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신춘문예 조선일보]
아름다운 눈사람 / 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시 당선 소감
수많은 손이 날 다독이며 ‘잘 쓰고 있어’ 말해준 기분
이수빈
-2004년 서울 출생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2학년 재학 중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는 대신 몰래 시집을 읽곤 했다. 어느 날은 읽고 있던 시집이 너무 좋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쉬워 눈물이 고였던 적이 있다. 그때 교실에 두근대던 내 심장 소리가 종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이 지금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좋은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쓰는 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멋있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시를 사랑한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루에 백 편이 넘는 시를 읽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단 한순간도 시를 쓰는 일이 지겨웠던 적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나 글 쓰고 싶어. 그 한마디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엄마 아빠에게 고마워. 내가 이뤄낸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뤄낸 거라고 믿어.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던 스터디 사람들, 전부 다 잘될 거야. 언제나 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고양예고 15기 친구들아, 너희의 사랑이 나를 키워냈어. 내 가장 오랜 친구 정연이 가연이 그리고 민정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던 승주 언니, 정말 사랑해.
저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 교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가 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김기형 선생님, 저를 믿어주시고 아껴주신 유계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신 오양진 교수님, 언제나 마음 써주시고 제가 더 재밌게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언 교수님,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부족한 제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온 마음, 온몸으로 쓰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기적이 일어났다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수많은 손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잘 쓰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기분이다.
마침내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이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고 싶다.
시 부문 심사평
시단에 신선한 바람 불어넣을 ‘감각의 사용’ 갖춰
시는 구르고, 잠시 멈추고, 다시 움직인다. 시장과 광장, 평원과 대양(大洋)과 우주로 나아간다. 사람들의 말 속에 들어 있고, 뿌리와 내일의 새잎, 발톱과 단단한 근육에 깃들어 있다가 시의 바퀴는 구동한다. 시는 모든 곳에 있고, 도달하지 못할 곳 또한 없다. 시인은 이 시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때로는 붙들어 앉히느라 매 순간 아픈 사투를 벌인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기대하는 것은 솟구치는 힘과 고요한 정려(精慮)가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러나 시는 헤쳐가며 구르는 것이어서 기저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기저는 관계의 접면(接面)이라고 할 수 있고, 기저로 인해 시적 비전이 제시될 수 있다.
본심에 올라온 열한 분의 작품을 세심하게 읽었고, 최종적으로 숙의한 작품은 「주머니 자라기」, 「중력」, 「아름다운 눈사람」이었다. 「주머니 자라기」는 ‘나’를 구성하는 것의 내용을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상술했다. 시적 화자가 키우고, 모으는 것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불완전한, 멀쩡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구성물들이 내포하거나 환기하는 것이 다소 모호했다. 「중력」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시였다. 시행 곳곳에 묻어둔, 곧 터질 굉음은 마치 묵시록적 느낌을 무겁게 줬고, 현실에서 끄집어낸 시의 언어는 매우 힘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공간의 이동이 눈에 띄게 계획되고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눈사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이 시는 풍요로운 서정이 돋보였다. 시의 보행(步行)이 차분하면서도 감각의 사용이 단순하지 않았다. 하얀 눈과 둥글고 큰 눈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순백과 순수의 세계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시의 매력은 운동장에, 즉 교실 바깥에 펼쳐져 있거나 세워져 있는 그 세계가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곧 짓밟히고, 녹아내려 울상을 보이며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에 있었다. 어떤 막막함과 뭉클한 슬픔이 길게 여운으로 남는 시였다. 미성(美聲)을 잃지 않고, 시심을 잘 지니고 키워서 우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 주길 고대한다. 당선을 축하한다.
챗 GPT 해설. *참고만
1. 제목의 의미
**“아름다운 눈사람”**은 화자의 노력과 애정이 담긴 결과물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본질을 잃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눈사람은 완벽과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주제
사회적 이상과 본질 사이의 갈등.
보호와 애정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움과 본질을 잃게 되는 모순적인 인간 행위를 탐구함.
3. 상징의 분석
장갑: 기성세대(선생님)의 보호와 간섭을 상징하며, 동시에 화자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함.
눈덩이: 순수한 자연스러움과 본질을 상징.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사회적 이상과 완벽주의를 상징.
흙덩이 같은 눈덩이: 현실의 불완전함과 수용의 태도.
선생님의 울상: 이상과 본질의 갈등에서 느끼는 안타까움과 회의.
내리는 눈: 치유와 재생, 갈등을 덮어버리는 자연의 순환.
4. 연단위 해설
1연: 선생님은 화자에게 보호를 제공하며 눈놀이를 준비시킨다.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선생님은 화자에게 이중으로 장갑을 끼워주며 보호의 역할을 한다. 이는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선의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음을 드러낸다. 장갑을 끼운 상태에서 느껴지는 “부스럭 소리”는 보호 속에서 억제된 감각을 암시하며, 선생님이 “마음 편히 놀아”라고 하지만 이미 자유로움은 제한된 상태다.
2연: 화자는 완벽한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애쓰며 성공한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화자는 아이들이 설정한 기준인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에 집착하며 완벽한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눈덩이를 “개를 쓰다듬듯” 신중히 다루며 성공을 이룹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흙덩이를 안거나 눈을 맞으며 자유로운 놀이를 즐기며 자연스러움을 수용합니다. 이는 화자가 사회적 이상을 위해 본질을 훼손하는 모습과 다른 아이들의 태도를 대비시키며, 이상과 자연스러움 간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3연: 화자는 눈사람을 꾸미지만, 본질을 잃어버린 눈사람을 바라본다.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화자는 자신의 눈사람을 꾸미기 위해 목도리와 모자를 벗어 입히며 애정을 쏟습니다. 그러나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눈사람은 본래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잃습니다. 아이들이 떠난 뒤 운동장은 파헤쳐지고 흙탕물이 섞여 더 이상 깨끗하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이는 이상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자연의 순수함이 훼손된 것을 상징합니다.
4연: 선생님은 화자의 눈사람을 보고 슬퍼하며, 다시 눈이 내린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화자는 자신의 눈사람이 이상에 부합한다고 자부하지만, 선생님은 이를 바라보며 슬퍼합니다. 이는 선생님이 화자의 노력이 본질을 훼손했음을 깨닫고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반영합니다. 내리는 눈은 이전의 흔적을 덮으며 치유와 재생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사회적 이상과 본질의 갈등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무력화되는 순간을 암시합니다.
5. 결론
이 시는 사회적 이상과 본질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화자는 기성세대(선생님)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으며 이상적이고 완벽한 눈사람을 만드려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질을 잃습니다. 반면, 다른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이를 하며 불완전한 현실을 수용합니다. 선생님은 화자의 눈사람을 바라보며 이상이 본질을 훼손한 모습을 안타까워합니다. 마지막에 내리는 눈은 모든 흔적을 덮으며 갈등을 초월한 새로운 가능성과 자연의 치유력을 암시합니다.
이 시는 인간의 이상화된 가치관이 자연스러움을 훼손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본질과 이상 간의 균형을 찾아야 함을 독자에게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