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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사단 전우들과 무대 위에서 '군가'를 부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는 나라 지키는 여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속에 맺어진 전우야--.사단 이경진 주임원사가 노병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다. 곧 그도 전역한다니 아쉽다.>
<군에 다녀온 전우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 반동 준비. 반동 중에 군가를 부른다. 군가(?)는 '맨발의 청춘'! 군가 시작 하낫 둘 셋 넷--."기합도 빳다도 죽도록 맞아가면서----영자를 태양터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 줄 날 있으리라-- 나는 영자가 없었다. 그래도 죽어라 불렀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트위스트김도 저승으로 떠났고 신성일은 늙었다. 이 노병은 젊다.(물론 이 장면에서의 군가는 '나의 자랑'이었다. 전우야 잘 잘느냐 지난밤 꿈속에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 너는 나의 아들이며 대한의 아들 너는 나의 자랑이며 조국의 방패/ 언제나 굳세게 싸워 이겨라 지키자 지키자 내 나라 내 겨레--.나는 콘서트 장 뒤쪽에서 엄마가 손을 흔드시는 모습을 보았다.
‘世界에서 類例없는 콘서트’를 마치고
아직도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는다. 명색이 신앙인이면서 조금 자중해야 하련만, 그러기에는 외려 너무나 부담스러운 큰 사고(?)를 하나 겪었으니 내친김에 그대로 드러내 놓자.
두 달 반 전에 나는 남산 자락 ‘문학의 집’에서 열여섯 번째 콘서트를 열었다. 천리 타관, 그것도 ‘서울 바닥’에서 얼토당토않게 그런 행사를 계획한다는 자체는 내 특유의 무지막지함에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이다. 거기다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교만…….그게 부채질하였음은 두말 하나마나.
<정말 귀한 분이 자리를 함께했다. 서울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교편을 잡았었던 조상명 선생님/ 한양대학교 음대 기악과에서만 18년 근속한 조순명 교수다. 그 뒤로 부산교대 서울동창회 조만기 전 사무국장(한 해 후배)과 내 사범학교 동기동창 신외성/ 김강미 친구(가톨릭 교우) 등의 얼굴이 보인다. 안경 낀 이는 역시 동기동창인 김철곤 전 중등학교장(음악), 그리고 맨 끝은 동기회장 하영수 전 국세청 서기관 . 얼굴이 가려진 이는 전 서부교육청 학무국장 이진표 수필가>
하지만 나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바로 母部隊(내가 50년 전에 몸담았었던 부대)다. 여기서 왕복 여섯 시간쯤 걸리는 곳이 위치하고 있는 그야말로 어머니 母, 엄마처럼 여겨지는 26기계화보병사단이다. 일찌감치 나는 그곳 장병들을 초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만찮은 일이다. 아무리 토요일 오후지만 병력이 이동한다? 도중에 만약 사고라도 날까봐 주위에서도 걱정을 많이 할밖에. 그러나 이미 주사위가 던져진 뒤였다.
어디 그것뿐이었으랴.
경비가 문제가 아닐 수 있겠는가? 대관료만 삼십육 만원이란다. 우여곡절 끝에 내로라하는 음향기기 전문가 겸 키보드 반주자에게 지불해야 할 액수도 사십 만원. 내 군대 시절 최고의 인기 가수 쟈니리의 출연료 오십 만원. 성악가 박참 중위와 가곡 독창 반주할 피아니스트 이십 만원. 35명 안팎의 26사단 장병들에게 따뜻하게 저녁 한 끼를 사 대접하는 데 150만원(이것만은 절약할 수 없었다) 플래카드(제대 50년 노병 이원우 하사의 콘서트) 두 개 제작비 십이 만원. 교통비, 미리 만난 장병들과의 식대 이십 만원……. 적어도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넉 장은 필요했다. 다행히 재작년 ‘문학의 집’에서 받은 청향문학상 상금 삼백 만원 중 병사들을 위해 쓰고 남은 게 조금 있었다. 모자라는 건 아내와 딸이 보탰다.
<이경진 주임원사 뒤로 서성식 예비역 하사. 부산 사범 내 동기동창이다. 서울 법대를 졸업했으나 법관 대신 은행을 택했다. 부산 경남 본부장까지 지낸 친구다. 나보다 늦게 26사단에 전입하여 사단장 실에 근무했다. 나는 부관참모부에 있었고. 50년 만에 다시 한 공간에 들어앉다니 실로 우정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서성식 전우의 뒤로 앳돼 보이는 여인(?)은 32년 전의 내 제자 김진영이고 한 줄 뒤 안경낀 중년 남성은 김진영과 동기인 하준영, 그 뒤로 캠코더를 들과 촬영 중인 친구는 40년 전 밀양 숭진초등학교 제자 권철우 군. 저 멀리 이은집 소설가가 보인다. 주임원사의 바로 옆은 역시 숭진초등학교 제자 장완규 군과 이종웅 군. 흰 보자 쓴 분은 이태희 표암 문학회장(표암 공을 시조로 모시는 후예들의 문학 모임/ 국제PEN이상문 이사장/ 이문열 작가/ 이유식 교수/ 이재정 경기 교육감 등이 회원임). 정말 이경진 주임원사는 부사관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에 오른 사람이다. 의전상 예우는 중령!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를 큰형님이 부른다. 그의 작은형님은 윤성필 부사단장. 우리의 전우애 혹은 혈연과 같은 우애는 게속될 것이다.>
못지않은 노심초사, 장꾼이 안 모이면 장이 어떻게 서겠는가? 일백이십 석쯤 마련해 달랬는데, 턱없이 참석자가 부족하면 우세이고말고. 군 병력(?) 서른다섯 명을 빼고도 나머지가 여든 명 이상 동원되어야 한다. 는 노심초사할밖에. 사실 그 정도만 차도 성황이니, 제발 그 자리만 채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도리밖에. 초등학교 친구와 사범학교 동기동창, 교우, 문우, 제자, 이웃 등에게 줄기차게 연락을 취했다. 육필 편지도 쓰고 카톡으로 문자를 날렸다.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붙잡고 있었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세계에서 유례없다는 말이 적절하다. 지구촌 어디에서 자기 나라 국가를 4절까지 콘서트장에서 부르겠는가? 일반 국민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현역 장병은 불가능하다. 내 전우들의 부대 마크를 보라. 그들은 불무리 용사다. 나와 만나면 어디서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저 멀리 국제PEN 이사장 손해일 박사가 보인다. 황금색 두루마기를 입은 분은 세계 최초로 대중 가요 부르는 보덕 선사 (宗正)>
‘태풍’에 맞서 버텨냈다. 당일 내가 진행하고 사회하며 노래까지 부른 콘서트를 치러내면서 내내 스스로 만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특히 부사단장과 주임원사를 비롯한 장병들과 무대에서 애국가며 사단가 군가 진중가요를 열창하던 때의 기분을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아편을 맞으면 그렇게 하늘로 날아오를까?
<군 시절 쟈니리를 만난다는 것은 꿈에서도 어려웠다. 그의 '뜨거운 안녕'은 정말 최고의 인기였다. 그런데 딱 50년 만에 그를 초청하여 내 무대에서 그 명곡 중의 명곡을 부르게 하다니--.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는 세 곡을 소화했다. 정말 가수는 가수였다. 나는 그를 사석에서 그를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가톨릭에서의 형제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고인이 된 김상국 가수도, 남백송 가수도 같은 호칭을 붙였다. 서로 양해하면 그게 편하더라.>
아니나다르랴. 신문에서 다투어 보도해 주었다. 물론 자료와 정보를 내가 건넨 결과이기도 하지만. <조선일보>도 무겁게 다루었다. <국방일보>는 아예 전면을 도배했고. <실버넷 뉴스>도 톱으로 실었더라. <한국문학신문>에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방송으로 이어졌으니, ‘국군방송’(라디오 대담) ‧ 마포 FM(라디오 대담) ‧ 국방 TV '우리는 전우’ 등등이다. <국방일보> 박지숙 기자가 정곡을 찌르는 표현을 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
<부사단장 윤성필 대령. 그는 나의 영원한 전우다. 내가 비록 예비역 하사(당시에는 병사들도 하사로 제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에 지나지 않지만 우린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수 경례다. 공격! 그리고 전우들의 나에 대한 호칭은 '선배님'. 사단장도 마찬가지. 최고의 예우를 해 주는 셈이다. 만약 어르신 운운 한다면 그건 차라리 망발에 가깝다. 제대 후에도 나는 이 자랑스러운 예비역 대령과 인간 관계를 계속하고말고.>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다. 제자 김진영이 부사단장에게 꽃다달 증정이라니--.이런 광경 때문에 '세계에서 유례없는--'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다. 무대 위에 놓인 난 화분은 내가 신인* 신임 사단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마련한 것이다. >
하기야 그렇다. 제대 50년/ 부사단장 현역 대령의 장병 30여 면 인솔/ 정식 데뷔한 가수인 본인의 노래와 윤행원 수필가와의 듀엣/ 찬란한 우정 출연진(쟈니리 외 박수정 가수협회 이사 독창 ‧ 종교계를 대표하는 분들의 특별무대 ‧ 국제 PEN 부이사장 손해일 박사의 시 낭송 등)/ 이백여 명 청중 동원(실버넷 뉴스)/ 단 한 건의 안전사고 무! 셋계에 유례없는 운운도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라고 우기는 이유다.
<어찌 다시 이런 전우가 있겠는가? 우리 셋은 42년생, 다시 말해 '갑장'이다. 그리고 약 50년 전 26기계화보병사단(당시 보병 제26사단)에 근무했다. 가운데 카메라를 든 전우가 김의배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실버넷뉴스 편집국장)이고, 그
옆은 서성식 사범학교 동기동창. 김의배 전우는 75연대 대대 정보장교로 근무 중이었고, 나는 부관참모부에서 모필병으로 사단장 표창장을 썼다. 그리고 서성식 전우는 공병 대대에서 영역을 하다가 이윽고 사단장실로 옮겨 근무했다. 나를 제외한 두 전우는 서로 모르는 사이, 이 날 처음 만났다. 김의배 전우와도 나는 얼마 전까지 얼굴도 익히지 못했던 터였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알게 되었고, 특히 26사단 공식 카페에 부지런히 글을 올렸더니, 그가 읽고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 나와 함께 부관부에서 근무했었던 전우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연락이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밤에 잠까지 설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었다. 저들은 생트집을 잡고 우리 땅에 무력행사를 해 댔으니…….만약에 우리 군에서 엉거주춤한 채 단호하게 대응을 하지 않았으면, 파주를 비롯한 접적 지역의 국민은 대피소에 계속 묵어야 할 형편이었다.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함은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음은 우리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 직접 포화로 응징한 부대가 바로 26사단 불무리 부대다. 그것으로 저들은 꼬리를 내리고, 전쟁 발발 직전에 사태가 수습된 것이다.
<난 애국자는 아니다. 다만 군이 참 좋다. 그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이등병에서 대장까지. 근래 소장을 둘 만났고, 이등병과는 수도 없이 얼굴을 마주대했다. 합동참모본부로 옮긴 오상* 12* 기보대대장! 그는 대단한 지휘관이다. 내 콘서트에 이 장병을 출연시켜 준 것이다. 그것도 한 닷새쯤 특별휴가를 허락해서. 왼쪽 전투복 차림이 성악가 박참 중위이고, 오른쪽은 뮤지컬배우 지망생 나승인 일병이다. 점심 식사를 안 했다고 해서 나는 멀리 부산에서 일부터 올라온 아내의 제자 김진규 소방파출소장 등 세 사람과 함께 한참 걸어내려가 대중음식점에서 떡만두국을 먹었다. 오천 원짜리인데 정말 맛있었다. 17일 나는 국방 TV '우리는 전우'에 출연한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하루는 26사단 군악대와 인사처에서 촬영한다. 군악대에서 '전우야 잘 자라'를 영어로 가르치려 한다. 당연히 이 두 전우에게도 노래 부를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신임 대대장도 적극 협조하니 나는 행복하다. 박 중위는 그 날, '비목'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우정 출연했다.>
만약 26사단이 없었더라면,, 콘서트라니 어림도 없다. 장병들이 없는 콘서트? 그건 군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이 노병이 아닌들 누가 못 열랴.
16일엔 국방 TV 제작팀이 우리 집에 온다. 송두리째 비워버린 내 서가(26사단에 장서를 전부 보냈다), 내가 손자의 반주에 맞추어 ‘애국가와 사단가’ 부르는 모습, 다시 머리를 50년 전만큼 짧게 깎는 현장, 우체국에서의 책 발송 등등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은 다시 사단 사령부로 간다. 군악대원들과 인사처 전우들을 만나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는 막을 내리지 않는다. 부대에 폐만 안 된다면 내가 퍼붓고 싶은 군에 대한 사랑을 계속한다. 그게 또 다른 의미의 콘서트다.
<시간이 되자 우정 출연할 가수들과 사단장으로부터 특별 휴가를 얻은 병사들이 속속 '문학의 집'으로 모여든다. 비슷한 시기에 대통령과 사단장이 각각 전 장병(부사관 포함) 혹은 병사들에게 이런 선물을 전달한 것이다. 26사단의 모범 병사들이 내 콘서트에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복 입은 이는 원로 가수 이영규/ 선글라스 낀 자매는 복수미 체칠리아 가수/ 그 뒤로 정동진 가수>
<윤행원 수필가와 함께 O Sole Mio를 원어로 부르다. 그는 덩치로 보나 노래 실력으로 보나 파파로티와 닮은꼴이었다. 질투? 당연하지. 나는 사람이니까. 하여튼 멋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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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지십니다.
잊지못할 시간이었네요. 기쁨 오래 간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