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예술인
17년만에 열린 제네바 콩쿠르 타악기 부문서 우승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3호(2020. 2.15)
퍼커셔니스트 박혜지(기악10-14) 동문
4세 때 피아노로 음악 시작- 마림바, 팀파니, 드럼 등 연주
지난해 11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 전세계 타악기 연주자 지망생이 기다려온 무대가 펼쳐졌다. 피아노와 클라리넷, 첼로 등 경쟁 부문이 해마다 바뀌는 이 대회의 80년 역사에서 타악기 부문이 열린 것은 단 세 번. 지난해 17년만에 세 번째로 열린 타악기 부문 우승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대 음대에 다니는 한인 유학생이었다. 퍼커셔니스트 박혜지(기악10-14) 동문이다.
세계적인 권위의 제네바 콩쿠르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을 배출했다. 한국인 연주자로는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문지영 등에 이어 박 동문이 우승자에 이름을 올렸다. 청중상과 6개 부문 특별상도 휩쓸었다. 독일에 머무는 박 동문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직접 만났다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했을 법한 답변에 타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제 전공을 말하면 모두 타악기가 대체 뭔지 물어봐요. 그럼 대답하죠. ‘두드릴 수 있는 건 모두 다 타악기’라고요.” 퍼커셔니스트의 퍼커션은 타악기를 통칭하는 말. 타악기 연주자는 기본인 마림바와 팀파니, 스네어 드럼에 호루라기처럼 입으로 부는 악기, 나뭇가지 같은 자연물과 와인잔, 깡통 등 생활용품까지 다룬다. 그만큼 ‘다재다능’ 하다는 이미지다. 이번 콩쿠르에서도 그는 대여섯 종류가 넘는 악기에 둘러싸여 양손으로 동시에 다른 악기를 두드리곤 했다. “몸을 때리거나 춤을 추는 행위도 넓은 범위에선 타악기에 속해요. 파트너와 볼을 때려가며 연기하는 곡도 했었죠. 한 가지 일에 쉽게 질려 하는 제겐 맞춤 악기예요. 연주를 하면서 내면의 강함과 섬세함을 고루 보여줄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입니다.”
퍼커셔니스트만의 고충도 물론 있다. “악기 옮기는 시간만 연주시간의 최소 두세 배예요. 매일 옷과 머리는 먼지투성이에 유학생활 동안 치마를 입은 적이 손에 꼽죠. 새로운 곡의 악보를 읽기 전에 필요한 악기와 세팅을 생각하느라 몇 주가 걸리기도 하고요. 비용과 시간 문제로 타악기 솔리스트는 연주 잡기도 쉽지 않아요.”
무거운 악기에 지쳐 눈물을 흘리고, ‘내 자식은 절대 타악기 시키지 말아야지’ 다짐하다가도 연주만 하면 마음이 바뀐다. “관중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다양한 퍼포먼스를 준비하거든요. 무대계획과 세팅을 준비하고 동선을 연습하면서 무대를 상상 하면 벌써 행복하죠. 유럽에서 연주 후 관객과 다과를 함께 하는 시간에 제 연주에 감동 받으신 분들이 손을 꼭 잡고 칭찬해주실 때면 다신 연주 안 해야겠다던 생각은 온데간데 없어져요.”
좋은 퍼커셔니스트가 갖춰야 할 자질로 그는 협동심을 꼽았다. “연주자들끼리 이런 얘길 해요. ‘우린 악기는 당연하고, 노래, 춤, 외국어랑 연기도 잘해야 하는데 말렛(채)을 잘 감으려면 바느질도 능숙하고 체력도 좋아야 해!’ 정말 많은 재능이 필요한 악기죠.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협동이 중요한 것 같아요. 누가 저 많은 걸 다 잘할 수 있겠어요. 솔리스트라도 타악기는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에요. 세팅과 악기 정리, 운반은 도움 없인 아예 불가능하죠. 이번 콩쿠르에도 운전을 못 하는 절 위해 클래스 친구들이 제네바까지 악기를 실어다 줬어요. 도움 받은 만큼 저도 더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 동문은 4세 때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다. 예중 입학까지 준비했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중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받은 드럼 레슨에서 타악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림바가 무슨 악기인지도 모르던 때였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싶어 단식투쟁까지 하며 엄마를 설득했죠.”
고액 레슨 대신 대구시가 지역 예술영재를 위해 만든 대구예술영재교육원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학생이 갖추기 힘든 타악기들이 구비돼 있었고, 우수 원생으로 뽑혀 지역대학 강사에게 저렴하게 개인지도도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 입학 후엔 타악기 연주자 최경환(작곡72-80) 교수의 지도 하에 일취월장했다. 수업에서 혼을 내도 저녁엔 ‘고기 먹으러 가자’며 학생들을 배불리 사먹이던, 아버지 같은 스승의 사랑을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고 있다. 밤새 함께 연습했던 동기 김지연(기악10-15) 동문은 독일에서도 함께 공부한 선의의 라이벌이자 파트너다.
고비마다 주어진 좋은 기회를 잊지 않아서일까? 박 동문은 교육에도 뜻이 깊다. 콩쿠르 우승 이후 ‘마음가짐이 바뀌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고, 학생을 가르칠 기회가 많아지면서 부족한 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하고 겸손하며,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연주자와 선생님이 되는 게 제 꿈이거든요. 부자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재능이 있거나 노력하는 아이이거나 상황에 상관 없이 행복한 음악을 할 수 있게 사랑으로 가르치고 도와주고 싶어요.”
유럽과 달리 한국은 타악기 연주가 친숙하지 않다. 고전음악에선 메인에 나서는 일이 드물고, 타악기 독주곡이 많은 현대음악은 장르 자체가 생소하다. 하지만 인류와 함께한 역사가 긴 만큼 마음을 직격 당하기 좋은 악기다. 연주자로서 느낀 매력이 한국 청중에게도 가 닿길 바라고 있다. “타악기 연주는 사실 매우 간단해요. 보통 연주를 보러 오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기해 하시는데 그 신기함 그대로 감상하셔도 좋을 거예요. ‘저 악기는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저런 퍼포먼스도 하는구나’ 하고요. 연주자가 감정과 생각을 말이 아닌 연주로 표현한다 생각하고 곡마다 연주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해보세요.”
콩쿠르 우승과 동시에 슈투트가르트대를 졸업한 그는 진정한 프로 연주자로 발을 내딛는다. “10년간 대학교의 보호 아래 살다가 보호막이 벗겨진 기분이어서 섭섭하긴 하지만 많은 연주 계획 덕분에 바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저 제 연주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기쁨과 감동을 드리는 게 올해 목표예요. 앞으로 제네바 콩쿠르 우승자로 초청받는 게 아니라, 연주가 좋아서 또 보고 싶은 박혜지로 알려지고 싶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