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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4)
겔 37:1-14
< 설 교 >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
겔 37:1-14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에스겔서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의 하나일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낯설고 난해한 책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본문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본문의 내용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환상 가운데서 목도하고 체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사방에 바싹 마른 뼈들로 가득한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1-2절). 본문 11절에 보면 이 마른 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즉 마른 뼈들은 절망 가운데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과 유다백성이 예루살렘 함락의 소식을 들은 후입니다. 언제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애절한 기다림 속에 있던 유다백성에게 예루살렘 함락의 소식은 그나마 남아있던 믿음과 희망을 다 무너뜨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도한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마른 뼈들은 바로 이 절망 속에 탄식하던 바벨론의 유다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 물음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3절). 이 물음과 대답은 유다백성 스스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 일을 행하실 능력과 주권이 있음을 짧고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백성 스스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밝히시고 그 일을 행하실 능력과 주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에스겔의 입으로 확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가 유다백성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4-5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희망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절망 속에 빠져있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만유와 만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생명의 회복과 희망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6절). 죽어 바싹 마른 뼈들처럼 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힘줄을 주시고 살을 입히시고 가죽으로 덮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리실 것이며, 그때에 백성이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와 생명의 유일하신 주권자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에스겔에 입에서 전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그 말씀대로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7-8절 말씀을 봅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하나님께서는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9절). 에스겔은 역시 그대로 대언했고,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였습니다(10절). 에스겔의 이 놀라운 체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2-14절에서 보는 하나님의 계속된 말씀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약하면 바벨론의 유다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망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뒤따르는 15-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라는 새 명령을 주십니다. 16-17절을 봅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에스겔에게 그의 그 행위가 무슨 뜻인지를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해줄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1절 이하를 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즉 단지 고국땅의 회복만이 아니라 남북왕국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단지 정치적으로 한 민족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된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준수하고 그의 율례를 지켜 행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에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며,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받은 이 환상과 예언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첫째는, 비록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지만 절망 속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모든 민족과 나라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되 그 일에 에스겔을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 세우시고 그의 충성스런 예언사역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살려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마른 뼈들을 살려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넷째는,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생명을 회복하는 일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충직한 종에게 그 성령을 움직이시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께서 사람에게 순종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 예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놀라운 위로와 격려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나라의 처지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망한 나라 죽은 민족까지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해서 지금 말라빠진 뼈무더기 같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계곡에 널려져 쌓인 바싹 마른 뼈무더기 같은 북한도 하나님께서는 살리실 수 있습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그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다 죽어 희망 없는 나라까지라도 새 나라로 만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우리에게 통일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하셨던 예언이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싹 마른 뼈들 같았던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이는 성령이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이 땅에 충만히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나라를 살리시고 우리 민족을 하나 되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싹 마른 뼈들처럼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성령께서 다시 힘줄을 주시고 살을 입히시며 가죽으로 덮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이 나라를 살려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살리시는 일에 당신의 대언자를 세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충실한 종을 원하십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 결과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라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며 또한 우리 교회가 특별히 나라를 위한 기도주일로 정한 날입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에 모인 그 첫 본회의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출발한 나라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임을 말없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 우리 교회는 매년 5월 마지막 주일을 "나라를 위한 기도주일"로 지키며 온 성도들이 이 나라의 정치를 책임진 이들이 바르게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격려하며 그들과 이 나라를 위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로 제일 먼저 결정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을 맞은 것입니다. 오늘이 제17대 국회가 그 4년의 임기를 시작하는 첫 날이라는 사실은 그 의미를 더해 줍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정치의 새 국면을 만들어낸 지난 총선의 결과에 따라 국민의 대표로 선택된 국회의원 중 그리스도인들을 35% 이상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야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나라의 국정을 함께 책임지게 되었다는 사명감으로 이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우리는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기독의원들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나라를 이끌어주심으로써 우리 민족이 남북통일이라는 하나님의 선물도 앞당겨 받게 하는 지도자들이 되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기독의원 여러분은 에스겔과 같은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위한 이 역사적 사명을 잘 감당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위에서 우리 기독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심으로 해서 그 어떤 국가상황 속에서도 국민이 좌절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새문안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김경호 목사
어제 제가 뉴우스를 들으니 한 연구소에서 “나는 재수 되게 없다” “하는 일 마다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과 “나는 운수대통이다” “왜 안되는 일이 없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8년간 추적 하며 조사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제 생활에서 맞이하는 기회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주 현격하게 다른 것은 그들이 사물을 해석하는 방식이고 내면적 자의식인데 한 쪽은 세상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다른 한 쪽은 매우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매우 새로운 삶을 열게 했고, 나중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하며 세상을 대하는 내면적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합디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도 능히 해 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겔 37,11) 이들은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울부짖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보고 있지 않으시며, 주께서 이 나라를 버리셨다”(겔 8,12)
이들은 깊은 절망감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아무 것도 의미가 없고, 아무 것도 새롭지 않고, 아무 것도 그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떠나셨다는 하나님 부재의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의 땅 바벨론의 중심지에서 느끼는 문화의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자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서 보니 조그만 헛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신전 벽 뚜께만 해도 10미터가 넘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바벨론 문명 그들의 건축 규모와 신상들의 위용 앞에 그들은 ‘우리가 속았구나!’, ‘우리가 어리석었구나!’, ‘야훼는 왜소하구나!’, ‘그가 우리를 버렸다’, ‘세상을 다스리는 참신은 바벨론 신 마르둑이구나!’하는 생각들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믿어 오던 다윗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약속과 시온(예루살렘)은 신성 불가침이라는 약속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성전은 무너져 내리고 왕조는 중단 되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살육되었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포로지의 사람들에게 에스겔은 어떤 꿈을 심어 줄 것인가? 그는 많은 실제적 민족 중흥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멸망 원인을 분단으로 보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이상을 그리기도 합니다(37장), 또 새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나라는 토지의 공평한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땅을 빼앗기지 않으며, 폭력과 착취가 없는 왕과 지배자가 출현하는 이상 등을 그렸습니다. 에스겔은 분명 새로운 평등의 실현을 꿈꿉니다 그 때마다 관용구처럼 쓰이는 노래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깍아 내리고...” “높은 산은 평지가 되고 낮은 골짜기는 언덕이 되리라”는 노래가 불려집니다. 제가 그동안 성서학당을 하면서 이런 사회적 대안에 치중해서 에스겔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성서학당을 하면서 에스겔을 읽는 중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아주 중요한 것을 간과 했구나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문제 해결은 이런 저런 해결 방식에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 정의와 공의의 부재 그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부재 상태에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1장에 보면 마치 묵시록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의 병거발현하고 큰 짐승들이 그 병거를 끌고 공중에 일어나는 것을 장황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예루살렘에서부터 병거가 발현해서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여 포로지에서 하나님 부재 의 땅 바벨론에 돌아오시는 것을 웅장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장면으로 에스겔서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으로 그의 예언도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의 앞 부분은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37,1)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장면이 바뀌는 곳은 모두 이렇게 묘사됩니다. 마치 새로운 영화 장면이 전개 될 때의 연결고리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들 들어서 어디 어디에 갖다 놓으심으로.... 하나님의 영이 무엇을 증언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예언이 설정되어집니다.
에스겔은 목자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너희는 내 양떼요, 내 목장의 양떼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 34,30-31)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어야”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24장의 오홀라, 오홀리바의 비유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그들의 마음이 빼앗겨 있는 상태를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한 상태에 비유해 말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의 창조를 말합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갖처럼 부드러운 마음”(36,25-28)의 창조가 이루어져 이젠 다시는 하나님을 잃지 않고 그들 마음 깊숙이 하나님과 호흡하는 백성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 본문 유명한 해골 골짜기의 회복의 이야기도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을 때, 그것은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창조 시에 마치 흙으로 빚은 생명 없는 덩어리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자 생명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에스겔은 그 마른 뼈들 위에 하나님의 영이 불어와 뼈들이 맞추어지고, 새 살이 돋고, 마침내 살아 움직이게 되어,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어 행진하는 극적인 변화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가능하게 되는 변화들인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남북 왕국의 화해와 회복의 이야기도 이 영의 회복 다음에 일어나는 한 부산물로 묘사됩니다.
에스겔은 이러한 이상을 그의 새로운 왕국의 구상 속에서도 그대로 그려냅니다. 그 새 왕국의 가장 중심 부분은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성전 중심에서 샘물이 발원해 흘러나옵니다. 사방으로 물이 흘러 넘쳐 천자를 지나니 물이 발목 까지 차고, 또 천자를 지나가니 이젠 그 물이 무릎까지 차고, 다시 천자를 내려가니 이번엔 물이 무릎까지 차게 되었습니다. 다시 천자를 내려가니 허리까지 오고, 다시 천자를 가니 이젠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이 물이 닿는 곳에 죽은 물이 살아나며 온갖 생물이 번성하고, 사해도 고기가 살게 되어 온 이스라엘에서 고기를 잡게 됩니다(47,7-9). 새 왕국의 중심,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은 성전, 거기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는 아닙니다. 사해는 아직 까지 짠 물이고 그 이름대로 생명이 존재치 못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그들의 미래를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중심임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이리저리 외국의 힘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집트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이 의지할 나라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당한 것을 보고서 이집트에 의지 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상기하고 그 때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 하나님인줄 알 것이다” (29,16)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삶 그 속에 걸레 같이 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에스겔은 말합니다. 에스겔은 포로생활을 “민족의 광야”로 데리고 나와 심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20,35). 에집트에서 나올 때의 광야는 자연조건의 광야였지만 지금 바벨론 그곳은 자연 조건으로는 기름진 땅이지만 하나님 없는 민족들의 영적으로 메마른 광야 “민족의 광야”입니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불에 정제된 민족”, “남은 자”로서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민족으로 톡톡히 교훈을 얻어 “온전히 하나님께 정제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어떤 구체적 대안의 제시보다도 하나님부재의 백성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시급하고 유일한 대안임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절망의 깊은 원인은 하나님 없는 데서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한쪽 발을, 세상에 한쪽 발을 어정쩡하게 걸치고 나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지 모릅니다. 결국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발 걸침이 아니고 하나님은 온전한 신뢰와 믿음의 관계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 관계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에 반드시 놀랍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생기(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지태일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이 없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모습입니다. 살아 날 소망이 전혀없는 마른 뼈들이 다시 모여 새생명을 얻어 살아 있는 큰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분열왕국으로 나누어 집니다. 나뉜 후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남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으로부터 침공받아 완전히 나라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당시에 잔인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장들까지 학살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되고 성전의 기명들은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술잔으로 쓰는 비극을 맛봅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힌 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벨론으로 비참하게 끌려 갔습니다.
오늘 이 성경 기록자인 에스겔도 당시에 포로로 붙잡혀가 바벨론 포로생활 때에 함께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조국을 잃고 끌려간 머나먼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11절을 보면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며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이스라엘의 신음과 절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눈물로 탄식하던 에스겔에게 어느날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지시에 이끌려서 골짜기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을 자세히 보니 뼈들이 대단히 많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시체는 다 썩어 없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바람에 굴러 다니는 참혹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절의 뼈라는 말과 2절의 뼈가 심히 많고라는 말과, 그리고 11절의 '마른 뼈'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끝장이 나 소망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음을 에스겔에게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9절의 말씀을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역 이전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그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거기서 이미 짓밟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 이후의 상태입니다. 생명이 없는 마른 뼈,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 주시면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3절을 보니까 하나님의 질문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 먼저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상태가 어떤가를 자각하게 하시고, 그런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보여 주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우리 같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대개 "아니요" "아니면 글쎄요 그것이 가능할까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마른 뼈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불가능한 일 아님니까? 에스겔도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믿음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대답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니 솔직히 양심에 걸렸습니다. 어떻게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에스겔은 아주 묘한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면, 하나님의 뜻이면 이 마른 뼈도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런 뜻으로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4-5절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은 인간적인 생각할 때 아무런 소망도 없고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 그대로 전했더니 마른 뼈들이 우수수 일어나 '데가닥 데가닥'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서로 들어맞아 연락(連落)하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금방 죽은 사람처럼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흩어졌던 뼈들이 모여들고 살과 힘줄이 붙어 사람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흩어졌던 뼈들이 모여들고 살과 힘줄이 붙어 사람의 모양이 된 다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아주 씩씩한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지 70여 년이 되어서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속에 생명의 역사를 분명히 이루어 주시겠다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과 성령"입니다.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 선지자는 대신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른 뼈들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고, 생기를 불어넣으라는 말씀을 역시 대신 대언하였더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큰 군대, 다시 말하면 성령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에서 두 가지 단계의 역사는 바로 말씀과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 마른 뼈들이 살아나려면 말씀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첫 번째는 역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선지자가 대언할 때에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졌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람이 볼 때는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권능만을 믿고 대언했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 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4-6절)
에스겔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에스겔이 이 뼈들에게 명령하여 살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우수수 일어나 '데가닥 데가닥'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서로 들어맞아 연락(連落)하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금방 죽은 사람처럼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흩어졌던 뼈들이 모여들고 살과 힘줄이 붙어 사람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제일 먼저 불어야 할 것이 바로 말씀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있고 사람을 감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이는 성경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딤후3:15절 이하에 보면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3)
성경을 읽을 뿐만이 아니라, 설교를 잘 듣고 아멘 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마른 뼈를 일으키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일으키지 않으시고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하셨듯이, 설교자인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 듣고 아멘하여 응답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는 아멘의 신앙이 넘치시기 바람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말씀의 맛을 느끼게 되어서, 말씀의 진수를 느끼게 되어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도 더하니이다"(시편119:103)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2. 마른 뼈들이 살아 움직이는 두번째 단계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른 뼈들이 모여 하나가 되어 사람의 모양을 이루었지만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9절에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누구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습니까? 사망을 당한 자에게라 했습니다. 사망을 당한 자는 몸은 있으나 그 안에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니 힘도, 생기도, 능력도 없는 하나의 시체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고 되는 것이 아님니다. 신체적으로 건장하게 준비되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니다. 자동차 엔진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차를 움직이는 힘, 휘발유가 있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이 결정적으로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게 되는 데는 생기,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올 때 비로소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고, 10절에 큰 군대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안에 생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니다. 생명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님니다. 사람의 모양만 갖추었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8절에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속에 생기는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모양은 갖추었어도 생기가 없으면 마네킹처럼 죽은 시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생기, 성령의 운동입니다.
9∼10절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생기' 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하는데 '바람' '호흡' 혹은 '영' '영혼'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생기를 넣어주셨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른 뼈들이 연합된 몸에 "생기가 들어갔다"는 말은 "성령의 바람이 들어갔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바람이 죽은 뼈들을 살리게 되었고 큰 군대를 이루어 결국은 포로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완전히 회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생기를 국가에 주면 살아나는 국가가 되고, 개인에게 주면 개인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이상과 말씀이 말라 빠진 뼈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다 죽어서 썩고 아주 말라 버린 뼈들, 불가능한 뼈들, 이스라엘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멸망당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재건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망 없는 사람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소망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하시면 생명이 다시 오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뼈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임하면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뼈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오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도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중환자실에 산소 호흡기 꽂고 있는 환자를 보면서 "이 환자가 살겠느냐"고 해도 확신하지 못할텐데 에스겔 선지자는 바짝 말라붙어 있는 뼈들을 보고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하셨을 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시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는지를 알고, 또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람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믿느냐 못믿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왔을 때 뒤에는 애굽 병정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이제는 다 죽었구나"고 생각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에 믿음대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신약에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은 200 데나리온의 돈이 어디 있으며 또 돈이 있어도 광야에서 그 많은 빵을 어디서 살 것이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하여간 있는 대로 주님께 가지고 가면 주님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과연 주님은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그 손으로 장정만 5000명, 여자 어린이합치면 2만명 이상을 먹이고도 부스러기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 앞에 나왔던 아버지에게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고 믿었을 때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마른 뼈들을 다시 살리시는 위대한 역사가 에스겔같은 사명자를 대언자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 움직이는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른 뼈들 같은 죽은 심령을 살리는 데는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사명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요, 에스겔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명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해결됩니다. 여기에 길이 있고 국가와 민족의 소망이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위기를 면할 수 있는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전해야 할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마른 뼈 같이 죽어있는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민족을, 가정을, 교회를,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말씀 하실 때, 우리도 "주여 주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우리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람니다.
이렇게 그 옛날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사명을 에스겔에게 주신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를 살릴 수 있는 사명은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명자로 사시기 바람니다. 생기를 명할 사람은 성도요 하나님의 종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 안되어도 복음의 선진국이 되면 됩니다. 잘 먹고 잘 살면서 죄 짓는 것보다 조금 적어도 힘들어도 하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복음 전도요, 그런 나라가 복 있는 나라입니다.
100여년전 미국의 어느 구두 수선 가게에 들렸던 손님 한 분이 구두 수선공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이 유명한 세계적인 전도자 무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비록 의무적이라도 무심코 전도한 사람이 이 민족을 복음화 시킬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디 한 사람에게 전도한 것이 결국 수백만명을 전도하게 했던 것처럼 여러분이 한 사람 전도한 것이 이 민족을 구원할 위대한 전도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의사가 더 이상 희망 없는 환자에게 절망을 선언할 때에 자기가 의사가 된 것에 한없는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죽어가는 인생을 살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일이기 때문입니다.(찬송가 275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 죄악과 무덤서 건져내며 죄인을 위하여 늘 애통하며 예수의 공로로 구원하네...)
이 사명으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물으실 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주일을 맞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려으로 살아 큰 군대를 이룬 것처럼,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새 생명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람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큰 군대를 이루어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크게 쓰임 받는 믿음의 거목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역사들이 교회를 통하여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 성도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람니다. 아멘.
너희가 살리라
한대근 목사
세계 3대 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가 28일 우리나라 국가 신용등급을 'Baa2'에서 'A3'로 2단계 상향조정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4년 3개월만에 A등급에 복귀함으로써 국가 신인도의 상승과 함께 기업들이 해외 자금조달 비용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외자 유치도 보다 손쉽게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며,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참으로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부활절을 앞두고 이루어진 조치로 그 동안 눈물로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부활절 선물이라 생각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나라의 경제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더욱 각성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최대의 희망은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의 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회개를 촉구하던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귀찮아하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습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성벽은 무너지고, 유대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사람들은 한발과 재난으로 굶주려 죽어갔습니다. 성전과 회당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이런 비극적 역사가 수년간 계속되어졌고 골짜기마다 마른 뼈로 흘러 넘쳤습니다. 뼈가 온 지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뼈는 본래 땅속에 묻혀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는 아비규환이었던 것입니다. 제멋대로 버려진 시신들을 짐승들과 독수리와 까마귀가 뜯어먹었습니다.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은 골짜기에 나뒹구는 해골들처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하셔서, 그 마른 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서 군대를 이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에 절대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살리라” 여기서부터 몇 단계로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너희가 살리라 - 너희가 무덤을 열고 나오리라
5절과 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9절, “또 이르시되 인자야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따라합시다. “너희가 살리라”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사람들은 죽어서 격식을 갖추어 장사되지 못한 일은 수치스러운 재난으로 여깁니다. 골짜기에 바싹 말라빠진 뼈들이 가득 널려 있다고 하는 것은 큰 재난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숱한 사람이 죽어 그 시체가 그냥 땅에 널부러진 채, 살은 짐승의 밥이 되고, 남은 뼈다귀마저 한낮의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바싹 말라붙은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불행을 겪은 것과 더 이상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시기를 “너희가 -마른 뼈들이, 소망 없는 이스라엘이- 살리라” “사망을 당한 자를 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언하자 실제로 마른 뼈들이 알아들었는지, 소리가 나고 움직이면서 뼈가 들어맞습니다. 뼈에 힘줄이 생깁니다. 그 위에 살이 덮였습니다. 그리고 생기에게 대언하니 그 몸에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이 출발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근거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생명력이 넘치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나와 여러분의 생명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살리는 역사입니다. 죽이는 역사가 아니라 살리는 역사입니다. 모든 절망가운데서도 반드시 희망의 길을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죄를 범한 세상을 무섭게 심판하시는 동시에 그 이면에서 항상 희망의 길을 닦고 계시는 분입니다.
노아의 때에 모든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실 때, 역사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 두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 그리고 그들이 음란하게 섬기는 바알에게 너도나도 무릎을 꿇을 때, 끝까지 생명을 걸고 믿음 지키며 무릎꿇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7천명이나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 사상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루터기라고 부릅니다. 밑둥이 잘려나간 나무부리에서 새로운 싹이 움트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룬다고 하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오늘까지 이 세상에 건재하게 한 비밀입니다.
에스겔의 눈에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믿음으로는 그 뼈들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창조의 주님이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담대하게 마른 뼈들을 향해, 생기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었고,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주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너희가 살리라” “살게 하리라” “너희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은 전혀 소망이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탄의 노예가 된 인생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져 있었습니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한된 능력으로 살다가 그것이 소진되면 이제 곧 죽음에 이르러 지옥으로 내던져질 운명에 갇힌 인생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본 사람들은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예수를 두려워하며 죽이려 했던 사람들은 한 미친 선지자가 벌인 해프닝으로 치부하며 안심하였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엘리야나,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여기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역전시킨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그 사역을 완성하시고, 마귀 사탄의 권세까지도 완전히 밟아버렸습니다. 모든 상황을 역전시켰습니다.
역전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대 역전의 드라마를 쓰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어떤 절망입니까? 마른 뼈들로 군대를 이루시고, 무덤에 갇힌 자들을 나오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절망을 해결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른 뼈들을 향해 “너희가 살리라”고 하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반드시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2. 너는 대언하라
4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도;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7절 “이제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9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10절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술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에스겔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 마른 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에스겔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희망,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언하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겔을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그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수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의 사람입니다. 세상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붙잡힌 종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무엇하나 희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에 주님은 제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임을 위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외에도 마가복음 16:15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24:48에는 “너희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 21:22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대임명령이 언제 주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제자들이 모두 경험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악하고 패역한 세상에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을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세상을 사는 힘이며,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인 것입니다.
누가 이 명령을 따라 순교의 정신으로 이 사실을 증거할 것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며,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1961년 미국 플러 신학교에서 목사 후보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강연을 마쳤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들의 증언의 자리에는 한결같이 자기가 믿는 것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자기 피로 도장 찍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또다시 주님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기의 피로 도장 찍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새로운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젊은 여러분들 가운데서 자기의 피로 기꺼이 도장 찍기를 원하는 진실한 증인들이 이 시대에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강력한 도전으로 삼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습니다. 우리의 입술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우리의 작은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에 상황이 바뀌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의 메시지가 넘쳐흐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 악하고 패역한 세상, 죄악으로 혼돈한 이 세상에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6절과, 13절을 읽습니다. 먼저 6절입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13절 “내 백성들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다시 살려 큰 군대가 되게 하시고, 무덤을 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오게 하여 고향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결과와 목적은 바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E. H. 카아’라고 하는 역사가는 역사가가 다루어야 하는 사료에는 두 가지 구성 요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어야 됩니다. 즉 사실성이 있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 사실성 외에 그 사건이 주는 의미가 후대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부활은 절망 앞에서는 희망을, 죽음 앞에서는 생명을 좌절 앞에서는 용기를 거짓 앞에서는 진리 등, 수많은 의미로 번역해 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의미보다 사실성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토록 사랑했는데도 마지막 순간에 다 도망간 연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본 후에는 온 세계에 흩어져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다 순교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꾸며낸 이야기, 허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신념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결국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알고 온 누리가 하나님을 주님을 모시고 섬기도록 우리들의 삶이 주님을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할 것이요, 또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욕망과 절망과 죄악의 무덤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보고,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심을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절 아침,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른 뼈도 살아나리라
겔 37:1-14
저는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절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성령의 권능에 이끌려 간 곳은 한 골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것이 수 많은 마른 뼈였습니다. 그 뼈들은 심히 많았으며 아주 말랐습니다. 도저히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그 골자기에 성령의 바람이 불자 뼈들이 살아나고 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다 죽어 가는 암 환자 1천명이 모여 있어도 마른 뼈보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완전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듣는 분들 가운에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소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완전한 절망이 가득한 에스겔의 골짜기에 생명의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내가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소망은 꽃 필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룹니다. 첫째는 에스겔의 체험이 주는 의미 즉 마른 뼈가 살아나는 사건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어떻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는가를 살펴봅니다.
1.에스겔의 체험이 주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를 이룬 이 사건은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몇 가지 적용이 가능합니다.
1)이스라엘의 부활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주전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에스겔은 포로 생활 중에 그발 강가에서 소명을 받고 22년간 선지자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은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유대민족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른 뼈들처럼 완전한 절망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포로 생활 70년만인 고레스왕 원년에 포로 된 자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쌓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 때 이스라엘은 마른 뼈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후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는 주후 70년경에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망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제기불능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약 2000년이 지난 1948년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했습니다. 1억이 넘는 아랍 국가들과도 싸웠을 때에 6일만에 승리하고 국가를 재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완전 절망의 상황에서 회복이 불가능한 나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은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정권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2)몸의 부활을 보여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주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몸이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합니다. 고전15:20에서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씀하시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의 몸이 주님처럼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줍니다. 달걀을 보면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껍질이 깨지고 그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처럼 신자들의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달걀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몸이 부활한다고 하면 걱정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 시체를 화장해서 뿌렸는데 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이 얼마든지 다시 살아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화장했든지 매장을 했든지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의 부활을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썩을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신령한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 둘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으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화되셨습니다.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셨지만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은 후에야 주님이신 줄 알아봤습니다. 막9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화되신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은 부활의 맛보기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변화되신 주님에게서 엄청난 광채가 났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적인 약점이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되면서 능히 극복될 것입니다.
3)영의 부활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만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영혼이 없어지거나 기능을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말할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부분적이지만 영혼의 활동도 있습니다. 그럼 영혼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과 교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고 나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무 뒤에 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됨 그것이 바로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인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죄의 삯을 치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지옥의 형벌을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영적 죽음의 결과인 지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지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런 영적인 진리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혼이 살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에스겔 골짜기처럼 마른 뼈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마른 뼈를 살려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하신 것처럼 신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마른 뼈와 같은 많은 영혼들을 살려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교회의 부활을 보여줍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귀는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짓밟았습니다. 때로는 국가적인 핍박이 교회를 짓누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굶주린 사자 굴에 집어넣기도 했으며, 살아있는 사람을 화형 시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몸을 찢어서 죽이기도 하고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생명력은 결국 로마 제국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공산통치 하의 교회들은 온갖 핍박 속에서도 견뎌냈습니다. 공산당은 교회를 말살하는 것 같았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보이지 않게 부흥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월요 영성에서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 그리고 쌍으로 들어간 짐승들을 통해서 생명의 씨앗에 대한 부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비록 8명의 식구가 들어갔지만 지금은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존재합니다. 비록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들어갔지만 지금은 그 동물들이 온 땅에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아직은 연약한 교회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가 싹이 나고 자라는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2.어떻게 해서 살아났습니까?
마른 뼈들이 살아 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떻게 해서 살아났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의 영, 혼, 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1)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납니다(1절).
마른 뼈들이 살아나기 전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없이 에스겔 혼자서는 마른 뼈 모두가 아니라 한 사람도 살려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마치 마른 뼈와 같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니 살아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이스라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보다 강한 권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혹 의술로는 포기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오셔서 설교하셨던 권영수 선교사님의 사모님도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니 항암 치료를 받지 않고도 사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너무나 강퍅해서 도저히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니 그의 영혼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공중 재림하시면 자던 성도들의 육체가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몸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다면 그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성령의 역사로 살아납니다(1절).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하시더니 성령으로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신자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따라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기에 왜 오셨냐고 묻는 옥사장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까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자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3장에 보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장악하시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성도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있는데 이 성경도 성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령 없는 성도는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살았다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령 없는 성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모양은 갖췄지만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 없는 성도는 실탄 없는 소총과 같습니다. 적이 보기에는 위협적이지만 실상은 영적 싸움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3)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려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시는데 에스겔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비록 마른 뼈와 같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살게 되며, 하나님의 군대의 일원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해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전도하는 시간을 정하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힘을 씁니다. 또한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11개의 교회를 지원하고 6개의 기관과 3명의 선교사 그리고 25명의 해외결연 아동을 지원합니다.
우리는 에스겔처럼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신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4)주의 말씀으로 살아납니다(4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이 대언하자 뼈들이 살아납니다. 에스겔의 말은 에스겔의 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할 때는 사람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와 같은 원리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인간입니다. 사람들이 글을 썼지만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뼈들이 모이고 그 위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가죽이 덮히고 생기가 들어가니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천지를 존재하게 한 것처럼, 말씀의 능력으로 마른 뼈가 살아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른 뼈와 같은 이웃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사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 이런 자부심이 있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5)연결되어야 살아납니다(7절).
뼈들이 각각이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여도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만약 살아 움직인다면 끔찍한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머리만 움직이고, 발만 움직이고, 손만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지체는 다 모였는데 코만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몸의 원리로 설명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몸 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지체가 몸에 연결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를 떠난 신자는 스스로 생명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연합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절새벽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 제가 노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도 연합의 한 모습입니다.
너희가 살리라
박조준 목사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에스겔 37장 4∼5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너희 마 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 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 생활할 때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자기도 포로 가운데 하나로서 갈대아 땅 그발 하숫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 아 여러 가지 이상을 보고 포로 된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상의 내용은 다른 이상보다도 널리 알려져 있고 또한 깊은 의미가 있 는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하셔서 어떤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골짜기에 가보니까 많은 해골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녀 보는데 가는 곳마다 해골들이 심히 많고 자세히 보았더니 아주 말라 있었습니다. 그러 니까 죽은 사람이 많고, 죽은 지가 오래 되어서 살은 이미 썩어 없어졌고 남은 뼈만이 바람 에 불리고, 비를 맞고, 햇빛에 쬐어서 아주 말라붙어 문자 그대로 백골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은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가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았을 때 유다 왕국은 이미 최후를 고한 때였습니다. 이제 그 들은 다 포로 되어 가고 소망이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또 내 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역 이전의,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의 상태는 이미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세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 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마른 뼈에 대해서 성경이 스스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 뼈가 무엇 을 상징한다고 말씀했습니까? 이 마른 뼈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역 사의 한 단계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거기서 이미 짓밟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또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 로 끌려갔고 또 나머지 사람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 이후의 상태입니다. 생명이 없는 마른 뼈,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민 족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니까 하나님의 질문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 전 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상태를 자각하게 하시고 그런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 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물으셨을 때 우리 같으면 무엇이라고 대 답하겠습니까? 골짜기에 나뒹굴고 있는 마른 뼈들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우리라면 대개 아니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마른 뼈가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에스겔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오 라고 대답 하면 믿음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대답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네, 그렇습니다 라 고 대답하자니 솔직히 양심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에스겔은 아주 묘한 대답 을 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뜻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시면, 하나님의 뜻이면 이 마른 뼈도 살 수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는 대답이라고 생 각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 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 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 말씀을 들은 에스겔은 하나 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람으로 볼 때는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권능만 을 믿고 대언했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 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말씀을 전했더니 마른 뼈들이 우수수 일어나 데가닥 데가닥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그 뼈들이 서로 들어맞아 연락하고 거기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금방 죽은 사람처럼 온전히 육체가 회 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아직 생기는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계의 부활의 사역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말씀의 사 역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이제 하나의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졌습니 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제 둘째 단계는 성 령의 사역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10절을 보세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 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생기 란 말은 본래 히브리말로 루아 라고 하는데 바람, 호흡, 혹은 영 이란 말입니 다. 그러니까 생기가 들어갔다는 말은 성령이 들어갔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14절 에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의 모습을 상징하는 마른 뼈들의 부활의 장면에서 두 가지 단계 의 부활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말씀으로만 사역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게 되는 데는 생기,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고 큰 군대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두 가지 차원의 부활 이 있습니다. 육적인 부활이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감으로 민족의 생명이 끝났다가,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민족적으로 다시 회복되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 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 어가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무덤 이란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절 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갔던 바벨론 땅에서 나와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옛 땅을 회복하고 그들의 나라를 다시 수립하여 민족적으로 소생하는 민족적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 이것이 말하자면 육적인 차원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온전히 회복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셨습 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보세요.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 하게 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참으로 살아 있는 민족이 되게 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회복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살아 있는 민족이 되는 영적인 회복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회복이 더 중요하게 강조되었습니 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둘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 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고국으 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정치적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4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 고 고토에 들어가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와서 그들의 고국인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만 예언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예언의 핵심은 조금 전에 읽은 에스겔 36장 26∼27절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이스라엘 민 족이 정치적으로 땅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 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민족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더 크고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 우리 민족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라 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나라의 남북이 통일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 나라의 남북 통일에 관심 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다 시 돌아오는 일에 관심이 있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시고 육신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경제적 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상적인 것에도 관심이 있으 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전인적이고 포괄적이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하나님의 관심은 육 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더 큰 관심은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 루는 것 자체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 고 살아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민족이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 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큰 관심은 이 모든 풍요와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기 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이상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말라빠진 백골에 임하셨습니다 다 죽어서 썩고 아주 말라 버린 백골, 아 무런 소망이 없는 곳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 없는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 가운 데 오십니다. 그래서 소망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하시면 생명이 다시 오고 소망을 가지 게 되는 것입니다. 백골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임하면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 다. 백골 가운데도 하나님이 오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골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하나님이 백골을 다시 살리시는 위대한 역사를 행할 때 그의 사람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서 하나님 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백골이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골과 같이 죽은 심 령을 살리는 데는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사명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셋째, 백골이 다시 살아서 큰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다시 살아난 사람 들은 나이 많은 사람, 허약한 사람, 병든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눈먼 사람 같은 사람이 아 니고 아주 씩씩한 청년들이 된 모양입니다.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군대는 조직과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같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강한 군대 는 모든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이 죄악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는 것입 니다. 에스겔이 본 이상을 대개 세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에게 그 의미가 가장 중대했다고 생각합니 다. 백골로 덮인 골짜기는 그 당시 포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참혹한 형편을 묘사한 것 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백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고국을 떠나서 먼 원수 나 라에 잡혀가 사방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살았으나 죽은 목숨과 같았습니다. 도처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언제 고국에 돌아갈는지 희망이 묘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 우리의 뼈는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다 끊어졌으며 우리는 다 망 하게 되었구나 하며 탄식과 눈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 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른 뼈가 회복되어 군대를 이루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 후의 역사를 보면 에스겔이 본 이상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민족적 현실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 이 있습니다. 경제 난국을 맞이하여 고용 해고에 불안해하고 사회 질서도 악화되어 절도, 강 도, 살인, 자살들의 사건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 우리가 다 이렇게 말라빠진 것이 아닌가 하 면서 낙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옛날 마른 뼈가 된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우리 민족을 절대로 잊어버리시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하나님의 말 씀을 들으라. 너희가 살리라. 너희가 살리라. 아무리 마른 뼈처럼 소망이 없어 보인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새생명이 백골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 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죄에 빠져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 님과의 연락이 끊어진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도 너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적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말 하자면 백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골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른 뼈가 된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 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구원하여 백골과 같이 된 심령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곧 군대입니다. 이 교회는 군대와 같아서 모든 악한 마귀의 궤계를 소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고 하는 군대로서 하나님 의 교회를 우리 가운데 세우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말세적인 의미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세계, 온 지 구는 말하자면 마른 뼈들로 덮여 있습니다. 다 흙으로 묻기는 했지만 어디 가나 무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땅은 좁은데 무덤이 차지하는 면적이 너무 넓어 앞으로 큰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이태리 로마 근교에 가면 카타콤이라는, 지하에 있는 신자들 의 옛날 무덤이 있습니다. 깊은 굴 속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마다 백골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백골이 옛날 2천년 전 기독교 신자의 유골인데 층층이 있습니다. 카타콤 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긴지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마른 뼈를 보면 마음 가운데 주여, 이 모든 뼈가 살아 날 때가 언제입니까?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성경에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 영혼만이 아닙니다. 일시적이나마 우리 영혼의 집이 되었던 육신까지 신령한 몸으로 부활케 해주시겠다고 하는 언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 우리가 벗어 놓았던 이 육신까지 부활해서 새로운 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날이 있을 것이라는 언약을 이 이상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의 죄인이 그리스 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영적인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의 음성을 들을 때 가 온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26절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 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말씀을 전파한 대상들 속에 생기가 되어 들어감으로 그들이 부활하는 놀라운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에스겔이 보았 던 환상의 골짜기에서처럼, 수많은 마른 뼈들이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순간 사 람의 형상을 갖추고 동시에 성령이 임하시사 그들이 생기를 받고 살아나 군대가 되는 엄청난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이웃과 우리 민족에게 봉사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령한 눈을 들어 이 강산을 바라보세요. 마른 뼈와 같이 된 심령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죽었습니다. 아름다움도, 감격도, 보람도, 긍지도, 의미도 없습니다. 마른 뼈와 같습니다. 이 뼈들이 살 수 있습니까? 이들에 게는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는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전하면 됩니다. 말씀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사역이 나타납니다. 보라 지 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저는 요사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움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낍니 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위로하라 하십니다. 이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 님께 돌아와 새생명을 얻는 길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역을 맡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마른 뼈 같이 된 이 민족 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너희가 살리라
겔 37:1-7 / 피종진 목사
하나님의 신은 에스겔을 인도하여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마른 뼈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은 전혀 생기가 없는 마른 뼈와 같아서 함께 모일 수도 없이 분열된 상태에 있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임하자 마른 뼈가 다시 소생하여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바로 하나님 앞에 해골떼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그런 영혼의 세계 또 하나님 앞에 새로 소생함을 입은 그런 생명을 소유한 영의 세계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준 이 영적 세계, 해골떼의 이 광경은 그 당시에 부패상뿐 아니라 오늘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속에서 많은 영혼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4절) 서점에 가보면 문학전집, 음악, 체육, 예술, 철학, 수학, 처세, 정치, 법률에 관한 책 등 수많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이러한 좋은 서적을 많이 읽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훌륭한 인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해골떼와 같은 영혼들에게 이런 저런 말로 깨우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고, 성령님을 만나게 되고, 구원의 복음을 깨달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한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주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와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제가 지방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갈 때는 우등고속을 이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어떤 중년 남자분이 성경을 들고 주위를 살피더니 어떤 분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접근하면서 성경 말씀을 소개하니까 귀찮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그래도 이 분의 표정이 달라지지 않고 뭐라고 기도하면서 또 다른 분에게 다가가서 성경 말씀을 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 분도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분에게 다가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 분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그 분의 모습이 천사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 분을 바라보면서 저도 과거에 노방전도를 한 경험이 있어서 그 분을 참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분을 사랑하실까요?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복음의 나팔을 부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전도해보세요. 그곳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보세요. 병든 육체가 건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도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자원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축복해주기도 합니다(겔 36:38).
시편 기자는 시편 119:1이하에 전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에 대해서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56절에 보면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왜 소유가 될까요?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천만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소유하지 않으면 그것은 물거품처럼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워주시고, 모든 것을 성취시켜주시며, 소유하게 하시고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부요하게 하시고 풍성하고 넘치게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빈곤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내가 뜻대로 잘 안되는 일이 있다고 거기에 대해서 낙심하기 전에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은 바로 보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백마디 이론보다도 성경 말씀 한 말씀이 심어지면 미사일이 폭발되듯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71)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주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라도 그 말씀대로 살도록 몰아놓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어떤 때는 외롭게 해서, 때로는 위협을 당하게 해서, 어떤 때는 소유를 잃어버리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음악을 들려주어도 좋게 들려지지 않듯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굶주려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여 힘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5절) 성령의 생기가 오늘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보면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찬송도, 열심도, 충성하는 모습들이 다 뜨겁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메마른 교회는 나와서 앉아있기는 하지만 전부 살벌하고 서로 화합이 되어지지 아니하고 갈라지고 깨지고 분열되고 원망 불평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돌이 부서져 가루가 되듯이 그 생각이 바꾸어지고, 얼굴 모습이 바꾸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환경도 바꾸어집니다. 어느 지역이든지 귀신을 섬기고 우상이 난무하는 곳에는 땅도 저주 받아서 황폐하게 된 것을 지구상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바로 그 지역도 옥토 즉 기름지고 윤택한 그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맥시코와 미국의 경계선을 보면 마치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같이 평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국경선이라 해서 무슨 성을 쌓아놓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국경선을 넘어서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섬기지 않는 나라가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볼 수 있고, 아시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는 황폐했던 땅도 축복 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옛날에 황폐했던 저 덴마크가 하나님을 잘 섬기니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하나님이 축복해주셨습니다.
에스겔 36:26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6, 7절) 그래서 10절에 보면 큰 군대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부흥되는 교회에 가보면 제각기 직업이 다르고, 사는 지역, 취미, 개성, 출생지가 달라도 전체가 다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소유와 인격, 외모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쁜 사람들끼리도 이혼하는 경우를 보잖아요. 그 외모가 행복의 표준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삼일절 하면 유관순을 떠올리게 됩니다. 유관순이 우리에게 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가 연설할 때 젓가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세워보라고 했더니 모두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나누어준 젓가락을 모두 회수하여 한 데 묶어서 세워놓고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이 한데 뭉쳐야 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뭉쳐져야 됩니다. 오늘 이 세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데 뭉쳐지는 것입니다. 언어 장벽, 풍습, 국경을 초월해서 온 인류가 예수로 말미암아 뭉쳐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그런 삶을 살면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성령을 통하여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날마다 입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찬양의 삶이 이어져 분열과 갈등, 전쟁의 불안 속에 사는 이 시대에 개인과 가정,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른 뼈 같던 백성
겔 37:1-14 / 이필재 목사
아직도 끝나지 아니한 6·25전쟁은 68년 전에 일어나서 그해 태어난 사람이 61살이 되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일합방이 1910년이었으니까 2020년까지 100년 동안 한반도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시간들을 우리가 살아온 것입니다. 똑같은 역사가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났습니다. 에스겔이라고 하는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대 나라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는 것이 오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환상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산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한 광경이었는데 이 뼈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라.” 그렇게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마른 뼈다귀는 생명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아무 소망이 없다는 말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말랐어도 생명만 붙어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잘 먹고 몸을 잘 보호하면 살도 찌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끊어진 마른 뼈다귀는 그런 희망이 전혀 없어진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25 동란이후 시골 산골짜기는 이런 마른 뼈다귀, 사람들의 해골바가지를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뼈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노출을 표현합니다. 죽은 사람의 뼈다귀가 노출되어 있는 것은 대단히 흉측스럽고 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는 땅 속에 깊이 묻어서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그 나라의 모든 형편이 노출된 마른 뼈다귀라고 에스겔에게 환상적으로 보여주신 내용이 오늘 성경말씀입니다. 이 마른 뼈다귀 같이 재생의 기운이나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적 상태의 백성이 그 흉측하고 더러운 뼈가 세상의 열국 앞에 수치를 드러내고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얼굴을 찡그리고 침을 뱉고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고 빨리 피하려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기록을 봤습니다.
그러면 그 민족의 형편이 지금 어떠하기에 그런 환상이 보였는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민족의 분열의 비극이 있습니다. 한반도와 똑같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두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나 아쉬워하는 말이 땅이 너무 작다는 말을 합니다. 남북한 다 합쳐야 러시아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면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는 한반도의 5분의 1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그맣습니까? 그런 작은 나라가 또 남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적대시하는 희망이 없는 마른 뼈다귀 나라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남북으로 갈라진 그 나라도 그대로 두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변의 나라들은 “이 유대인들이 너무 지독한 사람들이다. 항상 골치가 아팠는데 자기들끼리 갈라져서 서로 싸우니까 잘 되었다. 때는 이때다.” 하고 유대 백성이 약해진 그 틈을 이용해서 침략을 해서 이때 유대의 왕이 여호야김이었는데 3개월 동안 왕 노릇하고 왕조차도 포로로 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끌려간 사람이 1만 명 정도였는데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 중의 한 사람으로 끌려가서 거기에 가서 노동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신앙적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인 민족이라 아브라함 때부터 신앙 하나만 잘 지키면 살아간다는 그런 힘이 정신적으로 있었습니다. 이러한 민족 고난이 닥치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사람들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하나님 믿어봐야 이 꼴이 되는 것을 뭐 하러 번제를 열심히 드리며 아침저녁으로 나가서 기도해 봤자 하나님 알지도 못하는 백성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낫다. 하나님 믿어서 뭐하느냐?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다.’ 그런 생각이 신앙적 마른 뼈다귀, 절망적 상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시면서 두 가지 괴로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째 질문은 “에스겔아! 네 생각에는 이 뼈들이 능히 다시 살겠느냐?”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간단한 거 같지만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질문이 됩니다. 현실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마른 뼈다귀, 산골짜기에 뒹굴어 다니는 마른 뼈다귀를 보면서 생명력이 하나도 없어진 이 뼈들이 네 생각에 다시 살아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네가 하나님의 종으로 예언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영적 테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답하라.” 우리가 학생 시절에 이런 상황을 설명해준 것이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나오는 삽화입니다. 아마 기억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쫓겨 갑니다.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나와 있는 소나무로 뛰어 내려가서 그 소나무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호랑이가 그 소나무 가지로 오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시 기어 나오길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이 먹잇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다른 동물들이 우글우글 합니다. ‘어휴~ 이걸 어떡하나?’ 그런데 하얀 쥐가 하나 나와서 내가 매달려 있는 가지를 갉아먹고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또 까만 쥐가 나와서 갉아먹고 들어갑니다. 같은 곳을 계속해서 하얀 쥐와 까만 쥐가 들랑거리면서 갉아먹는데 그게 낮과 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의 위험한 생활을 지금 하고 있는데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낮과 밤의 시간은 계속 나의 인생을 갉아먹고 들어가는데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이 사람은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는 힘 밖에는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은 초월적인 힘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나라가 살아가다가 이렇게 마른 뼈다귀와 같은 참혹한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나님이 질문을 하셨을 때 내 믿음의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 소망이 없습니다.” “그게 너의 답변이냐?” 그 답변이 얼마나 어려웠든지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 뼈들에게 가서 네가 설교를 해라. 설교의 제목은「너희가 살리라」말하라. 너희들은 장차 생기가 생기고 힘줄이 생겨서 살아날 것이라고 설교를 하라.” “하나님! 마른 뼈다귀가 소망이 없습니다.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가서 말하라.” 이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마른 뼈들 앞에 나가서 “너희가 다시 살리라”고 하나님이 설교를 하라는데 해야 될 것인가? 내가 생각해도 안살아날 것 같은데 안할 것인가?
여러분은 설교자의 고민을 모르실 것입니다. 설교자가 정말 설교하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제가 다 경험한 것대로만 이야기해 보면 3대 독자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나가서 설교해야 되지 않습니까? 장례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서 뭐라고 설교해야 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 고생스러운 세상 일찌감치 갔으니 잘 된거다.” 이렇게 설교해야 합니까? 이민 와서 부부가 죽을 고생 해가면서 겨우 햄버거 가게를 마련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한 달이 안 되어서 불이 나버렸습니다. 잿더미 위에 앉아있는 그 불쌍한 집사 부부한테 나는 심방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라고 설교해야 합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이렇게 설교해아 합니까? 20대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뭐라고 설교를 하지요? “더 좋은 사람이 있으니 걱정 말아라.”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이때에 목사가 설교 한마디만 잘못해도 그 사람은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가슴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옆 교회에 장례식이 나서 저도 참석해서 순서를 담당했는데 남편 잃은 그 부인이 장례식 끝나고 우리 교회로 왔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닌데 온 것입니다. “아니, 왜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까?” “나 우리 목사님께 시험 받아서 그 교회 못 다니겠습니다.” “아니, 며칠 전에 장례식 했는데요?” “그 장례식 때문에 시험받았습니다.” “왜 시험을 받았나요?” “40대 후반에 남편이 죽어서 나는 슬퍼 죽겠는데 목사님은 뭐가 그렇게 장례식에서 신이 났는지 설교를 부흥회 식으로 힘차게 테너 독창회 나간 것처럼 ♬ 며칠 후~ 며칠 후~ ♪ 신나게 부르시고, 나는 슬퍼 죽겠는데 목사님도 좀 슬퍼하시면서 장례식을 진행하셔야지 잘되었다는 식으로…….” 사실 잘못한 거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시험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런 때는 가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장례 문화를 보면 문상객들이 상주들에게 가서 인사할 때 뭐라고 합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합니다. “어흐안사아히단방아쟘@&#…….” 그냥 꿍꿍 거립니다. 말을 잘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의 고민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나라도 빼앗기고 삶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다 빼앗기고 신앙을 다 팔아먹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와서 노예 노릇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 앞에 나가서 희망의 설교를 하라니 뭐라고 말해야 그들이 내 설교를 듣겠습니까?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시는 마른 뼈다귀같이 소망 없는 아골 골짜기에서 나더러 설교를 하라니!”
마치 61년 전 한국의 6·25 동란 때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 굶주린 고아들 전쟁미망인들 앞에 가서 설교하라는 상황과 똑같습니다. 6·25 전쟁의 피해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인명 피해 300만 명, 미군들도 36,500명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6·25 과부가 10만 명이 나왔고, 목사만 523명 살해당했고, 2,122개 교회가 불탔고 전쟁고아 5만 명입니다. 김인서 목사의 “6·25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1950년 10월을 기억하소서.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학살하기를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 그 수를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늘이여! 기억하소서. 교회 역사상 한국의 10월을! 땅은 말하라. 피의 10월, 순교의 10월을! 그 숨 끊어진 몸들이 여름 장마에 떠내려가고 가을 낙엽이 덮으며 이제 다시 흰 눈으로 덮으시나이다.” 찬송가 515장은 석진영 선생이 6·25를 통해서 지은 찬송가로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6·25를 찬송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고민 고민 하다가 그들 앞에 나가서 시키는 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건 또 무엇입니까? 다시 살아나는 흔적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수천 년 역사 마른 뼈의 소생의 역사입니다. “성경이 본 유대인 학살 2천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가 2차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서 처형된 유태인 6백만입니다. 사람 죽여서 버리는 것이 쓰레기차가 쓰레기 버리듯, 명태 말려서 짐 꾸려 놓은 듯 했습니다. 그 뼈의 민족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현대 유대사의 6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르 헤즐, 다윗 레퍼슨, 어터 와법, 나훔 스컬러, 차임 와이즈맨, 나훔 골드맨입니다. 시오니즘을 제창하면서 “우리 민족은 다시 살아나야 돼! 흩어진 세계인이여! 시오니즘에 의해서 우리의 땅을 도로 찾자.” 그래서 오늘의 이스라엘이 건국된 것입니다. 마른 뼈같이 된 민족의 부활입니다. “말해라! 다시 살아난다고 가서 전해라!” “하나님, 다 죽었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마른 뼈가 산더미 같이 쌓였던 대한민국 거리에 지금은 살아난 무엇을 보십니까? 한국이 10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폐허 위에 세계에서 자랑하는 고층 건물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보십시오. 전 세계에 한류 바람이라는 것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1년에 한 번씩 일본에 가서 세미나 강사를 하지만 독도는 절대 안 빼앗길 거 같습니다. 일본 여자들이 배용준 때문에 제발 그 돌멩이 건드리지 말라 합니다. 욘사마 보려고 공항에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우리가 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남에서 며칠 전 박지성 자선 축구 경기가 열렸는데 베트남의 모든 젊은이들이 열광적 박수를 보냈지 않습니까? 세계를 대표하는 유엔 사무총장에 발기문 총장이 안보리 만장일치로 재선 통과되었습니다. “다시 일어날 것이다.” 1960대를 기억하십니까? 비틀즈가 세계를 비틀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샤이니, 소녀시대가 온 세상을 문화적으로 뒤집어엎지 않습니까? 얼마 전 유럽의 심장 파리 공연을 보십시오. “K-POP Invasion” Invasion은 ‘공격했다’, ‘침공했다’는 뜻으로 “케이 팝이 유럽을 점령했다” 파리 신문에 난 겁니다. 비틀즈 때보다 훨씬 더 열광하는 이유! 비틀즈는 노래는 했어도 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케이 팝은 노래와 춤이 함께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훨씬 더 열광하는 것입니다. 사실 팝이 세계 절정이 된 것은 마이클 잭슨 때문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팝을 부르면서 춤과 함께 했지 않습니까? 마이클 잭슨이 최고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춤이 뭔지 아십니까? 문 워킹입니다. 지금 내가 해도 이렇게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저도 요즘에 젊은이들에게 소외되지 않으려고 ‘링딩동’, ‘쏘리쏘리’ 열심히 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한류 바람이 세계에 불고 있을까요? 영적으로 모르시죠? 제가 항상 영적으로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미 선교의 한류가 불었기 때문에 24,000명의 우리 한국의 선교사가 온 세상을 영적으로 이미 한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것도 주리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벌써 한 30년 전부터 한국 교회를 배우기 위하여 한국 선교사나 목사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적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목사도 얼마나 요청하는 곳이 세계에서 많은지 요청하는 곳에 절반도 가지 못합니다. 오늘도 저는 밤 비행기로 미국을 가서 장로교 목사들 여름 수련회를 하는데 제가 주강사입니다. 3일 동안 해주고 와야 합니다. 온 세계에 이미 영적 한류가 일어났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뒤를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도적 관찰로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원래 모습대로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망가진 에덴동산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탕자가 된 거지는 제 자리로 되돌려 비단 옷을 입고 회복시키십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마른 뼈다귀 같은 택한 백성도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해 “가서 말하라. 회복될 것이다.” “저는 설교하기 싫습니다.” “빨리 가서 하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삶에 어떤 것이 마른 뼈다귀입니까? ‘이것은 소망 없다.’ 우리 국민은 어떤 마른 뼈다귀가 있습니까? 나는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마른 뼈다귀 같다는 공산당은 소망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되돌려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보면서 이 성경말씀을 봐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이 부활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