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Ⅲ-4]나는 이제 현주(玄酒)만 마실테다
엊그제 인사동 일식집에서 4인이 모였다. 한 친구는 동갑내기 교수 출신으로 초"맨처엄 면이지만 수십 년부터 이름은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또 한 분은 나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는 한국서가협회 이사장으로 서예가이다. 세상에 회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내 술역사 50년에 처음 있는 일. 까닭인즉슨, 그 전날 종합건강검진 결과지를 놓고, 여자의사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뇌혈관이 막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술은 한 잔도 마시면 안된다”는 어머무시한 ‘협박’을 했다. 뇌관련 MRI, MRA, 뇌CT, 경동맥초음파 4가지를 찍었는데, 혈관 3곳에 혈전(피뭉치)이 50%도 넘겨 쌓였다는 것. 이건 정말 뛰다가 죽을 정도의 ‘빨간 불’이다. 내 눈으로 간신히 이어진 듯한 가는 미세혈관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혔다. 이런 마당에 술 한잔을 앞에 놓고보니 마치 독약을 보는 듯했다. 초면인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는데 쪽이 팔렸다고 할까. 몇 다리 건너면 대한민국은 모르는 사람이 없듯, 나의 친구 4명하고도 각별한 사이였으니 흥이 나고, 술잔이 날아다녀야 맞는데, 나는 남진의 노래처럼 ‘빈 잔’으로 연신 건배를 했다.
이때 그 친구가 “괜찮아요. 앞으론 현주(玄酒)만 드셔야겠군요” 현주? 솔직히 듣보잡. 듣느니 처음이다. 뭐냐니까 물으니,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역시 유식한 친구를 두면 뭐라도 하나 배우기 마련인데, 현주를 알게 돼 기뻤다. 자, 현주란 무엇인가? 현주는 술이 아니고 ‘맹물’ ‘깨끗한 찬물’을 우회적으로 부르는 말인데, 이 현주가 만만찮았다. 원래 제사때 술 대신 사용하는 물이며,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유교 제례때 가장 귀하게 여긴 제수용품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검을 현’일까? 아시겠지만 천자문의 첫 네 글자가 ‘천지현황’(天地玄黃)인데, 고대 동양철학에서 하늘의 색을 검게 보았고, 만물의 근원인 물(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을 가장 신성하게 여겨, 술은 아니지만 술과 같은 위상을 지니며 술보다 앞서 올려야 하는 근본적인 존재로 대우, 이렇게 불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하여, 그날 저녁 나는 연속 현주로 건배에 동참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유학이 전공인 그 친구의 설명이 더 이어지는데, 현주를 맨처음 제상에 올리는 까닭은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물을 올려 제사를 지냈고, 후대에 술이 생겼는데도 조상들이 마시던 ‘태초의 음료’인 물을 맨먼저 올린다는 것이다. 또한 담박명지(淡泊明志)라는 말을 아느냐?고 ‘유식꾼’이 묻는데, 서예가들이 잘 쓰는 문구 아니냐니까, 그 문구에는 ‘맑고 깨끗함이 마음을 밝게 한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와우-, 역시 30년도 넘게 유학을 가르친 교수다웠다. 그리고 정말 좋은 말을 들은 것이다. 왜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에 일어나 맨처음 하시는 일이 정제(부엌)에서 정화수(정안수)를 실겅에 올려놓고 비손하는 일이 일상이지 않던가. 오로지 총생들의 무병무탈을 일편단심으로 비시던, 아 조선의 어머니들이시여. 할머니들이시여. 지금도 고맙습니다. 정말 경건한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사람이 살면서 근본(본원)를 잊으면 안될 일이다. 깨끗한 물 한 잔을 조상님 전에 올리듯, 이제부터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현주를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조상의 은덕까지 생각하며 마시겠다고 작정했다. 실제 마시고 취하는 술이 아닌 현주야말로 정말 성스러운 술이 아닌가, 아니 맑은 물이 아니겠는가. 문득 ‘지조의 시인’ 조지훈의 '주도유단'(酒道有段)의 9단 폐주(廢酒) 전의 8단이 생각났다. 술을 바라만 보고 마시지 않는 관주(觀酒)가 그것이다. 이제껏 마실 만큼 마셨으니까(맨처음 15살 중학 2년때 노란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몽땅 다 먹고 대취했으니 얼마나 가관이었겠는가), 건강의 적신호를 계기로 관주를 하고 현주만 마신다고 친구들이 왕따시키고 저희끼리만 만나는 일은, 장담하건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현주로 건배를 하며 관주를 하는데 천불이 날 터이지만(목구멍에서는 얼마나 당그래질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오랫동안 즐겼지 않은가), 앞으로 10년, 아니 20년 손자들이 커가는 모습도 보아야 하고, 곱게 익어가는 아내와 함께 노년의 삶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결심은 요지부동, 확고할 것이다. 일가붙이나 그 어떤 친구도 나에게 ‘술 마시지 말라’는 우정과 애정어린 충고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제 술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진 기분까지 느끼고 있으니까. 어쩌면 홀가분한 기분이다. 현주, 좋다. 하루에 1.5-2리터의 현주를 마셔야 몸에 좋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 언제나 옆구리에 현주를 끼고 다니자. 그것이 바로 나의 수명 연장책이 되지 않을까. never mind. take it easy. b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