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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성종실록
1 유학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체제의 완성.
(960년-997년. 재위기간 : 981년 7월- 997년 10월, 16년 3개월)
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고려는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
입한다. 충효사상을 강조하고 계급질서 확립에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으로 이뤄진 양반사회와 농,공.상으로 이뤄진
평민사회, 노비와 천민으로 이뤄진 천민사회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 같은 유교정치는 중앙집권적체제를 완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3성(省) 6부(部)제 도입으로 중앙관졔의 기
강을 확립하고 12목(牧) 설치로 지방조직 정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각 지방에 유학교육기관을 세워 백성의 사상적
통합을 꾀하게 된다.
성종의 유교정책은 결과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형태를 띠게 되어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
들이 폐지되고, 사회 전반에 유학 열풍을 불러일으킨다.
*유교- 유교란 공자(bc551-bc479 노나라)의 사상과 그를 계승한 맹자(bc372-bc289 추나라)의 민본사상 순자
(bc298-bc238 조나라)의 교육의 중요성에 의해서 계승된 유가사상에서 발전 성립된다. 특히 공자말씀을 제자들이 적
어 놓은 논어에는 인의예지신의 생활윤리와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충효사상을 본령으로 한다.
성종은 960년(광종 11년)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욱(旭)과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 선의
왕후 유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古)다. 981년 7월 죽음이 임박해진 경종의 선위
를 받아 고려 제6대 왕에 올랐으며,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성종은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찍 죽어 할머니 신정왕후 황보씨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학에
밝고 인품이 뛰어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광종 이후 형성된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그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
한 인무로 평가되고 있었으며, 그 명성에 걸맞게 즉위와 동시에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팔관회-우리 민족의 고유민속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가 결합된 신라와 고려의 불교행사다.신라 진흥왕 (534-576)
551년에 불교의 팔관재계를 지키기 위해 열렸던 불교법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불교적 색채가 옅어져 무속신앙의
제천행사의 성격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팔관회는 거칠부가 고구려 승려 혜량을 신라에 모시고 와 승통으로
삼고, 진흥왕이 그에게 불교교단의 각종의식을 정비하도록 했는데, 이에 산천용신제와 10월 제천행사등의 토속신앙 등
을 불교의식을 결합해서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등회에 더불어 개최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898년 11월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의 궁예도 송악에서 팔관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때는 전사자 추모의 성격이 강했
으며 동시에 미륵불의 현세에 나타남을 바라는 불교행사로 변모시켰다.
팔관회는 원래 팔관재계에서 유래한 말이다.
8관재계‘란 팔관의 관은 금한다는 뜻으로 출가하지 않은 신도가 한 달 6재계 날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즉,1.
중생을 죽이지 말라.2.도둑질하지 말라,3.음행하지 말라.4.거짓말하지 말라,5.술마시지 말라, 6,꽃다발 쓰거나 향바르거
나 노래하고 풍류하게 하지 말라 7.높고 넓고 큰 잘 꾸민 평상에 앉지 말라.8.때아닌 적에 먹지 말라.이다.
신라를 전승한 고려의 팔관회는 순수한 불교의 팔관재계를 따른 것은 아니다.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건국의 해인 918
년(태조1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궁예가 매년 겨울 팔관회를 설치하여 복을 빈 것을 전승한 것이다.태조왕건은 팔관회
를 소위 말하는 훈요십조’에 넣을 정도로 중요시했으며 신라의 팔관회에 조상제의 성격을 띤 천하태평,군신화합을 기원
하는 민족적,호국적 연중행사로 발전되었다.특히,고구려의 국호를 이은 고려가 옛풍습인 동맹을 팔관회로 전승한 것으
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종은 팔관회를 폐시시켰으나 다음다음대인 제8대 현종대에 와서 최항의 건의로 부활시켰
다.
또한 성종 원년(982년) 6월에 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이념을 명확히 할 목적으로 5품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봉사(封事,
밀봉한 상소문)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 최승로의 <시무 28조>가 채택되어 정치방향과 체제정비를 위한 기본적인 골격
이 형성되었으며,990년 김심언이 올린 육정육사(六正六邪)에 관한 봉사를 통해 올바른 신하상이 확립된다.
최승로의 상소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 부분은 봉사를 올리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며, 둘째 부분은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는 5조의 정치를 평가하는 내용이며, 셋째 부분은 시무28조이다.
<시무28조>는 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군신관계 정립과 광종대의
노비안검법으로 양인이 된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려 놓는 노비환천법 실시를 주장하여 귀족중심의 사회신분제도를
확립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봉사를 올리게 한 목적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이었다.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서는 개국공신 세력 중심의 귀족들과 광종대에 과거로 진출한 신진관료, 신라 귀족 계통의 학자와 유력가들의 힘을 필
요로 했다. 최승로의 <시무28조>에는 이러한 세 세력을 통치체제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이 있었고, 성
종은 그 장치들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하게 된다.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유교사회 건설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성종은 983년(성종2년) 2월 최승로를 문하시랑 평장사
로 임명한 후 본격적인 체제정비작업에 돌입한다. 3성 6부제를 도입하여 중앙관제를 확립하고, 10도 12목으로 지방조
직을 중앙집권적 틀 속으로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써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행정조직 개편에 의한 중앙집권화 계획은 962년부터 995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흔히 3성 6부제로 대표되는 중앙관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과 이, 병,
호, 형, 예, 공부 등의 6부를 가리킨다.
이 제도는 982년에 설치된 내사문하성 및 어사도성과 어사 6관(선관, 병관, 민관, 형관, 예관, 공관)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995년부터 내사문하성이 중서문하성으로,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칭되면서 3성 6부 체제가 본격화된다.
한편 지방제도의 근간이 된 12목은 중앙에서 주목(州牧)이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관할하게 하는 것으로서 주
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목이 설치된 곳은 양주,광(廣)주,충주,청주,공주, 해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
주 등 고려의 혈관을 잇는 12곳의 요지로, 건국초엔 이곳에 머물던 호족들의 힘이 막강했으나 광종대의 호족 숙청작업
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중앙집권체제 내에 흡수되었다.
12목 설치가 완료되자 성종은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관리를 교체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고, 995년에
는 전국을 다시 열 개의 도로 나누는 10도제를 도입하였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이 10도제는 행정적 의미
는 적었으나 지역을 처음으로 도 단위로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성 6부와 12목 설치로 행정조직을 대폭 개편한 성종은 유학과 생활학문 진작을 위해 일관된 교육정책을 단행한다.
우선 유교적 분위기을 형성하기 위해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고, 12목에다 경학박사와 의학박사을 보내 지방교육을
장려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서 유학이나 의술이 뛰어난 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럴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교육에 대한 성종의 열정은 989년에 내린 다음의 교서에서 잘 나타난다. ‘짐은 지금 학교를 확장하여 국가를 다스리
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을 많이 두고 학생들을 널리 모집하여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학문이 높은 사람들을 파견하여 선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마다 갑을과를 치러 수재들을 선발하고 날마다 숨
어 있는 학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우대하라. 박식한 선비들을 찾아내어 나의 부족한 정치를 돕게 하고 항상 분발하여
피곤을 잊도록 하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배우는 자는 소털처럼 많으나 성공하는 자는 기린의 뿔처럼 드물며 국학에 이름을 올린 자는
많으나 과거장에서 시험 보는 자는 드물구나. 짐은 이 때문에 밤낮으로 생각하고 자나깨나 걱정이도다.’
교육정책과 함께 성종은 민간에 효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989년 12월 병인일의 교서에서
성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에 당태종은 자기 부모가 죽은 달에는 가축 도살을 금지하고 국내 사찰들에 명령하여 5일간 불공을 드리는 것
을 상례로 하였다. 그런데 짐으로 말하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부모의 무한한 은혜를
갚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추모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어찌 옛일을 본받아 나의 열망을 실현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태
조와 아버지 대종의 제삿날을 전후하여 5일간, 어머니 선의왕후의 제삿날에을 전후하여 3일간 불공을 드리도록 하라.
그리고 제사 드리는 날에는 도살을 금지하고 고기 반찬을 올리지 않도록 하라.‘
이 교서는 비록 유교의 중심사상인 효를 강조하고 있지만,실천 방법으로 불공을 택하고 있다. 이는 성종의 숭유정책
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섬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성종대의 유교는 일부 귀족과 신진관료
세력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종의 유학진흥책은 지배계급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도 정5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을 시험 없이 등용하는 음서제(蔭敍制)와 같은 임용제도가 있었지만, 과거만큼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없
었다. 그리고 과거를 위해서는 의당 경학과 시, 문장을 공부해야 했고, 이것이 곧 부분적으로나마 유학을 진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가 내부적으로 이 같은 문화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동안 외부적으로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이 강화되고 있었다.
거란은 체제 정비를 완료하고 고려를 압박하면서 과거의 고구려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거란은 발해를 몰락시킨 후 당연히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이
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거란의 엄포가 있자 고려 조정은 숙의 끝에 거란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결정하고, 거란에게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
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승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에 거란은 993년 10월 소손녕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려에
내침한다.
거란군이 침입하자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에 임명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
경에 진을 쳤다. 하지만 국경의 봉산군이 함락되어 많은 고려군이 포로로 붙잡히자 서희는 군대를 이끌고 봉산을 향해
북진한다. 이에 소손녕이 항복을 권유하는 위협적인 서한을 보내자 서희는 오히려 그와 담판을 짓고 압록강 동쪽의 6
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되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던 여진의 세력
은 더욱 위축된다.
이 사건 이후 고려는 외교적으로 송나라를 섬기고 있었지만 막강한 힘을 형성한 거란이 등장함으로써 송과는 문화
정치적 외교를 펼쳐 선진 문물을 들여오고 거란과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군사적 외교를 펼치는 실리주의 전략을 구사
한다.
이처럼 성종대엔 행정조직의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정착시켜 교육제도의 변혁을 꾀했으며,
사회 전반에 충효 사상을 심어 정신적 기반을 다졌다. 또한 거란과의 외교적 성과로 강동 6주를 얻어 영토를 확장했
고, 991년 4월에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한언공이 대장경을 들여와 불경사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22세에 왕위에 올라 16년동안 고려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성종은 997년 병
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10월 병이 위독해지자 경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개령군 왕송을 불러 왕위를 물려
주었다. 이때 평장사 왕융이 왕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대사령은 내리자고 하였으나 성종은 다음과 같이 거절한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들을 용서함으로써 억지로 연명을 구할 수 있겠소, 또 만일 내가 미
리 대사령을 내리고 죽으면 나를 계승하여 즉위한 사람이 무엇으로써 왕의 은혜를 베풀 수 있겠소.’
997년 10월 무오일에 왕이 생을 마감하니 향수는 38세요, 재위기간은 16년 3개월이었다. 묘호는 성종(成宗)이라 하
였으니, 이는 무릇 나라의 기반을 닦고 체제를 완성한 왕에게 붙이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성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설치하였으며 학비를 넉넉히 주어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를 치러 인재를 등용하였고,
수령들에게는 백성들을 잘 돌보게 하고 효자와 절부를 표창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또한 매양 친필교서를 내릴
때마다 풍속을 변혁하는 간곡한 내용을 담는 것을 임무로 알았다. 그리고 성종은 채 늙기도 전에 자기 후계자를 세
웠으니 국사에 대한 생각이 원대하였으며 죽어가면서도 함부로 대사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생사의 이치에 밝은 식
견을 가졌음이라. 가히 성종과 같은 분이 정치에 뜻을 둘 만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오오, 어진 임금이 여기에 있었구
나!’
성종의 능은 강릉이며 개성 남쪽 교외에 자리하고 있다.
첫댓글
우리나라의 10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고려 전체를 다스리는
기반이 되었으나 현재의 우리를
생각하면 그리 잘한 정책 같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당나라의 제도를
따라한것도 어쩔수없는 소국의
아픔이기도 한것이겠죠 .
수고 했습니다~^^
보쳉님 같은 분이 계심으로 해서,
삶의 의의를 노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