이가 8척이고, 안에는 7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아(營衙)
가 있다.
인산진(麟山鎭) : 주에서 서남으로 38리 떨어져 있다. 본조 세종 때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천 2백 6척,
높이가 9척이고, 안에는 9개의 샘물과 군창이 있고, 병마첨절제사의 영아가 있다.
○ 이상은 첨절제사가 1명씩이다. 수구보(水口堡) : 주에서 동으로 28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하였고, 여름에는 권관(權管)을 보내 수어(守禦)하게 하고, 겨울에는 본도(本道)로 철수
하는데, 연변의 다른 보(堡)도 같다. 석종 24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73척이다.
청수보(靑水堡) : 주에서 동북으로 95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만호를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하였고, 권관을
보내 지키게 한다. 성종 24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86척이다.
소관보(所串堡) : 주에서 동남으로 35리 떨어져 있는데, 속칭 대모성(大母城)이라 한다. 겨울에는 조방장(助防將)
을 보내 수어하게 하고, 봄 여름에는 폐지한다. 성종 23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12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
신증 고미성보(姑未城堡) : 주에서 동북으로 87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6백 46척, 높이가 7척이다.
광평보(廣坪堡) : 주에서 동으로 1백 15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1백 10척, 높이가 8척이다.
옥강보(玉江堡) : 주에서 동북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7백 44척, 높이가 5척 5촌이다.
송산보(松山堡) : 주에서 동으로 12리 떨어져 있다. 벽돌[?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55척, 높이가 8척이다.
가정(嘉靖) 병술년에 보 안에서 실화(失火)가 있어 민가와 성이 다 탔는데, 절도사(節度使) 정윤겸(鄭允謙)이
고쳐서 목책(木柵 통나무 등으로 만든 울타리)을 설치하였다.
이상 네 보는 권관(權管)을 두어 지키게 한다.
성고개보(城古介堡) : 주에서 동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석성인데, 둘레가 8백 90척, 높이가 9척이다. 겨울에는
절도사가 조방장을 보내 지키게 하고, 얼음이 풀리면 폐지한다.
이상 다섯 보는 홍치(弘治) 경신년에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다.
봉수 통군정봉봉수(統軍亭峯烽燧) : 동으로 수구(水口)에 응하고, 남으로 위원에 응한다.
수구봉수(水口烽燧) : 동으로 금동전동에 응하고, 서쪽으로 통군정봉에 응한다.
금동전동봉수(金同田洞烽燧) : 주에서 동북으로 74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노토탄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구에
응한다.
노토탄봉수(老土灘烽燧) : 주에서 동북으로 97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삭주부의 전왕구비(田往仇非)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금동전동에 응한다.
위원봉수(威遠烽燧) : 주에서 남으로 26리 떨어져 있는데, 북으로 통군정봉에 응하고, 남으로 도산에 응한다.
도산봉수(刀山烽燧) : 주에서 서남으로 48리 떨어져 있는데, 북으로 위원에 응하고,
남으로 용천군의 용호산(龍虎山)에 응한다. 신증 정자산봉수(亭子山烽燧) : 고미성보에서 동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노토탄에 응하고, 서쪽으로 금동전동에 응한다. 송봉봉수(松峯烽燧) : 방산진에서 남으로 3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금동전동에 응하고, 서쪽으로 부동에 응한다.
부동봉수(浮洞烽燧) : 옥강(玉江)보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송봉(松峯)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구에 응한다. 석계봉수(石階烽燧) : 송산보에서 동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수구에 응하고 서쪽으로
구룡연에 응한다. 구룡연봉수(九龍淵烽燧) :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석계에 응하고, 서쪽으
로 통군정봉에 응한다. 오언대봉수(吳彦代烽燧) : 주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통군정봉에 응
하고, 서쪽으로 고정주에 응한다. 고정주봉수(古靜州烽燧) : 주에서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오언
대에 응하고, 서쪽으로 쇄아점에 응한다. 쇄아점봉수(鎖兒岾烽燧) : 주에서 서쪽으로 28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고정주에 응하고, 서쪽으로 인산진에 응한다. 인산진성서우봉수(麟山鎭城西隅烽燧) : 진성 안의 서쪽에 있는데,
동으로 쇄아점에 응하고, 서쪽으로 기이성에 응한다. 기이성봉수(岐伊城烽燧) : 인산진에서 서쪽으로 6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인산진에 응하고 서쪽으로 진병곶에 응한다. 진병곶봉수(鎭兵串烽燧) : 인산진에서 남으로 9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기이성에 응하고, 서쪽으로 미륵당에 응한다. 미륵당봉수(彌勒堂烽燧) : 인산진에서 남
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진병곶에 응하고, 서쪽으로 우리암에 응한다.
우리암봉수(于里巖烽燧) : 인산진에서 남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미륵당에 응하고, 서남으로 용천군의
대산(代山)에 응한다. 누정 통군정(統軍亭) : 객관 북쪽에 있다.
○ 임사홍(任士洪)의 기명에 "주성(州城)이 압록강에 임하였으니, 그 북은 여진씨(女眞氏)의 지역이고 그 서쪽은
중국의 경계이다. 섬들이 둘러 있고 언덕과 산들이 높고 험하며 대창ㆍ소창ㆍ송골이라는 여러 산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층층이 나타나고 겹겹이 보여 중화(中華)의 산하(山河)와 성곽(城郭)의 장려(壯麗)함을 연상할 수 있는데,
바로 주의 북에 산봉우리가 뾰죽이 서 있어서 사방에 통하여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위에 정자가 있어 통군(統軍)
이라 하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누가 이름지었는지는 모른다.
청성(淸城) 한후(韓侯) 천손(千孫)이 나와 목사(牧使)가 되어 통판(通判 관직명) 김철손(金哲孫)군과 꾀하여 옛
규모를 늘이고 기와집으로 고쳤다. 무술년 여름에 내가 죄를 짓고 이 고을에 귀양오게 되었다.
정자의 공역이 겨우 끝나니 환히 빛나고 날아갈 듯하고 굉창헌활(宏敞軒豁 둘 다 건물이 넓고 크고 높은 것)하여
그 조망(眺望)이 더욱 멀어지고, 그 경치가 더욱 좋아졌다. 하루는 후가 고을의 좌리(佐吏)를 거느리고 그 위에서
잔을 들고 그 아래에서 활을 쏘아서 낙성하니, 관하(管下)에 나그네로 와 있는 비생(鄙生)이 자리 끝에 참여하게
되었다.
후가 이르기를, "의주가 있은 이래로 봉우리의 높고 험준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몇 사람이나 올라와 바라보고서
나라를 떠나고 고향을 떠난 회포를 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이란 정자가 있는 것이고 정자라면 이름이 있는
것이 원래 그 상례입니다. 내가 마침 이 고을에 원으로 있다가 지금 또 목사가 되었으며, 당신 또한 임금의 후설
(喉舌)이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러서 대죄(大罪)를 범하여 쓸쓸하게 멀리 외딴 고장에 있어 미록(?鹿)과
더불어 논다는 것은 더욱 주(州)로서는 듣기 드물고 보기 드문 바입니다. 내가 거듭 온 것이 한 가지 어려운 일
이요, 정자가 낙성됨이 둘째 어려운 일이요, 당신이 귀양온 것이 셋째 어려운 것인데, 당신이 만약 기문을 짓지
않는다면 뒤에 여기 오르는 사람이 무엇을 연유해 세 가지 어려움이 쉽지 않다는 뜻을 알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이 나그네에게 편지를 부쳐서 아울러 편액 쓰기를 청하였다.
내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데에는 모두 잘하지 못하는 바이나 후의 명을 받고서 감히 잘못한다고 하여 사양
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주의 적(籍)에 기록된 것이 무려 만여 호(戶)이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가 번잡
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군사를 거느린다는 것으로 이름함은 어찌하여서인가.
내지(內地)의 주현(州縣)으로는 군사의 임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백성 다스리는 것을 주(主)로
하고, 변방에서 변방을 지키는 자는 백성 다스리는 정사도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훈련(訓鍊)하기에 전심
(專心)하게 되니 이는 국가가 군ㆍ민의 일을 나누어서 둘로 하지 못하고 또한 합해서 하나로 하지 못하는 것이
니 이것은 주군(州郡)이 소재하는 땅에 따라서 목수(牧守)ㆍ군려(軍旅)의 직분이 또한 다르게 된 것이라.
이 고을의 땅은 우리 동방의 서북 끝의 경계이며, 남으로 서울과 1천 5백여 리 떨어졌고, 세 방면으로 다른 나라
에 끼어 있으므로 이 고장에 와서 목사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재질이 문ㆍ무를 겸하고 정사가 군ㆍ민에 통한 뒤
에라야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지금 후는 조정의 의론의 높이는 바가 되어, 다시 여기를 맡아서 변방의 진(鎭)을
열어 이하(夷夏 우리나라와 중국)를 대하여 그 은혜는 봄날 같아서 능히 늙은이와 어린이를 온화하게 하고,
그 위엄은 추상(秋霜) 같아서 능히 부오(部伍)를 엄숙하고 민첩하게 하며, 중국의 손님을 영접하는 데에는 그
성의와 공경을 다해서 우리 전하의 사대(事大)하는 예의를 밝히고, 풍속이 틀린 여진을 대접하는 데에는 그 가고
오는 것을 순하게 하며 그 어루만지기를 극진히 해서 전하를 받들어 그 무외(無外)의 인(仁)을 드러내니,
이는 후의 다스림이 하나를 주로 하면서 둘을 겸하고 그 큰 것을 총리(總理)하여 그 작은 것을 따르도록 한 것이
니 마땅히 국가가 분우(分憂)와 분곤(分?)의 중책을 받들어 한 지방의 권력을 오로지 하게 한 것이다.
군사를 호궤(?饋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한 뒤에 친히 용맹스런 병사를 거느리고 천만(千萬)으로 대오를
만들어 이 정자 아래에 포진하되 왼편으로 하고 싶은 자는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하고 싶은 자는 오른편으로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섬에 호령이 엄하며 기강이 정숙(整肅)하고, 일당(一堂) 안에서 운주(運籌)하고
천리 밖에서 절충(折衝)함에, 싸우지 않고서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기니 어찌 이 정자의 이름됨이 족히 후의
군율을 보게 되는 것이요, 가공(架空)한 헛된 호칭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까 보냐."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용만(龍灣) 옮긴 곳에 주성(州城)을 두었는데, 말 위에서 멀리 보니 눈 더욱 밝네. 진중(珍重)
한 통군봉 한 모임이, 강 건너에 분주히 웃고 서로 맞이하네." 하였다.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백 길 높은 층층한 성이 아득한데, 붉은 난간 종일토록 기대었네. 새원(塞垣)에는 호표
(虎豹)들이 엄하고, 바다에는 곤붕(?鵬)들이 펼치는구나. 지세(地勢)는 서와 남이 트여 있고,
천룡(天龍)은 위아래로 맑네. 배회(徘徊)하여 끝없는 뜻은 호기(豪氣)가 진등(陳登)보다 갑절 더하네.
○ 마자(馬? 압록강의 별칭)의 나뉜 지경 멀고, 용만(龍灣)의 옛 요새가 쓸쓸하구나. 강류(江流)는 금대(襟帶)를
굳게 하였고, 지세는 한병(翰屛 지세가 높고 깎은 듯이 험준함)이 웅장하네. 세 섬[島]은 논밭 가는 바깥에 있고,
고성(孤城)은 부락 가운데 있네. 늦게 와서 긴 한숨 쉬고 서 있는데, 석양이 강 위 가득 비끼고 있네.
○ 사방을 둘러보니 막힌 것이 하나도 없어, 망망한 만상(萬象)들이 분주하구나. 한 조각 마음은 우주의 끝까지,
두 눈엔 하늘땅이 좁네. 해가 지니 강광(江光)이 흔들거리고, 연기가 사라지니 해기(海氣) 짙구나. 장군(將軍)은
오늘날의 극곡(??)이라, 나라의 서쪽문을 굳게 지키네.
○ 경치는 예전부터 제일 좋아서 금탕(金湯 견고한 성곽과 성지)이라 만고에 들려 왔네.
울타리는 오랑캐에 대비하였고, 비예(?? 성 위에 있는 벽)는 찬 구름[寒雲]을 가로막았네.
고각(鼓角)은 군성(軍聲)을 웅장히 하고, 강과 산은 경계를 나누고 있네. 무비가 묘략(廟略 조정(朝廷)의 계략)
에 이르니 오래도록 수문(修文)만 믿지 말라." 하였다.
○ 권달수(權達手)의 시에, "옛 요새엔 성곽이 천길이나 되고, 화정(華亭)엔 객이 함께 기대었구나.
산형(山形)은 물가 나라[澤國] 두르고 있고, 도세(島勢)는 구름 붕새[鵬] 떨어뜨리네. 물은 세 갈래를 지어서
넓고, 강은 만상(萬象)을 담가서 맑네. 취해 오니 호탕스런 흥취가 일어, 길게 휘파람 불며 손등(孫登)을 본받네.
○ 땅 다한 데 강물이 경계지었고, 하늘 넓은 데 나무가 공중에 떴네. 진(鎭)은 관서(關西)의 요지(要地)요,
정자는 새북(塞北)에 웅장하네. 구름은 푸른 산 밖에서 일고, 사람은 석양(夕陽) 안에 의지해 섰네.
얼굴 쇠(衰)함이 오랬음을 스스로 웃고, 석 잔 술로 붉은빛이 다시 이네.
○ 한번 이 정자 위에 올라오니, 여러 산이 눈 아래 분주하구나. 트이기는 초택(楚澤) 머금어 들였고, 크기는
하늘땅을 들이려 하네. 운영(雲影)은 하늘과 아울러 고요하고, 성(城) 그늘은 물은 띠었네. 강 경치는 저녁 늦게
더욱 좋은데, 머물러 달이 문에 들기를 기다리네.
○ 서쪽 국경 지금 또다시 오니, 형승(形勝)은 옛 소문 그대로일세.
비휴(?? 짐승 이름)는 활을 달[月]같이 당기고, 고각(鼓角)은 진(陣)을 구름처럼 벌였네, 융마(戎馬)는 오랜 해
를 수자리 살고, 관하(關河)는 이 경계를 나누었구나. 장군은 당대에 제일 인물이니,
무(武)에 능하고 또한 문(文)에 능하네." 하였다.
○ 허굉(許?)의 시에, "관하(關河)가 멀고 먼데 내 마음 어떠한가, 연연(燕然)에 올라가 이름 새기고 싶네.
땅은 압록강에 다했는데 봄물이 넓고, 성은 위화도에 임했는데 저문 구름 평평하네.
연래(年來)로 나라에 몸 바치매 마음만 부질없이 있고, 밤 고요한데 군악기[?笛] 소리 들리어 꿈이 저절로 깨네.
기둥에 기대어 낮은 소리로 읊조리니 고향에 돌아갈 생각 간절한데, 기우는 달빛 추녀에 이르러 밝게 하네."
하였다.
의순관(義順館) : 옛 이름은 망화루(望華樓)인데, 성의 남쪽으로 2리 되는 압록강 물가에 있으며, 중국 조정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우리 세조 때에 누(樓)를 철거하고 관(館)을 두었다.
○ 이첨의 시에, "평생이 자양(子陽)과 같음을 늘 괴상히 여겼었는데, 중국에 멀리 놀아 관광(觀光)하게 되었네.
동으로 돌아와서 좋은 날에 높은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여러 산이 대지(大地)에 잇닿았네. 구름이 변방
하늘에 일어 넓고 아득한 데로 돌아가고, 꽃은 봄 물결 따라 푸르고 아득한 곳에 들어가서, 무궁한 지난 일은
수습하기 어려워, 새 시(詩)를 읊고는 한소리로 외치네." 하였다.
○ 정몽주의 시에, "말을 달려 유유히 패강(浿江)에 오니, 배신(陪臣)이 곧 관광을 하고 싶구나.
집 떠나 천리 멂은 차차 깨닫고, 술을 드니 팔황(八荒)이 좁은 것을 알겠구나. 말갈강(靺鞨江) 물가에는 산 겹겹
이요, 요양성(遼陽城) 아래에는 길 망망하네. 밤 깊은 데 역려(逆旅)에서 잠 못 이루는데,
한 곡 어가(漁歌) 소리는 짧고 길구나." 하였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강을 건너 돌아와 다시 강 머리에 쉬는데, 멀리 바라보니 뿌연 숲이 먼 물가에 잇닿
았네. 따뜻한 물결 한 강은 압록(鴨綠)이 떴고, 저녁 산 두 기슭에 나청(螺靑)을 맺었네. 버들에 꾀꼬리는 봄이
늦은데 소리 아직 미끈하고, 소나무의 학은 집이 깊어 꿈을 깨지 못하네. 동으로 번경(藩京)까지 가자면 아직
천리인데, 사모(四牡)노래 들리니 몇 번이나 들을건고.
○ 만리 하늘가에 먼 손이 지나는데, 붉은 정자 푸른 술[綠酒]에 뜻이 어떠뇨. 부여(扶餘)의 지맥(地脈)은 강에
임해 다했고, 요(遼)의 동쪽 산광(山光)은 물건너 많구나. 절모(節?)가 경기(京畿)를 가리켜 새벽 말을 재촉하는
데, 은혜가 해국(海國)에 미쳐 맑은 물결 넘치네. 서(西)로 가면 귀국하는 길이니 양관곡(陽關曲) 나를 향해 부
를 것 없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바람 향해 말 멈추니 낮 연기 나는데, 오로지 동으로 가는 첫 길을 헤아리네. 깎인 기슭 청산
(靑山)에는 솔[松] 머리 합치고, 긴 강 파란 물엔 압두(鴨頭)가 평평하네. 노랫소리 길에 가득하니 사람 모두
기뻐하고, 풀빛이 하늘에 잇닿으니 만물 모두 번영하네. 화순관에 앉았으니 향기가 집에 가득한데, 배신(陪臣)
이 술자리 함께 하여 임금 뜻을 전하네.
○ 동번(東藩)의 인물 옛 유자(儒者)라, 왕래가 잦아서 접반(接伴)하여 놀았네. 화순관 맑은 술잔은 나를 더 취
하게 하고, 금낭(錦囊)의 좋은 글귀는 누구 위해 머물렀나. 송산(松山)에 비 지나니 남은 더위 사라지고,
압록강에 바람 이니 첫 가을을 알겠네. 진중(珍重)하게 국왕(國王)이 이별한 뒤엔, 자주 태평루(太平樓)에 오르지
말지어다." 하였다.
○ 장성의 시에, "강 머리의 푸른 풀은 수심 불러일으키는데, 수인(愁人)을 대하여서 나그네길 헤아리지 마오.
한 자리 좋은 바람은 때 맞춘 비를 보내고, 산중턱의 남은 해는 저녁 구름에 평평하네.
현왕(賢王)이 이미 은근한 뜻을 다하니, 돌아가는 사신이 응당 사뢰(賜賚)의 영광을 전하리.
판서(判書)가 구면 같음이 더욱 기쁘니, 시로 창화(唱和)하매 정을 이기지 못하겠네."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공관(公館)에 자리 베푸니 한낮이 기울었고, 소반에 가득한 안주는 진기한 것 늘어놓았네.
술은 녹수(綠水)를 나누어 향기가 항아리에 넘치고, 병풍은 푸른 산을 껴서 그림자가 장막에 떨어지네.
운금(雲錦)을 꾸민 나머지 꽃무늬 찬란하고, 색실로 봉황을 만들었네. 성조(聖朝)의 덕화는 이제 안 닿는 곳
없으니, 풍속이 다른 곳에도 예의 존중함을 기꺼이 보네." 하였다.
○ 이곡(李穀)의 망화루 시에, "신세(身世)가 한가하여 누각에 들어와 의지했는데, 이 다락이 또한 나라 서쪽 끝에
있구나. 구경을 청하니 여행하는 동안에 세월이 빠른 것을 보게나, 누각 아래 긴 강이 끊임없이 흐르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유의(儒衣)로 몇 번이나 관성(關城)의 아전을 보았던고, 사절(使節)로 거듭 서장관(書狀官)
이 되었네. 백척(百尺)이나 되는 강가의 누각은 우뚝하게 높았는데, 낙하고목(落霞孤鶩)이 난간에 닿았네." 하였다.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동으로 돌아와 나라 서쪽의 누각에 올라와 보니, 만 가지 풍경이 잠깐 사이에 와서
이바지하네. 먼 변방에 눈 개니 산이 끝없고, 긴 강에 바람 자니 물이 잠잠히 흐르네." 하였다.
○ 왕창의 시에, "조칙(詔?)을 금니(金泥)에 받들고 우리나라를 지나니, 말 앞에 고취(鼓吹)가 정당(旌幢)에 둘러
싸였네. 평평한 숲에는 길이 아득히 성곽을 비껴 통했고, 넓은 들엔 하늘이 낮아 강에 반쯤 들어갔네.
꿩을 바쳐 월상(越裳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었던 나라)들은 모두 조공(朝貢)에 힘썼고, 표[表函]를 바친 모든
촉(蜀) 나라는 항복하였었네. 부여(扶餘)는 지척에 요수(遼水)로 분계를 했는데, 예의를 지킨 유래로 풍속 더욱
후하구나." 하였다. 취승정(聚勝亭) : 객관 동쪽에 있다.
○ 홍치(弘治) 갑인년에 목사 구겸(具謙)이 세웠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주의 객사 동쪽에 땅이 둥그스름한 데가 비어 있어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덮
이고 닭 돼지[豚] 개의 더럽히는 바이므로 예전에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더니, 홍치(弘治) 기원 6년에 능산(綾山)
구겸(具謙)공이 이 고을에 목사가 되어, 비로서 이상히 여겨서 그 덮인 숲을 깎고 그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그
둥근 것을 평평히 하고서, 그 위에 정자를 세우니 날개 편 듯하다. 빈객들이 오르기도 전에 능산이 죽으니,
슬프다. 8년 봄에 지금 목사 황형(黃衡)공이 이어서 다스리니 마침 변경에 일이 없었으므로 그 백성이 병란 있음
을 보지 못하므로, 날마다 오직 손님들의 노는 데만 갖추는 것으로 일삼았다. 황공이 말하기를, '객사는 크긴
하지만 답답해서 마음대로 펼 수 없고 통군정은 트이긴 했으나 높아서 늘 오를 수 없으니 이 정자라야겠다.'
하고, 이에 능산이 마치지 못한 공역을 끝내었으니, 마당이 평평히 넓고 창호(窓戶)가 통창하여, 앉아서 호산
(湖山) 몇 십 리의 먼 곳까지 다 구경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이 해에 황제(皇帝)가 태감(太監) 김보(金輔), 태감 이진(李珍), 행인(行人) 왕헌신(王獻臣)을 보내어 우리 성종의
시호(諡號)와 금상(今上)의 고명(誥命)을 내리매, 노공필(盧公弼)공, 송공일(宋公?)공, 김심(金諶)공이 강 위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는데, 겸선(兼善 홍귀달의 자(字))의 재주 없는 몸으로도 또한 부끄럽게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여기에 다 모였다. 목사가 정자에 술과 안주를 놓고 귀한 손님을 윗자리에 모시었는데,
때마침 날씨가 풀리어 따뜻하고 훈풍(薰風)이 남에서 불어오매, 옷깃을 헤치고 맞으니 상쾌하기가 뜨거운 것을
참았다가 시원한 물에 씻는 듯하다. 목사가 술을 따르며 말하기를, '정자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노(盧)공이 이르기를, '아, 정자는 내가 마땅히 이름지을 것이다. 대개 동방의 지맥(地脈)이 여기 와서 다
하였으니, 그 꿈틀거리고 맑은 기운이 반드시 강의 물가에서 뭉치어 얽혔을 것이다.
중국의 산이 또한 강에 다달아 멈추어서 늘 푸름을 보내 오고 푸름을 옮겨다 주어 통군정의 처마를 둘러쌌다.
통군정은 위로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을 삼키고 옆으로 만상(萬象)을 당겨서 굽어 눌러 통해 쏟았는데,
이 취승정이 다 이어받아서 쌓아 모아 유람하는 사람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니, 어찌 취승이라고 이름하지 않겠
는가. 하물며 나와 제공(諸公)이 조정에서 뽑혀와서 천자의 큰 명(命)을 맞이하여 여기서 모이고 여기서 잔을
드니 다행이 아니겠소. 취승이라 일러도 또한 어찌 좋지 않겠소.'라고 하매 모두들 좋다고 하고 서로 함께 다시
잔질하매 취해서 눕고 깨서 일어나고 하였다. 그 말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 노공필의 시에, "취승정이 높다랗게 변방을 진압하니, 등림하여 구경하매 조그만 것까지 다 뵈네.
긴 강은 아득하여 바다에 잇달았고, 먼 나무는 영롱하게 저녁 햇빛 띠었네. 땅에 가득한 눈꽃[雪花]에 배꽃 반쯤
떨어지고, 하늘에 나부끼는 푸른 물결에 보리는 비로서 살찌네. 노래(老來)에 호산벽(湖山癖 산수를 좋아하는
버릇)이 줄지 않아서, 취해 조각한 난간에 기대니 호탕한 흥이 날리네." 하였다.
○ 조위의 시에, "웅번(雄藩)이 옛적부터 변방을 장(壯)하게 했는데 화려한 정자 새로 지어 산(山)을 대했네.
절역(絶域)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층성(層城)의 꽃과 버들이 맑은 햇빛에 아양떠네. 산은 넓은 들을
에워서 푸르기가 그림 같고, 비가 긴 강을 지나가니 푸름이 점점 살찌네. 올라서 돌이켜 멀리 바라보매 고향
그리는 마음은 밤낮 남쪽으로 날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네."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말밥굽이 서해(西海)로 와서 변방에 이르렀는데, 백척 높은 정자가 자미(紫微 임금의
궁궐)에 가깝구나. 조각한 난간에 의지하여 좋은 경치를 보니 주박(珠箔 주렴(珠簾))으로 하여금 맑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강은 압록(鴨綠)이 비껴서 하늘과 아울러 맑고, 버들에는 누른빛 짙은데 비를 맞아 윤이 나네.
문득 옥당(玉堂 독서당(讀書堂), 호당(湖堂)이라고도 한다)을 생각하는데 몸은 만리 밖에 있으니, 봉래산(蓬萊山)
어느 곳에 오색(五色) 구름 나는가." 하였다.
학교 향교 : 주성(州城) 안의 서쪽에 있다. 역학(譯學) : 주의 서쪽에 있다.
역원 의순역(義順驛) : 곧 의순관이다. 소곶역(所串驛) : 주의 남쪽 33리에 있다.
방산역(方山驛) : 방산진에 있다. 고진강
원(古津江院) : 고진강 물가에 있다. 개무원(蓋武院) : 주의 동남 51리에 있다.
창고 군창(軍倉) : 객관 북쪽에 있다. ○ 본도의 철산(鐵山)ㆍ곽산(郭山)ㆍ정주(定州)ㆍ선천(宣川)ㆍ용천(龍川)
등의 관조세(官租稅)를 모두 여기에 수납한다.
신증 소곶창(所串倉) : 홍치(弘治) 경신년에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는데,
정녕창(定寧倉)의 미곡을 옮겨서 채웠다.
불우 미륵사(彌勒寺)ㆍ금강사(金剛寺) : 모두 송산에 있다. 관음굴(觀音窟)ㆍ보라사(寶羅寺) : 모두 마두산에 있다.
불장사(佛藏寺) : 천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안 북쪽에 있다.
압록강사(鴨綠江祠) : 구룡연 위에 있다. 사전(祀典)에 장단(長湍)의 덕진(德津)과 평양강(平壤江)과 더불어 서쪽
지방의 큰 강이 되어 중사(中祀 중간 정도의 제사를 지내는 것)에 실렸고,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
지낸다. 여단(?壇) :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국내성(國內城) :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교외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임금이 장생(掌牲) 설지(?支)에게 명하여 쫓게 하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서 국내의 인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돼지를 쫓아 국내에 이르러서 그 산수(山水)를 보니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五穀)에 알맞고 또한 미록
(?鹿) 어별(魚鼈)의 자산(資産)이 많습니다. 서울을 옮긴다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지세(地勢)를 보고, 22년 겨울에 임금이 국내에 서울을 옮기
고 위나암성을 쌓고서 4백 25년을 지냈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 지금 상고하건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인주(麟州)에 장성(長城) 터가 있는데,
덕종 때에 유소(柳韶)가 쌓은 것이며, 주(州)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였고,
또 병지(兵志)에,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국내성은 마땅히 옛 인주의 지경 안에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지(高句麗志)에는 이르
기를, "국내성이 꼭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히 압록강 이북의 한(漢)의 현도군(玄?郡) 경계, 요
(遼)의 동경(東京)인 요양(遼陽)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으나, 임시로
정의 설을 쫓아 여기에 붙인다.
고정주(古靜州) :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송산현이었는데, 덕종 2년에 성을 쌓고 정주진(靜州鎭)
이라 하고서 백성 1천 호(戶)를 옮겨서 채웠고, 문종 31년에 또 내지(內地)의 백성 백 호를 옮겼다. 성의 둘레는
1만 2천 6백 10척이었으며, 본조 태종 2년에 주를 폐하고 의주에 내속(來屬)시켰으며,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
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70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
고인주(古麟州) : 주의 남쪽 35리다. 본래는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이었는데, 현종 9년에 인주방어사(麟州防禦使)
고을로 일컫고, 21년에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속칭 조여(鳥餘)라 하며 둘레가 1만 1천 1백 척이며, 영평진(永平
鎭)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 고종 8년에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 함인(含仁)이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觀군사(知郡
事) 고을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고, 세종 때에 인산진을 두었다.
고영주(古靈州) : 주의 남쪽 5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흥화진(興化鎭)이었는데, 현종 23년에 영주로 승격시켜
서 방어사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다. 토성 터가 있는데, 둘레가 2천 5백 80척이다.
○ 고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강조(康兆)를 토벌하려고 흥화진을 에워
싸매 양규(楊規)가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羲令) 장경(張顥)과 더불어 성에 틀어박혀 굳게 지켰는데, 거란 임금이 거짓
으로 강조의 글을 써서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거늘 양규가 이르기를, "나는 왕명(王命)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지 않았다."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來侵)하매 강감찬(姜邯贊)
으로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군사 20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고, 흥화진에 가서 선기병(選騎兵) 1만 2천 명을 산골짜기
가운데에 매복시키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서 성의 동쪽에 있는 큰 강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것을 트고 복병을 일으켜서 크게 패배시켰다.
고정녕현(古定寧縣) : 주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아조(我朝) 태종 5년에 비로소 현령(縣令)을 두었고, 세종 27년
에 방산으로 옮기고 높여서 군(郡)으로 하였고, 세조 원년에 옛 읍(邑)으로 환원하였다가 2년에 현을 폐하고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고위원진(古威遠鎭) :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고려 현종 20년에 유소를 보내어
옛 석성을 수리하고 위성진을 두니 흥화진의 서북쪽에 있는데, 성의 둘레가 4천 8백 40척이고, 안에는 7개의
우물이 있다.
고영덕진(古寧德鎭) : 주의 동남쪽 40리다. 고려 현종 21년에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천 12척이고 안에는 12개
의 우물이 있다. 문종이 거란 흥종의 휘(諱)를 피해 영덕성(寧德城)이라고 개칭하니, 진(鎭) 자가 진(眞 거란 흥종
의 휘)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조에서는 정녕현(定寧縣)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현을 없애고 내속시켰다.
○ 고려 고종 4년에 금(金)의 내원성(來遠城)이 이첩(移牒)하여 이르기를, "반적(叛賊) 만노(萬奴)가 본래 거란과
한 마음이라 만약 군사를 아울러 귀국(貴國)을 내침한다면 그 걱정이 적지 않으며, 또한 귀국에게 격퇴 당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달아나 돌아올 것이니, 실지로 귀국을 침범하거든 꼭 급히 알려 주시면 우리가 곧 출군(出軍)
엄호(掩護)하여 공격하겠습니다." 하니, 영덕성이 회첩(回牒)하여 이르기를, "거란병이 일찍이 우리나라 지경에
들어왔다가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약 만노가 이어서 이른다면 우리 군력(軍力)이 나뉠까 두렵고, 거란의 구적
(寇賊)이 다시 세력을 떨치어 상국(上國)을 침범한다면 일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라 알리기에 미칠 수 없
을 것이니, 청하건대 미리 병마를 베풀어서 만노를 막아 우리 읍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 읍이 또한 거란병
을 막는다면 상국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다." 하였다.
고영삭진(古寧朔鎭) : 주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고려 문종이 안의진(安義鎭)의 진자농장(榛子農場)에 성을
쌓고 영삭진이라 하여 변방 적의 요충(要衝)을 진압하였다. 성의 둘레가 7천 7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토성의
남긴 자리만 있으며,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고정융진(古定戎鎭) : 주의 동쪽 80리에 있다.
유소가 또한 흥화진 북쪽에 있는 옛 석벽(石壁)을 수리하여 정융진을 두고 영평성(永平城)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
으며,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92척이고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으며, 속칭 임천성(臨川城)이다.
고연평성(古延平城) : 주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8백 87척이고,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고연주성(古延州城) : 주의 동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80척이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옥강성(玉江城) : 옥강의 동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20척이고, 사면이 절벽인 가운데에 못이
있다.
전문령고성(箭門嶺古城) : 주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1천 6백 10척이고, 안에는 62
개의 우물이 있다.
가미성(嘉彌城) : 주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고, 우물이나 샘이 없다.
장성(長城) :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
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
(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
(和州) 등 3성에 다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옥강리(玉江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고동보(庫洞堡)ㆍ삼기보(三岐堡) : 주의 북쪽에 있다. 검동보(黔同堡) : 곧 검동도이다.
암림보(暗林堡)ㆍ미륵당보(彌勒堂堡) : 주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명환 고려 김인존(金仁存) : 용만(龍灣)에 출진(出鎭)하였는데, 그 제자들이 서울 성문 밖에서 전송하매 인존이
시를 지어주어 이르기를, "10년 동안 대각(臺閣)에서 사륜(絲綸 임금의 말)을 맡았었는데, 오늘 갑자기 바뀌어
변방의 신(臣)이 되네. 간액(諫掖)으론 당의(?議)를 아뢰기를 잘하지 못하였으나, 변성(邊城)에선 그런 대로
오랑캐의 병란을 없애보려네. 귀밑머리 일찍 나라 잃은 근심 때문이고, 눈물을 금하기 어려움은 어버이 그리워
서일세. 일문(一門)의 어진 제자 매우 감사하니, 많은 술병의 맑은 술로 가는 사람을 전송해 주네." 하였다.
김경손(金慶孫) : 고종 때에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침입하여 정주
(靜州)까지 오매 경손이 영아(營衙) 안의 감사사(敢死士) 12명을 이끌고 문을 열고 나아가 힘껏 싸우니 몽고가
물러가 달아났다. 뒤에 다시 와서 공격하매 크게 싸우기 20여 일에 경손이 기회에 맞추어 설비하고 귀신같이
응변(應變)하니 몽고가 이르기를, "이 성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대적하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으며, 곧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벼슬을 받았다.
김극기(金克己) : 일찍이 용만의 좌장(佐將 진영의 부사령관)을 지냈는데, 시가 있어 이르기를, "문장(文章)은
늙어가며 서로 즐길 만하여 한 검(劍)으로 노는 곁에 오히려 오거(五車 다섯 수레에 실은 많은 책)일세.
관아 일이 파하면 새리(塞吏 변방의 관리)인 것을 잊고, 지창(紙窓)이 밝은 곳에 누워 책을 보네." 하였다.
본조 이사검(李思儉)ㆍ이인(李茵)ㆍ유익명(兪益明) : 모두 목사였다.
인물 고구려 을파소(乙巴素) : 고국천왕 때에 4부(部)가 함께 동리(東里)의 안류(晏留)를 추천하니, 임금이 국정
(國政)을 맡기는데, 안류가 사양하여 이르기를, "미신(微臣)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대정(大政)에 참여할 만하지
못합니다.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좌물촌(左勿村)에 을파소란 사람이 있는데,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지혜로운
생각이 깊으니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후한 예(禮)로 맞이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 벼슬을 제배하고 곧 국상(國相)을 삼았는데, 파소가 정치와 교육에 밝고 상벌을 신중히 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으며, 그가 죽자 국민이 통곡하였다.
밀우(密友)ㆍ유유(紐由) : 동천왕 때에 위(魏) 나라의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貫丘儉)이 와서 환도성(丸都城
당시의 서울)을 함락시키매, 임금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려고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병졸들이 모두 흩어
지고 밀우만이 임금 곁에 있어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함께 나아가 적을 맞아 힘껏 싸우니, 임금이 겨우 벗어날
수 있어 몰래 가서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의 군사가 쫓기를 그만두지 않으매, 동부(東部) 사람인 유유가 임금
앞에 나아가 이르기를, "사세가 매우 위급하나 부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臣)이 청하건대 가서 위군을
막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식기(食器)에 칼을 감추고, 앞에 나아가 칼로 위의 장수를 찌르고 더불어 함께 죽으니,
위군이 드디어 문란해져, 임금이 군사를 이끌고 세 길로 쫓았다. 임금이 나라로 돌아와서 공을 논하는데, 밀우와
유유를 첫째로 삼았다.
명림답부(明臨答夫) : 신대왕 때에 국상이 되었다. 한(漢) 나라의 현도군 태수(玄?郡太守) 경림(耿臨)이 군사를
일으켜 와서 공격하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이로운가를 물으니,
답부가 이르기를, "지금 한 나라 사람은 천리나 식량을 옮겨오니 길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깊이 도랑을
파고 방벽을 높이 하고 기다리면 저들이 열흘이 못 가서 굶주리는 어려움 때문에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 편이
굳센 군사들로 쫓으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을 따랐다. 한 나라 사람들이 과연 견디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어 돌아가거늘 답부가 쫓아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군(漢軍)이 크게 패하였으므로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 이상의 세 사람은 모두 국내에 도읍하였을 때의 일이므로 여기에 붙인다.
고려 정오보(丁五甫) : 임연(林衍)이 왕위를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할 때, 세자(世子)가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보내어 압록강에서 기다렸다가 위협하려고 하였다. 오보가 밤에 강을 건너가서 변을 고하니,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서 천자에게 알렸다. 황제가 임금에게 복위(復位)하고 입조(入朝)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매, 연이 등창이 나서죽었다.
조문발(趙文拔) : 정융진 사람인데,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여 글을 읽으면 바로 쓰고, 글이 깨끗하고 놀라웠다.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번 전직하여 중서주서(中書注書)가 되었는데, 일찍이 성중(省中)에서 순직할 때 한
하리(下吏)가 매우 추워하매 문발이 가엾게 여겨 이불 안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였더니 그가 가볍게 여겨 배 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그 밤에 마침 정령(政令 인사명령 등속)을 펴게 되어 성리(省吏)가 와서 주서가 정언(正言)이
되었음을 알리니, 소서가 가만히 그 발을 거두는데도 문발이 오히려 깊이 잠든 척하였다.
벼슬은 예부 낭중(禮部郎中)에 이르렀다.
본조 장사길(張思吉) : 본주의 토호(土豪)인 장씨(張氏)들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매 국가의 정령이 미칠 수
없었는데, 사길이 우리 태조의 지휘 아래에 예속하기를 원한 뒤로부터는 다시 배반하지 않았다. 뒤에 개국공신
(開國功臣)이 되어 벼슬이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이르고 희양(僖襄)이라 시호하였다. 신증 유우 본조 조위
(曹偉).
신증 열녀 본조 벌등이(伐等伊) : 백성 조개동(趙開同)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매, 벌등이가
크게 소리지르며 범을 치니, 범이 버리고 가서 지아비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임금께 들리어 정려(旌閭)
하였다.
제영 김극기의 시에, "집을 떠나 탄식 버리고 봄놀이도 저버리고 필마(匹馬)로 서쪽에 오니 벌써 철 바뀌어 가을
일세. 나그네 길 몇 리냐고 묻지 마오, 용만성 밖에는 다시 더 고을 없네." 하였다.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주가
(周家)에는 우는 봉(鳳)이 조양(朝陽 산의 동쪽)에 모이니, 옥백(玉帛)은 여러 지방에서 임금의 덕업을 뵈러 왔네.
크고 넓은 황령(皇靈 임금의 신령)은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빛나는 사절(使節)이 하황(遐荒 개화되지 않은 먼 곳)
까지 왔네. 하늘은 학야 바람 쓸쓸한 데에 닿았고, 땅은 용만 길이 아득한 데에 다했네. 나라를 떠나 몸이 차차
늙어감을 잊고, 앉아서 딱따기소리 들으니 자정(子正)이 길구나." 하였다.
옛 보루 풀 깊은 곳에 전사(戰士)의 유골을 묻다 : 권근(權近)이 천자의 명을 받고 지은 시에, "강 위의 외로운 성
(城)은 땅이 자연히 치우치니, 상마(桑麻) 있는 거리는 정말 쓸쓸하구나.
봉강(封疆)은 오히려 장군의 지략에 의지하고, 보장(堡障)은 반드시 자사(刺史)의 현명을 믿어야겠네.
옛 보루 풀 많은 곳엔 전골을 묻었고, 거친 마을 나무 늙은 곳엔 밥짓는 연기를 띠었네. 이제 천자의 덕화가 동쪽
으로 퍼져오는 날을 만났으니, 백성이 편히 잠들 수 있음이 매우 기쁘구나." 하였다.
고국(古國)에는 산하(山河)가 장(狀)하다 : 안노생(安魯生)의 시에, "왕명을 받들어 천자를 뵙고 수레 돌려 오는데
아직 젊었네. 10년 동안 강해(江海)에 뜻을 뒀는데, 만리의 나그네길 근심이로세. 고국의 산과 물이 씩씩도 한데,
황성(荒城)에는 세월이 한가히 가네. 스스로 세속을 달리하기 좋아하여, 종일토록 혼자서 다락[樓]에 있네."
하였다.
산길은 구름 속으로 잇달아 뚫려 있다 : 예겸의 시에, "아주 밝아 의순(義順)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가서 왕도(王都)
로 들어가는데, 산길은 구름 속으로 뚫려 있고, 송교(松橋)는 잎을 띤 채 깔려 있네. 이 한 길엔 요참(腰站 주막)이
자주 있는데, 몇 곳에나 들마을이 외롭겠느뇨. 말 머리에 주리자(侏離子)는 말[音]이 달라 불러도 대답이 없네."
하였다.
하늘이 웅장한 국경을 베풀매, 묻노라, 몇 봄이 지났느뇨 : 강희맹의 시에, "하늘이 웅관(雄關)을 베풀어서 몇 해이
더냐. 땅은 문호(門戶) 맞춤이니 늘 손님을 맞네. 용맹스런 백대(百隊)에는 구름같이 주둔한 군사요, 연기 나는
천가(千家)엔 모여 먹고 사는 백성일세. 강세(江勢)는 성 북쪽 기슭에 사랑스레 들어왔고, 산형(山形)은 바다 동쪽
물가에 치우쳐 모였네. 등림하니 화이(華夷)의 경계를 가리지 못하겠고, 만고의 기주(箕疇 기자(箕子)의 홍범구)
에는 스스로 신(神)이 있네." 하였다.
옥(玉) 술병에 때때로 단지 속의 술을 떠서 보내다 : 앞사람의 시에, "옥호(玉壺)에 때때로 단지 속의 술을 보내서
관(館) 열고 음식 벌여 멀리 온 손 위로하네. 늘 행장에 익숙하니 역마(驛馬)를 번거롭히고, 얼굴을 자주 보니
변민(邊民)을 알겠네. 노란 꾀꼬리 푸른 나무는 교로(橋路)를 짧게 하고, 보랏빛 제비 경쾌한 바람은 넓은 물가를
맑히네. 귀양살이 나그네가 어찌 시력(詩力) 주는 것을 알랴, 해마다 광경이 억지로 정신을 전하네." 하였다.
8영(八詠) 임사홍의 시. 일대(一帶)의 긴 강은 만고에 흘러, 용용(溶溶 물이 성(盛)한 모양) 양양(?? 물이 자연스레
흐르는 모양)하기 어느 때나 그칠까. 봄이 오니 새 물 가득히 포도같이 푸르고, 넘치는 맑은 빛은 갈매기를 물들일
만하구나. 호산(胡山)은 벼랑지어 하늘과 나란하고, 야색(野色)은 창망(滄茫)하여 조망(眺望)에 들어 희미하네.
절정에 서린 구름 늘 짙은데, 석양이 밝은 곳엔 새가 날아 내리네. 구리징 같은 해가 나무 머리에 걸린 것을 잠깐
보았는데, 붉은빛이 잠시 사이에 강루(江樓)에 스며드네. 변성(邊城)의 초가집 다소를 알겠으나, 자배(炙背)하는
누가 임금에게 드리겠나. 흑풍(黑風 큰 바람)이 바다에 불어 하늘이 어둡더니, 용(龍)이 싸워 구름이 다투어 먼
마을이 안 보이네. 귀양 온 나그네가 어찌 수심을 금할 수 있으랴, 초가 처마에서 종일토록 빗물이 동이 뒤집는
것만 보네. 독룡(毒龍)이 잠긴 곳에 물이 치우치게 깊으니 깎인 벼랑 높아서 오똑하기 몇 길인지.
낚시꾼만이 때때로 낚시 드리우는데, 편주(扁舟)는 오히려 단풍 진 숲에 매여 있네. 북녘 들이 멀리 아득한 데에
들었고, 갓이 끝없는 곳에 이슬이 서리 됐네. 서풍 부는 하룻밤에 꽃이 눈같이 날리니, 봄 하늘에 버들개지 광란
하는 듯하구나. 요교(凹橋)의 조객(祖客 손님을 전송함) : 풀이 먼 긴 둑에 비가 잠깐 개니, 계교(溪橋)의 저무는
해에 각별히 수심이 일어나네. 가련하다, 목메는 다리 앞의 물은 무정한 것이 유정한 것인 줄을 알겠구나.
들을 불태우니 빈 들에 다했는데, 용맹스런 병사 천기(千騎)가 정모(旌?)를 둘러쌌네.
장군이 교렵(校獵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사냥하는 것)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고각(鼓角)소리 가운데에 초승달이
높다랗구나.
[비고]
연혁 선조(宣祖) 25년 왜란을 피하여 여기서 임금이 어가를 세워 머물렀으며, 26년 환도(還都)하여 부윤(府尹)
으로 승격하였고, 인조(仁祖) 12년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를 겸하였다가 병자란(丙子亂) 후 혁파한 뒤에 19년
양서운향사(兩西運餉使)를 겸하였다.
방면 천내방(川內坊) : 부(府)와의 거리가 사방 1천 20리이다. 수진방(水鎭坊) : 동쪽으로 40리이다.
소관방(所串坊) : 동쪽으로 60리이다. 가산방(加山坊) : 위와 같다. 고령삭방(古寧朔坊) : 동쪽으로 80리이다.
청수방(靑水坊) : 동쪽으로 1백 리이다. 옥상방(玉尙坊)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위원방(威遠坊) : 남쪽으로 50리이다. 광화방(光化坊) : 남쪽으로 60리이다.
비현방(批峴坊)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월화방(月化坊) : 남쪽으로 85리이다.
송장방(松長坊) : 동남쪽으로 20리이다. 고군방(古郡坊) : 동남쪽으로 40리이다.
관리방(館里坊) : 위와 같다. 고성방(古城坊) : 동남쪽으로 30리이다. 양상방(楊上坊) : 서남쪽으로 65리이다.
고읍방(古邑坊) : 서남쪽으로 50리이다. 광성방(光城坊) : 위와 같다. 진리방(津里坊) : 서남쪽으로 40리이다.
양하방(楊下坊) : 서남쪽으로 45리이다. 미라산방(彌羅山坊) : 서남쪽으로 9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성안 동쪽에 있다. 서창(西倉) : 성안 서쪽에 있다.
군향고(軍餉庫)ㆍ군기고(軍器庫)ㆍ관향고(管餉庫) : 인조(仁祖) 원년에 사행(使行)의 노자(路資)와 칙행(勅行)의
책응(策應)에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이상은 모두 성안에 있다.
소관창(所串倉) : 소관(所串)에 있는데 연산주(燕山主) 6년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다.
광평창(廣坪倉) :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옥상창(玉尙倉) : 동쪽으로 1백 리이다.
고영삭창(古寧朔倉) : 동쪽으로 80리이다. 원창(院倉) : 동쪽으로 60리이다. 양둔창(楊屯倉) : 양하(楊下)에 있다.
해둔창(海屯倉) : 인산진(麟山鎭) 남쪽에 있다. 고읍창(古邑倉) : 고읍방(古邑坊)에 있다.
가산창(加山倉) : 가산방(加山坊)에 있다. 월화창(月化倉) : 월화방(月化坊)에 있다.
진보 청성진(淸城鎭) : 동북쪽으로 80리이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 군총(軍摠) 3백 60명,
진창(鎭倉) 1, 곡(穀)이 모두 77석(石)이다. 건천보(乾川堡) : 동북쪽으로 20리이며, 권관(權管)이 1명,
군총이 1백 44, 창(倉)이 1, 곡총(穀摠)이 8석이다. 양하진(楊下鎭) : 서남쪽으로 60리이며, 숙종(肅宗) 4년에
설치하였다. 순조(純祖) 때 폐지하였다.
영아 방어영(防禦營) : 청성(淸城)ㆍ청수(淸水)ㆍ방산(方山)ㆍ옥강(玉江)ㆍ수구(水口)ㆍ양하(楊下)ㆍ건천(乾川)
을 진보(鎭堡)하는데 속하였다.
별무사(別武士) 3백 30명, 장무대병(壯武隊兵) 2초(哨), 정초동오(精抄東伍) 22초, 아병(牙兵) 2초, 별포수
(別砲手) 2초, 창군(?軍) 1초, 작대군(作隊軍) 5초, 표하군(標下軍) 3백 52, 초고(哨考)가 있다.
토산 소금[鹽].
장시 중강개시(中江開市) : 본조(本朝) 세종(世宗) 때 명 나라 선종(宣宗)이 칙령(勅令)으로 경우(耕牛) 1만 마리
를 요동(遼東)에 보내어 건포를 무역하였다. 선조(宣朝) 26년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요동에 통첩해서 압록
중강(鴨綠中江)에다 개시(開市)하여 무역을 통하고 이내 장시(場市)를 설치하였다.
34년 파하였다가 다음해 다시 영을 내려 의주(義州)에다 옛날과 같이 매매(賣買)하게 하였다.
광해주(光海主) 원년에 파하였고, 인조(仁祖) 24년 다시 설치하여 1년에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로 정하여
교역하게 하였으며, 뒤에 2월과 8월로 고쳤다.
공무역 이외에 만상(灣上)과 송도(松都)의 사상(私商)이 점점 범람하여 수시로 매매하는 자를 중강후시(中江後市)
라고 이름하였다. 숙종(肅宗) 26년 파하였으며, 또 사행(使行)에서 책문(柵門)을 출입할 때와 만인(灣人)ㆍ송인
(松人) 등이 몰래 은(銀)을 가지고 인부와 말 가운데 섞여 있어 물건을 판매하여 이익을 도모하였다.
모리하는 것이 처음에는 점점 번성하더니 끝에는 연경(燕京)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성책(城柵)에 나가게 하고,
탄압한 바가 없었다. 그런 연후에 자기 마음대로 매매하여 이름을 책문후시(柵門後市)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사행
회책(回柵) 때에 연화(燕貨)와 동시에 책(柵)에 나오게 하는 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았다.
개시(開市) 공무역 총수(總數) : 소 2백 마리, 해대(海帶) 일명 다시마[坑士麻] 1만 5천 7백 95근(斤), 해삼(海蔘)
2천 2백 근, 면포(綿布) 3백 73필(疋), 마포(麻布) 1백 75필 8천 4백 권(卷), 장지(壯紙) 6백 권, 소금 3백 10석(石),
쟁기[犁] 1백 94통(筒), 사기(沙器) 3백 30죽(竹)이다.
성지 백마산성(白馬山城) :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이 축조하였다. 본조 인조(仁祖) 24년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개축하였으며, 성 서남쪽 음저(陰阻) 둘레가 2천 6백보(步)이고, 높이가 2길이며, 옹성(甕城)이
7, 치각(雉閣)이 7, 문(門) 5, 군금(軍錦) 30, 우물이 32, 못 13이고, 동창(東倉)ㆍ읍창(邑倉)ㆍ양무고(養武庫)ㆍ
차승정(次勝亭)이 있다.
외성(外城)은 영종(英宗) 29년 부윤(府尹) 남태기(南泰耆)가 석성을 축조하였는데, 동ㆍ서ㆍ북 3면이 낮고 평평
하고, 둘레가 2천 1백 3보(步)이며, 높이가 2길, 치각(雉閣)이 4, 문(門) 3, 제대(梯臺) 2, 군포(軍鋪) 10, 우물 3이다.
진도 압록강진(鴨綠江津) : 고려 현종(顯宗) 13년 비로소 설치하였고, 압록강 구당(句當)을설치하였으며,
본조에서는 고쳐 도승(渡丞)으로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으며, 옛날부터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대로(大路)로
삼았다.
누정 세병루(洗兵樓)ㆍ환학정(喚鶴亭).
사원 현충사(顯忠祠) :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있다.
숙종(肅宗) 경인년에 세웠으며, 정종(正宗) 기유년에 사약(賜額)하였다.
강감찬(姜邯贊) : 마전(麻田)을 보라. 임경업(林慶業) : 충주(忠州)를 보라.
황일호(黃一皓) : 강화(江華)를 보라.
최효일(崔孝一) : 의주(義州) 사람이며, 병판(兵判)으로 증직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안극성(安克誠) : 용천(龍川) 사람이며, 병판으로 증직하였다.
차예량(車禮亮) : 의주 사람이며 병판으로 증직하였다.
차충량(車忠亮) : 차예량(車禮亮)의 형이며, 병판으로 증직하였다.
차원철(車元轍) : 차예량의 종제(從弟)이며 병판으로 증직되었다.
차맹윤(車孟胤) :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장후건(張厚鍵) : 본관은 안동이고, 병의(兵議)로 증직되었다.
별단(別壇) : 정종(正宗) 무인년 승지(承旨) 심진현(沈晉賢)의 말에 따라 현충사 옆에 설치하여 별단에서 제사지
냈다. 명(明) 나라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 : 95명이다.
본조(本朝) 의사(義士) 백대호(白大豪) 등 : 21명이다.
기충사(紀忠祠) : 성안에 있으며, 경종(景宗) 임인년에 세웠고, 정종(正宗)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을파소(乙巴素) :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처사이며, 압록강(鴨綠江) 가에 살았고, 국상(國相)으로 초빙
되었다. 김상헌(金尙憲) : 태묘(太廟)를 보라.
철산군 鐵山郡
동쪽은 선천군(宣川郡) 경계까지 18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41리, 서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36리,
북쪽은 의주(義州) 경계까지 56리이고, 서울에서 1천 50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의 장녕현(長寧縣)인데 : 일명 동산(銅山)이었다. 현종 9년에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
고을로 일컬었고, 본조 태조 원년에 지주사(知州事)로 삼아 영삭만호(寧朔萬戶)를 겸하였고,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15년에 만호를 폐지하고 군(郡)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1명씩이다.
군명 장녕ㆍ동산ㆍ철천(鐵川)ㆍ철주.
성씨 본군 최(崔) : 전주(全州). 김(金)ㆍ황(黃) : 모두 황주(黃州).
산천 웅골산(雄骨山) : 군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장화산(長花山) : 군의 서남쪽 27리에 있다.
어랑산(於郞山) : 군의 서쪽 22리에 있다. 취가산(鷲家山) : 군의 남쪽 35리에 있는 대관목장(大串牧場) 안에 있다.
석현산(石懸山) : 군의 북쪽 33리에 있다. 백량산(白梁山)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바다 : 군의 남쪽 23리에 있다.
대관도(大串島) : 군의 남쪽 19리에 있다. 목장이 있으며, 봄가을에 관(官)에서 제사지낸다.
가도(?島) : 군의 남쪽 47리에 있다. 목장이 있는데, 둘레가 41리이다.
가차리도(加次里島)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저지도(楮只島) : 군의 서쪽 27리에 있다.
월로도(月老島) :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거우도(車牛島) : 군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모양이 수레를 끄는 소 같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섬 안에 기암(奇巖)
괴석(怪石)이 많아, 새가 날아 내리지 못한다. 사람이 만약 가까이 간다면 머리털이 일어서며 떨려서 머무를 수
없다. 봄가을에 관에서 제사지낸다.
토산 실ㆍ삼[麻]ㆍ옻[漆]ㆍ자초(紫草)ㆍ삼치ㆍ숭어ㆍ조기ㆍ홍어ㆍ밴댕이ㆍ준치ㆍ민어ㆍ상어ㆍ넙치ㆍ낙지ㆍ
조개ㆍ굴ㆍ새우부레[魚?]ㆍ제호유(??油)ㆍ수달(水獺)ㆍ농어ㆍ도미[架魚]ㆍ토화(土花 조개붙이).
성곽 철산성(鐵山城) : 돌로 쌓았으며, 군의 남쪽 9리에 있는 가산(架山) 위에 있는데, 둘레가 6천 9백 75척,
높이가 10척이고, 안에는 9개의 샘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본조 태종 때에 쌓아서 군성(郡城)으로 삼았다. 세조 때에 고을 사람들이 그 높고 험함을 꺼리므로 평지(平地)로
옮겼다.
봉수 웅골산봉수(熊骨山烽燧) : 서쪽으로 용천군의 용호산(龍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선천군의 오도곶(吾道串)
에 응한다. 오랑산봉수(於郞山烽燧) : 남쪽으로 취가산에 응하고, 소곶산에 응한다.
취가산봉수(鷲家山烽燧) : 동쪽으로 기곶에 응하고 서쪽으로 어랑산에 응한다.
기곶봉수(岐串烽燧) : 군의 서쪽 23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백량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취가산에 응한다.
백량산봉수(白梁山烽燧) : 동쪽으로 선천군의 우이곶(牛耳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기곶에 응한다.
소곶산봉수(所串山烽燧) :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용천군의 석을곶(石乙串)에 응하고, 남으로 어랑산
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거련역(車輦驛) : 군의 북쪽 27리에 있다. 관(館) 앞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구불거리며 높이 솟아 그 맑은
그늘이 여러 두둑을 덮는다.
○ 예겸(倪謙)의 시에, "철산(鐵山)의 거련관(車輦館)에서, 박오(薄午 한낮이 덜된 때)에 잠깐 술통을 열었네.
골자리가 평평히 땅에 깔렸고, 송정(松亭)은 똑바로 문을 향했네. 피리 소리는 해를 맞아 울려오고, 깃발 그림자
는 바람 따라 나부끼네. 식사가 끝나고서 앞 육로(陸路)를 따라가니, 군사가 가는 것이 고요하여 들리지 않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조용히 숲 언덕 옆에서 밥을 먹고서, 앉아 남훈(南薰)을 대하여 머리를 거듭 긁네. 땅에
가득한 부들 방석은 풀자리를 이었고, 주방에 가득한 해물(海物)은 계모(溪毛 시내에 있는 수초(水草), 이끼)와
섞였네. 평생에 본래 풍경 구경할 뜻이 있었더니, 오늘에 풍속을 묻는 수고가 많구나. 견여(肩輿)를 빌려 얻으니
가볍기가 작은 배 같은데, 옷깃을 헤치니 한길엔 소나무 바람이 스며드네." 하였다.
○ 또 김식의 반송시(盤松詩)에, "누가 말했나, 홀로 선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고. 뜰앞에 선 녹음(綠陰) 밑에
앉았으니, 뻗어 나간 깊은 뿌리는 지맥(地脈)을 연하였고, 넓게 덮힌 일산(日傘)은 하늘 가운데를 떠받쳤네.
흰 학(鶴)이 구름 뚫고 일어서는데, 두어라, 푸른 용이 비를 띠고 울도록 하지 말라. 꿈에 조래산(?徠山 소나무
좋기로 유명한 산)에 들어가니 바람이 소매에 가득한데, 바다 물결 소리 속에 낮도 침침하구나."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긴 젓대 한 소리가 숲 언덕에 일어나니 만 가닥 심회가 휘저어 놓은 듯 요란하구나.
스스로 백 년이 흐릿하여 꿈과 같다 하는데, 누가 삼벌(三伐)하여도 다시 털이 난다 하는가. 하늘 가에 해를 보매
쌍궐(雙闕)을 생각하고, 바다 위에 관풍하니 이로(二勞)에 지나는구나. 벼슬길에 언제나 분주한 것 우스운데 취향
(醉鄕)에는 진(晉) 나라의 산도(山濤)가 한가하구나." 하였다.
○ 또 장성의 반송시에, "어느 해에 심어서 지금껏 이르렀나, 정자 밖에 평평히 반묘(半畝)의 그늘을 보태었네.
둥글게 덮인 것은 모두가 나무 뿌리가 얽힌 힘은 아니요, 늘 푸른 것은 바로 세한(歲寒)의 마음이네. 분명히 푸른
일산(日傘)은 거련(車輦)을 둘렀고, 황홀한 푸른 용이 바닷가에 일어나네. 총총히 시를 쓰노라니 좋은 글귀 없으
나, 그래도 진기한 경치를 거두어 시단(詩壇)에 제공하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반송시에, "반묘의 짙은 그늘이 길가를 덮었으니, 조래산서 씨를 나누어 먼 지방에 왔네,
하늘을 받친 깃일산[羽蓋]은 깊이 서리었고, 땅에서 나온 용의 비늘 같은 껍질은 떨쳐 일어나려 하네. 늙어 가며
정정한 모습은 비 이슬을 넉넉히 받았고, 나면서부터 높은 절개는 바람 서리에 오만하네.
산 앞에 푸른 나무가 응당 무수하겠으나, 어찌 신기한 뿌리의 홀로이 상함과 같을 수 있으랴." 하였다.
○ 동월(董越)의 반송(蟠松)시에, "낮게 늘어지고 높이 올라가 삐죽삐죽 길가에 나왔으니 하늘 밝은 해에 서린 용을 보겠네. 무더위는 부질없이 삼복(三伏)에 가까우나 상쾌한 기운은 늘 6월에도 떠는구나.
푸른 일산은 새벽에 천사(天使)의 깃발을 따랐고, 놀란 물결은 밤에 바다 어귀에 배를 띄웠네, 재목을 고르려고
일찍이 조래산 마루에 올라갔더니 머리를 돌리던 만우(萬牛 두보(杜甫) 시에 있는 말)를 연상케 하였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반송시에, "늙은 나무 줄기의 겹친 그늘이 사면에 둘러 있고, 푸른 물결의 깊은 곳에는 푸른 용을
감추었네. 뿌리는 굽은 쇠같이 서려 서리를 겪은 지 오랬고, 그림자는 차가운 못에 떨어져 종일토록 떠 있게 하네.
해물은 소반에 바치매 가늘게 회(膾)를 쳤고, 단지에서 술을 뜨매 옥배(玉杯)로 배[舟] 삼았네. 덕성(德星)들이
오늘 삼한(三韓)에 모이니, 응당 홍광(虹光)이 있어 두우성(斗牛星)에 뻗치리라." 하였다.
○ 이파(李坡)의 반송시에, "한 절개가 어찌 일찍이 고금에 변하리오, 푸르러서 사시의 그늘을 드리우네.
우연히 일산을 버티어 지나는 손을 맞이하니, 벼슬 때문에 내 마음을 더럽히는 것 아니네. 난(鸞)과 학(鶴)은 밝은
달밤에 깃들어 오고, 규(? 뿔이 있는 용)와 용은 푸른 강가에서 읊조리기를 파하네. 생뢰(笙?)를 이루더라도 곡조
를 알 사람이 드물 것이니, 누가 신령스런 뿌리를 보내어 상림(上林 한(漢) 나라 때 임금의 동산)에 의탁할까."
하였다.
두로농원(豆老弄院)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용천원(龍泉院) : 군의 동쪽 17리에 있다.
불우 운암사(雲巖寺)ㆍ석봉사(石峯寺) : 모두 웅골산에 있다. 옥동사(玉洞寺) : 동골산(東骨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대관도사(大串島祠) : 봄가을에 관에서 제사지낸다. 거우도사(車牛島祠) : 봄가을에 관에서 제사지낸다.
고적 고철주성(古鐵州城) : 군의 북쪽 35리에 있는 개걸현(?屹峴)의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그 나머지 일부는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5백 척이고, 안에 7개의 우물이 있다.
고영삭성(古寧朔城) : 군의 동쪽 4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척이다. 예전에는 만호영(萬戶營)
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의주의 영삭진과는 다르다.
명환 고려 이원정(李元禎) : 북쪽 군사가 침입했을 때에 원정이 고을의 원이 되어 굳게 지키고 힘을 다하였으나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드디어 관창(官倉)을 불태우고 처자를 거느리고 불에 몸을 던져 죽었다.
○ 김구(金坵)의 시에, "당년에 성난 구적(寇賊)이 변방의 성문에 난입(亂入)하니, 40여 성이 불타는 들 같은데,
산에 의지한 외로운 성첩(城堞)이 적의 지름길을 막으니, 만군(萬軍)이 아가리를 벌리며 한번에 삼키려 하네.
흰 얼굴의 서생(書生)이 이 성을 지켜, 나라에 목숨 바치기를 기러기 털같이 가볍게 하네. 일찍부터 인(仁)과 신
(信)을 높여 인심을 결속하였으니, 장사(壯士)가 환호하매 천지가 기우네. 서로 반 달이나 버티어 백골(白骨)을
불을 때어 밥 지었고, 낮에 싸우고 밤에 지키니 용과 범이 지쳤네. 형세가 다하고 힘이 꺾였어도 오히려 여유를
보이느라, 다락 위의 관현(管絃)은 소리 더욱 슬펐네. 관창이 하루 저녁에 붉은 불길을 지르고는 달갑게 처자와
함께 뛰어들어 재가 되어 죽었네. 충성스런 영혼 장한 넋은 어디를 향해 갔는고, 천고(千古)의 고을 이름 부질
없이 철(鐵) 자로 기념하네." 하였다.
전충(全忠) : 충선왕 때에 철주의 원이 되어 정치를 간편히 하였다.
이희적(李希勣) : 판관(判官)이었다. 북쪽 오랑캐의 군사가 성 아래에 이르러 공격함이 매우 급한데,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져서 고수할 수 없으매 희적이 장정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찔러 죽었다.
[비고]
건치연혁 태종(太宗) 15년에 갈라서 만호를 겸하였다. 광해주 14년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인조 2년에 현감
(縣監)으로 강등시켰다가, 11년에 복구하였다. 영종 27년에 치소를 거련참(車輦站)에 옮기고, 45년에 옛 치소로
환원시켰다.
방면 읍내면ㆍ고성방(古城坊) : 동남쪽으로 40리이다. 자량방(自梁坊) : 남쪽으로 40리이다.
정혜방(丁惠坊) : 서남쪽으로 20리이다. 부서방(扶西坊) : 20리이다. 참방(站坊) : 북쪽으로 40리이다.
여간방(餘間坊) : 서북쪽으로 25리이다. 서림방(西林坊) : 서북쪽으로 50리이다.
장화방(長化坊) : 총목(總目)에 실려 있다.
창고 사창(司倉)ㆍ영창(營倉) : 서림성(西林城) 가운데 있다. 산창(山倉) : 운암성(雲暗城) 가운데 있다.
신창(新倉) : 부의 동쪽 10리, 운암산성(雲暗山城) 남쪽에 있다. 북창(北倉) : 운암산성 서쪽에 있다.
방료창(放料倉) : 차령역(車嶺驛)에 있다.
성지 운암산성 : 웅골산(熊骨山) 동쪽에 있다. 인조 9년에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 이 쌓았다.
숙종 10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둘레는 2천 4백 45보이며 국청사(國淸寺)가 있다. 수첩군(守牒軍)이 15초
(哨), 91명이다. 《문헌비고》에 실려 있다.
진보 서림진(西林鎭) : 북쪽으로 40리 산 위에 있다. 영종 23년에 첨사를 두고 석성을 쌓았다. 둘레는 2천 4백
85보(步)이며, 5년이 넘어서 진을 혁파하고, 독진(獨鎭)을 두어 중군(中軍)이 지켰다. 45년에 곧은 길 요새지로써
선천부(宣川府) 소재 청감첨사(淸江僉使)를 진(鎭)으로 다시 옮겼다.
병마동첨절제사가 1명, 군사가 모두 6백 20명, 창고 4, 곡식은 모두 1천 8백 89석이다.
선사포진(宣沙浦鎭) :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인데, 옛날에는 선천부에 속하였다. 수군 첨절제사 겸감목관
(水軍僉節制使兼監牧官)이 1명, 군사는 모두 8백 65명, 창고 4, 곡식은 모두 1천 8백 89, 방선(防船)이 2척,
병선(兵船)이 1척, 사후선(詞候船)이 있다.
진도 망동포진(望東浦鎭).
교량 판교(板橋) : 북쪽으로 30리 월운천(月雲川) 대로에 있다.
목장 가도장(?島場) : 감목관 1명, 선사포 첨사가 겸하였다. 목마(牧馬)가 2백 44필이다. 대곶장(大串場).
용천군 龍川郡
동쪽은 의주(義州)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19리, 북쪽은 같은 주의 경계까지 19리,
남쪽은 철산군(鐵山郡) 경계까지 22리, 서쪽은 바닷가까지 40리이고, 서울에서는 1천 1백 7리 떨어졌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의 안흥군(安興郡)이었는데, 현종 5년에 용주방어사(龍州防禦使) 고을로 일컬었다가 뒤에
용만부(龍灣府)로 고쳤고, 충선왕 2년에 지군사(知郡事)로 고쳤다. 본조 태종 4년에 의주이언(義州伊彦)으로
하여 군(郡)에 붙였다가 13년에 준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1명씩.
군명 용만ㆍ안흥ㆍ용주.
형승 강은 발해(渤?)에 닿았고, 들은 요양(遼陽)에 잇닿았다 : 유정현(柳廷顯)의 시에, "긴 강이 발해에 잇닿았고,
평평한 들이 요양에 잇닿았네." 하였다.
성씨 본군 최(崔) : 전주(全州). 석(石) : 충주(忠州). 강(康) : 영주(靈州). 서(徐) : 안산(安山). 변(邊) : 광주(廣州).
여(呂) : 곡성(谷城). 이언(伊彦) 염(廉) : 용담(龍潭). 오(吳)ㆍ최(崔) : 모두 해주(海州). 한(韓) : 장사(長沙).
안(安) : 수원(水原). 조(趙) : 임주(林州). 오(吳) : 덕안(德安). 장(張) : 장연(長淵).
산천 용골산(龍骨山) :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서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북쪽으로 압록강을 바라보며, 강 밖에는 송골(松?) 여러 산이 책상 앞에 있는 듯하여 가장 좋은
경치이다. 용안산(龍眼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 군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사위포(沙爲浦)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장천(長川) : 성안에 있는 서산(西山)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성의 동문(東門)에 이르러 다시 바뀌어서 서쪽
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신도(薪島) : 군의 서쪽 60리에 있다. 대우도(大牛島) : 군의 남쪽 80리에 있다. 삼도(蔘島) : 군의 남쪽 29리에
있다. 신지도(信知島) : 군의 서쪽 62리에 있다. 사자도(獅子島)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오도도(吾道島) : 군의 서쪽 39리에 있다. 마도(馬島) : 군의 남쪽 45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월로도(月老島) : 군의 남쪽 32리에 있다.
양량곶(梁良串) :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용암(龍巖) : 군의 서쪽 45리에 있다. 조수(潮水)가 왕래하는데, 바위 위에 용의 발톱 자국이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밴댕이ㆍ조기ㆍ넙치ㆍ대하(大蝦)ㆍ숭어ㆍ홍어ㆍ굴[石花]ㆍ바지락[土花]ㆍ조개ㆍ낙지ㆍ
민어ㆍ준치ㆍ오징어ㆍ상어ㆍ부레[魚?]ㆍ제호유(??油)ㆍ자초(紫草)ㆍ무명석(無名石) : 유산(柳山)에서 나온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3천 3백 8척, 높이가 10척이고, 안에는 95개의 우물과 3줄기 시냇물
과 4개의 못이 있다.
봉수 용호산봉수(龍虎山烽燧) : 서쪽으로 의주(義州)의 도산(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철산군(鐵山郡)의 웅골산
(熊骨山)에 응한다.
대산봉수(代山烽燧) : 군의 서쪽 11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의주의 우리암(于里巖)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안산에
응한다.
용안산봉수(龍眼山烽燧) : 서쪽으로 대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진곶에 응한다.
진곶봉수(辰串烽燧) : 군의 서쪽 42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용안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사위포에 응한다.
사위포봉수(沙爲浦烽燧) : 서쪽으로 진곶에 응하고, 동쪽으로 석을곶에 응한다.
석을곶봉수(石乙串烽燧) : 군의 서쪽 3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사위포에 응하고, 동쪽으로 철산군의 소곶(所串)에
응한다.
누정 관덕정(觀德亭)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성(郡城) 안의 서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 밖의 서쪽으로 옮겼다.
역원 양책역(良策驛) : 군의 동쪽 18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작은 관(館)이 황량하여 인마(人馬)가 드문데, 요란한 산 깊은 곳에 해 저물려 하네.
괴상하구나, 우리(郵吏 역리(驛吏))는 서로 아는 듯하니, 흰 밥 푸른 말 꼴[芻]로 멀리 돌아온 것을 위로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몇 군(郡)에서 와서 손님을 대접하니, 차는 달고, 술 또한 맑으며, 봉화(烽火) 전하니 바다
와 산의 일을 알겠고, 세상 변한 것은 산성(山城)에 나타나 있네. 골짜기 그윽하니 구름 안개가 오래이고, 창문이
차가우니 눈[雪] 달이 밝구나. 꿈을 깨어 베개를 어루만지니, 반은 고향 생각일세."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일대(一帶)의 갠 구름이 말 머리를 둘렀으니, 용천(龍泉)의 공관(公館)이 산 사이에 있네.
해가 옮겨가니 느티나무 그늘이 외로운 평상에 오고, 바람이 움직이니 소나무 소리가 가까운 산에서 이르네.
마신 것이 적어서 천일취(千日醉)를 도모하기 어렵고, 일이 많으니 어느 때에나 한가할 수 있을지.
오늘 아침 즐거이 구름 산을 벗하여 잤는데, 머지않아 응당 또 여기 돌아오리."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날마다 조정에 나가서 고관(高官)들과 모였는데, 어찌 말 타고 민간에 올 줄 알았으랴.
밤에 자면서 하늘가의 달을 여러 번 보았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바다 위의 산을 많이 만나네. 나그네길은 옮겨
돌아 스스로 앞길 헤아리기 어려운데, 벼슬의 정(情)은 멀고 아득하니 누가 한가함을 허락할까.
평생에 현진자(玄眞子)를 알지 못했으니 어느 곳에 시를 쓰고 대환단(大還丹 선약(仙藥))을 물을까."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양책관에 가서 쉬니, 결채(結彩)가 중문(重門)을 둘렀네. 조칙에 절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
하고, 자리를 열어 술이 통에 가득하네. 죽변(竹? 대로 만든 식기(食器), 제기(祭器))에는 옛 제도가 있고,
삿갓에는 옛 풍습이 남아 있네. 온돌에 새로 불을 때니, 밤새도록 침실이 따뜻하구나.
○ 소쇄(瀟?)한 수풀 산에 보랏빛 푸른빛 꾸며 놓은 방에, 손[客] 곁에 누가 함께 잔질을 할까. 한양에서 사신 보내
조칙을 맞이하니, 천리로 서쪽에 오느라고 며칠이나 바빴는가. ○ 푸른 연기가 작은 정자에 비껴 덮였는데 사면의
노랑 발[簾]을 때 따라 여니, 용골산 마두산(馬頭山) 좌우(左右)가 슬며시 좌중(坐中)에 몽땅 들어오네." 하였다.
재송원(栽松院) :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신증 건천원(乾川院) : 군의 동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호사(龍虎寺) : 군성 안에 있다. 절 앞에 은행나무가 있는데, 한 뿌리에 두 줄기이며, 혹시 오래 말랐다가도
다시 소생하는데,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하였다. 불정사(佛頂寺) : 성안에 있다. 원통사(元通寺)ㆍ
원적사(元寂寺) : 모두 용골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용주(古龍州)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등정폐현(柳等井廢縣) : 군의 남쪽에 있다.
명환 고려 추적(秋適) : 원이었다.
제영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잇따른 봉우리의 끊어진 벼랑은 기이한 모습을 다투니, 수묵(水墨 그림에 쓰는
묽은 먹)으로 베개 위에 병풍을 새로 이루었네. 못 밑에 물결이 두 해오라기 그림자를 흔들고, 나무 머리에 바람이
한 매미 소리를 부수네. 두어 집에 비추는 석양은 마을을 꿰뚫고, 외로운 노[棹]는 맑은 물결에 들 배[?]가 오르네.
느릅나무 울타리 고요한 곳에 개짖는 소리 없고, 밤에도 오히려 사립문을 닫지 않았네." 하였다.
[비고]
건치연혁 광해주 12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숙종 13년에 별전영(別前營)을 겸하고, 18년에 청북 토포사
(淸北討捕使)를 겸하였다. 영종 8년에 별전영을 혁파하고 독진장(獨鎭將)으로 삼았다.
방면 부서면(府西面) : 사방 10리이다. 동상방(東上坊) : 25리이다. 동하방(東下坊) : 서북쪽으로 30리이다.
내상방(內上坊) : 남쪽으로 20리이다. 내하방(內下坊) : 서남쪽으로 25리이다. 외상방(外上坊) : 남쪽으로 30리이다.
외하방(外下坊) : 남쪽으로 35리이다. 서면방(西面坊) : 서쪽으로 40리이다. 북상방(北上坊) : 위와 같다.
북하방(北下坊) : 서쪽으로 30리이다.
창고 부창(府倉)ㆍ내창(內倉)ㆍ남창(南倉)ㆍ참창(站倉).
영아 별전영 청북 : 별전영장이 있었다. 숙종 13년에는 겸하였고 영종 8년에는 통합하였다.
진보 신도진(薪島鎭) : 숙종 4년에 미곶(彌串)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승격시켜 병마첨절
세사(兵馬僉節制使)로 삼았다. 순조(純祖) 7년에 신도로 옮겨 설치하였는데, 바람이 잠잠하면 나가서 신도에
둔(屯)치고, 바람이 세면 물러나와 미곶을 지켰다. 본진에는 수군첨절제사가 1명, 민가[民戶]가 4백 29호, 인구
는 1천 6백 56명인데, 남자가 9백 24명, 여자가 7백 32명이다. 군사는 총 3백 41명, 창고가 3, 양곡이 총 1천 9백
20석, 연대(煙臺)가 1, 파수(把守) 1, 배가 8척이다.
역원 자포원(者浦院).
교량 대교(大橋) : 서쪽으로 10리이다. 강교(舡橋) : 서남쪽으로 25리인데 북쪽으로 의주(義州) 치소와 1백 리
떨어졌다. 오두교(烏頭橋) : 서쪽으로 35리이다. 향교(香橋) : 서쪽으로 20리이다.
유교(柳橋) : 양책참(良策站) 앞에 있다.
창성도호부 昌城都護府
동쪽은 운산군(雲山郡) 경계까지 1백 90리,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2백 4리, 남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 압록강까지 3리, 북쪽은 벽동군(碧潼郡) 경계까지 63리이고, 서울에 1천 2백 54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창주(昌州)는 본래 고려의 장정현(長靜縣)이었는데, 정종 원
원년에 재전(梓田)에 성을 쌓고 백성의 집을 옮겨서 창주방어사(昌州防禦使) 고을로 하였고, 고종 18년에 몽고
군사가 침입하여 성읍(城邑)이 폐허가 되었으며, 이성부(泥城府)는 공민왕 18년에 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를
두어 진평(鎭平)ㆍ진강(鎭康)ㆍ진정(鎭靜)ㆍ진원(鎭遠)의 4군(軍)을 설치하고,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
를 차출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이 성을 창주에 합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가
13년에 감무(監務)로 고쳤고, 세종 때에 올려서 도호부로 하고 운산의 청산촌(靑山村)을 갈라서 내속(來屬)시켰
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1명씩이다.
군명 장정(長靜)ㆍ창주(昌州).
성씨 본부 강(康) : 신주(信州). 황(黃) : 공주(公州). 이(李) : 보안(保安).
산천 연평산(延平山) : 부의 남쪽 22리에 있다. 산의 남쪽 삭주부의 경계에 철미륵(鐵彌勒)이 있다.
달각산(達覺山) : 부의 동쪽 90리, 벽동군 경계에 있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나무하고 사냥하여 시끄럽게 하면
갑자기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청산(靑山) : 부의 동쪽 90리에 있다. 당아리산(堂阿里山) : 부의 동쪽 1백 75리에 있다.
운두리산(雲頭里山) : 부의 서쪽 13리, 태천ㆍ운산 2군(郡)의 경계에 있다.
압록강(鴨綠江) : 부의 북쪽 4리에 있는데, 의주(義州)에 상세히 나온다.
창주천(昌州川) : 창주진(昌州鎭)의 남쪽에 있는데, 근원은 부의 동쪽에 있는 오정동(於頂洞)에서 나오고 남쪽
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갑암천(甲巖川) : 부의 남쪽 10리에 있는데, 근원은 방장현(防墻峴)에서 나오고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오정탄(於丁灘) : 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압록강의 지류(支流)이다.
마랑이동(馬郞耳洞) : 이하는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와천동(瓦遷洞)ㆍ대와방동(大瓦方洞)ㆍ
소와방동(小瓦方洞)ㆍ산양천(山羊遷)ㆍ적전암(狄田巖)ㆍ노토탄(驢土灘).
토산 실ㆍ삼[麻]ㆍ돈피[貂]ㆍ날다람쥐[靑鼠]ㆍ인삼ㆍ산양[羚羊]ㆍ잣ㆍ벌꿀ㆍ백랍(白蠟)ㆍ속돌[水泡石]ㆍ
사향(射馨)ㆍ복령(茯?)ㆍ수달(水獺)ㆍ궁간목(弓幹木)ㆍ은어[銀口魚]ㆍ여항어(餘項魚).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1백 55척, 높이가 7척이고, 안에 11샘물이 있다.
청산성(靑山城) : 고려 말기에 홍건적(紅巾賊)이 이곳에 난입하였는데, 당시에는 성보(城堡)가 없었으나 고을
사람들이 오히려 지형의 험함에 의지하여 난을 피하였다. 본조 태종 영락(永樂) 갑오년에 비로소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5천 4백 48척이며, 사면이 위험하고 돌벼랑이 깎여 섰는데 그 높이가 3장(丈)은 되며,
오직 하나의 문이 있을 뿐인데 현교(懸橋)를 설치하고서 들어갈 수 있으며, 성안에는 시냇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행성(行城) : 고림성(古林城)의 실호리(失號里)로부터 두 곳에 이르는데 길이가 3백 척이고, 창주진의 어정탄동
어귀로부터 5곳에 이르는데 길이가 1천 척이다.
관방 창주진(昌州鎭)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1천 8백 50척, 높이가 6척이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아(營衙)가 있다.
○ 첨절제사 1명이 있다. 운두리산보(雲頭里山堡)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백 41척, 높이가 8척이다.
대실호리보(大失號里堡) : 부의 북쪽 53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척, 높이가 9척이다.
갑암천보(甲巖川堡)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백 16척, 높이가 9척이다. 오정탄보(於丁灘堡)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백 47척, 높이가 4척이다.
전자동보(田子洞堡) : 부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 5척, 높이가 7척이다.
우구리책(牛仇里柵) : 부의 동쪽 42리에 있다.
○ 이상은 권관(權管)을 차출하여 수자리살게 한다.
봉수 갑암봉수(甲巖烽燧) : 북쪽은 운두리산에 응하고, 남쪽은 삭주부의 연평산(延坪山)에 응하고, 서쪽은 같은
부의 권적암(權狄巖)에 응한다. 운두리산봉수(雲頭里山烽燧) : 남쪽은 갑암에 응하고, 동쪽은 묘동에 응대한다.
묘동봉수(廟洞烽燧) : 부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서쪽은 운두리 산에 응하고, 북쪽은 오정탄에 응한다.
오정탄봉수(於丁灘烽燧) : 서쪽은 묘동에 응하고, 북쪽 서개동에 응한다.
서개동봉수(徐介洞烽燧) : 부의 북쪽 39리에 있는데, 서쪽은 오정탄에 응하고, 북쪽은 고림성에 응한다.
고림성봉수(古林城烽燧) : 동쪽은 벽동군의 호조리(胡照里)에 응하고, 서쪽은 서개동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부성(府城) 안의 북쪽에 있다.
역원 창주역(昌州驛) : 창주진에 있다.
신증 여정원(旅貞院) : 부의 동쪽 90리에 있다. 구계원(九階院) : 부의 동쪽 백 리에 있다.
불우 복숭사(福崇寺) : 당아리산에 있다. 상암사(上菴寺) : 달각산에 있다. 정혜사(淨惠寺) : 운림산(雲林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ㆍ
여단(?壇) : 모두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성(古城) : 부의 동쪽 1백 50리에 있다.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1만 6천 9백 97척이고, 안에는 큰 냇물이
있고, 또 11우물이 있다. 행성(行城) : 길이가 2만 1천 5백 73척, 높이가 10척이다.
옥개역(玉開驛) : 옛터가 부의 동쪽 2백 5리에 있다. 풍전역(楓田驛) : 옛터가 부의 동쪽 2백 리에 있다.
성인교(聖人橋) : 부의 남쪽 15리 되는 압록강 밑에 있는데, 물이 얕아지면 볼 수 있다.
효자 본조 김을시(金乙時) : 성 가운데에서 불이 일어나 그 집에 뻗어 오는데, 아버지가 병들어서 일어나지 못하
므로 을시가 곧 화염 속에 들어가 아버지를 업고 나왔으나 부자가 불에 데어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
져서 쌀을 내리고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이모지(李毛知) : 아버지가 나쁜 병을 얻었는데, 모지가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먹이매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비고]
건치연혁 세조(世祖) 13년에 나누어 동ㆍ서ㆍ중ㆍ 3도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본부(本府)를 우도(右道)로,
영변(寧邊)을 중도(中道)로, 강계(江界)를 좌도로 삼았다. 예종(睿宗) 원년에 3도를 합하여 영변에다 하나의 영
(營)으로 하였다가, 광해주 6년에 절도사를 두어 지키다가 11년에 혁파하였다. 인조 8년 창주(昌州)에 계원장
(繼援將)을 두었다. 숙종 7년에 계원장을 혁파하고 속진(屬鎭)으로 삼아 영(營)을 옮겼다가,
본부 겸좌영장(本府兼左營將)이 후에 이를 혁파하였으며, 17년에 청북 육군 좌방어사(淸北陸軍左防御使)를 겸
하였다. 영종 38년에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47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내면(府內面)ㆍ동창명(東倉面) : 동쪽으로 1백 70리이다. 대창면(大倉面) : 위와 같다.
신창면(新昌面) : 동쪽으로 1백 40리이다. 청산면(靑山面) : 동쪽으로 2백 20리이다.
우구면(牛仇面) : 동쪽으로 70리이다. 상창면(上倉面) : 남쪽으로 50리이다.
전창면(田倉面) : 북쪽으로 50리이다. 창주면(昌州面) : 북쪽으로 70리이다.
시채면(恃寨面)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창고 부창(府倉) : 부내(府內)에 있다. 상창(上倉) : 남쪽으로 50리이다. 자잔창(自潺倉) : 창주(昌州)에 있다.
전창(田倉)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우창(牛倉) : 남쪽으로 50리이다. 신창(新倉)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1백 50리이다. 대창(大倉)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청산창(靑山倉) : 동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성지 당아산성(當峨山城) : 당아(當峨) 북원항(北緩項)에 있다. 빈 속에 원수굴(元帥窟)이 있다. 영종 22년에 처음
으로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7천 4백 71보이며, 가운데에 용문수(龍門守)가 있다. 수첩(守堞)이 3초(哨)
작대군(作隊軍)이 30명이다.
영아 좌방영(左防營) : 소속된 진보는 창주ㆍ박채(博寀)ㆍ갑암(甲巖)ㆍ운두리(雲頭里)ㆍ묘동(廟洞)ㆍ오정탄
(於汀灘)ㆍ대길호리(大吉號里) 등이다. 별무사(別武士) 3백 30명, 충위사(忠衛士) 7백 명, 장무대(壯武隊) 마병
(馬兵) 5초(哨), 정초(精抄)ㆍ속오(束五)가 8, 초작대군(抄作隊軍)이 5초, 갑사(甲士) 24초, 표하군(標下軍)이 2백
30명이다.
진보 시채진(恃寨鎭) : 동남쪽으로 1백 10리이다. 숙종 2년에 만호로 승격시켰으며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
制使)가 1명이다. 군사는 모두 5백 25명, 창고 1, 곡식은 모두 3백 78석이다.
묘동보(廟洞堡) : 북쪽으로 15리 지점에 있으며 권관(權管)이 1명이다. 군사는 모두 60명, 창고 1, 곡식은 모두 2
석이다.
토산 복령(茯?)ㆍ오미자(五味子)ㆍ말음[菱仁]ㆍ송이버섯[松?]ㆍ석용(石茸)ㆍ이장어(里長魚)ㆍ소가리[金鱗魚]ㆍ
곰ㆍ사슴ㆍ토저(土猪). 역원 관문참(官門站).
사원 충렬사(忠烈祠) : 성내에 있다. 숙종 을해년에 의주(義州)에서 옮겨 세우고 그 해 사액하였다.
김응하(金應河) : 철원편에 보라.
삭주도호부 朔州都護府
동쪽은 창성부(昌城府) 경계까지 84리, 북쪽은 같은 부의 경계까지 18리, 남쪽은 구성부(龜城府) 경계까지 94리,
서쪽은 의주(義州) 경계까지 20리, 압록강(鴨綠江)까지 36리이고, 서울에서 1천 95리 떨어졌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의 영새현(寧塞縣)이었는데, 현종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방어사(防禦使) 고을로
하였다가 뒤에 올려 부(府)로 하였고, 본조 태조 3년에 견아상착(犬牙相錯)하므로 고구주(古龜州)와 부근의 12촌
(村)을 갈라 합쳐서 낮추어 군(郡)으로 하였고, 태종 13년에 올려 도호부로 하였고, 세종 21년에 다시 낮추어 군
으로 하였다가 이듬해에 올려 도호부로 하였고, 세조 12년에 읍치(邑治)를 소삭주(小朔州)로 옮기고 진(鎭)을 두었다.
진관 보(堡)가 하나 : 구영(仇寧).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1명씩이다.
군명 영새.
성씨 본부 김(金) : 염주(鹽州). 최(崔) : 청산(靑山). 한(韓) : 전의(全義). 이(李) : 평주(平州)ㆍ보안(保安).
산천 천마산(天磨山) : 《일통지(一統志)》에는 운산(雲山)으로 썼다. 부의 서남 80리, 의주와 구성부의 경계에
있다. 흑산(黑山)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개막산(蓋幕山)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청룡산(靑龍山) : 부의 남쪽 90리, 구성부의 경계에 있다. 세정산(洗井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연평산(延坪山) : 부의 북쪽 18리, 창성부의 경계에 있다. 계반산(界畔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부의 동쪽 65리에 있다. 두롱산(豆籠山) : 부의 동쪽 79리에 있다.
팔령산(八嶺山) : 대삭주(大朔州)의 남쪽 94리에 있다. 구성에도 나온다.
삼기천(三岐川)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세정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개막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흑산에서 나와서 이곳에 이르러 합쳐서 흐르는 까닭에 이름 붙였으며, 또한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계반천(界畔川) : 부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계반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삼기천으로
들어간다.
온정천(溫井川) : 부의 남쪽 35리에 있는데, 세정산에서 나와서 북으로 흘러 삼기천으로 들어간다.
판막천(板幕川) : 부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개막산에서 나와서 계반, 온정의 두 내와 합쳐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
강으로 들어간다.
천동천(泉洞川) : 부의 동쪽 70리에 있는데, 대삭주에서 나와서 동으로 흘러 백려자천으로 들어간다.
백려자천(白呂子川) : 부의 남쪽 50리에 있는데, 천마산에서 나와서 남으로 흘러 형제천으로 들어간다.
형제천(兄弟川) : 부의 남쪽 68리에 있다. 두 근원이 있는데, 하나는 천마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청룡산에서 나와서,
부의 남쪽에 이르러 합쳐 흘러서 동으로 계반천으로 들어가서, 두 냇물이 섞여 흐르므로 형제천이라 이름지었다.
생동천(?洞川) : 부의 남쪽 95리에 있는데, 형제천의 지류(支流)이다.
온천(溫泉) : 부의 남쪽 30리에 있으며, 온정천 곁에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돈피[貂]ㆍ날다람쥐[靑鼠]ㆍ인삼ㆍ벌꿀ㆍ은어[銀口魚]ㆍ여항어(餘項魚)ㆍ속돌[水泡石]ㆍ
잣ㆍ영양(羚羊)ㆍ사향(射馨)ㆍ궁간목(弓幹木)ㆍ수달(水獺).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33척, 높이가 9척이고, 안에 우물과 샘물이 13군데 있다.
대삭주성(大朔州城) : 바로 옛 읍성인데, 지금 관아(官衙)에서 남쪽으로 65리 떨어졌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6백 15척, 높이가 7척이고 안에는 11곳의 샘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는데 박천(博川), 가산(嘉山), 태천(泰川) 등의 관조세(官租稅)를 거두어 들인다.
행성(行城) : 구령(仇寧)의 구자동서동(口子東西洞) 어귀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길이가 1천 3백 31척, 높이가
7척이다.
신증 연평령행성(延坪嶺行城) : 돌로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30척, 높이가 8척이다.
관방 구령보(仇寧堡) :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래 의주의 땅이었는데, 우리 조선 세종 25년에 내속(來屬)되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8백 17척, 높이가 8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 있다.
봉수 연평산봉수(延坪山烽燧) : 북으로 창성부의 갑암에 응하고 남으로 건전산에 응한다.
건전산봉수(件田山烽燧) : 부의 서남 12리에 있는데, 북으로 연평산에 응하고, 남으로 오리동에 응한다.
권적암봉수(權狄巖烽燧) : 부의 북쪽 32리에 있는데, 동으로 창성부 갑암에 응대하고, 서쪽으로 전왕구비산에
응한다.
전왕구비산봉수(田往仇非山烽燧) : 부의 북쪽 33리에 있는데, 동으로 권적암에 응하고, 서쪽으로 의주의 노토탄에
응한다.
오리동봉수(梧里洞烽燧) : 부의 남쪽 29리에 있는데, 북으로 건전산에 응하고, 남으로 성두산에 응대한다.
성두산봉수(城頭山烽燧) : 부의 남쪽 65리에 있는데, 남으로 구성부의 팔령산에 응하고, 북으로 오리동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성안의 남쪽에 있다.
역원 대삭역(大朔驛) : 고삭주(古朔州)에 있다. 소삭역(小朔驛) : 부성(府城)의 남쪽에 있다.
계반원(界畔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대삭원(大朔院) : 부의 남쪽 95리에 있는데, 일명 팔령원(八嶺院)이다.
불우 보현사(普賢寺) : 오봉산에 있다. 약사암(藥師菴) : 연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삭주(古朔州)ㆍ기이역(岐伊驛) : 옛터가 부의 남쪽 90리에 있다.
암사역(巖舍驛) : 옛터가 기이역의 서쪽 10리에 있다. 창평역(昌平驛) : 옛터가 기이역의 동쪽 10리에 있다.
○ 이상은 모두 구성에서 이속(移屬)된 땅이다.
명환 본조 최운해(崔雲海) : 병마사(兵馬使)였는데,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었으며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므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승진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면(東面) : 40리에 있다. 북면 : 30리에 있다. 역지면(驛只面) : 동쪽으로 90리에 있다.
백군자면(白君子面) : 남쪽으로 30리, 끝이 70리이다. 천동면(泉洞面) : 동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상단면(上端面)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90리이다.
하단면(下端面) :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10리이다. 구령면(仇寧面)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창고 사창(司倉)ㆍ북창(北倉) : 서쪽으로 25리에 있다. 대창(大倉) : 대동주(大洞州)에 있다.
남창(南倉) : 80리에 있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70리에 있다. 천장(泉倉) :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범창(凡倉) : 온정령(溫井嶺)의 남쪽에 있다. 상단창(上端倉) : 동남쪽으로 1백 리에 있다.
하단창(下端倉) : 동남쪽으로 1백 40리에 있다. 천마둔창(天摩屯倉) : 남쪽으로 80리에 있다.
진보 천마진(天摩鎭) :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효종(孝宗) 4년에 감영(監營)으로부터 상단명(上端面)으로 임시
주둔하고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숙종(肅宗) 31년에 첨사진(僉使鎭)으로 내려, 진(鎭)을 대소성령(大小城嶺)의
밑으로 옮겨 독진(獨鎭)으로 하고 의주(義州) 옥강진(玉江鎭)을 방어한다. 강외로 유령(踰嶺)의 길[路]이 나와
있는데 또한 대성ㆍ소성(小城)의 두 영을 방어한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이다. 군(軍)은 모두 3백 56명이고, 진창(鎭倉)이 둘이 있으며 양곡은 모두 5백
9석이다.
구령진(仇寧鎭) : 서쪽으로 40리, 압록강(鴨綠江) 가 의주 경계의 큰 길이다. 세조(世祖) 25년에 의주로부터 내속
(來屬)하였으며 동서쪽은 돌로 성을 쌓았고 둘레는 8백 30보(步)이다. 망북정(望北亭)ㆍ식파정(息波亭)이 있다.
의주(義州) 청수진(靑水鎭)과 강외(江外) 노상탄(老上灘)의 통로를 방어하고, 또 강외 황발리(荒發里) 밑 전량동
(田兩洞)의 통로를 방어한다.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다. 군(軍)은 모두 4백 33명이고 진창(鎭倉)이 하나이며,
양곡은 모두 5백 4석이다.
막령진(幕嶺鎭)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인조(仁祖) 25년에 역지면(驛只面)에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다가, 현종(顯宗) 15년에 만호(萬戶)로 올려 대소(大小) 방장령(防墻嶺) 밑에 진을 방어하고 독진(獨鎭)으로
하여 강외(江外) 창성(昌城)과 유령(踰嶺)의 통로를 방어하고, 또 종운(宗雲)ㆍ대회(大晦)ㆍ사모(紗帽)의 세 동
(洞)을 방어한다.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며, 군(軍)은 모두 6백 36명이고, 진창이 둘이며 양곡은 모두 6백 68
석이다.
토산 오미자(五味子)ㆍ애끼찌나무[弓幹木].
역참 관문참[官門站]ㆍ계반참(界畔站)ㆍ대관참(大館站) : 곧 대삭역(大朔驛)이다.
교량 계반교(界畔橋)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범창교(凡倉橋)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석교(石橋)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남창교(南倉橋) : 남쪽으로 77리에 있다.
승선교(陞仙橋) : 남쪽으로 7리에 있다. 수첨교(水砧橋) : 남쪽으로 12리에 있다.
병암교(餠巖橋) : 남쪽으로 16리에 있다. 찰방교(察訪橋)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석산교(石山橋) :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삼기교(三岐橋) : 북쪽으로 18리에 있다.
판막교(板幕橋) : 서* 으로 15리에 있다. 망운교(望雲橋)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학수교(學水橋) : 동쪽으로 6리에 있다. 판교(板橋)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호장교(胡墻橋)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귀성도호부 龜城都護府
동으로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38리, 남으로 정주(定州) 경계까지 38리, 선천군(宣川郡) 경계까지 72리,
곽산군(郭山郡) 경계까지 58리, 서쪽으로 의주(義州) 경계까지 1백 13리, 북으로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29리
이고, 서울에서 8백 86리 떨어졌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이었는데, 성종 13년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여진(女眞)
을 공격하여 쫓고 성을 쌓아서 귀주(龜州)라고 불렀고, 고종 18년에 높여서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하고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뒤에 주치(州治)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고, 본조 세조 원년에 옛 구주가
실로 요해(要害)의 땅인데 정주와 멀리 떨어졌으므로 나누어서 귀성군(龜城郡 : 정주(定州)에 상세히 나온다)을
두고 또 여연(閭延), 무창(茂昌) 2읍(邑)을 폐지하고 그 백성들을 이 군에 옮겼고 12년에 높여서 도호부로 하고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 2 :선천ㆍ곽산.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
군명 만년(萬年)ㆍ귀주(龜州).
성씨 본부 이미 정주(定州)에 나왔다. 여연 김(金) : 개성(開城)ㆍ덕수(德水). 최(崔) : 탐진(耽津). 무창 박(朴)ㆍ
임(林)ㆍ이(李)ㆍ김(金)ㆍ하(河) : 모두 내(來).
풍속 활쏘기와 말타기를 힘쓴다. 간소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숭상한다 : 모두 군적(郡籍)에 있다.
산천 보십산(甫十山) : 부의 서북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바로 청룡산의 동쪽 지맥(支脈)이다.
서양산(西陽山)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서산(西山) : 부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보십산의 서쪽 지맥이다.
청룡산(靑龍山) : 부의 서북쪽 35리에 있다. 검산(檢山) : 부의 서북쪽 70리에 있다.
팔령산(八嶺山) : 부의 북쪽 29리에 있다. 천현(泉峴) : 부의 남쪽 48리에 있다. 정주(定州)에도 나온다.
굴암산(屈菴山) : 부의 동북 39리에 있는데, 팔령산의 동쪽 지맥과 서로 잇달았다. 석성(石城)의 옛터가 있는데,
둘레가 1만 50척이고, 안에 두 우물이 있다.
황화천(皇華川) : 부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굴암산에서 나와서 객관(客館)을 거쳐 동으로 흘러서 구림천으로
들어간다. 구림천(仇林川) : 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검산에서 나와서 동으로 흘러 팔령천으로 들어간다.
팔령천(八嶺川) : 부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팔령동(八嶺洞)에서 나와서 남으로 흘러 구림천과 합하여 박천강
(博川江)으로 들어간다. 부연(釜淵)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날씨가 가물 때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 고성지(古城池)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돈피[貂]ㆍ날다람쥐[靑鼠]ㆍ구리쇠 : 여연(閭延)에서 난다. 인삼ㆍ화피(樺皮)ㆍ자초(紫草)ㆍ
벌꿀ㆍ홍어ㆍ준치ㆍ민어ㆍ밴댕이ㆍ굴ㆍ낙지.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2천 3백 35척, 높이가 7척이고, 안에 우물과 샘이 50군데 있다.
봉수 소곶봉수(所串烽燧) : 부의 북쪽 28리에 있는데, 북으로 삭주부의 성두산에 응하고, 남으로 고성에 응한다.
고성봉수(古城烽燧) : 부의 서쪽 3리에 있는데, 북으로 소곶에 응하고, 남으로 태천현(泰川縣)의 농오리(籠吾里)
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역원 귀주역(龜州驛) : 부성(府城) 안에 있다. 부연원(釜淵院) : 부연 곁에 있다.
팔령원(八嶺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구림원(仇林院) : 구림천의 남쪽에 있다.
불우 광법사(廣法寺) : 청룡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ㆍ원통사(圓通寺) : 모두 굴암산에 있다.
길상사(吉祥寺) : 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 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안의진(安義鎭) : 부의 남쪽 1백 70리에 있다. 예전에는 수주(隨州)에 속하였었는데, 우리 조선 세조 때에
내속(來屬)되었다. 편월성(片月城) : 부의 서쪽 78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7백 59척이고, 안에
는 샘이 2군데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안의(安義)의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서양역(西陽驛) : 옛터가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통의역(通義驛) : 옛터가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대평역(大平驛) : 옛터가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명환 고려 박서(朴犀) : 고종 때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였다. 몽고(蒙古)의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철주(鐵州)를 도륙(屠戮)하고 귀주에 이르러 성을 3순(旬) 동안 포위해 갖가지 계교로 공격하였으나, 서(犀)가
문득 기틀을 타고 응변(應變)하여 굳게 지키매 몽고 군사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때에 몽고 장수로 나이 거의 70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성 아래에 이르러 성의 방벽과 기계(器械 병기(兵器))를
둘러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내가 소년 적부터 종군(從軍)하여 천하의 성지(城池)를 공격해 싸우는 형상을 두루
보았으나, 일찍이 이와 같이 공격을 당하고서 끝내 항복하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니, 성안의 여러 장수는
뒷날 반드시 모두 장상(將相)이 되리라." 하였는데, 뒤에 서(犀)가 과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제배되었다.
효자 본조 면시(沔施) :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얻으매 스스로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이 일이 임금께 들리어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이동(李同) : 부의 종인데, 아버지가 나쁜 병을
오래 앓으매 이동이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인조(仁祖) 때에 별좌영장(別左營將)을 겸하였다가 영종(英宗) 때에 진겸수성장(鎭兼守城將)으로 고치고 도호
부사 겸 귀성진병마 겸절제사수성장(都護府使兼龜城鎭兵馬兼節制使守城將)으로 하였다.
방면 성내방(城內坊)ㆍ내동방(內東坊)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동산면(東山面)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범성방(氾城坊) : 동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오봉방(五鳳坊)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방현방(方峴坊)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용두방(龍頭坊)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노동방(蘆洞坊)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면산방(面山坊)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이현방(梨峴坊) : 서쪽으로 70리에 있다. 사기방(沙器坊) :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북면방(北面坊) : 처음이 5리, 끝이 40리이다. 천마방(天摩坊) : 서북쪽으로 80리에 있다.
염리방(鹽里坊) : 서북쪽으로 1백 20리, 정주(定州)ㆍ곽산(郭山) 양 읍(邑)의 남쪽 경계 바닷가에 있다.
애전방(艾田坊) : 서쪽에 있다. 칠전방(七田坊) : 남쪽에 있다. 두 방(坊)이 지도(地圖)와 총목(總目)에 있다.
우장방(牛場坊) : 총목에 실려 있다. 방(坊)은 일찍이 면(面)으로도 일컬었다.
창고 동창(東倉) : 20리에 있다. 오창(敖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창(南倉) : 30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안창(安倉) : 서쪽으로 70리에 있다. 천창(天倉) :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다.
산창(山倉) : 청룡령산성(靑龍嶺山城)에 있다. 염창(鹽倉) : 염리방(鹽里坊)에 있다.
용창(龍倉)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붕어ㆍ쏘가리[錦鱗魚]ㆍ누치ㆍ백토(白土)ㆍ석회(石灰) : 창목(蒼木)ㆍ당귀(當歸)ㆍ석어(石魚)ㆍ숭어
[秀魚].
교량 황화교(皇華橋) : 남쪽으로 5리에 있다. 광법교(廣法橋) : 동북쪽으로 10膠에 있다.
구림교(九林橋)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우장교(牛場橋)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부락교(浮落橋) : 서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방현교(方峴橋)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선역교(善驛橋) : 선역천(善驛川)에 있다. 전탄교(前灘橋) : 서쪽으로 80리에 있다.
각송교(?松橋) : 서쪽으로 1백리에 있다.
사원 정공사(旌功祠) : 숙종 계미년에 세우고 갑신년에 사액(賜額)하였다.
박서(朴犀) : 서산(舒山)이 본이다. 귀성병마사(龜城兵馬使)로서 몽고(蒙古)병을 크게 깨뜨렸으며, 벼슬은 평장사
(平章事)이다.
김경손(金慶孫) : 경주(慶州)가 본이다. 본도의 장군으로서 몽고를 크게 깨뜨리고 벼슬은 은청광록 부추밀
(銀靑光祿副樞密)이었다. 뒤에 최항(崔沆)의 해(害)를 입었다.
고읍 봉산군(蓬山郡) : 동쪽으로 34리에 있다. 안주(安州) 조에 보라.
선천군 宣川郡
동으로 곽산군(郭山郡) 경계까지 13리, 서쪽으로 철산군(鐵山郡) 경계까지 70리, 남으로 바닷가까지 21리,
북으로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91리이고, 서울에서 9백 63리 떨어졌다.
건치연혁 본래는 안화군(安化郡)이었는데, 고려 초기에 통주(通州)라고 고쳤고, 현종 21년에 선주방어사(宣州防
禦使) 고을이라 일컫고, 고종 18년에 몽고(蒙古) 병란을 피하여 자연도(紫燕島)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에 육지로 나왔고,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郡)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 훈도(訓導) : 1명씩이다.
군명 안화ㆍ통주ㆍ선주.
성씨 본군 유(劉) : 평주(平州). 김(金) : 장연(長淵). 지(智) : 봉주(鳳州). 이(李) : 아주(牙州). 강(康) : 진양(晉陽).
박(朴) : 당악(唐岳). 최(崔) : 재령(載寧). 나(羅) : 황주(黃州). 송(宋) : 염주(鹽州).
산천 서운산(棲雲山)ㆍ보리산(菩提山) : 모두 군의 북쪽 60리에 있다.
검산(劍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봉우리들이 뾰죽하고 험하기가 칼끝 같은 까닭에 이름지었다.
무골산(無骨山)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소산(所山) : 군의 북쪽 65리에 있는데, 고선주(古宣州)의 진산(鎭山)이다.
향산현(香山峴) : 군의 북쪽 90리에 있다. 영산(靈山) : 군의 동남쪽에 있다. 바다 : 군의 남쪽에 있다.
동로강(東路江) : 군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귀성(龜城)의 마구우리산(馬仇于里山)에서 나와서 동으로 흘러 군의
동쪽을 거쳐, 또 남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청강(淸江) :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향산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보리산에서 나와서 옛
군영(軍營)에 이르러 합쳐서 북으로 흘러 철산군의 지경 20리까지 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탄도(炭島) : 군의 남쪽 32리에 있다.
대화도(大和島) : 군의 남쪽 60리에 있다.
신미도(身彌島)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높은 봉우리와 험한 벼랑이 바다 위의 큰 산을 이루고 있으며, 목장(牧場)
이 있다.
접도(蝶島)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99개의 우물이 있다고 한다.
우리경도(于里梗島) : 군의 남쪽 70리에 있다. 진경도(眞梗島) : 군의 남쪽 80리에 있다.
굴강포(堀江浦) : 군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근원이 보리산에서 나왔다. 석화포(石和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대지(大池)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자초(紫草), 자연석(紫硯石) : 군의 동쪽에 있는 다미리(多米里)에서 나온다. 준치ㆍ청어ㆍ
밴댕이ㆍ숭어ㆍ조기ㆍ홍어ㆍ은어[銀口魚]ㆍ민어ㆍ넙치ㆍ오징어ㆍ상어ㆍ부레[魚?]ㆍ낙지ㆍ새우ㆍ굴ㆍ
바지락[土花]ㆍ윤화(輪花)ㆍ조개ㆍ제호유(??油).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56척, 높이가 12척이고, 가운데에 두 우물이 있다.
봉수 우이곶봉수(牛耳串烽燧) :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철산군의 백량(白梁)에 응하고, 동으로 입암
에 응한다. 입암봉수(立巖烽燧)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우이곶에 응하고, 동으로 의요에 응한다.
의요봉수(蟻腰烽燧) : 군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입암에 응하고, 동으로 곽산군의 청엄산(靑奄山)에
응한다.
오도곶봉수(吾道串烽燧)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동으로 곽산군의 송족(松足)에 응하고, 서쪽으로 철산군의
웅골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 : 성안의 남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성 밖의 남쪽에 있다.
역원 임반역(林畔驛) :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 기순(祁順)의 시에, "돌길이 동으로 와 한 관(關)을 지나는데, 손님 맞는 정관(亭館)이 산기슭 사이에 있네.
옛 성은 동림(東林) 지경에 가까이 닿았고, 가는 길은 북악산(北岳山)에 멀리 통하였네. 봄은 사신을 따라 절성
(絶城)에 이르렀고, 비는 하늘의 혜택을 나누어 인간세계에 뿌리네. 싸늘한 등불이 밤을 비추니 시상(詩想)이
더하는데, 먼저 쓴 글은 자세히 차례로 정리하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지난밤에 하늘 가득히 눈이 날리더니, 새벽이 되매 찬 기운이 사람의 옷에 다가오네.
초거(?車)로 또 운흥(雲興)을 향해 떠나건만, 천리 우리 집 동산에는 어느 날에나 돌아갈까."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훈풍은 움직이지 않고 길은 겹겹인데, 풀 기운이 서로 섞여 더운 기운 짙었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처럼 바쁜 것이 이미 한껏 했는데, 사람의 말들이 벌떼처럼 소란한 것을 견디겠는가.
운흥역(雲興驛) 가는 길 어귀에는 돌을 많이 만나겠고, 임반역(林畔驛) 산머리에는 소나무가 드물게 보이네.
한창 갈증에 병이 되려는데 포도주 잔이 앉은 자리에 이바지해 오네." 하였다.
가물천원(加勿川院)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백현원(柏峴院) : 군의 서쪽 60리에 있다.
신증 교량 동로강석교(東路江石橋) : 동로강에 있다. 청강석교(淸江石橋) : 청강에 있다.
불우 묘혜사(妙惠寺)ㆍ서운사(棲雲寺) : 모두 서운산에 있다. 영안사(永安寺)ㆍ보덕사(寶德寺) : 모두 검산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 보리산에 있다. 무골사(無骨寺) : 무골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탄도사(炭島祠) : 봄 가을에 관(官)에서 제사지낸다.
대화도사(大和島祠) : 봄 가을에 관에서 제사지낸다.
고적 동림성(東林城) : 군의 북쪽 62리에 있는데, 곧 옛 선주성(宣州城)이다. 서와 북은 흙으로 쌓았고 동과 남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7천 5백 62척이었으나 지금은 무너졌고, 안에는 샘 우물이 다섯 군데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는 5령(領)과 5부(部)가 있었다고 한다.
○ 예겸(倪謙)의 시에, "동림 옛 성은 바다 언덕 구석에 있는데, 빈 성벽에는 사람 없고 미록(?鹿)만 노네.
쌓은 돌이 쓸려 무너져서 평지에 가득하니, 많고 적은 가시나무가 그 위에서 났구나." 하였다.
고군영(古軍營) :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수청진(水淸鎭)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인물 고려 방서란(房瑞鸞) :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키매, 서북 지방의 여러 성(城)이 모두 붙었는데,
서란은 위총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고 그 형 효진(孝珍)에게 부탁하여 몰래 고을 사람을 꾀어 위총이 둔 장수를
죽이고, 사람을 시켜 그 목을 주어 보내어 사잇길을 따라 행영(行營)에 급히 알리니, 여러 성(城)들이 이를 듣고
모두 군사를 해산하매 임금이 이를 아름답게 여겨 고려의 내시부(內侍府)에 붙였다
[비고]
건치연혁 명종(明宗) 1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군으로 강등되었다.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병자호란 후에 치소(治所)를 임반역(林畔驛)으로 옮겼다. 20년에 청북 수군방사(淸北水軍防使)를 겸하였다.
동림성(東林城)은 선주(宣州) 때의 치소다.
방면 읍내면(邑內面)ㆍ동면 : 30리이다. 신부면(新府面) : 서쪽으로 20리이다.
고부면(古府面)ㆍ태산면(台山面) : 모두 남쪽으로 30리이다.
군자면(君子面) : 남쪽으로 20리이다. 남면 : 40리이다. 수청면(水淸面) : 서남쪽으로 55리이다.
심천면(深川面) : 서쪽으로 40리이다. 보광면(普光面) : 북쪽으로 50리이다.
성지 인산산성(?山山城) : 서쪽으로 20리이다. 인조 50년에 부사(府使) 맹효남(孟孝男)이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1천 2백 50보이다. 또 9년에 부사 민함증(閔涵增)이 쌓았는데, 일설에는 방어사(防御使) 임경업(林慶業)이 증축
하였다고 한다. 수첩군(守堞軍)이 2초(哨), 방위군(防衛軍)이 2초이다.
좌현성(左峴城) : 서북쪽으로 30리이다. 영종 45년에 쌓은 성인데 길이가 2천 3백여 보(步)이며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다. 의주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며 청북(淸北)의 요충지로 삼아 험한 곳을 웅거하여 매복(埋伏)을 설치
하였다.
영아 방영(防營) : 인조 20년에 청북의 수군(水軍) 방영(防營)을 이곳 절제(節制) 수로(水路)에 설치하였다. 경종
(景宗) 2년에 고쳐 육군 방영으로 삼았고, 또 수군으로 고쳤다. 방영사(防營使)가 1명인데 본부사(本府使)가 겸
한다.
속읍은 선천(宣川)ㆍ철산(鐵山)ㆍ용천(龍川)ㆍ곽산(郭山)ㆍ정주(定州)ㆍ가산(嘉山)ㆍ박천(博川)ㆍ영변(寧邊)ㆍ
태천(泰川)ㆍ귀성(龜城)이고, 속진(屬鎭)은 미곶(彌串)ㆍ선사포(宣沙浦)ㆍ인산(?山)ㆍ양하(楊下)ㆍ수구(水口)ㆍ
청성(淸城)ㆍ건천(乾川)ㆍ방산(方山)ㆍ옥강(玉江)ㆍ청수(靑水)이며,
본방영(本防營)은 방선(防船)이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이 3척이다. 선사포 방선이 2척, 병선이 1척, 사후
선이 6척, 미곶진선(彌串鎭船)이 8척. 별무사(別武士) 3백 30명, 장무대 마병(壯武隊馬兵) 2초(哨), 정초속오(精
抄束伍) 15초, 표하군(標下軍) 1백 76명, 선사포 장졸(將卒) 5백 32명이다.
혁폐된 옛 영(營)은 북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진보 청강진(淸江鎭) : 서쪽으로 30리 극성(棘城)의 모퉁이에 있다. 숙종 4년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을 두었다.
영종조에 첨사진(僉使鎭)을 두었는데, 세상에서 극성첨사라 불렀다. 동(同) 45년에 진을 철산부(鐵山府)의 서쪽
임산성(林山城)에 옮겼다. 선사포진(宣沙浦鎭) : 이제는 옮겨 철산에 있다.
토산 목면(木綿)ㆍ백토(白土)ㆍ농어[?魚]ㆍ여어(餘魚)ㆍ문어.
역원 청강참(淸江站)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서쪽 철산의 거련참(車輦站)에 이른다.
가물천원(加勿川院) : 동쪽으로 15리이다. 백현원(栢峴院) : 서쪽으로 30리이다.
목장 신미도(身彌島)에는 말이 5백 필,
탄도장(炭島場)에는 말이 50필이다. 이상 두 목장은 선포포 목관(牧官)의 소속이다.
교량 유교(柳橋) : 부 안에 있다. 철마천교(鐵馬川橋) :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곽산(郭山) 대로로 통한다.
누정 의검정(倚劍亭)ㆍ청진정(淸塵亭)ㆍ열무정(閱武亭).
사원 의열사(義烈祠) : 부 안에 있다. 숙종 정축년에 세우고 영종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김 응하(金應河) : 철원(鐵原)편에 보라.
정기남(鄭奇男) : 하동(河東)이 본관인데 을미년에 김응하를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주문공서원(朱文公書院) : 숙종 신사년에 세웠으며 주자(朱子)ㆍ이이(李珥)를 배향하였다.
충민사(忠愍祠) : 부 안에 있다. 영종 정축년에 세웠으며 임경업을 배향하였다. 충주(忠州)편을 보라.
삼충사(三忠祠) : 고려 때 세웠는데 뒷날 병란 때 없어졌다. 본조 인조 을유년에 중건(重建)하였다.
양규(楊規) : 안악(安岳) 사람인데 고려 현종 2년에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서 거란과의 싸움으로
통천(通川)에서 죽었다. 벼슬은 형부 낭중 벽상공신(刑部郎中壁上功臣)이다.
김숙흥(金叔興) : 서북면 도지휘사 귀주별장(西北面都指揮使龜州別將)으로서 양규와 함께 순절하였다.
유백부(庾伯符) : 통주 도부서(通州都部署)로서 양규와 함께 순절하였다.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추증되었다.
서포사(西浦祠) :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김만중(金萬重) : 호는 서포(西浦)이며 광주(光州)가 본관이다.
숙종 18년에 귀양가서 죽었는데, 벼슬은 병조 판서로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정재사(定齋祠) :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박태보(朴泰輔) : 파주(坡州)편에 보라.
곽산군 郭山郡
동으로 정주(定州) 경계까지 13리, 남으로 바닷가까지 13리, 서쪽으로 선천군(宣川郡) 경계까지 23리,
북으로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울에서 9백 27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장리현(長利縣)이었는데, 성종 13년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여진(女眞)
을 공격하여 쫓고 성을 쌓게 하고서 곽주(郭州)라 이름하였고, 현종 9년에 방어사(防禦使) 고을로 삼았다.
고종 8년에 반역하므로 낮추어 정양(定襄)이라고 일컬었고, 18년에 몽고의 병란을 피하여 바다의 섬으로 편입
(編入)시켰다. 원종 2년에 육지로 나와서 수주(隨州)에 예속시켰고, 공민왕 20년에 다시 군을 삼았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1명씩이다.
군명 장리ㆍ정양ㆍ곽주.
성씨 본군 임(林) : 해주(海州). 변(邊) : 황주(黃州). 김(金) : 강동(江東)ㆍ전주(全州). 장(張) : 풍주(?州).
산천 능한산(凌漢山) : 《일통지(一統志)》에는 웅화산(熊花山)으로 쓰여 있다. 군의 동북 7리에 있는데, 진산
(鎭山)이다. 장경산(長境山)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바다 : 군의 남쪽 13리에 있다.
삼장천(三長川) : 군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방축포(防築浦)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부락포(浮落浦) : 군의 서쪽 28리에 있다.
소포(召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거라지(居羅池) :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우통지(牛筒池) : 군의 동쪽 13리에 있다. 성이곶(聲伊串) : 군의 동쪽 23리에 있다.
우리곶(于里串)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내은금곶(內隱金串)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자초(紫草)ㆍ자연석(紫硯石) : 선사포(宣沙浦)에서 난다. 은어[銀口魚]ㆍ밴댕이ㆍ숭어ㆍ조기ㆍ
오징어ㆍ상어ㆍ민어ㆍ홍어ㆍ넙치ㆍ준치ㆍ새우ㆍ굴ㆍ바지락[土花]ㆍ낙지ㆍ부레[魚?]ㆍ제호유(??油).
성곽 능한산성(凌漢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9백 13척, 높이가 13척이고, 안에 23개의 우물과 1개 못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선사포(宣沙浦) : 군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의 영아(營衙)가 있다.
○ 첨절제사 1명이 있다.
봉수 청엄산봉수(靑奄山烽燧) : 군의 서쪽 28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선천군의 의요(蟻腰)에 응하고, 동으로
방축포에 응한다.
방축포봉수(防築浦烽燧) : 서쪽으로 청엄산에 응하고, 동으로 정주(定州)의 입피산(立彼山)에 응한다.
송족봉수(松足烽燧) :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선천군의 오도곶(吾道串)에 응하고, 남으로 소산에
응한다.
소산봉수(所山烽燧) : 군의 동남 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송족에 응하고, 동으로 정주(定州)의 구령산(仇寧山)에
응한다.
신증 누정 신정(新亭) : 객관의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운흥역(雲興驛) : 군의 북쪽 17리에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곽산 고개 아래 운흥역에서, 낮밥을 처음 먹고 다시 길뜨네. 섣달 눈 다 꺼져서 봄볕이
따뜻하고, 개간 밭에 불지르니 하늘을 비추어 밝구나."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길이 운흥으로 들매 몇 번 물을 건넜던가, 두루 도니 지형이 좋은 것을 점점 알겠네.
높고 낮은 비탈진 언덕에는 층층이 보리요, 끊이고 이은 시냇가 밭엔 곳곳마다 벼로구나. 바다 위의 어염(魚鹽)은
때마침 이로움이 있고, 성안의 관부(官府)에는 오래도록 일이 없네. 내가 오니 마침 단오절인데, 누가 용주(龍舟)
를 풀어서 경멱라(競汨羅)를 할 것인가."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용만(龍灣)에 안장을 풀고 어느 때나 쉴까, 운흥을 지나지 못하여 말은 벌써 지쳤네.
돌을 녹이고 모래를 찌니 천기가 호되게 덥고, 강을 건너고 봉우리에 오르니 길이 멀구나. 무더위는 정말 번흥부
(繁興賦)를 괴롭게 하고, 시원한 비에 부질없이 사조(謝眺)의 시를 생각하네. 어찌 천리 가는 수레를 잠깐 멈출
수 있으랴, 원님은 숲 아래에 취해 곤드라졌구나."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얼음 풀리고 수렁 녹은 곳에 비가 잠깐 개었는데, 청풍(淸風)을 양 소매에 담고 운흥에
이르렀네. 쌓이고 쌓인 해미(海味)는 아름다운 좌석에 이바지하고, 텁텁한 봄 막걸리는 옥병(玉甁)에서 따르네.
소나무는 처마 너머에 수레와 합치고, 곽산은 문 앞에 불탄 흔적인데 푸르게 새싹 돋았구나. 황은(皇恩)이 크고
넓어 동토(東土)에 임했으니, 어찌 사는 사람들이 사신을 보는 것을 제한(制限)하랴." 하였다.
능제원(凌濟院) : 군의 북쪽 13리에 있다. 자비원(慈悲院) : 군의 동쪽 13리에 있다.
가을개천원(加乙?川院) : 군의 서쪽 23리에 있다.
신증 교량 실광천석교(實光川石橋)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사송천석교(史松川石橋) :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삼장천석교(三長川石橋) : 삼장천에 있다.
불우 개원사(開元寺) : 군의 북쪽 23리에 있다. 장경사(長境寺) : 장경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효자 본조 사월(四月) : 군인(軍人) 김말건(金末巾)의 딸이다. 19살 때에 어머니가 질병을 얻어 해를 지나도 낫지
않아서 지아비의 버림을 받았는데, 사월이 산 사람의 뼈가 병을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약을 만들어서 드리매 병이 곧 나았다. 이 일이 임금께 들리어 정려(旌閭)하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 진감(陳鑑)의 사(辭) 서문(序文)에, "곽산군의 길가에 석표(石表 돌에 뜻을 간단하게 적은 것)가 있어 제(題)
하여 이르기를 '효녀의 문[孝女之門]'이라 하였는데, 곧 군(郡)의 백성 김씨의 딸이 손가락을 끊어서 어미의 병을
고치매 조선 임금이 세워서 그 효행을 정표(旌表)한 것이다. 내가 그 뜻을 어여삐 여겨 사(辭)로써 이를 펴니 비록
고민녀(高愍女)의 비(碑)가 반드시 전해지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또한 넉넉히
효녀의 마음을 알 것이다." 하였다. 사에 이르기를, "아아, 효녀여 착하고 아름답도다. 부드러움을 모으고 빼어난
것을 기르매 그 완전함을 이루었구나. 학문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그 천성의 효(孝) 열었으니 효성이 마음에서
나와 몸을 손상(損傷)할 수 있었네. 아이의 몸이 있음은 어미가 끼친 바인데, 어미가 이수(二?)를 앓으매 고치지
못하는구나. 어미 죽고 아이 살아 있으면 장차 어찌 의지할까.
아이 죽고 어미 살면 어미 응당 아이 또 있으리라. 금도(金刀)가 손에 있으매 그 끝이 날카롭구나. 다만 어미 있음
을 아니 어찌 그 몸을 생각하랴. 한 번 휘두르매 잠깐 사이에 손가락 떨어지니, 어지러이 피 떨어져 옷이 붉게 물
들었네. 한 그릇의 국물을 비로소 드리니 어미 마음 기쁘고, 곧 때를 넘기지 않고 어미 빨리 일어났네.
오오, 천도(天道)는 멀지 않고 가깝구나. 밝음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피차(彼此)가 있으랴. 조선 국왕이 돌을 세우
고 마을 문에 정표(旌表)하여 풍성(風聲)을 세우니 야박하던 것이 다시 순후해졌네.
길 곁에 한 번 보매 심신(心神)이 즐거우니, 여기에 직필(直筆)을 잡음은 사문(斯文 공자의 도(道) 유도(儒道))을
위함일세. 아아, 효녀여 진실로 진기하다 하겠구나, 부녀자가 욕지거리함은 아아 어떤 사람인가,
부녀자가 욕지거리함은 아아 어떤 사람인가." 하였다.
○ 예겸의 시 서문에, "곽주 길 왼쪽에 큰 돌이 뚜렷이 보이며 제(題)하여 이르기를 효녀사월의문[孝女四月之門]'
이라 하였다. 물어 보았더니, 김씨 여자가 어머니가 풍기(風氣)병을 앓으매 손가락을 잘라서 치료하여 나았는데
조선 국왕이 아름답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요역(?役)을 면해 주고 이것을 세워서 그 집 마을에 정표
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효(孝)라는 것은 백 가지 행실의 첫째요, 만 가지 착한 일의 근원인데, 한낱 방에 들어앉은
소녀로서 오히려 이를 실천하였는데 하물며 그 사대부에 있어서랴. 내가 이에 우리 조정의 역대 천자의 교화가
점차로 입혀짐이 원대함을 알았다. 예전에 제계녀(齊季女 제사를 잘 지내는 아낙)가 있어서 일찍이 소남(召南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에 실렸는데, 이에 나의 직분이 착한 도리를 물어서 잘 인도할 것이니, 시가(詩歌)를
적어서 한 마디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록하여 보이니, 동행하는 여러분이 화답하여 주신다면 또한 넉넉
히 동방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시에 이르기를 '조선의 곽산 고을에, 김사월이란 여자가 있었네.
어려서 성품이 매우 순진하여, 효성으로 받들어 어버이가 기뻐하였네. 하루아침 어머니가 병에 걸려,
광질을 일으켜 숨이 여러 번 막혔네. 어쩔 줄 몰라 딸의 마음 근심이 되고, 비통(悲痛)하여 늘 목메였네.
의원이 말하기를 사람의 고기를 써서, 먹으면 병이 잘 낫는다 하였네. 딸이 어버이가 연명(延命)할 수 있음을 듣고,
몸을 손상하기를 꾀하였네. 칼을 휘두르며 안방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을 끊어 선혈(鮮血)을 흘렸네. 태운 재로
탕제(湯劑)를 드리니, 한 번 마시매 참으로 눈 녹듯이 나았네. 지극한 효성이 신명에게 통하니,
감동됨이 어찌 이렇게도 밝을까. 천제(天帝)가 진심을 내림이 화이(華夷)로써 달리하지 않음을 비로소 알았네.
국왕이 택리(宅里)에 정표(旌表)하매, 어찌 꼭 정려문을 베풀었던가. 천년에 길이 깎이지 않도록, 돌에 새겨 이름
이 높이 드러났네. 창강(滄江)에선 조아(曹娥)가 빠져 죽었으니, 살고 죽음에 길을 함께 했네. 아아, 저 효경(梟?
효는 올빼미인데 커서 그 어미를 잡아먹는다. 경은 거세고 나쁜 짐승)한 무리는 욕심이 불 일어나듯 하여 천리(天
理)를 멸(滅)하네. 내가 와서 백성의 풍속을 시찰하는데, 여기를 지나가며 기꺼이 절(節 사신의 증표로 임금에게서
받은 기(旗))을 멈추고, 곧 번갈아 노래하니 현열(賢烈)함을 거의 전할 것이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일찍이 문희(文僖 우탁(禹倬))의 효녀시(孝女詩)를 읽어서, 동국(東國)이 민이(民?)를 중
하게 여김을 안 지 오랬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천년 꿈에 떨어졌는데, 비석은 아직 3척으로 남았네.
구름은 북쪽산 하늘에 막막하고 물 막힌 남쪽 시내엔 풀이 무성하네. 봄을 지나 사절(使節)이 도로 여기를 지나니,
앞사람을 잊고자 하는데 생각이 더디 나는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英宗) 22년에 운흥역(雲興驛) 북쪽에 옮겼다가 44년에 도로 영청산(永淸山) 밑으로 옮겼다.
방면 동면(東面)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남면(南面)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서면(西面) : 25리에 있다.
북면(北面) : 40리에 있다. 우리곶면(?里串面)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관리면(館里面)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군내면(郡內面).
창고 사창(司倉)ㆍ신창(新倉) : 동쪽으로 8리 능한산성(凌漢山城) 남문 밖에 있다.
산창(山倉) : 능한산성 안에 있다. 해창(海倉)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참창(站倉)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진보 임해진(臨海鎭) : 임(臨)은 임(壬)으로도 쓴다. 동남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별장(別將) 1명이 있어 좌별사
(左別士)를 감영에서 차출하여 계문(啓聞)한다. 군(軍)은 모두 8백 42명이다.
능한산성(凌漢山城) : 수첩군(守堞軍)이 1천 초(哨) 34명이다. 상세한 것은 비고(備考)에 있다. 경내에는 영운사
(營雲寺)와 만경사(萬景寺)가 있다.
토산 목면(木綿)ㆍ윤화(輪花)ㆍ소라(小螺)ㆍ붕어ㆍ게ㆍ농어[?魚].
교량 판교(板橋)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석교(石橋)ㆍ공사교(孔司橋)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사원 월포사(月浦祠) : 이원(李?)은 나주(羅州) 조에 보라.
홍경우(洪儆禹)의 호는 월포(月浦)이며 남양(南陽) 사람이고 벼슬은 봉사 겸 첨정(奉事兼僉正)이었다.
54권 영변대도호부 寧邊大都護府
동쪽은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21리,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1백 9리, 남쪽은 안주(安州) 경계까지 56리,
서쪽은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40리,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46리, 북쪽은 희천군(熙川郡) 경계까지 1백 2리,
운산군(雲山郡) 경계까지 21리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2리다.
건치연혁 영주(迎州)는 본래 고려의 밀운군(密雲郡)이었는데, 안삭(安朔)이라고도 한다.
고려 광종(光宗) 21년에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知州)로 삼았고, 성종 14년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며,
공민왕 15년에 연산부(延山府)로 승격시켰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규례를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무주(撫州)는
본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이었는데, 고청산(古靑山)이라고도 한다.
성종 14년에 무주방어사(撫州防禦使)라 일컬었고 고종 18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육지로 나와 위주(渭州) 옛 성에 자리잡고 가주(嘉州)에 속하였으며, 공민왕 18년에 태주(泰州)
로 이속되었다. 공양왕 3년에는 따로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무산현(撫山縣)으로 고쳤다가 세종
11년에 연산(延山)과 무산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대도호부로 하였다.
무산의 약산성(藥山城)을 읍치(邑治)로 삼고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본영으로 하여 토관(土官)을 두었다.
24년에 절제사의 영을 폐지하였다가 28년에 복구했으며, 32년에 다시 폐지했다가 노산(魯山) 때에 또 다시 복구
하여 절도사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 옛 연주(延州)의 땅을 분할하여 운산군(雲山郡)에 예속
시켰다.
진관 군(郡) 3 : 운산(雲山)ㆍ희천(熙川)ㆍ박천(博川). 현 1 : 태천(泰川).
관원 부사 : 절도사가 겸임하였다. 판관(判官)ㆍ교수 : 각 1명.
토관 도무사(都務司) 도무(都務)ㆍ교부(校簿)ㆍ전사(典事) : 각 1명. 전례서(典禮署) 장부(掌簿)ㆍ전사(典事)ㆍ
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 융기서(戎器署) 사창서(司倉署) 영작서(營作署) 감부(堪符)ㆍ관사(管事)ㆍ
섭사(攝事) : 각 1명. 수지국(收支局) 장사(掌事)ㆍ섭사 : 각 1명. 전주국(典酒局) 급사ㆍ섭사 : 각 1명. 사옥국
(司獄局) 섭사 : 2명. 진변위(鎭邊衛) 여직(勵直)ㆍ부여직 : 각 1명. 여과(勵果)ㆍ부여과ㆍ여정(勵正)ㆍ
부여정 : 각 2명. 여맹(勵猛)ㆍ부여맹 : 각 3명. 여용(勵勇) : 4명. 부여용 : 5명.
군명 밀운(密雲)ㆍ안삭(安朔)ㆍ연산(延山) 연주(延州)ㆍ무주(撫州)ㆍ무산(撫山)ㆍ고청성(古靑城)ㆍ약산(藥山)
성씨 연산 현(玄) : 의주(義州). 이(李) : 지평(砥平). 골(骨) : 강화(江華). 박(朴) : 청리(靑里). 량(梁) : 남원(南原).
최(崔) : 경주(慶州). 무산(撫山) 오(吳) : 해주(海州). 김(金) : 김포(金浦) ㆍ토산(?山) 개성(開城).
조(趙) : 백주(白州). 길(吉) : 예안(禮安). 이(李) : 염주(鹽州). 위주(渭州) 최(崔)ㆍ김(金) : 모두 경주(慶州).
이(李) : 전주(全州)
형승 모양이 쇠독[鐵甕]과 같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약산(藥山)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으뜸간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가 서로 사면을 에워싸 그 모양이 쇠독과 같다." 하였다. 하늘이 만든 성이다. : 부의 기록에, "약산은 하늘
이 만든 성이다." 하였다. 군사를 모으는 곳 : 최치운(崔致雲)의 기문에 있다.
산천 약산(藥山) : 부의 서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묘향산(妙香山) :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다.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며, 옛 기록에, "그 산에 3백 60암자가 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향산(香山)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있어 요양(遼陽)과 경계하고
있으니 산의 크기가 비길 것이 없으며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 그곳에 향나무와 사철나무가 많으며,
선불(仙佛)의 옛 자취가 남아 있다." 하였다. ○ 고려 고종 3년에 금산(金山)의 군사가 이 산에 뛰어들어 보현사
(普賢寺)를 불질렀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2천 4백여 급의 목을 베었고, 적장 지노(只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검산(檢山)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이산(耳山) : 부의 북쪽 60리에 있다.
화천강(花遷江) : 부의 동남쪽 2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10리에 이르러 어천(魚川)이 되고. 또 하나는 영원군(寧遠郡)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40리에 이르러 희천군의
봉단성(鳳丹城)에서 합류하여 부의 동쪽에 이르러 이 강이 되고, 또 남쪽으로 5~6리를 흘러 안주(安州)의 무골도
(無骨島)를 지나 남쪽으로 청천강(淸川江)에 들어간다. 향산천
(香山川) : 부의 동쪽 1백 50리에 있다. 근원은 향산에서 나와 10여 리를 흘러 어천(魚川)과 합쳐 청천강으로 들어
간다.
어천(魚川) : 부의 동쪽 60리에 있으며, 화천강의 상류이다.
구음포진(仇音浦津)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산군(理山郡)의 경계 우령(牛領)에서 나와 부의 서쪽을 지나 동쪽
으로 흘러,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진강(鎭江)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근원은 삭주(朔州)의 소자수동(所子水洞)에서 나와 태천군(泰川郡)에 이르러,
남쪽으로 흘러 30여 리에서 부의 서쪽을 지나 박천강(博川江)으로 들어간다.
장항진(獐項津)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어천(魚川)의 하류인데,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화천강으로 들어간다.
부이탑연(夫伊塔淵)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곧 구금포의 지류이다.
사탄(沙灘) : 부의 북쪽 44리에 있다. 운산군(運山郡) 온정천(溫井川)의 하류이다. 용추
(龍湫) : 부의 성 서문 밖에 있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오미자(五味子)ㆍ은어ㆍ인삼ㆍ벌꿀ㆍ잣ㆍ사향(麝香)ㆍ자초(紫草) 애끼찌[弓幹木 활
만드는 나무]ㆍ복령(茯?)ㆍ영양(羚羊)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만 6천 8백 15자, 높이가 7척이며 안에 우물과 50과 시내 셋이 있다.
봉수 율고개(栗古介) 봉수 : 부의 서북쪽 39리에 있다. 서쪽으로 태천헌의 농오리(籠吾里)에 응하고, 남쪽으로
박천군의 독산(禿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 허굉(許?)의 시에, "홀로 붉은 난간에 의지하여 모자를 비스듬히 하고, 취한 눈으로 멍하니 바라
보네. 백이(百二) 산천이 참으로 훌륭한데, 겹겹이 피어오르는 연화(煙火 밥짓는 연기)는 몇 집이나 되는고.
솔바람 소리 비를 지어 금탑(琴?)에 시끄럽고, 나무 그림자 봄을 흔들어 사창(紗窓)으로 들어오네. 이 변성(邊城)
에도 아무 일도 없으니, 춤추고 노래하며 풍경을 즐겨도 무방하리." 하였다.
누정 운주루(運籌樓) : 부의 성 안에 있다.
○ 최치운(崔致雲)의 기문에, "통판(通判) 이정(李禎)군이 나에게 이르기를, '저 약산은 사방이 높고 험하고 바위
들이 깎은 듯이 서 있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컬으며, 땅이 또한 기름지어 뽕나무와 삼[麻]을 심기에 알맞아
실로 고을을 삼을 만한 곳입니다. 또한 의주(義州)와 삭주(朔州), 강계(江界) 등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를 모으기
에 적당한 곳이므로, 태종 16년 봄 정월에 공조(工曹)가 왕의 뜻을 받들어 본도에 공문을 보내어 성을 쌓게 하였
습니다.
그때에 도안무 겸 도절제사(都按撫兼都節制使) 신공(辛公) 유정(有定)이 공사를 맡아서 감독하였는데, 성이 오래
가는 데는 돌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곧 본도에서 3만 6백 명의 부역을 내어 드디어 이 산의 돌을 가져다가
쌓았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둘레는 거의 20리나 되며, 동문ㆍ남문ㆍ수문(水門) 등 세 문에는 각각 누각을
세우고, 서문과 북문에는 대문만을 두어 2월 2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27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성안에는 곳간을 34칸이나 지어서 여러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군량으로 대비하여 두고, 혹시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다만 난을 여기에서 피하기만 하였더니, 전하(殿下)의 11년 겨울에 본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 황희(黃喜)
등이 글을 올려, '약산성(藥山城)이라는 것은 실로 하늘이 만든 성터로서 무주(撫州)와 연주(延州)의 두 고을을
합치어 한 고을로 만들어 대도호부로 부르고, 부사 판관을 두고 병마도절제사로 겸임하게 하며, 토관을 설치하여
큰 진(鎭)을 이루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상감이 그 건의에 따랐습니다. 도절제사 조공(曺公) 비형(備衡)이 공사를
감독하여 아문(衙門) 곳간을 개설하고, 영사(營舍)의 관청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사를 마쳤고, 또 아문의 남쪽에
누각을 세워 운주(運籌)라고 부르는데, 비록 부족한 정(禎)도 참여하였습니다.
이로부터는 전에 이곳을 떠났던 백성들이 모두 되돌아오고 새로 오는 백성들이 뒤를 이어 성의 주변에 묵는 밭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정월에 최정승 윤덕(潤德)이 도절제사로서 여기에서 작전을 계획하여 군마를 모아 북쪽 오랑캐를 평정하였
으며, 가을 7월에는 다시 우의정으로서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가 되어 이곳에 왔었는데, 내가 막료[佐幕]가
되었습니다.
작전 계획에 빈틈이 없었으므로 모련위도독(毛憐衛都督) 이살만(李撒滿)ㆍ답실리(答失里)와 건주위도지휘(建州
衛都指揮) 이만주(李滿住) 등이 각각 그 아우와 조카로 하여금 항복하는 글월을 보내와 궐하(闕下)에 머리를
조아렸고, 그 밖의 우두머리들도 몸소 내조(來朝)하여 성심으로 귀순하였으므로 변방의 경비가 거의 걱정없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바
야흐로 거룩하신 임금과 어진 정승이 서로 함께 다스리기를 꾀하여, 군정(軍政)을 중히 여기는 때를 당하여 그대
와 조(曺) 재상이 조정의 뽑힘을 받고 이 새 고을에 부임하여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는 방법과, 적을 막고 지키는
기구들을 칭찬하여 적을 만하고 간책(簡冊)에 실려 있는 것과 비교하여도 더욱 부끄러움이 없거늘,
하물며 나라의 명을 받들어 진율(榛栗) 숲을 헤치며, 가시덤불을 베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이렇게 큰 고을을 이루
어 놓았으니, 그 공이 어찌 옅다고 하겠는가.
오직 우리 우의정공이 선공(先公)의 업적을 이어받아 세 번이나 왕명을 받고 와서 본도를 지켜, 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단번에 흉노를 쳐부수고, 한 장의 격문(檄文)으로 오랑캐를 귀순시켜 태산 같은 공을 이루었으니,
내 비록 옹졸한 붓이나마 감히 사양하지 않고 써서 기문을 삼노라." 하였다.
결승정(決勝亭) : 부이탑진(夫伊?津) 위에 있다. 언무정(偃武亭) : 장항진(獐項津)위에 있다.
관심정(寬心亭) : 부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어천역(魚川驛) : 어천 북쪽 언덕에 있다. 본도에 딸린 다음의 21역을 찰방(察訪)한다. 소고(所古)ㆍ개평
(開平)ㆍ장동(長洞)ㆍ평전(平田)ㆍ가막(加莫)ㆍ적유(狄踰)ㆍ입석(立石)ㆍ성간(城干)ㆍ종포(從浦)ㆍ북동(北洞)ㆍ
앙토(央土)ㆍ고리(古理)ㆍ우장(牛場)ㆍ고연(古延)ㆍ벽단(碧團)ㆍ창주(昌州)ㆍ만포(滿浦)ㆍ대삭(大朔)ㆍ소삭
(小朔)ㆍ방산(方山)ㆍ초천(草川)
○찰방(察訪) 1명. 개평역(開平驛) : 부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고려 고종 3년에 금산(金山) 병(兵)이 연주(延州)의
개평역에 머물러 이어 여러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김취려(金就勵)가 검을 빼어 들고 말에 채직질하여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적의 포위를 뚫고 드나들면서 용감히 공격하였으므로 적병이 무너져 달아났다.
추격하여 개평역에 이르니 적이 역 북쪽에 복병을 두었다가 갑자기 중군을 공격하였으나, 취려가 군사를 돌려
적을 공격하니 적군이 다시 무너져 달아났다. 가을현원(加乙峴院)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돈평원(頓平院)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증 수영역 (隨營驛) : 부의 남쪽에 있다.
석교원(石橋院) : 부위 북쪽 60리에 있다.
불우 보현사(普賢寺) : 묘향산에 있다.
○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절이 헐려 다시 고치기 한두 번이 아니라고, 봄새들이 옛일 느껴서 지저귀네. 험한
멧부리 사면을 에워싸 몇 천 겹이냐, 법당이 반은 새로 지은 3백 칸이로구나.
땅을 선택하여 세운 규모는 밀조(密祖)의 생각이 깊었고 진세에 뛰어난 단청(丹靑)은 참으로 향산이로다.
부처님의 힘이 오랑캐를 항복받았으니 푸른 들판에는 전마(戰馬)도 한가하였다.
윤필암(潤筆菴) 안심사(安心寺) 금강굴(金剛窟) : 모두 묘향산에 있다. 용문사(龍門寺) : 검산(檢山)에 있다.
임정사(林井寺) 관음사(觀音寺) 서운사(棲雲寺) 원효암(元曉庵) 심적사(深寂寺) 의상암(義相菴) : 모두 약산에
있다. 만합사(滿合寺) : 이산(耳山)에 있다. 수운사(水雲寺) : 약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에서 3리에 있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무주(古撫州) :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가 5천 9백 47자이며, 무산성
(撫山城)이라고 전해 온다. 고위주(古謂州) : 부의 서북쪽 40리에 있다. 본래 낙릉군(樂陵郡)이었는데,
고덕성(古德城)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방어사(防禦使)로 하였으며, 문종 4년에 성을
쌓았다. 뒤에 주를 폐지하고 원종 2년에는 무주(撫州)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가
4천 5백 60자이며, 위천성(謂川城)이라고 전해 온다.
신풍역(新?驛) : 옛터가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고연산(古延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흥교역(興郊驛) : 옛터가 연산의 서쪽 20리에 있다. 통로역(通路驛) : 옛터가 어천(魚川) 앞 들에 있다.
출탄역(出灘驛) : 옛터가 위주에 있다.
태백산(太白山) : 옛 기록에, "옛날 천신(天神)의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서자(庶子) 웅(雄)에게 명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神檀樹) 밑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들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이 있어 늘 사람의 몸이 되기를 신에게 축원하거늘, 신이 영약을 주어 먹게 하였더니,
곰이 그것을 먹고 여자로 변하였다. 신이 임시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며,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夫婁)하고 한다. 우(禹)임금이 도산(塗山)에서 제후(諸侯)를 모을 제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공을 드리게 하였다. 뒤에 부루가 북부여(北扶餘) 왕이 되었으나, 늙도록 아들이 없어 곤연(鯤淵)에
가서 아들을 빌어, 어린아이를 얻어서 기르니 이것이 금와(金蛙)다. 금와의 후손이 전해 오다가 대소(帶素)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신무왕(大神武王)에게 멸망되었다." 하였다.
우발수(憂渤水) : 못의 이름인데, 태백산 남쪽에 있다.
○ 삼국사(三國史)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가엽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그 옛 도읍에 천제
(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을 하였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었는데,
우발수에서 여자를 만나 물었더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하고 하는데,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나이
가 나를 꾀어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가 어떤 집 안에서 나를 욕보이고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랐다고 나를 꾸짖어 마침내 여기에 귀양와서 살게 되었다.'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그를 비추는데, 몸을 옮기어 햇빛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가서 비추었다.
그로 말미암아 임신을 하여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가 그것을 내다 버렸으나 개와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그것을 품었다. 이에 그 어미에게 돌려 주어 따뜻한
곳에 싸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과 얼굴이 영특하게 생겼었다.
나이가 일곱 살이 되니,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아 백발백중하였는데, 부여 사람들이 활을 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하였다.
행인국(荇人國) :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다. 고구려 시조 6년에 오이(烏伊) 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쳐서 빼앗았
다고 하나, 지금 그 땅은 자세하지 않다.
명환 본조 최윤덕(崔潤德) : 도절제사였다 조비형(曺備衡) : 판부사(判府事)였다.
구치관(具致寬) : 도절제사였다. 신유정(辛有定) : 도절제사를 겸임했다. 이정(李禎) : 판관(判官)이었다.
인물 고려 현덕수(玄德秀) : 본관은 연주(延州)다. 쇠같이 검붉은 얼굴에 이마 양쪽이 툭 튀어나온 귀인의 상으로
[鐵面犀角], 담이 크고 지략이 있었다. 명종 때에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절령(?嶺 자비령(慈悲嶺)) 이북이 모두 호응하였다. 덕수가 고을 장수들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여러 성
의 군사를 여러 번 패배시켰다. 그 공으로 내시지후(內侍祇侯)에 임명되었으며, 나가서 안남도호부사가 되었다.
정치가 청렴 공명하고, 더욱이 요사스러운 귀신을 제사하는 일을 미워하였으므로 무당들이 관내에 들어오지 못
하였다. 들어와 도관낭중(都官郎中)이 되고, 신종(神宗) 때에 여러 번 승진하여 병부 상서가 되었다.
오세(吳世)ㆍ임만(任萬) : 지정(至正) 갑오년에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의
장수 요주(要主)가 피난민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그때 오세가 하늘에 빌고 돌을 던져 요주를 죽였으며, 임만이
그의 목을 베었다. 이에 덕흥군이 물러갔으므로, 그 공으로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본조 이영걸(李營傑) : 영락(永樂) 연간에 적병이 연주(延州)로 쳐들어와 관민이 사방으로 흩어질 때에, 부사 권갑
(權閘)의 처자들도 갈 데가 없었으므로 영걸이 감추어 두고 정성껏 봉양하였으며, 또 서울로 들어가 쌀을 팔아 4
백 80섬을 배에 싣고 와서 피난민을 먹여 살렸다. 그 공으로 공훈 패(牌)를 받았고, 그 자손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비고]
연혁 예종(睿宗) 원년 삼도(三道)를 합하여 일도(一道)로 하였으며, 영(營)은 절도사로서 부사를 겸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2년 절도사 영(節度使營)을 안주(安州)에서 옮겼다가 다시 대도호부사가 별후 영장(別後營將)을 겸
하게 하였다. 경종(景宗) 2년에 폐지하였으며, 수성장(守城將)이 중산토포사(中山討捕使)를 겸하였다.
옛날 무주(撫州)는 부(府) 서북쪽 25리이며, 지금은 무산방(撫山坊)이라고 부른다.
본조 세조 때에 덕천군(德川郡)에 소속하였다가 뒤에 다시 내속하였다. 옛날 연산(延山)은 부(府) 남쪽 30리이며,
옛날부터 여기에서 연주(延州)로 옮겼고, 대도호부사가 영변진 병마첨절제사(寧邊鎭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으며,
약산산성(藥山山城) 수성장(守城將)이다.
방면 부내방(府內坊). 오리방(梧里坊) : 동쪽으로 30리이다. 검산방(檢山坊) : 동쪽으로 90리이다.
백령방(百嶺坊) : 동쪽으로 1백 35리이다. 어천방(魚川坊) : 동북쪽으로 70리이다.
연산방(延山坊) : 남쪽으로 35리이다. 독산방(獨山坊) : 남쪽으로 45리이다. 소림방(少林坊) : 서쪽으로 40리이다.
무산방(撫山坊) : 서쪽으로 60리이다. 고성방(古城坊) : 북쪽으로 50리이다. 팔원방(八院坊) : 북쪽으로 45리이다.
신현방(新峴坊) : 북쪽으로 90리이다. 남송방(南松坊) : 북쪽으로 1백 리이다.
개평방(開平坊) : 북쪽으로 1백 10리이다.
창고 사창(司倉) 저향창(儲餉倉) : 모두 성 안에 있다. 서창(西倉) : 신성(新城) 안에 있다.
산창(山倉) : 약산성(藥山城) 안에 있으며, 북문(北門) 밖은 절벽(絶壁)이다. 동창(東倉) : 동북쪽으로 1백 리이다.
신창(新倉) : 동북쪽으로 60리이다.
어창(魚倉) : 동북쪽으로 60리이며, 대로(大路)는 여기서 시작하여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는데 4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70리이다. 개창(開倉) : 북쪽으로 1백 리이다. 문창(門倉) : 북쪽으로 1백 10리이다.
석창(石倉) : 북쪽으로 57리이며, 이곳 개평(開平)으로부터 35리이다.
무창(撫倉) : 서쪽으로 50리이며, 태천(泰川) 경계는 대로(大路)이다.
독창(獨倉) : 남쪽으로 50리이며, 소감진(疏鑒津) 북안(北岸)이다.
진보 천수진(天水鎭)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두었으며, 증군(增軍)하였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성지 철옹산성(鐵瓮山城) : 일명 약산산성(藥山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둘레가 20여 리이며, 고기(古記)에 이르기
를, "약산(藥山)의 험한 것은 동방의 으뜸이다." 하였고, 읍지(邑志)에는 이르기를, "동남의 형세가 극히 준엄하고,
남쪽은 곧 대야(大野)에 임하여, 형세가 심히 넓고 땅이 비옥하여 뽕나무와 삼[麻]을 심기에 적합하다." 하였다.
세종(世宗) 15년 옛터에다 그대로 돌로 쌓았으며, 도절제사 영을 두었고, 도체찰사 황희(黃喜)가 성의 터를 정
하고 판관 이정(李禎)이 역사를 감독하였다. 인조 11년 수축하였는데, 둘레가 2천 7백 60보(步)이고,
또 동대(東臺)의 승산창(勝山倉) 하나가 있으며, 수성장(守城將) 1명, 수첩군(守堞軍) 11초(哨), 수영패(守營牌)
5초 56이요, 서운사(棲雲寺)가 있다.
영아 별후영장(別後營將) : 본부에서 겸한다. 속읍: 영변(寧邊)ㆍ개천(价川)ㆍ운산(雲山)ㆍ희천(熙川)이다.
속진(屬鎭) : 위곡(委曲)ㆍ유원(柔院)ㆍ금성(金城)이다.
장무대(壯武隊) 병마(兵馬) 2초(哨) : 정초동오(精抄東伍) 30초, 빈일포연군(濱日布鉛軍) 4초, 수첩군(守堞軍) 5초,
화포수(火?手) 1초, 총후사(摠後士) 3초, 작대군(作隊軍) 6초, 표하군(標下軍) 1천 66명이다.
진도 결승정진(決勝亭津) : 남쪽으로 15리이며, 부이탑동(夫伊塔洞)이다.
소관진(所串津) : 동남쪽으로 20리이며, 개천(价川) 경계는 대로(大路)이다.
소감진(소鑒津) : 남쪽으로 10리이며, 안주(安州)의 경계는 대로이다. 청석진(靑石津)ㆍ장항진(獐項津) : 언무정
(偃武亭) 아래에 있다. 파수진(把守津)ㆍ하행진(下杏津)ㆍ화옹진(化翁津) : 운산(雲山) 경계이다. 월림진(越林津)ㆍ
궤용진(?龍津) : 일명 공포진(孔浦津)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진강(津舡) 9이다.
원우 동래원(東來院) : 동북쪽으로 50리이며, 대로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덕천(德川) 경계에 이르고, 소민(蘇民)
은 40리이며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동창(東倉)까지 50리이다. 향정원(杏亭院) : 동북쪽으로 80리이다.
역참 신풍천참(新?川站) : 북쪽으로 20리이다. 행장참(行場站) 황경래참(黃京來站).
누정 대승정(大勝亭) : 성 안에 있다. 사절정(四絶亭) : 개평역(開平驛)에 있다. 철옹관(鐵甕館) : 객관에 있다.
은송정(隱松亭) : 성 안에 있다.
사원 약봉서원(藥峯書院) : 숙종(肅宗) 무진년에 세웠으며, 정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조광조(趙光祖) : 문묘를 보라. 남악사(南岳祠) : 현덕수(玄德秀)는 고려 때 사람이며, 윤거(尹居)는 본조 사람이다.
수충사(酬忠詞) : 정종(正宗)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석 휴정(釋休靜).
운산군 雲山郡
동쪽으로 영변부(寧邊府) 경계까지 59리, 남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34리, 북쪽으로 이산군(理山郡) 경계까지 81리다.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9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운중군(雲中郡)인데 : 고원화진(古遠化鎭)이라고도 하였다. 광종 때에 위화진(威化鎭)이
되었고, 성종 14년에는 운주방어사(雲州防禦使)로 일컬었으며. 고종 18년에는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 안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에 육지로 나와 가산 서촌(嘉山西村)에 임시로 머무르면서 연산부(延山府)에 예속
되었으며, 공민왕 20년에 다시 군으로 되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세조 5년에는 없애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8년에 복구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운양(雲陽)ㆍ운중(雲中)ㆍ원화ㆍ위화ㆍ운주
성씨 본군 강(康) : 진주(晉州)ㆍ신주(信州). 윤(尹) 김(金)ㆍ음(陰) : 모두 평산(平山). 김(金) : 상주(尙州)ㆍ
청주(淸州). 최(崔) : 안악(安岳)ㆍ해주(海州). 송(宋) : 영월(寧越). 변(邊) : 고부(古阜). 음(陰) : 음(陰竹)
산천 백벽산(白碧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꼭대기에 용지(龍池)가 있어 가물 때에 비를 빈다.
운대산(雲臺山)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꼭대기에 용연(龍淵)이 있어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가물면 비를 빈다.
동천(東川)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산군(理山郡) 경계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벽동군(碧潼郡)경계에서 나와 영변부의 사탄(沙灘)에 이르러 합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같은 부의 구음포
(仇音浦)로 들어간다.
온정천(溫井川)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운대산에서 나와 영변부의 사탄으로 들어가는데, 곁에 온천이 있다.
평한천(平限川)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백벽산에서 나와 영변부의 구음포로 들어간다.
약수(藥水)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물이 아주 차며, 어떤 병이든 고칠 수가 있다.
토산 궁간상(弓幹桑)ㆍ실[絲]ㆍ삼[麻]ㆍ영양(羚羊)ㆍ복령(茯?)ㆍ오미자ㆍ인삼ㆍ벌꿀ㆍ송이버섯ㆍ석이ㆍ
쏘가리[錦鱗魚]ㆍ여항어(餘項魚)
학교 향교 :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역원 고연역(古延驛) : 고연주(古延州)에 있다. 차유원(車踰院) : 군의 북쪽 60리에 있다.
우계원(牛界院) :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우원(牛院) : 군의 동쪽 60리에 있다.
불우 반야사(般若寺) : 백벽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백벽산성(白碧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5백 69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직동 토성(直洞土城)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둘레가 6천 99척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운산(古雲山) : 가산군(嘉山郡)의 서쪽 40리에 있다. 본군에서 이틀 길 거리인데, 뭍으로 나와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다. 고연주(古延州)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연주(延州)였는데, 본조에 와서 영변부에 합치되
었다가 세조 때에 떨어져 나와 소속되었다.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가 8천 5백 89자이며, 지금은 폐지되
었다.
옥아리역(玉兒里驛) : 옛터가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운반역(雲畔驛) : 옛터가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비고]
방면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 25리이다. 남면(南面) : 30리이다. 성동면(城東面) : 서북쪽으로 40리이다.
위곡면(委曲面) : 북쪽으로 90리이다. 고연주면(古延州面) : 북쪽으로 70리이다.
고운산면(古雲山面) : 서남쪽으로 1백 50리이며 정주목(定州牧)이다. 동쪽 경계는 가산(嘉山)이며, 서남쪽 경계
는 해변(海邊)이다. 고려 원종(元宗) 2년 육지에 나와 우거(寓居)한 땅이다.
창고 본창(本倉) : 읍내(邑內)에 있다. 성창(城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위곡창(委曲倉) : 북쪽으로 60리이다.
고연주창(古延州倉) : 고연주(古延州) 토성(土城) 안에 있다. 산창(山倉) :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에 있다.
해창(海倉) : 고운산면(古雲山面)에 있다. 신창(新倉) : 동쪽으로 2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80리이다.
토산 자초(紫草)
역참 관문참(官門站) 이성동참(梨城洞站) : 북쪽으로 30리이다. 장성동참(長城洞站) : 북쪽으로 70리이다.
진도 화옹진(化翁津) : 남쪽으로 15리이며, 영변 대로(寧邊大路)가 통한다.
교량 마전탄교(麻田灘橋)는 동쪽으로 15리이고, 온정교(溫井橋)는 북쪽으로 45리이며, 화옹정교(化翁亭橋)는
겨울에는 다리[橋], 여름에는 배[舡]가 있다.
능묘 연왕 풍홍묘(燕王馮弘墓) : 동쪽으로 10리이며, 구봉산(九峯山)의 서쪽이고, 읍지(邑志)를 위만(衛滿)이
만들었으며 묘(墓)를 속칭(俗稱)하여 위만동(衛滿洞)이라 한다.
살피건대, 문제(文帝) 원가(元嘉) 13년 위(魏) 나라가 연(燕) 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연왕(燕王) 홍분(弘奔)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24년이 된다. 왕 연주(燕主)는 평곽(平郭)에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북풍(北?)으로 옮겨
살다가 2년에 죽었다.
희천군 熙川郡
동쪽으로 강계부(江界府)까지 1백 19리, 북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1백 8리, 남쪽으로 영변부 경계까지 46리,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94리, 서쪽으로 이산군(理山郡) 경계가지 7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2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청새진(淸塞鎭)이었는데. 고종 4년에 거란(契丹)의 군사를 막는 데 공이 있었다 하여
위주방어사(威州防禦使)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에게 투항하였다 하여 희주(熙州)로
개칭하고 개주(价州) 겸관(兼官)을 삼았으며, 본조 태조 5년에 갈라서 군을 두었고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위성(威城)ㆍ청새(淸塞)ㆍ위주(威州)ㆍ희주(熙州)
성씨 본군 김(金) : 온천(溫泉). 신(申) : 동주(洞州). 오(吳) : 해주(海州).
산천 백산(白山) : 군의 북쪽 1백 8리에 있다. 산 동쪽에는 두첩굴(頭疊屈)이 있으며, 산허리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흰돌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적유령(狄踰嶺) : 군의 북쪽 1백 50리에 있다. 강계부와의 경계에 있으며,
백산의 동쪽 등성이다.
구인성령(?蚓城嶺) : 군의 서쪽 74리, 이산군과의 경계에 있다. 호현(狐峴) : 군의 서쪽 45리, 영변부와의 경계에
있다.
평전령(平田嶺) : 군의 동남쪽 93리, 영원군 경계에 있다.
원림현(元林峴) : 군의 남쪽 22리, 영변부 경계에 있다. 남산(南山)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묘향산(妙香山) : 군의 남쪽 59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영변부에 보라.
입암(立巖) : 장동(長洞)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조그만 봉우리가 외로이 솟아 있는 모양이 송곳을 세워 놓은 듯
하며, 물가에서의 높이가 세 길이 넘는다.
서천(西川) : 군에서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백산에서 나와 영변부의 어천(魚川)으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 군의 동쪽 50리, 원홍리(元洪里)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영양(羚羊)ㆍ옻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ㆍ눌치[訥魚]ㆍ복령ㆍ벌꿀ㆍ오미자ㆍ
인삼ㆍ잣ㆍ사향(麝香)ㆍ담비[貂]ㆍ날다람쥐[靑鼠]ㆍ송이버섯ㆍ물개[水獺]ㆍ애끼찌[宮幹木]
성곽 읍성 :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9천 7백 자인데, 안에 샘 일곱이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쌓은 것인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학교 향교 :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장동역(長洞驛) : 군의 동쪽 42리에 있다. 적유역(狄踰驛) : 적음령 밑에 있다.
평전역(平田驛) : 평전령 밑에 있다. 적유령원(狄踰嶺院).
불우 원명사(圓明寺)ㆍ광제사(廣濟寺) : 모두 묘향산 북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동쪽 4리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봉단성(鳳丹城) : 군의 동쪽 64리에 있다. 예전에 봉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인물 본조 김우(金宇) :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희천군(熙川郡)에 봉하였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제영 앉아서 향산(香山)을 한 눈 안에 마주한다 : 박은(朴?)의 시에, "작은 누각 동녘에서 여울 소리는 흐느끼는데,
앉아서 향산을 한 눈 안에 마주한다." 하였다. 구름 그림자는 처마 사이로 떨어진다 : 홍여(洪汝)의 시에, "여울
소리는 베갯머리에 이어 있고, 구름 그림자는 처마 사이로 떨어진다."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면(邑內面)은 전에는 읍상(邑上) 읍하(邑下) 두 면(面)으로 불렸다. 동면(東面)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남면(南面) : 30리이다. 서면(西面) : 80리이다. 북면(北面) : 1백 20리이다. 동창면(東倉面) : 1백 40리이다.
서동면(西洞面) : 50리이다. 진면(眞面) :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장동(長洞) : 동쪽으로 80리이다.
유원면(柔院面) : 군(郡)에서 1백 10리 떨어져 있으며, 총목(總目)에 실렸다.
창고 군창(軍倉) : 동쪽으로 2리이다. 진창(眞倉) : 동쪽으로 35리이다. 신창(新倉) : 동쪽으로 92리이다.
석창(石倉) : 동쪽으로 63리이다. 적창(狄倉) : 북쪽으로 95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53리이다.
심창(深倉) : 서북쪽으로 42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42리이다.
진보 유원진(柔遠鎭) : 동쪽으로 1배 15리이다. 인조(仁祖) 원년에 비로서 별장을 설치하였으며. 숙종(肅宗) 원년
첨사 병마동 첨절제사(僉使兵馬同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군총(軍總)이 2백 84이고, 창고가 3이며, 곡총(穀總)
이 2천 9백 34석(石)이다.
누정 대향루(對香樓) : 군내(郡內)이다. 초연정(超然亭) : 남쪽으로 6리이다. 옥류각(玉流閣) : 남쪽으로 6리이다.
토산 연석(硯石)
역참 군내역(郡內驛) : 군 안에 있으며, 말[馬] 2필[匹]이다. 관문참(官門站)ㆍ
법흥참(法興站) : 동북쪽으로 35리이다. 복죽참(福竹站) : 동북쪽으로 63리이다.
흑참(黑站) : 군 북쪽으로 55리이다. 백산참(白山站) : 군 북쪽으로 1백 25리이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 남쪽으로 5리이다. 서천교(西川橋) : 서쪽으로 5리이다.
송관지교(宋串之橋) : 남쪽으로 35리이다. 석홍교(石虹橋) : 동쪽으로 25리이다. 용교(龍橋) : 남쪽으로 90리이다.
사원 중현서원(衆賢書院) : 선조(宣祖) 병자년에 세웠으며, 숙종(肅宗)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 모두 문묘를 보라.
박천군 博川郡
동쪽으로 영변부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12리,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12리, 남쪽으로
안주(安州)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가산군(嘉山郡)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박릉군(博陵郡)이다. : 고덕창(古德昌)이라고도 한다. 성종 14년에 박주방어사라 일컬었
으며, 고종 18년에는 몽고병을 피하여 바다 안의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에 뭍으로 나와 가주(嘉州)에 속
하였고, 공민왕 20년에 다시 군으로 삼았고, 본조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세조 5년에는 군이 쇠잔하다고 폐하여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10년에 복구하였다.
관원 군수 훈도 : 각 1명.
군명 박릉(博陵)ㆍ박주(博州)ㆍ덕창(德昌)
성씨 본군 김(金) : 남해(南海). 김포(金浦) 두원(荳原). 강(康) : 나주(羅州)
산천 와룡산(臥龍山) : 군의 동쪽 3리에 있는 진산인데, 또 고방산(高方山)이라고도 한다.
봉린산(鳳麟山) : 군의 남쪽 18리에 있는데, 심원산(深源山)이라고도 한다.
박천강(博川江) : 옛 이름은 대령강(大寧江)인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고도 써 있다.
군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근원은 창성부(昌城府)의 부운산(浮雲山)에서 나와 태천현을 지나, 안주(安州)의 노강
(老江)과 합쳐 바다로 들어간다. 또 가산군(嘉山郡)조에 보인다.
○ 이색(李穡)의 시에, "산이 깊다, 어느 곳이 참 근원이냐. 백제(白帝)의 가을바람이 애를 끊는구나. 한 줄기 푸른
물결 바닥까지 맑은데, 낚시꾼의 말소리 달 뜨는 저녁에 들려오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지척의 맑은 강물이 두 길을 갈라 놓았는데, 강가의 정자가 흰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네.
사람의 그림자 어지러이 빙감(氷鑑)으로 돌아들고, 호탕한 봄물은 옥호(玉壺)에 담기는구나.
전야(田野)의 풍광이 사신을 맞이하니,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주방(廚房)에서 나오는구나.
조각배가 서호(西湖)의 흥에 감(減)하지 않으나, 여기서는 문득 시재주[詩才]가 노소(老蘇 소동파를 말한다)의
부끄러움 도리어 우습구나." 하고, "3월 강가에는 벌써 얼음이 녹아, 한 조각 작은 배에 그대와 함께 오르노라.
빈 산 고요하여 가끔 새소리 들리는데, 옛 절은 황량하여 중도 아니 보인다. 금성(禁城)에 꽃이 피어 봄이 바다
같고, 승지(勝地)에서 잔치를 베푸니 술이 못 같구나. 풍광이 모두 좋아 싯거리[詩料]를 더하는데,
미인(오 나라의 미인)이 마름 캐는 노래[秉菱]를 부를 필요가 있으랴."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박천강을 건너 와서 우선 박천강에서 쉬노라니, 정자 밖에는 소나무가 무더기로 푸르고,
강가에도 풀이 어지럽게 푸르네. 물속의 고기는 상에 자꾸 들어오고, 지저귀는 새소리도 참으로 들을 만하구나.
잔치 파하고 배에 올라 떠나가니, 시가 이루어지자 술이 쉬이 깨는구나,"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다 지나려면 며칠이나 걸리는 험한 산이뇨, 말 위에서 시냇물 소리를 기꺼이 듣노라.
아래 위가 맑게 잠기었으니 천 이랑이 푸른데, 동남을 가로지르니 한 물굽이[灣]가 옥 같구나. 흔들흔들 노를
저어 바로 배가 청작(靑雀) 나란히 건너가는데, 분주히 다님[驅馳]이 백구(白鷗)의 한가로움만 못하구나.
도도(滔滔)함이 도무지 까닭 없다 말하지 말라, 일찍이 선사(仙? 신선이 탄 뗏목)와 함께 만리에서 돌아왔노라."
하였다. 연지지(蓮支池)ㆍ맹지통지(孟之筒池) : 모두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강금지(江金池) : 군의 남쪽 35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벌꿀ㆍ옻ㆍ닥[楮]ㆍ왕골[莞草]ㆍ붕어[?魚]ㆍ숭어ㆍ홍어(洪魚)ㆍ굴ㆍ조개ㆍ자초(紫草)
봉수 독산(禿山) 봉수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북쪽은 영변부의 율고개(栗古介)에 응하고, 남쪽은 안주(安州)의
성황당에 응한다. 덕간곶(德間串) 봉수 : 군의 남쪽 49리에 있다. 서쪽은 정주(定州)의 사읍동음(沙邑冬音)에
응하고, 남쪽은 안주의 호혈(虎穴)에 응한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원우 광통원(廣通院)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대장사(大藏寺) : 대장산에 있다. 심원사(深源寺)ㆍ극락사(極樂寺)ㆍ
서공사(西孔寺) : 모두 봉린산(鳳麟山)에 있다. 영천사(靈泉寺) : 와룡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박릉성[古博陵城] :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7천 3백 55자이며, 안에 샘이 아홉, 못 셋이 있다.
장림역(長林驛) : 옛터가 군의 서쪽 23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장림역에서 잠시 쉬면서, 옷깃을 열고 낮의 서늘함을 취하네. 다발 꼴은 말을 먹이어 건장
하고, 잔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빛내네. 집은 낡았는데 산이 다가 있고, 뜰이 비었는데 해 그림자가 절로 길구나.
사람들은 말하기를 일찍이 임금 수레가 머물렀다는데, 쉬던 곳이 높은 산 위에 있다네."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면(郡內面) : 고을에서 사방 10리 거리에 있다. 동면(東面) : 동남쪽으로 30리이다.
남면(南面) : 40리이다. 덕안면(德安面) : 남쪽으로 5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해창(海倉) : 서남쪽으로 40리이다. 동창(東倉) : 남쪽으로 20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12리이다.
역원 광통원(廣通院) : 북쪽으로 20리이며, 군(郡) 남쪽에 있다. 동남쪽 역참은 안주(安州)의 관문참(官門站)이고,
서쪽 역참은 가산(嘉山)의 관문참이다.
진도 진두진(津頭津) : 서남쪽 20리에 있으며, 서쪽으로부터 가산(嘉山)까지 20리인데 대로(大路)이다.
풍포진(楓浦津) : 동남쪽으로 30리이며, 안주(安州) 경계는 대로이다.
우비탄진(雨飛灘津) : 서쪽으로 5리이며, 태천(泰川) 경계는 중로(中路)인데 이상의 나루[津]에는 배[舡]가 6척이
있다.
교량 장천교(長川橋) : 남쪽으로 2리이다. 황병천교(黃柄川橋) : 남쪽으로 8리이다.
석교(石橋) : 서쪽으로 18리이다. 구룡천교(九龍川橋) : 남쪽으로 18리이다.
장평천교(長平川橋) : 남쪽으로 30리이다. 가통교(加通橋) : 동남쪽으로 35리이다.
사원 지천사(遲川祠) 최명길(崔鳴吉) : 자는 자겸(子謙)이며, 호는 지천(遲川)이고, 전주(全州) 사람이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형(文衡)을 관장하였다.
태천현 泰川縣
동쪽으로 영변부 경계까지 36리, 남쪽으로 가산군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구성부(龜城府) 경계까지 21리,
북쪽으로 운산군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광화현(光化縣)이다. : 영삭(寧朔) 또는 연삭(連朔)이라고도 한다. 광종 21년에 태주방어사
(泰州防禦使)로 일컬었으며, 고종 18년에는 몽고병을 피하여 바다 안의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에 육지로
나와서는 가주(嘉州)에 속하였고, 공민왕 15년에는 무주(撫州)ㆍ위주(渭州) 두 주를 본군에 소속시켜 태주사
(泰州事)로 일컬었다가, 신우(辛禑) 7년에 도로 두 주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군으로 하고, 성종 3년에는 고을 사람이 계모[後母]를 죽이고 또
그 아비까지 죽이려 하였으므로 현감(縣監)으로 격하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광화(光化)ㆍ영삭(寧朔)ㆍ연삭(連朔)ㆍ태주(泰州)
성씨 본현 변(邊) ㆍ황(黃) : 모두 황주(黃州). 최(崔)ㆍ임(任) : 모두 풍주(?州). 김(金) : 풍주(?州)ㆍ상주(尙州)ㆍ
평주(平州). 이(李) : 삼화(三和)ㆍ거령(居寧)ㆍ당악(唐嶽). 곽(郭) : 삼등(三登). 한(韓) : 공주(公州).
문(文) : 용강(龍岡). 지(池) : 충주(忠州). 강(康) : 안악(安岳).
산천 향적산(香積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삼각산(三角山) :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꼭대기에서 샘이 솟아나 동쪽으로 30여 리를 흘러 오지천(烏知川)으로 들어간다.
퇴라산(退羅山)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양화산(陽和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오지천천(烏知遷川)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창성부(昌城府)의 청산(靑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삭주부(朔州府)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고구주(古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와 현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박천군의 대정강(大定江)으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 퇴라산 밑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벌꿀ㆍ인삼ㆍ자초(紫草)ㆍ오미자ㆍ잣[海松子]ㆍ사향(麝香)ㆍ복령(茯?)ㆍ애끼찌[弓幹木]ㆍ옻[漆]ㆍ
영양(羚羊)ㆍ오옥(烏玉) : 현의 남쪽 장림리(長林里)에서 나온다.
신증 누정 척서정(滌暑亭) : 객관 동쪽에 있는데, 그 밑에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봉수 농오리(籠吾里) 봉수 : 서쪽으로 구성부(龜城府)의 고성(古城)에 응하고, 동쪽으로 영변부의 율고개(栗古介)
에 응한다.
원우 퇴여원(退餘院) : 현의 서쪽 23리에 있다. 신증 와동원(瓦洞院) :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불우 양화사(陽化寺) : 양화산에 있다. 송림사(松林寺) : 삼각산에 있다. 화장사(華藏寺) 원각암(圓覺菴)ㆍ
원적암(圓寂菴) : 모두 향적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성(古城) : 현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둘레가 6천 6백 74자이다.
농오리 산성(籠吾里山城)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3백 69자인데, 안에 샘 셋이 있다.
속칭 고성(姑城)이라고 한다.
인물 고려 변여(邊呂) : 고종 19년에 몽고병이 송경(松京)을 포위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였는데, 적이 배를
만들어 쳐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때 변여가 향호(鄕戶)로 있다가 붙잡혀 적이 길을 물으면서 단근질[?烙]까지
하였으나, 물길이 매우 험하여 배를 타지 못한다고 답하였더니, 적이 그것을 믿고 배를 불사르고 물러갔다.
그러므로 곧 상장군(上將軍)의 벼슬을 주었다.
효자 본조 은시(恩時) : 수군(水軍) 광우(光右)의 딸이다. 21살 때에 그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술에 타서 먹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비고]
방면 현내면(縣內面) : 사방으로 10리이다. 동면(東面) : 40리이다. 남면(南面) : 40리이다. 서면(西面) : 35리이다.
북면(北面) : 50리이다. 장림면(長林面) : 남쪽으로 50리이다.
창고 현창(縣倉) : 북쪽으로 2리이다. 동창(東倉) : 북쪽으로 20리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25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서창(西倉) : 남쪽으로 20리이다. 신창(新倉) : 서쪽으로 20리이다.
토산 홍화(紅花)
진도 관적강진(串赤江津)ㆍ소용탄진(所用灘津)ㆍ내홍진(內紅津) : 이상 나루[津]에는 배[舡]가 4척이 있다.
교량 내강교(內江橋) : 동쪽으로 5리이다. 소용탄교(所用灘橋) : 서남(西南)쪽으로 5리이다.
원탄교(院灘橋) : 북쪽으로 25리이다. 달탄교(達灘橋) : 남쪽으로 7리이다.
사원 둔암서원(遯菴書院) : 선우협(鮮于浹)은 평양(平壤)을 보라. 김익서(金翼序)는 처음 이름이 대진(大振)이며,
만학재(晩學齋)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성천도호부 成川都護府
동쪽으로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경계까지 1백 26리, 남쪽으로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38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42리, 서쪽으로 은산현(殷山縣) 경계까지 46리, 북쪽으로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65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비류(沸流)와 송양(松讓)의 옛 서울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북부여(北扶餘)로부터
와서 졸본천(卒本川)에 도읍할 때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였으므로 드디어 다물도(多勿都)를 설치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로 하였다. : 고구려 말에 옛 땅을 복구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종 14년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고, 현종 9년에 성주방어사로 오다가 뒤에 지군사로 하였다.
본조 태종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금 예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세조 때에 진을 두었다.
진관 군 5 : 덕천(德川)ㆍ개천(价川)ㆍ자산(慈山)ㆍ순천(順川)ㆍ상원(祥原). 현 5 : 양덕(陽德)ㆍ맹산(孟山)ㆍ
삼등(三登)ㆍ강동(江東)ㆍ은산(殷山).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
군명 비류(沸流)ㆍ다물(多勿)ㆍ졸본부여(卒本扶餘)ㆍ강덕진(剛德鎭)ㆍ송양(松讓)ㆍ성주(城州)
성씨 본부 이(李)ㆍ김(金)ㆍ최(崔)ㆍ송(宋)ㆍ변(邊)ㆍ황(黃) : 모두 속(屬), 이(李) : 수안(遂安). 송(宋) : 봉주(鳳州).
형승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 : 삼국사(三國史)에 있다.
산천 검학산(劍鶴山) : 부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좌우의 낭떠러지가 칼 같고 학같이 생겼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회산(檜山) : 부의 북쪽은 70리에 있다. 석벽(石壁)의 둘레가 30리나 되는데, 그 안에 흙빛이 붉은 언덕이 펀펀하고
넓으며, 큰 시내가 그 밑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컫는데, 1천 명의
군사를 그 안에 수용할 만하다.
백령산(白嶺山) :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으며. 산속에 굴이 있다.
약수산(藥水山) : 부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산 위에 연못이 있다.
향풍산(香風山) : 부의 동북쪽 30리에 있는데, 가이산(加耳山)이라고도 한다.
구룡산(九龍山) :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삼등현(三登縣)에도 보라. 오운산(五雲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봉두산(鳳頭山)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흘골산(紇骨山) : 부의 서북쪽 2리에 있다. 12봉우리가 오기종기 모여 있는데, 세상에서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
이라 부른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강 위의 여러 봉우리는 검처럼 뾰족하고, 봉우리 앞의 강물은 쪽[藍]을
풀어 놓은 듯하네." 하였다.
박연(博淵) : 구룡산 위에 있으며. 둘레가 40자이다. 가물 때에 범의 머리를 그 속에 잠그면 감응이 있다.
비류강(沸流江) : 곧 졸본천(卒本川)인데, 속칭 유거의진(遊車衣津)이라고 하며, 객관 서쪽 30보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의 오강산(吳江山)에서 나오고,
또하나는 맹산현(孟山縣)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부의 북쪽 30리 되는 곳에서 합류,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날 제 산 밑에 굴 넷이 있는데, 물이 그 굴 속을 뚫고 흘러 비등(沸騰)하여 서쪽으로 나가
므로 비류강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또 자산군(慈山郡)의 우가연(禹家淵)과 합하여 대동강(大洞江)으로 들어간다.
○ 고구려의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固)를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를 피하여 집을
나가서 남의 집의 하인이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봉상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아들여 왕위에 올리려고 조불(祖弗)
소우(蕭友) 등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다. 비류강가에 이르러 찾아 보았더니, 한 사람이 그 모습은 비록 여위고
쇠약하나 거동이 보통이 아니므로 소우 등이 나아가서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재상들과 여러
신하가 의논하여 폐하고, 왕손께서 인자하시어 대업을 이을 만하므로 신들을 보내어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습
니다."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 "나는 야인(野人)이요, 왕손이 아니다." 하니, 소우 등이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왕손에 대한 바람이 매우 간절하오니 의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마침내 맞이하여 돌아와서 왕위
에 올렸으니 이가 곧 미천왕(美川王)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노래와 춤이 강을 가로질렀는데 지는 해는 붉구나. 풍류와 기개(氣槪)는 제공(諸公)
들의 것이로구나. 뉘 능히 고당부(高唐賦)를 화답하여 이루겠느냐, 운우(雲雨)가 의연하니 무산 십이봉이네."
하였다. 온천(溫泉) : 부의 서쪽 약수산 밑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화룡(火龍)은 물을 뿜으며 땅 밑에 잠겨 있고, 작은 골짜기는 봄을 머금어 별유천
(別有天)이로구나. 목욕하고 나서 몸과 마음에 티가 없으니, 무우(舞雩)에서 돌아오는 흥이 참으로 유연(悠然)
하구나." 하였다.
토산 실ㆍ삼ㆍ백옥(白玉) : 백령산 바위굴에서 나온다. 벌꿀ㆍ인삼ㆍ송이버섯ㆍ사향ㆍ잣ㆍ옻ㆍ오미자ㆍ자초
(紫草)ㆍ닥[楮]ㆍ복령(茯?).
성곽 흘골산성(紇骨山城) : 강선루(降仙樓) 서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송양(松讓)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1천 명의 군사를 능히 수용할 수가 있으며, 비류강 물이 그 밑을 안고 돈다. 고려 태조 때에 돌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백 10자 , 높이가 5자이며, 군창(軍倉)이 있고, 또 궁궐의 옛터가 있다.
누정 강선루(降仙樓) : 객관 서쪽 모퉁이에 있다. 비류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서쪽 언덕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것이 있다. ○ 이원(李原)의 시에, "술이 있으니 주천(酒泉)을 물어 무엇하랴, 푸른 강가에 잔
들고 시 읊기가 가장 마땅하네. 천년이라 궁벽한 땅 풍연(風煙) 예스럽고, 십 리나 둘러 있는 바위에는 나무들이
푸릇푸릇. 수면(水面)이 처음 불었으니 밤 지나갔고 산 모습이 수척하네. 해 지니 벌써 가을이로구나.
문호(文豪)가 그날 벽 위에 시를 써 두었는데, 화답하려고 읊조려보다가 보니 문득 망연(?然)하구나." 하였다.
종공(宗工)은 정몽주를 가리킨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 앞으로 돌아
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하여라.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 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하였다.
평관대(平寬臺) : 흘골산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원우 온정원(溫井院) : 온천 곁에 있다. 성은원(成殷院) : 부의 서쪽 55리에 있다.
보강원(保彊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영빈원(迎賓院) :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
신증 교량 귀룡교(貴龍橋) : 객관 앞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ㆍ안동사(安東寺) : 모두 검학산(劍鶴山)에 있다 보현사(普賢寺) : 약수산에 있다.
정진사(淨進寺) 향수암(香水菴) : 모두 향풍산(香風山)에 있다. 월정사(月淨寺) : 오운산(五雲山)에 있다.
청량사(淸?寺) : 백운산에 있다. 묘운사(妙雲寺) : 학궁산(鶴宮山)에 있다.
망일사(望日寺) : 봉두산(鳳頭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 오봉산(五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흘골산에 있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졸본천(卒本川) : 삼국사(三國史)에,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아들 7형제가 있어 주몽(朱蒙)과 함께 놀았
는데,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그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으면서, 또한 용기가 있으니 제거하소서.'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게 하니,
주몽은 말 먹이는 꼴과 콩을 더하고 덜하여 좋은 말은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살찌게 하였더니, 왕은 늘 자기는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는 여윈 놈을 주었다.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에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잡은 것은 언제나 많았으므로 여러 왕자들이 그를 꺼리어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 낌새를
알고 타이르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너의 재주로 어디에 간들 안 되겠느냐.'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과 함께 집을 떠났다. 엄호수(淹?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나 다리가 없는데, 뒤쫓아 오는 군사가 다가옴을 염려하여 빌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자인데, 오늘 난을 피하여 여기에 왔으나 뒤쫓는 자가 따라 잡으려 하오니 어찌하오리까.' 하였더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주몽이 건너갈 수가 있었다.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재사(再思)ㆍ무골(武骨)ㆍ묵거
(?居) 등을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큰 명령을 받고 나라를 세우려 하는데, 이 3현(賢)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
의 뜻이 아니겠소.' 하고,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하므로 거기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조그마한 집을 짓
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는데, 또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도 일컫는다.
○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임신하였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유리(類利)인데, 어렸을 적부터 기이한 절조(節操)가 있어 탄환(彈丸 옛날 새를 잡는데 쓰던 물건)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밖에 나가 놀다가 참새를 쏘면서 잘못하여 물 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맞혔다.
그 여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 없이 자라 이렇게 거칠다.' 하였다. 유리는 부끄럽게 여기고 동그란 진흙
덩이를 쏘아 뚫어진 물동이의 구멍을 막아 주고, 돌아와 그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니,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는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아 남쪽 땅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일으키고 왕이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떠나면서 나에게,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고개, 일곱 골짜
기의 돌 위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얻은 자가 곧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했더니,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두루 찾아 보았으나 얻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듣고 가서 보았더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으므로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는 일곱 모[稜]이고, 돌 위의 소나무는 기둥이로구나.' 하고 곧 기둥 밑을 찾아서 부러진 검(劍) 한 조각을 얻었
다. 드디어 옥지(屋智)ㆍ구추(勾鄒)ㆍ도조(都祖) 등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주몽을 뵙고 그 검을 올리었다.
주몽이 간직해 두었던 부러진 검을 꺼내 맞추어 보니 과연 들어맞았으므로 곧 뒤를 이을 아들로 삼았다." 하였다.
비류국(沸流國): 동명왕 주몽이 처음 졸본에 이르러, 비류수 위에 푸성귀 잎사귀가 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냥하면서 가서 찾아보았더니, 과연 비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왕 송양(松讓)이 주몽
의 용모가 비범함을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외딴 해외(海外)에 있어 일찍이 군자(君子)를 보지 못하였었는
데,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니,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서쪽 나라의 왕이오.
감히 군왕(郡王)께 묻노니 누구의 뒤를 이었소이까." 왕이 이르기를, "나는 신선의 후손으로서 여러 대로 왕 노릇
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땅이 좁아서 두 임금을 용납하기에는 부족하고, 당신은 도읍을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나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였다. 주몽이 "과인은 천재의 뒤를 이었고, 지금 왕은 신의 자손
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 된 것이니, 만약 나에게 귀순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 하였다.
왕은 주몽이 여러 번 천손(天孫)이라고 하는 말에 속으로 의심을 품고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당신과 함께
활쏘기를 해 보고 싶소." 하고는 사슴을 그려서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의 화살은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
가지 못하였다. 주몽이 옥가락지를 1백 보 밖에 걸어 놓고 쏘아 기왓장 부수듯이 깨뜨리니, 왕이 크게 놀라,
도읍을 세운 선후에 따라 부용(附庸)을 삼고자 하였다.
주몽이 궁실을 짓는데 썩은 나무로 기둥을 하여 천 년이나 묵은 것 같이 보였으므로, 왕은 마침내 감히 다투려
하지 않았다. 골령(?嶺) : 동명왕 3년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서 일어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수천 명의 사람
소리만 들리면서 토목공사를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는 흩어지고 성과 궁대(宮臺)가 이루어졌다.
해원(蟹原) : 주몽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아다가 해원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주문을 읽기를, "하늘
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왕의 도읍을 물속에 잠가 버리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니, 그 사슴의 슬피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어 7일 동안 큰 비가 내렸다. 송양(松讓)의 도읍이 물속에 잠기
었으므로 왕은 갈대 새끼를 가로 흘리고 오리말[鴨馬]을 타고, 백성은 그 새끼를 잡았는데, 주몽이 채찍으로 물
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졌다. 양곡(?谷) :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에게 두 왕비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라 한다. 두 왕비가 사랑 다툼을 했으므로 왕은 양곡에 동ㆍ서 두 궁을 짓고 각각 살게
하였다. 뒤에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그동안에 두 왕비가 서로 싸우며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漢) 나라의 종년으로서 어찌 그리 무례하냐." 하였더니,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
러워 한 나라로 도망하여 버렸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몸소 뒤쫓아 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쉬면서 꾀꼬리[黃鳥]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껴지는 것이 있어 노래부르기를,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따르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더불어 돌아갈꼬." 하였다.
명환 본조 윤승해(尹承解) : 부에 세력을 가진 무리가 관기(官妓)를 멋대로 죽이는 일이 있으나, 전후의 사명을
받드는 자들이 결단성이 없어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윤승해가 그 주모자를 조사하여 죽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부쳤더니, 온 고을이 평안하여졌다. 신영손(辛永孫) : 부사다.
신증 민효증(閔孝曾)
열녀 본조 난공(卵公) : 정두언(鄭豆彦)의 아내다. 두언이 범에게 잡혀갔는데, 난공이 도끼로 범을 죽이고 남편을
구하였다. 이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성곽은 의연한데 학은 갔다가 오리 :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신인(神人)의 옛 고을이 몇 봄을 지냈는고.
성곽은 의연하여 학은 갔다가 오네. 경치와 풍류는 이 세상에 보던 것이 아닌데, 구경하고 성곽을 지획(指?)한
이는 누구이던가. 옥비녀 미인들 모시는 술자리는 두 척 배 나란하고, 채령(綵嶺)의 신선님들 줄 지은 배에 벌여
있네. 눈에 그윽한 강산은 한 폭의 그림이요, 절세[傾城]의 명기(名妓)들은 천 무더기의 비단이로다. 푸른 물결
그림자 속에는 부용막(芙蓉幕)이요, 맑은 노랫소리 가운데는 호박잔[琥珀杯]이로구나. 해는 저물어 화성(火城)
이 십 리나 이어 있는데, 풍악 소리로 둘러싸여 요대(瑤臺)로 들어오네." 하였다.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하늘이로다 : 장수(張脩)의 시에, "원우(院宇)는 비록 송양(松讓)의 시대 아니지만,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때로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상부(上部) : 읍내에 있다. 하부(下部)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서부 :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숭인(崇仁)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묵소(墨所) : 동남쪽으로 60리이다.
남전(藍田) :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대곡(大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60리
이다. 왕을이(王乙伊) : 동남쪽으로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암포(巖浦) : 동쪽으로 30리이다. 사가동(史加洞) : 동북쪽을 처음이 40리, 끝이 80리이다.
문헌(文憲)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직동(直洞) : 위와 같다.
천곡(泉谷)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와룡(臥龍) : 남쪽으로 80리이다.
삼파(三坡) : 동남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10리이다. 온천(溫泉) :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이다.
추전(杻田)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심학(深壑) : 서쪽으로 45리이다.
추탄(楸灘)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유동(柳洞)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삼기(三岐)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5리이다. 칠전(漆田) : 북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1백 10리이다.
성암(城巖)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산음(山陰) : 동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삭면(朔面) : 북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10리이다. 봉래(蓬萊) : 북쪽으로 90리이다.
필밀(必密)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10리이다. 회곶(檜串) :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와동(瓦洞) : 처음이 55리, 끝이 90리이다.
성지 기암성(岐巖城) : 북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중창(中倉) : 읍내에 있다. 동창 : 동쪽으로 50리이다. 남창 : 남쪽으로 90리이다. 서창 : 서쪽으로 40리이다.
북창 : 동북쪽으로 90리이다. 회창(檜倉) : 위와 같다. 대곡창(大谷倉) :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직동창(直洞倉) : 남쪽으로 40리이다. 신창(新倉) : 북쪽으로 40리이다. 삭창(朔倉) : 북쪽으로 10리이다.
석창(石倉) : 동북쪽으로 50리이다. 기창(岐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산창(山倉) : 서쪽으로 1백 리,
자모산성(慈母山城)에 있다.
진도 비류진(沸流津)ㆍ백현진(白峴津)ㆍ아파진(?波津)ㆍ선래진(仙來津)ㆍ석장진(石莊津)ㆍ기창진(岐倉津).
교량 모두 21곳이다. : 비류강 위아래 여울 다리 건너에 14처가 있다.
토산 자초(紫草)
사원 기성영전(箕聖永殿) : 백령산(百靈山)에 있다.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그 해 현액(懸額)하였다.
기자(箕子) : 평양편에 보라.
○ 학령서원(鶴翎書院) : 선조 정미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정구(鄭逑) : 충주편을 보라. 조호익(曺好益) : 영천편을 보라.
박 대덕(朴大德) : 자는 사화(士華)요, 호는 합강(合江)이며 무안(務安) 사람이다. 벼슬은 동중추(同中樞)이며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 쌍충사(雙忠祠) : 선조 기해년에 세우고 숙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정의(鄭?) : 고려 대장군 선유사(大將軍宣諭使)이며, 상장군(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최춘명(崔椿命) : 해주 사람으로 최충(崔沖)의 후손이다. 고려 벼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였다.
덕천군 德川郡
동쪽으로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39리, 남쪽으로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34리,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25리,
서쪽으로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46리, 북쪽으로 영변부(寧邊府) 경계까지 39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3리
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요원군(遼遠郡) :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하였다. 목종(穆宗) 4년에 덕주 방어사(德州防禦
使)라 일컬었고, 원종(元宗) 원년에는 몽고병을 피하여 안주(安州)의 노도(蘆島)로 들어간 뒤에 모두 다섯 번이나
옮겼으며. 충렬왕 6년에 이르러 옛 땅으로 돌아와 성주(成州)에 속하였다가, 공민왕 20년에 갈라져 지주사(知州事)
로 되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얼마 되지 않아 맹산현(孟山縣)으로 일컫다가, 15년에 맹산
을 다시 두면서 덕천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요원(遼原)ㆍ장덕(長德)ㆍ덕주(德州)
성씨 본국 오(吳) : 영일(迎日). 방(邦) : 청송(靑松). 문(文) : 해주(海州). 김(金)ㆍ동(童)ㆍ노(盧) : 모두 재령
(載寧). 변(邊) : 이산(伊山). 최(崔) : 연산(連山)
형승 땅이 향산(香山)에 닿아 있다. 강이 큰 바다로 통한다 : 박은(朴?)의 시가 있다.
산천 장안산(長安山) : 군의 남쪽 25리에 있는 진산이다. 당산(堂山)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남산(南山) : 군의 남쪽 4리에 있다. 금성산(金城山)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장양산(長楊山) :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향산(香山) : 군의 북쪽 45리에 있는데, 곧 영변부의 묘향산(妙香山)이다.
관음산(觀音山) : 군의 북쪽 48리에 있다.
삼탄(三灘) : 군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영원과 맹산의 물이 이곳에 이르러 교류하므로 삼탄이라고 한다.
여울가에 굴이 있고 굴 속에 못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날씨가 가물 때에 범의 머리를 담그면 비가
내린다.
응강(凝江)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근원은 영원군에서 나와 비류강과 합류하여 대동강(大洞江)으로 들어간다.
막탄(?灘)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맹산현 대천(大川)의 하류로서 또 삼탄으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자초(紫草)ㆍ인삼ㆍ오미자ㆍ잣ㆍ석청꿀[石淸蜜]ㆍ사향ㆍ안식향(安息香)ㆍ영양(羚羊)ㆍ
백옥(白玉) : 장양산(長楊山)에서 나온다. 여항어(餘項魚)ㆍ복령(茯?).
성곽 금성(金城) : 금성산(金城山)에 있는데 산의 이름이 금성산이 된 것은 이 성 때문이다. 본조 태조 때에 돌로
쌓았는데, 삼면이 낭떠러지이고, 둘레가 3천 1백 25자, 높이가 8자이다. 안에 샘이 하나 있으며, 또 군창(軍倉)이
있다.
학교 향교: 군의 서쪽 7리에 있다.
원우 평지원(平地院) :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불우 관음사(觀音寺) : 관음산에 있다. 흥덕사(興德寺) : 장안산(長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당산(堂山)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무산현[古撫山縣] : 군의 서쪽 1백 80리에 있다. 예전에도 영변부에 속해 있었는데, 우리 세조 때에
내속시켰다. 자세한 것은 영변부 연혁조에 있다.
명환 본조 박명산(朴命山) : 군수가 되었을 때 흉년을 만나서 자기의 집에서 갖다가 생활하였다.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칭송하고 있다.
제영 질펀한 긴 강은 외로운 성을 끌어 안았는데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질펀한 긴 강은 외로운 성을 끌어 안고,
넓고 깊숙한 골짜기는 한결같이 평평하네." 하였다.
풍년 들고 사람이 화목하여 의로운 군사를 기른다 : 박은(朴?)의 시에, "관청은 한가롭고 일은 간소하니 가혹한
정치가 없고, 풍년들고 사람이 화목하여 의로운 군사를 기르네." 하였다.
신증 사면의 산은 둘러 겹성을 만들었고 : 성현(成俔)의 시에, "사면의 산은 싸고 둘러 겹성을 만들었고, 들은
넓고 넓어 손바닥같이 평평하구나. 나무 그림자 봄을 간직하였는데 꽃은 벌써 졌고, 시냇물은 돌을 부딪쳐 맑기만
하네. 주진촌(朱陳村)의 순박한 풍속 백성들은 모두 생업을 편안히 하고, 변방 거칠은 땅에는 전쟁을 알지 못하여.
교화를 베풀어 끼친 은택 조금도 없으나, 다만 마음과 힘을 가지고 나의 정성을 다하리라."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郡內) : 남쪽으로 20리이다. 고척(古尺) : 동북쪽으로 60리이다. 삼탄(三灘) : 동남쪽으로 30리이다.
고리항(古里項) : 서북쪽으로 45리이다. 서초소(西初所) : 서쪽으로 15리이다. 이소(二所) : 30리이다.
송산(松山) : 45리이다. 동면 : 30리이다. 남면 : 30리이다.
영아 청남우영(淸南右營) : 영장(營將)이 1명인데 본군 군수가 겸하였다.
○ 속읍은 덕천ㆍ자산(慈山)ㆍ영원(寧遠)ㆍ개천(价川)ㆍ맹산(孟山)ㆍ은산이다.
창고 읍창ㆍ서창 : 25리이다. 읍서창(邑西倉) : 15리이다. 남창 : 28리이다 신창 : 북쪽으로 25리이다.
송창(松倉) : 북쪽으로 50리이다. 금성창(金城倉) : 동쪽으로 27리, 금성 내에 있다.
읍신창(邑新倉) : 서남쪽으로 10리이다. 내송창(內松倉) : 북쪽으로 60리이다. 장림창(長林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진도 요원강진(遼原江津) : 군의 남쪽이다. 고성강진(古城江津) : 동쪽으로 35리인데 영원으로 통한다.
교량 시량천교(矢梁川橋) : 서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유장교(楡長橋) :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장림천교(長林川橋) : 북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 신창교(新倉橋) :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칠(漆)ㆍ황양(黃楊)ㆍ쏘가리[錦鱗魚]
누정 힐융정(詰戎亭) : 서쪽으로 2리, 강변에 있다. 선유정(仙遊亭) : 읍내에 있다. 망일루(望日樓) : 읍내에 있다.
개천군 价川郡
동쪽으로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37리, 남쪽으로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79리,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60리, 은산현(殷山縣) 경계까지 32리, 안주(安州) 경계까지 32리, 서쪽으로 영변부(寧邊府) 경계까지 34리,
북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63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안수진(安水鎭)이었는데, 현종 9년에 연주방어사(連州防禦使)로 고쳤다가 뒤에 조양진
(朝陽鎭)으로 고쳤으며, 고종 2년에는 거란 군사를 막는 데 공이 있었다 하여 다시 연주방어사로 일컬었고,
4년에 익주(翼州)로 고쳤다가 뒤에 또 개주(价州)로 고쳤으며,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연주(連州)ㆍ조양(朝陽)ㆍ익주(翼州)ㆍ안수(安水)ㆍ개주(价州)
성씨 본군 변(邊) : 염주(鹽州). 최(崔)ㆍ문(文) : 모두 전주(全州). 김(金) : 유주(儒州)ㆍ우봉(牛峯)ㆍ인주(仁州)ㆍ
전주(全州). 이(李): 해양(海洋)
산천 임대산(林大山) : 군의 북쪽 4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광산(光山) : 군의 북쪽 7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ㆍ건지산(巾之山) : 모두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사산(姑射山)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 군의 남쪽 8리에 있다. 횡계산(橫溪山)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난결현(卵結峴) : 군의 동쪽 44리에 있다. 남천(南川)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백운산
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난결현에서 나와 합쳐 서쪽으로 흘러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으로 들어간다.
순천강(順川江)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근원은 영원(寧遠)ㆍ맹산(孟山)에서 나와, 다시 순천의 옛터를 지나
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부연(釜淵)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근원은 난결현에서 나와 남천으로 들어가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
분탄(?灘) : 군의 서북쪽 38리에 있다. 영변부의 묘향산에서 나온다. 장항강(獐項江) : 군의 북쪽 38리에 있다.
곧 분탄의 하류인데, 다시 서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인삼ㆍ영양ㆍ무쇠[水鐵]ㆍ철강석[石鐵] : 모두 건지산(巾之山)에서 나온다.
자초(紫草)ㆍ애끼찌 뽕나무[弓幹桑]ㆍ수달(水獺)ㆍ벌꿀ㆍ잣ㆍ은어ㆍ여항어(餘項魚)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소고역(所古驛) : 근의 서쪽 30리에 있다. 난결원(卵結院) : 난결현 밑에 있다.
불우 관음사(觀音寺) : 고사산(姑射山)에 있다. 대림사(大林寺) : 대림산에 있다.
삼각사(三角寺) : 백운산에 있다. 횡계사(橫溪寺) : 횡계산에 있다. 뇌사(磊寺) : 오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조양진성(朝陽鎭城) : 옛터가 군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1만 5천 4백 36자이다.
장환성(長桓城) : 옛터가 군의 서쪽 30리에 잇다. 분난역(奔難驛) : 옛터가 군의 북쪽에 있다.
장리역(長里驛) : 옛터가 군의 남쪽에 있다. 고사산(姑射山) 고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만 6천 7백 61자이다.
명환 고려 소현(蘇顯) : 문종조 연주방어부사(連州防禦副使)로 있을 때 장리(長吏)와 군민(軍民) 등 8백여 명이
병마사 양대춘(楊帶春)에게 고하기를, "부사가 부임한 이후 농사와 양잠(養蠶)을 권장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하였으므로 대춘이 그 일을 조정에 알렸더니, 상서 이부(尙書吏部)에서 영을 내려 제도에 준하고,
재추를 재량하여 기용하였다 한다.
신증 열녀 본조 막시(莫時) : 군노(郡奴) 이양경(李良京)의 아내이다. 남편이 광질(狂疾)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그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비고]
연혁 세조 12년에 군수로 고쳤다 : 조양진(朝陽鎭) 옛터는 서쪽으로 22리에 있다.
방면 내동(內東)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외동 : 동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70리이다.
군내(郡內) : 끝이 15리이다. 중남(中南)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내남(內南)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80리다. 중면(中面)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외서(外西)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0리, 끝이 80리이다.
성지 ○ 고려 태조 13년에 대상(大相) 염상(廉相)을 보내어 마산(馬山)을 쌓아 영안진(永安鎭)이라 이름하였다 :
어떤 기록에는, 13년에 조양진(朝陽鎭)을 쌓았다고 한다. 8백 21간에, 문(門)이 4, 수구(水口)가 1, 성두(城頭) 2,
요성(遼城)이 2이다.
진보 금성보(金城堡) : 서남쪽으로 70리, 자산(慈山) 경계에 있다. ○ 별장이 1명이다.
창고 읍창ㆍ동창 : 동쪽으로 40리이다. 원창(院倉) : 무진대(無盡臺) 곁에 있다. 남창 : 서남쪽으로 60리이다.
신창(新倉) : 서남쪽으로 30리이다. 서창 : 서쪽으로 30리이다. 북창 : 북쪽으로 30리이다.
산창(山倉) : 서북쪽으로 55리,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에 있다.
역원 죽관역(竹官驛) :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혁폐 풍단역(?端驛) : 분탄(奔灘)에 있다.
장리역(長梨驛) : 남쪽에 있다. 장환역(長歡驛) : 서남쪽에 있다.
진도 무진대진(無盡臺津) : 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은산(殷山)으로 통하는 대로다.
서진(西津) : 일명 장항진(獐項津)이라고도 하는데, 서북쪽으로 34리이며 영변 대로이다.
교량 강련교(江連橋) : 남쪽에 있다. 승창교(承昌橋) : 남쪽으로 12리이다. 당죽교(唐竹橋) : 동쪽으로 20리이다.
율우교(栗隅橋) : 서쪽으로 12리이다.
원점 이목원(梨木院) : 북쪽으로 60리, 영변 대로이다. 영변 동래원(東萊院)ㆍ행정원(杏亭院)에서 북쪽으로
희천(熙川)ㆍ지현(知峴) 80리까지다.
직동원(直洞院) : 동쪽으로 30리 지점인데 덕천(德川)으로 통하는 길이다.
희주원(熙州院) : 서쪽으로 32리 지점인데 안주(安州)의 대로이다.
자산군 慈山郡
동쪽으로 은산현(殷山縣) 경계까지 4리, 남쪽으로 평양부(平壤府) 경계까지 36리, 순안현(順安縣) 경계까지
39리, 서쪽으로 숙천부(肅川府) 경계까지 34리, 북쪽으로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11리, 개천군(价川郡) 경계
까지 2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문성군(文城郡)이었는데, 태조 22년에 고쳐 태안주(太安州)로 하고,
성종 2년에 자주방어사(慈州防禦使)로 일컬었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이어
오다가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신증 연산(燕山) 을축년에 이 고을 출신의 환관(宦官) 김계경(金季敬)을 죽이고 본군을 폐지하여 그 땅을 이웃
고을에 갈라 붙였다가, 지금 임금(중종) 초년에 다시 군을 설치하였다.
군명 자모(慈母)ㆍ태안주(太安州)ㆍ자주(慈州)ㆍ문성(文城)
성씨 본군 양(楊) : 안악(安岳). 김(金) : 안악(安岳)ㆍ홍주(洪州)ㆍ금주(金州)ㆍ용강(龍岡)ㆍ당성(唐城).
배(裵) : 순화(順化)ㆍ남해(南海). 민(閔) : 우봉(牛峯). 안(安) : 장계(長溪). 장(張) : 승주(昇州).
정(鄭) : 반남(潘南). 이(李) : 흥주(興州)ㆍ서경(西京). 강(康) : 광주(光州). 정(鄭) : 반남(潘南)ㆍ영월(寧越).
송(宋) : 영월(寧越). 현(玄) : 유성(杻城). 우(禹) : 곡주(谷州).
산천 봉린산(鳳麟山) : 군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자모산(慈母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우가연(禹家淵) : 군의 동쪽 4리에 있다. 근원은 덕천군(德川郡)에서 나와 다시 동쪽으로 흘러서 강동현(江東縣)
의 잡파탄(雜派灘)으로 들어간다. 생두리못[生頭里池] : 군의 북쪽 7리에 있다.
토산실ㆍ삼ㆍ돌고드름[石鐘乳]ㆍ안식향(安息香)ㆍ소유(?油)
성곽 자모산성(慈母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만 2천 7백 33자, 높이가 13자이다. 성안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 나오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99우물이라고 한다. 군영의 옛터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불우 안국사(安國寺) : 봉린산에 있다. 천왕사(天王寺) : 자모산에 있다. 정수사(正水寺) : 수고산(水庫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이성(泥城) : 옛터가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50자이다.
금천역(金川驛) : 옛터가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선전역(善田驛) : 옛터가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통덕원(通德院) : 옛터가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명환 고려 최춘명(崔椿命) : 고종 18년에 부사(副使)로 있을 제, 몽고병이 고을을 포위하였으나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왕이 몽고의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의 힐책을 받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타일렀으나 춘명이 성문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삼군의 장수가 왕명으로 항복을
하자, 회안공(淮安公) 정(?)이 대집성(大集成)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하였으나 춘명이 성루에 앉아 사람을 시켜
대답하기를, "성안에서는 회안공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집성이 성으로 들어오자, 훈명이 좌우를 시켜
쏘아 물리쳐 버렸다. 집성이 최이(崔怡)에게 헐뜯기를, "춘명이 항복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적지 않을 것이니,
죽여서 몽고에게 보이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최이가 내시 이백전(李百全)을 보내어 베이려 할 제, 춘명이 언사
와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몽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매 백전이 자주(慈州)의 원이라고 대답하니,
몽고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에게는 비록 명령을 거역하였지마는 너희에게는 충신이다. 나도 죽이지
않는데 너희가 성을 지킨 충신을 죽여서 옳으냐." 하고 굳이 놓아주기를 청하였다. 뒤에 논공할 때 1등 공신으로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
인물 본조 김광귀(金光貴) : 태조 때에 공조 전서(工曹典書)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중종 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인조 11년에 치소를 자모산성에 옮겼다가 15년에 옛 치소로 환원하였다.
숙종 29년에 치소를 산성에 옮기고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44년에 다시 옛 치소로 환원시켰다 : 자주(慈州) 때
의 옛 치소는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방면 부내(府內)ㆍ오탄(五灘)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끈이 15리이다.
귀후(歸厚) : 동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월탄(月灘)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인동(麟洞)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용곡(龍谷) : 남쪽으로 40리이다.
풍전(?田)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성내(城內) : 서쪽으로 30리이다.
성동(城洞)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운암(雲暗) : 북쪽으로 40리이다.
우곡(?谷)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고도암(高都巖) : 처음이 10리, 끝이 35리이다.
창고 읍창ㆍ남창 : 동남쪽으로 30리이다. 동창 : 서쪽으로 20리이다.
역참 혁폐 금천역(金川驛) : 북쪽으로 30리이다. 선전역(善田驛) : 서쪽으로 15리이다.
도덕역(道德驛) : 남쪽으로 40리이다.
진도 우가연진(禹家淵津) : 동쪽으로 5리인데, 성천(城川)ㆍ은산(殷山) 대로로 통한다.
교량 만제교(萬濟橋) : 서쪽으로 1리 지점에 있다. 시천교(矢川橋) : 남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이교(泥橋) : 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강동교(江東橋) : 남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토산 뽕나무ㆍ누치[訥魚]ㆍ은어
사원 의열사(義烈祠) : 인조 병자년에 세우고 현종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최춘명(崔椿命) : 성천(成川) 편에 보라. 홍명구(洪命?) : 여주(驪州) 편에 보라.
최경후(崔景候) : 자주 부사(慈州副使)이다. 김지저(金之佇) : 자주 판관(慈州判官)이다.
55권 순천군 順川郡
동쪽으로 은산현(殷山縣) 경계까지 11리,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15리,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89리.
남쪽으로 자산군(慈山郡)까지 11리, 서쪽으로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12리, 북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19리
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려 정융군(靜戎郡)으로 성종 2년에는 순주방어사(順州防禦使)라 하였다.
고종(高宗) 44년에 덕주(德州)와 병합했다가 후에 분리하여 군(郡)으로 하였다. 본조(本朝)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정융(靜戎)ㆍ순주(順州).
성씨 본군 이(李) : 수안(遂安)ㆍ의성(義城)ㆍ백주(白州)ㆍ홍주(洪州). 궁(弓) 서(徐) : 모두 토산(?山).
포(包) : 진주(眞州). 김(金) : 토산(?山)ㆍ백주(白州)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ㆍ덕주(德州)ㆍ남원
(南原)ㆍ가림(嘉林). 유(劉) : 상주(尙州). 임(任)ㆍ조(趙) : 모두 백주(白州). 임(林) : 백주(白州)ㆍ염주(鹽州).
강(康) : 덕주(德州). 최(崔) : 안변(安邊). 윤(尹) : 염주(鹽州). 장(張) : 수덕(樹德).
산천 도산(刀山) : 군의 북쪽 4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용주산(龍住山)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봉서산(鳳棲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 군의 동쪽 1백 리에 있다. 봉일산(奉日山)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관타점(官墮岾) : 군의 동쪽 1백 10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옛날에 군수가 이곳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었다
한다. 그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 한다.
용도(龍島) : 옛 읍(邑)의 성(城) 북쪽에 있으며 둘레는 4백여 척(尺)이다. 섬 북쪽 7리에 용지(龍池)가 있으니
둘레 역시 4백여 척이다.
성암진(城巖津) : 군의 동쪽 7리에 있으며, 자산군(慈山郡) 우가연(禹家淵)의 하류(下流)로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아래에는 기탄(岐灘)이 있다.
금천(金川) : 군의 서남쪽 13리에 있으며 근원은 안주(安州)ㆍ검산(檢山)에서 나와 성암진(城巖津)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점탄(狸岾灘) : 잠서진(蠶墅津) 북쪽에 있다.
안평진(安平津) 두음진(豆音津) 잠서진(蠶墅津) : 모두 군의 동쪽 1백 10리에 있다.
부연(釜淵) : 용도(龍島) 남쪽 15리 천장리(天將里) 산곡(山谷) 안에 있다.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3리쯤 흘러서 땅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귀출천(貴出泉) : 군의 동쪽 35리에 있으며 산의 남쪽 석벽(石壁)
에는 샘물이 쏟아져 날아 나오는 구멍이 있다. 구멍 둘레는 수 10척(尺)이요, 흘러서 내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성암진에 들어간다. 광천(廣泉) : 군의 동쪽 1백 2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 안평진(安平津)에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인삼ㆍ자초(紫草)ㆍ칠(漆), 녹반(綠礬) : 군의 동쪽 잠서리(蠶墅里)에서 난다. 영양(羚羊)ㆍ
석창포(石菖蒲)ㆍ안식향(安息香)ㆍ소유(?油)ㆍ오미자(五味子)ㆍ꿀[蜂密].
누정 청원루(淸遠樓) :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이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동림사(東林寺) : 용주산(龍住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 봉서산(鳳棲山)에 있다.
남선사(南禪寺) : 팔봉산(八峯山)에 있다. 북천사(北泉寺) : 봉일산(奉日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여단(?壇)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밀전역(密田驛) : 군의 동쪽 60리에 옛터가 있다. 함덕역(咸德驛) : 군의 동쪽 90리에 옛터가 있다.
고읍성(古邑城) : 군의 동쪽 1백 5리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8백 67척(尺)으로 지금은 은산현(殷山縣)
동북(東北)으로 넘어 들어가 있다.
인물 본조 이귀철(李龜鐵) : 태조(太祖) 때 사람으로 벼슬은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양
(貞襄)이다.
효자 본조 복태(卜台) : 김다경(金多慶)의 딸이다. 김다경이 약한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떤 사람이 산 사람의 뼈로
고칠 수 있다 하여, 복태 나이 열두 살에 이 말을 듣고 왼손을 잘라 약에 섞어 올렸더니 부친의 병이 즉시 나았다.
[비고]
연혁 세조 12년에 군수로 고쳤다 : 고읍 터는 지금의 치소인 동쪽으로 백 5리에 있다.
은산(殷山)의 동북쪽 용도방(龍島坊)에 넘어 들어가 있으며 곧 순주(順州) 때에 설치한 읍이다.
○ 무등대(無等臺)는 동쪽으로 5리에 있는데, 옛 순천에서 처음으로 옮긴 터이다.
○ 평리(坪里)는 윤씨연(尹氏淵) 가에 있는데, 순주로 다시 옮긴 터이며, 후에 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방면 군내(郡內), 아포(?浦) : 남쪽으로 10리이다. 윤동(潤洞) :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수(鳳岫) : 북쪽으로 20리이다. 소상단(召上端) : 동쪽으로 10리이다. 소하단 : 동쪽으로 20리이다.
점석포(粘石浦)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분지현(粉知峴) :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원상단(院上端) : 동쪽으로 60리이다. 원하단 : 동쪽으로 50리이다.
밀전(密田) :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뇌봉(雷封) :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학천(鶴川)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옥정(玉井) : 동북쪽으로 1백 50리이다.
광천(廣川) :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80리이다. 잠상단(蠶上端) : 동북쪽으로 1백 40리이다.
잠하단(蠶下端) : 동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인상단(仁上端) : 동북쪽으로 1백 30리이다.
인하단 : 동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용도(龍島) : 동북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위의 14방(坊)은 다른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북쪽으로는 덕천(德川)ㆍ개천(价川)을 접했고, 동쪽으로는 맹산
(孟山)과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성천(成川)과 접했고 서쪽으로는 은산(殷山) 경계와 접하였다.
○ 금물(今勿)은 처음이 백 50리, 끝이 백 70리이다. 우곡(?谷)은 처음이 90리, 끝이 백 20리이다.
천장(天將)은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이언(所伊彦)은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신이정(新伊亭)ㆍ뇌잡(賴雜)은 총목(總目)에 실렸다.
영아 청남우영(淸南右營) : 영장(營將)이 1명인데 본군 군수가 겸하였다.
○ 속읍은 순천ㆍ성천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ㆍ양덕(陽德)ㆍ토성(?城)ㆍ용동(龍洞)이다.
진보 용연보(龍淵堡) : 미륵령(彌勒嶺) 아래에 있다. ○ 별장이 1명이다.
창고 읍창 : 동쪽으로 3리이다. 신창(新倉) : 동쪽으로 50리이다. 원창(院倉) : 동쪽으로 70리이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백 20리이다. 가창(假倉) : 북쪽으로 1백 리이다. 사창(舍倉) : 위와 같다.
북창 : 동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운창(雲倉) : 동북쪽으로 90리이다. 광창(廣倉) : 동쪽으로 1백 30리이다.
산창(山倉) : 서쪽으로 40리인데 자모산성(慈母山城)에 있다.
역참 혁폐 밀전역(密田驛) : 동쪽으로 60리이다. 함덕역(咸德驛) : 동쪽으로 90리이다.
진도 정융진(靜戎津) : 일명 성암진(城巖津)이라고도 하며, 동쪽으로 7리인데, 은산(殷山) 대로로 통한다.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아래에는 기탄(岐灘)이 있다. 잠사진(蠶舍津) : 용도(龍島)의 서쪽이다.
인산진(?山津)ㆍ도령진(都令津)ㆍ수예진(水汭津)ㆍ익연진(益淵津).
교량 흠성교(欽聖橋) : 동쪽으로 2리이다. 금천교(金川橋) : 남쪽으로 10리이다.
신석교(新石橋) : 동쪽으로 50리이다. 강서교(江西橋) :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방암교(防巖橋)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광천교(廣川橋) : 동쪽으로 1백 30리이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麟魚]ㆍ여항어(餘項魚).
누정 문고루(聞鼓樓) : 모두 군내에 있다. 오산정(鰲山亭) : 동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상원군 祥原郡
동쪽으로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경계까지 40리, 남쪽으로 동도(同道) 황주(黃州) 경계까지 41리, 서쪽으로
평양부 경계까지 23리.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20리, 북쪽으로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37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37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식달현(息達縣)으로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토산(土山)이라 고쳤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황주(黃州)에 속했다가 충숙왕 9년에 공신(功臣) 조인규(趙仁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
이름으로 바꾸고 군(郡)으로 승격하였고 그 후 본도(本道)에 예속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두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토산(土山)ㆍ금달(今達)ㆍ식달(息達).
성씨 본군 최(崔)ㆍ이(李)ㆍ김(金)ㆍ임(林)ㆍ윤(尹)ㆍ강(姜)ㆍ조(趙)ㆍ한(韓)ㆍ송(宋)ㆍ서(徐)ㆍ현(玄)ㆍ여(呂)ㆍ
노(盧)ㆍ박(朴)ㆍ최(崔)ㆍ김(金) : 모두 내(來). 양(楊)ㆍ김(金)ㆍ원(原)ㆍ강(康) : 모두 안악(安岳). 정(鄭)ㆍ
오(吳)ㆍ김(金) : 모두 해주(海州). 홍(洪)ㆍ이(李)ㆍ김(金) : 모두 삼화(三和). 박(朴) : 통구(通溝).
문(文) : 교하(交河).
형승 높은 산이 빙 둘러 있다. 장덕량(張德良)의 기문(記文)에, "높은 산이 둘러싸고 수목이 울창하다." 하였다.
산천 반룡산(盤龍山) : 군의 서쪽 3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화산(花山) : 군의 동쪽 3리에 있다.
관음산(觀音山)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음작문(音作門)이라 하였다.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속에 굴이 있으니 이름을 가수(佳殊)라 한다. 그 안에 돌이 있는데 혹은 관음(觀音)
같기도 하고, 혹은 솟 모양 같기도 한 것이 매우 기괴(奇怪)하다. 고령산(高嶺山)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성산(城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란산(龍卵山)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화산(禾山)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동천(東川) : 군의 동쪽 2리에 있으며 화산(禾山)에서 나와 대동강(大同江)
으로 들어간다. 오정탄(於丁灘) : 군의 북쪽 37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자초(紫草)ㆍ꿀[蜂蜜]ㆍ닥나무.
누정 동락루(同樂樓) : 장덕량(張德良)의 기문(記文)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원우 보제원(普濟院)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와좌미원(臥佐未院)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오정천원(於丁淺院) : 군의 북쪽 31리에 있다. 신증 신원(新院)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불우 운제사(雲際寺) : 반룡산(盤龍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ㆍ동일사(東日寺) : 화산(禾山)에 있다.
은고사(銀古寺) : 관음산에 있다. 법화사 : 성산에 있다. 개천사(開天寺) : 고령산(高嶺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용란산(龍卵山)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인물 고려 최응(崔凝) : 어머니가 임신하자, 집의 호박 넝쿨에 갑자기 참외가 맺어졌다. 읍 사람이 궁예(弓裔)
에게 고하니 궁예가 점을 치고 말하기를, "생남(生男)하면 나라에 이롭지 않다." 하였다.
부모가 숨겨서 그를 길렀다. 장성하여 오경(五經)에 통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벼슬은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희개(熙愾)며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되었다.
조인규(趙仁規) : 충렬왕 때 사람. 어머니가 해[日]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였으며 좀 자라서 공부를 시작하자 글의 뜻을 대략 통하였다. 국가에서 민첩하고 재주 있는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몽고어(蒙古語)를 가르치는데 조인규가 뽑혔으나 동류(同類)들보다 뛰어나지 못하였다.
삼년 동안 문을 닫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익혀서 드디어 이름이 알려졌다. 주청(奏請)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조인규를 보내었으니 사신(使臣)으로 갔던 것이 무려 30회로 공로를 드러내었다.
어떤 원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와 감정이 있어서 우리 풍속(風俗)을 바꾸려고 황제(皇帝)에게 호소하여,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조인규가 단기(單騎)로 중국에 들어가 명쾌하게 변명하여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서북 두 지방이 우리에게 복귀(復歸)된 것은 역시 그의 외교(外交)의 공인 것이다.
여러 가지 벼슬을 거쳐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에 이르고 평양군(平壤君)에 책봉되어 부(府)를 두고
관속을 두었다. 조회(朝會)에서 옥대(玉帶)를 띠고 일산(日傘)을 받고 시종(侍從)을 따르게 하는 것을 허락하고
찬배(贊拜)할 때에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고 칼을 차고 신을 신고 전(殿)에 오르게 하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첨의밀직(僉議密直) 한 사람을 집에 보내어 문의하였다. 나이 72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조서(趙瑞) : 인규(仁規)의 아들로 충렬왕 조에 급제하여 벼슬에 여러 번 승진되어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었다.
원(元) 나라에 들어가 천자(天子)의 천추(千秋 황제의 생일)를 축하하니,
황제가 회원대장군 고려국부원수(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를 주었다. 돌아왔을 때 왕이 또한 검교찬성(檢校贊
成)을 제배(除拜)하였다. 시호는 장민(莊敏).
조연(趙璉) : 조서(趙瑞)의 동생으로 벼슬을 역임하여 첨의평리 전찬성사(僉議評理轉贊成事)에 전직되었으며
이어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배하였다, 왕이 일찍 원 나라에 있었을 적에 조연이 임시로 5년 동안
일을 보았다. 시호는 충숙(忠肅).
조위(趙瑋) : 조서(趙瑞)의 동생으로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다.
조덕유(趙德裕) : 조연(趙璉)의 아들로 부친(父親)의 작위(爵位)를 이어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이 되었다.
성정(性情)이 청백하고 강압(强壓)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영화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다.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조인(趙璘) : 덕유(德裕)의 아들로 신돈(辛旽)이 나라를 맡았을 때 사람
들은 다투어 그에게 붙었으나 한 번도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오인택(吳仁澤)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 모의
하다가 그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주헌(李周憲) : 처음은 작은 아전으로 몸을 일으켜 퍽 근면하고 능란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쇠 중에도 쟁쟁(錚錚)한 쇠다." 하고 감찰사헌(監察司憲)을 주었다. 벼슬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안소광(安紹光) : 대대로 장수로, 체모(體貌)가 크고 위대하였다. 현종(顯宗) 조에 상서우복야를 제배하였다.
본조 조준(趙浚) : 조인(趙璘)의 동생으로 고려 말에 급제하여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로 강원도 안찰사로 나가
위엄과 은혜가 병행하였다. 정선(旌善)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동해 바다를 깨끗이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백성
들은 눈을 씻고 맑기를 기다리라." 하여, 식자(識者)들은 그가 큰 뜻이 있는 것을 알았다. 후에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조박(趙璞) :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사겸(思謙)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하여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에 이르렀다. 개국정사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평원군(平源君)에 봉해졌다.
신증 열녀 본조 양씨(梁氏) : 교생(校生) 김자호(金自浩)의 처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통곡하며 먹지 않고
목매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조씨(曹氏) : 교생 나규(羅奎)의 처이다. 남편이 죽자 3일
을 통곡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뽕과 삼 우거져 한 구역이 그윽하다 : 이지강(李之剛)의 시에, "꽃나무 그늘지고 다시 누(樓)가 있는데, 뽕과
삼 우거져 한 구역이 그윽하다. 붉은 수레로 왔던 그날에 사랑을 남긴 것 없으니, 주민(住民)을 향해 옛 놀이 말
하기 부끄러워." 하였다.
열 집 되는 마을 뽕과 삼에 땅이 더욱 그윽하다 : 한상질(韓尙質)의 시에, "푸른 산 깊은 곳에 높은 누각(樓閣) 솟아
있고, 마을 들의 뽕과 삼에 땅이 더욱 그윽하다." 하였다.
[비고]
연혁 세조 12년에 군으로 고쳤다 : 고읍 터는 만경원(萬景院)에 있고 하나는 군의 남쪽 6리, 대정리(大井里)에
있다.
방면 읍내. 홍암(紅巖)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수산(水山)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
이다.
천곡(天谷)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배화(培花)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풍동(楓洞)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5리이다. 상도(上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하도 : 남쪽으로 40리이다.
창고 본창(本倉) : 동쪽으로 2리 지점에 있다. 남창 : 동남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성창(城倉) : 서북쪽으로 70리, 평양성 내에 있다.
진도 파랑진(波浪津) : 동북쪽으로 45리, 삼등(三登)으로 통한다.
만경원진(萬景院津) : 북쪽으로 45리, 강동(江東)으로 통한다.
교량 용두교(龍頭橋) : 북쪽으로 6리 지점에 있다. 취암교(鷲巖橋) :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석교(石橋) : 북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토산 뽕나무ㆍ은어.
누정 집상루(集祥樓)ㆍ대월루(待月樓) : 모두 읍내에 있다. 하허정(何許亭) : 북쪽으로 35리 지점에 있다.
삼등현 三登縣
동으로 성천부(成川府) 경계까지 1백 90리, 북으로 동부(同府) 경계까지 43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27리,
남으로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경계까지 2리, 서로 평양부(平壤府) 경계까지 46리,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31
리로, 서울과의 거리 6백 67리이다.
건치연혁 고려 인종(仁宗) 14년에 서경기(西京畿)를 나누어 성주(成州)에 소속한 신성(新城)ㆍ나평(蘿坪)ㆍ
구아(狗牙) 세 부곡(部曲)을 합하여 삼등현(三登縣)으로 하고 현령을 두었다. 본조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조에 강동현(江東縣)을 합쳤다가 세조 원년에 그만두었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능성(能成)ㆍ양양(陽壤).
성씨 본현 김(金)ㆍ송(宋) : 모두 속(續)이다. 백(白)ㆍ김(金) : 모두 부여(扶餘)ㆍ안악(安岳)ㆍ동주(洞州)이다.
유(劉) : 금산(金山). 황(黃) : 수안(遂安).
산천 봉두산(鳳頭山) : 현(縣)의 동북쪽 1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제령산(祭靈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봉미산(鳳尾山)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건달산(巾達山)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현의 서쪽 90리에 있다.
능성강(能成江)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양덕현(陽德縣) 남천(南川)의 하류(下流)이며 또 서쪽으로 흘러 대동강(大同江)으로 들어간다.
또한 수안현(遂安縣)에도 보인다. 관동천(串洞泉)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자초(紫草)ㆍ자연동(自然銅) : 강지동(江知洞)에서 난다. 닥나무.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신증 원우 대사원(大寺院) :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불우 쌍봉사(雙鳳寺)ㆍ건달사(巾達寺) : 모두 건달산에 있다. 동림사(東林寺) : 봉두산(鳳頭山)에 있다.
고산사(高山寺) :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벽운대(碧雲臺) : 현의 서쪽 25리에 옛터가 있다.
신증 효자 본조 임석명(林石明) : 나이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리니 석명이
칼을 휘둘러 호랑이를 쫓아 위험을 면하였다. 금상(今上) 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성종 13년에 다시 강동(江東)을 설치하고 본현의 옛 치소에 반환시켰다.
방면 읍내 : 사방으로 끝이 2리이다. 정호(鼎湖) : 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영수(靈岫) : 서북쪽으로 끝이 30리이다. 풍잠(楓岑) 동북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세속에서 고성(姑城)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23리 지점에 있으며, 둘레가 1천 4백 7척이다.
창고 사창(司倉)ㆍ진휼창(賑恤倉) : 모두 읍 안에 있다. 성창(城倉) : 평양성 안에 있다.
진도 묵슬리진(墨瑟里津)ㆍ촉호정진(矗湖亭津)ㆍ앵무주진(鸚鵡洲津)ㆍ옥금리진(玉琴里津)ㆍ부연진(斧淵津)ㆍ
유점진(鍮店津).
교량 상아천교(上阿川橋) : 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하아천교 :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토산 뽕나무ㆍ취사어(吹沙魚)ㆍ잉어ㆍ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누정 황학루(黃鶴樓) : 남쪽으로 1리 지점인 능성강(能成江) 가에 있다. 앵무주 적벽(赤壁)이라고 이름하며 돌로
깎아서 세웠는데 물에 넣으면 자라 등 같아서 앉을 수 있고, 언덕 위에는 다락이 있다.
양덕현 陽德縣
동으로 함경도 고원군(高原郡) 경계까지 33리, 동도(同道) 안변부(安邊府)경계까지 37리,
남으로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경계까지 22리, 서로 성천부(成川府) 경계까지 128리,
북으로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154리, 함경도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51리로, 서울과의 거리 9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고려의 양암(陽巖)ㆍ수덕(樹德) 양진(兩鎭)으로 본조 태조(太祖) 5년에 합하여 양덕현(陽德縣)
으로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태종 13년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바꾸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동양(東陽)ㆍ양암(陽巖)ㆍ수덕(樹德).
성씨 양암(陽巖) 손(孫)ㆍ박(朴) : 모두 밀양(密陽). 오(吳) : 서곡(瑞谷). 고(高) : 강화(江華). 최(崔) : 의주(宜州).
채(蔡) : 평강(平康). 김(金) : 등주(登州). 수덕(樹德) 이(李)ㆍ윤(尹)ㆍ변(邊) : 모두 동주(洞州).
한(韓) : 곡주(谷州).
산천 은우산(隱于山) : 현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영산(靈山) : 현(縣)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일명 재령산(載靈山)이다.
산정(山頂)에는 용연(龍淵)이 있으며 속담에 나무꾼 사냥꾼이 이곳에 올라 떠들면 구름과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한다.
오라발산(?羅鉢山) : 일명 거차리(巨次里)로 현의 북쪽 40리 함경도 고원군(高原郡)과의 경계에 있다.
오강산(吳江山) : 현의 북쪽 115리의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의 경계에 있다.
청룡산(靑龍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은 오라발산에서 나와 또 서쪽
으로 흘러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을 지나 삼등현(三登縣)에 이르러 능성강이 된다.
견탄(犬灘) : 현의 서쪽 1백 45리에 있다. 난전온천(?田溫泉) :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모두 세 곳이 매우 뜨겁다.
초천온천(草川溫泉) : 현의 서쪽 70리에 있으며 모두 두 곳인데 약간 따뜻하다.
토산 실ㆍ삼ㆍ송이[松?]ㆍ인삼ㆍ자초(紫草)ㆍ꿀[蜂蜜]ㆍ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수달[水獺]ㆍ석이[石?]ㆍ
복령(茯?).
성곽 양암성(陽巖城) : 현의 서쪽 4리. 고려 태조(太祖) 21년에 석축(石築)으로 둘레 1천 6백 37척(尺) 높이 9척(尺)
으로 안에 두 우물이 있다. 성지(城地)는 높고 험하며 3면에 물이 있고, 천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으며 군창
(軍倉)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초천역(草川驛) : 온천 옆에 있다. 신증 순희원(淳熙院) : 현의 서쪽 36리에 있다.
불우 백운사(白雲寺) : 청룡산(靑龍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여단(?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 수덕(古樹德) : 토성터[土城基]가 현의 서쪽 70리에 있으며, 둘레 1824척(尺)이다. 고려 성종(成宗) 2년
에 쌓았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영 쓸쓸한 여덟 아홉 집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닭 울 때 성주(成州)를 떠나 종일토록 긴 골짜기를 달렸네.
천산(千山) 한 골 안에 쓸쓸한 여덟 아홉 집. 이것이 양덕현(陽德縣)이니, 객사(客舍)는 산기슭에 의지했네,
원님은 일 하나 없어 한낮에 미록(?鹿)을 벗삼네. 관동(冠童) 수십 무리, 읍양(揖讓)으로 예속(禮俗) 이루었네.
더불어 성경(聖經)을 담론(談論)하니 그윽한 고독 위로할 수 있네.
산전(山田)에 벼 흉년 들어 쌀 낟알 옥(玉)같이 귀하네. 민생(民生)을 생각하니 놀라울 뿐이요, 깊은 밤을 외로운
촛불에 머무르네." 하였다, 관사(館舍)는 반이 모옥(茅屋)이라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북새(北塞) 돌아오는 길
멀어, 천리에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오네. 해 저물어 양덕(陽德)에 투숙하니, 관사는 반이 모옥이네.
가벼운 바람 마른 잎을 불고 짧은 담은 끊어진 산록(山麓)에 기댔구나. 비 그치니 가는 구름 나직하고 산이 가까
워 우는 사슴 소리 들리네. 오래 앉았으매 정히 고요하니 회포가 속진(俗塵)을 떠났구나. 왕명 받은 일 진실로
완수되지 못했으니 어찌 능히 고독을 생각하랴. 베개 옆 밤중 소리는, 맑은 시내에 찬 구슬이 달리네.
먼 나그네 스스로 잠들지 못하고, 동자를 불러 촛불을 돋우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 :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고읍(古邑) :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초천(草川) : 서쪽으로 끝이 1백 리이다. 대구(大邱) : 서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대륜(大倫) : 동남쪽으로 끝이 1백 20리이다. 온천(溫泉) : 서북쪽으로 끝이 85리이다.
화촌(花村) : 북쪽으로 끝이 1백 10리이다. 오강(吳江) : 북쪽으로 끝이 1백 60리이다.
유전(柳田) : 북쪽으로 끝이 80리이다. 용산(龍山) : 북쪽으로 1백 50리이다. 농산(農山) : 북쪽으로 1백 리이다.
성지 금성(金城) : 태백산 남쪽 갈래이다. 일명 금성산, 또 사암산성(四巖山城)이라고 한다.
고성(姑城) : 일명 한미산(寒眉山)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1백 45리이다.
진보 토성진(?城鎭) : 북쪽으로 1백 20리 지점에 있다. 숙종 3년에 둔(屯)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6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병마첨절제사가 1명이다.
○ 숙종 4년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을 양덕(陽德)의 거유(車踰)에 두었다. 4현(峴)ㆍ양둔(兩屯)이다.
창고 사창(司倉) : 양암성(陽巖城) 가운데 있다. 원창(院倉) : 35리 거리인 온천방(溫泉坊)에 있다.
서창 : 80리 거리인 초천방(草川坊)에 있다. 중창(中倉) : 80리 거리인 유전방(踰田坊)에 있다.
별창(別倉) : 1백 30리 거리인 대구방(大邱坊)에 있다. 북창 : 1백 30리 거리인 농산방(農山坊)에 있다.
신창(新倉) : 1백 40리 거리인 화촌방(花村坊)에 있다. 산창(山倉) : 1백 30리 거리인 오강방(吳江坊)에 있다.
윤창(倫倉) : 50리 거리인 대륜방(大倫坊)에 있다. 평창(平倉) : 1백 20리 거리인 용산방에 있다. 가창(假倉).
토산 참버섯[眞?]ㆍ산개(山芥)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ㆍ누치.
맹산현 孟山縣
동으로 함경도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31리. 남으로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54리.
서로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20리,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33리, 북으로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50리,
서울과의 거리 1천 1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 철옹현(鐵甕縣)으로 현종(顯宗) 10년에 맹주(孟州) : 맹(孟)을 혹은 맹(猛)으로도 씀.
방어사(防禦使)라 일컫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蒙古) 병(兵)을 피하여 섬에 들어갔다가 44년 은주(殷州)에
병합되었고 원종(元宗) 2년에 육지에 나와 안주(安州)의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분리하여 현령을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원년에 또 안주(安州)에 합하였다가 14년에
복구되었다. 이 해에 다시 덕주(德州)에 합하여 덕맹현(德孟縣)이라 일컫다가 명년(明年)에 분리되어 현감
(縣監)을 두고 지금 이름을 고치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철옹(鐵甕)ㆍ맹주(孟州)ㆍ덕맹(德孟).
성씨 본현 유(劉) : 당악(唐岳). 김(金) : 수안(遂安)ㆍ풍주(?州)ㆍ염주(鹽州)ㆍ광리(光里)ㆍ경주(慶州)ㆍ남경
(南京)ㆍ삼척(三陟). 최(崔) : 장연(長淵). 임(林) : 용강(龍岡). 이악(利岳). 홍(洪) : 은률(殷栗). 강(康) :
등주(登州)ㆍ염주. 송(宋) : 송림(松林). 이(李) : 안악(安岳) 수안. 안(安) : 용성(龍城). 한(韓) :
안변(安邊). 박(朴) : 기린(麒麟). 방(方) : 풍주(?州).
산천 두무산(豆無山) : 현의 동북쪽 6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안도리산(安都里山) :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 우장산(牛場山) :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수라산(秀羅山)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공암산(孔巖山) :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대천(大川)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박달산ㆍ두무산ㆍ안도리산의 물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 흐르며 또 서쪽으로 덕천군(德川郡)에 이르러서 막탄(?灘)이 된다.
원지(圓池) : 현의 동쪽 60리에 있다.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담가 놓으면 비가 온다.
대천(大泉) : 객관(客館) 앞에 있으며 동쪽으로 흘러 남천에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자초(紫草)ㆍ사향(麝香)ㆍ봉밀(蜂蜜)ㆍ해송자(海松子)ㆍ수달(水獺)ㆍ복령(茯?)ㆍ석이[石?]ㆍ
오미자(五味子)ㆍ눌어(訥魚)ㆍ여항어(餘項魚).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불우 소림사(小林寺) : 수라산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공암산에 있다. 두무사(豆無寺) : 두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여단(?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철옹성(鐵甕城)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둘레 6백 50척(尺)으로 사면이 절벽이며 항아리 입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에 속한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 : 동쪽으로 50리, 서쪽으로 20리이다. 애일(艾日)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90리이다.
덕천(德川) :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지성(池城) :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내남(內南)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외남(外南) :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창고 읍창. 북창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남창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외창(外倉) : 위와 같다.
동창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애창(艾倉)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청산창(靑山倉)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애신창(艾新倉)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성창(城倉)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뽕나무.
누정 호연루(浩然樓)ㆍ공신루(拱宸樓) : 모두 읍내에 있다.
강동현 江東縣
동쪽은 성천부(成川府) 경계까지 5리, 북쪽은 동부(同府) 경계까지 32리,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8리,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46리, 서쪽은 평양부 경계까지 39리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건치연혁 고려 인종(仁宗) 14년에 서경기(西京畿)를 나누었는데, 잉을사향(仍乙舍鄕)ㆍ반석촌(班石村)ㆍ
박달관촌(朴達串村)ㆍ마탄촌(馬灘村)을 합하여 강동현(江東縣)으로 하고 현령을 두었다. 후에 성주(成州)에
속하였다가 공양왕 때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세종(世宗) 17년에 현 사람 곽거(郭巨)가 현령 이백선(李伯善)을 구타했기 때문에 현을 없애버리고
삼등현(三登縣)에 소속시켜 삼등(三登)의 치소(治所)를 현에 두었다가 성종(成宗) 13년 신축(辛丑)에 다시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송양(松壤).
성씨 본현 이(李) : 속(續). 김(金) : 함창(咸昌).
산천 대박산(大朴山) : 현의 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구룡산(九龍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손자산(孫子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만달산(蔓達山)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산정(山頂)에 무쇠로 만든
말[水鐵馬]이 있다.
환희산(歡喜山)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진사봉(進士峯) : 현의 서쪽 22리에 있으니 곧 옛 읍성(邑城)의 서쪽
기슭이며 아래로 강물에 임하고 있다.
잡파탄(雜派灘) : 현의 동쪽 자산군(慈山郡) 우가연(禹家淵)의 하류이며 또 동쪽으로 흘러 성천부 비류강(沸流江)
으로 들어간다. 서강(西江) : 현의 서쪽으로 22리이며, 옛 읍성 아래에 있다.
그 근원은 함경도 홍원현(洪原縣) 두무산(豆無山)에서 나와 삼등현 능성강(能成江)과 합하여 서쪽으로 대동강
(大同江)에 흘러 들어간다.
○ 강 중간에 돌다리가 있으니 넓이는 7, 8척 되고 높이는 13척이며 길이는 70여 보(步)이며 다리 위쪽의 수심
(水深)은 5, 6척으로 사람이 건널 수 없다. 속어(俗語)로 용교(龍橋)라 부른다.
수정천(水精川) : 현의 남쪽으로 1리에 있으며 서강(西江)으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자초(紫草)ㆍ닥나무.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서강원(西江院) : 서강의 동안(東岸)에 있다.
불우 용복사(龍福寺) : 구룡산에 있다. 대산사(臺山寺) : 환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祠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대박산(大朴山)에 있다.
여단(?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邑城) : 서강 동안(東岸)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둘레는 5천 7백 59척(尺)이며 안에 우물 둘이 있다.
고려 고종(高宗) 3년에 거란(契丹) 유종(遺種)인 금산(金山)과 금시(金始) 두 왕자가 스스로 대요수국(大遼收國)
왕이라 일컫고 석권하여 동쪽으로 강동성(江東城)에 들어와 점령하고 있었다.
몽고 장수 합진(哈眞)과 찰랄(?刺)이 동진(東眞) 만노(萬奴)가 보낸 완안자연(完顔子淵)의 군사와 같이 와서 토벌
하였다. 때마침 큰눈이 내려 양도(糧道)가 이어지지 않았다. 합진이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군량을 청하였다.
왕(王)이 조충(趙?)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어 열 장군의 군사와 신기대각내상(神騎大角內廂)의 정졸(精卒)을
영솔하고 가서 성 아래서 만났다. 합진은 성의 남문(南門)에서 동남문(東南門)에 이르기까지 못을 파 깊이와
넓이가 열 자씩 되었다. 서문(西門) 이북은 완안자연에게 맡기고 동문(東門) 이북은 김취려에게 맡겨 모두 해자
[隍]를 파서 도망하는 것을 막았다. 적(賊)의 괴수 감사왕자(感捨王子)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그 관인(官人) 군졸
(軍卒) 부녀 5만 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왕자(王子)의 처자식과 위승상(僞承相) 평장(平章) 이하 1백여 명은 모두 군전(軍前)에서 베어 죽이고, 합진이
부녀 동남(婦女童男) 7백 명과 우리 백성으로 포로가 되었던 사람 2백 명은 우리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고 돌아갔다.
대총(大塚) :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태자원(太子院) : 현의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석탑(石塔)이 있고 탑 남쪽에는 연산(連山)이 있다. 속담에 옛
태자(太子)의 태(胎)를 감춘 곳이라 한다. 잉을사향(仍乙舍鄕) : 현의 남쪽으로 12리에 있다.
기천향(岐淺鄕) : 현의 북쪽으로 3리에 있다. 반석촌(班石村) : 현의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박달관촌(朴達串村) : 현의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마탄촌(馬灘村) : 현의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제영 유정현(柳廷顯)의 시에, "봉악(鳳岳)은 구름을 치솟아 빼어났고, 용교는 물에 들어가 비껴 있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 : 끝이 20리이다. 고읍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도산(陶山) : 북쪽으로 50리이다.
구지(區地) : 북쪽으로 30리이다. 마탄(馬灘)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원당(元堂)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고천(高泉)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추탄(楸灘)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도마산(都馬山)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물구지(勿仇知)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 기천향(岐淺鄕)은 북쪽으로 3리이다.
창고 읍창. 서창 :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남창 : 남쪽으로 45리 지점에 있다. 성창 : 평양성 가운데 있다.
진도 열파정진(閱波亭津) : 서쪽으로 20리이다. 원연진(圓淵津) : 위와 같다.
한대진(漢垈津) : 북쪽으로 25리이다. 파릉진(巴陵津).
토산 뽕나무ㆍ눌어ㆍ금린어.
누정 열파정(閱波亭) : 서강(西江) 동쪽 언덕에 있다. 영금루(暎金樓) : 서쪽으로 3리 지점에 있다.
추흥루(秋興樓) : 읍내에 있다.
은산현 殷山縣
동으로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20리, 서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12리,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23리.
남으로 성천부(成川府) 경계까지 20리, 북으로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49리로 서울과의 거리는 751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고려 흥덕군(興德郡)으로 일명 동창(同昌)이며 성종(成宗) 2년에 은주방어사(殷州防禦使)라
일컬었다. 고종(高宗) 18년에 현청(縣廳)이 몽고병을 피하여 섬에 들어갔다가,
후에 육지로 나와 성주(成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자산군(慈山郡)에 속하였다가 15년에
분리하여 현감을 두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동창(同昌)ㆍ흥덕(興德)ㆍ은주(殷州).
성씨 본현 피(皮)ㆍ이(李) : 모든 수안(遂安). 임(林) : 영풍(永?). 오(吳)ㆍ정(鄭) : 모두 해주(海州).
용(龍) : 홍천(洪川). 박(朴) : 춘천(春川). 김(金)ㆍ이(李)ㆍ박(朴) : 모두 속(續).
산천 진강산(鎭江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천성산(天聖山) : 현의 동북쪽 30리에 있다. 관음(觀音) 삼봉(三峯)이 있고 중봉(中峯) 바위 위에는 말 발자국이
있으니 속담에 동명왕(東明王)의 인마(麟馬) 자국이라 전한다.
숭화산(崇化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상(山上) 석벽(石壁)에는 굴이 있고 굴 안에는 못이 있고 못 안에는
푸른 연꽃이 있다. 부판산(付板山) :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풍혈(風穴) : 부판산 아래에 있다. 대풍(大風)이 열흘 동안에 두세 번 일어난다.
동천(東川)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며, 천성산(天聖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대천(大川)에 들어간다.
대천(大川) : 현의 동북쪽으로 60리에 있으며 남으로 흘러 자산군(慈山郡) 우가연(禹家淵)으로 들어간다.
개동지(价洞池) :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흘러 동천(東川)에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봉밀(蜂蜜)ㆍ칠(漆)ㆍ자초(紫草)ㆍ인삼ㆍ오미자(五味子)ㆍ안식향(安息香)ㆍ사향(麝香)ㆍ
해송자(海松子)ㆍ애끼찌[弓幹木]ㆍ수달(水獺)ㆍ영양(羚羊) 신증 납[鉛]ㆍ철(鐵) : 자오리(自吾里)에서 난다.
누정 가학정(駕鶴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으로 1리에 있다.
불우 천성사(天聖寺) 관음사(觀音寺) : 모두 천성산(天聖山)에 있다. 가섭암(迦葉菴)ㆍ
아난굴(阿難窟) : 모두 숭화산(崇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祠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다. 여단(?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邑城) : 토축(土築)으로 둘레 5168척이며 안에 아홉 개의 우물 세 못이 있다.
흥덕역(興德驛) : 옛터가 현의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금천역(金川驛) : 옛터가 현의 동북쪽 옛 순천(順川) 29리에 있다.
신증 인물 본조 이자화(李自華) :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하여 3년을 거상을 입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속이는
행동이라 하여 장차 죽이려 하니 이자화가 대답하기를 ’단지 군부일체(君父一體)인 줄만 알았고, 나라 법이 이런
줄 몰랐다.’ 하고 조용히 형(刑)을 받으니, 그때 나이 70여 세였다.
효자 고려 은태(殷台) : 김상택(金尙宅)의 딸이다. 나이 아홉 살에 부친이 악한 질병에 걸리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마시게 하여 즉시 병이 나았다. 그 문과 동네를 정표(旌表)하였다.
본조 안춘만(安春萬) : 모친(母親)이 악한 질병에 걸리자 안춘만이 왼쪽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에게 올리니 그 병
이 곧 나았다. 이자화(李自華) : 어릴 적부터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조석(朝夕)으로 반드시
친히 밥을 지어 공양하며 시절의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올렸다. 부모가 돌아가자 손발을 굴리며 통곡
하며 죽은 부모를 섬기기를 생존시처럼 하였다. 부부(夫婦)가 같이 자지 않고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성종(成宗)
의 상(喪)을 듣자 마치 부모를 여읜 것같이 3년을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소금장과 채소
과일을 먹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들리자 증산훈도(甑山訓導)를 제수하고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인조 21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얼마 후에 다시 현으로 강등시켰다.
방면 현내, 용화(龍化) : 동쪽으로 35리이다. 구상(仇上) : 동쪽으로 처음이 13리, 끝이 25리이다.
애전(艾田)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5리이다. 구하(仇下)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5리이다.
풍상(楓上)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풍하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8리이다.
임파(林坡)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조음(助音)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마산(馬山)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함오(咸吾)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선원(仙院) : 서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 상덕(尙德)은 20리, 후덕(厚德)은 5리, 모현(慕賢)은 15리, 제남(濟南)은 30리, 경천(擎天)은 30리,
약천(藥天)은 25리, 진북(鎭北)은 50리, 봉명(鳳鳴)은 60리, 사원(蛇員)은 45리이다. 이상은 총목에 실렸다.
성지 ○ 고려 태조 12년에 흥덕진(興德鎭)을 쌓았다. 23년에 은주성(殷州城)을 쌓았는데, 7백 39칸이다.
창고 현창(縣倉). 신창(新倉) : 읍내에 있다. 북창 : 북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봉창(鳳倉) : 북쪽으로 60리 지점에 있다. 산창(山倉) : 서쪽으로 60리, 자모산성에 있다.
진도 우가강진(禹家江津)ㆍ북창진(北倉津)ㆍ금암진(金巖津)ㆍ무진대진(無盡臺津).
교량 정자교(亭子橋) : 동쪽으로 1리 지점에 있다. 청천교(淸川橋) : 동쪽으로 7리 지점에 있다.
유탄교(柳灘橋) : 서쪽으로 7리 지점에 있다. 판교(板橋) : 북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
고석교(孤石橋) : 동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강탄교(强灘橋) :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산개(山芥)ㆍ시고 단 채소ㆍ누치ㆍ금린어.
강계도호부 江界都護府
동으로 고자성군(古慈城郡) 경계와 1백 30리이고, 남으로 희천군(熙川郡) 경계와 2백 70리이고,
함경도 함흥부(咸興府) 경계와 3백 6리이고, 서로는 위원군(渭原郡) 경계와 36리이고 북으로 압록강(鴨綠江)
과는 1백 3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3백 61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독로강(禿魯江)이라 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만호(萬戶)를 두고 18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진변(鎭邊)ㆍ진성(鎭成)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사군(四軍)을
설치하고 상부천호(上副千戶)를 보내어 그것을 관장하게 했다. 조선 태종 원년에 입석(立石)과 등이언(等伊彦)
두 곳을 합쳐서 석주(石州)라 부르고 태종 3년에 부(府)로 고쳤다.
13년에는 통례대로 도호부(都護府)라 고쳤고 세종(世宗) 24년에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뒀다가 28년에
그것을 없앴다. 32년에 다시 만들었다가 35년에 또 없앴다.
세조(世祖) 때 우예(虞芮)와 자성(慈城) 두 군을 고쳐 그 주민을 부에 옮기고 후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두 개의 보(堡) : 추파(楸坡)ㆍ상토(上土).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
토관(土官) 도할사(都轄司) 도할(都轄)ㆍ전사(典事) : 각 1명.
전례서(典禮署) 감부(勘簿)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
융기서(戎器署) 사창서 장사(掌事)ㆍ섭사(攝事) : 각 1명.
전주국 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
사옥국 섭사(攝事) : 각 1명.
진포위 여과(勵果)ㆍ부여과(副勵果)ㆍ여정(勵正)ㆍ부여정(副勵正) : 각 1명. 여맹(勵猛)ㆍ
부여맹(副勵猛) : 각 2명. 여용(勵勇) : 3명. 부여용(副勵勇) : 각 5명.
군명 석주(石州)ㆍ청원(淸源).
성씨 본부 전(田) : 과천(果川). 이(李) : 용구(龍駒). 박(朴) : 밀성(密城). 자성 장(張)ㆍ김(金)ㆍ박(朴)ㆍ정(鄭)ㆍ
한(韓)ㆍ최(崔)ㆍ이(李)ㆍ배(裵)ㆍ고(高) : 모두 내(來). 우예 신(辛)ㆍ이(李)ㆍ최(崔)ㆍ박(朴)ㆍ김(金)ㆍ전(田)ㆍ
정(丁) : 모두 내(來).
풍속 민풍이 순박하고 간략하다 : 황희(黃喜)의 시에, "땅은 궁벽한데 풍속은 어찌 순박 하고 간략한가, 판잣집
으로 하여금 빗소리만 많게 하는구나." 하였다.
형승 땅은 말갈(靺鞨)에 이어져서 서북쪽의 큰 진(鎭)이다 : 정문형(鄭文炯)의 인풍루기(仁風樓記)에 있다.
산천 독산(獨山) : 부(府) 서남 46리에 있다.
적유령(狄踰嶺) : 부(府) 남쪽 2백 69리, 희천군(熙川郡) 경계에 있다. 즉 함경도 경성부(鏡城府) 백산(白山) 동쪽
산 끝이니 우리나라 서북쪽의 큰 관문이다.
설렬한령(薛列罕嶺) : 부(府) 남쪽 3백 6리에 있고 동은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공민왕이 우리 태조로 동북면 원수를 삼아 동녕부(東寧府)를 쳐서 북쪽 원(元) 나라를 끊게 했다.
태조는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을 이끌고 동북면으로부터 초황령(草黃嶺)을 넘어 6백여 리를 가서 설한령(薛罕嶺)
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영(嶺)이다.
공귀산(公貴山) : 부(府) 남쪽 20리에 있다. 두읍개산(豆邑介山) : 부(府) 서쪽 36리 위원군(渭原郡) 경계에 있다.
이령(梨嶺) : 부(府) 북쪽 57리에 있다. 황청동산(黃靑洞山) : 부(府) 북쪽 30리에 있다.
오을외령(於乙外嶺) : 부 서쪽 36리에 있다. 마마해천(??海川) : 부 남쪽 5리에 있다. 함경도 삼수군(三水郡) 경계
로부터 나와서 서쪽 독로강으로 흐른다.
고영천(古營川) : 부 북쪽 2리에 있다. 고자성(古慈城) 서남쪽에서 근원하여 나와 추파성(楸坡城) 북쪽을 흘러
지나서 독로강으로 들어간다. 독로강(禿魯江) : 부 서쪽 1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희천군
(熙川郡)과의 경계인 적유령 밑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함경도와의 경계인 화을점(和乙岾) 밑에서 나와 부
남쪽 입석(立石)에 이르러 합류하여 독로강이 되어 위원군(渭原郡) 경계를 지나 압록강에 들어간다.
마상화(磨尙和) : 독로강 가까이의 나루터이다. 압록강(鴨綠江) : 부(府)의 서쪽 1백 27리에 있다.
하면동(何眠洞)ㆍ호단(呼丹)ㆍ입암동(立巖洞)ㆍ나한덕(羅漢德)ㆍ시개(時介)ㆍ원시덕(元時德)ㆍ도을한동
(都乙恨洞)ㆍ가사동(家舍洞)ㆍ대훈두(大薰豆) : 이상은 무창(茂昌)이다. 소훈두(小薰豆)ㆍ묵동(墨洞)ㆍ나리천
(那里川)ㆍ감음동(甘音洞)ㆍ누둔동(漏屯洞)ㆍ봉천대(奉天臺)ㆍ부을모동(夫乙毛洞)ㆍ주사동(朱砂洞) :
이상은 여연(閭延)이다.
소롱괴동(所弄怪洞)ㆍ조명간동(趙明干洞)ㆍ오용괴동(於用怪洞)ㆍ신송동(申松洞)ㆍ시시내동(時時乃洞)ㆍ
남파동(南坡洞) : 이상은 우예(虞芮)이다. 소포리(小甫里)ㆍ고도동(古道洞)ㆍ파탕동(波湯洞) :
이상은 자성(慈城)이다.
삼기현(三岐峴)ㆍ황성평(皇城坪) : 만포(滿浦)에서 30리의 거리가 되는 곳으로 금(金) 나라가 도읍했던 곳이다.
황제묘(皇帝墓) : 황성평(皇城坪)에 있으니, 세상에서 전해 내려온 말로는 금(金) 나라 황제묘라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가히 10장이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왕자묘가 있다.
구랑포동(仇郞浦洞)ㆍ서동(瑞洞)ㆍ용괴동(用怪洞)ㆍ고도수동(古都水洞) : 이상은 강계(江界)에 있다.
옹촌리(甕村里) : 건주위(建州衛)에 속하고 만포(滿浦)와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토산 실ㆍ삼ㆍ숭어ㆍ여항어ㆍ돈피ㆍ청서(靑鼠)ㆍ수달피ㆍ영양ㆍ인삼ㆍ잣ㆍ꿀ㆍ화피(樺皮)ㆍ수포석(水泡石)ㆍ
오미자ㆍ사향ㆍ자초(紫草).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둘레가 2천 4백 70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안에 12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관방 만포진(滿浦鎭) : 부(府) 서쪽 1백 28리에 있다. 돌성으로 둘레가 3천 1백 72자이고 높이가 5자이다.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이 있고 군창이 있으며 또 행성이 있다.
고산리보(高山里堡) : 부 서쪽 1백 25리에 있다. 석성으로 둘레가 1천 1백 6자이고 높이는 4자이다,
병마첨절제사영이 있고 군창이 있다.
○ 이상 첨절제사(僉節制使) 각 한 명이 있다.
추파보(楸坡堡) : 부(府) 동쪽 30리에 있다. 석성으로 둘레가 2천 2백 30자이고 높이가 4자다. 군창이 있다.
상토보(上土堡) : 부(府) 북쪽 1백 리에 있다. 석성으로 둘레가 5백 30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또 군창이 있다.
○ 이상에 병마만호(兵馬萬戶)가 각 한 명씩 있다.
외괴보(外怪堡) : 부 서쪽 1백 23리에 있다. 석축은 둘레가 4백 33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등공구비(登公仇非) : 부(府) 북쪽 78리에 있다. 벌등포보(伐登浦堡) : 부 서쪽 1백 13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
가 6백 55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 이상은 권관(權管)을 보내 지키게 한다.
신증 고합보(高哈堡) : 부 남쪽 90리에 있다. 정덕(正德) 무인년에 목책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5백 자이고,
높이가 5자이다.
마마해보(??海堡) : 부 동쪽 15리에 있다. 정덕(正德) 무인년에 석성을 쌓았다. 둘레가 8백 7자이고, 높이가 5자
이다.
황청보(黃靑堡) : 부 북쪽 30리에 있다. 홍치(弘治) 경신년에 목책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7백 20자이고,
높이가 6자이다. 종포보(從浦堡) : 부 북쪽 25리에 있다. 홍치 경신년에 목책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7백 자이다.
봉수 허실리봉수(虛失里烽燧) : 부(府) 북쪽 8리에 있다. 북은 김마흘가북(金?訖家北)에 응한다.
김마흘가북봉수(金?訖家北烽燧) : 부(府) 북쪽 35리에 있다. 동은 석용봉(石茸峯)에 응하고, 서는 허실리에 응한다.
석용봉봉수(石茸峯烽燧) : 부(府) 동북쪽 50리에 있다. 서는 김마흘가북(金?訖家北)에 응하고 북은 안흥도가북
(安興道家北)에 응한다.
안흥도가북봉수(安興道家北烽燧) : 부(府) 북쪽 30리에 있다. 동은 김마흘가북(金?訖家北)에 응하고 북은 안명
수가북(安明守家北)에 응한다.
안명수가북봉수(安明守家北烽燧) : 부 북쪽 50리에 있다. 남으로 안흥도가북(安興道家北)에 응하고, 북쪽으로
이현(梨峴)에 응한다.
이현봉수(梨峴烽燧) : 부(府) 북쪽 70리에 있다. 남으로 안명수가북(安明守家北)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산양천
(山羊遷)에 응한다.
산양천봉수(山羊遷烽燧) : 부 북쪽 1백 10리에 있다. 남쪽은 이현에 응하고 서쪽은 송봉(松峯)에 응하여 있다.
송봉봉수(松峯烽燧) : 부 북쪽 93리에 있다. 동쪽은 산양천에 응하고 서쪽은 김성민가북(金成敏家北)에 응한다.
김성민가북봉수(金成敏家北烽燧) : 부(府) 북쪽 1백 50리에 있다. 동쪽으로 송봉(松峯)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여둔현(餘屯峴)과 응한다.
여둔현봉수(餘屯峴烽燧) : 부 북쪽 1백 50리에 있다. 동쪽은 김성민가북(金成敏家北)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여둔
에 응한다. 여둔봉수(餘屯烽燧) : 부 북쪽 1백 61리에 있다. 서쪽은 이차가대(伊車加大)에 응하고, 동쪽은 여둔현
과 응한다.
이차가대봉수(伊車加大烽燧) :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남쪽은 재신동(宰臣洞)과 응하고, 동쪽은 여둔과 응한다.
재신동봉수(宰臣洞烽燧) :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북쪽은 이차가대와 응하고, 서쪽은 분토(分土)에 응한다.
분토봉수(分土烽燧) : 부 서쪽 1백 30리에 있다. 동쪽은 재신동과 응하고, 남쪽은 허린포(許麟浦)에 응한다.
허린포봉수(許麟浦烽燧) : 부 서쪽 1백 30리에 있다. 북쪽은 분토와 응하고, 서쪽은 마시리(馬時里)에 응한다.
마시리봉수(馬時里烽燧) : 부 서쪽 1백 45리에 있다. 동쪽은 허린포와 응하고, 서쪽은 위원사장구비(渭源舍長仇非)
에 응한다.
신증 등공구비봉수(登公仇非烽燧) : 부(府) 북쪽 1백 15리에 있다. 서쪽은 여둔에 응하고, 북쪽은 송봉(松峯)에
응한다.
누정 인풍루(仁風樓) : 부(府) 성안 서쪽에 있다.
○ 정문형(鄭文烱)의 기문에, "강계부(江界府) 땅은 말갈(靺鞨)에 이어 있고, 산천이 돌고 돌아 이 나라 서북쪽
큰 진(鎭)으로 중요한 요새지이다. 전하(殿下) 4년 임진년 봄에 윤말손(尹末孫)공이 중추부(中樞府)로부터 이
땅에 부사로 와서 부(府) 성 서북쪽 구석에 누(樓)를 지었다. 누 앞에는 교장(敎場)을 두어 평일에는 장교들로
하여금 무예를 연습했다. 내가 변새 지방을 순찰하다가 이 부에 이르니 나에게 누의 이름 붙일 것을 청하기에
이름하여 인풍(仁風)이라 지었다. 여기에 대해 어떤 분이 힐난하여 말하기를, ’누의 이름이 이상하도다.
누각은 변진(邊鎭)에 있어 힘쓰는 바가 병사에 관한 것이고, 사철 경색이 아주 다른데 하필 이로써 이름할 것인가.’
하였다. 내가 거기에 대해 풀어 말하기를, ’대개 지금 장수 된 이들은 한갓 위엄과 무예만을 일삼고 날마다 다
사냥만 좇으니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하려는 자가 없다. 오직 공(公)만은 그렇지 않아 이 백성을 어루만지기를
마치 갓난애와 같이 하고 사졸(士卒)과 더불어 달고 쓴 것을 같이 하고 예악(禮樂)을 기뻐하고 시서(詩書)를 가꾸
게 하며, 가르치되 바르게 하고 양성함이 기본이 있으며, 호령은 엄하고 밝으며 상과 벌은 바르고 믿게 한 것이
어진 사람의 일이다. 그것으로써 백성이 편안하게 살게 되어 백성이 불어나고 무기가 견고해지고 예리해지며
사졸(士卒)들이 즐겨 따르고, 현명하고 능한 사람이 힘을 바쳐서 모두가 윗사람을 섬기는 마음에 친함이 있고,
그 인풍에 미치는 바가 멀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자(仁者)는 대적할 이가 없다.’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공이 이 누각을 짓고 내가 이 누각을 이름한 것은 어찌 뜻이 없는 것이겠는가.’ 하니, 그분이 말하기를, ’그렇습
니다.’ 했다. 그래서 여기 쓴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부(府) 성안 서쪽에 있다.
역원 입석역(立石驛) : 부 남쪽 1백 65리에 있다. 성간역(城干驛) : 부(府) 남쪽 1백 5리에 있다.
종포역(從浦驛) : 부 성안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부 서쪽 55리에 있다.
파원(坡院) : 부 남쪽 2백 40리에 있다. 신증 오을외원(於乙外院) : 부 서쪽 40리에 있다.
임자파원(林子陂院) : 부 서쪽 25리에 있다.
불우 법장사(法藏寺) : 봉향산(奉香山)에 있다. 영각사(英覺寺) :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심원사(深原寺) : 선주산(善注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 북쪽 10리에 있다.
여단(?壇) : 부 북쪽에 있다.
고적 여연폐부(閭延廢府) : 동쪽은 무창(茂昌) 다락구비(多落仇非)에 이르기까지 45리다. 남쪽으로는 자성(慈城)
신로현(新路峴)에 이르기까지 1백 5리이고, 서쪽은 우예(虞芮) 하무로북(下無路北)까지 65리이고,
북쪽은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리다. 본래는 함길도(咸吉道) 갑산부(甲山府)의 여연촌(閭延村)이었다.
본조 태종(太宗) 16년에 군현(郡縣)과 거리가 멀어 소훈두(小薰豆) 서쪽을 나누어 여연군(閭延郡)으로 삼아
본도에 속하게 했다. 세종(世宗) 17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어 거기에 진(鎭)을 두어 첨절제사(僉節制使)
로 삼았다. 세조(世祖) 원년에 그 땅을 비워 두어 그 백성을 귀성(龜城)으로 옮겼다.
무창폐군(茂昌廢郡) : 동쪽은 함경도 갑산부(甲山府) 마상화(磨尙和)에 이르기까지 1백 60리에 있고, 남쪽으로는
자성군(慈城郡) 죽전현(竹田峴)에 이르기까지 88리에 있고, 서쪽으로는 여연부 소온량(所溫梁)에 이르기까지
1백 33리에 있고, 북쪽은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2리이다. 본래는 여연부(閭延府) 상무로보(上無路堡)였다.
세종 18년에 만호를 두고 22년에는 보(堡)로써 여연과 멀리 떨어져 있어 명령과 원호가 미치지 못해 여연부에
출합(出哈)과 손량(孫梁)ㆍ후주(厚州)ㆍ보산(甫山) 등지의 백성을 나누어 무창현(茂昌縣)을 두었다. 24년에 군
으로 승격되고 세조(世祖) 원년에 그 땅을 비워 그 백성을 귀성부에 옮겼다.
우예폐군 : 동쪽은 여연 하무로(下無路)에 이르기까지 30리이고, 남쪽은 자성 잉질항(芿叱項)까지 50리이고,
서쪽으로는 강(江)에 이르기까지 1리이고, 북쪽은 조명간(趙明干)까지 23리이다. 본래는 여연부 우예보(虞芮堡)
였다. 처음에는 만호를 두었다가 세종 25년에 보가 본부와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본부의 유파(楡坡)ㆍ
조명간ㆍ소우예(小虞芮)ㆍ자성군ㆍ태일(泰日) 등지의 민가를 나누어 군을 두어 강계부(江界府) 소관으로 했다.
세조 원년에 그 땅을 비워 부에다 그 백성을 이주시켰다.
자성폐군(慈城廢郡) : 북쪽으로 상토보(上土堡)와의 거리가 1백 20리이다. 본래는 여연부 시번강(時番江)의
자작리(慈作里)였다. 세종 6년에 소보리(小甫里) 등 여덟 곳에 사는 백성으로 시번(時番)의 장항(獐項)으로 모
이게 하여 보호하며 나무로 방책을 만들고 수자리를 방비하게 했다. 14년에 파저강(婆猪江) 야인이 사람을 죽
이고 약탈해 갔다. 여연과 더불어 그 땅이 강계와 서로 떨어져 있어 서로 구하는데 미치지 못했으므로 다음해
곧 두 고을 중간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고 군을 두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강계부 소관으로 삼았다. 세조에
이르러 그 땅을 비우고 그 백성을 부에 옮겼다.
후주보(厚州堡) : 고무창(古茂昌) 동쪽 1백 33리에 있다. 보산보(甫山堡) : 고무창(古茂昌) 동쪽 83리에 있다.
시개보(時介堡) : 옛 무창(茂昌) 동쪽 21리에 있다. 봉포보(奉浦堡) : 옛 무창(茂昌) 서쪽 38리에 있다.
가사동보(家舍洞堡) : 옛 무창(茂昌) 서쪽에 있다. 훈두보(薰豆堡) : 옛 여연 동쪽 40리에 있다.
성파보(城破堡) : 옛 여연 남쪽에 있다. 하무로보(下無路堡) : 옛 여연 서쪽 45리에 있다.
유파보(楡坡堡) : 옛 우예(虞芮) 동쪽에 있다. 조명간보 : 옛 우예 북쪽 25리에 있다.
소우예보(小虞芮堡) : 옛 우예 서쪽에 있다. 태일보 : 옛 우예 서쪽에 있다.
신증 효자 본조 유산(劉山) : 모친이 나쁜 질병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써서 병이 나았다.
일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열녀 본조 막덕(莫德) : 갑사(甲士) 박의창(朴義昌)의 처이다. 남편이 죽으매 애타게 마음이 상하도록 울부짖다
명절날을 만나면 의복을 만들어 제사지내고 나서 그것을 태웠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세조 13년에 동서중 삼도절도사(東西中三道節度使)를 두고, 본부(本府)를 좌도(左道)로, 영변(寧邊)을 중도
(中道)로, 창주(昌州)를 우도(右道)로 하였다가 예종 원년에 세 도를 합하여 도로 영변부(寧邊府)가 다스렸고,
숙종 18년에 겸청북육군 우방어사(兼淸北陸軍右防禦使)로써 부사를 겸하였다.
방면 부내삼부(府內三部)ㆍ입석방(立石坊) : 남쪽으로 1백 50리이고, 동쪽은 장진(長津) 경계 2백 50리에 이르고,
남쪽은 희천(熙川) 경계 2백 40리에 이르는데, 45촌(村)을 합하였다.
공귀방(公貴坊) : 동쪽으로 80리, 서ㆍ북쪽은 각각 25리 거리이며, 14촌을 합하였다.
성우방(城于坊) : 남쪽은 처음이 40리, 끝이 1백 30리이며, 동ㆍ남쪽은 거리가 1백 30리인데 26촌을 합하였다.
어뢰방(漁雷坊) : 서쪽은 끝이 1백 80리이며, 20촌을 합하였다.
시시천방(時時川坊) : 서북쪽은 끝이 30리이며, 15촌을 합하였다.
고산리방(高山里坊) : 서쪽은 끝이 1백 50리이고, 세 촌을 합하였다.
외질괴방(外叱怪坊) : 서북쪽으로 1백 50리에 있으며 일곱 촌을 합하였다.
종포방(從浦坊) : 북쪽으로 끝이 70리이며, 17촌을 합하였다.
팔판동방(八板洞坊) : 북쪽으로 끝이 1백 20리이며, 일곱 촌을 합하였다.
곡하방(曲河坊) : 서쪽으로 끝이 60리이며, 11촌을 합하였다.
자성방(慈城坊)ㆍ삼천방(三川坊)ㆍ신광(神光) : 8촌이 예속되어 있다.
평남(平南) : 7촌이 예속되어 있다. 상토(上土) : 6촌이 예속되어 있다. 만포(滿浦) : 6촌이 예속되어 있다.
대등(代登) : 다섯 촌이 예속되어 있다. 고산리(高山里) : 여섯 촌이 예속되어 있다.
창고 부창(府倉) : 읍(邑) 안에 있다. 오모로창(吾毛老倉)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별하창(別河倉) : 동남쪽으로 2백 20리에 있다. 성간창(城干倉) : 남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전천창(箭川倉) :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입석창(立石倉) :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사창(社倉) : 동남쪽으로 2백 60리에 있다. 용림창(龍林倉) : 동남쪽으로 2백 80리에 있다.
동창(東倉)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추파창(楸坡倉)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종포창(從浦倉) :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상토창(上土倉) : 북쪽으로 90리에 있다.
팔판동창(八板洞倉) : 북쪽으로 80리에 있다. 만포창(滿浦倉) : 서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시시천창(時時川倉) : 서북쪽으로 1백 리에 있다. 고산리창(高山里倉) : 서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어뢰창(漁雷倉) :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50리에 있다. 자성창(慈城倉).
진보 평남진(平南鎭) : 동남쪽으로 2백 20리이며, 숙종 4년에 별장(別將)을 설치하여 평남진에 주둔시켰다가
뒤에 승격하였는데,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을 두었다. 군(軍)은 모두 2백 8명이고, 진창(鎭倉) 셋이 있는데
곡식은 모두 6백 석이다. 후포진(後浦鎭) :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연산군 6년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숙종 17년에 돌로 성을 쌓고, 권관(權管)으로 올렸다.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며, 군(軍)은 모두 2백 13명
이고 진창이 하나이며, 곡식은 모두 1천 2석이다.
고적 본부(本府)ㆍ강외(江外). 황성평(皇城坪) : 만포(滿浦)와의 상거(相距) 30리인데, 금국소도(金國所都)에
말하기를, "황제의 무덤이 황성(皇城)에 있어 세상에 전하기를, "금 나라 황제의 무덤에 초석(礎石)을 고가(高哥)
십장(十丈)이 만들었는데, 안에 세 침(寢)이 있으니 황후의 무덤과 황자의 무덤이다.’ 하였다." 한다.
옹촌리(甕村里)는 건주위에 속하며, 만포와의 거리는 2백 70리이다.
토산 장어(長魚)ㆍ산양(山羊)ㆍ누치[訥魚]ㆍ산저(山猪)ㆍ쏘가리[錦麟魚]ㆍ붕어ㆍ점어(鮎魚)ㆍ석이ㆍ송이ㆍ
목적(木賊)ㆍ산사(山査)ㆍ진자(榛子)ㆍ산포도(山葡萄)ㆍ추자(楸子)ㆍ구리ㆍ쇠[鐵] : 옛 연주(延州)에서 산출
한다. 율무[薏苡]ㆍ벼[稻]ㆍ기장[黍稷]ㆍ옥수수 : 자성(慈城)에서 많이 생산하며 토민(土民)이 이것으로써
양곡을 대신한다.
역참 관문참(官門站)ㆍ부로지참(夫老只站) : 남쪽으로 55리에 있다. 성간참(城干站)ㆍ입석참(立石站)ㆍ
양파참(梁坡站)ㆍ고암참(高巖站)ㆍ무주참(茂州站)ㆍ여진원(女眞院) : 서쪽으로 55리에 있다.
시시천원(時時川院) : 서북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어뢰원(漁雷院) :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 남쪽으로 3리에 있다. 별하교(別河橋) : 남쪽으로 80리에 있다.
북천교(北川橋) : 북쪽으로 2리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중성간교(中城干橋) : 남쪽으로 95리에 있다.
누정 세검정(洗劍亭)ㆍ수강(受降) : 모두 만포진(滿浦鎭) 위에 있다.
관덕정(觀德亭) : 민군정(閔軍亭) : 모두 성안에 있다.
사원 경현서원(景賢書院) : 성안에 있는데, 광해군 기유년에 세우고 숙종 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언적(李彦迪) : 문묘(文廟)조에 있다.
위원군 渭原郡
동쪽으로 강계부 경계까지 1백 50리이고, 북쪽은 강계부 경계까지 52리이고, 남쪽은 이산군(理山郡) 경계까지
39리이고, 서쪽은 강계군 경계까지 43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이산군 도을한보(都乙漢堡)이다. 본조 세종 25년에 보(堡)가 사방과 멀리 격절되어 있어
갑자기 급히 응원할 일이 있으면 곤란하여 강계와 이산 땅을 나누어 위원군을 두었다. 세조 6년에 혁파하여
이산에 속하게 했다가 9년에 다시 복구하여 진(鎭)을 두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밀산(密山)ㆍ도을한(都乙漢).
성씨 본부 송(宋) : 이산(理山).
산천 북산(北山) : 군 북쪽 4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나, 옛 이름은 대비라(大非羅)이다.
남산(南山) : 군 남쪽 2리에 있다. 서산(西山) : 군 서쪽 2리에 있다. 봉천대산(奉天臺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화등라산(和等羅山) : 군 남쪽 39리에 있다. 독산(獨山) : 군 동쪽 1백 5리에 있다.
남파산(南波山) : 군 서쪽 13리에 있다. 동천산(銅遷山) : 군 서쪽 60리에 있다.
임리점(林里岾)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압록강 : 군 북쪽에 있다.
독로강(禿魯江) : 군 동쪽 18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강계부에 있다.
남대천(南大川) : 근원은 강계부와 또 고이산(古理山) 응기천(鷹岐川)에서 나와 합쳐서 군 남쪽 1리를 지나 서쪽
으로 압록강에 들어간다.
회동(檜洞) : 이하는 압록강과 이어져 있는 바깥 땅이다.
용괴동(用怪洞)ㆍ야둔동(也屯洞)ㆍ다회평(多回坪) : 건주위(建州衛)에 속하며 군과의 거리가 2백 40리다.
토산 실ㆍ삼ㆍ돈피ㆍ청서ㆍ수달피ㆍ영양ㆍ꿀ㆍ수포석ㆍ인삼ㆍ잣ㆍ오미자ㆍ사향ㆍ여항어ㆍ애끼찌나무.
성곽 읍성 : 석축으로 둘레가 1천 1백 72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성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
가을한동행성(加乙罕洞行城) : 석축으로 길이가 8백 74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동구행성(洞口行城) : 석축으로 길이가 1천 1백 72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관방 가을한동보(加乙罕洞堡) : 군 서쪽 24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5백 41자이고, 높이가 9자이다.
신증 직동성(直洞城) : 군 서쪽 40리에 있다. 정덕(正德) 병인년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천 자, 높이
18자 궁가(弓家)가 1백 30이고, 성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
남파보목책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둘레가 55자이고 높이가 18자이다. 정덕(正德) 신사년에 만들었다.
봉수 사장구비봉수(舍長仇非烽燧) : 군 북쪽 12리에 있다. 동쪽은 강계부 마시리(馬時里)에 응하고, 서쪽은
남파산(南波山)에 응한다.
남파산봉수(南波山烽燧) : 동쪽은 사장구비(舍長仇非)에 응하고 서쪽은 동천산(銅遷山)에 응한다.
동천산봉수(銅遷山烽燧) : 서쪽은 이산군 합지산(蛤池山)에 응하고, 동쪽은 남파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성안 동쪽에 있다.
역원 하북동역(下北洞驛) : 성안에 있다. 상북동역(上北洞驛) : 군 동쪽 90리에 있다.
두음고개원(豆音古介院) : 군 동쪽 1백 46리에 있다.
불우 용복사(龍福寺) : 화등라산(和等羅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동쪽 4리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도을한보(都乙漢堡) : 군 동쪽 10리에 있다. 봉화대보(烽火臺堡) : 군 동쪽 30리에 있다.
강계(江界) 땅으로 태종 때 이산군에 속했다가 세종 때부터 다시 와서 소속되었다.
고성(古城) : 군 동쪽 7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2천 1백 50자이다. 지금은 없다.
[비고]
연혁 영종 19년에 치소를 송현(松峴)에 옮기고 독진으로 삼았다.
방면 군내면(郡內面) : 30리이다. 동면(東面) : 45리이다. 남면(南面) : 50리이다. 서면(西面) : 60리이다.
북면(北面) : 1백 30리이다. 한면(漢面) :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원(渭原) : 남쪽으로 55리이다.
독산면(獨山面)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총목(總目)에 실려 있는데 지도(地圖)에는 없다.
창고 읍창. 위창(渭倉) : 동쪽으로 35리다. 북창 : 동쪽으로 70리다. 사창(社倉) : 동쪽으로 1백 5리다.
한창(漢倉) : 남쪽으로 80리다. 업창(業倉) : 1백 리다. 남창 : 40리다. 서상창(西上倉) : 30리다.
서하창(西下倉) : 55리다. 송창(松倉) : 동쪽으로 45리다. 사상창(社上倉) : 동쪽으로 1백 5리다.
백창(柏倉) : 남쪽으로 90리이다.
진보 오로양진(吾老梁鎭) : 동북쪽으로 20리 대로에 있으며, 옛날에는 권관방수(權管防守)가 있었다.
효종 5년에 압록강 가로 옮겨 설치하였다.
숙종 11년에 만호(萬戶)로 승격시켰으며 병마만호(兵馬萬戶)가 1명이다. 군사는 모두 2백 62명, 창(倉)이 2,
곡식은 모두 1천 6백 41석이다.
토산 목면(木綿)ㆍ쏘가리[金鱗魚]ㆍ산사(山査)ㆍ연석발묵고(硯石潑墨鼓).
역참 관문참(官門站). 계동참(界洞站) : 서쪽으로 60리이다. 사덕참(四德站) : 서쪽으로 35리이다.
고보참(古堡站) : 동쪽으로 35리이다.
진도 북위진(北渭津) : 위수(渭水)에 있다.
노동진(蘆洞津) : 일명 독로강진(禿魯江津)이라고도 하는데, 동쪽으로 30리, 강계(江界)의 경계이다.
대로진(大路津) : 배가 2척이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 서쪽으로 1리 지점에 있다. 구읍(舊邑) 남천교 : 서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구오로양진변교(舊吾老梁鎭邊橋).
누정 진북루(鎭北樓). 읍북문루(邑北門樓) : 앞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제약루(濟弱樓) : 군내(郡內)에 있다.
위남루(渭南樓)ㆍ군성(郡城). 남문루(南門樓) : 앞에 위수(渭水)가 흐르고 있다.
이산군 理山郡
동쪽은 위원군(渭原郡) 경계까지 24리, 남쪽은 위원군 경계까지 1백 60리, 운산군(雲山郡) 경계까지는 2백 53리
이고 희천군(熙川郡) 경계까지는 2백 50리이다. 서쪽은 벽동군(碧潼郡) 경계까지 5백 9리, 북쪽은 압록강까지
1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1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여진족이 살던 두목리(豆木里)이다. 고려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 본조 태종 2년에
산양호(山羊湖) : 어떤 때는 호(湖) 자를 회(會) 자로 하기로 하였다. 도을한(都乙漢)ㆍ봉화대(烽火臺)ㆍ
등이언(等伊彦) 등지를 합쳐 이주(理州)라 칭했는데 13년에 통례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세종 때 읍을
앙토리(央土里)로 옮겼고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 도을한과 봉화대는 지금은 위원군에 속한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초산(楚山)ㆍ이주(理州).
성씨 본군 원(元)ㆍ안(安)ㆍ박(朴) : 모두 내(來).
산천 숭적산(崇積山) : 군 동쪽 1백 2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거을쌍산(巨乙雙山) : 군 서남쪽 30리에 있다.
안찬령(安贊嶺) : 군 서쪽 25리에 있다. 조동산(曹東山) : 군 남쪽 60리에 있다.
합지산(蛤池山) : 군 동쪽 15리에 있다. 가을한령(加乙罕嶺)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위원군과 경계하고 있다.
취사령(吹沙嶺) : 군 남쪽 1백 50리에 있다. 판막령(板幕嶺) : 군 남쪽 1백 70리에 있다.
우령(牛嶺) : 군 남쪽 2백 50리에 있다. 대물이산(大物伊山) : 고이산군(古理山郡) 동쪽 20리에 있다.
압록강 : 군 북쪽 15리에 있다. 상운대천(上雲臺川) : 고이산군 남쪽 1리에 있다.
우장천(牛場川) : 우장역(牛場驛) 남쪽에 있다. 근원은 우령(牛嶺) 밑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동건강(童巾江)으로
들어간다.
동건강 : 군 서쪽 78리에 있다. 상운대천과 우장천 등이 합쳐 이 강이 되었으며, 아이보(阿耳堡)를 지나 압록강
으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 성 남쪽 2리에 있다. 신동(薪洞)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파저강(婆猪江) : 이하는 압록강 바깥 땅에 소속되어 있다.
연시산(延時山)ㆍ토자산(?子山)ㆍ알미부(斡眉府) : 군과의 거리가 2백 40리이다.
홍타리(紅?里) : 군과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아한리(阿閒里) : 군과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올자산(兀刺山) : 군과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앙토구자(央土口子)에서 압록ㆍ파저 두 강을 건너면 북쪽 큰 들
가운데 성이 있는데 올자성이라 한다. 사면이 벽같이 솟아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다만 서쪽으로만 오를 수
있다. 고려 공민왕이 북원(北元)과 절교하고자 하여 우리 태조(太祖)로 하여금 동북면 원수로 삼아 동녕부
(東寧府)를 치게 하니, 동지(同知) 이올로첩목아(李兀魯帖木兒)는 태조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 험한 곳
으로 옮겨 이 성으로 근거를 삼으려고 옮겨와서 보위하고 있었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올로첩목아가 나와 도전하다가 얼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고 3백여 호를 이끌고 항복해 왔다.
그 추장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을 근거로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가 그것을 포위하였다.
태조가 손수 70여 명을 쏘았는데 모두 바로 그 얼굴에 맞으니 성중은 기운을 잃게 됐다. 안위는 밤중에
도망하고 여러 성은 모두 항복했다. 이로써 동쪽은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은 동녕부(東寧府)에 이
르고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남쪽은 압록강에 이르도록 모두 빈 땅이 되었다. 이 전쟁에 어떤 사람이
헐린 담 아래에 서서 우는 것을 보고 잡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원(元) 나라 장원(狀元)인 배주
(拜住)이다." 하니, 태조는 즉시 옷과 말을 주어 같이 데리고 와서 왕에게 보고하여 판사농시(判司農寺)
직을 주고 한복(韓復)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 이상 네 곳은 지금은 야인(野人)이 사는 곳이다.
토산 실ㆍ삼ㆍ봉밀ㆍ돈피ㆍ청서ㆍ인삼ㆍ사향ㆍ오미자ㆍ해송자ㆍ수달피ㆍ수포석ㆍ여항어.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둘레가 3천 9백 5자, 높이가 9자이고, 성안에 6개 샘이 있다.
행성(行城) : 두 곳이 있는데, 모두 석축이다. 하나는 적탄(赤灘)에 있는데 길이가 2천 8백 73자, 높이가 7자이다.
다른 하나는 남문 밖에 있는데 길이가 4백 41자, 높이가 5자이다.
관방 아이보(阿耳堡) : 군 서쪽 55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5천 7백 84자, 높이가 3자이다. 이 안에 우물이 세
개 있고 군창이 있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한 명이 있다. 산양회 보(山羊會堡) : 군 서쪽 23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9백 14자,
높이가 3자이다.
○ 권관(權管)을 보내어 수자리하게 했다.
신증 김사동보(金士洞堡) : 군 서남쪽 75리에 있다. 권관을 두어 수자리하게 했다
봉수 합지산봉수(蛤池山烽燧) : 동쪽은 위원군(渭原郡) 동천(銅遷)에 응하고 서쪽은 송봉(松峯)에 응한다.
송봉봉수(松峯烽燧) : 군 북쪽 18리에 있는데, 동쪽은 합지산(蛤池山)에 응하고 서쪽은 구천산(九天山)에 응한다.
구천산봉수(九天山烽燧) : 군 북쪽 21리에 있는데 동쪽은 송봉과 응하고 서쪽은 고연대산(古煙臺山)과 응한다.
고연대산봉수(古煙大山烽燧) : 군 서쪽 31리에 있다. 동쪽은 구천산에 응하고 서쪽은 아이보(阿耳堡)와 응한다.
아이보봉수(阿耳堡烽燧) : 동쪽은 고연대산과 응하고 서쪽은 벽동군(碧潼郡) 광평(廣坪)과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성안 서쪽에 있다.
역원 우장역(牛場驛) : 군 남쪽 1백 94리에 있다. 고이산역(古理山驛) : 고이산성(古理山城) 안에 있다.
앙토역(央土驛) : 성안에 있다. 판막원(板幕院) : 군 남쪽 1백 50리에 있다.
차유원(車踰院) : 군 남쪽 2백 40리에 있다. 우령원(牛嶺院) : 군 남쪽 2백 2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북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앙토리목책(央土里木柵) : 군 동쪽 5리에 있다.
고이산성(古理山城) : 군 남쪽 1백 3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는 2만 3천 10자, 높이는 10척이다. 성안에 우물
넷이 있고 군창이 있다. 평지성(坪地城) : 군 남쪽 1백 2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3천 9백 17자, 높이는 16자
이다 성안에 샘이 넷 있다.
산성(山城) : 군 남쪽 1백 8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6만 4천 2백 9자, 높이가 12자이다. 성안에 우물이 두 개
있다.
명환 고려 강윤철(康允哲) : 부만호(副萬戶)로 방어를 잘했다.
신증 열녀 본조 김씨(金氏) : 박학손(朴鶴孫)의 처이다. 남편이 죽으매 밤낮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더니 사흘만에 죽었다. 이런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벽동군 碧潼郡
동쪽은 이산군(理山郡) 경계까지 1백 45리, 북쪽은 이산군 경계까지 91리,
남쪽은 창성부(昌城府) 경계까지 77리, 서쪽은 창성부 경계까지 7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3백 8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여진족이 살던 임토(林土)와 벽단(碧團)의 땅이다. 고려 공민왕 6년에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시켜 쳐서 도망가게 하고, 임토를 고쳐 음동(陰潼)으로 하여 벽단에 예속시키고, 남쪽 경계의
민가를 뽑아 그것에 채웠다. 본조 태종 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세조 때 진(鎭)을 설치했다.
진관 보(堡) 1 : 아이(阿耳).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벽단(碧團)ㆍ임토(林土)ㆍ음동(陰潼).
성씨 본군 강(康) : 신주(信州). 최(崔) : 철원(鐵原). 신(申) : 적성(積城).
산천 구봉산(九峯山) : 군 남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달각산(達覺山) : 군 서남쪽 55리에 있다.
삼일산 : 군 남쪽 60리에 있으니 달각산과 더불어 서로 이어져 있고 가장 험한 산이다.
금창산(金昌山) : 군 북쪽 12리에 있다. 국토현(國土峴) : 군 동쪽 6리에 있다.
실호령(失號嶺) : 군 서쪽 71리에 있으며 창성부(昌城府)와 경계하고 있고 가장 험한 산이다.
부계현(夫界峴) : 군 남쪽 78리에 있으며 창성부와의 경계이다.
가막동(加幕洞) : 군 동남쪽 1백 20리에 있는데 옛 사창(社倉)이 있다. 조골산(照?山) : 군 남쪽 70리에 있다.
읍천(邑川) : 군 남쪽 1리에 있으며. 달각산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신동천(新洞川) : 군 남쪽 90리에 있으며, 부계현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읍천(邑川)으로 들어간다.
동건강(童巾江) : 군 북쪽 1백 45리에 있으며, 이산군(理山郡)에 나타난다. 압록강 : 군 서쪽 5리에 있다.
여시산(余時山) : 이하는 압록강 바깥 땅에 소속되어 있다.
채가동(蔡家洞)ㆍ김이동(金伊洞)ㆍ사창포(沙昌浦)ㆍ동산(銅山)ㆍ사양점(斜陽岾)ㆍ매창동(賣昌洞)ㆍ
호조리동(胡照里洞)ㆍ동자동(銅子洞)ㆍ도을한동(都乙恨洞)ㆍ올자산(兀刺山)ㆍ고음한리(古音漢里) :
야인(野人)이 살던 곳으로 군과의 거리가 70일 정도 걸리는 곳이다.
토산 실ㆍ삼ㆍ돈피ㆍ청서ㆍ영양ㆍ수달피ㆍ칠ㆍ자초ㆍ인삼ㆍ잣ㆍ봉밀ㆍ수포석ㆍ은구어ㆍ누치[訥魚].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둘레가 8천 45자, 높이가 7자이다. 성안에 우물이 셋 있다.
행성(行城) : 세 곳이 있다. 모두 석축으로 하나는 군 북쪽에 있는데 길이가 1백 90자, 높이가 4자이다.
다른 하나는 군 서쪽에 있는데 길이가 1만 3천 32자이고, 높이가 4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대파아(大坡兒)와
소파아(小坡兒) 사이에 있는데, 길이가 2만 4천 2백 50자, 높이가 4자이다.
관방 벽단진(碧團鎭) : 군 서쪽 51리에 있다. 석성으로 둘레가 1만 3천 32자, 높이가 5자이다.
성안에 4개의 샘이 있다.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 있다. 대파아보(大坡兒堡) : 군 북쪽 25리에 있다. 석축의 둘레는 4백 80자, 높이는
4자이다.
소파아보(小坡兒堡) : 판막(板幕)이라고도 한다. 군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4백 25자이고 높이는
4자이다.
추구비보(楸仇非堡) : 군 서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4백 자, 높이는 8자이다.
소실호리보(小失號里堡) : 군 서쪽 66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2백 54자, 높이는 4자이다.
광평보(廣坪堡) : 군 북쪽 55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56자이다.
○ 여러 곳에 권관을 보내어 수자리하게 했다.
신증 마전동보(麻田洞堡) : 군 서쪽 3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1천 1백 22자, 높이는 12자이다. 성안에 2개의
샘이 있다. 신성보(新城堡) : 군 남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1천 7백 46자, 높이는 10자이다.
오음회목책(吾音會木柵) : 군 동쪽 80리에 있는데 둘레가 6백 26자, 높이가 12자이다.
오농괴목책(於農怪木柵) : 군 동쪽 50리에 있는데 둘레는 6백 12자, 높이는 12자이다. 성안에 샘이 하나 있다.
다대동목책(多大洞木柵)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둘레는 8백 30자이고 높이는 12자이다.
비아리보(非兒里堡) : 군 북쪽 72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는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성안에 1개의 우물이
있다. 겨울에는 이 보(堡)를 비우고 성(城) 안으로 들어가 있고 여름에는 아이만호(阿耳萬戶)로 나와 이곳에서
수자리하게 했다.
봉수 광평봉수(廣坪烽燧) : 동쪽은 이산군(理山郡) 아이(阿耳)에 응하고 서쪽은 소파아(小坡兒) 송림(松林)에
응한다.
송림봉수(松林烽燧) : 군 북쪽 40리에 있다. 동쪽은 광평(廣坪)에 응하고 서쪽은 두음지(豆音只)에 응한다.
두음지봉수(豆音只烽燧) : 군 북쪽 45리에 있다. 동쪽은 송림(松林)에 응하고 서쪽은 파한천(波限遷)에 응한다.
파한천봉수(波限遷烽燧) : 군 북쪽 30리에 있다. 동쪽은 두음지에 응하고 서쪽은 금창산(金昌山)에 응한다.
금창산봉수(金昌山烽燧) : 동쪽은 파한천에 응하고 서쪽은 추구비(楸仇非)에 응한다.
추구비봉수(楸仇非烽燧) : 동쪽은 금창산과 응하고 서쪽은 호조리(湖照里)에 응한다.
호조리봉수(湖照里烽燧) : 군 서쪽 65리에 있다.
동쪽은 추구비와 응하고 서쪽은 창성부(昌城府) 고림성(古林城)과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동쪽 성안에 있다.
역원 벽단역(碧團驛) : 변단진(碧團鎭)에 있다.
불우 묘향사(妙香寺)ㆍ상암(上菴) : 모두 달각산(達覺山)에 있다. 삼일암(三日菴) : 삼일산(三日山)에 있다.
중암(中菴) : 청석산(靑石山)에 있다.
고적 고벽단성(古碧團城) : 군 서쪽 58리에 있다. 석축의 둘레는 1천 7백 54자이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북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효자 본조 최상연(崔尙淵) : 성격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돌아가매 묘소에다 움막을 지어 3년상을 마쳤다.
이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열녀 본조 계수(桂樹) : 관노(官奴) 고진석(高震碩)의 처이다.
남편이 죽으매 시아버지가 재가를 권했으나 맹세코 따르지 않고 끝내 절개를 지켰다. 이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교화는 미쳤고, 강물과 냇물은 이미 맑았네.
어느 뉘 봉화가 들렸다 하랴. 밤이 깊어도 밝은 것을 보지 못하는가."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면. 대상면(大上面) : 동북쪽으로 40리이다. 대하면(大下面) : 동쪽으로 20리이다.
우농괴면(雩農怪面) : 동쪽으로 60리이다. 별하면(別河面) : 동쪽으로 1백 리이다.
가상면(加上面) :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서상면(西上面) : 모두 서쪽으로 50리이다.
남상(南上)ㆍ하단면(下端面) : 남쪽으로 50리이다. 회창면(會倉面) : 동쪽으로 80리이다.
학구비면(鶴仇非面) : 동쪽으로 30리이다. 동면ㆍ남면ㆍ오면(吾面)ㆍ북면 : 이상은 총목에 실려 있다.
호구 6천 2백 49가구(家口). 1만 3천 87명 : 남자 8천 5백 97명, 여자 4천 4백 81명이다.
창고 읍창 : 동쪽에 있다. 평창(平倉) : 동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북창 : 서쪽으로 45리에 있다.
오창(吾倉) : 동북쪽으로 50리에 있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시창(時倉) 동쪽으로 90리에 있다.
별창 : 80리에 있다. 가창(加倉) : 동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학창(鶴倉) : 동남쪽으로 50리에 있다.
남창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성창(城倉)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송창(松倉)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서창 : 서쪽으로 50리에 있다. 산창(山倉)ㆍ임창(林倉).
토산 열목어(熱目魚)ㆍ경장어(頸長魚)ㆍ마름ㆍ오미자ㆍ석심ㆍ진심(眞?)ㆍ화피(樺皮)ㆍ게ㆍ황어(?魚)ㆍ잉어ㆍ
농어ㆍ금린어.
역참 관문참(官門站)ㆍ소길호리참(小吉號里站).
진도 동건강진(童巾江津) : 동북쪽으로 70리, 아이진(阿耳鎭)의 대로에 있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벽단전교(碧團前橋) : 곧 중암천(中庵川)의 하류이다.
누정 세병루(洗兵樓)ㆍ서별루(西別樓) : 모두 성안에 있다.
사원 구봉서원(九峯書院) : 동쪽으로 1리에 있다. 숙종 정축년에 세우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편에 보라. 민유중(閔維重) : 장단(長湍)편에 보라.
영원군 寧遠郡
동쪽은 함경도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1백 60리, 남쪽은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1백 2리, 서쪽은
덕천군(德川郡) 경계까지 1백 6리, 북쪽은 희천군(熙川郡) 경계까지 4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려 영원진(寧遠鎭)이다. 태조(太祖) 5년에 영청현(永淸縣)에 속했고 정종(靖宗) 7년에 최충
(崔?)에게 명하여 성을 쌓게 했다. 후에 영청현 해변으로 옮겼다가 후에 희천(熙川)으로 옮겨 속하게 했다.
본조 태조 5년에 또다시 영청(永淸)에 합하여 영녕(永寧)이라 일컬었고 세조 12년에 고영원(古寧遠) 땅에 나아가
따로 군을 두고 그대로 진(鎭)으로 삼았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요원(遼原).
성씨 본군 오(吳) : 영일(迎日). 이(李) : 창녕(昌寧). 박(朴) : 강서(江西). 최(崔) : 덕천(德川).
산천 쾌산(快山) : 군 서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 군 남쪽 1백 리에 있다.
지막지산(池莫只山) : 군 북쪽 60리에 있다. 낭림산(狼林山) : 군 동쪽 1백 80리에 있다.
북쪽은 강계부(江界府) 경계에 있으며, 동쪽은 함경도 함흥부(咸興府) 경계에 있다.
광성산(廣城山) : 군 북쪽 30리에 있다. 산중에 돌굴이 있는데 굴 안에는 좌우 양쪽에 작은 못이 있다.
또 두 개의 석룡(石龍)이 있는데 꿈틀꿈틀하고 위로 오르는 형상 같으므로 이름하여 석룡굴(石龍窟)이라 한다.
간삼현(干三峴) : 군 동쪽 1백 리에 있다. 군 남쪽으로부터 이 현에 이르기까지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들어서고
돌길이 마치 실 같아서 사람과 말이 나란히 가기 어렵고, 시내가 있는데 지막지산에서 나와 고개 한쪽을 안고 남
으로 흘러 덕천군(德川郡) 삼탄(三灘)으로 들어간다.
검산현(劍山峴) : 군 동쪽 91리에 있다. 함경도 정평부(定平府) 경계에 있다.
마유령(馬踰嶺) : 군 남쪽 60리에 있다. 함경도 영흥부(永興府) 경계에 있다. 광성천(廣城川) : 군 동쪽 3리에 있다.
근원은 지막지산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흑연강(黑淵江)으로 들어간다.
흑연강(黑淵江) : 군 남쪽 30리에 있다. 그 근원은 두 개인데 하나는 낭림산에서 나오고, 또 다른 하나는 지막지산
에서 나와 합하여 남으로 흘러 덕천군 삼탄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가물 때 비 오기를 빌면 반응이 있다 한다.
온정(溫井) : 군 동쪽 30리 구로파리(仇老波里)에 있다.
토산 삼ㆍ돈피ㆍ청서ㆍ영양ㆍ사향ㆍ벌꿀ㆍ인삼ㆍ석이[石?]ㆍ잣ㆍ오미자ㆍ백옥(白玉) : 군 남쪽 천동(穿洞)
에서 난다. 여항어ㆍ궁간목.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둘레가 4천 7백 44자, 높이가 7자이다. 성안에 4개의 샘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소초역(所草驛) : 군 남쪽 90리에 있다. 가막역(加莫驛) : 군 동쪽 90리에 있다.
광성원(廣城院) : 광성산(廣城山) 밑에 있다. 검산원(劍山院) : 군 동쪽 90리에 있다.
신증 지산원(支山院) : 군 북쪽 45리에 있다.
불우 온정사(溫井寺) : 약수산(藥水山)에 있다. 남산사(南山寺) : 타대산(駝大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안 서쪽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군 남쪽 90리에 있다. 토축(土築)의 둘레는 7천 2백 70자이고, 안에는 5개의 샘이 있다.
인물 본조 오사충(吳思忠) : 그 선조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으로 후에 영원진(寧遠鎭)으로 옮겨와 고려 말에
급제하여 점차 올라 대간(臺諫)이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 사의대부(司議大夫)로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으로 옮겼는데 탄핵을 그치지 않으므로 언관(言官)의 직을 뺏겼다.
본조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으로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함을 받았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중종 20년에 치소(治所)를 소초역(所草驛)에 옮기고, 숙종 16년에 또 서변(西邊) 10리쯤에 옮겼다가 영조 24년에
초소역 터로 도로 옮겼다.
방면 고창(古倉) : 동북쪽으로 90리이다.
온창(溫倉) : 북쪽으로 1백 30리이다. 사창(社倉) : 북쪽으로 1백 80리이다. 군내(郡內) : 남쪽으로 20리이다.
검창(劍倉) : 동쪽으로 1백 69리이다. 가창(加倉) : 동쪽으로 90리이다. 악창(樂倉) : 북쪽으로 2백 70리이다.
흑창(黑倉) : 동쪽으로 2백 40리이다. 신창(新倉) : 동쪽으로 1백 50리이다. 생천(生川) : 북쪽으로 1백 79리이다.
성창(城倉) : 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남면(南面) : 남쪽으로 30리이다. 서면 : 서쪽으로 25리이다.
진보 혁폐 영성진(寧城鎭) : 동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인조 19년에 순영(巡營)에서 처음으로 둔의 별장을 두었다.
숙종 7년에 병마첨절제사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설치한 둔을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관방(關防) 요새를 독진첨사
(獨鎭僉使)로 삼았다가 순조 28년에 폐하였다.
창고 읍창. 고창(古倉)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성창(城倉) : 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온창(溫倉) : 북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사창(社倉) : 동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신창 : 위와 같다.
검창(劍倉) : 위와 같다. 가창(加倉) : 동쪽으로 70리에 있다. 악창(樂倉) : 북쪽으로 1백 9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영성진(寧城鎭)과 1백 리 거리이다. 흑창 : 북쪽으로 1백 7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영성진과 80리
거리이다.
역참 견우역(牽牛驛)ㆍ치담역(淄潭驛)ㆍ관천역(寬川驛).
진도 고성진(古城津) : 서쪽으로 20리, 덕천 경계의 대로이다. 입석진(立石津)ㆍ생천진(牲川津)ㆍ광성동진
(廣城洞津)ㆍ고창진(古倉津)ㆍ온창진(溫倉津)ㆍ신창진(新倉津)ㆍ석우진(石隅津).
교량 남천교 : 군의 남쪽에 있다. 구룡교(九龍橋) : 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황학교(黃鶴橋) : 북쪽으로 2백 10리에 있다. 고나물교(古羅物橋) : 북쪽으로 2백 10리에 있다. 향유교(香踰橋) : 북쪽으로 2백 50리에 있다.
벽천교(碧川橋) : 동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누정 망미루(望美樓)ㆍ정이루(正已樓)ㆍ영파정(影波亭) : 모두 군내에 있다.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도지(圖志)가 생긴 유래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나중에 만들어진 것에서 자상해지고, 새로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전에 만들어진 것에 따라 증보(增補)되는 것
입니다. 대체로 먼저 만들어진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갖추어지지 못하고, 전에 만들어진 것을 따르지 않으면 사적
이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옛것에 따라 뒤에 다시 만든 도지의 예(例)는 또한 옛적부터 있었습니다.
우리 성종[成廟]께서 육경(六經)을 들추어서 밝히고, 한편으로는 자사(子史)를 찾아내어 교화를 일으키는 재료
로 삼으니 사적이 실로 곡식 낟알처럼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되어 사람들이 지향할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지승람》의 시초도 역시 성종의 성스러운 계획에서 나온 것이며 동국(東國)에 지(誌)가 있음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규모는 바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옛 뜻을 그대로 따랐으며 조례(條例)와 격식은
전지(前誌)의 서문과 발문(跋文)에 이미 모두 밝혀 있습니다. 무자년 가을에 주상께서 지금 좌의정인 신 이행
(李荇)에게, "지난번의 혼란할 때(연산군 때를 말한다)에 관제(官制)를 경신하고 군현(郡縣)의 이동과 분활을
아직 개정하여 기록하지 못하였으며 그 동안에 생긴 효자ㆍ열녀의 행실과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새로 가려
기록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그런 것을 상고하고 모아서 증보(增補)하여 바치라." 명하셨습니다. 명을 들고 나와
임원의 명단을 갖추어 아뢰고 마침내 외교서관(外校書館)에 국(局)을 마련하였습니다.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모두 전에 만들어진 것에 따라 편찬하다가 한재(旱災) 때문에 두 번 중지하다가 경인년 가을에 비로소 편집할
수 있었으니 모두 5권이었습니다.
만일 따로 책을 만든다면 계통과 두서가 없을 것 같아서 전에 만든 기록에다 첨가해 넣어서 전의 것을 좇아
계승하고, 옛것에 따라 더함으로써 한 시대에 편집한 것 같고 한 솜씨에 나온 것 같으며, 모두 주상(主上)의
결재를 받은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하수(河水)는 근원과 하류(下流)가 있으니 근원으로부터 하류
로 따라 내려가나 하류에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어느 것이 하수 아님이 없습니다. 성묘께서 앞서 시작
하시고 전하께서 후에 계승하셨으니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는 방법
이 어느 것이 도(道)가 아님이 없으며 하수가 근원과 하류가 있음과 같이 서로 처음이 되고 끝이 되었으니 또한
성대하지 아니하옵니까. 《승람》 한 질은 비록 도(道)를 기록한 글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 번 책을 열면 우리
동방 강역(疆域)의 구역과 고금(古今)에 흥하고 폐했던 자취가 모두 환하게 눈앞에 있으니 실로 주 나라 직방씨
(職方氏)의 규모로서 도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어찌 도움이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선대의
뜻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일의 한 가지 일입니다. 아 기록하옵니다.
가정(嘉靖) 10년 6월 초7일에 자헌대부 형조 판서 겸동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世子右副賓客) 신 홍언필(洪彦弼)은 삼가 발합니다.
이상 《여지승람》 55권은 우리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13년 신축에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
(盧思愼) 등이 편찬한 것입니다.
그 뒤에 미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다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모방하여 개정
하고 인쇄하여 국내에 반포하여 뒤로 비각(?閣)으로부터 아래로 사가(私家)의 장서(藏書)에 이르기까지 있지
않은 데가 없었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좋은 볼거리[勝覽]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정무(政務)의 여가에 때때로
보시다가, 노정(路程)의 이수(里數)에 그 실제가 아님이 많고 제목(題目)과 사적의 요긴한 데 있어서도 또한 혹
틀린 것이 있으므로 공조 판서(工曹判書) 신 성현(成俔)과 행호군(行護軍) 신 이덕숭(李德崇) 및 신 임사홍(任士
洪)에게 다시 교정하라 명하시기를, "무릇 산천(山川)과 사적의 빠진 것을 보충하고 제영(題詠)과 편장(篇章)의
지리한 것은 삭제하여 정(精)하고 적당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 등이 마침내 모든 임원들과 더불어 경복궁(景福宮)의 교서관(校書館)에 국(局)을 개설하고 일을 시작한 지 2
년이 지나서야 겨우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편찬한 것은 모두 전의 목록을 따르되 그 의심난 것은 질정(質正)하고
그 그릇된 것은 수정하였으며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더할 만한 것은 더하였습니다. 서울에서는 모든 관서
(官署)에서 상고하였고 문헌(文獻)은 고가(古家)에서 묶었으며 지방에서는 각 도의 감사에 물었는데 계리(計吏)
와 저주(邸主)에게까지 미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와 자서(子書) 문집(文集)도 참조하여 편집을 완성하였습
니다. 이것은 비록 신등의 필묵(筆墨)으로 이룬 것이나 그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보탤 것은 더하는 규모는 실로
전하의 재단을 받은 것이옵니다.
신이 듣건대 옛적에는 경계에는 도(圖)가 있었고 고을에는 지(志)가 있어 상고할 일이 있을 때에 책을 펴면 역력
히 드러났다 합니다. 한(漢) 나라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진(秦) 나라 승상부(丞相府)의 도적(圖籍)을 간직하여
천하의 산천과 호구(戶口)의 강약(强弱)을 알았다는데 그 도적이 이런 기록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동방이 개국한 이래 이미 수천백 년이 되었으되 이와 같은 상세한 기록이 없었으니 이 책은 어찌 동방의
승람으로서 후세의 모범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책을 교정하는 것은 떨어진 잎을 쓸어내
는 것 같다.(자꾸 쓸어도 자꾸 떨어지는 것이 있다는 뜻) 하였으니, 신 등이 수정한 것도 어떠한 그릇됨이 있어
뒷사람의 웃음거리가 될지 두렵습니다. 편찬한 관료(官僚)의 성명은 왼편에 기록하였습니다.
홍치(弘治) 12년 양월(良月) 일(日)에 가선대부 행충무위 상호군(嘉善大夫行忠武衛上護軍) 신 임사홍은 명을
받자와 삼가 발합니다.
성화(成化) 21년 3월 3일(日)에 주상(主上)께서 승정원에 명하시어 지금 평안도 관찰사인 신 성현과 충청 관찰
사인 신 채수(蔡壽) 및 신 종직(宗直)을 부르시어 선성부원군 노사신 등이 바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내보
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책은 축목(祝穆)의 책을 모방하여 중요한 사적을 들고 겸하여 시(詩)와 문(文)을 하여
널리 찾아 뽑아서 기록하였으니 국가에 진실로 유익한 문헌(文獻)이나 그중에는 산천과 옛적 사실에 더러 빠진
것이 있고, 여러 사람이 지은 시문(詩文)에는 지저분하고 혼잡스런 것이 자못 있을까 염려되니 너희들은 마땅히
교열하고 수정하여 정미하고 적당하게 하도록 힘쓰되 그 범례(凡例)는 한결같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를 법 삼으라." 하시었습니다. 신 등이 명령을 듣고 황송하여 마침내 경복궁의 홍문관(弘文館)에 국(局)을 개설
하고 지금 전한(典翰)인 신 이창신(李昌臣), 부정(副正) 신 신종호(申從濩)와 정랑(正郞) 신 김맹성(金孟性) 등과
더불어 삼가 원고(元藁)를 열람하여 삭제도 하고 수집도 하다가 얼마 안 가서 한재로 흉년이 들어 중지되었더니
이듬해 병오 2월 일에 다시 신 종직, 신 창신, 신 종호로 하여금 그 일을 마치게 명하셨는데 교리(校理) 신 이의무
(李宜茂), 부교리(副校理) 신 유호인(兪好仁), 수찬(修撰) 신 최보(崔溥)가 서로 잇따라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산천ㆍ성곽ㆍ누대ㆍ사묘ㆍ사찰은 계리(計吏)와 저주(邸主)에게 물었고, 건치(建置)ㆍ풍속ㆍ인물ㆍ고적은 모든
사서(史書)ㆍ자서(子書)ㆍ문집을 대조하여 그릇된 것은 바꾸고 빠진 것은 기재하였으며 서(序)ㆍ기(記)ㆍ시(詩)ㆍ
명(銘) 중에 연혁(沿革)과 창수(創修)ㆍ풍토ㆍ경치에 관계가 있는 것은 혹은 전대로 하기로 하고 혹은 첨가하기
도 하였고, 별로 관계된 바가 없는 것은 모두 삭제하였습니다.
서울 각 관청의 직관(職官)과 주군(州郡)의 성씨(姓氏), 변방의 방비와 봉수(烽燧)는 특별히 위의 재결을 받아
사요(事要)에 첨가해 넣었으며 천문 분야(天文分野)는 역시 《한서(漢書)》를 참고하여 평양조(平壤條)에 기록
해 넣었으며 각읍(各邑)의 속현(屬縣)ㆍ향소(鄕所)ㆍ부곡(部曲) 중에 지금은 폐하여 촌락이 된 것은 모두 고적
에 붙였고 양계(兩界)의 국경 가까운 지역과 바다와 대마도 등의 섬도 경계에 연한 지역으로 기재하였습니다.
첫머리의 총도(總圖)에는 사전(祀典)에 실린 악독(嶽瀆)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기록하였으며 8도의 각도(各圖)
에는 다만 주현(州縣)의 진산(鎭山)과 그 사지(四至)ㆍ사도(四到)를 아울러 붙였으며 강희맹(姜希孟)과 성임(成
任) 등은 비록 처음에는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지금은 죽었으므로 역시 인물에 기록하였습니다.
삭제한 것도 한둘이 아니지마는 보탠 것도 실로 많으므로 다시 개정하여 55권을 만들었으니 무릇 여덟 달이 지나
서야 완성하였습니다. 신 종직은 생각하건대, 중원의 땅에는 비록 구석진 지방이나 작은 고을이라 할지라도 도지
(圖志)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 그것을 모으고 정리하여 책을 만들려면 매우 쉽지마는 우리 동방은 삼국 시대 이래
로 조정에도 문적(文籍)이 없는데 하물며 군읍(郡邑)이겠습까. 지금 이 책의 이루어짐이 속설[俗諺]과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하여 이루어졌고 삭제하거나 넣는 것도 타당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토 안의 고금에 이미
이루어진 자취로서 정한 것 추[粗]한 것 큰 것 작은 것이 한 번 책을 열람하면 환하게 눈앞에 있으니 비록 감히
《일통지》에는 견주지 못하나마 《방여승람(方輿勝覽)》에 비교하면 실로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것으로써 사방
후세에 혜택을 주는 데에는 반드시 작으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해 12월 일(日)에 가선대부 겸 동지 경연 성균관사 예문관 제학(嘉善大夫兼同知經筵成均館事藝文館提學)
신 김종직은 절하며 삼가 발합니다.
발문 [1]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도지(圖志)가 생긴 유래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나중에 만들어진 것에서 자상해지고, 새로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전에 만들어진 것에 따라 증보(增補)되는 것
입니다. 대체로 먼저 만들어진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갖추어지지 못하고, 전에 만들어진 것을 따르지 않으면 사적
이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옛것에 따라 뒤에 다시 만든 도지의 예(例)는 또한 옛적부터 있었습니다.
우리 성종[成廟]께서 육경(六經)을 들추어서 밝히고, 한편으로는 자사(子史)를 찾아내어 교화를 일으키는 재료
로 삼으니 사적이 실로 곡식 낟알처럼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되어 사람들이 지향할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지승람》의 시초도 역시 성종의 성스러운 계획에서 나온 것이며 동국(東國)에 지(誌)가 있음도 여기에서 비
롯된 것입니다. 그 규모는 바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옛 뜻을 그대로 따랐으며 조례(條例)와 격식은
전지(前誌)의 서문과 발문(跋文)에 이미 모두 밝혀 있습니다. 무자년 가을에 주상께서 지금 좌의정인 신 이행
(李荇)에게, "지난번의 혼란할 때(연산군 때를 말한다)에 관제(官制)를 경신하고 군현(郡縣)의 이동과 분활을
아직 개정하여 기록하지 못하였으며 그 동안에 생긴 효자ㆍ열녀의 행실과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새로 가려 기록
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그런 것을 상고하고 모아서 증보(增補)하여 바치라." 명하셨습니다.
명을 들고 나와 임원의 명단을 갖추어 아뢰고 마침내 외교서관(外校書館)에 국(局)을 마련하였습니다.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모두 전에 만들어진 것에 따라 편찬하다가 한재(旱災) 때문에 두 번 중지하다가 경인년
가을에 비로소 편집할 수 있었으니 모두 5권이었습니다. 만일 따로 책을 만든다면 계통과 두서가 없을 것 같아서
전에 만든 기록에다 첨가해 넣어서 전의 것을 좇아 계승하고, 옛것에 따라 더함으로써 한 시대에 편집한 것 같고
한 솜씨에 나온 것 같으며, 모두 주상(主上)의 결재를 받은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하수(河水)는 근원
과 하류(下流)가 있으니 근원으로부터 하류로 따라 내려가나 하류에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어느 것이 하수
아님이 없습니다. 성묘께서 앞서 시작하시고 전하께서 후에 계승하셨으니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켜 세상
을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는 방법이 어느 것이 도(道)가 아님이 없으며 하수가 근원과 하류가 있음과 같이 서로
처음이 되고 끝이 되었으니 또한 성대하지 아니하옵니까. 《승람》 한 질은 비록 도(道)를 기록한 글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 번 책을 열면 우리 동방 강역(疆域)의 구역과 고금(古今)에 흥하고 폐했던 자취가 모두 환하게 눈앞
에 있으니 실로 주 나라 직방씨(職方氏)의 규모로서 도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어찌 도움이 있지 않
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선대의 뜻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일의 한 가지 일입니다. 아 기록하옵니다.
가정(嘉靖) 10년 6월 초7일에 자헌대부 형조 판서 겸동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世子右副賓客) 신 홍언필(洪彦弼)은 삼가 발합니다.
발문 [2]
이상 《여지승람》 55권은 우리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13년 신축에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
(盧思愼) 등이 편찬한 것입니다. 그 뒤에 미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다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모방하여 개정하고 인쇄하여 국내에 반포하여 뒤로 비각(?閣)으로부터 아래로
사가(私家)의 장서(藏書)에 이르기까지 있지 않은 데가 없었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좋은 볼거리[勝覽]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정무(政務)의 여가에 때때로 보시다가, 노정(路程)의 이수(里數)에 그 실제가 아님이 많고 제목
(題目)과 사적의 요긴한 데 있어서도 또한 혹 틀린 것이 있으므로 공조 판서(工曹判書) 신 성현(成俔)과 행호군
(行護軍) 신 이덕숭(李德崇) 및 신 임사홍(任士洪)에게 다시 교정하라 명하시기를, "무릇 산천(山川)과 사적의
빠진 것을 보충하고 제영(題詠)과 편장(篇章)의 지리한 것은 삭제하여 정(精)하고 적당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 등이 마침내 모든 임원들과 더불어 경복궁(景福宮)의 교서관(校書館)에 국(局)을 개설하고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편찬한 것은 모두 전의 목록을 따르되 그 의심난 것은 질정(質正)
하고 그 그릇된 것은 수정하였으며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더할 만한 것은 더하였습니다.
서울에서는 모든 관서(官署)에서 상고하였고 문헌(文獻)은 고가(古家)에서 묶었으며 지방에서는 각 도의 감사에
물었는데 계리(計吏)와 저주(邸主)에게까지 미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와 자서(子書) 문집(文集)도 참조하여
편집을 완성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신등의 필묵(筆墨)으로 이룬 것이나 그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보탤 것은
더하는 규모는 실로 전하의 재단을 받은 것이옵니다. 신이 듣건대 옛적에는 경계에는 도(圖)가 있었고 고을에는
지(志)가 있어 상고할 일이 있을 때에 책을 펴면 역력히 드러났다 합니다. 한(漢) 나라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진(秦) 나라 승상부(丞相府)의 도적(圖籍)을 간직하여 천하의 산천과 호구(戶口)의 강약(强弱)을 알았다는데 그
도적이 이런 기록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동방이 개국한 이래 이미 수천백 년이 되었으되 이와 같은 상세한
기록이 없었으니 이 책은 어찌 동방의 승람으로서 후세의 모범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책을 교정하는 것은 떨어진 잎을 쓸어내는 것 같다.(자꾸 쓸어도 자꾸 떨어지는 것이 있다는 뜻) 하였으니, 신
등이 수정한 것도 어떠한 그릇됨이 있어 뒷사람의 웃음거리가 될지 두렵습니다. 편찬한 관료(官僚)의 성명은
왼편에 기록하였습니다.
홍치(弘治) 12년 양월(良月) 일(日)에 가선대부 행충무위 상호군(嘉善大夫行忠武衛上護軍) 신 임사홍은 명을
받자와 삼가 발합니다.
발문 [3]
성화(成化) 21년 3월 3일(日)에 주상(主上)께서 승정원에 명하시어 지금 평안도 관찰사인 신 성현과 충청 관찰사
인 신 채수(蔡壽) 및 신 종직(宗直)을 부르시어 선성부원군 노사신 등이 바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내보이
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책은 축목(祝穆)의 책을 모방하여 중요한 사적을 들고 겸하여 시(詩)와 문(文)을 하여
널리 찾아 뽑아서 기록하였으니 국가에 진실로 유익한 문헌(文獻)이나 그중에는 산천과 옛적 사실에 더러 빠진
것이 있고, 여러 사람이 지은 시문(詩文)에는 지저분하고 혼잡스런 것이 자못 있을까 염려되니 너희들은 마땅히
교열하고 수정하여 정미하고 적당하게 하도록 힘쓰되 그 범례(凡例)는 한결같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법 삼으라." 하시었습니다. 신 등이 명령을 듣고 황송하여 마침내 경복궁의 홍문관(弘文館)에 국(局)을 개설하고
지금 전한(典翰)인 신 이창신(李昌臣), 부정(副正) 신 신종호(申從濩)와 정랑(正郞) 신 김맹성(金孟性) 등과 더불
어 삼가 원고(元藁)를 열람하여 삭제도 하고 수집도 하다가 얼마 안 가서 한재로 흉년이 들어 중지되었더니 이듬
해 병오 2월 일에 다시 신 종직, 신 창신, 신 종호로 하여금 그 일을 마치게 명하셨는데 교리(校理) 신 이의무
(李宜茂), 부교리(副校理) 신 유호인(兪好仁), 수찬(修撰) 신 최보(崔溥)가 서로 잇따라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산천ㆍ성곽ㆍ누대ㆍ사묘ㆍ사찰은 계리(計吏)와 저주(邸主)에게 물었고, 건치(建置)ㆍ풍속ㆍ인물ㆍ고적은 모든
사서(史書)ㆍ자서(子書)ㆍ문집을 대조하여 그릇된 것은 바꾸고 빠진 것은 기재하였으며 서(序)ㆍ기(記)ㆍ시(詩)ㆍ
명(銘) 중에 연혁(沿革)과 창수(創修)ㆍ풍토ㆍ경치에 관계가 있는 것은 혹은 전대로 하기로 하고 혹은 첨가하기
도 하였고, 별로 관계된 바가 없는 것은 모두 삭제하였습니다. 서울 각 관청의 직관(職官)과 주군(州郡)의 성씨
(姓氏), 변방의 방비와 봉수(烽燧)는 특별히 위의 재결을 받아 사요(事要)에 첨가해 넣었으며 천문 분야(天文分
野)는 역시 《한서(漢書)》를 참고하여 평양조(平壤條)에 기록해 넣었으며 각읍(各邑)의 속현(屬縣)ㆍ향소(鄕所)ㆍ
부곡(部曲) 중에 지금은 폐하여 촌락이 된 것은 모두 고적에 붙였고 양계(兩界)의 국경 가까운 지역과 바다와
대마도 등의 섬도 경계에 연한 지역으로 기재하였습니다. 첫머리의 총도(總圖)에는 사전(祀典)에 실린 악독(嶽瀆)
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기록하였으며 8도의 각도(各圖)에는 다만 주현(州縣)의 진산(鎭山)과 그 사지(四至)ㆍ
사도(四到)를 아울러 붙였으며 강희맹(姜希孟)과 성임(成任) 등은 비록 처음에는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지금은
죽었으므로 역시 인물에 기록하였습니다. 삭제한 것도 한둘이 아니지마는 보탠 것도 실로 많으므로 다시 개정
하여 55권을 만들었으니 무릇 여덟 달이 지나서야 완성하였습니다. 신 종직은 생각하건대, 중원의 땅에는 비록
구석진 지방이나 작은 고을이라 할지라도 도지(圖志)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 그것을 모으고 정리하여 책을 만들
려면 매우 쉽지마는 우리 동방은 삼국 시대 이래로 조정에도 문적(文籍)이 없는데 하물며 군읍(郡邑)이겠습까.
지금 이 책의 이루어짐이 속설[俗諺]과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하여 이루어졌고 삭제하거나 넣는 것도 타당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토 안의 고금에 이미 이루어진 자취로서 정한 것 추[粗]한 것 큰 것 작은 것이 한
번 책을 열람하면 환하게 눈앞에 있으니 비록 감히 《일통지》에는 견주지 못하나마 《방여승람(方輿勝覽)》에
비교하면 실로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것으로써 사방 후세에 혜택을 주는 데에는 반드시 작으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해 12월 일(日)에 가선대부 겸 동지 경연 성균관사 예문관 제학(嘉善大夫兼同知經筵成均館事藝文館提學)
신 김종직은 절하며 삼가 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