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추천도서
최근 몇 달 새에 각계각층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이
정지아 님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닌가 싶구나.
아빠가 좋아하는 유시민 님도 이 책을 추천해 주셔서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책 제목 때문에 별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방영된 인기 드라마의 제목에서 따온 듯한 책 제목이 별로였거든.
해방일지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책 제목에 넣은 것은 드라마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점이 아빠에게는 마이너스 요소였단다.
책을 읽고 나니,
굳이 제목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만큼 책 내용이 너무 좋으면서 재미있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들 추천하는지 알겠더구나.
음, 그러면 제목이 뭐였으면 좋았을까?
창의적이지 못한 아빠가 이 책의 제목을 짓는다면….
<나의 아버지>? 음 이것도 드라마의 제목과 유사한가?^^
소설의 첫 문장 <아버지가 죽었다>는 어떨까?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짧은 첫 문장 속에 소설의 성격을 어느 정도 담겨 있는 듯 했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라는 높임말이 아닌,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말에 아버지와 딸 사이에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고,
나이 드실 만큼 드신 다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픈 감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어.
아버지가 죽은 것도 희한하게도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라고 했어.
아무튼 첫 문장부터 끌어당기는 그런 소설이었단다.
주인공 정지아 님의 소설은 아빠가 처음 읽어보았는데
이름 꼭 기억해야겠구나.
정지아 님의 또 다른 대표작 <빨치산의 딸>도 꼭 읽어봐야겠구나.
정지아 님의 또 다른 책이 무엇이 있나? 찾아보았더니,
앗, 그 중에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 무려 두 권이 있더구나.
그러니까 정지아 님의 글을 그 이전에도 읽었더구나.
하나는 <민중의 기록하라>라는 책으로 여러 사람들의 같이 지은 책인데,
정지아 님도 포함되어 있었어.
나머지 하나는 아빠가 너희들 읽으라고 사준,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에 과한 책
<하늘을 쫓는 아이>를 정지아 님이 쓰셨더구나.
알고 보니 정지아 님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도 많이 쓰셨더구나.
1. 빨치산 아버지
자, 그러면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는 고아리.
고아리의 아버지는 고상욱.
평범하신 분은 아니었어.
빨치산 경력을 갖고 계시고 철저한 사회주의자셨어.
빨치산 경력 때문에 십 수 년 감방생활도 하셨어.
감방에 나오셔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였어.
어머니도 빨치산 경력이 있었고,
두 분은 동지로 만났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빨치산 이력으로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와 멀찍이 떨어지려는 의도로
깡촌에서 농사를 지내며 지내셨어.
평생을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말년이 되셔서 치매도 겪게 되었어.
다른 사람에게 치매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었던 아버지는
어느날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어머니도 아버지 따라 깡촌에서 농사를 지내며 살았지만,
책도 많이 읽으시고 공부도 많이 하시고 그랬어.
어머니도 평생 철저한 사회주의자.
…
그런 부모님을 보는 친척들의 시선은 좋지 못했단다.
친척 가족 중에 빨치산 이력이 있다면,
예전에는 제약이 많았거든.
그래서 작은 아버지는 원하는 아버지와 평생을 원수지간처럼 지냈어.
나중에는 눈물을 자아내는 진실이 드러나지만 말이야.
….
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의 성격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아빠가 소설 속 글을 발췌해 보았단다.
딸 고아리가 느끼는 아버지 고상욱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이해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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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는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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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뒤늦게 만난 아버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들이 왔단다.
그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아니 몰랐던 모습을 뒤늦게 알게 되었단다.
아버지는 평생 철저한 사회주의자이자 유물론자였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사람 그 자체였단다.
사람이 좋으면 사상보다 앞섰어.
그러니 사상적으로 정반대였단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단다.
심지어 잘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생전에 술 한잔 잘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람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아버지의 철학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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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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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아버지는 공감능력도 뛰어났단다.
모르는 십대 소녀와 맞담배를 피면서 조언을 해주어
그 소녀가 검정고시까지 볼 수 있도록 해주었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담배 핀다고 잔소리만 늘어 놓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담배조차 이해를 해주는 어른의 이야기라면
자신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 때문에 친척들이 간혹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친척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달려가서 일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버지였단다.
…
고아리는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고,
뒤늦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제서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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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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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아리는 마지막으로 깨닫게 된단다.
아버지는 혁명가이고 빨치산이고 사회주의자이고 유물론자이기 전에
나의 아버지였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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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249)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잠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가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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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다 보면 읽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할 거야.
아빠도 아빠의 아버지, 그러니까 너희들의 할아버지가 떠오르더구나.
어떤 특별한 사상을 가지시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아버지.
하지만 아빠가 본 모습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계시겠지.
어쩌면 아빠도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 더 진짜일 모습을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구나.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나이 드신 부모님 걱정은 커져만 갈 수 밖에 없는데,
건강히 오래오래 함께 하셨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아버지가 죽었다.
책의 끝 문장: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책제목 : 아버지의 해방일지
지은이 : 정지아
펴낸곳 : 창비
페이지 : 268 page
책무게 : 287 g
펴낸날 : 2022년 09월 02일
책정가 : 15,000원
읽은날 : 2022.11.14~2022.11.15
글쓴날 : 2022.11.3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