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목) 이사야 7:17-25 찬송 423장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영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고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 (개역 개정)
- 앗수를 통한 남유다 심판 예언 -
임마누엘의 징조와 함께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멸망과
남유다의 구원에 관해 예언한 어제 말씀의 예언과 상반되게
앗수르를 통한 남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즉 파리와 벌떼처럼 몰려올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남유다 전역이 초토화되고 백성들이 처참하게 유린 당할 것이며(17-20절)
그 땅은 황폐화되어 극심한 경제적 고난에 시달리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21-25절)
그런데 3-16절에서 대적들의 멸망과 남유다의 구원을 예언하다가 갑작스럽게
남유다에 대한 이러한 처참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것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한번 택한 백성은 결코 궁극적인 멸망에 이르게는 아니할 것이나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세상 권력자인 앗수르를 더 의지한
아하스의 죄악에 대해서는 징계하셔서 그 백성을 연단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에서 남유다를 철저하게 유린한 앗수르 왕은
아하스가 도움을 구했던 디글랏빌레셋 3세는 아니다.
그는 아하스 왕에게 단지 뇌물만 받은 것으로 역대기 기자는 전하고 있다.(대하28:20)
그것은 아마 B.C.701년경 히스기야 14년에 남유다를 공격한
산헤립(B.C.705-681)의 침공, 또는 B.C.648년경 므낫세 49년에 공격한
앗수르바니팔(B.C.669-626)의 침공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는 5:26-30의 예언과도 연관된다.
여기서 우리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 왕 한 사람의 불신앙이
그 백성 전체에게 미친 영향이 실로 엄청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한 나라의 왕이 가지는 막대한 권세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보다 궁극적으로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전(全)선민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곧 전 백성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의식을 고양함(롬11:20; 살후1:8-9; 히3:15-19)과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이 각각의 삶의 터전에서 맡고 있는 역할 속에서
참 신앙으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막12:33; 롬13:10)
21-22절)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영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이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유다 땅에 있던 사람이 거의 대부분
이방 땅으로 이송되어 그 땅에는 소수의 남은 자들만 있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오직 목축에만 의지하여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와 양을 떼로 이루어 목축하였다.
따라서 사람이 한 마리의 어린 암소와 두 마리의 양을 기를 것이라는 사실은
많은 가축들이 외적의 침입으로 죽거나 빼앗길 것임을 암시한다.
게다가 그 적은 양의 짐승에게서 얻는 젖이 많다는 것은
그 젖을 먹을 사람 역시 많지 않음을 알려 준다.
그만큼 유다는 사람도 없고 재산도 없는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도 한 두 마리의 소와 양이라도 남아 있고,
그것에서 나는 젖을 먹고 땅에 있는 천연 꿀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징계하시는 상황 속에서도
결코 그들을 향한 사랑은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 그 실례가 제시되어 있다.
즉 성경은 진노 중에도 긍휼과 사랑을 잃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여러 가지로 보여 준다.
단적인 예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대표적인 선지자이다.
그는 니느웨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무시하고 니느웨와는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갔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도망치는 요나가 탄 배를 거대한 풍랑과 함께 찾아오셨다.
이 풍랑 앞에서 배에 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요나의 말에 따라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었고, 풍랑은 잠잠해졌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빠진 요나는 익사하지 않았다.
거대한 풍랑을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켜
풍랑 속에서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는 큰 물고기도 함께 보내셨다.
요나를 징계하시는 풍랑 안에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고 계셨다.
즉 징계 속에 사랑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 안에는 반드시 사랑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결코 징계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요나에게 풍랑을 보내실 때 큰 물고기를 같이 보내셨던 것처럼,
앗수르를 통한 징계로 인해 피폐해진 유다에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사랑과 은혜를 준비해 두셨다.
믿음이란 이처럼 징계가 내려지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이미
회복을 위한 은혜와 사랑을 준비하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불만을 토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징계 속에 이미 준비해 두신 사랑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