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Seoul National Cemetery)
요약 :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묘지로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
내용
「국립묘지령」은 그 첫 조항에서 ‘군인·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과 국가에 유공한 사람의 유골 또는 시체를 안장하고, 그 충의(忠義)와 위훈(偉勳)을 영구히 추앙하기 위하여 국방부 장관 소속하에 둔 묘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국립묘지는 1955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관악산 줄기로 약 44만 평(144만㎡)의 대지에 설립되었다. 2018년 현재 무명용사 11만여 위를 비롯하여 모두 17만 9천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민족적 수난인 6·25 전쟁으로 전몰한 국군 장병들이 이름없는 넋이 되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하여 국군묘지가 설치되었다.
1954년 육군 공병단에 의하여 착공되어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가 설치되었으나, 그 준공은 1957년에 있었다. 처음 이 국군묘지의 안치 대상은 전몰한 군인에 한하였으나, 1965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2092호 「국립묘지령」에 의하여 국립묘지로 그 격을 높이고, 안장 대상자 범위도 국가에 유공한 민간인에까지 확대하였다.
안장 대상자의 범위는 ① 현역군인, 소집중의 군인 및 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자, ② 군복무중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군사상의 공적)이 뚜렷한 자, 장관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자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뒤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이 지정한 자, ③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장의(장례)된 자, ④ 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하여 공로가 뚜렷한 자 중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⑤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향토예비군 대원과 임무수행 중 전사 또는 순직한 경찰관, ⑥ 대한민국에 공로가 뚜렷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등이다.
1970년 1월 이 영의 개정에 의하여 이 일대를 성역으로 지정하여 한층 미화단장하였고,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던 곳으로 전하여지며 보훈충의(報勳忠義)가 깃들인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관(冠)을 쓴 듯 봉우리가 솟았다 하여 관악산이며, 붓끝과 같이 뾰족한 형세라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일컬어지는 산세로 감싸여 있다. 이들 산세 속의 펑퍼짐한 지형을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여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氣脈)이 흐른다 하였다. 또한, 전면을 흐르는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한층 미관을 더하고 있다.
국립묘지의 정면에 들어서면 충성 분수탑이 우뚝 서 있고, 금잔디가 깔린 광장을 지나면 현충문(顯忠門)과 현충탑(顯忠塔)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현충탑 안에는 1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위패실과 납골당이 있으며, 이를 가호하고 있는 애국 투사상이 좌측에, 호국 영웅상이 우측에 있다.
이 탑을 중심으로 동서묘역에 국가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장군 묘역, 장교사병 묘역, 경찰관 묘역 등 신분별로 약 5만 위가 정연하게 잠들어 있다. 동작동 묘지 시설로는 안장식을 거행하는 현충관(顯忠館), 유품과 전리품을 전시하는 유품 전시관이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초대·2대·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李承晩)과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朴正熙) 및 영부인 육영수(陸英修)가 안장된 것을 비롯하여, 전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전 민의원의장 곽상훈(郭尙勳)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묻혀 있다. 해마다 영령들의 충절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늘고 있다. 2009년 8월 23일 제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이 안장되었다. 2015년 11월 26일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안장되었다.
한편, 정부는 묘역 확대의 일환책으로 1985년 11월 13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에 국립묘지 대전분소를 설치하였고,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 대전분소에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6년 1월 국립현충원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호국지장사
위치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현충원 내
국립현충원을 들어서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묘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와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런가 하면 운동복 차림으로 순환로를 따라 걷는 사람, 약수를 받아가려는 사람들의 즐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가슴에 안고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묘비의 숲과 자연이 이루어 놓은 숲속을 번갈아 가며 지나면 호국지장사에 닿는다. 지장사가 자리한 곳은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들렀다가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국지장사는 원래 통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弓寺)가 시초이다. 이후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바꾸게 된 것이다. 호국지장사라는 절 이름에 어울리게 현재 절에는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의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소년시절 머물면서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이야기책의 한 꼭지가 되기도 했다.
* 역사
지장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즉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印)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華藏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사기(寺記)를 인용하여 “1577년(선조 10) 왕이 창빈묘(昌嬪墓)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것이다(朝鮮宣祖十年 ?寺於昌嬪墓附近山麓 爲昌嬪願刹 是葛弓寺)”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창빈의 묘는 1578년 즉 선조 즉위 11년에야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에서 이곳 동작리로 옮겨졌다. 그래서인지 안진호 스님은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을 언급하며 이 시기에 지장사가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현재로서는 화장사가 언제 처음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보인(寶印) 스님의 중창 이후 1577년(선조 10)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묘를 절 부근에 모시게 되자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華藏寺)로 고쳐 불렀으며, 창빈묘의 조포사찰(造泡寺刹)로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후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자세히 전한다. 화장사는 1663년(현종 4)에 중수를 하는 등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왔는데,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伽藍攷)』에도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在銅雀里縣北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862년(철종 13)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경파루(鏡波樓)를 새로 지었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주지 서월(瑞月) 스님과 경해 스님이 큰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3년(고종 30)에는 화주 경운(慶雲)·계향(戒香) 스님이 불상을 개금·개분하고 구품탱·지장탱·현왕탱·독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화주 풍곡(豊谷)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신중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0년에는 주지 원옹(圓翁)스님과 명진(明眞)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 스님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 뒤 1983년에는 혜성(慧惺)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차시설 : 주차 가능
[국립서울현충원 & 호국지장사 ]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