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왕들에 대해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이를 확인코자 이 글을 올리오니 많은 관심과 토론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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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리씨 선원계보를 보면
우리 나라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해서 살아왔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독특한 한자 용어가 있다.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옥[璿]’은 돌 중에서 가장 값져 ‘임금님’에 비유되므로 ‘임금님의 조상’들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쓴 듯하다. 또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도 하여 제왕 또는 임금은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모든 백성 공동의 부모 곧 국부(國父)이므로 한 파의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님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를 따지는 것은 불경(不敬)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시조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 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조로부터 17세 양무장군까지의 직계와 방계의 3파 곧 시중공파(侍中公派)․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는 모두 선원선계에 속한다.
선원세계는 추존왕 4대와 태조고황제부터 순종황제까지 20세를 합쳐 24세의 역대왕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대왕의 5왕자로부터 장조의 3왕자군까지 도합 125의 파계가 있었으나 무사(無嗣)의 군파가 있어 현재는 105여 파로 분리되고, 2000년 5월 현재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 종약원에 등록한 파종회는 86개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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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祖大王(18世)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요, 고려 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완산실록> <동국세기>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부분적으로 자구(字句)가 틀릴 정도이다.
‘목조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신데, 하루는 꿈에 청의동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공의 선대에 하느님께서 주신 물건이 있으니 잘 간직하시오. 후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꿈을 깨어 찾아보니 구슬도 아니고 돌도 아닌 술잔 같은 것이 있었다. 이에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어느 날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에는 天狼山,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시는데 한 노파가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대왕께 물었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보물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 그 노파가 말하기를 “향린산(香麟山 : <충효전>에는 香因山)에 천 년 묵은 청학(靑鶴)이 선동(仙童)으로 변하여 용궁의 보물을 훔쳐다가 준 것이요”하며, 보여 달라 하기에 보여 주니 그 노파가 보고서
“이것은 용궁 깊숙히 간직해 두었던 활과 화살인데 그 선동이 어떻게 훔쳐 갔는지 알 수가 없군”
했다. 이에 대왕이 묻기를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그 노파가 대답하기를
“속세의 인간들이 내가 용녀(龍女)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거룩한 천명이 장차 공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백호도(白虎刀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白龍劍)를 전해 주려고 왔노라.”고 하면서 좋은 칼을 주므로, 대왕은 받고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찰라에 그 노파는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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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퇴거(全州 退去)의 원인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게 된 목조대왕은 예기치 않던 하나의 시련에 봉착하였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당시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주관과 안렴사는 목조대왕에게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를 씌워, 목조대왕 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보내기로 책동하였다. 이것이 목조대왕 일족 전주 퇴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시조 사공공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에서 살다가, 17세손 장군공과 18세손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척 이주(三陟 移住)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리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려는 목조대왕은 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괴산(槐山)․제천(堤川)․정선(旌善) 등의 직선 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이 때 장군공과 목조대왕에 따르기를 원하는 혈족과 외족은 170여 호나 되었다. 대이동한 일족은 삼척군 내의 삼화사(三和寺 : 정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을 지나면 있으며, 삼척군 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쪽 25리에 북평이 있고, 북쪽 30리에 묵호가, 서남쪽 10리에 頭陀山城이 있다)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대이동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231년(고려 고종 18)에 제1차 몽고병의 침입이 있었고, 같은 해에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장군공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1232년(고려 고종 19)엔 제2차 몽고병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목조대왕은 삼화사에 열심히 참례(參禮)하였으며, 또 일족의 일부는 묵호만(墨湖灣)으로 이동해 가서 선박 15척을 만들었다.
진실로 성품이 호방하고 사방을 경영할 뜻이 있는 목조대왕은 과연 선견지명이 적중한 것이다. 전주에서 목조대왕의 일족이 무리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던들 일족의 화(禍)는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3년 후인 1235년(고려 고종 22)에 제3차로 몽고병이 침입하였는데, 이 때의 몽고병은 실로 전국 8도를 샅샅이 누비며 야만적인 행패를 다하였다.
몽고병이 동해안에서 행패를 부릴 때 목조대왕은 일족을 이끌고 삼화사의 서남쪽 골짜기 깊은 곳인 두타산(頭陀山)의 중턱인 두타산성으로 이동하여 피난하였다.
첫댓글 좋은 참고문헌을 올려 주셨습니다. 배우는 일은 끝이 없다 합니다.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많이도 느꼈습니다.전공과 관심이 다르다 해도 몰랐던 점을 깨달으며, 좋은 학습기회로 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잘 읽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