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본디오 빌라도
생몰연대: 미상. 재직 26~36년.
주소: 유대 예루살렘. 서기 36년 이후 이후 로마.
직업: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5대 지사
가족관계: 부인 클라우디아
1. 빌라도의 행적
또다시 정말 오랜만이다. 예후 편을 쓰고 장장 4개월 만에 다시 쓰게 되었다. 그 사이 감이 떨어지지나 않았나 심히 고민이다.
그러나 감이 떨어진 것은 고사하고 더욱 고민인 것은 언제나 한결같은 나의 행실이다.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그른지는 알지만 주변의 이목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타협적인 선택을 하고야 마는 내 행실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해 또다시 손을 뻗는 나를 보며 참으로 인간은 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곤 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건 뭐 답이 안 나오는 죄인.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보며 문득 2천년 전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전세계 수십억 인류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그 분'.
인류의 33%에 달하는 크리스천들과 천주교인들에게는 수천년 간 죄악과 저주로 불려진 ‘그 자’.
언감생신 예수님을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진실로 회를 쳐도 시원찮을 ‘그 놈’.
바로 유대 지사 본디오 빌라도이다.
가만!!!
왜 "총독"이 아니냐고 물어보신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다들 이 본디오 빌라도를 유대 '총독'으로 알고 계시는데 사실 '총독'이란 건 로마 영토인 속주에 설치되는 관직이고 이 당시에 유대 지역을 포함한 소아시아와 이집트 사이의 그 강역을 통치하는 자는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였다.
본디오 빌라도는 시리아 총독 휘하에서 유대와 갈릴리 일대를 관장했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관료였으며 그런 연유로 '총독'보다는 '지사'가 더욱 본 의미에 적합하다.
(사실 우리식 표현대로 하면 '감사' 혹은 '관찰사'가 더 적합한데 (옛날에 평양감사, 충청도 관찰사처럼) 성경을 최초로 번역했을 때 '지사'라는 중국식 호칭으로 번역되어 전해졌기에 그것을 준수하기로 했다는....)
역사에 나와 있는 빌라도의 행적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본래 정통 로마인도 아닌 그는 폰토 지방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뛰어난 용맹을 떨쳐 처음으로 요직에 발을 들여놓았고 특히 창술이 매우 뛰어나 그를 향해 ‘창(필룸)을 가진 자’ 필라투스라고 불렀다.
(활 잘 쏜다고 주몽이라 부른 것처럼)
창을 가진 폰토인. 로마어로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성경에 기록되기로는 일명 ‘본디오 빌라도’이다.
(그의 행적이 얼마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지어낸 가공인물이라는 설까지 있었으며 무려(!!!)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비문이 발굴되서야 비로소 확연한 실제 인물이 되었다지 뭔가...)
그는 백부장 시절에 유력한 로마 귀족의 딸 클라우디아와 연애하여 결혼까지 성공했고 처가 덕을 톡톡히 보았는지 승진을 거듭하여 시리아 총독 휘하에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을 다스리는 지사에까지 올랐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그 정도 자리는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징세권을 다 가진 최고 직위요, 그렇기에 (돈과 권력을 얻는 데에) 다시 없을 요직이었다. 별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 총독을 생각하면 금방 느낌이 올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총독의 대리인이 되어 예루살렘에 부임한 그는 담대하게(?) 로마 군단의 독수리 군기를 성전에 떡하니 내걸어 유대인들의 기를 꺾으려 했고 당연지사 유대인들의 격렬한 시위를 불러왔다.
로마 장군의 가오가 있는 터라 유대인들의 시위에 눈도 깜짝 않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다 죽어도 물러설 수 없다고 내뻗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군기를 내렸다.
(시작부터 왠지 불안하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사람만은 아니었던 터라 성전의 기금을 압수하여 수로 공사를 하고 유대인들이 해마다 내는 반 세겔의 성전세까지 착복해 버렸으니 유대인들과의 관계는 또다시 험악해졌다.
더군다나 성전 기금으로 수로 공사를 하는 실로암에서 공사 중에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되는 유대 인부들이 깔려죽는 사고까지 벌어졌으니 더욱 그럴 밖에.(- 눅 13:4)
게다가 그 일로 인해 항의 시위를 하는 유대인들을 강제 해산시키며 그 중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어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눅 13:1)
빌라도가 저지른 짓이 저러하니 어찌 유대 땅의 민심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민심은 술렁였고 곳곳에서 열심당원을 위시한 반란 세력들의 준동이 잇달았으며 심지어는 로마의 앞잡이라 할 수 있는 헤롯 왕가마저 빌라도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까지 말이다.(- 눅 23:12)
이래저래 골치를 썩이던 본디오 빌라도.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예수라는 한 사람이 끌려 왔다. 유대 곳곳에서 기적을 일으키며 천국 복음을 전했던 사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사람. 나귀 새끼를 타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 마침내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음모로 같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자신에게 넘겨졌다. 아무리 법대로 따져 보아도 그는 죄가 없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에서 예수로 인하여 매우 고민하였으며 즉시 남편에게 달려와 예수를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부인 클라우디아가 꾼 꿈은 수많은 사람들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글귀를 읽으며 예수를 죽인 것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을 증오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과거 카이사르가 자신이 죽는 것을 꿈에서 본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으로 나갔다가 살해당한 것을 알고 있던 빌라도는 아내의 꿈 이야기에 한층 더 마음이 동하였다. 궁여지책으로 갈릴리가 헤롯 왕의 소관임을 알고 헤롯 왕에게 넘겨버렸으나 헤롯 왕은 도로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버렸다.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어도 계속해서 죽이라고만 외치는 유대인들, 심지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그들에게 질린 빌라도는 결국 손을 씻으며 무죄를 주장했고 예수를 그렇게 십자가 언덕으로 보내고 말았다. 때는 서기 29년.
그로부터 4년 뒤 빌라도는 그리심 산에서 순례를 온 사마리아 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황제로부터 문책을 받고 36년에 파면을 당했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참수당했다는 설, 자살했다는 설이 있고 아무튼 빌라도는 자연사가 아닌 석연치 않은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은 사도신경에 실려 대대로 저주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2. 죽일 놈인가? 살릴 놈인가?
과연 본디오 빌라도는 우리가 늘 알던 바와 같이 산 채로 포를 떠서 젓갈을 담아도 모자랄 악인인가?
아니면 조금은 억울한 역사의 희생양이었던가?
사실 당시 유대는 지금의 이라크나 아프간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억세고 끈질긴 유대인들은 과거 마케도니아가 다스리던 때부터 율법을 목숨으로 사수하여 새로운 지배자인 로마에게서도 율법에 대한 인정을 받아냈다.
심지어 유대인의 무장력까지 허용되었고 사형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적용되었다.
물론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탄압도 무시무시하여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연도는 불명이나) 유월절 등의 축제일에 학살당한 유대인이 3만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같은 유대인끼리도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파 등 파벌 다툼이 벌어졌고 열심당원(셀롯, 영어로는 질럿;;;)들은 의열단이나 알 카에다처럼 로마인이나 친로마 매국노들을 끊임없이 저격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부임했고 들끓는 유대인들의 머리를 식히고 질서를 잡아야 했다. 더군다나 그가 재임하고 있던 시리아 속주는 로마의 주적인 파르티아와 대치한 최전선으로 모든 촉각이 집중된 곳인지라 더더욱 세심한 관리를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역사는 그를 포악하고 잔인했다고 평하고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과 더불어 농민들의 대규모 시위대들도 함께 예수님을 따라 들어왔고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 예루살렘에서는 열심당원들이 주도한 반로마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민중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한 예수님이 당연히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여겼으나 예수님께서는 수락하지 않으셨으며 결국 봉기는 진압되고 말았으며 농민 시위대들의 요구사항도 예수님께서는 전혀 변호해 주지 않으셨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으며 결국 제사장들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군인들도 로마 병사가 아닌 같은 유대인인 성전 경비병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체포와 처형에 빌라도가 한 일은 이미 다 만들어진 서류에 도장만 찍어준 것이었다. 실상은 유대인 자신들의 소행인 것이다.
크리스천도 아닌 데다 방금 막 잠재운 폭풍이 다시 터져나올 위기였고 로마 황제에까지 상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니 빌라도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죄도 없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민중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자신의 손을 씻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다. 걸출한 용장이며 담대한 무관인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협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형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결국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였고 결국 그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가 구원받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빌라도는 죽일 놈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경위야 어찌 되었든 무죄한 예수님께 고난을 가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다.
모르면 몰랐다고나 하지 자신의 아내도, 유대 왕 헤롯도, 자기 자신도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와 출세와 사욕을 더 걱정하였고 그로 인하여 멀쩡한 생목숨을 끊고 말았다.
하물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주님께 채찍질을 하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 허리에 창을 찌르고, 그 옷을 제비뽑은 죄를 무엇으로 변명을 할 것인가?
빌라도는 답이 안 나오는 전무후무한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의 본래의 의미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사...’라는 뜻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은 빌라도의 소행이요, 빌라도가 대대로 지고 가야 할 업보이다.
아마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주님! 왜 하필 저였습니까?” 라고 말이다.
여담이지만 빌라도의 최후는 특이하게도 전혀 다른 극과 극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쪽은 그가 천벌을 받았다고 하며, 한 쪽은 그가 회개하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전한다.
초대 교회 시대를 지나며 빌라도는 차츰 인정받기 시작해 예수님의 처형과 부활 후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는 설도 등장했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는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성자, 성녀로 추앙되었고 6월 19일이 성자 빌라도와 성녀 클라우디아의 축일이다.
정경은 아니지만 외경에서는 빌라도 부부가 순교자의 일원으로 천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예수님의 모든 이적과 죽음, 부활을 증거한 일명 ‘빌라도의 보고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빌라도의 회심과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 위서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한 쪽은 빌라도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본 모 목사의 간증에서 나타났다.
빌라도는 지상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읽혀질 때마다 지옥 사자들에게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했고 예배시간 등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외어질 때는 더욱 잔인하게 채찍질을 당했다.
온몸이 찢겨나가면 다시 회복되어 또다시 고문을 당했으나 예수님을 향해 사형선고를 읽었던 그의 혀는 저주를 받아 뽑혀져 나간 후 회복되지 않았다.
과연 어떤 것이 정말 빌라도의 최후일까?
3. 총평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타협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의 이름은 지난 수천년간 저주를 받았으며 앞으로도 사도신경이 낭독될 때마다 끊임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결백함을 알았음에도 판결을 올바로 하지 않았으며,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 했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한 것이 아닌 손을 씻는 퍼포먼스와 말장난으로 물타기를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빌라도의 죄가 우리와는 해당사항 없다고 생각하는가?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핑계를 대고, 구실을 붙이며 저지르고 마는 우리들.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 무릎 꿇기보다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손을 씻어야 마음이 후련해지는 우리들.
2천년 전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떠넘겼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빌라도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도리어 사도신경을 핑계로 예수님에 대한 죄악을 빌라도에게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 고난을 준 자는 빌라도이니 우리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저런 당시 상황들을 보며 빌라도도 저건 어쩔 수가 없었네, 내지는 빌라도가 뭘 잘못했어?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잊지 말자. 우리도 공범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성전 경비병들 무리 중에 우리가 있었다.
예수님을 채찍으로 치던 로마 병정들 중에 우리가 있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 속에 우리가 있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고, 허리에 창을 꽂았으며, 주님의 옷자락을 제비뽑았다.
그 때 그 사람들이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지금 우리가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주님의 가족으로 받아주셨다.
본디오 빌라도는 어쩌면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샘플이다.
그의 최후가 극과 극의 두 가지로 전해지는 것도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갔을 때와, 끝내 회개하지 않고 죄악 속에 머물 때의 두 가지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 의롭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리새인보다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세리의 모습이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올바르고 정직한 모습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본디오 빌라도가 지옥에서 고통받는다는 내용은 확인 결과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의 저서 '지옥'에 수록된 사항이었습니다. 이재록 목사는 교계에서 저명한 이단이며 따라서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 또한 신빙성 없는 자료로 판명되었습니다. 위 칼럼에서 해당 부분은 그냥 지나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집필자 : 계시탐정
첫댓글 공감하는 글 입니다. 사도신경 할때 그 대목 만큼은 조금은 죄스러운 마음에 " 내 지은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시고" 로 하기도 합니다. 이 글 읽고 저는 아예 고칠까 합니다. 은혜의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