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5D3KIr2S
(11)“미디어는 정신과 육체의 확장”…디지털 시대 이해의 출발점 제공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캐나다의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 ‘지구촌(global village)’ 등의 개념을 제시하며 미디어가 인간의 촉각을 자극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64년 캐나다의 미디어학자인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1911~1980)은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을 발표해 서구 지식사회의 안과 밖에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후 사상 70년에서 맥루언만큼 최고의 찬사와 격렬한 비난을 동시에 받은 지식인도 드물다.
어떤 이들에겐 ‘시대의 예언자’였지만, 다른 이들에겐 ‘지적 사기꾼’이었다. 분명한 것은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맥루언의 주장이 기성의 논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유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1965년 뉴욕헤럴드트리뷴은 맥루언을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과 파블로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맥루언은 영문학자로 출발해 미디어학자, 문명비평가로 나아간 지식인이었다. <미디어의 이해>를 비롯해 <기계 신부> <구텐베르크 은하계: 활자 인간의 형성> <미디어는 맛사지다> 등 그의 주요 저작들 모두 현대문화를 해부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했다. 1962년에 발표한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미디어의 이해>만큼 문제적인 저작이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200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인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양한 인용에 자유로운 단상을 덧붙임으로써 맥루언은 표음문자와 인쇄술의 발명이 가져온 실재에 대한 시각적 편향성을 주목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포괄적 감각의 존재인 인간에로의 귀환이었다.
■ ‘미디어가 메시지다’
<미디어의 이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이다. 이 언명이 갖는 함의는 미디어에 담긴 내용보다는 미디어를 이루는 형식이 삶과 세계를 인식하는 데 오히려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다. 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신문으로 읽는 경우와 텔레비전으로 보는 경우 그 메시지가 확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주장의 적절한 사례다. 맥루언에게 미디어란 신문과 텔레비전을 넘어 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을 포괄한다. 그는 <미디어의 이해>의 후속 저작인 <미디어는 맛사지다>에서 “바퀴는 발의 확장이며, 책은 눈의 확장이고, 옷은 피부의 확장이며, 전자 회로는 중추 신경계의 확장”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미디어는 정신과 육체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이런 독창적인 접근에 기초해 맥루언은 ‘뜨거운(hot) 미디어’와 ‘차가운(cool) 미디어’를 구분했다. 뜨거운 미디어가 데이터로 가득 찬 미디어라면, 차가운 미디어는 데이터가 상대적으로 적은 미디어다. 라디오·영화·사진 등은 뜨거운 미디어이며, 전화·텔레비전·만화는 차가운 미디어다. 뜨거운 미디어가 밀도가 높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참여 가능성이 작다면, 차가운 미디어는 밀도가 낮기 때문에 포용적이고 참여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미디어의 분류를 맥루언은 인류 역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결합시켰다. 그에 따르면 활자의 발명으로 열린 인쇄문화 시대의 도래는 인간의 감각에서 시각의 편향성과 패권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19세기 말 전기문화 시대의 등장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을 활성화시켜 감각의 균형을 되찾게 했다. 이렇게 전자매체에 의해 인류가 지구적으로 하나의 부족을 이루는 게 ‘지구촌’이라는 그의 유명한 개념이다.
주목할 것은 텔레비전에 대한 맥루언의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텔레비전은 모자이크로 이뤄진, 점묘화와 같은 차가운 미디어이기 때문에 시각이 지배적인 책·신문과는 달리 여러 감각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열린 매체다. 텔레비전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견해는 전후 새롭게 열린 텔레비전 시대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맥루언의 논리는 철학적 직관에 의존한 것이지 과학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다. 또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그는 무관심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공론장이 쇠퇴했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견해와 비교할 때, 맥루언의 견해는 소박하고 유행에 민감한 낙관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마셜 맥루언의 대표 저작 <미디어의 이해>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인터넷 은하계
1990년대 이후 ‘맥루언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맥루언은 재발견됐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인 폴 레빈슨의 <디지털 맥루언>(1999)은 이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맥루언 저작들은 1960년대보다 오늘날에 더 중요하고, 인터넷과 세계화로 상징되는 디지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게 레빈슨의 주장이었다.
맥루언이 미친 영향은 정보사회 이론가인 마누엘 카스텔의 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카스텔은 <인터넷 갤럭시>(2001)에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Gutenberg galaxy)’를 응용해 인류가 정보사회의 도래와 진전을 통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세계인 ‘인터넷 은하계(internet galaxy)’에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이 은하계에선 창조성·혁신·생산성·부의 창조와 변덕성·불안정성·불평등·사회적 배제가 극단적으로 병존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인터넷 은하계야말로 21세기 네트워크 시대의 자화상인 셈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맥루언의 예언이 모두 맞지는 않았다. 그의 예상과 달리 거대도시는 소멸하지 않았고, 자동차와 증권거래도 퇴물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나무가 아니라 숲 전체다. 21세기는 정보사회의 진전과 네트워크 사회의 만개가 사회생활의 기본 조건을 이루는 시대다. 미디어와 네트워크라는 형식이 삶과 세계의 내용을 바꾸는 놀라운 현실을 우리 인류는 마주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올바로 판독하기 위해서라도 <미디어의 이해>를 읽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작지 않다.
■한국어판 저작은
김상호 경북대 교수가 번역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은 테렌스 고든이 편집한 비평판(2003)을 옮긴 것이다. 고든의 비평판 편집자 서문, 맥루언의 ‘뉴미디어의 이해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포함한 부록, 옮긴 이의 꼼꼼하고 친절한 역주들은 이 번역본의 가치를 높인다.
■맥루언과 함께 주목할 사상가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와 함께 1960년대 미디어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다. 그의 교수자격 논문인 <공론장의 구조 변동>은 미디어와 시민사회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는 공론장(public sphere)을 가족으로 대표되는 사적 영역과 대비되는, 공적 토론이 이뤄지는 영역으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는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갈등이 이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해결되는 정치체제다. 다시 말해, 공론장은 근대 민주주의를 열고 지탱해온 지반이라 할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
문제는 이 공론장이 20세기에 들어와 ‘재봉건화’를 겪게 됐다는 데 있다. 재봉건화란 공론장에 부여된 정치·사회적 역할이 약화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다시 봉건사회처럼 재결합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재봉건화 과정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비판적 청중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채 소비문화의 향수자로 전락하게 됐다고 하버마스는 비판했다.
맥루언으로부터 영향받아 현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분석틀을 제공한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언명과 연관해 주목할 보드리야르의 두 개념은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다.
시뮬라크르란 외부 현실에 근거가 없는, 원본 없는 이미지를 말한다. 더 이상 모사할 실재가 없어진 시뮬라크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실재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하이퍼리얼리티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가상 실재가 실재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살아간다. 원본과 모사본의 경계가 부재한다는 이러한 논리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대한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했다.
위르겐 하버마스
흥미로운 것은 계몽주의적 사회이론과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보드리야르 모두 매스 미디어가 현대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의 중심은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으로 이동하고 있다. 더불어 일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은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화되고 있다. 새롭게 부상해온 쌍방향 인터넷 시대의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분석은 현재 사회과학에 중요한 과제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