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6
1월7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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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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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Tx0kegps8A
[광주대교구 권다혁 다미아노(삼각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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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도대체 왜? 이 큰 부끄러움은 항상 우리의 몫이어야 합니까?>
오랜 세월 차곡차곡 공들여 쌓아 올린 국격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주 항공기 참사로 인한 범국민적 트라우마, 거기에다 전 세계 사람들 앞에 볼썽사나운 광경을 끝도 없이 연출하고 있는 악의 무리들...
어찌 그들은 그리도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그들인데,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이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입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가련한 우리 민족을 굽어보시어, 이 혼란과 방황에서 조속히 해방시켜 주시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난감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어쩌면 너무도 기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울부짖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길거리에서 꼬박 밤을 지새웁니다. 대체 누구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나,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목자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거리의 양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양이면서, 동시에 목자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착한 목자가 없다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엄중한 이 시국에 우리는 목자로서 이 시대와 나라와 양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착한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금쪽같은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아닐까요?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는 언제나 양들 사이에 현존하기에, 몸에서는 늘 양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양들 사이에, 나라를 위한 걱정이 태산인 거리의 백성들 사이에, 울부짖고 있는 민중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착한 목자는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침을 통해 그의 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목자는 맡겨진 양들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양들 사이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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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UZ4hUo9l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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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부님, 수녀님이 되면 저절로 믿게 될까?>
하느님이 계심이 의심이 들어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중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내어놓을 때, 그것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통해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정배연 수녀님의 이야기 또한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머니를 돌볼 수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도 없었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제는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는 이들이기에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 성빈센트드뽈자비의 수녀회 정배연 루피나 수녀님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는지 들려줍니다. 수녀님은 청년 때 청년빈첸시오회를 통해 수도성소를 받아들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차차 자기 힘으로 이웃에게 무언가 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머니가 편찮아지셨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낡고 비좁은 시골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 말고 다른 형제들은 다 외국에 살았고, 어머니는 끝까지 그 집을 고집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의 응답은 “네 몫이다.”였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주님, 당신은 아시잖아요. 수녀인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모실 수 있습니까?” 수녀님은 어머니도 돌봐드릴 수 없으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제 몫이라면 응답해 주세요. 수도원을 떠나겠습니다.”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내가 하겠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수녀님은 “네 몫이다. 내가 하겠다.”라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내 몫의 일을 주님께서 해 주신다는 뜻이었구나!’
그러고 나서 수녀님의 시선이 확 바뀌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를 찾아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수녀님이 못 가실 때는 꼼꼼한 주간 보호사가 어머니를 돌봐드렸고, 수녀님도 평화 속에서 어머니에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부담이 없어진 어머니에게 봉사하니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증가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지만, 이래저래 주님의 섭리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도움이 주위에서 쏟아졌습니다.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수녀님의 일을 예수님이 해 주고 계신 것을 장례 기간 내내 느꼈고 힘들지 않으니 형제들에게 섭섭했던 것들도 저절로 다 풀렸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먹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것 이상은 당신께서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 이상을 원하실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순명으로 실천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여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그 사람에게 드러내십니다.
1열왕기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을 믿었고, 그 결과 그녀와 아들은 기근 동안에도 끊임없이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 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 17,14)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모든 것을 내어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 채우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에게도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하느님께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우리의 시간, 에너지, 혹은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한 사람도 만족시킬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니 매일 수천 명의 신자가 저의 유튜브 강론과 글을 읽으십니다. 이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매일매일 주님의 현존과 도우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는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종종 “하느님께서는 제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빈곤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자신이 가진 작은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녀의 작은 희생과 노력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크게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나며 살고 싶거든 우리 능력 이상으로 주라고 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내 능력만큼만 하려고 하면 만나지 못합니다. 불가능에 도전합시다. 그러면 반드시 그분의 능력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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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놀라운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주님 공현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전하는 여정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이 사명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독서에서 강조하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응답할 때, 우리는 주님의 공현을 실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빛날 때, 세상은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공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내적으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도와 성사, 성경 묵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의 내면에 주님의 빛이 차오릅니다.
둘째, 외적으로는 우리가 이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말과 행동, 나눔과 봉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에 변화를 불러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 사랑을 이어받아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사랑과 희망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나며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과 공현을 기념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공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 주었고, 모두가 먹은 다음에 남은 것이 12광주리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에게 보여준 마음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보여준 마음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셋째는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세상은 가난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헐벗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오늘의 성서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주어야 하는 것, 사랑 받기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과 나눔이 주님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큰 기적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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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4-44: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들었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지금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을 우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빵은 “외딴곳”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그곳은 외딴곳이었지만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함께 계시고 시간이 이미 늦었지만,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분은 전에 빵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으로서 승리하셨다(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참조). 배고픔도 겪으셨지만 수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참조: 마태 14,20-21; 15,37-38; 마르 6,42-44; 8,6-9).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참조: 요한 6,51) 목마름도 느끼셨지만(참조: 요한 19,2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하셨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인간이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으로서는 우리처럼 잡수셨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지만(참조: 히브 4,15), 하느님으로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참조: 마태 14,17-21; 마르 6,38-44; 루카 9,14-17; 요한 6,10-13)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 하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3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놓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풀밭에 앉도록 명하신다. 사람들은 백 명의 식탁에, 쉰 명의 식탁에 둘러앉는다. 말씀의 식탁, 성찬의 식탁에서 그들은 양육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다. 이는 우리가 하늘에서 받는 선물에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는 순간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이루셨다. 그러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오늘 빵의 기적의 신비는 이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매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기적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는 일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오천의 영적인 의미는 대담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용기를 지닌 사람은 천상적 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오천 명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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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두 모습을 떠올립니다. 첫째는 시편 23(22)편이 노래하는 ‘목자와 양 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쫓아온 큰 군중을 가엾이 보시고 제자들을 시켜 모두 푸른 풀밭에 백 명 또는 쉰 명씩 무리 지어 자리 잡게 하십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풀을 뜯는 초원의 양 떼들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디에 풀과 마실 물이 있는지 잘 아는 목자와 함께라면 메마른 광야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약 성경의 오경이 묘사하는 광야를 행진하여 가는 열두 지파 진영의 모습입니다. 낮 동안 그들을 안내하던 구름이 내려와 멈추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질서 정연하게 무리 지어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모세는 많은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백성들의 고충을 하느님께 가져가 아뢰고, 하느님께서는 이에 응답하시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백성의 가엾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빵의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제자들의 가난한 봉헌물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당신 양 떼들을 배부르게 하셨지요. 아버지 하느님의 도우심과 제자들의 가난한 봉헌이 함께한 선물과도 같은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6,43). 신명기 28장 5절의 축복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반죽 통의 축복이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서 이루어졌다면, 광주리의 축복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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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 6,34-44)
1)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신 분이고, 양들을(우리를) ‘생명의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34절의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은총’을 사람들이 배불리 받아먹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적의 빵’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그 빵으로 육신만 배부른 것은 아니고, 영적인 배부름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식과 평화와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2) 제자들이 먼저 다가와서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자기가 먹을 것은,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게 합시다.”라는 뜻이고, 표현만 보면 사랑 없는 ‘냉정한’ 말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먹을 것을 사지 못하고 그냥 굶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때 제자들은, 그 이상의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그 상황에서는 주님께 사람들의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고, 해결책은 주님께 맡겨 드렸어야 합니다.
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돈도 없고, 빵도 없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테니.”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또 제자들 자신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만일에 그때 제자들의 믿음이 완성 단계에 도달한 상태였다면, 그들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을 텐데, 그때는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제자들은 “저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는 말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는 말은, “저희에게는 돈도 없고, 빵도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 그러나 ‘주님의 힘’으로는 되는 일, 그것이 ‘기적’입니다.>
4)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41절)라는 말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제자들이 실제로 실행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테니.”로 이해하는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기적의 빵’을 사람들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들이 그 빵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은, 제자들의(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이웃의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사명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기도’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 실천’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해결하려고 나선다면, 그것은 믿음 없는 태도이고,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대원칙입니다.
신앙인들이, 또는 교회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기도이고, 그 다음에는 기도하면서 사랑 실천에 앞장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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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가엾은 마음”과 연관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것은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 ‘애가 녹는다.’ 정도로 번역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한 이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 불쌍한 이와 같은 처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그럼, 누가 불쌍한 사람일까요? 한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굳이 빗대어 보자면,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의 가치에 얽매여 ‘함께’의 길을 잃어버린 제자들, 그들이 바로 목자 없이 헤매는 양들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실은 아주 적습니다.
필요한 것의 양이 절대화되는 이유는 삶의 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불안함을 덜어 내는 것은, 앞다투어 쫓아가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 함께하려는 마음이고, 그 마음이 모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제도와 법이 생기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무한한 사랑이나 자비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나눔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의 초대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제 것이라도, 함께 나눌 것인가, 혼자 누릴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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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와 같은 생각,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반대될 때 안색이 바뀌곤 합니다. 자기 생각과 같을 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다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친한 친구에게 자기와 다른 이웃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냐?’면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생각에서인지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모습으로 더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한 친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음~~ 그럴 수 있지.”
자기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면서 자기 생각을 받아 들어주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 자기도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음~~ 그럴 수 있지.”라면서 그 생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다름에 화가 나면 마음속으로 ‘3... 2... 1...’을 외친 다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면 대부분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즉, ‘3... 2... 1...’을 말하는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해서 부정적 마음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3... 2... 1...’ 그럴 수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을 오늘 복음에서 묵상해 봅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늦은 시간까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계산하고,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자면 빵 이백 데나리온어치가 필요하니,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는 결론까지 내리게 되지요.
이렇게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 정반대로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예수님 곁에만 머무르려는 군중들. 누가 문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누가 틀렸다고도 또 맞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군중도, 자기 일을 도와주려는 제자들의 계산적인 생각도 그럴 수 있었기에 아무런 꾸중도, 칭찬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 어떤 판단 없이 이상의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 복음에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사랑의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 모범을 따라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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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 한 사람>
마르코 6,34-44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그렇게 모이고 모여
많은 사람일 테지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얼핏 훑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을
결코 볼 수 없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틋이 눈 맞추면
마침내 많은 사람을
모두 품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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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가 주어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 하고 하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 할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내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습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합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어놓으면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들어줄 상대를 찾는 사람,.....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베푸는 삶, 행동하는 믿음으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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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요한 1서 4장 10절)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에페소서 2장 4절 / 로마서 8장 3절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코 6장 36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장 37절)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코 6장 41절)
이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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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 서로 사랑합시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영어로 쓰니, “God is love”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가장 많이 말하면서 가장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사랑에 위반되는 모든 행위가 죄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소극적 노력보다는 사랑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죄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에는 우리 모두 영원한 초보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가 사랑이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인생 학교에 재학중인 평생학생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을 배워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사랑하라 주어지는 인생입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사랑 못했던 것이요, 하느님 앞에 가서는 평생 사랑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평생 아프게 했던 남편의 임종전 고백에 말끔히 치유되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이 생생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마지막 이런 임종어를 주님께 고백할 수 있다면 무조건 구원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 요한이 ‘사랑의 대가’답게 명쾌하게 사랑을 설명합니다. 무려 사랑이란 말이 10회 나옵니다. 사랑없이는 결코 사람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없이는 하느님도, 인간도 해명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비, 인간의 신비는 그대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모든 신비의 열쇠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사랑도 못합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 이웃이요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라 주어진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사랑도, 구원도 없습니다. 공동체내에서 서로 사랑할 때 서로가 구원이요, 서로가 자존감 높은 삶에, 정체성 또렷한 삶입니다. 수도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잘 체험할 수 있는 두 중심 시간은 성당에서의 공동미사시간이요, 식당에서의 공동식사시간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름길은 사랑하는 일뿐입니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워지고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사랑의 능력은, 깊이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뿐입니다. 이 사랑이 아니곤 도대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도,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울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은 예수님뿐입니다. 요한이 설명이 명쾌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 오늘 복음의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사도들이 전교활동후 돌아와 성과를 보고하자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배려하는 주님의 사랑이요, 막상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목자 없는 양들같은 군중을 보자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에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새삼 예수님의 분별의 사랑, 분별의 지혜가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당신과 제자들의 휴식보다는 군중의 필요를 우선 충족시킨 주님이십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그대로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를 닮았습니다. 앞서 가르치시는 부분은 말씀전례에 해당되고 이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장면은 그대로 성찬전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계시가 미사시간이요, 미사전례의 주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성체성사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성을 다해 모두를 봉헌하니 하느님도 감동하셨고 군중도 감동하여 가진 것을 다 나누니,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이요,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가리킵니다. 없어서 굶주린 것이 아니라 나누지 못해 굶주림이요, 이것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 탓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 은총을 통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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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오늘 서간은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우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는 사랑입니다. 외아드님을 육화하게 하시어 우리와 같아지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고통과 불행 중에 있는데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군대나 외국에 나가 온갖 고생고생하는데 모르는 체할 수 없어 뭐라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는 온갖 고생하는 사람들을 가엾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사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많은 인간이 남의 고통과 불행을 보지 못합니다. 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거나 욕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가엾어하시고 이어서 행동을 취하십니다. 첫째는 가르쳐주시고 둘째는 빵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을 주시기 전에 많은 가르침을 먼저 주시는 것인데 배부르게 하시기 전에 사는 길을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일용할 양식으로 영적 육적인 양식을 모두 주시는데, 미사로 치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행하심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그분의 사랑은 당신 아드님의 수난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나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가르침과 빵을 주시는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에 동참하시는 것을 넘어 우리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릴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흔히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셨다고 하는 그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인데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우선 그 사랑으로 충만하고 배부르고 치유 받아야겠지요.
그 사랑을 받고도 아직도 배고프고 불만투성이고 아프다면 안 되겠지요. 내가 지금 배고프고 불만이고 아프다면 아직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받고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 알량한 내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받아 사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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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6,42)
<사랑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 6,34-44)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큰 사랑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통해 드러난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가엾은 곳으로 향해 있는 낮은 사랑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 낮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사이처럼 머리를 들고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교만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교만이 그 자체로도 죄이지만, 또 다른 죄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죄는 모두 교만의 죄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 4,7-10)는 낮은 곳으로 향해 있는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7-8)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4,9-10)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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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 6, 42)
삶이 이어지는
곳에 빵이
있습니다.
빵이
생명입니다.
빵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빵이
우리들의 삶에
들어오십니다.
빵이 되는
빵의 삶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배부르게 할
빵의 정신이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빵은
우리 모두에게
빵이 되는
사랑의
참된
삶입니다.
빵의 길을
따르는 삶이
지혜의
삶입니다.
살아있는
생명들은
베풀고
받아들이는
생의 풍요로움
속에서 진정한
감사를 배웁니다.
함께 나누지
않으면 모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애틋함의
십자가가
빵의 나눔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나눔이
아니더라도
소박한
일상의 나눔은
우리 모두를
더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빵이며
나눔입니다.
서로의 삶에
빵이 되지
않으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복음은
우리들에게
빵의 삶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먼저 위로의
빵이 되는
기쁜 날
되십시오.
빵이 되는
거룩한 실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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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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