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복장감실과 동학군의 비결
칠송대의 암각여래상의 배꼽(정확히는 명치) 부위에는 네모난 서랍이 파여있다. 이것은 부처님을 봉안할 때 복장하는감실이다. 여기에는 불경이나 결명주사로 찍은 다라니, 사리 대용구인 구슬 그리고 시주자의 이름 등 조성 내역이 기록된 문서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고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 부처님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어서,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른바 갑오농민 전쟁의 '석불비결'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도 나오는데, 그 원전은 이 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인 오지영의 <동학사>에 실려있다.
1820년,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도임한 후 며칠 안되어 무슨 조짐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가 무장현 선운사에 이르러 도솔암에 있는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결을 내어 보려는데, 그 때 마침 뇌성벽력이 일어나므로 그 비결책을 못다보고 도로 봉해두었다고 한다. 그 비결의 첫머리에 쓰여 있으되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고 한, 글자만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어떤 사람이 열어보고자 하였으나 벼락이 무서워서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892년 8월 어느 날, 손화중 접중에서는 석불 비결이야기가 나왔다...
청죽 수백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을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무장현감은 각지의 동학군을 모조리 잡아들여 수백명이 잡혔다. 그 괴수로는 강경중(姜敬重), 오지영, 고영숙이 지목되었다....
소위 비결이라고 하는 것은 손화중이 어디론가 가지고 가고 말았으며 여러 두령들도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 없다하여 10여일 동안 형벌을 받다가 전라감사에게 보고되어 주모자 3인은 모두 강도 및 역적죄로 사형에 처하고 남은 100여명은 엄장을 때려 방송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반전의 일이다. 망해가는 나라의 쇠운과 일어서는 민중의 힘과 의지가 서려있는 얘기다. 그 비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있었다면 불경이 고작일 것인데 왜 이렇게 역적죄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을까?...139 - 142쪽
나의 문화유산답사기_산사순례편, 유홍준, 2018년, (주)창비
강경중(姜敬重)
생년월일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언제 동학에 입교(入敎)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92년 8월 선운사 마애불비기 탈취사건 때 고영숙(高永叔)·오지영(吳知泳)과 함께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뒤 동학 교도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어려서부터 동학에 가담한
것으로 짐작된다.
1893년 보은 집회 때는 무장 접주로 참여하였다. 당시 강경중은 손화중(孫華仲) 포에
소속되어 두령으로 동학을 포교하였고, 1894년 3월 봉기
때 송경찬(宋敬贊)과 함께
1,300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에서 봉기하였다. 9월 봉기 때는 청송역에서 3,000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으나 후에 우금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