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위쪽과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겨울 백두대간 단독 종주에 야심차게 나섰지만 3회차 첫 날에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렸다. 지난 21일 경남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마을에서 백운산(1279m)과 영취산(1076m), 깃대봉(1015m) 거쳐 육십령에 이르려 일박하고 둘째날 삿갓재에서 이박째를 하고 다음날 덕유산 향적봉에서 케이블카로 하산하는 2박 3일 일정을 구상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첫날 5시간 만에 적설 산행으로 기진맥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오전 8시 20분 동서울터미널을 출발, 함양 터미널에 도착하니 11시 35분쯤이었다. 11시 20분 운산리 방면 마을버스를 놓쳐 택시(이종기 기사 010-3560-8154)를 탔다. 2회차 마지막 탈출했던 대안 마을과 월경산 한 자락 건너편이 중기 마을이다. 마을 가장 위쪽 고사리밭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낮 12시 5분, 정각에 시작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5분 늦어졌다. 상당한 고빗사위다. 길이 흐릿해 조심조심 올랐다. 2회차 때 포기한 광대치~중재~중고개재를 건너뛰기로 했다. 12시에 산행을 시작하니 육십령까지 7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는데 해가 5시쯤 지니 2시간은 랜턴을 켤 각오로 나름 치밀하게 계산을 했던 터다.
10분 만에 중고재에 올라섰다. 중재에서 1.6km, 백운산까지 2.4km를 가야 한다. 눈은 거의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택시를 타고 오며 올려다본 대간 길은 온통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고개재를 출발해 15분쯤 호젓한 산길을 걷는데 눈이 없다.
그러나 서서히 눈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쌓인 높이가 올라간다. 예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산행 시작한 지 얼마 안돼 능선에 올라서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그런데 능선이 나오지 않고, 이제 눈은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다. 우라질, 욕이 절로 나온다. 사실 이때쯤 돌아서야 했다. 1시 36분 백운산 정상 800m를 남겨둔 지점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길이 뚜렷해 포기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 길이 사라졌다. 눈이 쌓여 길을 가렸다. 걸음을 멈추고 전방의 표지기들을 확인하며 내가 길을 만들어나가는, 러셀을 했다. 악전고투를 했다.
2시 32분 백운산 정상에 이르렀다. 헐, 2.4km를 오르는 데 2시간 반이 걸렸다. 여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지체다. 그런데 적설보다 더 위험한 것이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정상의 남쪽 아래 중봉과 끝봉 거쳐 대방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안내돼 있다. 거리는 2.5km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길이 뚜렷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껏 오른 길로 봤을 때 이 구간을 통과한 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점심 대신 호두과자 두 알을 꺼내 먹는데 인기척이 난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다. 무령고개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정상석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내려갈 채비를 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러셀을 하고 왔다며 평소 한 시간 반이면 오를 거리를 3시간쯤 올라왔다고 했다. 여성은 짐이 없었고 남성도 짐이 가벼웠다. 대방마을로 내려가는 대신 둘을 따라 가는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무령고개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올라왔을테니 전북 장수면 장계면으로 탈출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이 러셀하며 올라온 길을 내가 앞장서 내려갔다. 둘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러셀해 놓은 길을 되짚어 내려가니 한 결 나았다. 그런데 더 거친 걸림돌이 나타났다. 산죽이다. 백운산에서 영취한 갸는 길은 온통 산죽이다. 키가 내 키 만한 것들도 있다. 1시간쯤 악전고투를 했다. 두 사람이 올라올 때 뚫고 나왔던 반대로 내가 뚫고 나가야 하니 힘이 무척 들었다. 방수외투이긴 했지만 상하의 모두 흠뻑 젖었고, 스패츠를 하지 않은 탓에 등산화까지 물이 차올라 여름 장마철 장화 신었을 때처럼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였다.
중간쯤에서 두 사람에게 선행을 양보하고 등산양말을 갈아 신었다. 5분쯤 지체했는데 산죽은 그뒤로도 끈질기게 이어져 10분 뒤에는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산죽이 정말 지긋지긋해졌다. 10m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을 따라 내려갔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예보대로 이 시간이 되자 온통 잿빛 세상이다. 원래 이 구간은 지리와 덕유를 조망하는 맛이 쏠쏠한 곳인데 천지사방 눈과 잿빛 안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왼쪽으로 장수의 숨은 명산 장안산(1237m) 자락이 금남호남정맥으로 갈라지는 곳인데 보이지가 않으니 영 글렀다.
영취산까지 오르락내리락 산죽을 헤치며 나아간다. 3.3km인데 300m 앞에 무령계곡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주차장까지 800m라고 표시돼 있다. 길도 또렷하고 눈도 확연히 줄었다. 앞선 두 사람이 부처님 두상을 닮은 듯한 큰 바위 옆에 서 있는데 그렇게 마음이 놓이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내 하산 및 탈출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주차장에 내려서니 한라산 관음사 주차장과 흡사했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다시 움직일 요량인 모양이다. 다행히 화장실은 동파를 예방하기 위해 가동 중이었다. 여기가 잠겼더라면 나는 장계콜택시를 호출한 뒤 25분 정도 그대로 추위에 노출돼 있었을 터였다. 아이젠을 벗었더니 한쪽 아이젠 밑에 두께 2cm정도 얼음이 끼여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5시 5분. 7km 남짓 걷는 데 5시간이 걸린 셈이다.
장계면 하얏트모텔에서 자고 다음날 육십령부터 남덕유 거쳐 삿갓재 대피소까지 갈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닌데 포기하기로 했다. 지리산 쪽과 달리 사람들 왕래가 잦지 않은 코스라 길이 뚜렷하지 않고 적설량도 상당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오는 도중 고속도로에서 올려다본 덕유산 능선은 눈으로 가득했다. 날씨를 봐도 그랬다. 삶과 죽음이 백지 한 장처럼 갈리는 길을 오늘 걸었다. 백운산 오르는 중간에 119에 구조 요청을 할까 싶은 순간이 세 차례 정도 있었다. 이만하면 교훈을 얻고 돌아설 일이다 싶었다. 나중에 눈이 완전 녹아 쉬운 길일 때 다시 시작하자 마음 먹었다.
25분쯤 화장실에서 기다리니 거짓말처럼 택시가 올라왔다. 기사님(063-353-1660)도 이렇게 눈이 많을지 몰랐다며 올라오며 차가 미끄러져 덜컥 겁이 났다며 안전하게 탈출했으니 다행이라고 다독여줬다. 논개 생가가 있는 대곡리를 지나 장계면에 들어갔는데 기사님은 차라리 전주로 가서 ktx를 이용하라고 했다. 2만 5000원 요금이 나왔는데 3만원 내고 잔돈은 가지시라고 했다. 중간에 칼국수에 낙지비빔밥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등산화도 말리고 옷도 조금 말렸는데 여전히 오한이 들린다. 처음에 전주행 7시 35분 전주행 버스를 예약했다가 10분 뒤 출발하는 대전행 버스를 탔다. 1시간 40분 걸려 대전동부복합터미널 들러 5분 만에 부리나케 서울 경부 고속터미널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각각 1만 1000원과 1만 6500원.
완벽하게 준비해도 겨울 백두대간 단독 종주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교훈을 비싼 값에 치렀는데 그만이길 천만다행이다. 얼마나 피곤이 누적됐는지 다음날 꼼짝을 않고 방안 퉁수로 지냈는데도 그 다음날까지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완연한 봄날에나 다음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첫댓글 제가 다 조마조마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산행기의 한 구절은 "삶과 죽음이 백지 한 장처럼 갈리는 길을 오늘 걸었다."입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