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01-30~2025-2-26
진 해크먼, 영어발음은 진 핵맨이라 부르는데, 그건 그렇고, 해크먼의 죽음이 아쉬움을 주는 건 가족이 같이
숨을 거두었다는 거다. 왜 아내까지 죽었을까? 의문부호로 남겨두자.
95세의 해크먼이 죽었대서 이상할 건 없다.
만수를 누렸으니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 앤 클라이드, 1967)이다.
이후 뽀빠이형사의 활극을 그린 '프렌치 커넥션'이다.
'프렌치 커넥션'(1971)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니 해크먼의 일생에서 최고의 해라고 할 터다.
허나 해크먼은 밝은 얼굴이 아니라선지 항상 어두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남긴 영화를 보노라면 어두운 그림자의 잔영이 지워지지 않는다.
해크먼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그는 나이가 들어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크먼이 미남 측에 들었을까란 말은 아니다.
그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활약을 펼치는 영화에서조차 해크먼은 불안이나 회의감이 묻어났고
짙은 회색의 복잡함이나 삶의 무게추가 뒤흔들리는 내면의식을 보여주었다.
해크먼이 배우가 되려고 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이일저일 하다가 해병대에 입대했고, 3년을 복무한 후 사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제대한 군인들을 돕는 제대군인 원호법의 혜택을 받아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해크먼은 저널리즘과 텔리비전 제작법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의 나이는 30대가 됐고, 늦은 나이에 배우생활을 해보려 캘리포니아에 있는 파사데나
플레이하우스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미남도 아니고, 강한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닌 해크먼은 동료들에게 '배우로서 자질이 없고,
더구나 성공은 언감생심이란 말을 듣고 낙망을 한다.
그때 사귄 친구가 더스틴 호프먼이다.
호프먼 역시 짝달막한 키에 개성이 없는 캐릭터란 소릴 들어야 했고 그런 와중에 두 사람은
친구로서 우정을 쌓아갔다.
허나 별볼 일 없는 배우지망생, 신뢰가 가지 않는 연기지망생이란 딱지를 달고 두 사람은 파사데나
플레이하우스를 나와 닥치는대로 막노동을 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로버트 로센 감독(폴 뉴먼 주연 '허슬러' 연출)에 의해 '릴리스'(1964)에 출연했고,
이어 아서 팬 감독의 눈에 뛰어 '보니 앤 클라이드'(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에 출연해 그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이를 계기로 'I Never Song for My Father'(1970)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넓혔고 '프렌치 커넥션'에 출연해
인생찬가를 부를 수 있었다.
진 해크먼 필모그래피
'릴리스'(1964)
'보니 앤 클라이드'(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I Never Song for My Father'(1970)
'더 프렌치 커넥션'(1971)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
'프라임 컷'(1972)
'허수아비'(1973) 제리 샤츠버그 감독
'컨버세이션'(1974)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영 프랑케슈타인'(1974)
'머나먼 다리'(1977)
'라스트 부루맨'(1977)
'노 웨이 아웃'(1987)
'미시시피 버닝'(1988)
'배트 21'(1989)
'익스프레스'(1990)
'용서받지 못한 자'(1992)
'겟 쇼티'(1995)
'퀵 앤 데드'(1995)
'크림슨타이드'(1995)
'앱솔루트 파워'(1997)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
'하이스트'(2001)
'로열 테넌바움'(2001) 등
참고자료: '501 무비스타'(마로니에 북스 출판사, 2008)
글쓴이: 아스팔트 정글
첫댓글 진 해크먼의 최고 영화는 어느 작품일까?
각자의 주관이 있겠지만 재미로는 '하이스트'다.
두뇌게임이 즐거움을 준다.
그의 최고 영화는
'허수아비'와 '미시시피 버닝'이다.
물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렌티 커넥션'도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도 그 중 하나지만 내겐 위의 두 편 '허수아비'와 미시시피 버닝'.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빅 바로우를 연기한 해크먼, 어둠이 가시지 않는 그의 희색빛 연기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